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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없는 ADHD 여자아이
엄마 없는 ADHD 여자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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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없는 ADHD 여자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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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is ebook

저는 마흔 살에 ADHD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이전에는 돌 이전에 당한 부모의 이혼과 그로 인한 유기 및 방치, 영양 부족과 애정결핍, 계모의 학대와 착취, 아빠의 알코올 중독과 애정결핍이 내 현재 상태의 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99% 타고난다는 ADHD를 진단받은 이후에 내 어린 시절의 고난은 그저 내 ADHD 성향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벌이지 않은 많은 고통 앞에서 아이러니하게 나를 구원했던 것은 ADHD 특유의 과몰입이었습니다. 저는 당시의 감정적, 인격적 성장과 현실적인 문제를 뒤로하고 관념의 세상으로 들어가 공부를 해서 그 시기에 타락하거나 인생을 망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은 ADHD가 있고, 돌봐줄 엄마가 없는 여자아이가 유아기부터 성장하면서 어떤 일을 겪는지, 그 과정에서 아무런 치유 없이 사회생활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심리적인 분석을 위주로 썼습니다. 정말 어렵고 힘든 시간들이었습니다.

 

 

(소제목에 따라 일정 부분 사실관계와 감정 분석이 중복되기도 하는데 양해 부탁드립니다.)

 

프랑스는 기혼/사실혼/비혼을 가리지 않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아버지의 역할을 정부가 하기로 사회적인 합의를 한지 오래되었습니다. 저출산 문제에 대해 고심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더 낳으라고 하지 말고 있는 애들이나 괴롭히지 말고 죽이지 말고 잘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온 세상의 ADHD가 있는 아이들이 잘 치유받기를 기도합니다.

 

자식을 버리고 떠나는 여자는 어떤 사람일까?

내 친엄마는 59년 생이라고 들었다.  서른 살 즈음 되어서 문득 친엄마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내가 어떤 경로로 그 이름을 알게 되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가족 증명서를 떼어보지 않았을까 한다. 거기에는 "전**"이라는 귀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조금은 직설적 이름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부모는 참 돈을 좋아할 것 같아 보였다. 그녀의 부모는 내 외조부모가 되겠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은 없다.

내 첫 기억은 할머니 등에 업혀서 장날 짐 꾸러미가 가득한 버스를 탄 기억이다. 할머니 등 뒤에서 나는 버스 안을 둘러보았고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은 "딱하다" 하는 동정의 빛이었다. 그것이 나 자신과 내 인생의 전반적인 이미지가 아닌가 한다. "딱한 아이" 나는 항상 때에 절어 있었고, 가난한 시골 살림의 큰집에서 원하지도 않게 더부살이 중이었다. 친엄마는 내가 돌이 되기도 전에 제대로 된 인수인계도 없이 나와 오빠를 집에 두고, 집에 있는 돈과 귀한 것을 싸서 도망가듯이 사라졌다고 들었다. 이 모든 것은 아빠 편에선 가부장적 제도에 순응하고 기준도 없이 선도 없이 아들 편을 들어 아들을 망친 그러나 선한 할머니의 판단이다. 나중에 커서 서류를 떼어 진상을 확인했을 때 나의 부모는 합의 이혼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친엄마의 그 당시 나이는 22살, 아빠의 나이는 아마도 26~7살 정도였을 것이다. 오빠와 나를 남기고, 인물이 훤칠하게 좋았다는 친엄마는 그렇게 내 인생에서 나갔다. 돌도 되기 전의 나는 그렇게 유기되고 방치되었고, 삶의 고통은 그때부터, 아니 기억은 없지만 나를 낳을지 말지 고민하는 엄마의 감정이 전전긍긍하는 나의 기본 감정을 형성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나와 오빠는 남겨졌고, 아빠는 가부장적인 사람에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의존적인 사람이었다. 젊었지만, 어려서부터 아빠는 이상하게 노인네같이 행동했다. 술을 마시고 고성방가를 하며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다. 어린 나는 배가 고프고 엄마가 사라진 상황이 불편해서 울었을 것이다. 눈치 없이 울었을 것이다. 돌도 되지 않은 아기니까. 주변 상황을 배려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그런 나를 어찌 대했는지는 15년 후에 아빠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애가 너무 시끄럽게 울어서 귀싸대기를 날렸더니 울음을 뚝 그치더라" 웃으면서 다섯 살이 어린 배다른 동생에게 엄마를 잃고 배고파서 울던 나를 어떻게 학대했는지 놀리듯이 면전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이 나의 아빠라는 인간이었다. 나는 그날 내내 마음이 아리고 슬펐다. 그러나 나는 소리 내어 울지 못했다. 사람들은 내가 우는 모습이 너무 슬프다고 했다. 소리 내지 않고 눈물만 흘린다고 했다. 나는 왜 그렇게 우는 습관이 들었는지 알지 못했는데, 이 글을 쓰면서 그때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본다. 불쌍한 아기, 엄마를 잃고 배도 고픈데, 아빠의 신경질 받이가 되어 맞기까지 해도, 울 수도 없고 울면 맞는다는 것을 배워버린 아이.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 삶을 내리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누군 비약이라고 하겠지만.

 

 

엄마 없는 아이

친엄마는 그렇게 내 인생에서 걸어나갔다. 그리고 아빠는 그 길로 폐인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그렇게 사나운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정말 사실일까? 그 사람의 속에 없는 것이 나올 수 있을까? 자기 마음대로 인생이 되지 않는다고 여자를 때리고 물건을 부수는 사람, 그 일을 매일같이 반복하는 사람, 전화를 안 받는다고 어린 자식 앞에서 전화기를 대망치로 부수는 사람, 아내에게 불만이 있다고 아내의 옷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는 사람, 화가 난다고 가산을 부수고, 소주를 부어 마시던 맥주잔을 벽에 던져서 온 유리 파편이 날리게 하는 사람, 기분이 나쁘다고 밥상을 엎는 일이 다반사인 사람, 자식이 마음에 들고 이쁘면 봐주고,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노려보는 사람, 아내에게 화가 난다고 옷을 찢고 물에 처넣는 사람. 그런 사람의 내면에는 무엇이 살까? 내가 세상에서 만난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서른 살이 넘어 깨달았다. 왜? 어려서부터 자신이 불쌍한 사람이라고 세뇌시켰으니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방치되고 아빠에게 맞으면서 며칠을 보낸 나는 할머니가 거두어갔다. 제사가 13개인 한미하고 가난한 깡 시골의 종갓집, 자식 넷도 버겁고 농사도 버겁고 제사도 버거운 집에 나를 무작정 데리고 간 나의 할머니. 그리고 큰 엄마의 미움과 불만. 그 가운데서 나는 전전긍긍하면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들어서 깨달은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당한 많은 일들이 부모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해서 당한 일이라는 것이다. 아빠가 나를 큰집에 버려두고 몇 년에 한 번씩 왔다는 것, 엄마가 없다는 것으로 인해서 나는 자라는 내내 큰집 가족과 그들의 가까운 사람들, 동네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고, 다들 나에게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말했다. 그리고 그런 취급을 당하며 자라난 나도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했다. 씻기지도 않고 제대로 먹이지도 않는, 길에서 만나 우연히 집에 들어앉은 새끼 고양이와 다를 바 없었던 어린 시절, 큰 엄마는 언제나 눈길이 곱지 않았고 내가 먹는 것을 내내 아까워했다. 내가 씻는 물도 아깝고, 내가 자는 자리도 아깝고, 내가 쓰는 모든 물자가 아까운 듯이 행동했다. 그래서 그럴까? 나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사지도 돈을 잘 쓰지도 못한다.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서 옆에 있는 손전등을 건드렸는데, 잠결에 켜진 것 같았다. 그때가 5살 정도였을까? 지나가던 큰 엄마는 곧장 달려와서 자고 있는 나를 잡히는 대로 때렸다. 씻겨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도 끓고 때가 줄줄 흐르는 나를 한 번도 고운 손길로 쓰다듬어준 적이 없고, 고운 눈길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옷은 사촌 오빠들이 줄줄이 입던 옷을 물려 입었는데, 한 두번 나를 불쌍히 여긴 고모들이 새 옷을 사주기는 했었다.

어느 소설에선가? 어떤 여자아이가 어떤 가정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두 여주인이 있어 한 주인은 그 애를 딸같이 대하고 한 여인은 하녀같이 대해서, 그녀의 자아는 두 개의 정체성을 가져 반은 하녀, 반은 딸처럼 자랐다고 했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Jiyeon Lee
Release dateJun 1, 2023
ISBN9798223445753
엄마 없는 ADHD 여자아이
Author

Jiyeon Lee

Jiyeon Lee, Korean writer, and translator.  As a child, I was misunderstood as a prodigy, and as an adult, I was misunderstood as someone who intentionally hurts others. My family treated me like an enemy. I couldn't even understand myself, so how could I explain myself and defend against misconceptions? I had no place to belong in life, and I often had to leave communities or organizations feeling like I was being pushed out while standing on my tiptoes. When I learned that I had ADHD, I felt like I had to apologize to the whole world without any reason. With my inadequate social skills, I used to make mistakes and be misunderstood, but now I can give myself a reason to stop and have the courage to pursue what I really want to do instead of just making money. I am now writing, which is something that I enjoy doing. I realized that having ADHD is painful, but it's okay to inconvenience others a little bit. I tell myself that everyone can be a burden to someone else, and accepting that we all have some weaknesses in life makes it a bit easier to live. I want to offer my sincere condolences to all individuals with developmental disor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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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없는 ADHD 여자아이 - Jiyeon Lee

    자식을 버리고 떠나는 여자는 어떤 사람일까?

    내친엄마는 59년 생이라고 들었다 .  서른 살 즈음 되어서 문득 친엄마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내가 어떤 경로로 그 이름을 알게 되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가족 증명서를 떼어보지 않았을까 한다. 거기에는 전**이라는 귀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조금은 직설적 이름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부모는 참 돈을 좋아할 것 같아 보였다. 그녀의 부모는 내 외조부모가 되겠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은 없다.

    내 첫 기억은 할머니 등에 업혀서 장날 짐 꾸러미가 가득한 버스를 탄 기억이다. 할머니 등 뒤에서 나는 버스 안을 둘러보았고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은 딱하다 하는 동정의 빛이었다. 그것이 나 자신과 내 인생의 전반적인 이미지가 아닌가 한다. 딱한 아이 나는 항상 때에 절어 있었고, 가난한 시골 살림의 큰집에서 원하지도 않게 더부살이 중이었다. 친엄마는 내가 돌이 되기도 전에 제대로 된 인수인계도 없이 나와 오빠를 집에 두고, 집에 있는 돈과 귀한 것을 싸서 도망가듯이 사라졌다고 들었다. 이 모든 것은 아빠 편에선 가부장적 제도에 순응하고 기준도 없이 선도 없이 아들 편을 들어 아들을 망친 그러나 선한 할머니의 판단이다. 나중에 커서 서류를 떼어 진상을 확인했을 때 나의 부모는 합의 이혼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친엄마의 그 당시 나이는 22살, 아빠의 나이는 아마도 26~7살 정도였을 것이다. 오빠와 나를 남기고, 인물이 훤칠하게 좋았다는 친엄마는 그렇게 내 인생에서 나갔다. 돌도 되기 전의 나는 그렇게 유기되고 방치되었고, 삶의 고통은 그때부터, 아니 기억은 없지만 나를 낳을지 말지 고민하는 엄마의 감정이 전전긍긍하는 나의 기본 감정을 형성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나와 오빠는 남겨졌고, 아빠는 가부장적인 사람에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의존적인 사람이었다. 젊었지만, 어려서부터 아빠는 이상하게 노인네같이 행동했다. 술을 마시고 고성방가를 하며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다. 어린 나는 배가 고프고 엄마가 사라진 상황이 불편해서 울었을 것이다. 눈치 없이 울었을 것이다. 돌도 되지 않은 아기니까. 주변 상황을 배려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그런 나를 어찌 대했는지는 15년 후에 아빠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애가 너무 시끄럽게 울어서 귀싸대기를 날렸더니 울음을 뚝 그치더라 웃으면서 다섯 살이 어린 배다른 동생에게 엄마를 잃고 배고파서 울던 나를 어떻게 학대했는지 놀리듯이 면전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이 나의 아빠라는 인간이었다. 나는 그날 내내 마음이 아리고 슬펐다. 그러나 나는 소리 내어 울지 못했다. 사람들은 내가 우는 모습이 너무 슬프다고 했다. 소리 내지 않고 눈물만 흘린다고 했다. 나는 왜 그렇게 우는 습관이 들었는지 알지 못했는데, 이 글을 쓰면서 그때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본다. 불쌍한 아기, 엄마를 잃고 배도 고픈데, 아빠의 신경질 받이가 되어 맞기까지 해도, 울 수도 없고 울면 맞는다는 것을 배워버린 아이.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 삶을 내리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누군 비약이라고 하겠지만.

    엄마 없는 아이

    친엄마는 그렇게 내 인생에서 걸어나갔다 . 그리고 아빠는 그 길로 폐인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그렇게 사나운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정말 사실일까? 그 사람의 속에 없는 것이 나올 수 있을까? 자기 마음대로 인생이 되지 않는다고 여자를 때리고 물건을 부수는 사람, 그 일을 매일같이 반복하는 사람, 전화를 안 받는다고 어린 자식 앞에서 전화기를 대망치로 부수는 사람, 아내에게 불만이 있다고 아내의 옷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는 사람, 화가 난다고 가산을 부수고, 소주를 부어 마시던 맥주잔을 벽에 던져서 온 유리 파편이 날리게 하는 사람, 기분이 나쁘다고 밥상을 엎는 일이 다반사인 사람, 자식이 마음에 들고 이쁘면 봐주고,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노려보는 사람, 아내에게 화가 난다고 옷을 찢고 물에 처넣는 사람. 그런 사람의 내면에는 무엇이 살까? 내가 세상에서 만난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서른 살이 넘어 깨달았다. 왜? 어려서부터 자신이 불쌍한 사람이라고 세뇌시켰으니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방치되고 아빠에게 맞으면서 며칠을 보낸 나는 할머니가 거두어갔다. 제사가 13개인 한미하고 가난한 깡 시골의 종갓집, 자식 넷도 버겁고 농사도 버겁고 제사도 버거운 집에 나를 무작정 데리고 간 나의 할머니. 그리고 큰 엄마의 미움과 불만. 그 가운데서 나는 전전긍긍하면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들어서 깨달은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당한 많은 일들이 부모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해서 당한 일이라는 것이다. 아빠가 나를 큰집에 버려두고 몇 년에 한 번씩 왔다는 것, 엄마가 없다는 것으로 인해서 나는 자라는 내내 큰집 가족과 그들의 가까운 사람들, 동네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고, 다들 나에게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말했다. 그리고 그런 취급을 당하며 자라난 나도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했다. 씻기지도 않고 제대로 먹이지도 않는, 길에서 만나 우연히 집에 들어앉은 새끼 고양이와 다를 바 없었던 어린 시절, 큰 엄마는 언제나 눈길이 곱지 않았고 내가 먹는 것을 내내 아까워했다. 내가 씻는 물도 아깝고, 내가 자는 자리도 아깝고, 내가 쓰는 모든 물자가 아까운 듯이 행동했다. 그래서 그럴까? 나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사지도 돈을 잘 쓰지도 못한다.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서 옆에 있는 손전등을 건드렸는데, 잠결에 켜진 것 같았다. 그때가 5살 정도였을까? 지나가던 큰 엄마는 곧장 달려와서 자고 있는 나를 잡히는 대로 때렸다. 씻겨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도 끓고 때가 줄줄 흐르는 나를 한 번도 고운 손길로 쓰다듬어준 적이 없고, 고운 눈길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옷은 사촌 오빠들이 줄줄이 입던 옷을 물려 입었는데, 한 두번 나를 불쌍히 여긴 고모들이 새 옷을 사주기는 했었다.

    어느 소설에선가? 어떤 여자아이가 어떤 가정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두 여주인이 있어 한 주인은 그 애를 딸같이 대하고 한 여인은 하녀같이 대해서, 그녀의 자아는 두 개의 정체성을 가져 반은 하녀, 반은 딸처럼 자랐다고 했다.

    큰 엄마에 비해, 할머니는 나에게 참으로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나중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릴 때 나를 아셨던 먼 친척이 되는 아주머니는 할머니가 나를 대할 때 조선에 없는 누구라고 하셨다. 그만큼 애달파하면서, 엄마가 있으면 사랑을 받았을 텐데 하고 안타까워하셨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귀여워하고 이유 없이 쓰다듬으면서 다정하게 말씀해 주셨다. 외할아버지 집에서 놀다가 얻은 사탕을 쥐여주곤 하셨고,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주셨다. 나에게 다정다정한 감성이 있다면 그때 할머니에게 받은 것이 아닐까 한다. 할머니는 평생 누구를 욕하거나, 비난하거나 나쁘게 하신 적이 없으셨다. 다만, 너무 아들을 위해서 나쁜 것까지 감싸 안아주는 것 같아 며느리들의 불만이 대단했었다.

    할머니는 내가 30살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자리에 누워있으시면서도 내가 가면, 장롱에 숨겨놓은 돈을 주시면서 용돈을 하라고 하셨다. 그 당시 할머니 본인은 큰 엄마에게 맞고, 고통을 받으면서 말년을 보내고 계신데도 말이다. 그 집은 가난하고 망한 집이었고, 큰엄마가 못돼서 그런지 자식들도 다 잘되지 않았다.

    나에게 엄마가 있다고 평생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의 부재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게 엄마는 없었다. 그것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이 내 생의 본질적인 문제였다. 그럼에도 친엄마, 새엄마, 두 명의 큰엄마, 정서적으로 나를 돌봐준 엄마 같은 할머니, 고모들...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할머니가 내 엄마였다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교 때 하숙하던 집주인의 말이 떠오른다. **이는 엄마가 없나 봐... 그 당시 나는 무슨 소리야 나 엄마 있는데...라고 생각했다. 내 가족의 이루는 근간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며, 그래서 가족 간에 두려움이 많은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친엄마와 계모 사이

    새엄마를 만난 것은 내 나이 다섯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아니다 배다른 남동생과 다섯 살 차이인 것을 보면 더 어렸었다. 사람들은 그 여자를 엄마라고 했다. 나는 각인이 되듯이, 아무런 의심이나 생각 없이 엄마=친엄마 즉, 다른 아이들이 가진 낳아준 엄마라고 어린 마음에 생각했고, 그것은 지적으로, 심리적으로 평생 나를 지배했다.

    그 여자가 친엄마가 아니고 계모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평생에 나를 이용했다는 것을 직시한 것은 30대 후반, 정신분석을 받은 이후의 일이다. 나는 그 여자가 내게 악하게 군 것이 내 친엄마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일 만큼 강하지도 못했고, 현실을 직시할 용기가 없을 만큼 짓밟혀 있었고 외부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나 자신의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자아 없이 종노릇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여드름 구멍이 크고 광대가 크고, 눈에 쌍꺼풀이 있고 턱이 강해서 고집이 매우 세게 생긴 그 여자는 키가 작고 날씬했다. 우리 집안사람들과 다르게 뭔가, 로봇 같은 느낌이 있고 따뜻한 기운이 없었다. 사람들은 새엄마를 예쁘다고 말했지만 어린 마음에 나는 그 여드름 자국이 조금은 꺼림직했다. 물론 새엄마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엄마는 너무 예쁘다고 아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여자 또한 매우 어렸다. 아빠보다 8살이나 어렸고 시집을 올 때 22~3살이나 되었을까? 왜 아이가 둘이나 딸린, 무직인 남자에게 시집을 왔는지는 자세히 모른다. 대충은 감이 오기는 했지만, 여기서 일일이 다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 여자와 아빠와의 관계는, 굳이 말하자면 가부장적 가치관에 매몰된 남녀의 관계 중독?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빠는 내가 인지하기 시작할 때부터, 아니 그 이전에도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남자인데도 동네 늙은이같이 행동했다. 항상 술에 절어 있었고, 자신의 이혼과 이혼에 따른 부정적인 해석, 피해자라는 의식에 남을 욕했고, 생산적이지 못했고, 남 탓을 하고, 코가 빨개져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술을 먹고, 노름을 하고, 싸움을 하고 관계를 잘 다루지 못했다. 한마디로 문제적 인물이었는데, 새엄마는 뭐가 좋다고 결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둘의 관계는 결혼 초부터 가정폭력과 가난, 비난과 미움으로 얼룩졌다.

    애가 없을 때도 때려서 친정으로 가서 빌고 데려오고, 아이를 낳고도 그런 관계를 반복되었다. 그런데도 그 여자는 집을 들어갔다 나갔다가 하면서 아직까지도 이혼을 하지는 못하고 있다. 자식들이 집에 오면 그간 아빠로부터 받은 핍박을 토해내면서 발광을 하는 것 외에는 다 큰 자식들이 그 지옥에서 자신을 꺼내주시기를 바라는 것 같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만 끊임없이 되뇌고, 그리고 아빠가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이 그러는 것이라고 아빠의 상태를 옹호하기까지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이혼을 하자고 하는 것은 아빠 쪽이었고, 항상 빌면서 이혼하지 않겠다고 매달리는 것은 새엄마 쪽이었다. 그 관계는 무한 반복이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할머니를 따라 큰집과 사촌 오빠 자취 집과 아빠와 새엄마의 신혼집을 왔다 갔다 하던 나는 마침내 학교 갈 나이가 되어, 배다른 동생들이 있고, 오빠가 이미 가서 학교를 다니는 그 가정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배고프고, 미움받고, 외롭게 지내던 나, 외진 큰집에서 밤이 되도록 사람들이 논에서 돌아오기를 배곯으면서 기다렸던 나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줄 알고 몹시 기대를 했다. 그 시골을 벗어나서 나도 이제 학교를 가고 까막눈을 벗어나는구나. 남들 다가는 유치원의 존재도 모르고 혼자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면서 놀던 시간을 지나 이제 나도 남들이 다 가는 학교를 가는구나! 그 기대에 부합해 할머니는 장에 나물을 내다 판 돈으로 책가방도 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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