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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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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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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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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is ebook

사랑을 통한 치유와 용서 그리고 화해를 담은
가슴시리도록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복수라는 욕망을 품고 살아온 남자, 강재호.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어버린 여자, 이시은.
토요일 밤, 10주, 은밀한 계약…….
그들 사이에 놓인 건 치명적일 만큼 달콤한 유혹, 잘못된 욕망이었다.
뒤틀린  관계에서 시작된 인연은 역설적이게도 사랑을 고하고.
심장을 나눠가진 사람들처럼, 깊은 사랑에 빠졌지만
그 사랑이 비수가 되어, 마음을 나누기 무섭게 서로를 아프게 찌르기 시작한다.
욕망에서 사랑에 이르기까지, 결코 순탄하지 않은 길을 걷게 된 두 사람.
이제는 서로에게 치유가 되고자 한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니까…….

Language한국어
Release dateFeb 11, 2020
ISBN9791189542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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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된 욕망 - 메텔 정유나

    잘못된 욕망

    Story by. 메텔(정유나)

    <목차>

    1부. 욕망의 시작 

    2부. 계획 그리고 혼란

    3부. 감정의 변화

    4부. 흔들리는 마음

    5부. 그 남자의 비밀

    6부. 달라진 남자

    7부. 비밀의 공간

    8부. 시리도록 아픈 마음

    9부. 이별 

    10부. 기적 같은 선물 

    11부. 욕망 그 후…… 사랑

    1부. 욕망의 시작

    1901호. 

    그가 알려준 호텔방 앞에 멈춰 서자 식은땀이 손바닥에 흥건할 정도로 배어나왔다. 심장도 미친 듯이 뛰었다. 자꾸만 가빠지는 숨을 천천히 고르며 긴장을 풀기 위해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긴장된 상태로 그를 마주할 수는 없었기에. 뜻밖에도 복도 벽에 걸려있는 낯익은 그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로제티의 페르세포네. 죽음의 신이자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하데스에게 납치된 페르세포네. 그녀가 한 손에 석류를 든 채 그것을 먹을지 말지 고민하는 그림이었다. 페르세포네는 이브가 금단의 사과를 먹은 것처럼, 결국 금단의 석류를 먹었다. 그 석류를 먹으면 영원히 하데스의 곁을 떠날 수 없는데도 말이다. 페르세포네는 그 석류를 자신의 의지로 먹었을까, 아니면 하데스의 강요에 의해 먹었을까. 

    갑자기 저 페르세포네가 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까지 온 나는 내 의지에 의해 온 것일까, 아니면 그의 강요에 의해 온 것일까. 모든 사물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반영한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지 않는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어쩌다 나 이시은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휘말렸단 말인가. 잘 알지도 못하고 더욱이 아무런 감정도 없는 남자와…….

    그렇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어쩔 수 없는 일. 돈이 곧 계급이고 신분이 되는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이것밖에 없었다. 돈을 따르는 선택. 이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때문에 이렇게라도 내 행동을 합리화해야 했다. 

    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나는 떨리는 손끝으로 벨을 눌렀다. 어느새 약속시간보다 15분이 지나있었던 것이다. 벨을 누르고 문이 열리는 그 짧은 시간동안 심장은 다시 미친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곳에 오기 전, 우황청심원을 마셨는데 다 소용없는 짓이었던 모양이다. 전혀 약효가 들지 않았다.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긴장과 불안이 엄습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철컥 소리를 내며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살짝 열린 문을 천천히 밀자,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눈에 확 들어왔다. 최고급 호텔이어서 그런지 거실에 놓인 소파며 장식장 등이 이태리에서 직접 가져온 고가구처럼 값어치가 있어 보였다. 

    문을 닫고 들어가 거실에 어정쩡하게 서서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넓은 창문 밖으로 드러난 도심의 야경이 화려했다. 알록달록한 불빛이 만 갈래로 퍼져나가 어두운 도시를 아름답게 밝히고 있었다. 그 화려한 불빛이 나는 왜 슬프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서글픔이 물밀 듯 밀려들었지만 애써 참으며 그를 찾았다. 

    나는 지금 아주 혼란스러웠고 마음이 복잡했다.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혼돈의 상태였다. 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문을 열어줬다는 건, 그가 이곳 어딘가에 있다는 것일 텐데. 

    늦었군.

    때마침 거실과 방으로 이어지는 복도 어딘가에서 그가 나오며 말했다. 평소 단정하고 깔끔하던 겉모습과 달리 와이셔츠 단추 몇 개를 풀어헤치고 소매를 대충 둘둘 말아 올린 다소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피곤한 듯 얼굴이 까칠해 보였지만 그래도 고급스럽게 생긴 외모는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눈빛은 우수에 젖기라도 한 듯 신비로웠고, 우뚝 솟은 콧날은 날카로웠으며, 단정하게 다물고 있는 입술은 시크했다. 또한 평균 남자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커 보이는 장신에 건장한 체격은 그를 더욱 위압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다음부턴 이렇게 늦으면 곤란해.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있는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위엄스런 분위기를 풍기며 서 있는 그에게서 날카로운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앞으론 조심…… 할게요.

    내 말에 그가 일인용 소파에 앉으며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그만 시선을 아래로 피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도무지 그의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신경 좀 썼군.

    …….

    평소엔 주로 청바지에 가벼운 티셔츠와 운동화 차림을 선호했다. 때문에 출근을 할 때도 청바지에 티셔츠 그리고 포니테일 스타일로 머리를 묶고 가볍게 비비크림과 립글로스만 발랐는데 오늘은 조금 신경을 쓰고 왔다. 몸에 딱 붙는 블랙 H라인 원피스를 입고 머리도 길게 내렸으며, 화장도 신경을 썼다. 귀걸이와 팔찌, 굽이 높은 하이힐도 신었다. 

    그는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 입장에선, 어떻게든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이 간절했다. 원래의 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철저하게 가면을 쓴 채 다른 사람도 그리고 나 자신도 속이고 싶었다. 이런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적게는 한두 개에서 많게는 수십 개의 가면을 바꿔 쓰며 때로는 상처를 감추기 위해, 때로는 진정한 자신을 숨기기 위해 살고 있겠지. 

    그는 여전히 강렬함을 뒤로 숨긴 담담한 눈빛으로 아무 말 않고 있는 나를 응시하며 천천히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은 잘 인지하고 있겠지?

    계약! 그래. 나는 그와 계약을 맺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계약들 중 결코 흔하지 않은 종류의 계약을 말이다. 매주 토요일 저녁 여섯시부터 그 다음 날 아침 여섯시까지, 모두 10주 총120시간 동안 그를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와야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면 안 되었고, 토요일이 아닌 다른 날에는 절대로 그에게 연락하면 안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이 방안에 있을 동안 난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이것이 계약의 핵심이었다. 

    네.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온몸으로 긴장이 스며들어 떨렸지만 그 떨림조차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에 난 더욱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쨌든 이 계약은 내가 선택한 것이고, 그 선택의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까 말이다. 때문에 그 어떤 후회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남자를 만나본 경험은…… 당연히 있겠지?

    그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일단 사실대로 답했다.

    네.

    대학에 다닐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귀었던 남자가 있었다. 3개월 정도 만났었던가. 학교 선배였는데 나를 너무 구속하려고 해서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던 경험이 있었고, 그것이 내 연애의 전부였다.  

    그렇군.

    시선을 피하며 답하는 나를 보며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다소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긴장하지?

    그가 묘하면서도 관능적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나 다가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소나무 향이 풍겨왔다. 알싸하면서도 시원한 냄새였다. 그 냄새에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인데 다가온 그가 내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심장이 미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숨조차 편하게 쉬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떨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더욱 고개를 뻣뻣이 치켜들고 그를 당당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긴장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닌…… 가요?

    말끝을 흐렸다. 얼굴을 쓰다듬던 그의 손이 내 목선을 타고 천천히 내려오더니 쇄골을 훑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 손길이 무척 부드러운 것이 아닌가. 이런 느낌이 처음이라 난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러나 너무 긴장하지는 말도록. 네가 그렇게 긴장하면, 마치 내가 나쁜 놈이 된 것 같아 기분 별로니까 말이야.

    그의 말에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자 그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거실 한가운데 놓여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좀 앉지.

    그가 가리키는 대로 난 소파에 가서 조심스럽게 앉았다. 냉장고 문을 열고 병맥주를 두 병 들고 온 그가 내게 맥주 한 병을 건네고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마셔. 마시고 긴장 좀 풀어.

    그가 맥주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나도 맥주 한 모금을 마셨다. 톡 쏘는 알코올이 들어가자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듯했다. 

    지금 이 상황, 후회스럽나?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후회스럽지 않다. 그저 어이가 없을 뿐. 이런 상황에 말려든 것 자체가 현실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두 달 전이었다. 대학원에서 임상심리학을 전공한 나는 졸업 후 지도교수가 운영하는 ‘아동발달심리연구소’에서 일했다. 아이들에게 심리검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해석해서 상담과 놀이치료를 진행하는 일이었다. 나름 전공도 살릴 수 있고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는 자부심에 즐겁게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연구소로 찾아왔다. 세진이라는 아홉 살짜리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세진은 주 양육자인 엄마의 정서적인 학대 때문에 여러 가지 부적응을 겪고 있는 아이였다. 그날도 세진은 놀이치료를 그리고 세진의 엄마는 상담을 받기로 한 날이었는데 그날 세진의 엄마 대신, 외삼촌이라는 남자가 아이를 데리고 온 것이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잠시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압도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다. 훤칠하게 잘생긴 외모와 더불어 묘한 분위기까지 지닌 그는 정말, 고급스러웠다. 사람한테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를 처음 본 인상은 그랬다. 표정은 차갑고 태도는 냉정했지만 내가 느꼈던 그는 고급스럽고 신비로운 남자였다. 

    그가 연구소를 왔다 간 날엔 동료 교사들 모두 하루 종일 그의 얘기만 할 정도로 그는 우리 연구소에서 나름의 인기 스타로 부상했다. 그렇게 그를 처음 만났고, 이후로도 몇 번 더 그는 세진을 데리고 연구소로 왔다. 올 때마다 무표정으로 내게 세진을 맡겼고, 놀이치료가 끝날 때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다 끝났습니다.

    놀이치료를 마친 후 세진을 데리고 대기실로 가자 늘 그랬듯, 그는 소파에 앉아 무슨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연구소에 올 때 그는 늘 한 뭉텅이의 서류를 들고 왔고 세진을 기다리는 동안 그 서류를 읽고 무언가를 고쳤다. 심지어 어쩔 때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호통을 치기도 했다. 아무래도 꽤 바쁜 사람처럼 보였다. 

    나와 세진의 등장에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일어섰다. 

    세진이 오늘도 수고 많았어. 다음 주엔 더 즐거운 기분으로 선생님하고 만나자. 알았지?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는 세진을 향해 허리를 굽혀 눈을 맞췄다. 세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에게로 쭈뼛거리며 걸어갔다. 그가 아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또 와야 됩니까?

    처음으로 그가 내게 말을 걸었다.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가 고급스러움을 더욱 가미시키는 듯했다. 

    네, 앞으로 몇 번은 더 오셔야 될 것 같습니다.

    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귀찮음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효과가 있긴 한 겁니까?

    그럼요.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는 효과가 없어서 답답하실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좋아질 겁니다. 어디 팔이 부러졌거나 칼에 베어서 난 상처가 아니잖아요. 마음에 깊게 생긴 상처라, 치유도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겁니다.

    흠…….

    아, 그리고 세진이 어머니도 같이 오셔야 더 효과가 좋은데요. 보통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심리적 문제는 거의 부모에게도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내 말에 그가 잠시 몸을 움찔거렸다.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던 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며 동요하는 것도 같았다. 이내 다시 평정심을 유지하고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세진이 엄마는 당분간 오기 힘들 것 같습니다. 때문에 세진이와 관련된 문제는 앞으로 저하고 의논하시죠.

    아, 네…….

    대답과 동시에 나도 그에게 명함을 건넸다. 

    여기 제 명함…….

    그런데 내가 건넨 명함을 담담하게 보던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아니 뜯어보았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요리조리 내 얼굴을 말 그대로 구멍이 뚫릴 것처럼 쳐다보던 눈동자가 어느 순간 크게 확장되어 짙은 의혹을 만들어내더니 이내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시은이 당신 이름입니까?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던 나는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이름이 이시은인데…… 대체 왜 그러시는 거죠?

    혹시 나이가 서른다섯?

    네? 아니요. 전 스물아홉인데요.

    느닷없는 질문에 발끈하며 던진 내 대답에 그는 무언가를 더욱 확신한 듯했다.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날 노려보듯 서늘하게 바라보고만 있었으니까. 순간 그 눈빛이 어찌나 섬뜩하던지 심장이 쿵 내려앉을 정도였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이유를 몰라 불쾌한 시선으로 나 또한 그를 노려보자 그가 재빨리 자신의 눈동자 속 모든 감정들을 감춰버렸다. 다시 담담한 눈빛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지인 중에 이시은이라고, 아주 오래전에 알았던 사람하고 닮은 것 같아서 유심히 살펴봤는데, 같은 사람이 아니군요. 무례했다면 사과드립니다.

    ‘아, 나를 자신이 알고 있던 동명이인의 어떤 여자와 착각한 거였구나.’ 

    그렇다면 조금 전 그가 보였던 이상행동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런데 얼마나 오래전에 알았던 여자이기에 그렇게 사람을 뜯어본단 말인가.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뭐.

    내 대답을 끝으로 그는 세진의 손을 잡고 연구소를 빠져나갔다. 그때서야 그의 명함을 자세히 들여다본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DS건설 대표. 강재호.]

    DS건설이라면 우리나라 건설회사 중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회사가 아니던가. 주요 도시에 아파트, 호텔, 리조트 등 짓지 않는 건물이 없고 해외의 유명 건축물까지 지어서 명성을 높이고 있는 곳이었다. 더불어 DS건설은 자동차, 전자, 식품, 호텔 분야 사업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DS그룹의 일부였다. 예전에 아버지가 DS전자를 다니셨기에 더 익숙한 곳이었다. 그 기업의 대표였다니. 정말 놀라웠다. 꽤 젊어 보였는데, 아무리 많이 봐도 30대 초반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하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니 저 나이에도 대표가 가능하겠지. 나 같은 사람은 평생 아무리 노력해도 저들의 발뒤꿈치만큼도 따라가지 못할 텐데.’

    괜한 반발심이 들어 그의 명함을 책상 서랍 속에 내팽개치듯 던져 넣었다. 그 후로 그는 더 이상 세진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비서라는 남자가 세진을 데려왔다. 

    세진아, 엄마는 어디에 계셔?

    놀이치료를 하는 중간에 세진에게 궁금한 것을 살짝 물어보기로 했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아이의 엄마는 상담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또 그 외삼촌이라는 사람마저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긴단 말인가. 어쩌면 그들에게 화가 난건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상처에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만 같아서. 오로지 아이를 무관심과 방치로 학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어서. 

    엄마, 미국 갔어요.

    미국? 왜?

    몰라요.

    장난감이 진열되어 있는 장식장 앞에서 사자 모형의 인형을 꺼내며 아이가 말했다. 아이의 아빠는 이혼한 후 연락 안 하고 산 지 꽤 됐다고 하니 아빠에 대해선 물어볼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아이가 아빠라는 단어에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 삼촌은? 지난번에 같이 왔던 외삼촌은 왜 같이 안 왔어?

    삼촌은, 바빠요.

    갑자기 세진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아, 그렇구나. 삼촌은 바쁘시구나.

    ‘하긴 그렇게 큰 기업의 대표이시니, 얼마나 바쁘실까.’ 

    나도 모르게 그를 생각하며 비아냥거렸다. 정작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사는 사람들 같았다. 아무리 돈이 많으면 뭐하나. 아이가 이렇게 아픈데도 그게 얼마나 심각한지도 모르면서. 그때 세진이 장식장에서 가져온 여러 가지 동물 모형을 책상 위에 늘어놓더니 사자를 집어 다른 동물들을 마구 공격하는 행동을 취했다. 그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진아, 지금 사자가 뭐하는 거야?

    다른 동물들을 죽이고 있어요.

    음, 사자가 다른 동물들을 죽이고 있구나. 그런데 왜 죽이는 거지?

    화가 나서요.

    아, 사자가 화가 많이 났구나. 그런데 사자는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아무도, 안 놀아줘서요. 모두 사자만 왕따 시키고 말도 안 걸어요. 집에 가도 사자는 외로워요. 엄마도 삼촌도 아는 체를 안 하니까. 그래서 화가 났어요. 다 죽일 거예요. 모두 다!

    아아. 이를 어쩐다. 놀이치료를 해도 전혀 차도가 없어 보였다. 현재 세진의 상태는 처음에 이곳을 왔을 때보다 어쩌면 더 안 좋아졌는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의 치료만으로는 부족하다. 절대적으로 부모의 지지와 가정 안에서의 노력이 병행되어야 좋아질 수 있는데, 아이에게는 전혀 이 부분이 이뤄지고 있지 않은 듯 보였다. 

    아이를 비서와 함께 보내고 난 후, 책상 서랍을 열어 그의 명함을 집어 들었다. 연락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의 상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가족들에게 사실을 말하고 그들의 노력을 요구해야 했다. 더 이상 아이를 방치하지 말라고, 따끔하게 일침을 가할 필요도 있었다. 이에 나는 침착한 마음으로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세진이와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음 주 상담 때 같이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놀이치료사 이시은 드림.]

    답장은 없었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가 다음 주에 아이와 같이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그 사이에 집에서 일이 터졌다. 엄마도 나도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바로 아버지가 몇 년 전, 작은 사업을 해보겠다고 사채업자들에게 돈을 빌렸는데 그것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더 이상 아버지도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당장 다음 주까지 집을 내어주어야 한다고 했다. 비록 20평대의 작은 아파트였지만 우리 집이었기 때문에 남들처럼 치솟는 전월세 때문에 이사고민할 필요 없이 마음 편히 살았던 집이었다. 아버지가 40대 초반에 갑작스레 회사를 그만두고 하는 사업마다 실패하는 등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이 집에서 모든 것을 극복하며 살았기에 그만큼 정이 많이 가는 집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집에서 나가야 하다니. 그것도 빚 때문에. 정말로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럼 우린 어디로 가요?

    엄마는 기가 막혀 더 이상 말도 안 나오는지 넋을 놓은 채 앉아있었다. 

    당분간, 시골로 내려가기로 했다. 너한텐 정말…… 미안하다.

    아버지가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허공을 향해 의미 없게 움직였다. 강원도 고성에 할머니가 살던 허물어지기 직전의 낡은 기와집이 있는데 그 집에 들어가 살겠다는 의미였다. 정말로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이것도 임시방편이고…… 빚을 갚지 않으면 더 큰일이 일어날 텐데. 휴우!

    더 큰일이요? 그게 뭔데요? 집 뺏긴 거 말고 더 큰일이 또 뭐가 있는데요?

    아버지가 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불안했다. 두려워서 미칠 것 같았다. 

    미안하다. 어떻게든 돈을 마련할 거니깐 걱정 마. 시은이 넌 아무 걱정도 말거라. 이 아빠가 다 해결할 테니.

    아아, 아버지. 대체 빚이 얼만데요? 네?

    그러나 끝내 아버지는 빚이 얼마인지,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더 큰일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다. 그저 내게 연신 미안하다고만 할 뿐이었다. 

    다음 날, 거의 잠을 자지 못해 퀭한 얼굴로 출근을 했다. 답답하고 절망적인 심정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10분. 11시에 세진과의 상담이 있으니 그 전에 정신을 차리고자 진한 커피를 내려 마셨다. 

    이 선생, 오늘 컨디션 안 좋아?

    나를 본 교수가 걱정스럽게 한 마디 했다. 교수의 목에 걸린 노란색 스카프가 화사했다. 평소 같았으면 스카프가 꽤 잘 어울린다고 말해줬을 텐데, 오늘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 어디 몸 안 좋으면 오전상담 끝내고 일찍 들어가 쉬던가.

    아니에요. 교수님.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교수는 더 이상 나에게선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수고해. 나 강의 갔다 온다.

    네, 다녀오세요.

    교수가 나가자 연구소에서 함께 일하는 신 선생이 다가왔다. 대학원 동기로 나보다 두 살 많지만 서로 선생님이라 부르며 존대를 하고 있는 사이였다. 

    선생님 오늘 정말 왜 그래요? 얼굴이 상당히 까칠해요. 어디 아파요?

    아니, 아니요. 잠을 좀 못 잤더니……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구요. 참! 오늘 세진이 오는 날이죠?

    네.

    순간 신 선생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 빛났다. 

    그럼 그 잘생긴 삼촌도 온대요?

    네, 아마 오늘 올 거예요.

    아아. 아니 요즘 통 안 오기에, 궁금해서. 어디 웬만큼 잘생겼어야 말이죠. 오늘 눈 호강 좀 하겠네. 호호호.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고 하더니, 그 순간 연구소 문이 열리며 그가 세진을 데리고 들어왔다. 가는 줄이 그어진 하얀색 와이셔츠에 회색 넥타이, 검은 정장을 잘 갖춰 입은 그 분위기는 여전히 고급스러웠다.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그에게 인사했다. 그도 까딱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그리고 나를 노려보듯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지난번과 달리 매우 강렬한 눈빛에 난 순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왜 저러는 거지? 혹시 내가 불러서 기분이 나빠 그러는 것인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날 바라보는 적의 가득한 그의 눈빛이 계속 신경이 쓰였다. 

    선생님.

    아이가 작은 소리로 나를 불렀다. 이에 난 허리를 숙여 아이와 눈을 맞추며 웃어주었다.

    우리 세진이. 일주일 동안 잘 지냈어?

    네.

    그래, 기특하네. 있지, 세진아. 삼촌하고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니까 오늘은 신 선생님하고 놀고 있어. 알았지?

    네.

    나는 세진을 신 선생에게 맡기고 그를 상담실로 데려갔다. 상담실은 네 평 정도의 작은 공간으로 벽에 붙여 놓은 삼인용 소파와 테이블, 의자 두 개가 전부였다. 테이블을 가운데 놓고 그와 나는 마주보고 앉았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우리를 스쳐가나 싶은 순간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투가 차가웠다. 

    날 부른 이유가 뭐죠?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그 앞으로 세진의 행동 관찰일지와 놀이치료 결과지를 보여주었다. 

    아이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어요. 보통은 심리치료를 시작하면 호전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세진인 오히려 그 반대예요.

    그는 굳은 표정으로 내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팔짱을 낀 상태로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지금 이 자리가 매우 거북하다고 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요?

    ‘그래서요?’ 라니. 그의 대답이 어이가 없었지만 꾹 참으며 최대한 친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가족들의 도움이 절실해요. 가정에서도 아이를 돌봐줘야 한다고요. 지금 세진이에게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가족들의 사랑이에요. 특히 어머니의 사랑과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해요. 세진이 어머니는 언제 오시죠?

    내 질문에 그는 어떠한 대답도 없이 그저 나를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었다. 아니 노려보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까? 조금 전 연구소에 들어서며 내게 보냈던 그 강렬한 시선과 동일했다. 나는 그만 그의 뜨거운 시선을 견뎌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왜 자꾸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 혹시 내게 어떤 적대감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세진이 때문에?’ 

    그게 아니라면 지금 저 남자의 표정과 행동을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합니까?

    드디어 부담스러운 침묵을 깨고 그가 말했다. 말투는 여전히 호전적이었다. 

    네?

    너무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 나를 보며 그가 다시 차갑게 말했다. 

    그런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까지 말해줘야 하냐 이 말입니다.

    왜 이렇게 도전적인 것일까, 이 남자.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지? 남자의 태도가 거슬렸지만 난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부드러운 어조로 답했다. 상대방의 감정에 나까지 말려들면 안 되었기에. 그럼 이 상담 자체를 진행할 수 없었기에.

    전 단지 세진이가 엄마와의 관계를 빨리 회복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여쭤본 것이고…… 당장 오시기 힘든 상황이라면, 엄마를 대신해서 아이를 잘 보살펴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걸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그런 거 없어도, 세진이 지금까지 잘 지내왔습니다. 큰 문제없이 학교도 잘 다니고 있고. 그런데 오히려 이곳에서 아이를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닌지 심히 의심스럽군요.

    지금 다시 보니 그는 내게 확실히 적대감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가끔 양육자가 자신의 아이에 대한 부정적인 얘기를 듣고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이런 거부적이고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기에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아이에게 큰 문제가 없다면 누님은 왜 세진이를 데리고 이곳으로 오셨을까요? 제가 알기론 세진이 담임 선생님께서 아이의 행동에 심각성을 느껴 누님에게 심리치료를 제안하신 걸로 아는데요.

    살짝 당황했는지 그가 낮은 헛기침을 뱉어냈다. 그러나 다시 냉소적인 표정을 짓더니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만일 가정 내에서 아무런 조치가 없다면, 앞으로 어떻게 되죠? 뭐 사이코패스라도 된답니까?

    아무래도 이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초지일관 내게 적의를 지니고 있는 듯한 남자의 태도도 거슬렸다. 어쩌면 그의 이런 부정적인 태도에 나 역시 심사가 뒤틀렸는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일부러 더 강하게 나갔다.

    당장은 학교에서 지금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어요. 또래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사회성 발달에 지장을 줄 수도 있고 학습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요. 결국 이러한 것들이 누적되다 보면 한 개인의 발달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겠죠.

    잠시 숨을 고른 뒤 난 내가 해야 할 말을 또박또박 이어나갔다. 

    만일 가정 내 방치가 앞으로도 지속된다면 아이가 훗날 성인이 되었을 때, 어떤 부분에서 상당히 비정상적이거나 부적응적인 문제가 발생되어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통을 받을 수도 있어요. 어쩌면 당신 말처럼 사이코패스가 될 수도 있겠군요! 그렇게 된다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비극적인 일 아닌가요? 혹시 그쪽은 세진이가 그렇게 되길 바라시는 건 아니겠죠?

    이 정도는 해줘야 그가 말귀를 알아먹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다소 비아냥거리며 앉아있던 그의 표정이 무섭게 돌변했다. 있는 힘껏 절제하고 있던 어떤 감정을 폭발시킨 것 같았다. 아주 격앙된 표정으로 눈을 치켜뜨더니 팔짱을 풀고 공격적으로 나를 향해 테이블 앞으로 몸을 쑥 내밀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왔고 당황한 난 뒤로 몸을 재꼈다. 

    비정상적이고 부적응적?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말하는 거지?

    화가 난 듯 그의 눈빛은 매서웠고, 목소리는 냉정했다. 갑자기 무섭게 돌변한 그의 태도에 나는 주춤거리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그건…… 꽤 광범위해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긴 힘들어요. 사람마다 케이스가 모두 다르거든요.

    갑작스러운 그의 공격적인 태도 때문에 당황하며 말했다.   

    꽤 광범위하다니.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지?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비정상적인지, 구체적으로 말해야 할 거 아냐. 대충 이런 식으로 얼버무린 채 나중에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 아닌가? 응? 너도 똑같군. 너도 똑같아! 

    갑자기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뜬금없이 이게 무슨 말이지? 나도 똑같다니, 대체 누구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여전히 화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당신 논리대로라면 가족의 보살핌을 제대로 못 받은 사람들은 나중에 커서 죄다 비정상적이고 부적응적인 문제를 지녀야 된단 소린데, 그게 말이 돼?

    어느 순간부터 그는 내게 말을 놓고 있었다. 표정과 말투가 아까보다 더 호전적이었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지난번과 달리 그는 내게 어떤 분노 같은 걸 표출하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현하진 않았지만 난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굉장히 화가 났고, 그걸 참기 위해 무척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그건, 그러니까…….

    당황해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주춤거리며 절적한 답을 찾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다시 내 말을 자르며 차갑게 치고 들어왔다. 조금 전보다 더욱 날카롭고 분노 가득한 눈빛으로. 

    너는, 너는 어떤데? 너도 이런 비정상적이면서도 부적응적인 문제를 단 하나라도 지니고 있나?

    이를 악문 채 그가 낮게 말했다.

    네? 그, 그게 무슨…….

    난 그의 말을 정말,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가지고 있다고 말해. 너도 이런 비정상적이거나 부적응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어서 힘들다고 말하라고! 그래서 하루하루를 정말 죽을힘을 다해 버텨내고 있다고 말하라고! 그래야 공평하지. 그래야 맞는 거지! 그래야 내가 덜 억울하지!

    그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게 이토록 화가 났단 말인가. 세진이 때문에? 아니다! 이건 이 남자의 내면에서 나오는 분노다. 분명 어떤 단어가 그의 무의식 속 숨겨두고 있던 분노를 건드렸고, 그래서 지금 그는 그것을 자기도 모르게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남자도 혹시 심리적으로 어떤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본인이 생각하기에 비정상적인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렇게 생각하니 이 남자의 이상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그걸 내가 건드렸고 때문에 지금 남자는 그 분노를 겉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최악까지는 가지 않으려고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는 듯 보였지만 말이다. 

    상담실 내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고 그는 여전히 날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분노에 찬 태도 때문에 당황해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순간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굵직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이내 소란스러워졌다. 그와 나는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나름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다. 나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정신없었던 상황을 정리하려고 노력하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거칠게 부르며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이시은! 이시은 없나? 지금 당장 나오는 게 좋을 거야! 

    이건 또 뭐지? 놀라 문 쪽으로 걸어가는데 신 선생이 사색이 된 얼굴로 들어왔다. 

    선생님. 좀 나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녀의 표정에서 뭔가 안 좋은 것을 예감한 나는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연구실 로비가 세 명의 덩치 큰 남자들로 인해 혼란스러웠다. 한 눈에 봐도 조폭처럼 무섭게 생긴 남자들이었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제가 이시은인데 누구시죠?

    네가 이성태 딸, 이시은이냐?

    그중 가장 무섭게 생긴 남자가 내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맞았다. 아버지의 빚 때문에 사채업자들이 날 찾아온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연구소 직원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나와 그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에게 내 사생활을, 그것도 이런 저급한 일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일 때문에 찾아오신 거라면, 밖으로 나가서 얘기하시죠. 보시다시피 여긴 제 직장이고, 저로 인해 아무런 잘못도 없는 이분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싶진 않으니까요.

    내가 먼저 문을 열고 나갔고 사채업자들이 나를 따라 나왔다. 그렇게 비상구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가슴이 답답하거나 시원한 공기가 필요할 때 종종 올라오던 곳이었다. 

    용건이 뭐죠?

    무섭고 불안했지만 꾹 참으며 말했다. 

    아가씨가 참 용감하네. 생긴 건 참하고 예쁘장하게 생겨가지고, 강단도 있고. 그런데 우짜냐? 네 인생이 이제 우리 손안에 있는데. 이게 뭔지 알아?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A4로 된 종이 한 장을 내게 흔들어 보였다. 

    그, 그게 뭔데요?

    네 신체포기각서! 네 아버지가 이걸 쓰고 돈을 빌려갔다. 정말 골 때리는 아버지 아니냐?지 딸의 신체를 빌미로 돈을 빌리고 말이야.

    믿을 수 없었다. 날벼락도 무슨 이런 날벼락이 다 있단 말인가! 집을 뺏긴 것도 모자라 이젠 나까지? 어이가 없었다. 물론 아버지가 내게 각별한 정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라면서 손 한번 잡아주지 않았던 냉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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