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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신뢰: 인생의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
자기 신뢰: 인생의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
자기 신뢰: 인생의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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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신뢰: 인생의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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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니체, 간디, 마이클 잭슨에게 영감을 준 책
에머슨의 대표 강연 「개혁하는 인간」 국내 최초 수록

니체가 말한 초인(超人)의 사상적 뿌리이자, 미국의 개척·독립정신의 초석이 된 에머슨의 에세이 3편이 꼼꼼한 해제와 가독성 높은 완역을 거쳐, 현대지성 클래식 제36권 『자기 신뢰』에 담겨 독자들과 만난다.
버락 오바마는 허먼 멜빌의 『모비 딕』과 함께 「자기 신뢰」를 즐겨 읽는다고 밝혔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여행길에 항상 에머슨의 책을 가지고 다녔고 「자기 신뢰」를 읽으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구상했다. 마이클 잭슨은 에머슨의 사상을 노래에 녹여내 표현했고,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에머슨의 제자이자 사상적 동지였다.
에머슨의 사상은 초월주의로 유명한데, 이 사상이 가장 잘 담긴 에세이가 「자기 신뢰」이다. 그 자기 신뢰를 바탕으로 인생과 자연 그리고 신성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 에세이가 「운명」이며, 「개혁하는 인간」은 ‘유출’ 개념에 근거해 인간이 한없이 향상하는 쪽으로 자신을 개혁할 수 있다고 권하는 글이다.
에머슨은 14세에 하버드대학교를 입학하고, 신학을 공부해 23세에 목사가 되었으나 기존의 종교 체계에 순응하고 예배 형식을 따라 사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자기 신뢰」에서 말하는 “자기 생각을 믿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는 기득권에 의지하지 않고도 자기를 온전히 믿고 살아간다면, 자기 영혼이 곧 빛이 되어 자족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국내 최초로 소개하는 「개혁하는 인간」을 포함하여, 에머슨의 에세이는 당시 미국의 경제·사회·종교적 배경과 초월주의 운동, 자연관, 동양 사상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데, 이 책은 방대하고 꼼꼼한 해제와 함께 원문에 충실한 완역으로 독자들에게 ‘에머슨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현대지성
Release dateApr 1, 2021
ISBN9791166813641
자기 신뢰: 인생의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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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신뢰 - 랄프 왈도 에머슨

    일전에 나는 독창적이면서도 관습을 따르지 않는 저명한 화가가 쓴 시를 몇 편 읽었다. 시의 주제가 무엇이든 간에 영혼은 그 시행(詩行)에서 경고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가 일으키는 정서는 그것이 표현하는 사상보다 더 중요하다.

    부러움은 무지에서 나온다

    당신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 은밀한 마음속에서 당신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도 그대로 진실이 된다고 믿는 것, 이것이 천재(genius)의 행동이다. 당신의 머릿속에 숨은 확신을 밖으로 드러내면 보편적 의미를 획득한다. 가장 깊숙한 것은 적절한 때가 되면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첫 번째 생각은 최후 심판의 나팔 소리가 울릴 때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이러한 마음의 목소리는 우리 모두에게 아주 친숙하다. 모세, 플라톤, 밀턴이 남긴 가장 뛰어난 공로가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이들이 책과 전통을 무시했고, 남들의 말을 모방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는 데 있다.

    사람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번쩍거리며 지나가는 빛줄기를 발견하고 관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각 개인에게는 음유시인이나 현자들에게서 나오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불빛보다 자기 마음속에서 샘솟는 한 줄기 빛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그 생각을 별로 주목하지 않고 그냥 무시해버린다. 천재들이 남긴 모든 작품에서 우리는 스스로 거부해버렸던 생각을 발견한다. 낯설지만, 장엄한 모습으로 그 생각들은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위대한 예술 작품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감동적인 교훈은 이것이다. 다른 무수한 목소리가 반대 의견을 낼지라도, 점잖으면서도 굳건한 자세로 자신의 자발적인 느낌을 더 소중하게 믿고 그 작품들이 웅변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내일 어떤 낯선 사람이 우리가 늘 생각하고 느꼈던 바로 그것을 아주 그럴듯하게 말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타인에게서 우리 생각을 받아들여야 하는 부끄러운 상태가 된다.

    부러움은 무지에서 나오고, 모방은 자살행위다. 배우는 과정에서 이런 확신이 드는 순간이 온다. 또한, 좋든 나쁘든 자신이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제 운명의 몫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을 맞이한다. 이 세상은 좋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경작지를 자기 자신의 노동으로 갈지 않으면, 단 한 알의 옥수수도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인간 내부에 깃든 힘은 본래 새롭다. 그 새로움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예상하지 못하는데, 직접 뭔가를 해보아야만 비로소 자기 능력을 알게 된다.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얼굴, 성격, 인상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는데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인상이 기억 속에 각인되는 것은 사전에 정해진 조화(調和)를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 눈은 빛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특정한 빛을 인식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생각을 절반도 옳게 드러내지 못하고, 각자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신성한 생각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긴다. 하지만 부끄러워하지 말라. 그 신성한 생각은 자기 형편에 알맞고 확실히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에 충실하게 밖으로 표현해야 마땅하다.

    신은 겁쟁이가 그분의 역사를 드러내도록 두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일에 온 정성을 다하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때 비로소 위로를 느끼고 즐거움을 얻는다. 하지만 그런 정성과 노력이 없는 말이나 행동은 그에게 마음의 평화를 안겨주지 않는다. 그것은 건져낼 능력이 없는 구원일 뿐이다. 건성으로 하는 그런 언행으로는 버림만 받을 뿐이며, 아무런 친구도 창의성도 희망도 건질 수 없다.

    자기 자신을 믿어라

    자기 자신을 믿어라. 모든 사람의 가슴은 이 철칙(鐵則)에 따라 반응해야 한다. 신의 섭리가 당신을 위해 마련한 자리,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어울림, 사건 사이의 상호 연결을 받아들여라. 위대한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게 해왔다. 그들은 시대의 위대한 정신에 자신을 어린아이처럼 내맡겼고, 절대적으로 믿을 만한 것이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그들의 양손을 통해 일하며, 전 존재를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제 어른이므로 가장 고결한 마음속에서 이와 동일한 초월적¹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잘 보호되는 곳에 있는 미성년이나 환자가 아니며, 혁명에서 달아나는 비겁자도 아니다. 우리는 전지전능한 분의 노력에 복종하며 혼란과 어둠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안내자, 구원자, 시혜자가 되어야 한다.

    1초월주의를 가리킨다. 해제에서 초월주의 운동을 참고하라.

    자연은 우리에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신탁을 남겨 놓았는지! 자연은 어린아이, 갓난아이, 심지어 짐승의 얼굴과 행동이라는 텍스트에 그것(신탁)을 써놓았다. 어린아이, 갓난아이, 짐승에게는 나누어지고 반발하는 마음, 감정에 대한 불신이 없다. 그런 것은 자기 목적과 다르게 힘과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고 여기고 손익을 따져보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은 분열되지 않아 온전하고 그들의 눈은 아직 이런 계산에 지배되지 않아 순수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의 눈을 들여다볼 때 당황한다. 유아는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것이 그에게 복종한다. 그래서 그 아이를 어르고 달래다가 어른 네다섯 명은 어린아이가 된다.

    또한, 하나님은 소년과 청년과 어른에게도 각 단계에 맞추어 어린아이에 못지않은 힘과 매력을 부여하여 멋지고 우아한 존재가 되게 했으며, 어린아이의 정신이 그들 안에서 자기주장을 하며 나설 때는 그러한 정신적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했다. 어린이가 당신과 나에게 말을 못 한다고 해서 힘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들어보라! 옆방에서 그의 목소리가 아주 분명하고 뚜렷하게 들려온다. 그 아이는 자신의 동시대인에게 말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수줍어하는 아이든 대담한 아이든 그 아이는 어른을 아주 불필요한 존재로 만드는 법을 안다.

    소년들은 무심하다. 저녁 식사가 확실히 나온다고 생각하고, 마치 자신이 영주나 되는 것처럼 남들 비위를 맞추는 말을 경멸한다. 이런 건전한 태도가 바로 인간 본성의 진면목이다. 거실에 나와 있는 소년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극장의 피트² 같은 존재다. 그는 독립적이고 무책임하며 곁을 지나는 사람과 사물을 곁눈질로 쳐다본다. 그러면서 소년 특유의 재빠르고 개괄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의 장단점에 대하여 좋고, 나쁘고, 흥미롭고, 어리석고, 멋지고, 골치 아프다 등으로 판결을 내린다. 결과에 얽매이는 법이 없고 이해관계 따위도 신경 쓰지 않는다. 아이는 독립적으로 진정 올바른 판결을 내린다. 당신이 소년의 비위를 맞춰야지 그가 당신에게 구애하는 법은 없다.

    2셰익스피어 시대에 극장의 피트(pit)는 극장의 맨바닥 자리(입석)를 가리켰다. 요금이 가장 저렴한 자리이기도 했는데 관객들은 이곳에 서서 무대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등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에 비해 어른은 자신의 의식(意識)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 그가 어떤 발랄한 말이나 행동을 하는 순간, 그는 어느 한편을 지지하는 사람이 되어 수백 명에게 동정을 받거나 증오의 대상이 된다. 이제 그는 사람들의 감정을 의식적으로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이것을 잊어버릴 방법은 없다.³ 그렇게만 된다면 ‘아, 다시 중립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하며 아쉬워한다.

    3직역하자면, 여기에는 레테가 없다(There is no Lethe for this)이다. ‘레테’는 저승에 있는 망각의 강으로 그리스 신화에 나온다. 이 강의 물을 마시면 과거의 모든 일을 잊게 된다.

    이런 눈치 보기를 일절 거부할 수 있는 사람. 주변 사람이나 사물을 일단 관찰했으면, 그다음에는 눈치 보지 않고, 편견을 갖지 않고, 뇌물로 마음을 취할 수 없으며, 두려움 없는 솔직함으로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은 언제나 강적이 된다. 이런 사람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의견을 내놓으면, 사적인 게 아니라 필요에 따른 의견임을 알기에, 사람들 귀에 쏙쏙 들어가 박히고 그들은 두려운 존재가 된다.

    사회는 ‘자기 신뢰’를 혐오한다

    우리가 혼자 있을 때는 이런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세상에 들어가면서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들리지 않는다. 어느 사회에서나 구성원이 씩씩하고 솔직한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음모를 꾸민다. 사회는 일종의 주식회사다. 구성원들은 주주에게 빵을 더 확보해주려고 빵 먹는 사람의 자유와 문화를 포기하기로 합의한다. 거기서 가장 요구되는 미덕은 순응이다. 그러므로 주식회사는 자기 신뢰를 혐오한다. 사회는 실재나 창조성보다 명목과 관습을 더 좋아한다.

    온전한 어른이 되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순응을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불멸의 종려 잎을 얻으려는 사람은 이름뿐인 선(善)의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선을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결국, 당신의 성실한 마음 외에 그 무엇도 신성하지 않다. 당신의 솔직한 의견을 자기 자신에게 선언하라. 그러면 당신은 온 세상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이 기억난다. 어떤 존경받는 조언자가 교회의 오래된 교리들을 무조건 따르도록 강권했을 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순전히 내면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할진대, 그 오랜 전통이 아무리 신성한들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그런 충동은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이고, 위에서 내려오는 것은 아니야. 조언자가 말했다.

    나는 내 충동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충동 때문에 내가 악마의 자식이 된다면, 나는 악마로 살아가겠습니다.

    자기 본성에서 나오는 법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법도 자신에게 신성할 수 없다. 선과 악은 그저 이름일 뿐이고 이런 것 혹은 저런 것에 임의로 갖다 붙일 수도 있다.

    유일하게 옳은 것은 내 기질을 따라 생활하는 것이다. 그 기질에 어긋나게 사는 것은 뭐든 잘못이었다. 올바른 사람은 갖은 반대 앞에서도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그저 이름뿐인 찰나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럴듯한 휘장과 이름, 거대한 사회와 죽어버린 제도 등에 사람들이 쉽사리 굴복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와는 달리 품위 있고 조리 있게 말하는 사람들은 나를 감동하게 하고 깊은 영향을 미친다.

    나는 올곧고 씩씩하게 나아가야 하고 모든 면에서 진실만 말해야 한다. 만약 어떤 자선 행위가 악의와 허영의 외투를 둘렀다면 그게 사람들 사이에서 통할까?

    평소에 화를 잘 내고 고집스러운 어떤 사람이 노예제 폐지라는 멋진 대의를 옹호했다고 해보자. 그는 내게 와서 바베이도스 섬⁴의 최근 소식을 전하면서 우쭐할 테지만 나는 그에게 필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41627년부터 영국령 서인도 연방으로 있다가 1966년 독립했다. 1816년 노예들이 봉기했으며 1834년에는 이곳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가서 당신의 갓난아이를 사랑해주십시오. 당신 집에서 장작을 패는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선량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런 성품을 발휘하는 아량을 지니십시오. 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흑인들에게 엉뚱한 애정을 표시하면서 냉정하고 무자비한 당신의 야망을 윤색하지 마십시오. 먼 데를 사랑한다면서 가까운 데 있는 악을 은폐하는 일은 그만두십시오.

    이러한 말대꾸는 거칠고 퉁명스럽게 들리지만, 순수한 진실은 가장된 사랑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당신의 선량함은 그 가장자리에선 다소 날카로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선량함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의 교리가 가냘픈 소리를 내며 징징거릴 때 거기 맞서려면 증오의 교리를 설교해야 한다. 나의 ‘천재’가 나를 부를 때면 나는 아버지, 어머니, 아내, 형제까지도 모두 멀리한다.

    나는 문기둥에 ‘변덕’이라는 단어를 써놓고 싶다. 하지만 바라기는, 결국 변덕보다 더 좋은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온종일 설명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내가 어떤 사람과는 어울리고 또 어떤 사람은 기피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길 기대하지 말라. 또한, 어떤 선량한 사람이 오늘날 말하는 것처럼, 모든 가난한 사람이 좋은 환경 속에 살아가도록 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다고 말하지 말라. 그들이 내가 돌보아야 할 가난한 사람들인가? 어리석은 박애주의자여, 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내가 속하지 않고 내가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단 1달러, 1다임, 1센트도 내놓고 싶지 않다.

    정신적 유대관계 때문에 내가 받아들이고 또 설득해야 하는 부류가 분명 있다. 그들을 위해 필요하다면 나는 감옥에 가는 것도 사양하지 않겠다. 그러나 온갖 대중적 자선 행위, 바보들이 모인 대학 교육, 많은 사람이 지지한다는 어떤 쓸데없는 목적을 위한 집회 장소 마련, 술 취한 거지에게 동냥하기, 온갖 구제 단체에 의연금 기부하기 등은 정중히 사절하겠다. 고백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때때로 그런 요청에 굴복하여 돈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악한 돈이다. 향후 그런 요청을 물리치는 어른스러움을 점점 갖추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대중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미덕은 원칙이라기보다 예외에 가깝다. 먼저 사람이 있고 그다음에 미덕이 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용기와 자비가 있다는 증거로 소위 선행을 한다. 가령 날마다 벌어지는 열병식에 불참한 데 대한 속죄로 벌금을 내는 식이다. 그들의 선행은 세상살이에 대한 변명 혹은 정상참작과 같은 뜻이다. 말하자면 환자나 정신이상자가 병원에 입원비를 많이 내는 것과 비슷하다. 일반인이 하는 덕행은 이처럼 속죄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속죄하지 않고 단지 씩씩하게 살아가고 싶다. 내 인생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화려하면서 불안정하기보다는 비록 낮은 신분이더라도 진실하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것을 훨씬 더 선호한다. 내 인생이 건전하고 달콤하길 바라지, 절식(節食)하거나 방혈(放血, 치료를 위해 일부러 피를 뽑는 것)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나는 당신이 사람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핵심 증거를 원하지, 지금껏 이런저런 행위를 했다면서 그것을 내놓는 것은 거부한다. 소위 탁월하다는 행동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본질적인 권리를 지닌 그곳에서 특혜를 좀 누린다고 해서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내 재주는 많지 않고 또 평범한 것에 불과하더라도, 나는 실제로 여기 이렇게 있다. 그렇기에 다른 이차적인 증거로 내 확신이나 동료들의 확신은 필요치 않다.

    나는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야지, 남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서는 안 된다. 이 원칙은 실제 생활이나 정신생활에서 지키기가 아주 어려운 것이지만, 동시에 위대함과 평범함을 구분하는 결정적 지표가 된다. 왜 이 원칙을 지키기가 어려운가 하면, 어떤 것이 당신의 의무인지 당신보다 더 잘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변에는 항상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여론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 위인은 군중의 한가운데서 자신의 독립적인 고독을 지키면서도 아주 품위 있는 생활을 해나간다.

    순응은 눈먼 사람의 허세

    당신이 보기에 이미 죽어버린 관례들에는 절대 순응하지 말라. 그것은 당신의 잠재력을 흩어버리기 때문이다. 당신의 시간을 빼앗고 겉으로 드러나는 성품을 흐릿하게 만든다. 당신이 죽어버린 교회에 다니고, 죽어버린 성서공회에 힘을 보태고, 여당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거대 정당에 투표하고, 평범한 살림꾼처럼 식탁을 차린다고 해보자. 나는 그런 장막에 둘러싸여 있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그런 생활을 하면서 힘이 많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이 자신만의 일을 한다면 나는 금방 알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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