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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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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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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와 함께
서양 철학의 4대 윤리사상가로 꼽히는 존 스튜어트 밀
그가 말하는 개인과 사회의 행복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함으로써 개인의 쾌락과 사회 전체의 행복을 조화시키려는 사상이다. 공리(功利)를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하여,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행위가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늘리는 데 얼마나 기여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 공리주의는 19세기 영국의 사회사상가 제러미 벤담이 창시하여 존 스튜어트 밀로 이어졌다.

벤담은 쾌락의 질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쾌락이 계량 가능하다는 ‘양적 공리주의’를 주장했다. 반면 밀은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한 ‘질적 공리주의’를 주장했다. 그는 지적이고 도덕적인 쾌락이 육체적인 쾌락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또 행복과 만족을 구분하고 전자가 후자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하면서, 그것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다.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더 낫다. 만족하는 바보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 이렇게 밀은 행복의 질을 구별하면서 도덕적 규범과 의무를 질적으로 더 높고 고귀한 성격을 지니는 행복의 추구와 연결시켰다.

지난 2세기에 걸쳐 『공리주의』는 매우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많은 철학자들이 밀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철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다. 밀의 주장을 살펴보고 생각함으로써 독자들은 옳고 그름, 그리고 행복에 대한 자신만의 입장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현대지성
Release dateJun 18, 2020
ISBN979119087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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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리주의 - 존 스튜어트 밀

    제1장

    총론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기준에 대한 논쟁은 과거로부터 오랫동안 진행되어왔으나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현재의 인간 지식을 구성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 사안에 대한 사색조차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진전을 이루기는커녕, 이 옳고 그름의 기준에 대한 논쟁처럼 후진적 상태에 있는 것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철학의 여명기로부터, 최고선(最高善)에 대한 문제, 다시 말해 도덕성의 기반에 관한 문제는 사변 철학의 중요한 주제로 간주되어왔다. 또한 가장 뛰어난 재주를 가진 지식인들의 생각을 사로잡아왔으며, 그들을 여러 파벌과 학파로 분열시켜서 서로 적극적인 논쟁을 벌이며 싸우게 만들었다.

    그때 이후 2천 년이 흘러간 지금에도 여전히 같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철학자들은 여전히 논쟁적인 기치를 내걸고 있다. 그 어떤 사상가들이나 인류도 이 주제에 대하여 만장일치의 결론에는 단 한 발자국도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젊은 소크라테스는 일찍이 늙은 프로타고라스의 말을 듣고서, 소위 소피스트의 대중적 철학에 반대 의사를 표시하면서 공리주의의 이론을 펼쳤다(플라톤의 대화가 실제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가정했을 때 말이다).¹ 저 오래된 소크라테스의 시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주제(옳고 그름의 기준)는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것이다.

    1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서 프로타고라스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다른 종류의 결과를 낳지 않는다면 모든 것들은 쾌락을 낳는 한 좋고, 고통을 낳는 한 나쁘다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쾌락주의를 말하고 있는데 밀은 이것이 공리주의(쾌락은 행복과 직결된다)와 연결된다고 본 것이다.

    도덕 철학: 제1원리의 수립이 필요하다

    그런데 모든 학문의 제1원리와 관련해서도 위와 유사한 혼란과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가장 확실한 학문이라고 여겨지는 수학조차도 여기서 예외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제1원리가 없다고 해서 그런 학문들이 내린 결론의 신빙성이 크게 피해를 입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전반적으로 보아 전혀 피해를 입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 하나의 변칙적 현상인데, 그렇게 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학문의 세부적 규칙들은 그 학문의 제1원리에서 연역된 것이 아니고, 또 그 규칙들을 증명할 때 제1원리에 의존하지도 않는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면 대수학(代數學)만큼 아주 불안정하고, 또 불충분한 결론을 가지고 있는 학문도 없을 것이다. 대수학은 보통 그 학문의 구성 요소들이라고 가르치는 것들로부터 확실성을 도출하지 않는다. 몇몇 저명한 대수학 교사들이 정립한 대수학의 구성 요소들은 영국의 법률만큼이나 허구로 가득 차 있고,² 신학만큼이나 신비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학문의 제1원리로 받아들여지는 진리는 실제로는 형이상학적 분석(그 학문에 잘 알려져 있는 기본적 개념을 가지고 실천되는 분석)의 최종 결과물이다. 제1원리들과 학문의 상관관계는 기초와 건물의 관계가 아니고, 뿌리와 나무의 관계와 같다. 뿌리는 비록 그 밑바닥까지 캐내려가 거기에 빛을 들이대지 않아도, 땅속에서 제 기능을 잘 발휘하기 때문이다.

    2벤담은 영국의 법률이 자연법의 원리와 공감의 원리를 강조하는 정신을 갖고 있다는 기존의 법률 사상을 허구라고 지적했다. 오히려 영국의 법률은 지배층의 이익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잘못된 것으로서, 이것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쳐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즉 공공 이익을 개인의 이익과 최대한 일치시키는 방향으로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학문에서는 개개의 구체적 진리가 일반 이론에 앞서서 정립되지만, 도덕이나 법률 같은 실천적 기술(技術)의 경우에는 정반대로 일반 이론이 먼저 정립되고, 그 다음에 개개 진리들이 따라 나온다. 모든 행동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고, 행동 규칙은 그 행동이 달성하려는 목적으로부터 특성과 특색을 얻게 된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추구할 때, 그 대상의 정체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첫 번째가 되어야 하고, 우리가 그런 추구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에 대한 기대는 맨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옳고 그름의 기준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조사하는 수단이지, 이미 그것(옳은 것 혹은 그른 것)을 조사한 결과는 아니다.

    우리의 자연적 능력 혹은 본능이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고 보는 대중적 이론에 호소해도 기준을 설정하는 일의 어려움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여기서 도덕적 본능 그 자체가 논쟁거리라는 사실은 잠시 옆으로 제쳐두자.

    그 본능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철학적 훈련이 조금이라도 되어 있는 사람은 그런 도덕 본능이 마치 우리의 눈과 귀가 경치와 소리를 즉각적으로 구분하는 것처럼 어떤 특정한 사안의 옳고 그름을 구분해준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상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의 도덕적 능력은 도덕적 판단의 일반 원리들만 제공해준다. 그것은 우리 이성의 한 부분이지, 우리 감각적 능력의 한 부분은 아니다. 따라서 그 도덕적 본능은 도덕의 추상적 원리를 파악하는 데 활용될 수 있을 뿐, 구체적 상황 속의 도덕을 인식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직관적 윤리학파는 귀납적 윤리학파 못지않게 일반 법칙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이 학파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동의한다. 어떤 개인적 행동의 도덕성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일반 법칙을 그 개별 행동에 적용해야 알 수 있는 문제라는 사실이다. 두 학파는 일반 법칙과 유사한 도덕적 법칙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 법칙의 증거와, 그 법칙에 권위를 부여하는 원천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한다.

    선험과 경험: 도덕 법칙의 두 바탕

    직관 학파에 의하면 도덕의 원리는 분명 아프리오리(a priori: 선험적. 경험 없이도 알 수 있는 것)이므로 그 용어를 이해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³ 귀납 학파에 의하면 옳고 그름, 진리와 거짓은 관찰과 경험의 문제다. 그러나 두 주장은 똑같이 도덕은 원리들로부터 연역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직관 학파는 귀납 학파와 똑같이 도덕의 학문이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도덕학에서 기본 전제가 되는 선험적 원리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나아가 그런 다양한 원리들을 제1원리(혹은 의무의 공통 바탕)로 압축하려는 노력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선험적 원리 같은 통상적인 도덕 원리를 내놓거나, 여러 개별적 원리들의 밑바탕이 되는 공통적 원리를 내놓을 뿐이다. 그러나 그 공통적 원리라는 것도 개별적 원리들보다 더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일반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3밀은 여기서 직관주의(intuitionism) 이론을 말하고 있다. 이 이론은, 도덕적 판단은 경험이 없어도 직관에 의해서 연역적으로 알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칸트로 대표되는 독일의 관념론이 이 입장을 취한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라는 명제는 여러 사람을 죽여 보니 그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 명제로 정립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인간이 그게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정립됐다는 이야기이다. 반면에 존 로크 이래 영국에서 발달되어온 경험론은 도덕적 판단을 포함하여 모든 지식은 체험에 의해서 얻어진 것들(귀납된 것들)의 일반화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살인자 카인은 그게 나쁜 행위인지 알지 못했고, 그런 일이 반복되어 사회에 혼란이 오다 보니 결과적으로 살인이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밀은 경험론자이므로 이런 직관주의, 즉 관념론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 서 있으나 다른 측면(가령 쾌락의 질적 측면에 대한 강조)에서는 이 관념론을 다소 수용하는 입장을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모든 도덕의 뿌리가 되는 하나의 근본 원리 혹은 법칙이 있어야 한다. 그런 원리와 법칙이 여러 개라면 그것들 사이에 확정된 우선순위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의 원리, 혹은 여러 원리들이 갈등을 일으킬 때 우선순위를 결정해주는 원리는 누가 봐도 분명한 것이어야 한다.⁴

    4밀은 올바른 행위 즉 도덕적 행위의 궁극적 기준(제1원리)은 행복이 되어야 한다고 뒤에서 말한다. 도덕적 행위를 만들어내는 기준이 여럿 있을 때에도 행복이 최고 우선순위이며 이것은 누가 봐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1원리가 없다면 나쁜 결과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나쁜 결과가 실제 상황에서는 어떻게 완화되는지, 그리고 인류의 도덕적 신념이 그런 궁극적 기준(제1원리)이 없어서 얼마나 피해를 입었고, 또 얼마나 불확실한 것이 되어버렸는지 알아보는 과정은, 곧 과거와 현재의 윤리적 원칙을 철저히 관찰하고 비판하는 일과 같다. 하지만 기존의 도덕적 신념이 어떤 안정성과 일관성을 획득했다 할지라도, 제1원리(공적으로는 제1원리로 인정되지 않는 원리)의 암묵적 경향 덕분에 그런 안정성과 일관성을 얻게 되었다는 걸 보여주기란 비교적 쉬운 일이다.

    공적인 제1원리가 없기 때문에 윤리학은 하나의 행동 지침이 되지 못하고, 인간의 실제 감정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런데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인간의 감정은 어떤 사물(혹은 사건)이 그들의 행복에 미치는 효과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그리하여 효용의 원리, 혹은 벤담이 나중에 명명한 최대 행복 원리는 도덕적 이론을 형성하는 데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고, 심지어 공리주의를 경멸하면서 거부하는 사람들의 도덕 이론에도 영향을 주었다.

    공리주의는 도덕의 제1원리

    어떤 행위가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도덕률의 여러 세부사항에서 가장 구체적이면서 가장 지배적인 고려사항이다. 이것은 공리주의를 도덕의 원리 혹은 도덕적 의무감의 원천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인정하는 바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공리주의를 반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선험적 사상가들조차도, 공리주의의 핵심 주장(행복)이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인정한다.

    여기서 나는 선험적 사상가들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하나의 구체적 사례를 제시하기 위하여 그런 사상가들의 대표인 칸트가 내놓은 체계적인 논고 『도덕 형이상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칸트의 사상 체계는 앞으로 철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의 하나로 길이 남을 것이다. 이 위대한 철학자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책에서 도덕적 의무의 근원이면서 터전이 되는 보편적 제1원리를 주창했다. 그 원리는 이러하다. 그대 행동의 바탕이 되는 법칙이 모든 합리적 존재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 법칙이 되도록 하고, 그 법칙에 따라 행동하라.

    그러나 칸트는 이 원리로부터 도덕의 실제 의무사항들을 추출하면서 인간들이 그런 보편 법칙을 실천할 때 모순사항이 발생하고, 또 그 법칙의 실천이 논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불가능하다는 것을 거의 기괴할 정도로 보여주지 않는다. 인간은 실제로는 그런 보편 법칙을 위반하는 부도덕한 행위를 일상생활에서 예사로 저지른다. 그런데도 칸트는 어떤 행동을 모든 사람이 다 선택하면 그 결과는 너무나 참담할 것이므로 결국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⁵

    5칸트의 보편 법칙은 정언명령이라고 한다. 정언명령으로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가 있는데, 사람들은 실제로 일상생활 중에 거짓말을 자주 한다. 그런데도 칸트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거짓말을 하면 인간의 사회는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데 그치고 있다고 밀은 지적하는 것이다.

    이 논고에서 나는 다른 이론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공리주의 혹은 행복 이론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그리고 공리주의를 뒷받침해주는 증거들을 내놓는 데 힘을 기울일 것이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증거는 통상적이고 대중적 의미의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궁극적 목적이라는 것은 직접적인 증거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언가가 좋다고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좋다고 인정된 무언가로 가는 수단이 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에 직접 증거는 없어도 무방하다.

    예를 들어, 의술(醫術)은 좋은 것이라고 증명되는데 그것이 사람들을 건강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이 좋은 것임을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마찬가지로 음악은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하지만 즐거움이 좋은 것이라는 직접적 증거를 어떻게 제시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그 자체로 좋은 것들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정식(공리주의)이 있는데 그 밖의 다른 좋은 것들은 하나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본다고 하자. 그러면 그 정식(공식, formula)은 용인될 수도 있고 거부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정식은 일반적으로 증거에 의하여 이해되는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정식의 용인이나 거부가 눈 먼 충동이나 임의적 선택에 달려 있다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

    증거라는 단어에는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들어 있다. 그래서 철학의 다른 논제들과 마찬가지로 공리주의는 증거에 의해 그 타당성이 증명될 수가 있다. 이 주제(공리주의)는 합리적 추론의 범위 내에 있다. 공리주의는 순전히 직관의 형식으로만 증거 문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나는 여기에서 인간의 이성이 공리주의를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부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고려사항⁶을 제시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이 증거를 대신한다고 생각한다.

    6밀은 여기서 공리주의가 행복이라는 목적에 기여하고 또 행복을 성취하는 도구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을 여러 고려사항이라고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곧 그런 고려사항이 어떤 것들인지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런 사항들이 생활 속의 구체적 사례에 어떻게 적용되고, 어떤 합리적 근거가 있는지를 제시하여 사람들이 공리주의를 용인하거나 거부하는 자료로 삼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용인이든 거부든 먼저 공리주의라는 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선결 조건이다.

    나는 공리주의의 의미에 대하여 사람들이 갖고 있는 불완전한 개념이 이 사상을 거부하게 만드는 주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면, 하다못해 그런 오해를 다소나마 줄일 수 있다면, 문제는 아주 간단해질 것이고 문제의 상당 부분이 해소될 것이다.

    그래서 공리주의의 기준을 수용하도록 만드는 철학적 근거를 논의하기 전에, 나는 공리주의 자체에 대하여 몇 가지 구체적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할 것이다. 공리주의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공리주의와 공리주의가 아닌 것을 서로 구분하고, 공리주의를 오해하거나 잘 모르는 데서 오는 여러 가지 실제적인 반대 의견들을 물리치고자 한다. 이와 같이 사전 작업을 한 후에는, 철학적 이론의 하나로 간주되는 공리주의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제2장

    공리주의란 무엇인가

    공리(utility, 효용・유용)를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생각하면서, 그것(공리)을 쾌락의 정반대라는 제한적이면서 구어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 대해서는 단지 그런 무지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리라 본다. 반면에 공리주의를 그와는 정반대의 관점에서 반대하는 철학자들도 있다. 이 철학자들을 앞에서 말한 무지한 사람들과 같은 부류로 혼동한다면 그들에게 실례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철학자들이 어떻게 그런 황당한 오해를 품을 수 있는지 의아하다. 그 철학자들의 반대 이유는 더욱 놀라운 바가 있다. 공리는 쾌락의 정반대라고 비난하는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공리주의란 결국 모든 것을 쾌락의 관점에서 보는 사상이라고 비난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 공리주의와 쾌락에 대한 주장은 아주 흔한 공리주의 반대론이기도 하다.

    어떤 유능한 저술가가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듯이,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 때로는 똑같은 사람들이 공리주의 이론을 이렇게 비난한다. 공리라는 단어는 쾌락이라는 단어 앞에 놓이면 아주 무미건조하게 되어버리며, 반대로 쾌락이라는 단어는 공리 앞에 놓이면 너무 관능적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이 문제를 잘 아는 사람들은 다음 사실을 알고 있다. 공리주의를 주장한, 에피쿠로스⁷에서 벤담⁸에 이르는 철학자들은 공리를 쾌락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것으로 본 게 아니라, 공리를 쾌락(즉 고통으로부터의 면제)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유익한 것 대 유쾌한 것, 유익한 것 대 장식적인 것, 이렇게 맞대응시킨 것이 아니라 유익이 곧 유쾌함이요 장식이라고, 즉 이 셋이 다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7도덕적 쾌락을 주장한 그리스의 철학자(기원전 341-270). 그는 인생의 목적을 행복이라고 규정했다. 행복의 원료는 아타락시아(ataraxia)인데, 정신적 평온함과 정신적・육체적 고통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행복으로 가는 가장 큰 수단은 신중함인데, 이것은 미덕의 바탕이 되며 철학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이런 말도 남겼다. 우리는 현명하고, 고상하고, 정의롭게 살지 않는다면 즐거운(쾌락이 가득한) 생활을 할 수가 없다. 에피쿠로스(Epicurus)에서 나온 영어 단어 ‘epicure’는 음식물에 사치스러운 향락주의자, 섬세한 미식가, 식도락가 등의 뜻을 갖고 있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에피쿠로스주의자라고 하면 오로지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자로 오해되기에 이르렀다.

    8제러미 벤담(1748-1832). 영국의 철학자이며 공리주의의 제창자. J.S. 밀의 스승.

    그러나 다수의 작가들을 포함하는 일반 대중은 신문과 잡지에서, 그리고 각종 주장을 담은 중량감 있는 단행본에서 다음과 같은 천박한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공리주의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오로지 그 단어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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