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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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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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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is ebook

절대적 진리만을 강요하던 폭력의 시대에 맞서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문학의 효시가 된 불후의 고전

『모비 딕』은 단순한 해양모험소설이 아니라 수많은 상징과 은유를 품은 다면적인 소설이다. “나를 이슈메일이라 불러다오.” 이 유명한 첫 문장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성을 지닌다(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 선정,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첫 문장 30’). 주인공 이슈메일뿐 아니라 에이해브, 요나, 욥, 프로메테우스, 페르세우스, 나르키소스 등 성경과 그리스신화 인물들이 주요 모티브와 알레고리로 작용한다. 또한, 에이해브 선장과 모비 딕의 극적인 대립, 선원 커뮤니티의 계층·인종 간 갈등, 등장인물의 개성적인 캐릭터와 심리가 복합적으로 뒤얽힌 채 장엄하게 서사가 흘러간다.
1851년에 출간된 『모비 딕』은 이미 반세기 앞서 20세기에 도래할 모더니즘을 예고했다. 세상 모든 진리를 안다는 듯 신의 위치에서 소설을 써 내려간 19세기 리얼리즘 소설가들과는 달리, 20세기 모더니즘 소설가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주관적 관점과 내면 심리를 극화하는 데 집중했다. 그리하여 『모비 딕』은 획기적인 퓨전풍 스토리텔링, 독창적인 작품 구조, 다양한 인간 군상 추적, 이야기와 상징의 절묘한 결합, 인생의 신비를 둘러싼 깊은 종교적·철학적 탐구, 뛰어난 유머 감각과 풍자, 열린 결말 등등 기존에 없던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형식으로 미국 모더니즘 문학의 효시이자 상징주의 문학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궁극적으로 추적하는 흰 고래 모비 딕은 무엇을 의미할까? 색깔이 ‘흰’ 고래는 하나로만 해석되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사실상 모든 것을 상징한다. 독자가 부여하는 빛에 따라 상징의 색깔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역자 해제에서는 종교, 신화, 사회, 심리, 철학적 측면에서 각각 신, 괴물, 노예제, 트라우마, 존재의 신비로 해석했다. 이 다섯 가지 해석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읽으면 작품의 의미가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다가올 것이다. 베테랑 고전 번역가 이종인 선생이 멜빌 특유의 장중하고 거침없으면서도 재치 있고 섬세한 문장을 탁월하고 가독성 높은 우리글로 옮겨 즐거운 독서 경험을 선사한다. 이제 해석의 주도권은 독자 각자에게 주어졌다. 여러분도 『모비 딕』을 통해 나만의 ‘흰 고래’를 찾아 머나먼 항해를 떠나보면 어떨까.

Language한국어
Publisher현대지성
Release dateSep 2, 2022
ISBN9791139707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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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비 딕 - 허먼 멜빌

    어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어느 중등학교 보조 교사에게 받은 자료)

    얼굴이 창백한 보조 교사였다. 코트뿐 아니라 마음과 몸과 머리까지 너덜너덜한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그는 늘 낡은 사전과 문법책에 쌓인 먼지를 희한하게 생긴 손수건으로 털어냈다. 세상에 알려진 모든 나라의 화려한 국기가 요란하게 그려진 손수건이었다. 그는 낡은 문법책의 먼지를 털어내는 일을 좋아했는데, 그러면서 자신이 언젠가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만히 떠올리는 것 같았다.

    남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 고래(whale)라는 물고기의 이름을 우리말로 뭐라고 부르는지 가르칠 때, 무지하여 글자 하나로 단어의 의미를 거의 다 보여주는 ‘H’자를 빠뜨린다면, 그는 진실이 아닌 것을 전달하는 것이다.

    리처드 해클루트

    WHALE. 스웨덴어와 덴마크어로는 hval. 이 동물의 이름은 둥글둥글한 몸체 혹은 몸을 구르는 모습에서 유래했다. 덴마크어로 hvalt는 아치 또는 둥근 천장 모양을 뜻한다.

    웹스터 사전

    WHALE. 좀 더 직접적으로는 네덜란드어와 독일어 Wallen에서 유래했다. 앵글로색슨어 Walw-ian은 ‘구르다, 뒹굴다’라는 뜻이다.

    리처드슨 사전

    תן히브리어

    κητος그리스어

    CETUS라틴어

    WHÆL앵글로색슨어

    HVAL덴마크어

    WAL네덜란드어

    HWAL스웨덴어

    HVALUR아이슬란드어

    WHALE영어

    BALEINE프랑스어

    BALLENA스페인어

    PEKEE-NUEE-NUEE피지어

    PEHEE-NUEE-NUEE에로망고어

    발췌록

    (어느 사서 보조의 조수에게 받음)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딱한 사서 보조의 조수는 바티칸의 긴 서가와 세상의 노점을 두더지나 굼벵이처럼 고생스럽게 죄다 찾아다니면서 종교 서적이든 일반 서적이든 가리지 않고 고래가 언급된 내용을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따라서 이 발췌록에 뒤죽박죽 실린 고래에 관한 논평이 아무리 믿을 만하더라도 이를 참되고 절대적인 고래학(學)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니 말이다. 고대의 저자들과 시인들이 인용된 이 발췌록이 유익하고 재미있는 이유는, 수많은 나라와 수많은 세대의 사람들이 이 거대한 리바이어던(바다 괴물, 즉 고래)에 관해 말하고 생각하고 상상하며 노래한 내용을 대략이나마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딱한 보조의 조수여, 잘 가시게. 내가 그대의 주석자가 될 테니. 그대는 이 세상 어떤 와인으로도 몸을 따뜻하게 덥힐 수 없을 정도로 가망 없고 병적인 종족에 속한 자이니 연한 셰리주조차 지나치게 붉고 독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때때로 사람들은 그대와 함께 그 비참한 기분을 공유하고 눈물이 차오르면서도 유쾌하게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긴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술잔을 비우며 그다지 불쾌하지 않은 슬픔에 사로잡혀 이처럼 퉁명스럽게 말한다. 때려치우게, 보조의 조수여! 세상을 기쁘게 해주자고 그대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고맙다는 말도 듣지 못하고 왜 계속 그 일을 하는가. 나라면 그대를 위해 햄프턴 궁과 튈르리 궁도 비워줄 수 있을 것 같건만! 하지만 눈물을 삼키고 기운을 내어 얼른 주돛대 높은 곳에 오르게나. 그대보다 먼저 떠난 친구들이 그대가 온다고 일곱 층으로 된 하늘을 깨끗이 치우고 오랫동안 제멋대로 굴던 가브리엘과 미카엘, 라파엘을 쫓아냈으니 말이네. 여기 지상에서 그대는 산산이 조각난 마음들과 부딪히지만, 그곳에서는 깨지지 않는 잔을 부딪치게 될 테니!

    그리고 하나님이 커다란 고래를 창조하셨다.

    창세기

    리바이어던이 한 번 지나가면 그 자취가 번쩍번쩍 빛을 내니, 깊은 바다가 백발을 휘날리는 것처럼 보인다.

    욥기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 한 마리를 마련해두셨다가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서

    물 위로는 배들도 오가며 주님이 지으신 리바이어던도 그 속에서 놉니다.

    시편

    그날이 오면, 주님께서 좁고 예리한 큰 칼로 벌하실 것이다. 매끄러운 뱀 리바이어던, 꼬불꼬불한 뱀 리바이어던을 처치하실 것이다. 곧 바다의 괴물을 죽이실 것이다.

    이사야서

    혼돈과도 같은 이 괴물의 입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짐승이든 작은 배든 돌이든 무엇이든 즉시 놈의 더럽고 거대한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가 배 속 끝없는 심연으로 사라진다.

    플루타르코스, 『윤리론집』

    인도양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물고기가 산다. 그중에서도 발레네라고 불리는 고래와 소용돌이는 길이가 4에이커 또는 4아르팡(약 1만 6,000제곱미터)에 이른다.

    플리니우스, 『박물지』

    바다에 나서고 이틀째 되는 날 해 뜰 무렵, 무수히 많은 고래와 바다 괴물이 나타났다. 고래 가운데 한 마리는 몸집이 어마어마했다. … 놈은 입을 쩍 벌린 채 사방에 파도를 일으키고 앞으로 물거품을 일으키며 우리 쪽으로 돌진했다.

    루키아노스, 『진실한 이야기』

    그는 이 나라에 말고래를 잡을 생각으로 왔다. 말고래의 뼈는 치아 대용으로 쓰이므로 값이 많이 나갔다. 그는 뼈의 일부를 왕에게 바쳤다. … 그의 나라에서는 최상품의 고래가 잡혔는데, 어떤 고래는 길이가 44미터부터 46미터에 달했다. 그는 자신이 이틀 동안 말고래 예순 마리를 잡은 여섯 명 중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오테르 혹은 옥테르의 구술을 앨프레드 대왕이 기록함(890년)

    짐승이든 배든 괴물(고래)의 입속 끔찍한 심연으로 들어간 것은 모두 삼켜져 사라지지만, 작은 물고기 떼는 그곳에 들어가 안전하게 머물며 잠을 청한다.

    미셸 몽테뉴, 「레이몽 스봉을 위한 변론」, 『수상록』

    도망치자, 도망쳐! 저것이 위대한 예언자 모세가 인내심 강한 욥의 삶을 이야기할 때 묘사한 리바이어던이 아니라면 악마가 나를 잡아가도 좋다.

    프랑수아 라블레,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이 고래의 간은 수레 두 대의 분량이었다.

    존 스토, 『연대기』

    바닷물을 가마솥의 물처럼 끓게 하는 거대한 리바이어던.

    프랜시스 베이컨이 번역한 시편

    고래의 거대한 몸에 관해 우리는 아무것도 특정할 수 없다. 고래는 자라면서 놀라울 정도로 기름진 몸이 되므로 고래 한 마리에서 믿기 힘들 정도로 많은 기름을 추출할 수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 『삶과 죽음의 역사』

    몸 안의 상처에는 경뇌유만한 것이 없습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헨리 4세』

    과연, 딱 고래입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그에게는 어떤 의술도 소용없으니

    그에게 상처를 입힌 자,

    저열한 창으로 그의 가슴을 찔러 멈추지 않는 고통을 준 자에게

    돌아가 보복하는 길밖에 없다.

    물살을 가르며 해안으로 돌진하는 상처 입은 고래처럼.

    에드먼드 스펜서, 『선녀 여왕』

    그 거대한 몸을 움직여 평온하고 잔잔한 대양을 들끓게 할 수 있는 고래처럼 어마어마한.

    윌리엄 대버넌트 경, 『곤디버트』 서문

    경뇌유가 뭐냐고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다. 박식한 호프만누스도 30년에 걸쳐 쓴 저술에서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라고 분명히 말했기 때문이다.

    토머스 브라운 경, 「경뇌유와 향유고래에 관하여」, 『통속적 오류』

    쇠도리깨를 든 스펜서의 철인 탈루스처럼

    녀석은 육중한 꼬리로 파멸시키겠다고 위협한다.

    옆구리에는 창들이 박혀 있고

    등에는 창날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에드먼드 윌러, 『서머제도의 전투』

    국가, 라틴어로는 키비타스라고 불리는 저 거대한 리바이어던이 창조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인공 인간’이다.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의 첫 문장

    어리석은 맨소울(Mansoul)은 그것이 고래 입속에 들어간 청어라도 되는 양 씹지도 않고 삼켰다.

    존 번연, 『거룩한 전쟁』¹

    1원서에는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으로 나오지만 해당 문장은 『거룩한 전쟁』(The Holy War)에 실려 있으므로 이와 같이 표기했다.

    신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거대한

    저 바다짐승 리바이어던이

    대양을 헤엄치고 다닌다.

    존 밀턴, 『실낙원』

    살아 있는 피조물 중 가장 거대한 저 리바이어던은

    깊은 바다에 곶처럼 누워서 자거나 헤엄치는 모습이

    마치 움직이는 육지 같다.

    아가미로 바다를 들이마시고 숨구멍으로는 바다를 뿜어낸다.

    존 밀턴, 『실낙원』

    거대한 고래는 바닷속에서 헤엄치고, 고래 몸속에는 기름의 바다가 출렁인다.

    토머스 풀러, 『세속 국가와 신성 국가』

    거대한 리바이어던이 곶 뒤에 바싹 붙어

    먹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먹이를 추격하지 않고 입을 크게 벌려 새끼 물고기들을 삼킨다.

    새끼 물고기들은 벌린 입이 길인 줄 알고 들어간다.

    존 드라이든, 『경이의 해』

    고래가 뱃고물 쪽에 떠 있을 때, 그들은 고래의 머리를 자른 다음 보트로 최대한 가까운 해안으로 끌고 간다. 수심이 3~4미터만 되어도 고래는 바닥에 닿아 걸리고 만다.

    토머스 에지, 「스피츠베르겐까지 열 번의 항해」, 『퍼처스』

    항해 도중에 그들은 수많은 고래가 대양에서 즐겁게 노는 것을 보았다. 고래들은 자연이 어깨에 달아준 관과 구멍으로 물을 장난스럽게 뿜어댔다.

    토머스 허버트, 「아시아와 아프리카 항해」, 존 해리스가 편집한 『항해기 전집』에 수록

    여기서 그들은 무수히 많은 고래 떼를 만나, 배가 고래 등에 올라앉는 일이 벌어질까 몹시 주의하며 항해를 해야 했다.

    빌렘 스호우텐, 『여섯 번째 세계 일주 항해』

    배는 북동풍이 부는 가운데 엘베강에서 출항했다. 배 이름은 ‘고래 배 속의 요나’였다. … 고래는 입을 벌릴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지어낸 이야기다. … 그들은 고래가 보이는지 확인하려고 자주 돛대에 올라갔다. 최초로 발견한 자에게는 대가로 금화 하나가 돌아갔기 때문이다. … 셰틀랜드제도 근처에서 잡은 고래 배 속에 청어가 한 통도 넘게 들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우리 배의 작살잡이 중 하나가 스피츠베르겐에서 온몸이 하얀 고래를 잡은 적이 있다고 내게 말했다.

    「1671년, 그린란드 항해」, 존 해리스가 편집한 『항해기 전집』에 수록

    이 (파이프) 해안에도 고래가 몇 마리 온 적이 있었다. 1652년에는 길이가 25미터에 달하는 긴수염고래가 왔는데, (내가 듣기로는) 엄청난 양의 기름 외에도 250킬로그램의 고래수염을 얻었다고 한다. 그 고래의 턱은 피트페렌 정원의 문으로 쓰이고 있다.

    로버트 시볼드, 『파이프와 킨로스』

    내가 이 향유고래라는 놈을 정복하고 죽일 수 있는지 시험해보기로 했다. 워낙 사납고 빨라서 누가 녀석을 죽였다는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리처드 스트래퍼드, 「버뮤다에서 보낸 편지」, 『철학 회보』(1668년)

    바다의 고래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뉴잉글랜드 초등학교 독본

    우리는 거대한 고래들도 많이 보았다. 남쪽 바다에는 북쪽 바다보다 고래가 백배는 많은 것 같다.

    카울리 선장, 『세계 일주 항해』(1729년)

    고래의 입김은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견디기 힘든 악취를 풍길 때가 많다.

    우요아, 『남아메리카』

    선발된 50명의 특별한 요정들에게

    우리는 중요한 임무인 페티코트를 맡긴다.

    튼튼한 테를 두르고 고래 갈빗대로 무장한

    일곱 겹 울타리로도

    버티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알렉산더 포프, 『머리카락 도둑』

    육지 동물을 바다 깊은 곳에 사는 동물과 비교한다면, 규모에서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고래는 분명 피조물 가운데 가장 큰 동물이다.

    올리버 골드스미스, 『자연사』

    작은 물고기들의 우화를 쓰려면 자신들이 거대한 고래가 된 것처럼 말하게 하면 됩니다.

    골드스미스가 새뮤얼 존슨에게 보낸 편지

    오후에 우리는 거대한 바위 같은 물체를 보았는데 실은 죽은 고래였다. 어떤 아시아인들이 고래를 잡아서 해안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고래 뒤에 몸을 숨기려 애쓰는 것 같았다.

    제임스 쿡, 『항해기』

    그들은 더 큰 고래들은 좀처럼 공격하려 하지 않았다. 몇몇 고래들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바다에 나갔을 때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꺼렸고, 고래들에게 겁을 주어 배에 너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려고 분뇨나 석회석, 향나무, 그밖에 비슷한 특성을 가진 물품을 배에 싣고 다녔다.

    뱅크스와 솔랜더의 1772년 아이슬란드 항해에 관해 우노 폰 트로일이 쓴 편지

    낸터킷섬 주민들이 발견한 향유고래는 기운차고 사나운 짐승이므로 어부들의 뛰어난 수완과 대담성이 요구됩니다.

    1788년 토머스 제퍼슨이 프랑스 공사에게 보낸 고래에 관한 청원서

    의장님, 세상 무엇이 그것에 필적하겠습니까?

    낸터킷 포경업에 관해 에드먼드 버크의 의회 연설

    스페인은 유럽 해안에 좌초한 거대한 고래다.

    에드먼드 버크(출처 불명)

    국왕의 통상 세입 중 열 번째 항목은 왕실의 물고기, 즉 고래와 철갑상어에 대한 소유권이다. 이 권리는 왕실이 해적과 약탈자에 맞서 바다를 지키고 보호한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해안으로 밀려오거나 해안 근처에서 잡힌 고래와 철갑상어는 모두 국왕의 재산으로 귀속된다.

    윌리엄 블랙스톤

    선원들은 곧 죽음의 놀이에 모여든다.

    로드먼드는 칼날 달린 무기를 정확히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사방을 주의 깊게 살핀다.

    윌리엄 팰코너, 『난파선』

    지붕과 돔과 첨탑이 찬란하게 빛나고

    폭죽이 저절로 날아올라

    창공 가운데 찰나의 불꽃을 남긴다.

    이 불을 물에 비유하자면,

    바다가 저 높은 곳에 있어

    창공에서 고래 한 마리가 물을 내뿜어

    벅찬 기쁨을 표현한다.

    윌리엄 쿠퍼, 「여왕의 런던 방문에 부쳐」

    심장을 찌르면 엄청난 속도로 40리터 내지 60리터의 피가 뿜어져 나온다.

    존 헌터의 소형 고래 해체 설명

    고래의 대동맥은 안지름이 런던 브리지 급수 시설의 주요 수도관보다 더 크다. 수도관에 흐르는 물의 세기와 속력도 고래 심장에서 솟구치는 피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윌리엄 페일리, 『신학』

    고래는 뒷발이 없는 포유동물이다.

    조르주 퀴비에

    남위 40도에서 향유고래를 보았지만, 바다가 향유고래로 뒤덮인 5월 1일 전까지는 한 마리도 잡지 않았다.

    제임스 콜넷, 『향유고래 포경업 확장을 위한 항해』

    내 발 아래 자유로운 환경에서

    온갖 색깔과 형태와 종류의 물고기들이

    놀고 쫓고 싸우느라

    헤엄치고 몸부림치며 물속 깊은 곳으로 잠수한다.

    무서운 리바이어던부터

    물결마다 가득한 수백만의 곤충에 이르기까지

    이는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으며

    뱃사람들조차 보지 못한 광경이다.

    물 위에 뜬 섬들처럼 거대한 무리를 지은 채

    신비로운 본능에 이끌려 길도 없는 황야를 나아간다.

    칼과 톱, 나선형 뿔, 혹은 구부러진 송곳니로

    전면과 턱을 무장한 게걸스러운 적들

    고래와 상어, 괴물 들의 공격을 받을지라도.

    제임스 몽고메리, 『대홍수 이전의 세계』

    오, 찬양하라! 오, 노래하라!

    지느러미 종족의 왕을 위하여.

    드넓은 대서양에도

    이보다 힘센 고래는 없으며

    북극해 주변에서 몸부림치는

    어떤 물고기도 이보다 기름질 수 없다.

    찰스 램, 『고래의 개선가』

    1690년에 몇 사람이 높은 언덕에 올라 물을 뿜으며 서로 즐겁게 노는 고래들을 보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바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자녀들의 손자들이 밥벌이를 위해 가야 할 푸른 초원이 저기에 있노라고.

    오베드 메이시, 『낸터킷의 역사』

    나는 수잔과 함께 살 오두막집을 짓고 고래 턱뼈를 세워 고딕 아치형 입구를 만들었다.

    너새니얼 호손, 『다시 들려준 이야기』

    그녀는 무려 40년 전 태평양에서 고래에게 목숨을 잃은 첫사랑을 위해 기념비를 주문하러 왔다.

    너새니얼 호손, 『다시 들려준 이야기』

    아니요. 그건 참고래입니다. 톰이 대답했다. 저는 물을 뿜고 있는 녀석을 보았어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보고 싶어 할 예쁜 쌍무지개를 만들더군요. 저 녀석은 기름통 그 자체예요.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 『수로안내인』

    신문이 배달되었고, 우리는 『베를린 가제트』 지에서 고래가 그곳 무대에 등장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세상에! 체이스 씨, 대체 무슨 일입니까? 나는 대답했다. 고래가 우리 배에 구멍을 냈습니다.

    태평양에서 거대한 향유고래의 공격을 받고 결국 부서진 낸터킷의 포경선 에식스호 난파 이야기, 낸터킷 사람 오언 체이스가 뉴욕에서 출간함(1821년)

    어느 날 밤 한 선원이 돛대 밧줄에 앉아 있고

    피리 소리를 내는 바람이 제멋대로 불었다.

    창백한 달빛은 때로는 환해지다가 때로는 흐려졌다.

    고래가 헤엄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인광이 번쩍였다.

    엘리자베스 오크스 스미스

    이 고래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여러 배에서 푼 밧줄의 길이는 모두 합쳐 10킬로미터에 육박했다. … 때로 고래가 그 거대한 꼬리를 공중에서 휘두르면 날카로운 채찍 소리가 5~6킬로미터 밖에서도 들렸다."

    윌리엄 스코스비

    새로운 공격을 받고 고통에 겨워 미친 듯이 화가 난 향유고래는 몸을 이리저리 굴렸다. 놈은 거대한 머리를 곧추세우고 크게 벌린 아가리로 주변의 것들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었다. 놈은 머리를 들이밀며 배들을 향해 돌진했다. 들이받힌 배들은 엄청난 속도로 밀려나거나 완전히 부서졌다.

    … 이토록 흥미롭고 상업적으로도 지극히 중요한 향유고래의 습성 연구가 철저히 방치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놀랍다. 지난 몇 년 동안 향유고래의 습성을 관찰할 가장 용이한 기회가 넘쳐났을 때, 유능한 관찰자들조차 호기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도 놀랍다.

    토머스 빌, 『향유고래의 역사』(1839년)

    카샬롯(향유고래)은 몸뚱이 앞뒤에 가공할 무기가 있어 참고래(그린란드고래 혹은 큰고래)보다 훨씬 잘 무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무기들을 교묘하고 대담하고 치명적으로 사용해 공격하는 성향을 자주 보인다. 따라서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고래 가운데 공격하기가 가장 어렵고 위험한 고래로 여겨진다.

    프레더릭 데벨 베넷, 『세계 일주 포경 항해기』(1840년)

    10월 13일. 저기 고래가 물을 뿜는다라는 말이 돛대 꼭대기에서 들려왔다.

    어느 쪽인가? 선장이 물었다.

    뱃머리에서 바람이 부는 쪽으로 3포인트 떨어진 지점입니다.

    키를 올리고 항로를 유지하라!

    네, 선장님.

    어이, 돛대 꼭대기! 아직도 고래가 보이나?

    네, 선장님! 향유고래 떼입니다! 물을 뿜고 있습니다! 물 위로 뛰어오릅니다!

    크게 외쳐라! 매순간 크게 소리쳐!

    "네, 선장님! 물을 뿜고 있습니다! 저기, 저기, 또 저기 고래가 물을 뿜습니다. 뿜어요. 부우우!

    거리는?

    4킬로미터 지점입니다.

    이런 날벼락 같은 일이! 너무 가깝잖아! 전원 집합!

    존 로스 브라운, 『포경 항해 인상기』(1846년)

    지금부터 포경선 글로브호에 일어난 참극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 배의 선적은 낸터킷섬이었다.

    생존자 레이와 허시, 「글로브호의 선상 반란 이야기」(1828년)

    예전에 자신이 상처를 입힌 고래에게 쫓기게 된 그는 한동안 작살로 놈의 공격을 받아넘겼다. 그러나 격분한 괴물이 마침내 배로 돌진했고, 그와 동료들은 공격을 피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것만이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었다.

    타이어먼과 베넷, 『선교 일지』

    낸터킷 자체가 국익에서 놀랍고도 특이한 부분입니다. 8,000~9,000명의 주민이 이곳 바다 위 섬에 살아가면서 용감하고 끈기 있게 일하여 해마다 국가의 부에 상당히 기여하고 있습니다라고 웹스터 씨가 말했다.

    낸터킷 방파제 건설 청원에 대해 대니얼 웹스터가 미국 상원에서 행한 연설(1828년)

    고래가 곧장 그를 덮쳤으니 아마도 그는 즉사했을 것이다.

    헨리 치버 목사, 『고래와 고래잡이들, 혹은 고래잡이의 모험과 고래의 일대기』(프레블 제독의 귀향 항해에서 자료 수집)

    어디 한번 떠들어봐. 새뮤얼이 대답했다. 지옥으로 보내줄 테니.

    새뮤얼의 동생 윌리엄 컴스톡, 『반란자 새뮤얼 컴스톡의 생애』, 포경선 글로브호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

    네덜란드인과 영국인은 북쪽 대양을 항해하면서 가능하면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고자 했다. 그들은 주된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대신 고래의 서식지를 알아냈다.

    맥컬록, 『상업 사전』

    이런 일들은 서로 영향을 미친다. 공은 튀어 오르며 다시 앞으로 나갈 뿐이다. 이제 고래의 서식지가 드러나며 고래잡이들은 신비로운 북서 항로에 관한 새로운 단서를 간접적으로나마 얻은 듯했다.

    미출간된 어느 글에서

    바다에서 포경선을 만나면 외양만 보고도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돛을 좁게 편 배에서 돛대 꼭대기에 오른 망꾼들이 주위의 넓은 바다를 열심히 살핀다. 통상적인 항해를 하는 배들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해류와 고래잡이」, 『미국 탐험 원정기』

    런던이나 그밖에 다른 곳의 근교를 걸어본 사람이라면 곡선형의 커다란 뼈가 땅 위에 수직으로 세워져 아치형 대문이나 정원 입구로 쓰이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뼈가 고래의 갈빗대라는 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북극해로 떠난 고래잡이 항해 이야기』

    포경 보트를 타고 고래를 쫓던 백인 선원들은 본선으로 돌아와서야 그들의 배가 선원으로 승선한 야만인들에게 장악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포경선 호보맥호 탈취와 탈환에 관한 신문 기사

    (미국) 포경선에 오른 선원 중에서 출항했을 때 탔던 배를 그대로 타고 돌아오는 이들이 극히 적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포경선 항해기』

    갑자기 물속에서 거대한 덩어리가 나타나더니 수직으로 솟구쳤다. 고래였다.

    『미리엄 코핀 혹은 고래잡이들』

    물론 고래에 작살을 꽂을 수는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라. 겨우 꼬리 끝에 밧줄 한 가닥을 묶어놓았다고 해서 힘세고 길들여지지 않은 수컷 망아지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늑재와 돛대 꼭대기 목관』 중 고래잡이에 관한 장

    한번은 수놈과 암놈 같은 괴물(고래) 두 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천천히 헤엄치는 것을 보았다. 너도밤나무 가지가 드리워진 해변(티에라 델 푸에고)에서 무척 가까운 곳이었다.

    찰스 다윈, 『어느 박물학자의 항해』

    전원 고물로! 항해사가 소리쳤다. 돌아보니 거대한 향유고래가 뱃머리에 바싹 다가와 입을 쩍 벌리고 배를 당장 박살낼 기세였다. 모두 고물로 가라! 살고 싶으면!

    『고래 사냥꾼 워튼』

    그러니 다들 힘내게. 절대 용기를 잃지 말게.

    담대한 작살잡이가 고래를 공격하고 있는 동안에는!

    낸터킷의 노래

    오, 진귀한 늙은 고래여,

    그대가 머무르는 대양의 거처는 폭풍과 돌풍 가운데 있나니

    힘이 정의인 곳에서 힘센 거인인 그대는

    끝없는 바다의 왕이로다.

    고래의 노래

    1장

    어렴풋이 드러나는 것들

    나를 이슈메일이라 불러다오. 몇 년 전(정확히 언제인지는 묻지 말라) 지갑에는 돈이 다 떨어져가고 육지에는 딱히 흥미로운 일도 없어, 나는 배를 타고 나가서 세상의 바다를 둘러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우울함을 떨쳐내고 몸 안에 정체된 피를 순환시키는 방식이다. 입언저리가 점점 험악해지는 것을 느낄 때, 영혼이 가랑비 내리는 축축한 11월처럼 변할 때, 나도 모르게 장의사 앞에 멈춰 선다거나 장례 행렬을 마주칠 때마다 뒤쫓아 갈 때, 특히 우울함에 사로잡혀 거리로 뛰쳐나가 사람들이 쓴 모자를 일부러 툭툭 쳐서 떨어뜨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엄청난 도덕심을 발휘해야 할 때, 그럴 때마다 나는 최대한 빨리 바다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이 방법이 내게는 권총과 총알을 대신한다. 고대 로마의 카토는 철학적인 문장을 읊으며 칼 위에 몸을 던졌다지만 나는 조용히 배에 오른다. 놀랄 일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바다를 아는 자라면 누구나 언젠가는 바다에 대해 나와 비슷한 감정을 품게 될 테니까.

    당신들의 도시 맨해튼섬은 인도의 섬들이 산호초에 둘러싸인 것처럼 부두에 둘러싸여 있고, 사방에서 무역의 파도가 넘실거린다. 오른쪽으로 가든 왼쪽으로 가든 모든 길은 바다로 이어진다. 시내의 끝자락에는 포대가 있는데, 그곳의 웅장한 방파제는 파도에 씻기고 몇 시간 전만 해도 육지가 보이지 않던 곳에서 불어온 바람에 서늘해진다. 그곳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라.

    꿈결 같은 안식일 오후에 이 도시를 한번 둘러보라. 콜리어스곶에서 코엔티스 선착장까지, 다시 그곳에서 화이트홀을 지나 북쪽을 향해 걸어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초소에 배치된 입 다문 보초병처럼 수천 명의 사람들이 바다에 대한 몽상에 잠긴 채 시내 곳곳에 서 있다. 말뚝에 기댄 사람, 부두 끄트머리에 앉은 사람, 중국에서 온 배의 뱃전 너머를 보는 사람, 바다를 좀 더 잘 보려고 삭구 위에 높이 올라간 사람 등 각양각색이지만 그들은 모두 육지 사람들이다. 평일에 그들은 벽에 회반죽을 바른 목조건물 안에 갇혀 지낸다. 계산대에 매여 있거나 의자에서 꼼짝 못하거나 책상에 붙들려 있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푸른 들판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여기서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지만 보라! 더 많은 사람이 바다에 뛰어들기라도 할 것처럼 곧장 이곳으로 오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육지의 끝자락에 서지 않고서는 도무지 만족할 수 없는 모양이다. 저기 창고 그늘 아래서 어슬렁거리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그들은 물에 빠지기 직전까지 바다에 가까이 가려 한다. 그런 사람들이 저 멀리까지 줄을 서 있다. 육지 사람들은 모두 좁은 길과 골목, 거리 등 사방에서 나타나 여기로 와서 한 무리가 된다. 혹시 저기 늘어선 배들에 달린 나침반 자력이 그들을 여기까지 끌어당긴 것일까?

    조금 더 생각해보자. 당신이 시골, 이를테면 호수가 여럿 있는 어느 고지대에 있다고 하자. 내키는 대로 어느 길을 따라가든 십중팔구 당신은 계곡으로 내려가 개울가 웅덩이에 이를 것이다. 물에는 마력이 있다. 얼빠진 사람을 몽상에 푹 잠기게 한 다음 일으켜 세워서 발 닿는 대로 가게 해보라. 그러면 그는 틀림없이 그 지역의 물가로 갈 것이다. 미국의 거대한 사막을 여행하다가 목이 마를 때, 일행 중에 형이상학 교수가 있다면 이 실험을 한번 해보라. 누구나 알다시피 명상과 물은 서로 영원토록 맺어진 관계다.

    여기 화가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세이코 계곡의 풍경 중에서도 가장 몽환적이고 은밀하고 고요한 데다가 매혹적이며 낭만적인 풍경을 당신에게 그려주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주된 소재로 삼을까? 그림 속의 나무들은 은둔자나 십자가상이 들어앉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텅 비어 있다. 이곳에는 초원이 잠들어 있고, 저곳에는 소들이 잠들어 있다. 저 너머 오두막에서는 나른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멀리 깊은 산림지로 구불구불 뻗어나간 미로 같은 길은 첩첩이 이어진 산마루로 이어지고 산비탈은 푸른빛에 감싸여 있다. 하지만 그림이 아무리 황홀하게 전개되어도, 또 소나무가 이파리를 양치기의 머리 위로 한숨처럼 떨어뜨려도, 양치기가 자기 앞의 마법 같은 개울을 응시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풍경은 아무 소용없어진다. 6월에 대초원을 찾아가보라. 무릎까지 올라오는 참나리가 수십 킬로미터 펼쳐져 있어도 뭔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한 가지 매력은 무엇일까? 바로 물이다. 그곳에는 물이 한 방울도 없다!

    나이아가라가 거대한 모래 폭포에 지나지 않다면 누가 그것을 구경하려고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하겠는가? 테네시주의 가난한 시인이 갑자기 은화 두 줌이 생겼을 때, 그것을 몹시 필요한 외투를 사는 데 쓸지 아니면 로커웨이 해안으로 가는 도보 여행의 자금으로 쓸지 깊이 고민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늠름하고 건강한 신체에 늠름하고 건강한 정신이 깃든 청년이라면 대부분 언젠가 바다에 가게 되기를 열망하는 것은 왜일까? 처음 승선해서 배가 이제 육지가 보이지 않는 먼 바다로 나왔다는 말을 들을 때, 알 수 없는 떨림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왜 바다를 신성시했을까? 그리스인들은 왜 바다의 신을 따로 모시고 그를 제우스의 형제로 삼았을까? 당연히 이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다.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붙잡지 못해 괴로워하다가 물에 뛰어들어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는 의미가 더욱 깊다. 하지만 우리는 이와 같은 모습을 모든 강과 바다에서 본다. 그것은 붙잡을 수 없는 삶의 환영이고 모든 것의 핵심이다.

    눈가가 침침하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낄 때마다 나는 바다로 나가는 버릇이 있다고 말했는데, 승객으로 바다에 가겠다는 뜻은 아니다. 배의 승객이 되려면 지갑이 필요한데, 지갑이란 그 안에 뭔가 들어 있지 않으면 넝마에 불과하다. 게다가 승객은 뱃멀미를 하고 걸핏하면 싸우려들고 밤에 잠을 설치는 등 대체로 항해를 즐기지 못한다. 그렇다. 나는 승객으로는 절대 배를 타지 않을 것이다. 내가 경험 많은 선원이기는 해도 제독이나 선장, 주방장 등으로 배에 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직책에 따르는 영예와 특별 대우는 그런 자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돌리겠다. 나는 어떤 종류가 되었든 간에 명예롭고 존경할 만한 노고와 시련과 고생은 딱 질색이다. 범선, 바크, 브리그, 스쿠너 등을 관리하는 것은 고사하고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차다. 주방장에 대해 말하자면, 그 자리가 배에서 중요한 직책이기 때문에 간부 선원 대접을 받는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닭고기를 굽는 일은 영 내키지 않는다. 물론 일단 굽고 조심스레 버터를 바른 다음 적절히 소금과 후추를 친 닭고기구이에 대해 나보다 더 경건까지는 아니어도 경의를 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대한 화덕 같은 피라미드에서 따오기와 하마의 미라가 발견된 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따오기구이와 하마구이를 우상 숭배하듯이 열렬히 사랑했기 때문이다. 요리는 그처럼 중요하다.

    여하튼 바다에 뜻을 두었다는 것은, 돛대 바로 앞에 서거나 앞갑판 선실로 달려 내려가거나 주돛대 꼭대기에 올라가는 일반 선원으로 바다에 나가려는 것이다. 일반 선원이 되면 이런저런 명령을 받고, 5월 들판의 메뚜기처럼 이 돛대에서 저 돛대로 뛰어다녀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일은 처음에는 꽤 힘들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특히 육지에서 저명하고 유서 깊은 가문, 이를테면 밴 렌슬러나 랜돌프, 하르디카누트 출신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타르 단지에 손을 담가야 하는 일반 선원이 되기 전까지 시골 학교에서 덩치 큰 학생들도 벌벌 떠는 호랑이 선생 노릇을 했던 사람이라면 자존심이 이만저만 상하는 게 아닐 것이다. 장담하건대, 선생에서 선원으로 전업하는 것은 엄청난 변화다. 씩 웃으며 이런 일을 견뎌내려면 세네카와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을 한 사발 진하게 달여 마셔야 한다. 하지만 이런 고통도 시간이 흐르면 점차 무뎌진다.

    늙고 고약한 선장이 내게 빗자루를 들고 갑판을 쓸라고 명령한들 그것이 뭐 그리 대수인가? 이런 치욕을 『신약성경』이라는 저울에 달면 무게가 얼마나 나갈까? 노선장의 명령을 순순히 따랐다고 해서 대천사 가브리엘이 나를 우습게 볼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노예가 아닌 자가 어디 있는가? 있다면 나와보라. 노선장이 아무리 모질게 명령을 내리고 아무리 쥐어박아도 모든 게 괜찮다는 것을 나는 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똑같은 대접을 받고 있다. 쥐어박고 때리는 일이 어디서든 보편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므로 모두가 서로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위로하며 참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언제나 선원으로서 바다에 나간다. 선원은 반드시 수고한 대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승객이 돈을 한 푼이라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반대로 승객은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돈을 내는 것과 돈을 버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돈을 내는 것, 혹은 대가를 치르는 것은 과수원의 두 도둑²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기분 나쁜 징벌일 것이다. 하지만 돈 버는 것을 비교할 수 있을까? 돈은 모든 악의 근원이며 어떤 이유로든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우리의 거룩한 믿음을 고려한다면, 인간이 품위 있는 활동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 일이다. 아아, 기꺼이 돈을 벌고 있지만 실은 그것이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니!

    2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를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내가 항상 선원으로 바다에 나가는 것은 운동이 건강에 좋고 앞갑판에서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육지에서도 그렇듯이 바람은 뱃고물보다 뱃머리에서 불어오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보통 뱃고물 갑판에 있는 선장은 앞갑판 선원들의 숨을 거쳐 온 공기를 마시게 된다. 선장은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피타고라스의 격언³을 그대로 따른다면 말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많은 경우에도 일반 대중이 지도자를 이끌어가지만 지도자는 그런 사실을 잘 의식하지 못한다. 그런데 상선 선원으로 여러 차례 바다 냄새를 맡아본 내가 왜 이제 와서 포경선에 발을 들이기로 한 것일까? 이 질문에는 운명의 경찰관들이 누구보다 적절히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나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미행하고 있으며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내가 고래잡이 항해에 나선 것은 틀림없이 신의 섭리를 따라 아주 오래전에 예정된 원대한 계획의 일부일 것이다. 이 항해는 대규모 공연 사이에 낀 짤막한 막간극이나 일인극과 같다. 이 부분이 전체 공연 안내지에 소개된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적혀 있을 것이다.

    3피타고라스는 콩을 먹으면 배에 가스가 차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바람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바닷바람이 뱃머리에서 뱃고물 쪽으로 흐른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뱃머리 쪽의 화장실 냄새가 뱃고물 쪽의 선장실로 흐른다는 뜻이다. 뱃고물 쪽에 있는 사람이 피타고라스의 조언을 따르지 않아 방귀를 자주 뀐다면 사정이 달라진다는 뜻도 내포되어 멜빌의 유머와 풍자를 보여준다.

    치열한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전

    이슈메일이란 자의 고래잡이 항해

    피비린내 나는 아프가니스탄전쟁⁴

    4이 책의 해제 중 ‘흰 고래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참조.

    다른 사람들이 고상한 비극에서 감동적인 역할을, 우아한 희극에서 쉽고 간단한 역할을, 익살극에서 쾌활한 역할을 맡을 때, ‘운명’이라는 무대 감독은 왜 내게 포경선 선원이라는 초라한 역할을 맡겼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 이유를 정확히 말할 수는 없어도, 이제 와서 모든 상황을 돌이켜보니 다양하게 변장하고 내게 교묘히 나타난 여러 동기와 원인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것들은 예정된 역할을 하도록 나를 밀어붙였고, 또한 기만하여 내가 편견 없는 자유의지와 예리한 판단으로 스스로 그런 선택을 했다고 믿게 만들었다.

    가장 결정적인 동기는 거대한 고래 자체의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이었다. 경이롭고 신비한 그 괴물은 내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덩치가 섬만 한 고래가 헤엄치는 거칠고 먼 바다, 그 고래가 가져오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위험들, 게다가 파타고니아에서 고래를 보고 그 소리를 들었다는 무수한 목격담, 이런 것들이 바다를 향한 나의 소망에 불을 붙였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아무런 도전 의식이 생기지 않을 테지만, 나는 머나먼 것들을 끊임없이 동경하고 갈망하는 사람이다. 나는 금단의 바다를 항해하고 야만인의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좋은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며, 공포에 민감하지만 상황이 허락한다면 공포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다. 아무튼 자신이 머물게 된 곳에 살고 있는 모든 거주민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니까.

    이런 이유로 나는 고래잡이 항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제 경이로운 세계로 가는 거대한 수문이 활짝 열렸고, 나를 이런 목표로 이끌었던 길들여지지 않는 상상 속에서 수많은 고래들이 두 마리씩 짝을 지어 내 영혼 가장 깊은 곳으로 흘러들었다. 행렬 한복판에는 우뚝 솟은 눈 덮인 산처럼 거대한 두건을 쓴 유령 하나가 헤엄치고 있었다.

    2장

    여행 가방

    셔츠 한두 장을 쑤셔 넣은 낡은 여행 가방을 겨드랑이에 끼고 혼곶과 태평양을 향해 출발했다. 정든 도시 맨해튼을 떠나 제시간에 뉴베드퍼드에 도착했다. 때는 12월 어느 토요일 밤이었다. 하지만 낸터킷으로 가는 소형 정기선이 이미 출발했고, 다음 주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배를 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무척 실망했다.

    고래잡이라는 고난과 형벌을 자처하는 젊은이들은 대부분 여기 뉴베드퍼드에 머물다가 항해를 시작한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애초에 이 도시에서 항해를 시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낸터킷에서 떠나는 배가 아니면 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유명하고 전통적인 낸터킷섬과 관련된 것은 죄다 멋지고 활기찬 느낌이 들었고, 이런 분위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최근 들어 뉴베드퍼드가 점점 포경업을 독점하면서 낸터킷이 지금은 딱하게도 훨씬 뒤처졌지만, 낸터킷이야말로 카르타고의 티레와 같이 뉴베드퍼드의 원형이며, 미국에서 최초로 고래 사체가 해변에 떠밀려온 곳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낸터킷 말고 어디서 처음으로 고래를 사냥하러 카누를 타고 바다에 나갔겠는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작은 외돛배가 기움돛대에서 작살을 쏘기 적절한 때를 알아내려고 수입한 포경용 자갈을 싣고 나가 고래를 향해 던졌다는데, 그런 배가 낸터킷이 아니면 어디서 출발했겠는가?

    이제 낸터킷섬의 항구로 떠나기 전에 뉴베드퍼드에서 하룻밤과 하루 낮, 그리고 다시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데, 그동안 어디서 먹고 자느냐가 걱정되었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아니 무척 어둡고 음울한 밤, 살을 에는 듯 춥고 쓸쓸한 밤이었다. 거기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주머니를 뒤져보니 갈고리 같은 손가락에 은화 몇 닢이 걸려 올라왔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황량한 길거리 한복판에 서서 북쪽과 남쪽의 어둠을 비교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이슈메일. 어디로 가든지, 분별력 있게 어디에 숙소를 정하든지 간에 반드시 가격부터 알아보고 너무 까다롭게 굴지는 말자.

    나는 머뭇거리는 걸음으로 거리를 헤매다가 ‘교차작살’이라는 간판 앞을 지나갔다. 그곳은 너무 비싸고 소란스러운 분위기였다. 더 걸어가자 ‘황새치’라는 여관이 나왔는데, 창문에서 쏟아지는 붉은빛이 어찌나 강렬한지 여관 앞에 쌓인 눈과 얼음을 녹여버린 것 같았다. 다른 곳에는 아스팔트 포장도로에 서리가 25센티미터나 두껍게 내려 단단히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했다. 내 부츠는 워낙 거칠게 막 신고 돌아다녀서 밑창이 한심할 정도로 너덜너덜해져 단단한 돌부리 같은 것에 발이 닿을 때마다 피로감이 몰려왔다. 이번에도 너무 비싸고 소란스러운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길바닥에 넓게 비친 불빛을 바라보며 안에서 들려오는 잔 부딪치는 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결국 이렇게 중얼거렸다. 가, 이슈메일. 저 소리 안 들려? 문 앞에서 떨어져. 여기저기 기운 네 장화가 그 안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하잖아. 그래서 나는 계속 걸어갔다. 이제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부두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주 쾌적하지는 않더라도 가장 저렴한 여관이 있을 것 같았다.

    아, 이렇게 황량한 거리라니! 집이 아닌 검은 덩어리들이 길 양쪽에 죽 늘어섰고, 여기저기 보이는 촛불은 마치 무덤 속을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한 주의 마지막 날, 그것도 이런 밤 시간에 이 도시 구역은 너무나 한적해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 낮고 널찍한 건물에서 연기 같이 흘러나오는 빛을 보았다. 문도 어서 들어오라는 듯 열려 있었다. 수수하고 편안한 분위기의 공공건물인 것 같았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현관 앞에 놓인 석탄재 통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날아오르는 석탄재에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 하, 이 잿더미는 파멸의 도시 고모라에서 온 것인가? 그나저나 아까 지나온 여관들이 ‘교차작살’과 ‘황새치’였지? 그럼 이곳 간판에는 ‘함정’이라고 쓰여 있겠군. 하지만 나는 벌떡 일어나 안에서 들려오는 큰 목소리를 따라 두 번째 문을 열었다.

    내부의 풍경은 도벳⁵에서 열린 악마들의 회합 같았다. 100명은 족히 되는 검은 얼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 너머에는 검은 죽음의 사자가 설교단에서 책을 두드리고 있었다. 내가 들어선 곳은 흑인 교회였다. 목사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자들에 관한 설교를 하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빠져나오면서 중얼거렸다. 하, 이슈메일. ‘함정’이라는 간판치고는 형편없는 대접이군.

    5과거 유대인이 몰록에게 자식을 산 제물로 바쳤던 예루살렘 근처의 땅.

    나는 계속 걷다가 마침내 부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불빛 하나를 보았다. 공중에서 쓸쓸히 삐걱거리는 소리도 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문 위에 간판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간판에는 길게 쭉 뻗은 안개 같은 물보라가 하얀색으로 희미하게 그려져 있고, 그 밑에 ‘물보라 여관: 피터 코핀⁶’ 이라고 쓰여 있었다.

    6여기서는 사람의 이름으로 쓰였으나 코핀(coffin)에는 시신을 넣는 관(棺)이라는 뜻도 있다.

    코핀? 물보라? 이 독특한 결합에 약간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낸터킷에서는 코핀이 흔한 이름이라고 하니 피터란 사람도 아마 낸터킷에서 이주해 온 모양이었다. 불빛은 아주 희미했고 집도 조용했다. 다 쓰러져가는 목조건물 자체가 어느 화재 지역의 폐허에서 가져온 자재로 만든 것 같은 데다가 간판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궁상맞게 들려, 이곳이라면 싼값에 묵을 수 있고 잘하면 맛있는 완두콩 커피도 마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괴상하게 생긴 집이었다. 박공지붕을 얹은 이 낡은 집은 한쪽이 마비라도 된 것처럼 애처롭게 기울어져 있었다. 이 집은 바람이 휘몰아치는 거리 모퉁이에 있었는데, 광풍 유로클리돈⁷이 아주 오래전에 가련한 사도 바울의 배를 뒤흔들 때보다 더 세차게 울부짖고 있었다. 그렇지만 실내에서 벽난로 옆 시렁에 두 발을 올려놓고 불을 쬐며 잠을 청하는 사람에게 유로클리돈은 기분 좋은 미풍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옛 작가는 작품에서 이렇게 말한다(나만 가지고 있는 그의 유일한 보관본이다). 광풍 유로클리돈이 가져오는 한기는, 그것을 내다보는 유리창의 상태에 따라 차이가 크다. 가령 서리가 밖에만 있는 유리창을 통해 보느냐, 아니면 창틀이 없이 서리가 안팎으로 쌓여 있고, 민첩한 죽음의 사자만이 유리를 끼울 수 있는 창을 통해 보느냐에 따라 그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7지중해에 발생하는 강한 북동풍.

    고색창연한 서체로 쓰인 이 문장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옳은 말이다. 검은 활자여, 정말 훌륭한 판단이구나. 그래, 나의 이 눈은 창문이고, 나의 이 몸은 집이다. 솜 부스러기라도 여기저기에 쑤셔 넣어 틈새를 막지 못한 건 참으로 딱한 일이다. 하지만 이제 손쓰기에는 너무 늦었다. 우주는 이미 완성되었다. 건물의 완성을 알리는 담 위의 갓돌이 이미 놓였고, 부스러기 돌들은 100만 년 전에 다른 곳으로 치워졌다. 너 가련한 나사로여, 부잣집의 연석을 베고 누워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몸을 떠느라 입고 있던 누더기가 벗겨질 정도로구나. 넝마로 두 귀를 막고 옥수수 속대로 입안을 메워도 사나운 유로클리돈의 한기를 막지는 못할 것이다. 자주색 비단옷으로 몸을 휘감은 부자 영감은 말하겠지. 어이쿠, 유로클리돈이라! 서리가 내려 멋진 밤이군. 오리온자리의 별들이 빛나는 것 좀 보게. 북극광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동양의 여름 기후는 늘 온실 같다던데 그러든지 말든지 내가 알게 뭐냐. 석탄만 있으면 언제든 나만의 여름을 만끽할 수 있는데.

    하지만 나사로는 어떻게 생각할까? 추위에 파랗게 얼어붙은 두 손을 웅장한 북극광을 향해 들어 올린다고 따뜻해질 수 있을까? 차라리 나사로는 수마트라섬에 있고 싶지 않을까? 적도를 따라 길게 드러눕고 싶지 않을까? 아, 신들이여! 이 서리를 피할 수만 있다면 지옥의 불구덩이인들 못 뛰어들겠나이까?

    그런데 나사로가 부자 영감 집 대문 앞 연석에 눕게 되는 것은 빙산이 몰루카제도의 한 섬에 밀려오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부자 영감도 러시아 황제처럼 얼어붙은 한숨으로 지어진 얼음 궁전에서 살고 금주 협회 회장인지라 고아들의 미지근한 눈물만 마실 뿐이다.

    하지만 이제 그만 징징거리기로 하자. 우리는 고래를 잡으러 떠난다. 앞으로는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제 신발에 얼어붙은 얼음을 긁어내고, ‘물보라’ 여관이 어떤 곳인지 알아보자.

    3장

    물보라 여관

    박공지붕을 얹은 물보라 여관으로 들어서면 천장이 낮고 공간이 누추하지만 널찍한 입구가 나온다. 벽에는 구식 징두리널을 덧대어놓아 폐기 처분된 낡은 배의 낮은 뱃전이 생각났다. 한쪽 벽에는 아주 커다란 유화가 걸려 있었는데, 어찌나 색이 바래고 손상되었는지 무엇을 그렸는지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밝기가 각기 다른 빛이 교차하는 곳에 있어 보는 이를 더욱 헷갈리게 했다. 그림을 성실히 연구하고 수시로 방문해 사람들에게 자세하게 물어봐야 비로소 무슨 내용인지 간신히 알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무튼 그림 속의 형언할 수 없는 그늘과 어둠의 덩어리를 처음 보면, 과거 뉴잉글랜드에서 마녀사냥이 횡행하던 시절에 한 야심찬 젊은 예술가가 마법에 걸린 듯한 혼돈의 시대상을 표현하려고 애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오랫동안 진지하게 응시하며 거듭 숙고해보면, 특히 입구 뒤쪽으로 난 작은 창문을 열어 그림에 약간의 빛을 더해보면, 이런 생각이 엉뚱하지만 전혀 근거 없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보는 이를 가장 난처하고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은 그림 중앙에 맴도는 길고 유연하고 꺼림칙한 검은 덩어리였다. 뭐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거품 속에 떠다니는 푸르고 흐릿한 세 줄의 수직선이 덩어리를 떠받치고 있었다. 질척거리는 늪 같은 그림인지라 신경이 예민한 사람이 보면 정신이 사나워질 법도 했다. 하지만 막연하고 상상할 수 없는, 절반 정도는 이미 완성된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어 자신도 모르게 이 기괴한 그림이 무엇을 그린 건지 알고 싶어져 뚫어져라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하여 때때로 재치 있지만, 아쉽게도 기만적인 생각이 쏜살처럼 보는 이의 머릿속을 지나간다. 이를테면 한밤중에 돌풍이 부는 흑해,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 원소 간의 비정상적인 전투, 히스가 말라붙은 황무지, 북극의 겨울 풍경, 얼어붙었던 시간의 개울이 녹는 모습 등을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모든 상상은 결국 그림 중앙의 꺼림칙한 무언가에게로 집중된다. 그 정체만 밝혀지면 나머지는 전부 저절로 알게 될 것 같다. 그런데 잠깐, 저건 왠지 거대한 물고기를 닮지 않았나? 혹시 거대한 리바이어던인가?

    화가의 의도는 이런 것 같았다. 이 주제로 나와 대화를 나눈 여러 노인의 의견을 종합한 나의 최종 결론이다. 이 그림은 엄청난 허리케인을 만난 혼곶의 포경선을 그린 것이다. 배는 이미 바다에 잠겨 부서진 세 개의 돛대만 보일 뿐이다. 몸에 작살이 꽂혀 극도로 성난 고래가 배를 훌쩍 뛰어넘으려다가 돛대에 찔려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입구 맞은편 벽에는 기괴한 야만인이 사용하는 괴상한 곤봉과 창이 빽빽이 걸려 있었다. 어떤 것은 상아를 자르는 톱처럼 번쩍이는 톱니가 촘촘히 달려 있고, 또 어떤 것은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매듭 다발이 달려 있었다. 어떤 것은 낫같이 생겼는데, 자루가 긴 낫으로 풀밭을 베었을 때 생기는 자국처럼 둥글게 휜 큼직한 손잡이가 있었다. 이런 물건들을 보고 있자니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대체 어떤 식인종과 야만인이 저런 우악스럽고 끔찍한 도구를 들고 남의 목숨을 빼앗으러 갔을까 궁금해졌다. 도구들 사이에는 녹슬고 낡은 데다 망가진 고래잡이용 창과 작살도 나란히 걸려 있었다. 그중에 몇 개는 꽤 역사가 있는 무기였다. 이젠 멋대로 굽었지만 한때 긴 창이었던 이 물건은 50년 전에 고래잡이 네이선 스웨인이 해가 뜨고 지는 하루 사이에 고래 15마리를 죽였던 도구다. 지금은 코르크 마개나 뽑게 생긴 저 작살은 한때 자바해에서 고래의 몸에 꽂혔고, 그대로 도망친 고래와 함께 사라졌다가 몇 년 뒤 그 고래가 블랑코곶에서 잡히면서 되찾아 여기에 진열되었다. 작살은 원래 고래의 꼬리 근처에 꽂혔는데, 사람 몸에 들어간 바늘이 움직여 다니듯 고래 몸속을 12미터 가량 이동해 혹등에 묻힌 채 발견되었다.

    어둑어둑한 입구를 지나면 낮은 아치 통로가 나왔다. 생긴 것으로 보아 예전에 분명 벽난로들이 설치된 커다란 중앙 굴뚝이 있었음직한 통로를 지나면 라운지가 나왔다. 라운지는 입구보다 더 어두웠다. 머리 위로는 육중한 들보가 너무 낮게 내려와 있고, 바닥에 깔린 낡고 쭈글쭈글한 판자 위를 걷자니 낡은 배 갑판 맨 뒤쪽 방으로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람이 윙윙 불어 길모퉁이에 정박한 이 낡은 방주를 맹렬히 흔드는 밤에는 특히 더 그럴 것 같았다. 라운지의 한쪽에는 길고 낮은 선반 같은 탁자가 있고, 그 위에는 금 간 유리 장식장이 놓여 있는데, 그 안은 이 넓은 세상의 가장 먼 오지에서 가져온 먼지투성이 골동품들로 가득했다. 건너편 구석에는 어둑한 소굴 같은 것이 튀어나와 있는데, 참고래의 머리를 조잡하게 본떠서 만든 주점 카운터였다. 그렇기는 해도 아치 모양으로 세운 고래 턱뼈가 어찌나 큰지 마차도 그 밑을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주점 안의 추레한 선반에는 오래된 포도주병, 유리병, 휴대용 술병 등이 즐비했다. 죽음을 부르는 고래 입속 같이 생긴 주점에는 그 옛날의 저주받은 요나처럼 또 다른 요나가 있었다. 이 작고 말라빠진 노인은(실제로 사람들은 그를 요나라고 불렀다) 바쁘게 움직이면서 선원들에게 돈을 받고 광기와 죽음을 팔고 있었다.

    노인이 독을 따라주는 잔은 아주 밉살맞게 생겼다. 바깥쪽은 원통형이지만 안쪽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좁아져 작정하고 양을 속이는 악랄하기 이를 데 없는 초록색 잔이다. 날강도 같은 잔에는 자오선 같은 평행선이 조잡하게 새겨져 이 선까지 채우면 1페니, 다음 선까지 채우면 1페니 추가, 하는 식이었다. 잔을 가득 채우는 것은 혼곶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마시려면 1실링이 들었다.

    주점에 들어서자 젊은 선원들이 탁자 주위에 모여 희미한 불빛 아래서 고래 뼈 수공예품을 살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여관 주인을 찾아가 하룻밤 묵을 방을 내달라고 청했다. 주인은 방이 다 차서 빈 침대가 없다고 하더니 잠시 뒤 이마를 두드리며 말했다. 잠깐만, 작살잡이와 담요를 같이 덮고 자는 건 괜찮겠나? 보아하니 고래를 잡으러 갈 모양인데 자네도 그런 일에 익숙해져야지.

    나는 한 침대에 두 사람이 자는 건 딱 질색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하다면 그 작살잡이가 어떤 사람인지에 달렸다고 덧붙였다. 정말로 내어줄 방이 없고 작살잡이가 불쾌한 사람만 아니라면 이토록 추운 밤에 낯선 도시를 정처 없이 헤매느니 점잖은 사람과 담요 한 장을 나누어 덮는 게 낫다고도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좋아, 일단 앉게. 저녁은? 먹을 텐가? 금방 준비되네.

    나는 뉴욕 배터리 공원의 벤치처럼 온통 칼자국이 새겨진 낡고 긴 나무 의자에 앉았다. 벤치 한쪽 끝에서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선원 하나가 몸을 구부리고 앉아 벌린 두 다리 사이의 공간을 잭나이프로 열심히 파서 장식을 더하고 있었다. 돛을 모두 올린 배를 새기려는 것 같은데 별 진전이 없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네댓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러 옆방으로 불려 갔다. 불기가 전혀 없는 그 방은 아이슬란드처럼 냉기가 돌았다. 주인은 불 피울 형편이 못 된다고 말했다. 하얀 수의를 둘둘 감아놓은 것처럼 생긴 두 자루의 싸구려 수지 양초가 타고 있었다. 우리는 선원용 재킷의 단추를 모두 채우고서 반쯤 언 손으로 델 듯이 뜨거운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식사는 무척 실속 있었다. 고기와 감자뿐 아니라 과일 푸딩까지 나왔다. 세상에, 저녁에 과일 푸딩이라니! 초록색 모직 외투를 걸친 한 젊은 친구가 허겁지겁 푸딩을 먹어대기 시작했다.

    이보게. 여관 주인이 말했다. 오늘 자네 꿈자리가 영 안 좋을 거야.

    저 사람이 작살잡이는 아니죠? 나는 그에게 속삭였다.

    에이, 아니야. 여관 주인은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작살잡이는 얼굴색이 거무튀튀한 친구라네. 과일 푸딩 같은 건 절대 안 먹지. 그 친구는 스테이크만 먹어. 피가 줄줄 흐르는 걸로.

    대체 그 작살잡이가 누군데요? 여기 있나요?

    금방 올 거야.

    나도 모르게 ‘얼굴색이 거무튀튀한’ 작살잡이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같이 자야 한다면 그가 나보다 먼저 옷을 벗고 침대에 들어가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다시 주점으로 돌아왔다. 달리 할 일이 없던 나는 구경꾼 노릇이나 하면서 저녁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곧 바깥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여관 주인은 갑자기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범고래호 선원들이군. 오늘 아침에 앞바다에 나타난 걸 보았지. 4년 동안 항해하고 만선으로 돌아왔다는군. 이보게 친구들, 이제 피지제도에서 온 최신 소식을 듣게 될 거요.

    여관 입구에서 덜거덕거리는 부츠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활짝 열리며 거칠게 생긴 선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털이 거친 방한 외투로 몸을 감싸고 넝마 같은 털목도리로 머리를 싸맸는데도 수염에 고드름이 달린 채로 뻣뻣한 그들의 모습은 캐나다 래브라도 지역의 곰들이 들이닥친 것 같았다. 배에서 방금 내린 그들이 맨 처음 들어온 곳이 이 여관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고래의 입, 다시 말해 주점으로 직행했고, 작고 쪼글쪼글한 요나 영감이 곧 술잔을 가득 채워 그들 모두에게 돌렸다. 선원 중 하나가 지독한 감기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하자 요나 영감은 그에게 진과 당밀을 섞어 만든 송진 같은 음료를 내주며 아무리 오래된 감기든, 래브라도 해안에서 걸린 감기든, 바람이 부는 빙산 근처에서 걸린 감기든 간에 이만한 특효약이 없다고 장담했다.

    그들은 곧 술기운이 차올랐다. 아무리 술고래라도 육지에 내린 지 얼마 안 되면 보통은 빨리 취한다. 취흥이 오르자 그들은 엄청나게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시끌벅적한 분위기와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취해 보이지 않았고 동료 선원들의 흥을 망치고 싶지는 않지만 그들처럼 시끄럽게 떠드는 건 삼가고 있었다. 나는 즉시 그에게 흥미를 느꼈다. 바다의 신들이 정한 운명에 따라 그는 머지않아 나의 동료 선원이 될 것이므로(선원실에서 같이 침대를 썼을 뿐이지만) 여기서 그에 관해 간단히 서술해보겠다. 키는 180센티미터가 넘고 어깨는 떡 벌어졌으며 가슴은 방파제처럼 넓었다. 그렇게 근육이 많은 사람은 좀처럼 보지 못했다. 얼굴은 햇볕에 그을린 짙은 갈색이었는데, 그 때문에 하얀 이가 더욱 하얗게 보여 눈이 부실 정도였다. 눈에 드리운 깊은 그림자에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추억이 희미하게 떠돌았다. 목소리를 들으면 남부 출신임을 단박에 알 수 있고, 체격이 좋은 걸로 보아 버지니아주 앨러게니산맥에 사는 산사람이 분명했다. 동료 선원들의 흥청망청한 술판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주점을 빠져나갔고, 이후로 바다에서 동료로 다시 만날 때까지 나는 그를 보지 못했다. 얼마 있지 않아 동료들은 그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동료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것 같았다. 그들은 벌킹턴!⁸ 벌킹턴! 대체 어디 간 거야?라고 외치며 그를 찾으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8벌킹턴에 관해서는 이 책의 해제 중 ‘집필 과정과 재발굴’ 참조.

    이제 밤 아홉 시가 다 되었다. 진탕 마시고 떠들던 선원들이 나가고 주점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덕분에 나는 선원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세운 나의 묘안에 뿌듯함을 느꼈다.

    한 침대에서 둘이 자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친형제라도 그렇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잠잘 때 혼자이기를 바란다. 낯선 도시에서 낯선 여관에 머무르며 낯선 자, 그것도 낯선 작살잡이와 함께 자야 한다면 그 거부감은 무한대로 커진다. 선원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사람과 한 침대를 같이 써야 할 이유도 없다. 육지의 독신 임금과 마찬가지로 바다에 나간 선원들도 한 침대를 둘이 같이 쓰지 않는다. 물론 선원들은 커다란 선원실에서 함께 자지만, 각자의 그물 침대에서 각자의 담요를 덮고 알몸으로 잔다.

    작살잡이를 생각할수록 같은 침대를 쓰기 싫어졌다. 작살잡이가 걸치는 옷은 리넨이든 모직이든 변변치 않을 것이고 깨끗할 리도 없다. 온몸에 몸서리가 쳐졌다. 게다가 밤이 점점 깊어지고 있는데 점잖은 작살잡이라면 지금쯤 거처로 돌아와 잠자리에 드는 것이 마땅하다. 그자가 한밤중에 침대에 기어들다가 나를 덮치면 어떡하지? 얼마나 지저분한 데서 있다가 왔는지도 모르는데?

    주인장! 생각이 바뀌었어요. 작살잡이 그자와 함께 못 자겠어요. 그냥 여기 벤치에서 잘게요.

    좋을 대로 하게. 매트리스로 쓸 식탁보를 내어줄 수 없는 건 안 된 일이지만. 이 벤치는 판이 울퉁불퉁해서 말이지. 여관 주인은 벤치의 옹이와 홈을 만지며 말했다. 참, 잠시 있어 보게. 대패가 주점에 있거든. 아늑하게 해줄 테니 잠시 기다려보라고. 그는 곧 대패를 가져와 낡은 명주 손수건으로 벤치의 먼지를 털어내더니 원숭이처럼 히죽거리며 내 침대가 될 벤치를 힘차게 대패질하기 시작했다. 대팻밥이 이리저리 날리다가 대팻날이 단단한 옹이에 걸리면서 마침내 동작이 중단되었다. 여관 주인은 손목을 접지를 뻔했고, 나는 그에게 제발 그만두라고 말했다. 침대는 그만 하면 매끈했고, 송판을 아무리 대패질한들 오리털 이불이 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관 주인은 히죽거리며 대팻밥을 쓸어 모아 방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난로에 던져 넣고 자기 볼일을 보러 갔다. 나는 그곳에 남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벤치 길이를 재어보니 내 키보다 30센티미터는 짧았다. 하지만 의자를 하나 갖다 대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문제는 폭도 30센티미터 정도로 아주 좁다는 것이었다. 그 방에 있는 다른 벤치는 대패질한 것보다 10센티미터는 높았다. 그러니 같이 놓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비어 있는 한쪽 벽에 대패질한 벤치를 길게 갖다 대고 벽에서 약간 간격을 두어 그 위에 등을 댈 수 있게 해보았다. 하지만 막상 누우니 창틀 아래로 차가운 외풍이 온몸으로 느껴져 이 계획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낡은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과 창틀 아래로 들어오는 바람이 만나 내가 누워 있는 곳 바로 옆에서 작은 회오리바람을 만들어내고 있어 더더욱 거기서 밤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귀신은 뭐하나, 그놈의 작살잡이나 잡아가지. 그런데 잠깐, 내가 먼저 손쓸 방법은 없을까? 방에 먼저 들어가 문을 잠그고 침대에 누워서 그가 아무리 문을 세게 두드려도 모른 척하며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떨까? 그리 나쁜 계획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고는 곧 포기했다. 다음 날 아침에 내가 방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작살잡이가 문 앞에서 나를 때려눕혀도 할 말이 없지 않은가!

    나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면서 누군가의 침대에 들어가지 않는 한 춥고 고통스러운 밤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지도 못하는 작살잡이에게 부당한 편견을 갖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이제 곧 들어오겠지. 그때 잘 살펴보자. 어쩌면 우리는 서로 유쾌하고 훌륭한 잠자리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그건 모르는 일이야.

    하지만 다른 투숙객들이 하나둘 자려고 들어오는데도 이 작살잡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주인장! 나는 말했다. 대체 이 사람 뭡니까? 늘 이렇게 늦나요? 이제 시간은 자정으로 가고 있었다.

    여관 주인은 다시 조용히 킬킬거렸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생각하며 혼자 웃는 것 같았다. 아니. 그는 대답했다. 보통 그 친구는 아침 일찍 일어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지. 그런 말도 있잖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오늘밤에는 물건을 팔러 나갔는데 왜 늦는지 모르겠군. 머리가 안 팔리는 모양이야.

    머리가 안 팔린다고요? 대체 무슨 정신 나간 소리예요? 나는 점점 화가 났다. 이봐요, 주인장. 그렇다면 그 작살잡이가 정말 이 신성한 토요일 밤에, 아니 지금은 일요일 아침일지도 모르겠군요. 어쨌든 야심한 때 머리를 팔러 이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말입니까?

    맞네. 여관 주인은 말했다. 여기 시장에는 그런 물건이 너무 많아 팔기 힘들 거라고 말해주기는 했는데.

    무슨 물건이요? 나는 소리쳤다.

    글쎄 머리래도. 알다시피 세상에는 머리가 너무 많잖아?

    이봐요, 주인장. 나는 짐짓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잖은 이야기는 그만 늘어놓으시죠. 난 풋내기가 아니에요.

    그럴지도 모르지. 여관 주인은 나뭇가지를 꺼내더니 뾰족하게 깎아 이쑤시개로 만들며 말했다. 그런데 그 작살잡이가 자기가 파는 머리에 대해 욕하는 소리를 듣기라도 해봐. 그럼 자네도 곤란해질걸.

    그럼 내가 그 머리를 모조리 박살낼 거예요. 여관 주인의 황당무계한 소리에 나는 다시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뭐, 박살난 거나 다름없지.

    박살났다니 무슨 뜻이에요?

    아, 그렇대도. 그래서 안 팔리는 것 같아, 내 생각에는.

    주인장. 나는 눈보라치는 헤클라산⁹처럼 차갑게 다가서며 그에게 말했다. 이쑤시개 깎는 일일랑 집어치우고 당장 터놓고 이야기해봅시다. 나는 이 여관에 와서 침대를 하나 달라고 했어요. 당신은 절반밖에 내어줄 수 없다고 했고요. 나머지 절반은 그 작살잡이 것이라면서. 내가 아직 본 적도 없는 자에 대해 당신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늘어놓고 있어요. 침대를 같이 써야 하는 자에 대해 불편한 감정만 들게 하고 있다고요. 주인장, 침대를 같이 쓰려면 아주 친하고 믿을 만한 사이여야 해요. 진심으로 요청합니다. 그 작살잡이가 누구이고 뭘 하는 사람인지, 한 침대를 써도 괜찮은 사람인지 말해주세요. 일단 그자가 두개골을 팔러 다닌다는 말은 취소하세요. 그게 사실이라면 미치광이라는 소리인데, 나는 그런 자와 같이 잘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으니. 그리고 당신, 주인장 당신 말이에요. 그런 사정을 다 알면서도 나한테 이런 식으로 한 침대를 쓰라고 하면 형사 고발 당할 줄 아세요.

    9아이슬란드 남부에 있는 활화산.

    허허, 참. 여관 주인은 긴 숨을 내쉬며 말했다. 조금 거칠기는 해도 젊은 친구가 제법 길게 설교할 줄 아네. 그런데 진정하게. 내가 말한 작살잡이는 남태평양에서 얼마 전에 돌아왔는데, 거기서 향유를 바른 뉴질랜드 원주민 두개골을 잔뜩 사왔더군. 알다시피 그게 꽤 값나가는 골동품이거든. 다 팔고 딱 하나 남았는데 오늘밤에 떨이를 하려는 거야.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사람들이 교회에 가고 있는데 길에서 두개골 사시오, 하고 외칠 수는 없잖아. 그런데 지난 일요일에는 팔고 싶어 하더라고. 줄에 두개골 네 개를 매달고 나가려는 걸 겨우 말렸지. 무슨 양파도 아니고.

    이로써 수수께끼는 풀렸고 어쨌든 여관 주인도 나를 속이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렇기는 해도 신성한 안식일이 될 때까지 토요일 밤 내내 거리를 돌아다니며 이교도의 두개골을 파는 식인종 같은 작살잡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난감했다.

    주인장, 그 작살잡이는 분명 위험한 사람일 거예요.

    그래도 숙박료는 꼬박꼬박 잘 내던걸. 여관 주인은 답했다. 그런데 말이야, 지금 시간이 꽤 늦었거든. 이제 자러 가야지. 좋은 침대일세. 신혼 첫날밤에 마누라랑 함께 잤던 침대야. 둘이서 막 뒹굴어도 될 만큼 널찍해. 크기가 어마어마하지. 침대를 손님용으로 쓰기 전에는 마누라가 우리 아들 샘과 조니를 침대 발치에서 재우곤 했어. 하루는 내가 잠결에 팔다리를 휘젓다가 샘이 바닥에 떨어져 팔이 부러질 뻔했지. 그 후로는 마누라가 저 침대를 안 쓴다고 했고. 이리로 오게, 촛불을 줄 테니.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초에 불을 붙여 내게 내민 다음 길을 안내하려 했다. 하지만 나는 우물쭈물하며 서 있었다. 구석에 걸린 시계를 본 여관 주인은 이렇게 소리쳤다. 벌써 일요일이 됐네. 작살잡이는 오늘밤에 안 나타날 것 같아. 어디 딴 데서 닻을 내린 모양이야. 이리 오게. 아, 어서. 자러 안 갈 건가?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그는 나를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조개처럼 차가운 그 방에는 작살잡이 넷이 나란히 누워서 잘 수 있을 만큼 정말 거대한 침대가 놓여 있었다.

    여관 주인이 세면대 겸 탁자로 쓰는 낡은 사물함에 양초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 이제 편히 쉬게. 좋은 밤 되라고. 내가 침대를 살피다가 눈을 돌리자 여관 주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이불을 젖히고 침대를 들여다보았다. 도저히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꽤 괜찮은 침대였다. 방을 둘러보니 침대와 사물함 외에 다른 가구는 보이지 않았고 조잡한 선반과 사방의 벽, 그리고 벽난로 덮개가 있었다. 벽난로 덮개에 발라진 종이에는 고래를 공격하는 한 사내가 그려져 있었다. 밧줄로 단단히 묶여 바닥 한쪽에 내던져놓은 그물 침대와 커다란 선원용 자루는 그 방에 원래 있지 않은 것 같은 물건이었다. 자루는 육지에서 가방 대용으로 쓰는 것 같은데 작살잡이의 옷이 들어 있을 게 분명했다. 벽난로 선반 위에는 뼈로 만든 기이한 낚싯바늘 한 무더기가 있었고, 침대 머리맡에는 기다란 작살이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사물함 위에 있는 이건 뭐지? 나는 그 물건을 들고 촛불 가까이에 비추고 만져보고 냄새도 맡으면서 그 정체에 관한 만족스러운 결론을 내려고 궁리를 거듭했다. 굳이 따지자면 커다란 현관 매트처럼 생겼는데 가장자리에는 딸랑거리는 작은 쇠붙이가 달려 있었다. 인디언들이 신는 가죽신발 둘레에 뻣뻣한 호저 가시를 박아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매트 한가운데에는 구멍 혹은 틈새 같은 게 있어 남미 사람들이 입는 판초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제정신을 가진 작살잡이라면 이런 현관 매트를 뒤집어쓰고 기독교도의 도시를 활보할 수 있을까? 시험 삼아 한번 걸쳐보니 큰 바구니를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이 짓눌렸다. 너무 까칠까칠하고 두꺼운 데다가 생면부지의 이 작살잡이가 비 오는 날에 입고 다녔는지 축축한 느낌마저 있었다. 그것을 걸친 채 벽에 걸린 거울 앞에 섰더니 여태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괴이한 광경이 거울에 비쳤다. 서둘러서 그것을 벗으려다 목에 경련까지 일었다.

    나는 침대 한쪽에 걸터앉아 두개골을 팔러 다닌다는 작살잡이와 그의 현관 매트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선원용 재킷을 벗고 방 가운데 서서 다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런 다음 상의를 벗고 좀 더 생각에 잠겼다. 옷을 반쯤 벗고 있다 보니 심한 한기를 느꼈고, 시간이 너무 늦어 작살잡이가 오늘밤에는 들어오지 않을 것 같다는 여관 주인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하고 바지와 부츠를 벗고 촛불을 끈 다음 침대에 기어 들어갔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나의 안위는 하늘의 뜻에 달린 문제였다.

    매트리스 속을 옥수수 속대로 채웠는지 깨진 그릇으로 채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수없이 몸을 뒤척이며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마침내 설핏 잠들어 꿈의 세계로 들어서려는 순간, 복도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리고 방문 틈 아래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주님, 제발 살려주세요. 저건 분명 작살잡이, 극악무도한 두개골 장사꾼이 틀림없어. 나는 꼼짝하지 않고 드러누워 그가 말을 걸기 전까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낯선 사내가 한 손에는 촛불을, 다른 한 손에는 뉴질랜드 원주민 두개골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침대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촛불을 내게서 멀리 떨어진 한쪽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내가 조금 전에 말한 커다란 자루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이 정말 보고 싶었지만 그는 자루 끈을 푸느라 등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 끝나자 얼굴을 돌렸는데 세상에, 내가 대체 무엇을 본 건지! 그 얼굴이란! 그의 얼굴은 거무튀튀하고 불그레한 데다가 누렇기까지 했다. 얼굴 여기저기에는 크고 거무스름한 네모 딱지 같은 것이 잔뜩 붙어 있었다.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한 그대로였다. 그는 한 침대를 쓰기에는 너무 끔찍한 작자다. 어디서 싸우다가 크게 다쳐서 병원에 다녀오는 길인가 보다. 하지만 그가 얼굴을 빛이 드는 쪽으로 돌리는 순간, 양 볼에 붙어 있는 검고 네모난 것이 반창고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그것은 얼룩이었다. 처음에는 도무지 감이 안 잡히다가 곧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식인종에 붙들려 강제로 문신을 새겼다는 어떤 백인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도 고래잡이였다. 이 작살잡이도 먼 곳으로 항해하다가 그와 비슷한 일을 겪은 게 틀림없다고 결론지었다.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저 겉모습에 불과한걸. 피부와 상관없이 사람은 정직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섬뜩한 얼굴색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건 네모난 문신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열대의 햇볕에 심하게 탄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리 태양이 뜨거워도 백인의 얼굴이 저렇게 불그레하고 누리끼리하게 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남태평양에 가본 적이 없으니 어쩌면 그곳의 태양은 피부에 이런 희귀한 영향을 줄지도 모르지. 이런 모든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동안에도 작살잡이는 나의 존재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는 간신히 자루를 열고 뒤적거리더니 도끼 같은 물건과 털 달린 물개 가죽 지갑을 꺼냈다. 그는 이 물건들을 방 한가운데 있는 낡은 사물함에 올려놓은 다음, 흉악하게 생긴 뉴질랜드 원주민의 두개골을 자루 안에 쑤셔 넣었다. 그러고 나서 비버 털가죽으로 만든 새 모자를 벗었다. 그 순간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는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었다. 이마 위에 짧게 꼰 머리털이 작은 사마귀처럼 달린 것이 전부였다. 불그레한 대머리는 마치 백곰팡이가 핀 두개골 같았다. 이 낯선 자가 나와 문 사이를 가로막고 있지만 않았어도 나는 저녁 식사를 황급히 목구멍에 쑤셔 넣은 것보다 더 빠르게 그 방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상황이 위급하여 창문으로 빠져나갈 궁리도 했지만 그 방은 2층 뒤쪽에 있어 추락할 위험이 있었다. 나는 겁쟁이는 아니지만 두개골을 팔러 다니는 이 붉은 악당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지는 두려움의 근원이다. 낯선 자 때문에 심히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한밤중에 내 방에 악마가 들어온 것만큼이나 두려웠다. 사실 그가 너무 무서워서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만족스러운 대답을 요구하기는커녕 말조차 붙일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 옷을 벗었고, 마침내 그의 가슴과 양팔이 드러났다. 옷에 가려져 있던 이 부위들도 얼굴과 마찬가지로 네모난 문신이 얼룩덜룩 그려져 있었고 등에도 문신들이 가득했다. 그는 30년전쟁¹⁰에 참전했다가 옷 대신에 온몸에 반창고를 붙이고 탈영한 병사 같았다. 심지어 두 다리도 짙은 초록색의 청개구리 떼가 어린 야자나무의 줄기를 타고 뛰어오르는 것처럼 네모난 문신으로 얼룩덜룩했다. 그가 남태평양에서 포경선을 타고 이 기독교 국가에 상륙한 끔찍한 야만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런 생각을 하니 몸이 덜덜 떨렸다. 이자는 두개골도 팔지 않던가? 어쩌면 자기 동족의 머리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머리도 노릴지 모른다. 원 세상에, 저 도끼 생김새하고는!

    101618~1648년 독일을 무대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간에 벌어진 종교전쟁.

    하지만 떨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이제 저 야만인이 하는 짓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고, 그가 이교도인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의자에 걸쳐놓은 묵직한 외투로 다가가 주머니를 뒤지더니 등이 굽고 기괴하게 생긴 작은 우상을 하나 꺼냈다. 태어난 지 정확히 사흘 된 콩고의 갓난아기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문득 향유 바른 두개골이 떠오르면서 처음에는 검은 우상이 그런 식으로 보존 처리된 진짜 갓난아기가 아닐까 생각할 뻔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전혀 유연하지 않고 광택을 낸 흑단처럼 번들거리는 것으로 보아 나무 우상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그건 나무 우상이었다. 이제 야만인은 비어 있는 벽난로로 가서 종이를 바른 덮개를 치우고 등이 굽은 우상을 벽난로 안의 장작 받침쇠 사이에 볼링 핀처럼 세웠다. 굴뚝 기둥과 벽난로 안쪽의 벽돌은 전부 그을음투성이어서 벽난로가 그의 콩고 우상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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