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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로마사 1: 1000년 로마의 시작
리비우스 로마사 1: 1000년 로마의 시작
리비우스 로마사 1: 1000년 로마의 시작
Ebook612 pages7 hours

리비우스 로마사 1: 1000년 로마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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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로마사가 살아있는 것은 리비우스 덕분이다!”

예일대, 세인트 존스대 필독서
마키아벨 리가 가장 사랑한 책

“고대의 가장 웅변적인 저술가”라는 극찬을 받는 사람이 있다. 바로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이다. 『리비우스 로마사』의 문체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문학평론가이자 수사학자인 퀸틸리아누스(Marcus Fabius Quintilianus)는 『리비우스 로마사』의 문체를 가리켜 “크림 빛이 도는 풍요로움”이라고 평했고, “이야기는 너무나 매혹적이고, 또 그 문장이 평담하면서도 유원하다”고 극찬했다.

『리비우스 로마사』는 2000년간 가장 정통한 로마 이야기로 인정받는 책이다. 이 책은 142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집필되었으나 2000년 동안 상당 부분 유실되어, 현재는 가장 재미있고 유익하다고 인정받는 1-10권과 21-45권, 총 35권이 전해지고 있다.
이번에 출간한 『리비우스 로마사 Ⅰ』은 원서 1-5권을 담았다. 1권은 아이네아스(Aeneas)가 이탈리아에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가 로마를 건국하고, 브루투스(Brutus)와 콜라티누스(Collatinus)가 집정관으로 선출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2-5권은 로마에 공화정이 들어서는 모습과 갈리아인이 로마를 약탈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책에서 리비우스는 화려한 문장으로 장엄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고, 긴박한 상황에서는 문장을 짧게 해 긴박감을 더한다. 전투를 묘사할 때는 극적인 어휘를 사용하여 사실감을 주었다. 이러한 문장과 어휘의 특성으로 『리비우스 로마사』는 사실이 나열된 딱딱한 역사서를 읽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 『로마제국쇠망사』(편역), 『로마사론』, 『고대 로마사』 등 다수의 로마사 관련 도서를 번역하여 로마사에 대한 깊은 관심과 해박한 지식을 입증한 전문 번역가 이종인의 섬세한 번역과 상세한 해설을 덧붙여 한층 정확하고, 즐겁게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이자 역사학회 회장인 김덕수 교수의 추천사 및 간략한 해설을 덧붙여 이해를 도왔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현대지성
Release dateMar 2, 2018
ISBN9791187142362
리비우스 로마사 1: 1000년 로마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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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비우스 로마사 1 - 티투스 리비우스

    서문

    로마의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역사를 집필하는 일은 내게 약간의 불안감을 안겨준다. 내가 이 작업의 가치를 확신한다고 해도, 그런 자신감을 드러내놓고 말하기가 망설여진다. 역사가들이 거창한 주장을 펴는 일이 과거에도 그렇지만 지금도 아주 흔하다는 것을 의식하는 까닭이다. 역사를 집필하는 모든 사람은 그의 덜 세련된 선배 역사가들을 내려다보면서 서술의 스타일에 있어서나 새로운 사실들을 밝히는데 있어서 그들보다 한결 자신이 뛰어나다고 자신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고는 하나,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에 기여하게 된 것에 만족감을 느끼며 또 내 기여가 그리 무식한 것이 아니기를 희망한다.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이 이 주제에 대하여 글을 써 왔는바, 나 자신은 그들 사이에서 무명인사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내게서 명성을 앗아가는 경쟁자들의 위대함과 찬란함을 부러워하면 그것으로 자기 위안을 삼으려 한다.

    더욱이 내가 하려는 일은 엄청나게 힘든 일이다. 나는 7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우리나라의 초라한 시작으로부터 오늘날의 창대한 결과 ― 너무나 다기 다양하여 제대로 다루기가 거의 불가능한 결과 ― 에 이르기까지 내 이야기를 기술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또 로마의 시작과 초창기 역사를 다룬 내 이야기에 사람들이 별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들은 한시바삐 좀 더 최근의 시대로 달려가서 제국 시민들의 힘이 제국의 멸망을 촉진하기 시작한 오늘날의 시대 ― 그 자체로 이미 오래된 시대 ― 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느낀다. 나는 고대 시대가 보람을 안겨주는 연구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고대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에는, 오늘날의 세계를 오랫동안 괴롭혀 온 여러 난제들로부터 잠시 시선을 돌릴 수 있고, 또 현대 생활을 다루는 작가에게 엄습하는 불안감 ― 물론 이런 불안감으로 인해 역사가가 진실을 은폐하는 일은 없다 ― 을 느끼지 않으면서 글을 써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가 탄생하거나 구상되기 이전에 벌어진 사건들은 탄탄한 역사적 기록이라기보다 시적(詩的) 매력을 풍기는 이야기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런 전승들을 나는 시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않는다. 고대 시대의 사람들이 인간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우리가 대놓고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국가의 창건자가 신들의 후예라고 주장할 만한 국가가 있다면 우리 로마가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로마인들이 여러 전쟁에서 승리하여 얻은 영광은 너무나 크고 찬란하기 때문에 마르스가 로마의 첫 번째 부모요 국가 창건자의 아버지라고 주장해도, 온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로마 제국의 통치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런 주장도 즉각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비교적 사소한 일들이고 그래서 나는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독자들이 우리의 조상이 어떤 종류의 삶을 살았고,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으며, 로마의 권력이 처음 획득되어 그 후 계속 확장되어나가는 과정에서 어떤 정치와 전쟁의 수단을 사용했는지 등을 좀 더 진지하게 고려해 보기를 촉구한다. 그런 다음 우리나라의 도덕적 쇠퇴의 과정을 살펴보기를 권한다. 먼저 오래된 가르침이 무시되면서 도덕적 기반이 붕괴한 과정,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진 신속한 해체 과정, 이어 도덕적 세계관의 전면적 붕괴 과정을 살펴보기 바란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의 음울한 시대가 어둡고 울적한 모습으로 등장했는데, 이제 우리는 우리의 악덕을 견디지도 못하고 또 그 악덕을 치료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해낼 용기도 없다. 역사의 연구는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약이다. 왜냐하면 역사서는 모든 사람이 뚜렷이 볼 수 있는 무한히 다양한 인간 경험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런 기록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나라를 위한 모범적 사례와 경고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좋은 일들은 모범으로 삼고, 철저히 부패한 지저분한 일들은 타산지석으로 삼아 피해야 할 것이다.

    나는 로마의 과거에 대한 나의 열정이 내 판단력을 흐려놓지 않았기를 희망한다. 우리나라보다 더 위대하거나 순수한 나라는 없다고 생각하며 또 훌륭한 시민들과 고상한 업적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를 따라올 나라는 없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처럼 여러 세대 동안 탐욕과 사치의 악덕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는 없었다. 그 어느 곳에서도 검소하고 순박한 생활을 그처럼 높이 여긴 나라가 없었다. 우리 로마인은 가난을 만족스럽게 여기며 살았다. 근년에 들어와 부( 富)는 우리를 탐욕스럽게 만들었고, 자만심은 각종 형태의 격정으로 분출하여개인이나 집단을 살육하는 행위를 선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쓴 소리는 설사 그렇게 말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호의를 얻을 것 같지 않다. 그러니 위대한 로마의 초창기를 다루는 이 시점에서 그런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말기로 하자. 그래서 나는 시인들의 방식을 취해와 좋은 조짐에 대한 얘기로 시작하고 또 내 앞에 놓인 이 어려운 일이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도록 하늘의 모든 신들에게 기도를 올린다.

    1. 트로이 함락 이후에 그리스인들은 아이네아스와 안테노르를 제외한 모든 트로이 인들에 대하여 계속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고 널리 믿어진다. 이 두 남자는 트로이의 평화와 헬레네의 반환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노력해 왔고 그런 이유로 그리스와 오랜 인간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그들은 괴롭힘을 받지 않고 트로이를 떠나는 것이 허락되었다. 두 남자는 각자 다양한 모험을 겪었다. 안테노르는 파플라고니아에서 쫓겨난 에네티 족과 힘을 합쳤다. 이 부족은 트로이에서 그들의 왕 필라이메네스를 잃었으므로 그들을 통솔하여 어디론가 데려가서 정착시켜줄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들은 아드리아 해의 수원(水源)으로 진출하여 알프스와 아드리아 해 중간 지역에 살고 있던 에우가네이 족을 쫓아냈고, 그리하여 그 지역은 트로이 인들과 에네티 족들의 혼합 인구가 점령하게 되었다. 그들이 상륙한 땅은 트로이라고 했고 그 인근 고장은 트로이 지역이라고 불렀다. 그 두 부족을 합친 주민들을 가리켜 베네티(베니스) 족이라고 했다.

    유랑에 내몰린 아이네아스도 유사한 어려움들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훨씬 더 장대한 미래의 초석을 놓을 운명을 타고 났다. 그는 먼저 마케도니아로 갔고 이어 새로운 정착지를 찾기 위해 시칠리아로 갔으며 시칠리아에서 라우렌툼 지역으로 건너갔다. 이탈리아의 이 지역은 안테노르가 상륙한 지역과 마찬가지로 트로이로 알려졌다. 끝날 것 같지 않은 방랑길에서 아이네아스와 그 부하들은 배와 칼을 제외하고는 모든 소유물을 잃었다. 일단 해변에 상륙하자 그들은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그 고장을 정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정찰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데, 무장한 원주민들이 그들의 왕 라티누스의 통솔 아래 그들을 공격해 왔다. 그 군대는 침략자들로부터 그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도시와 인근 산간 지방에서 급히 동원한 병력이었다. 그 다음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설명이 있다.

    첫째, 즉각 싸움이 벌어져서 라티누스는 패배했다. 그러자 라티누스는 아이네아스와 타협을 했고 현지의 왕은 아이네아스에게 그의 딸을 주어 동맹을 강화했다.

    둘째, 트럼펫 소리가 돌격 신호를 보내면서 전투가 막 시작되려는 찰나, 라티누스가 부장들과 함께 앞으로 나서서 해외에서 온 지도자들을 협상 장으로 인도했다.

    라티누스는 이어 아이네아스에게 그의 부하들은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왜 고향을 떠났으며, 라우렌툼 지역에 상륙한 목적이 무엇인가 등을 물었다. 라티누스 왕은 그들이 트로이 사람이고 그 지도자는 안키세스와 베누스의 아들인 아이네아스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들의 고향 도시는 불타서 무너졌고 이제 그들은 도망자 신세가 되어 새로운 도읍을 건설할 수 있는 지역을 찾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이 얘기를 들은 라티누스는 외국인들의 고상한 행동과 평화든 전쟁이든 두려워하지 않는 그 지도자의 높은 용기에 크게 감동되어, 아이네아스에게 그 때 이후 우정의 약속을 했다.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두 군대는 상호 존중의 의사를 교환했다. 아이네아스는 그에게 딸을 내준 라티누스의 환대를 받아들였고, 이렇게 하여 라티누스는 가정의 수호신들이 보는 앞에서 공적인 동맹 조약을 사적인 유대관계로 더욱 강화시켰다.

    트로이 인들은 마침내 그들의 방랑이 끝났고 이제 영원한 집을 건설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정착촌을 건설했고 아이네아스는 아내 라비니아의 이름을 따서 그 마을을 라비니움이라고 명명했다. 부부 사이에 곧 아들이 태어났는데 아스카니우스라고 이름 지었다.

    2. 트로이 인들과 라틴 인들은 곧 공동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아이네아스의 도착 전에 라티누스의 딸 라비니아를 아내로 받아들이기로 했던 루툴리 족의 통치자인 투르누스는 외국인에게 밀려난 모욕에 분노하면서 아이네아스와 라티누스의 연합군을 공격했다. 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양측은 피해를 보았다. 루툴리 족은 격퇴되었지만, 승자들도 지도자인 라티누스를 잃었다. 투르누스와 그 부하들은 미래가 걱정되어 메젠티우스의 도움을 요청하려 했다. 메젠티우스는 부유하고 강성한 에트루리아 족의 왕이었는데 왕도(王都)는 그 당시 부유한 도읍인 카이레에 있었다. 메젠티우스는 별 설득을 받지 않아도 루툴리 족과 합세할 생각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새로운 정착촌의 건설을 불쾌하게 여겼고 이제 트로이 인들의 힘이 급속히 강해져서 인근 주민들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느꼈다. 이런 위험한 상황을 맞이하여 아이네아스는 휘하의 트로이 인들에게 그 지방 원주민 이름인 라틴 인의 명칭을 부여했다. 공통의 정체(政體)에다 공통의 부족 명을 사용하면 두 부족 사이의 유대가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느꼈다. 이러한 조치의 결과로 원주민인 라틴 인들도 트로이 인들 못지않게 아이네아스 왕에게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 트로이 인과 라틴 인은 급속히 하나의 부족이 되어갔고 아이네아스는 여기에서 자신감을 얻어서 강성한 적 에트루리아를 상대로 적극적인 공략에 나서게 되었다. 이 무렵 에트루리아는 알프스 산과 시칠리아 해협에 이르는 이탈리아 전역의 육상과 해상에서 그 명성을 크게 떨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이네아스는 수세를 취하기를 거부하고 적과 맞상대하기 위해 행군에 나섰다. 라틴 인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아이네아스로서는 그 전투가 이승에서의 마지막 전투가 되었다. 그는 누니쿠스 강의 강둑에 매장되었다. 그는 인간인가 혹은 신이었는가? 어느 쪽이 되었든 사람들은 그를 그 고장의 유피테르라고 불렀다.

    3. 아이네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는 너무 어려서 왕좌에 곧바로 오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라비니아는 강인한 성품의 여인이었고 아스카니우스가 성년이 되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후계자로서 친정(親政)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섭정 역할을 했다. 아스카니우스가 정확히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남아 있다. 그처럼 깊숙이 시간의 안개 속에 감추어진 문제를 확실하게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는 내가 앞에서 얘기한 바로 그 사람인가, 아니면 크레우사의 아들로서 트로이 함락 이전에 태어나서 불타는 도시로부터 아이네아스와 함께 빠져나온 손위 아들 이울루스 ― 추후의 율리우스 황가는 자신들이 이 아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데 ― 를 말하는가? 아무튼 그가 아이네아스의 아들이라는 것은 확실하고 또 이울루스였든 아니었든, 그가 새로운 정착촌을 건설하기 위하여 라비니움을 떠났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라비니움은 그 무렵 인구가 많았고, 그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부유하고 번성하는 도읍이었다.

    아스카니우스는 그 도읍의 통치를 어머니 ― 혹은 경우에 따라서 계모 ― 에게 맡기고 알바 언덕들에 새로운 정착촌을 건설하러 갔다. 산등성이를 따라 완만하게 펼쳐진 이 도시는 알바 롱가(Alba Longa)로 명명되었다. 이 도시는 라비니움이 건설된 지 30년 후에 세워졌다. 그러나 라틴 인은 이미 강성해졌고 특히 에트루리아를 패배시킨 이후에는 더욱 단단해졌다. 그리하여 에트루리아의 왕 메젠티우스나 다른 이웃 부족들이 감히 공격해 오지 못했다. 이것은 아이네아스가 사망하고 권력이 임시로 여인의 손에 넘어가고 아스카니우스가 왕권의 기본적 요소들을 배우는 어린아이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라틴 인과 에트루리아 인 사이의 조약 조건에 의하여, 알불라 강(지금의 티베르 강)은 두 지역 사이의 경계선이 되었다.

    아스카니우스에 뒤이어 실비우스(숲에서 태어난 자)가 왕위에 올랐고 그 다음은 그의 아들 아이네아스 실비우스, 그리고 그 후계자인 라티니우스 실비우스 순으로 왕위에 올랐다. 라티니우스 실비우스는 새로운 정착촌을 여러 개 건설했고 올드 라틴스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그 후 알바의 모든 왕들은 실비우스라는 가명(家名)을 유지했다. 라티니우스 실비우스 다음에는 알바, 그 다음엔 아티스, 이어 카피스, 이어 카페투스, 그리고 티베르누스가 왕위에 올랐다. 티베르누스는 알불라 강을 건너다가 익사했는데 그 때 이후 이 강에는 티베르라는 이름이 붙었다. 티베르누스 다음에는 아그리파, 그 다음에는 그의 아들 로물루스 실비우스가 왕위에 올랐는데 로물루스는 벼락에 맞아 죽었고 권력을 아벤티누스에게 물려주었다. 아벤티누스는 현재 로마 시의 일부인 언덕에 매장되었는데 그 언덕은 이 왕의 이름을 따라 아직도 아벤티누스라고 한다.

    그 다음 왕인 프로카는 누미토르와 아물리우스라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누미토르에게 실비우스 왕가의 세습 영지를 남겨주었다. 적어도 그렇게 하려는 것이 선왕의 의도였는데 적장자 우대가 무시되었고 아버지의 의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그의 동생 아물리우스가 형을 몰아내고 보위를 찬탈했던 것이다. 하나의 폭력적 행동은 또다른 폭력으로 이어졌다. 아물리우스는 형의 두 아들을 죽여 버렸고 조카 딸 레아 실비아는 명예를 안겨준다는 허울 좋은 구실을 붙여서 베스타 신전의 여제관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속셈은 그녀를 영원히 처녀로 남게 하여 후사(後嗣:상속자)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려는 것이었다.

    4. 우리의 위대한 도시가 생겨나 신의 제국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강성한 제국이 세워지는 첫 번째 조치가 취해지게 되리라는 것이 이미 운명의 책에 씌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베스타 신전의 여제관은 강간을 당해서 두 아들(쌍둥이)을 낳았던 것이다. 그녀는 군신(軍神) 마르스가 아이들 아버지라고 선언했다. 그녀는 그 말을 정말로 믿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의 죄의식을 위무하기 위해 그런 척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진상이 무엇이든 간에 신들과 사람들은 그녀 혹은 그녀의 아기들을 왕의 잔인한 손으로부터 구제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투옥되었다. 두 아들은 강에 내던져 익사시키라는 왕명이 떨어졌다. 그러나 운명이 개입했다. 마침 티베르 강은 홍수가 져서 강둑으로 범람했다. 강둑이 그처럼 물에 잠기는 바람에 강변까지 진출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왕명을 수행하도록 지시받은 자들은 강둑을 넘은 물이 비록 완만하게 흐르기는 하지만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임시변통으로 갓난아기들을 처음 밀려온 강물에 내려놓는 것으로써 왕명을 수행하려 했다. 그 장소는 현재 루미날 무화과나무 ― 그 후 로물루스의 무화과나무로 알려짐 ― 가 있는 곳이었다.

    그 당시 그 일대는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였는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갓난아기들을 넣은 바구니는 빠져나가는 썰물에 의해서 물에 젖지 않은 마른 땅으로 밀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 인근 언덕에 사는 암 늑대가 강에 목을 축이러 왔다가 아이들이 우는 소리를 듣고서 바구니 있는 곳까지 왔다. 암 늑대는 두 아이에게 자신의 젖을 물려 빨게 했고 또 아이들을 부드럽게 얼렀다. 왕의 목축업자인 파우스툴루스는 혓바닥으로 두 아이를 핥아주는 암 늑대를 발견했다. 파우스툴루스는 아이들을 그의 오두막으로 데려가 아내 라우렌티아에게 건네주어 양육하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이야기의 근원을 다음의 사실에서 찾고 있다. 즉 라우렌티아는 평범한 창녀였는데 당시에 목동들에 의해 늑대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쌍둥이가 탄생하여 성장한 배경이다. 두 아이가 자라서 소년이 되자 농장에 나가서 열심히 일을 하고 가축을 돌보았으며 숲속에 사냥을 나가기 시작했다. 신체의 완력이 세어지자 결단력도 따라서 강해졌고 그리하여 사냥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비적들을 공격하여 훔쳐온 물건들을 빼앗아서 목동 친구들과 나누어 가지기도 했다. 다른 젊은이들도 쌍둥이에게 합류했고 그들과 목동들은 때로는 진담으로 때로는 농담으로 함께 시간을 보냈다.

    5. 그 오래 전의 시대에도 팔라티움 언덕 ― 그 이름은 그리스인 정착지인 팔란테움에서 왔다 ― 에는 루페르칼리아의 즐거운 축제가 열렸다고 한다. 여러 해 전에 그 지역을 장악한 그리스인 에반드루스는 리카오니아의 목신 판 ― 로마인들은 이 신을 이누우스라고 불렀다 ― 을 기리는 연례 축제를 거행하는 고대 그리스의 풍습을 그대로 실천해 왔다. 이 봄철의 축제에서 젊은이들은 나체로 질주하면서 여러 가지 장난과 우행을 저지르며 즐겼다. 축제의 날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 있었고, 축제가 한창 무르익던 시점에 장물(臟物)을 빼앗겨서 화가 난 몇몇 비적들이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잡기 위해 덫을 놓았다. 로물루스는 그 덫을 잘 피했으나 레무스는 잡혀서 아물리우스 왕에게 건네지면서 심지어 왕에게도 불평을 털어놓았다. 주된 혐의는 레무스와 로물루스가 악당들을 조직하여 누미토르의 땅을 습격하여 소를 훔쳐가는 버릇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레무스는 누미토르에게 건네져 벌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파우스툴루스는 그동안 내내 그가 키우는 두 소년이 왕가의 자식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왔다. 그는 두 아이가 왕명에 의해 내버려졌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가 강변에서 아이들을 발견한 시점은 왕명이 떨어진 시점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러나 그 때까지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밝히기를 꺼렸고 적절한 상황이나 기회가 나타나 행동에 옮겨야 할 때까지 기다렸다. 이제 진실을 더 이상 은폐할 수가 없었고 그는 가만히 있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로물루스에게 관련된 이야기를 다 해주었다. 레무스를 억류하고 있던 누미토르도 두 소년이 쌍둥이라는 얘기를 듣고 자신의 손자가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두 젊은이의 나이와 일반 보통사람들과는 너무나 다른 성격은 그의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리하여 사실을 조사해 본 결과 동일한 결론에 이르러 레무스를 손자로 인정해줄 마음을 먹게 되었다. 로물루스를 잡으려는 포획망이 점점 좁혀오자 로물루스는 행동에 나섰다. 로물루스는 노골적으로 왕과 대적할 정도로 강하지는 못해서 꾀를 냈다. 우선 다수의 목동들에게 서로 다른 길을 통하여 정해진 시간에 왕의 집 앞에서 만나자고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또다른 행동대를 이끌고 앞장서서 달려온 레무스의 도움을 받아가며 왕을 급습하여 살해했다.

    6. 첫 번째 공격이 가해지기 전에 누미토르는 적이 도읍을 쳐들어와 왕궁을 공격했다고 알렸다. 이어 그는 징집 적령기의 장병들을 모두 동원하여 도읍 내부의 성벽을 지키게 했다. 그는 임무를 완수하고 축하하기 위해 그에게 다가오는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보는 즉시 주민들의 회의를 소집하여 관련 사실들을 모두 밝혔다. 아물리우스가 형인 그에게 저지른 죄, 두 손자의 탄생, 그 탄생의 비화, 두 손자가 성장하여 마침내 신분을 밝히게 된 과정, 마지막으로 그 자신이 주도하여 벌어진 왕의 살해 등을 소상히 밝혔다. 두 형제는 그들의 행동대원들 앞에 서서 군중들 사이로 행진하면서 할아버지를 왕으로 선언했다. 그리하여 만장일치를 표시하는 함성으로써 그의 왕권이 확정되었다.

    위에서 방금 서술한 대로 알바의 왕권이 누미토르에게 건네진 후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그들이 갓난아기 시절 내버려졌고 또 성장했던 그 지점에다 새로운 정착촌을 건설해야겠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사실 알바는 알바 인들, 라틴 인들 그리고 목동들의 추가 유입으로 인해 인구가 넘쳐나고 있었다. 이런 지속적인 인구 유입으로 인해 알바와 라비니움은 언젠가 새로 건설되는 정착촌에 비해 작은 마을이 되리라고 예상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두 형제의 장래 계획은 그들이 할아버지 누미토르와 아물리우스를 갈라놓았던 바로 그것, 즉 질투와 야심 때문에 금이 가게 되었다. 그 자체로는 사소한 일 때문에 두 형제 사이에 불명예스러운 싸움이 벌어졌다. 두 형제는 쌍둥이였으므로 적장자의 문제를 가릴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 고장의 수호신에게 일단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면 누가 그 도시를 다스리고 또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조짐을 내려달라고 요청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로물루스는 팔라티움 언덕으로, 레무스는 아벤티누스 언덕으로 각자 가서 하늘의 조짐을 관찰하기로 했다.

    7.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레무스가 먼저 표징을 받았다고 한다. 여섯 마리의 독수리가 하늘을 날아갔다. 이 사실이 주민들에게 알려지자마자, 로물루스에게 그보다 두 배나 더 많은 독수리가 나타났다. 각 진영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주인을 왕으로 선포했는데, 레무스는 조짐이 먼저 나타났다는 점을, 로물루스는 숫자가 두 배나 많다는 점을 내세웠다. 분노의 고성이 양측 사이에서 오갔고 곧 싸움이 벌어졌으며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 레무스가 살해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널리 알려진 또다른 전승이 있다. 이 이야기에 의하면, 레무스는 로물루스를 비웃으면서 새로운 정착촌의 절반쯤 지어진 성벽을 뛰어넘어 왔고 그러자 로물루스가 격분하여 그를 죽이고서 이런 경고의 말을 했다. 감히 나의 성벽을 뛰어넘으려 하는 자는 그 누구든 이렇게 될 것이다.

    이것이 로물루스가 단독 왕권을 갖게 된 경위이다. 새로 지어진 도시는 창건자의 이름을 따서 로마라고 명명되었다.

    로물루스의 첫 번째 조치는 그 자신이 소년 시절을 보낸 땅인 팔라티움 언덕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알바의 의식을 따라서 신들에게 희생을 바쳤으나 헤라클레스의 경우에는 에반드루스가 제정한 그리스 식 제의를 따랐다. 오래된 이야기에 따르면,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을 죽인 후에 황소 떼를 몰고 이 지역으로 들어왔다. 아주 아름다운 황소 떼를 앞세우고 티베르 강을 건넌 후 그는 풀이 잘 자란 초원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피곤한 다리를 쉬게 할 겸 드러누워 휴식을 취했고, 소들은 푸른 목초지에서 마음껏 풀을 뜯도록 내버려두었다. 음식과 술을 들어 나른해진 그는 잠이 들었다. 그동안 그 지역의 목동이며 카쿠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나운 거인이 소 떼를 보고서 그 아름다운 소들에 반해버렸다. 소들을 훔칠 생각을 한 그는 만약 소들을 정상적인 방식으로 동굴 속으로 데려가면, 추적에 나선 주인이 그 발자국을 보고서 동굴을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소 떼 중에 가장 아름다운 놈들만 골라서 그 꼬리를 잡고서 거꾸로 끌어당겨서 동굴 속에다 감추었다. 헤라클레스는 새벽에 잠깨어 소 떼를 둘러보다가 몇 마리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는 동굴로 들어간 흔적을 발견하고 가장 가까운 동굴로 가보았으나 그 발자국이 모두 바깥쪽으로 향하다가 어느 한 곳에서 사라져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아주 기이했다. 그래서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힌 채 그는 나머지 소 떼를 끌고서 그 괴상한 곳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몇몇 소들은 동무들이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하며 울었고 그러자 동굴 내부에서 거기에 응답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헤라클레스는 몸을 돌려서 동굴 쪽으로 걸어갔다. 카쿠스는 다가오는 헤라클레스를 보자 힘으로 물리치려 했으나 헛수고였다. 헤라클레스는 몽둥이로 그를 내리쳤고 도둑은 헛되이 친구들의 도움을 요청하면서 죽어갔다.

    그 당시 에반드루스는 그 지역의 그 고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펠로폰네소스에서 유배온 사람인데 그의 지위는 왕권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영향력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는 문자를 발명하여 널리 존경을 받았다. 그와 함께 살았던 투박하고 무식한 주민들은 그 문자를 이상하면서도 경이로운 것으로 여겼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 카르멘타도 그의 지위를 공고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고 이탈리아에 시빌이라는 여자 예언자가 오기 전에는 그 지역의 주민들로부터 여자 예언자로 존경받았다.

    내가 방금 서술한 사건이 벌어진 때에, 에반드루스는 미지의 살인자를 둘러싸고서 웅성거리는 목동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는 그 범죄와 원인을 보고받은 후 목동들 사이에 합류하여 그 낯선 자를 응시했다. 그가 인간보다 더 덩치가 크고 또 초자연적 위엄의 몸짓을 하는 것을 보고서 에반드루스는 그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그의 이름과 부모 그리고 나라에 대해서 듣자, 에반드루스는 말했다. 유피테르의 아들 헤라클레스여, 나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당신은 우리 어머니가 늘 예언하던 바로 그분이십니다. 진정한 예언자인 어머니는 당신이 하늘로 올라가 신들의 무리에 합류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따라서 이곳에 당신에게 바치는 제단이 지어질 것이고 또 온 세상에서 최강국이 될 운명인 국가가 그 제단을 가장 위대한 제단이라고 명명하고 당신에게 걸맞은 의례를 거행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헤라클레스는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며 그 멋진 말들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면서 그 자신이 직접 제단을 지어 축성함으로써 운명의 손길을 돕겠노라고 대답했다. 소 떼 중에서 아주 아름다운 놈이 희생 제물로 선택되었고 새로운 제단에서 그 희생 제물이 헤라클레스에게 봉헌되었다. 그 의식과 그 후에 벌어지는 축연은 그 고장의 가장 유명한 가문인 폰티티우스와 피나리우스 가문의 사람들이 집행하기로 되었다.

    그런데 피나리우스 가문 사람들은 축연에 늦게 왔다. 반면에 폰티티우스 가문 사람들은 시간 맞춰서 왔고 그 결과 희생 제물의 내장을 접대 받았다. 늦게 온 피나리우스 가문 사람들은 그 나머지를 먹어야 했다. 이 일로 하나의 관습이 확립되었다. 피나리우스 가문 사람들은 그 가문이 존속하는 내내, 헤라클레스 희생 제물 중 그들 몫인 내장을 먹을 수가 없었다. 폰티티우스 가문은 에반드루스로부터 제사 절차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고 그 후 여러 세대에 걸쳐서 이 제사의 제물을 제관들에게 공급했다. 그들은 이 엄숙한 의무를 오랫동안 수행해왔으나 이 가문이 소멸하면서 그 의무는 공공 노예에게로 넘어갔다. 이것은 로물루스가 채택한 유일한 외국의 종교 의식이었다. 그는 그렇게 채택함으로써 그런 아주 오래된 시절에도 용기의 보상은 불멸이라는 것을 널리 알리려 했다. 로물루스 자신의 운명도 이미 그가 그런 보상을 받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8. 적절한 예식을 갖추어 종교적 의무를 수행했으므로 로물루스는 신하들을 소환하여 법률을 공지했다. 법률의 제정 없이는 통일된 정체를 만들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볼 때 그가 다스려야 하는 대중은 그 자신이 가시적인 권력의 표징을 채택할 때에만 그 법률을 준수하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왕위의 위엄과 장엄을 증가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행차할 때 그를 둘러싸는 12명의 릭토르(lictor: 집정관에게 예속된 시종관. 길나장이)를 선정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릭토르를 12명으로 한 것은 신탁으로 하늘에 나타난 12마리의 독수리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 제도가 에트루리아에서 온 것이라는 해석을 따르고자 한다. 우리는 고관용 특별 의자(curule chair)와 보라색 옷단으로 장식된 토가가 에트루리아에서 유래한 것임을 안다. 12라는 숫자는 에트루리아의 12개 공동체를 의미하는데, 이 공동체들이 단합하여 왕을 뽑았고 또 각 공동체는 각각 한 명의 릭토르를 보냈던 것이다.

    한편 로마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점점 더 많은 땅이 로마의 성벽 내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성벽으로 둘러싼 지역이 그처럼 급속히 팽창하는 것은 실제 인구에 비례해 볼 때 좀 과도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것은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대에 새로운 정착촌의 창건자는 그 인구를 늘리기 위해 많은 집 없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외부에서 끌어와서는 그들이 마치 그 땅에 태어난 것처럼 꾸몄다. 로물루스도 이와 유사한 과정을 따라갔다. 새로 조성한 광대한 도읍을 주민들로 채우기 위해 그는 카피톨리움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두 숲 사이의 공터 ― 이제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 를 도망자들의 은신처로 지정했다. 이곳으로 인근 부족들의 잡다한 사람들이 피신처를 얻기 위해 몰려들었다. 어떤 자는 자유인이었고 어떤 자는 노예였으나 하나 같이 새로운 출발을 바라고 있었다. 이렇게 몰려든 대중이 도시의 힘을 강화시킨 첫 번째 인구 유입이었고, 도시가 장차 위대한 국가로 성장하는 첫걸음이 되었다.

    이제 적절한 주민의 숫자를 확보했으므로 로물루스는 권력을 정책으로 억제하는 일에 착수하여 사회 조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1백 명의 원로원 의원을 임명했다. 그 정도 숫자의 의원이 그의 목적에 부합했거나 아니면 씨족의 족장이라고 불리는 아버지들(patres)이 그 정도 숫자밖에 안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그들의 지위에서 나온 것이고 그들의 후손은 귀족들(patricians)이라고 불렸다.

    로마는 이제 강성해져 주위 부족들 중 그 누구에게도 도전을 걸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가 아무리 강성하다고 하더라도 그 위대함은 겨우 한 세대 정도 버틸 수 있는데 불과했다. 우선 아이들을 낳아줄 여자들의 숫자가 충분하지 못했다. 이웃 공동체들과 통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의 인구 수준도 유지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그래서 로물루스는 원로원 의원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도시의 경계 너머에 있는 다양한 부족들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새로 세워진 국가를 위해 동맹을 결성하고 통혼의 권리를 부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사절들에게 도시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초라하게 시작하는 것임을 이웃 부족들에게 일러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도시의 노력과 하늘의 은혜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도시는 점점 부강해지고 유명해지는데 로마 또한 그런 도시들 중 하나라는 것을 역설하라고 지시했다. 신들은 로마의 탄생을 축복했고 또 로마 시민들의 용기는 장차 빛을 발휘하게 될 것이었다. 로마인들도 이웃 부족의 주민들과 똑같은 사람인데 왜 로마인들과 통혼하는 것을 망설이는가?

    9. 로물루스의 그런 접근은 그 어디에서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든 이웃 부족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무시하면서도 동시에 그들 주위에 새로운 국가 권력이 부상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나 후손을 위해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종종 로물루스의 사절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과 함께 일축을 당했다: 당신네들은 도망자와 방랑자를 위하여 피난처를 운영해왔는데, 왜 여자들을 위해서는 그런 제도를 실시하지 않는가? 우리가 보기에 로마인들이 아내를 얻는 방법으로는 그게 적당할 듯하다.

    젊은 로마인들은 당연히 이런 조롱을 괘씸하게 생각했고 무력의 사용이 불가피하게 보였다. 로물루스는 그런 싸움을 미리 내다보고 아주 조심스럽게 적절한 무대를 마련했다. 그는 신중하게도 자신의 분노를 감추고서 말(馬)들의 수호자인 넵투누스를 기념하는 엄숙한 축제인 콘술리아를 거행하기 위해 준비를 하면서, 그 소식을 인근 부족의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 축제를 널리 홍보하기 위하여 로마 시민들은 화려한 축제 준비에 그들의 재산 ― 그 당시 재산이라고 해봐야 별 것은 아니었다 ― 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지정된 날에 사람들이 로마로 쏟아져들어왔는데 상당수가 새로운 도시를 구경하려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해 찾아온 것이었다.

    대부분의 구경꾼들은 인근의 카이니나, 크루스투미움, 안템나이 같은 정착촌에서 왔지만, 모든 사비니 인들 또한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거기로 나왔다. 많은 집들이 방문객들을 환대하면서 접대했다. 그들은 도시의 요새, 시설, 건물 등을 구경하라고 초대받았고 도시의 급속한 성장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이어 멋진 순간이 다가왔다. 화려한 쇼가 시작되었고 사람들의 눈과 귀는 그 쇼에 집중되었다. 그 순간은 로마인들의 기회이기도 했다. 미리 정해진 신호가 주어지자, 건장한 로마인 남자들이 군중들 사이로 뛰어 들어가 젊은 여자들을 붙잡았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먼저 붙잡는 남자가 임자였다. 그러나 소수의 아주 아름다운 여자들은 미리 고위 원로원 의원들 몫으로 점지되었고, 그들은 특별한 무리에 의해 의원들의 집으로 납치되었다. 그런데 다른 여자들보다 월등하게 아름다운 한 여자가 있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미녀는 탈라시우스라는 사람의 집안에서 일하는 한 무리의 종복들에 의해 납치되었다. 종복들은 누구 집으로 그 여자를 데려가느냐는 질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손대는 것을 사전 예방하기 위하여 탈라시우스, 탈라시우스! 하고 외쳐댔다. 이것이 그 후 로마의 결혼식에서 신부 행차 때 사람들이 탈라시우스라고 외치는 풍습의 기원이 되었다.

    이 납치 행위 때문에 흥겨운 축제는 일변하여 공포의 분위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납치된 여자들의 부모는 간신히 도망치면서 축제 주빈의 배신행위를 강력하게 비난했고 또 축제의 주인공인 넵투누스 신에게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그 축제를 기념하려는 좋은 마음으로 참석한 이웃들에게 어떻게 이런 극악한 기만행위를 저지를 수 있느냐고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납치당한 젊은 여자들도 그에 못지않게 분개하면서 그녀들의 앞날을 아주 어둡게 보았다.

    그러나 로물루스는 그들을 안심시켰다. 이 여자 저 여자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그들 부모가 너무 오만하여 이웃 남자들과의 통혼을 거부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으므로 진정한 잘못은 그들 부모 탓이라고 선언했다. 그렇지만 여자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당부했다. 그들은 결혼한 여자로서 로마의 모든 행운과 공동체의 모든 특혜를 공유할 것이고, 부부 사이의 소중한 결실인 아이들로 인해 남편과 아주 단단하게 맺어질 것이라는 말도 했다. 피해 의식이 때로는 사랑의 감정을 낳는 법도 있고 또 우연히 그녀를 납치한 남자에게 애정을 느낄 수도 있는 법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억지로 데려온 만큼 남편들은 아내들을 더욱 자상하게 대할 것이고 또 남편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할 뿐만 아니라 아내들이 졸지에 잃어버린 가정과 부모를 보충해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여자를 납치해온 남자들도 로물루스의 말에 힘을 보탰다. 그들은 달콤한 말을 속삭이면서 이런 납치 행위에 나선 것은 오로지 열정적인 사랑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맹세했다.

    10. 시간이 흘러가면서 납치된 여자들은 분노하는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인 그 순간 여자들의 부모는 아주 심각한 소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람들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하여 상복을 입고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눈물과 탄원으로 그들의 슬픔을 적극 표시했다. 이런 시위 행위를 그들의 고향 마을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떼를 지어 사비니 왕 티투스 타티우스의 집까지 몰려가며 시위를 벌였다. 타티우스는 그 고장에서 가장 강성한 자였으므로 여러 정착촌들에서 공식 사절을 보내어 경의를 표시하기도 했다.

    그 항의 시위에 참여한 카이니나, 크루스투미움, 안템나이 등의 부족들이 볼 때 타티우스와 사비니 인들은 지나치게 꾸물거리는 것 같았고 그래서 이 세 공동체는 먼저 행동에 돌입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셋 중에서 크루스투미움과 안템나이는 너무 행동이 느려서 카이니나의 조급한 분노에 불을 질렀다. 그리하여 카이니나 사람들은 두 공동체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로마를 침공했다. 카이니나의 산발적인 무리들은 소소한 피해를 입히는 동안, 로물루스가 군대를 이끌고 맨 앞에 서서 현장에 나타났다. 몇 번의 타격으로 카이니나를 충분히 제압했고 그들은 패배하여 달아나면서 아무리 분노가 하늘을 찌르더라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공격 병력을 충분히 강화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마인들은 패주하는 적군을 뒤쫓았다. 로물루스는 카이니나의 왕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그의 갑옷을 빼앗았다. 이어 왕이 죽어버린 카이니나의 도읍을 첫 번째 공격에 함락시켰다. 승리를 거둔 로마 군은 도시로 돌아왔고 로물루스는 전리품을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전투에서 아주 용감하고 씩씩했지만, 대중들의 인정과 칭찬을 열렬히 받고 싶어 하는 마음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는 적군의 사령관에게서 빼앗은 갑옷을 가져다가 전시용 나무 틀 위에다 고정시킨 다음 그 틀을 양손에 들고서 카피톨리움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 언덕에서 로물루스는 목동들이 신성한 나무로 여기는 참나무 옆에다 그 나무틀을 내려놓고 유피테르에게 봉헌물로 바쳤다. 동시에 그는 그 장소를 신에게 바치기로 결심하고 이런 기도를 올렸다.

    유피테르 페레트리우스(승전의 신 유피테르. 이것이 그가 부여한 새로운 유피테르의 호칭이었다), 나는 당신에게 왕이 탈취한 왕의 갑옷인 이 전리품을 가져왔습니다. 또한 내가 마음속에서 보아둔 이 땅을 신성한 신의 경내로 당신에게 바칩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다른 사람들도 나의 모범을 따라서 그들이 직접 죽인 사령관이나 왕들에게서 벗겨낸 ‘명예의 전리품’을 당신에게 바칠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에서 신에게 바쳐진 첫 번째 사당의 기원이다. 로물루스가 다른 자들도 전리품을 바칠 것이라고 말하자, 신들은 그 약속이 허황된 것이 되지 않게 하라고 명했다. 또 그런 봉헌이 아무리 많이 바쳐진다고 하더라도 그 영광이 무색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명예의 전리품(opima spolia)을 얻는 사례는 실제로 아주 드물었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무수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딱 두 건이 있었을 뿐이다.

    11. 카피톨리움 언덕에서 이런 행사가 벌어지는 동안 로마인들은 그 제사에 참석하느라고 그들의 농장으로부터 떠나와 있었다. 안템나이 부족의 군대가 그 틈을 이용하여 공격해 왔다. 또다시 로마의 군대는 황급히 적들에게 맞섰다. 흩어진 침략자들의 집단은 기습 공격을 받았다. 단 한 번의 전투로 그들을 격퇴했고 그들의 도읍을 함락시켰으며 로물루스는 이로써 두 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로물루스의 아내 헤르실리아는 축제에서 납치당한 젊은 사비니 여인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해 왔다. 그래서 남편이 전투에서 성공을 거두자 그 기회를 이용하여 여자들의 부모를 사면하여 로마에 와서 살게 하자고 건의했다. 그렇게 되면 강력하고 가치 있는 동맹의 유대관계를 형성하게 될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 요청은 즉각 수락되었다.

    로물루스의 그 다음 움직임은 로마를 향해 진군해 오던 크루스투미움의 군대를 상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웃 공동체들이 이미 패배를 당하는 바람에 그들은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었고 심지어 그래서 좀 더 쉽게 격퇴할 수 있었다. 이후 안템나이와 크루스투미움의 두 공동체에 정착자들이 파견되었는데 특히 후자의 경우는 땅이 비옥하여 많은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반면에 주로 납치된 여자들의 부모나 친척인 사람들이 많이 크루스투미움에서 로마로 이주해 왔다.

    로마를 마지막으로 공격해 온 부족은 사비니 족이었고, 그들과의 싸움은 이전의 싸움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치열했다. 적은 그들의 의도를 알리지 않았고 또 황급한 복수와 탐욕의 충동에 내몰려 행동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사전에 면밀하게 계획을 짰고 또 상대를 속이는 작전을 폈다. 로마 요새의 사령관인 스푸리우스 타르페이우스에게는 젊은 딸이 하나 있었다. 그 딸은 희생제의에 바칠 물을 길어오기 위해 성벽 밖으로 나갔다가 사비니 왕 타이우스의 뇌물을 받고서 왕의 일부 병사를 요새 안으로 들여놓아주기로 했다. 그러나 일단 요새 안으로 들어가자 그 병사들은 그녀를 여러 개의 방패를 눌러 죽여서 마치 요새를 급습한 것 같은 외양을 꾸몄다. 혹은 그런 모진 행동으로 배신자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일깨우려 한 것인지 모른다. 한 전승에 의하면 그 딸은 배반의 대가로 병사들이 방패-팔에 차고 있는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 당시 사비니 병사들은 왼쪽 팔에 묵직한 황금 팔찌와 보석 박힌 반지를 차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약속을 지켰다. 그 딸이 요구했던 것처럼 황금 팔찌를 지불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방패로(방패로 찍어 눌러서) 지불한 것이다. 또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그녀는 그들이 왼쪽 팔에 가지고 있는 것을 흥정하다가 실제로는 그들의 방패를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녀가 그런 술수로 사비니 병사들을 무장해제 시키려 한 배신자로 판명되자 그녀가 요구한 바로 그것(방패)으로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사비니 족은 이제 요새를 점령했다. 그 다음날 로마 군은 팔라티움 언덕과 카피톨리움 언덕 사이의 모든 땅을 점령하고서 기다렸으나 더 이상 그 상황을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요새를 탈환해야겠다고 단단히 결심을 하고서 공격에 나섰다. 그것은 적이 로마 군과 접전하기 위해 아래로 내려오는 신호가 되었다. 첫 번째 접전에서 사비니 족은 메티우스 쿠르티우스가, 로마 군은 호스티우스 호스틸리우스가 사령관을 맡았다. 로마인들은 요새 쪽으로 올라가야 하는 불리한 입장이었으나 호스티우스의 엄청난 용기 덕분에 한동안 위로 올라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쓰러지자 로마 군의 공격은 즉각 붕괴되었고 무질서 속에서 팔라티움의 오래된 문까지 퇴각했다. 로물루스 자신도 퇴각하는 병사들의 물결에 휩쓸려 뒤로 밀려날 뻔했다. 그러나 그는 말을 앞으로 내달리며 칼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흔들면서 소리쳤다.

    제 말을 들어 주소서, 오 유피테르여! 당신이 날려 보낸 독수리들의 조짐을 보고서 나는 이곳 팔라티움 언덕에다 로마의 기반을 놓았습니다. 우리의 요새는 야비한 술책에 넘어가 사비니 인들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손에 칼을 들고서 계곡을 가로질러 우리에게 달려오고 있습니다.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시여, 저들이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소서. 로마인들의 가슴에서 공포를 없애주시고 그들의 수치스러운 후퇴를 멈추어 주소서. 오 유피테르여, 도망을 멈추게 하는 분이시여, 나는 이곳에다 당신의 사당을 세웠습니다. 지금 우리를 도와주시어 향후 로마가 어려움에 빠지면 당신의 도움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소서.

    로물루스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뒤 그는 소리쳤다. 로마인들이여, 돌아서서 다시 한 번 더 싸움에 나서라. 유피테르가 싸우라고 명령하신다. 로마인들은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목소리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복종했다. 그들은 다시 힘을 내어 공격에 나섰고 로물루스는 전열의 선두에 나섰다.

    메티우스 쿠르티우스는 사비니 공격대를 인솔하여 요새의 내리막길을 내려왔다. 그는 로마인들을 오늘날 포룸(카피톨리움 언덕과 팔라티움 언덕 사이에 있던 로마의 대표적 광장으로 그 주변에는 원로원 의사당, 국민회의장, 공회당, 금융기관, 신전 등이 들어서 있었음: 옮긴이)이 자리 잡고 있는 땅까지 무질서하게 도주하게 만들었고, 거의 팔라티움 대문 앞까지 왔다. 동지들, 그는 소리쳤다, 우리는 저 배신 잘하는, 저 허약한 적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들은 이제 여자들을 납치하는 것이 힘센 남자들을 상대로 싸우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임을 깨달았을 겁니다! 그런 자랑의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순간, 로물루스가 소수의 최정예 병사들을 데리고 메티우스 앞에서 공격해왔다. 메티우스가 말을 타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는 말을 돌려서 도망쳤고 로마 군은 추격했다. 로물루스의 이런 과감한 공격은 전장의 다른 곳에 있던 로마 군에게 용기를 불어넣었고 그들은 다시 힘을 내어 공격하여 적들을 패퇴시켰다.

    추격하는 로마 군의 함성은 메티우스의 말을 놀라게 했다. 말은 재갈을 이빨로 깨물면서 메티우스를 등에 태운 채 습지로 달려들었다. 사비니 병사들은 경악했다. 창졸간에 그들의 왕에게 들이닥친 위험 때문에 그들은 잠시 공격을 멈추고 함성과 수신호로 조언을 보내며 그를 도우려 했다. 그런 엄청난 노력 덕분에 사비니 군은 마침내 메티우스를 습지에서 안전한 곳으로 꺼낼 수 있었다. 그러자 싸움은 다시 두 언덕 사이의 계곡에서 재개되었고, 이번에 로마 군이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 순간 전투의 원인 제공자인 사비니 여인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그런 처참한 상황에 놓이자 타고난 수줍음과 소심함이 사라져 버렸고 개입해야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그들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옷을 찢으면서 날아다니는 창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 대치 중인 양군 사이에 무리를 지어 섰다. 그들은 분노하는 전사들을 떼어놓았다. 한편으로는 아버지들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들에게 친척의 피를 흘리게 하는 저주를 부디 피해야 할 것이라고 간곡하게 호소했다. 여자들은 소리쳤다.

    우리는 이제 어머니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당신의 아들들이요 손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아버지 살해의 오점을 남기지 말아주세요. 만약 우리의 결혼이 ― 당신들 사이의 관계가 ― 당신들에게 밉살스러운 것이라면 당신들의 분노를 우리에게 돌려주세요. 우리가 싸움의 원인입니다. 우리 때문에 우리의 남편과 아버지들이 부상을 당하거나 죽어 넘어졌고, 우리는 과부 혹은 고아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먼저 죽어버리겠습니다.

    그 호소의 효과는 즉각적이면서도 엄청난 것이었다. 싸움터에 정적이 감돌았고 단 한 명의 남자도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뒤 양군의 사령관들은 앞에 나서서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그들은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두 국가는 하나의 정부 아래 통일하기로 했고 로마를 수도로 정했다. 이렇게 하여 로마의 인구는 두 배로 불어났고 로마인들은 사비니 족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사비니 마을 쿠레스의 이름을 따서 그들 자신을 퀴리테스라고 불렀다. 그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쿠르티우스와 그의 말이 깊은 습지로 빠져들었다가 간신히 살아나온 얕은 물 일대를 가리켜 쿠르티우스의 호수라고 명명했다.

    치열한 전투가 이처럼 예기치 않게 평화롭게 마무리되자, 사비니 여인들과 그들의 부모와 남편들 사이의 유대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로물루스는 이런 유대관계를 특별히 귀중하게 여겨서 그가 도시의 인구를 나누어 설치한 30개 지역구에다 사비니 여인들의 이름을 붙여서 기념했다. 물론 납치되어온 사비니 여인들은 30명 이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름을 따올 여자들을 어떤 기준으로 선정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추첨이든, 연령이든, 여인들 자신 혹은 남편들의 지위 등이었을 텐데 이 중 어떤 것이 결정적 기준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동시에 3개의 기사 백인대가 조직되었는데, 로물루스의 이름을 따서 람넨세스, 타티우스의 이름을 따서 티티엔세스, 루케레스라고 명명되었다. 맨 마지막 백인대의 이름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불확실하다. 이러한 조치의 결과로 두 왕의 공동 통치는 아주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14. 그로부터 몇 년 뒤 타티우스의 친척들이 몇몇 라우렌툼 사절들에게 폭력을 가했다. 라우렌툼 사람들은 그 당시의 국제법 규정에 따라서 시정 조치를 요구해왔는데 타티우스는 혈연 관계를 의식하여 공정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에게 복수의 공격을 불러왔다. 그는 연례 희생제의에 참석하기 위해 라비니움으로 내려갔는데 그곳에서 벌어진 폭동의 와중에 살해되었다. 로물루스는 공동 통치자의 죽음에 당연히 보였어야 할 그런 애도를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공동 통치가 겉보기처럼 그리 매끄러운 것이 아니었던 듯하다. 어쩌면 그는 타티우스가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그는 피살 건으로 전쟁을 하기를 거부했고, 타티우스의 피살과 사절들에 대한 모욕이라는 이중의 오점을 닦아내기 위해 로마와 라비니움 간의 조약을 새롭게 체결했다.

    이렇게 하여 라비니움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비록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으나 환영을 받았다. 그렇지만 동시에 로마는 도시 출입문들 근처에서 적과 교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피데나이 군대가 공격해온 것이었다. 피데나이는 그들 주위에 있는 라이벌 도시가 급속하게 성장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그 권세를 아예 싹부터 잘라버리려는 심산으로 로마를 공격해 왔다. 그들은 두 도시 사이에 있는 땅을 초토화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들은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 오른쪽으로 강으로 막혀 있었다 ― 농촌 지역의 농장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농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경악과 혼란 속에서 보신을 위해 급히 도시로 달아났다. 이 사람들의 도착으로 로마 시에는 공격 소식이 널리 퍼졌다. 로물루스는 신속하게 행동에 나섰다. 적이 그처럼 가까이 와 있는데 꾸물거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군대의 선두에서 행진해 나아갔고 피데나이에서 1마일(1.6km) 떨어진 곳에 진지를 구축했다. 이어 그는 그곳에다 소규모의 예비 부대만 남겨 놓았다. 그는 주력 부대 중 일부를 떼어내어 잡목이 무성하게 자라 엄폐가 잘 되는 곳에서 매복을 하라고 지시했다. 훨씬 숫자가 많은 나머지 주력 부대와 기병대를 이끌고서 그는 공격하는 척하면서 적에게 도전을 걸었고 기병대와 함께 피데나이의 성문들 앞까지 진군했다. 그 양동(陽動) 작전은 성공했다.

    적은 그 작전에 말려들었고, 기병대의 교전은 이어진 로마 기병대의 철수에 진짜 작전인 듯한 외양을 부여했다. 기병대는 전열이 무너진 채 싸울지 아니면 도망칠지 망설이는 태도를 보였다. 이로써 로마 군의 보병도 무너지자, 양동 작전에 넘어간 적은 방어망 뒤에서 무더기로 앞에 나서면서, 맹렬한 기세로 퇴각하는 로마 군을 뒤쫓으면서 매복 중인 로마 군의 함정 안으로 들어섰다. 매복 중이던 로마 군은 피데나이 군의 측면을 신속하게 공격했다. 동시에 로물루스가 뒤에 남겨두었던 예비 군대가 군기를 휘날리며 전진해 오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합동작전의 위협은 너무나 막강하여 피데나이 군은 로물루스가 기병대가 말을 돌려 공격에 나서기도 전에 황급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잠시 전만 해도 피데나이 군은 가짜 퇴각에 속아넘어가 추격에 나섰으나 이제 완전한 무질서에 빠져버린 그들은 성벽 안으로 들어가 보호를 받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성벽까지 도망칠 운명이 아니었다. 로마 군은 그들을 바싹 뒤쫓으며 성문이 닫히기 전에 도읍 안으로 쇄도해 왔다.

    15. 전쟁의 열기는 곧 베이이까지 번졌다. 베이이는 피데나이와 마찬가지로 에트루리아의 도시였다. 베이이 주민들은 로마가 주위의 모든 공동체들을 적대시하는 것으로 보아 베이이가 단지 로마 가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로마 군이 침략해올 빌미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베이이는 사전 예방의 차원에서 로마 영토에 침략군을 파견했다. 그것은 조직적인 군대 이동은 아니었다. 침략군은 정규 진지를 구축한 것도 아니었고 농촌 지방의 이곳저곳을 되는 대로 약탈하다가 로마 군의 응전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들 도시로 돌아갔다. 그러나 로마 군은 그들이 아직도 로마 영토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 결전에 충분히 대비한 채로 티베르 강을 건너서 진지를 구축하고 베이이 시를 공격할 때를 기다렸다.

    베이이 군은 로마 군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서 야전으로 나섰다. 그들은 비좁은 성벽 안에 갇혀서 포위전을 견뎌내는 것보다는 야전에서 정규전을 벌여 결판을 내고자 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로물루스는 그 어떤 전략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베테랑 군대의 막강한 힘은 승리를 차지하기에 충분했고 그는 퇴각하는 베이이 군을 그들의 성벽까지 몰아붙였다. 그 도시는 축성이 잘 되어 있어서 단단한 방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로물루스는 그 도시를 함락시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회군하여 인근 농지들을 파괴하는 것으로 만족했는데, 그 파괴로부터 무엇을 얻자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표시로 그렇게 한 것이었다. 베이이 주민들은 전투에서의 패배 못지않게 그러한 농지 파괴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 그리하여 항복을 결정하고 사절들을 로마로 보내 평화 조약을 요청했다. 로마는 그들의 땅 일부를 벌금으로 빼앗고 향후 1백 년의 휴전을 허락했다.

    16. 이상이 로물루스 통치 기간 동안 로마가 거둔 군사적.정치적 업적들이었다. 이런 업적들은 그가 신의 후손이라는 믿음과 사후에 그에게 부여된 신성에 걸맞은 행적이었다. 우리는 그가 조상의 왕좌를 되찾는 과정에서 보여준 강건한 기상을 상기하게 된다. 또 로마를 창건하고 전쟁과 평화의 양쪽 기술을 모두 구사하여 이 도시를 강건하게 만든 로물루스의 지혜를 되돌아보게 된다. 로마가 엄청난 국력을 쌓아올려 로물루스 사후 40년 동안 아무런 어려움 없이 안정을 누리게 된 것은 오로지 그의 공로이다.

    로물루스가 위대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원로원보다 평민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고 또 군대는 그에게 열렬한 충성을 바쳤다. 그는 전시는 물론이고 평시에도 3백명의 무장 개인 호위대를 거느렸는데 이 부대를 켈레레스(빠른 자)라고 불렀다.

    이상이 로물루스의 업적이었고 그 업적은 영원히 새롭게 인식될 것이다. 어느 날 그가 마르티우스 들판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있는데, 엄청난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가 불어왔다. 그러자 구름이 그를 감쌌는데, 너무나 짙은 구름이어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볼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부터 그는 지상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폭풍우에 놀랐던 군대는 거센 바람이 지나가고 해가 다시 나오자 정신을 차렸다. 이어 그들은 왕좌가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왕의 바로 옆에 있었던 원로원 의원들의 말을 믿었다. 왕이 회오리바람에 의해 하늘 높이 들어 올려져 사라졌다는 것이다. 군대는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 같은 느낌이 들었고 슬픔 가득한 정적 속에서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이어 몇몇 사람들이 로물루스의 신성을 크게 외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 외침에 가세했고 마침내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신이면서 신의 아들이라고 선언했고 앞으로 영원히 그의 자녀들에게 은총을 내리고 또 보호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이런 중대사에도 몇몇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왕이 원로원 의원들의 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살해되었다고 은밀하게 주장했다. 마침내 그런 이야기가 약간 베일에 싸인 형태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로물루스의 위대함에 대한 경외심과 존경심이 그의 죽음을 다르게 설명하는 이야기를 완전 불식시켰다.

    게다가 율리우스 프로클루스라고 하는 남자의 시의적절한 설명으로 인해 로물루스의 승천설(昇天說)은 더욱 신빙성을 얻게 되었다. 프로클루스는 평소 중요한 문제들에 대하여 현명한 조언을 잘 해주는 사람으로 높은 명예를 얻었다고 한다. 왕이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이었고 또 원로원 의원들을 의심했다. 그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던 프로클루스는 의회에 나아가 사람들에게 연설을 해야겠다는 멋진 생각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도시의 아버지인 로물루스가 오늘 새벽에 하늘에서 내려와 내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두려움과 존경심을 동시에 느끼며 그분의 앞에 서서 아무런 불경죄를 저지르지 않고 그분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분이 내게 말했습니다. ‘가서, 로마 사람들에게 말하라. 하늘의 뜻에 의해 나의 로마는 세계의 수도가 될 것이라고. 로마인들에게 군인이 되는 법을 배우라고 하라. 또 그들이 그 방법을 잘 알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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