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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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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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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필독 고전!
마르크스 『자본론』과 함께 자본주의 논쟁의 양대 산맥!
부록 : 카를 피셔의 반박문과 베버의 답변 수록

막스 베버는 사회과학 분야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파격적이며, 논쟁이 끊이지 않는 작품을 남겼다. 그것은 바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의 기원을 근대 산업혁명과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아니라,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 전통에서 찾았다. 그는 ‘근대 노동 윤리’와 ‘물질적 성공에 대한 지향성’은 시장의 관심과 사업에 대한 기민한 감각, 그리고 기술혁신이 아니라, 16-17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하였던 칼뱅주의, 감리교, 침례교 등의 개신교가 지니고 있던 ‘윤리’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그들의 윤리와 종교의 자유를 확보하고자 했던 그들의 투쟁이 다른 모든 인권을 확보하는 데 모퉁잇돌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 논증으로 인해 이 책은 발표 당시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 격렬함은 오늘날에도 전혀 식지 않았다.
우리는 왜 이 책을 읽어야 할까? 이 책을 빼놓고 자본주의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꼭 자본주의에 대한 관심이 없더라도 그저 이 책에 담긴 베버의 지성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유익과 즐거움이 될 것이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현대지성
Release dateJun 1, 2018
ISBN9791187142485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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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막스 베버

    제1장 종파 a와 사회계층

    서로 다른 여러 종파에 속한 사람들이 함께 거주하는 지방들의 직업 통계를 한 번 훑어보기만 해도,² 근래에 가톨릭 진영의 신문과 문헌에 자주 등장하고 가톨릭 진영의 회의들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어 온 한 가지 현상이 주목할 만한 정도로 눈에 띄는데,³ 그것은 자본가와 기업가는 물론이고, 고급 숙련 노동자층, 특히 기술 분야나 상업 분야에서 좀 더 전문적인 훈련을 받고서 근대적인 기업들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대부분 개신교도인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⁴ 이런 현상은 단지 동부 독일에 사는 독일인들과 폴란드인들처럼 종파의 차이가 국적의 차이, 따라서 문화 발전의 정도에 있어서의 차이와 일치하는 곳에서 확인될 뿐만이 아니라, 개화기의 자본주의적인 발전에 따라 사회계층의 재편과 직업의 변동이 일어나게 된 거의 모든 곳에서 주민들의 종교에 관한 통계를 통해 확인되고, 그런 변화가 심하게 일어난 곳일수록 이런 현상도 더 분명하게 확인된다.⁵

    이렇게 상업과 교역 분야의 근대적인 대기업들에서 자본가들과 경영진들과 간부 직원들에서 개신교도의 비율이 전체 인구에서 개신교도가 차지하는 비율을 훨씬 상회할 정도로 상대적으로 현저하게 높게 나타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먼 과거로 소급되는 역사적인 원인들에 기인하고,⁶ 그런 점에서는 그런 직업들에 특정 종파에 속한 사람들의 비율이 높은 것은 어느 정도는 이런 경제 현상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할 수 있다.⁷ 왜냐하면, 그런 직업들을 가지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일정 정도의 자본을 소유하고 있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비용이 드는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까닭에, 대물림된 부의 소유, 또는 적어도 일정 정도의 부의 소유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지리적으로 유리한 입지나 풍부한 자연 자원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발달해서 가장 부유하게 된 지역들, 특히 부유한 도시들 중 상당수는 16세기에 개신교를 받아들였고, 그 결과 개신교도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경제적인 생존 투쟁에서 그 혜택을 보고 있다.

    a. 베버는 여기에서 신앙고백(Konfess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기독교 내에서 넓게는 구교인 가톨릭과 신교인 프로테스탄트(개신교)를 가리키고, 좁게는 개신교 내의 여러 분파들, 즉 칼뱅주의의 개혁교회와 루터교, 청교도, 경건주의, 침례교 등등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종파로 번역했다.

    2. 예컨대 헤르만 셸(Hermann Schell)의 『진보의 원리로서의 가톨릭 신앙』(Der Katholizismus als Prinzip des Fortschrittes, 1897) 31쪽과 게오르크 프라이헤어 폰 헤르틀링(Georg Freiherr von Hertling)의 『가톨릭 신앙의 원리와 학문』(Das Prinzip des Katholizismus und die Wissenschaft, 1899) 58쪽을 보라.

    3.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사례들은 어떤 산업의 노동자들의 종교가 일차적으로는 그 산업이 위치해 있는 지역, 즉 그 노동 인력을 공급해 주는 지역의 종교 분포에 의해 결정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통해 항상은 아니지만 자주 설명된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서 예컨대 가톨릭교도들의 비율이 높은 라인 지방 같은 곳들의 종교 통계는 사실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한 직업들이 세분화되어 있고, 그렇게 세분된 직업들을 꼼꼼하게 조사할 때에만 통계 수치는 신뢰할 만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에는, 많은 노동자들을 고용한 기업가들과 혼자 일하는 수공업자들이 똑같이 기업주라는 범주로 분류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완전히 발전된 자본주의, 특히 광범위한 비숙련 노동자 계층은 과거에 종교가 지녔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4. 내가 지도한 학생들 중 한 명이 몇 년 전에 바덴의 종교 통계를 철저하게 연구했고, 그 연구는 현재 이 주제와 관련해서 가장 자세한 통계자료다. 『바덴 지역 대학들의 경제학 논집』(Die Volkswirtschaftlichen Abhandlungen der badischen Hochschulen) 제4권 제5호(1901)에 수록된 마르틴 오펜바허(Martin Offenbacher)의 종파와 사회계층: 바덴에서의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의 경제적 지위에 대한 연구(Konfession und soziale Schichtung: Eine Studie über die wirtschaftliche Lage der Katholiken und Protestanten in Baden)를 참조하라. 아래의 설명에서 인용한 내용과 수치는 모두 그 연구를 전거로 한 것이다.

    5. 예컨대, 1895년에 바덴에서는 개신교도들은 1,000명 당 954,060마르크의 세금을 납부한 반면에, 가톨릭교도들의 경우에는 589,000마르크에 불과했다. 유대인은 1,000명 당 4백만 마르크의 세금을 납부함으로써 다른 종교들을 압도했다. 이 수치들은 오펜바허의 앞의 책 21쪽에서 인용했다.

    6. 오펜바허의 앞의 논문에 나오는 자세한 논의를 보라.

    7. 오펜바허는 자신의 논문의 처음 두 장에서 바덴과 관련하여 이 점에 대한 상당히 자세한 증거를 제시한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고찰했을 때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겨난다. 경제적으로 가장 발달한 지역들이 교회의 혁명, 즉 16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특히 강하게 끌리는 성향을 지니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하지만 그 대답은 결코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물론, 전체적으로는 경제와 관련해서 전통적인 사상에서 벗어난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전통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전통적인 권위에 반기를 든 종교개혁을 강력하게 지지하게 만든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종종 잊어버리고 있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것은 종교개혁은 지금까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해왔던 종교를 이제는 사람들의 삶에서 몰아내고 배제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한 종교의 형태만을 이전의 것과는 다른 것으로 바꾸고자 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사람들의 삶을 실제로는 별로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느슨하고 거의 형식적으로만 규율했던 가톨릭교회의 지배를 가정을 중심으로 한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을 포함한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을 대단히 강도 높게 실제적이며 무제한으로 규율하고 통제하는 개신교의 지배로 바꾼 것이었다.

    이단은 엄벌하지만 죄인은 관대하게 대한다는 원칙으로 대변되는 가톨릭교회의 지배는 오늘날 철저하게 근대적인 경제관념을 지닌 사람들조차도 충분히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러한 지배는 오늘날보다 이전에 더 느슨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15세기에서 16세기로 넘어가던 시기에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경제적으로 발달했던 지역들에서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반면에, 16세기의 제네바와 스코틀랜드, 16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가던 시기의 네덜란드의 대부분의 지역들, 17세기에 식민지 미국의 뉴잉글랜드, 그리고 종종 영국 본토에서조차도 위력을 발휘했던 칼뱅주의의 지배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개인에 대한 교회의 지배 형태 중에서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이었고, 그것은 당시에 제네바, 네덜란드, 영국에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옛 귀족 계층에게도 마찬가지로 아주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지역들에서 등장한 종교개혁자들이 불만을 품었던 것은 사람들의 삶에 대한 교회 및 종교의 지배가 너무 지나치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느슨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경제적으로 가장 발달한 지역들, 그리고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그 지역들 내에서 당시에 경제적으로 부상하고 있던 시민 중산 계층이 역사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인간의 삶을 그토록 철저하게 규율하고 지배하고자 했던 청교도적인 통제와 규율을 용인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시민 계층이 그 이전에는 드물게, 그리고 그 이후에는 전혀 나타내 보이지 않았던 영웅주의 ―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b이 이것을 우리의 최후의 영웅주의라고 부른 것은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 를 드러내며 열렬히 옹호한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b. 칼라일은 스코틀랜드의 문학자이자 역사학자로서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영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영웅숭배 사상으로 유명하고, 주저로는 『프랑스혁명사』(1837)와 『영웅숭배론』(1841)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데, 그것은 이미 말한 대로 오늘날 개신교도들이 많은 자본을 소유하는 것과 근대적인 경제 활동 내에서 지도적인 지위에 더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는 것은 단지 역사적으로 그들이 평균적으로 더 많은 부를 상속받은 동시에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더 나은 조건들을 물려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한 또다른 현상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 현상들에 속한 것들 중에서 몇 가지만 예로 들어보자면, 먼저 바덴과 바이에른, 그리고 예컨대 헝가리에서 아주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실제로 증명할 수 있는 현상은 부모가 가톨릭교도냐 개신교도냐에 따라서 그들의 자녀들이 받는 고등교육의 종류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등교육기관의 재학생들과 졸업시험 응시자들 가운데서 가톨릭교도의 비율이 가톨릭교도가 전체 인구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에 훨씬 못 미친다는 사실은⁸ 상당 부분 앞에서 말한 대물림된 부의 조건에 있어서의 차이에 기인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졸업시험에 응시하는 가톨릭교도인 학생들 중에서 특별히 기술 교육과 상공업 계통의 직업을 준비하기 위해, 그러니까 대체로 근대적인 시민계층의 영리 활동을 위해 설립되고 거기에 최적화된 근대적인 교육기관들인 실업계 고등학교, 실업학교, 고등공민학교 등등에서 공부한 학생들의 비율은 또다시 개신교도인 학생들의 비율에 훨씬 못 미치는 반면에,⁹ 인문계 고등학교가 제공하는 교육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것은 대물림된 부의 조건에 있어서의 차이로는 설명되지 않고, 도리어 역으로 가톨릭교도들이 자본주의적인 영리 활동에 참여하는 비율이 낮은 이유가 바로 그들이 가진 종교에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8. 1895년에 바덴의 인구는 개신교도 37%, 가톨릭교도 61.3%, 유대인 1.5%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1885년에서 1891년까지 의무교육이었던 초등학교를 제외하고 그 이후의 상급학교들에 진학한 학생들의 종교 분포는 다음과 같았다. 오펜바허의 앞의 논문 16쪽을 보라.

    프로이센,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알자스-로렌, 헝가리에서의 통계도 정확히 동일한 현상을 보여준다. 오펜바허의 앞의 논문 18-19쪽을 보라.

    9. 바로 앞의 주에 나온 수치들은 중등학교들에 진학한 학생들 중에서 가톨릭에 속한 학생의 비율은 전체 인구에서 가톨릭교도의 비율보다 3분의 1 정도 적고, 다만 주로 신학 공부를 준비하기 위해 김나지움에 진학한 경우에만 그 비율이 조금 높게 나온다. 이후의 논의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은 개혁교회가 주류를 이루는 헝가리의 경우에 중등학교들에서 개신교에 속한 학생의 비율이 전체 평균보다 훨씬 더 높게 나온다는 것이다. 오펜바허의 앞의 논문 19쪽 각주를 보라.

    하지만 근대적인 산업에 종사하는 숙련노동자들 중에서 가톨릭교도의 비중이 더 낮은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층 더 주목할 만한 고찰이 있다. 대규모 공장들이 대체로 자신들이 사용할 숙련 노동력들을 수공업자들이 키운 도제들로부터 충원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현상이다. 따라서 숙련 노동력을 훈련시키고 양성하는 일은 수공업자들에게 맡기고, 공장들은 거기에서 이미 잘 훈련이 된 숙련노동자들을 데려가기만 하는데, 이런 식으로 해서 수공업 사업장에서 대규모 공장들로 옮기는 도제들의 비율이 가톨릭교도보다는 개신교도의 경우가 훨씬 더 높다. 달리 말하면, 수공업에서 숙련된 도제들 중에서 가톨릭교도들은 수공업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경향이 더 강해서 수공업의 장인들이 되는 비율이 더 높은 반면에, 개신교도들은 상당수가 대규모 공장들로 옮겨가서 숙련노동자들의 간부층과 관리자층을 형성하는 경향이 기본적으로 더 강하다는 것이다.¹⁰ 이런 경우들에서 어려서부터 주입된 정신적 특성, 즉 여기에서는 자신이 자란 고향과 가정의 종교적 분위기에 의해 정해진 교육 방향이 직업의 선택 및 직업과 관련한 그 이후의 운명을 좌우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독일에서 근대적인 영리 활동에 참여하는 가톨릭교도의 비율이 적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그래왔고¹¹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다음과 같은 경험칙, 즉 민족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소수에 속한 집단은 지배 집단과 대립되는 피지배 집단으로서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자리들에서 배제되기 때문에 영리를 추구하는 분야로 뛰어드는 경향이 특히 강하고, 그런 집단의 구성원들 중에서 특히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들은 공적인 분야에서 이룰 수 없는 야망을 영리 활동을 통해 성취하려고 한다는 경험칙과 배치된다는 점에서 더욱더 주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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