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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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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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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반호』는 잉글랜드를 점령하여 지배계급이 된 노르만 인들에 대한 앵글로색슨 인들의 저항과 기백을 묘사하고 있다.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을 나선 틈을 타 그의 동생 존 왕자가 노르만 인 귀족들과 손을 잡고 왕위를 차지한다. 이에 충성스러운 색슨 족 기사 아이반호가 리처드 왕을 도와서 존 왕과 그의 도당들을 무찌른다.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로웨나 공주와 아이반호, 아이반호와 레베카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기에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아이작을 통해 잉글랜드 사회에서 멸시당하는 이야기 등이 한데 뒤섞여 신나는 모험과 아름다운 로맨스, 그리고 감동적인 드라마를 만들어 낸다.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12세기 잉글랜드의 문화와 삶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이 책의 다양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개성이 넘친다. 용맹한 왕 리처드 1세, 왕실 노예로 우직하고 충실한 돼지치기 거스, 여러 인물을 감옥에서 구출하는 록슬리(로빈 후드), 핏줄보다 민족의 독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완강한 색슨 족 지도자 세드릭, 상황을 절묘하게 비꼬는 광대 왐바 등 개성이 뚜렷한 등장인물들의 대화와 익살은 이 책을 유쾌한 분위기로 가득 채우고, 독자들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게 해준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현대지성
Release dateAug 1, 2018
ISBN9791187142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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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반호 - 월터 스콧

    1장

    배불리 먹은 돼지가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 시끄럽게 꿀꿀거리고 불쾌하게 소리 지르며

    억지로 쫓겨 마지못해 더러운 돼지우리로 들어가는 동안

    이들은 이야기를 나누었네.

    포프(Pope)의 「오디세이아」(Odyssey)

    돈(Don)강이 젖줄인 유쾌한 잉글랜드의 그 쾌적한 지방에, 예전에는 셰필드(Sheffield)와 아름다운 동커스터(Doncaster) 읍내 사이에 있는 멋진 언덕과 계곡의 대부분을 뒤덮고 있는 커다란 숲이 뻗어 있었다. 이 광대한 숲의 흔적은 지금도 여전히 원클리프 공원(Warncliffe Park)과, 웬트워스(Wentworth)의 귀족 영지와 로더럼(Rotherham)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곳은 바로 옛날에 전설상의 원틀리의 용(DragonofWantley, 퍼시의 「고대 영국 시풍」에 나오는 시구를 인용. 원틀리는 원클리프의 방언)이 출몰했고, 장미 전쟁 동안 가장 필사적인 전투들이 많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은 오래 전에 그 행적이 잉글랜드의 시가에 그토록 인기 리에 표현되었던 의협심 넘치는 무법자들 무리가 활약했던 곳이기도 하다.

    주무대가 이러하니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리처드(Richard) 1세의 재위 말 무렵의 어느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갖은 예속적 억압에 시달리고 있던 절망적인 백성들에게는 리처드 1세가 오랜 억류 생활에서 풀려 나오는 일이 단순한 기대에서 간절한 소망으로 바뀌어 있을 무렵이었다. 스티븐(Stephen)의 치세 동안 권력이 지나치게 커져 있었던 데다 헨리 2세(Henry the Second)의 소심함으로 인해 어느 정도 왕권 아래 거의 굴복되어 있지 않았던 귀족들은 이제 다시 예전의 방종을 마음껏 일삼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지주 평의회의 나약한 간섭을 무시한 채, 자신들의 성을 강화하고, 하인들의 수를 늘리고, 주위의 사람들을 노예의 상태로 몰락시키고, 각자 권력의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곧 닥칠 것 같은 국정의 격변에서 자신들을 주요 인사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군대의 수장이 되려고 애썼다.

    소위, 법률과 잉글랜드의 헌법 정신에 의해 봉건적인 전제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던 하급 귀족 혹은 자유 지주의 상황은 이제 대단히 위험해졌다. 가장 흔한 경우이듯이, 만약 그들이 인근의 어떠한 작은 왕들의 보호 하에 들어가 그 왕실에서 봉건적인 직책을 받아들이거나, 동맹과 보호의 상호 조약에 의해 왕이 벌이는 모험적인 일에서 왕을 지지하기로 서약했다면, 그야말로 일시적인 안식밖에는 얻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모든 잉글랜드 인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독립을 희생하고, 그들의 왕의 야심으로 인해 떠맡도록 끌어들일 모든 무모한 원정에 당사자로 휘말리게 될 위험을 무릅써야만 했다. 반면에, 억압과 원통함을 일으키는 대 귀족의 수단들이 그토록 늘어났으므로, 그들은 정세가 위험한 동안에 당국으로부터 벗어나 악의 없는 행위와 나라의 법에 자신들의 안전을 의탁하려고 시도하는 더욱 힘없는 이웃들을 파멸시킬 정도로 철저하게 괴롭히고 뒤쫓을 만한 어떠한 핑계를 원하지도 않았고, 그럴 의향도 거의 없었다.

    귀족들의 폭압과 하층민들의 고통을 크게 가중시켰던 상황은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작(Duke William of Normandy)의 정복으로 생겨났다. 적대적인 두 민족, 노르만 족과 앵글로색슨 족의 혈통을 섞거나, 여전히 승리에 취해 의기양양한 한쪽과 패배의 모든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신음하고 있는 다른 한쪽의 두 적대적인 민족을 공통의 언어와 공동의 관심사로 통합하는데 네 세대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헤이스팅스(Hastings)의 전투 결과, 권력은 노르만 귀족들의 수중으로 완전히 넘어갔는데,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권력이란 절대로 절제 있게 쓰여져 본 적이 없었다. 색슨족의 모든 영주들과 귀족들은 거의 예외 없이 철저히 근절되거나 상속권을 박탈당했다. 또한, 두 번째 서열이거나 그보다 못한 계층의 소유주로서 선조들의 고향에서 땅을 소유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왕실의 정책은 모든 합법적·비합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그 정복자에게 뿌리깊은 반감을 품고 있는 것으로 당연히 생각되던 일부 주민들의 힘을 오래 전에 약화시켰다. 노르만 혈통의 모든 지배자들은 노르만 신하들만을 극심히 편애하는 모습을 보였다. 수렵법과, 그와 동시에 색슨 족 헌법의 좀 더 관대하고 자유로운 정신에는 알려져 있지 않던 다른 많은 법들이 정복당한 주민들의 목에 족쇄로 채워져 말하자면 그들이 짊어지고 있던 봉건제도의 굴레를 한층 더 가중시켰다.

    궁정과, 궁정의 화려함과 위풍을 모방한 대 귀족들의 성에서는 노르만 프랑스어가 유일하게 사용되던 언어였다. 법정에서도 변론과 판결이 노르만 프랑스어로 진행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프랑스어는 의전, 기사도, 사법의 언어였던 반면, 훨씬 용맹스럽고 표현이 풍부한 앵글로색슨 어는 다른 언어를 전혀 알지 못하던 농부나 촌부들이나 쓰도록 팽개쳐졌다. 그러나, 여전히, 토지 소유주와 토지를 경작하는 억압받는 하층민들 사이에 의사 소통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서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던, 프랑스어와 앵글로색슨 어가 혼합된 일종의 방언이 점차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필요성에서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말이 그토록 다행스럽게 융화된 현재의 영어가 형성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영어는 고전 언어와 유럽 남부 민족들의 언어가 유입됨에 따라 더욱 풍부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전후 사정은, 비록 전쟁이나 봉기와 같이, 윌리엄 2세(William the Second)의 재위에 이어 앵글로색슨 족의 실체를 별개의 민족으로 구별지으려는 커다란 역사적 사건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을 잊어버릴 수도 있는 일반 독자들의 이해에 대한 전제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앵글로색슨 족과 그들의 정복자 사이에 있는 커다란 민족적 차별, 그들이 이전에 누구였는가와 현재 어떠한 처지로 몰락하고 말았는가에 대한 기억들은 에드워드 3세(Edward the Third)의 재위까지 내려가 노르만 정복으로 인한 상처를 더욱 벌어지게 만들고 정복자 노르만 인들과 피정복자 색슨 인들의 후손 사이에 분리 성향이 계속 유지되게 만들었다.

    우리가 이미 서두에서 언급했던 그 숲의 풀이 우거진 공터 위로 해가 내려앉고 있었다. 로마 군대의 위풍당당한 행진을 지켜보았을, 수백 개의 가지 끝과 짧은 줄기와 넓은 가지가 달린 떡갈나무들은 매우 상쾌한 풀밭의 두툼한 융단 위로 옹이투성이의 큰 가지들을 드리우고 있었다. 어찌나 빼곡히 들어차 있는지 가라앉는 석양의 차분한 빛을 완전히 차단할 정도로 너도밤나무와 서양 호랑가시나무와 온갖 종류의 자잘한 나무들과 한데 섞여 있는 곳도 있었고, 눈을 황홀하게 할 만큼 복잡하게 얽혀 기다랗게 내다보이는 원경을 이루며 서로 뚝 떨어져 있기도 했다. 반면에 상상으로는 그것들이 고독한 숲의 더욱 황량한 풍경으로 이르는 오솔길로 생각되었다. 바로 이곳에, 태양의 붉은 광선이 단속적이고 퇴색된 빛을 던져 부서진 가지와 나무의 이끼 낀 줄기 위로 부분적으로 걸려 있었고, 빛이 향하고 있던 곳의 잔디밭 일부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이 숲의 한 가운데 있는 꽤 넓은 빈터는 예전에 드루이드(Druid, 고대 켈트 족의 지식층을 일컬음. 참나무 숲에서 자주 모인 듯하며 사제또는교사, 법관 역할을 했다 ; 역주) 의식에 바쳐졌던 곳 같았다. 인공적인 것으로 보일 만큼 매우 정연한 낮은 산 구릉 정상에는 다듬어지지 않은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매우 드넓고 둥그렇게 늘어선 흔적이 일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일곱 바위는 곧게 서 있었다. 나머지 바위들은 아마도 일부 그리스도교 개종자들의 열성으로 원래 있던 자리에서 파내어져 일부는 예전의 장소에서 가까운 곳에, 또 일부는 산허리에 엎어져 있었다. 단 하나의 커다란 바위만이 바닥에 깊숙이 자리 잡아 작은 개울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었다. 솟아오른 바위의 발치 주위를 부드럽게 휘감아 돌던 개울은 바위의 저항에 부딪쳐 다른 곳에서는 잠잠하고 평온한 시내에 희미하게 졸졸 소리를 던지고 있었다.

    이 풍경을 채우고 있던 인물은 두 사람이었는데, 차림새와 용모로 보아 예전 시기에 요크셔(Yorkshire) 서쪽 구에 있는 삼림의 거친 촌뜨기 행색을 풍기고 있었다. 이 두 남자 가운데 연장자는 생김새가 험상궂고 잔인하고 거칠었다. 옷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형태로서, 처음에는 짐승의 털이 남아 있었지만 너무도 여러 곳이 해져, 남아 있는 조각만으로는 어느 짐승의 털이었는지 식별하기가 쉽지 않은 무두질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소매가 달린 꽉 끼는 재킷이었다. 이 원시적인 옷은 목부터 무릎까지 닿았고, 신체 덮개의 모든 일상적인 목적을 만족시켰다. 트임은 머리가 통과하는데 필요한 정도 이상으로 넓지 않았으므로, 이 사실로 미루어 현대의 셔츠나 옛날의 쇠사슬 갑옷 형태로 머리와 어깨 위로 뒤집어써서 입는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수퇘지의 가죽으로 만든 가죽끈으로 묶은 샌들이 발을 보호했고, 얇은 가죽끈이 스코틀랜드 고지 사람들의 것처럼 종아리 위까지 올라가 무릎은 내놓고 다리 주위로 정교하게 휘감겨 있었다. 재킷은 몸에 더욱 꽉 붙게 만들기 위해, 넓은 가죽 혁대로 가운데에서 모아져 놋쇠 버클로 채워져 있었다. 한쪽 옆구리에는 일종의 짐 보따리가 매달려 있었고, 다른 쪽 옆구리에는 불기 위한 목적으로 입에 대는 부분이 달려 있는 숫양의 뿔이 달려 있었다. 혁대에는 길고, 넓고, 끝이 뾰족하며 수사슴의 뿔 손잡이가 달린 쌍날칼이 꽂혀 있었다. 그 칼은 인근에서 만들어져 이렇게 일찍이 셰필드 검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이었다.

    남자는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있어, 머리는 헝클어지고 서로 꼬이고 햇빛에 그을려 바랜 어두운 붉은 색으로서, 볼 위에 텁수룩히 자란 약간 노란 색이나 호박색을 띠고 있는 수염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두툼한 머리칼에 의해서만 보호되고 있었다. 남자의 차림새 가운데 한 부분만이 아직 설명을 못 했지만, 그것은 몹시도 두드러져 감출 수가 없다. 그것은 바로 놋쇠로 된 목걸이로서, 트임새가 없다는 점만 제외하고는 개 목걸이와 비슷하여 목 주위로 단단히 납땜이 되어 있어, 숨을 쉬는데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로 느슨하지만 동시에 줄칼을 사용하지 않고는 벗어버릴 수 없을 정도로 꽉 죄어져 있었다. 이 특이한 목 가리개에는 색슨 글자로 다음과 같은 의미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베오울프(Beowulf)의 아들 거스(Gurth)는 로더우드(Rotherwood)의 세드릭(Cedric)의 타고난 노예이다.

    돼지치기가 직업인 거스 옆에는 비록 모양은 거스의 옷과 비슷하지만 재질이 더 좋고 훨씬 괴상한 옷을 입고 있는 열 살 정도 어린 모습의 사람이 드루이드의 쓰러진 기념석에 앉아 있었다. 이 남자의 재킷은 밝은 보랏빛으로 염색한 데다 다채로운 색상의 우스꽝스러운 장식이 찍혀 있었다. 재킷 위에는 허벅지의 절반도 덮지 못하는 짧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때가 많이 타기는 했지만 연노랑 안감을 댄 진홍색 천으로 만든 것이었다. 망토는 한쪽 어깨에서 다른 쪽 어깨로 옮겨가며 걸칠 수 있거나 또는 온 몸을 감싸 두를 수도 있었으므로 넉넉지 못한 길이와는 반대로 낙낙한 폭이 멋진 주름을 만들었다.

    남자는 팔에 얇은 은팔찌를 끼고 있었고, 목에는 위틀리스(Witless)의 아들, 왐바(Wamba)는 로더우드의 세드릭의 노예다라는 글씨가 새겨진 은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이 사람은 동료와 같은 재질의 샌들을 신고 있었지만 다리는 가죽끈으로 둘둘 감지 않고 한쪽은 붉은색 한쪽은 노란색으로 된 일종의 각반을 두르고 있었다. 또한 모자도 갖추고 있었는데, 모자 둘레로는 사냥매에 다는 크기 정도의 방울이 몇 개 달려 있어서 머리를 흔들 때마다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거의 잠시도 같은 자세로 있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이 듣기에는 방울 소리가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이 모자 가장자리로는 빳빳한 가죽끈이 둘러져 있었고, 관처럼 꼭대기 부분이 뻥 뚫려 있었는데, 그 안에서는 길게 늘어진 자루 같은 것이 삐어져 나와 구식의 나이트 캡이나 젤리 모양의 가방 또는 현대 경기병의 모자처럼 한쪽 어깨로 떨어져 있었다. 방울은 바로 이 부위에 붙어 있었다. 모자 모양과 반은 미친 것 같고 반은 교활한 것 같은 얼굴 표정뿐 아니라 그밖의 자질구레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남자는 어릿광대나 익살꾼 계통에 속하여, 부자들이 집안에만 갇혀 지내는 동안 느끼는 무료함을 없애주기 위해 부한 시람들의 집에 기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동료처럼 혁대에 짐 꾸러미를 차고 있었지만 아마도 날카로운 연장을 맡기기에는 위험한 부류의 인물로 생각되었는지 뿔피리도 칼도 차고 있지 않았다. 대신, 현대의 무대에서 할러퀸(Harlequin, 이탈리아의 기교 넘치는 코미디에 등장하는 정형화된 유형적 인물로서 대개 유순하고 재치가 넘치는 하인 역으로 등장하며 하녀를 따라다니는 바람기 있는 연인으로 묘사된다 ; 역주)이 휘두르는 것과 비슷한 나무칼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이 두 남자의 표정과 행동은 외모 못지않게 대조적이었다. 돼지치기 거스의 표정은 깊이 낙심한 태도로 시선을 땅에 둔 슬프고 무뚝뚝한 모습이었는데, 가끔 붉은 눈에서 이는 불꽃이 무뚝뚝한 의기소침한 외모 아래에 억압 의식과 저항 기질이 잠자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거의 냉담하게 보일 수도 있었다. 반면에, 왐바의 표정은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자신의 처지와 외모에 대한 상당한 자부심과 함께 일종의 쓸데없는 호기심과 한시도 가만 있지 못하는 안절부절 못하는 조바심을 드러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는, 전에 말했듯이노르만 병사와 지체 높은 봉건 귀족들의 가까운 가신들을 제외하고는 하층 계급에서 널리 쓰여지고 있던 앵글로색슨어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주고받은 원래의 대화를 현대의 독자들은 거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므로,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다음과 같이 번역하여 옮겨 적는다.

    에이 이 망할 놈의 돼지새끼들, 성 위톨드(St. Withold, 저자 스콧이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에서 에드거의 미친 노래에 나오는 Swithold를 모방한 것인데, 원래는 라벤나의 성 비탈리스를 의미한다)의 저주나 받아라!

    돼지치기는 흩어진 돼지 떼를 모으기 위해 시끄럽게 나팔을 분 후에 중얼거렸다. 그러나 돼지들은 그가 부르는 소리에 똑같이 시끄럽게 꿀꿀거리면서도 자신들을 살찌워왔던 너도밤나무 열매나 도토리의 호화로운 향연에서 떠나려고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또한 반은 진흙에 처박힌 채 주인의 소리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질펀하게 퍼져 있던 축축한 개울둑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놈들도 몇 있었다.

    이 우라질 놈의 돼지새끼들이 왜 그래! 해지기 전에 두 발 달린 늑대(사람)가 저 녀석들 가운데 몇 마리를 채가지 않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지지. 팽즈(Fangs) 이리와, 팽즈!

    돼지치기는 음성을 힘껏 높여 마스티프와 그레이 하운드의 잡종으로 사냥개의 일종인 늑대처럼 생긴 기진맥진한 개를 불렀다. 개는 말 안 듣는 돼지들을 불러모으는데 주인을 돕기라도 하는 듯이 절뚝거리며 뛰어다녔지만 사실은 돼지치기의 신호 소리를 잘못 알아들었거나 자신의 의무를 잘 몰랐거나 그것도 아니면 고의적인 앙심에서 돼지들을 이리저리 내몰기만 하였을 뿐으로 주인을 도우려던 것이 오히려 일거리만 더 늘려주었다.

    악마가 저 놈의 이나 몽땅 뽑아 버리길. 그리고 우리 개의 앞발을 잘라버려 제 구실을 못하게 만든 저 못된 사냥터지기 놈에게 저주가 내리길! 왐바, 자네도 사내라면 일어나 나 좀 도와줘. 저 언덕을 한 바퀴 빙 돌아 돼지 녀석들을 앞질러 가란 말이야. 녀석들을 앞지를 수만 있다면 아주 온순한 양처럼 얌전히 몰아올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왐바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않고 대답했다.

    사실은 이 일에 대해 내 다리에게 물어 보았는데, 훌륭한 차림새로 이 진흙탕을 지나가는 것은 나의 뛰어난 풍채와 멋진 옷에 어울리지 않는 짓이라는데 전적으로 동감이라고 하는군. 그러니, 거스. 충고 한마디하겠는데 팽즈는 그만 불러들이고 돼지 떼는 운명에 맡겨두라고. 그 녀석들이 행군하는 병사들이나 무법자들, 혹은 떠돌이 순례자 무리를 만난다고 한들 아침이 되어 노르만의 것으로 변하는 신세와 별반 다를 것이 뭐가 있나. 어차피 자네의 수고만 덜어주는 셈이 될 텐데.

    돼지가 노르만의 것으로 변해 내 수고를 덜어준다고! 왐바,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내 머리는 너무 둔하고 마음도 너무 산란해서 그런 뚱딴지 같은 말은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겠어.

    그야, 네 다리로 저렇게 싸질러 다니며 꿀꿀거리는 짐승을 자네는 뭐라고 부르지?

    이런 멍청이, 그야 스와인(돼지)이지. 그건 바보라도 다 안다고.

    그래 스와인은 어엿한 색슨 어가 아니냐고. 그렇지만 반역자처럼 암퇘지의 가죽을 벗겨 내장을 꺼내고 토막낸 후 발목을 묶어 매달아 놓으면 그것은 뭐라고 부르지?

    포크(돼지고기).

    제 아무리 바보라도 그것은 알고 있으니 다행이구먼. 그러면 내 생각에는 포크가 분명한 노르만 프랑스어가 아니고 뭐냔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그 짐승이 살아 있어 색슨 노예가 돌보고 있는 동안에는 색슨 이름으로 통하지. 하지만 귀족들 연회에 쓰이려고 성의 연회장로 옮겨지게 될 때에는 노르만의 것으로 바뀌어 포크라고 불리게 되는 거지. 자네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지, 거스?

    아무리 자네 같은 광대의 머리로 생각해낸 것이긴 해도 정말 틀림없는 학설이구먼, 왐바.

    왐바는 같은 어조로 계속 말을 이었다.

    아니, 그것 말고도 더 있어. 저 늙은 옥스(황소) 의원도 자네 같은 농노의 보살핌을 받을 때는 그 색슨 이름으로 쭉 통하지만 고기를 드시게 될 높은 어른들 입에 당도할 즈음에는 성급한 프랑스 멋쟁이 비프(쇠고기)로 변하게 된단 말씀이야. 그리고 카프(송아지) 경 역시 마찬가지로 므슈 드 보(송아지 고기)가 된단 말이야. 아직 보살핌이 필요할 때에는 색슨 이름으로 통하지만 향락의 재료가 될 때에는 노르만 이름을 갖게 된단 말일세.

    성 둔스탄(St Dunstan)께 맹세코, 자네는 정말 왜 그리 슬픈 얘기만 하는 거지. 우리가 숨쉬는 이 공기 말고는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 별로 없군. 한참 망설인 끝에 조금 남겨둔 것처럼 보이는 것마저도 우리 어깨에 짊어진 힘든 일을 견디게 할 목적 외에는 없으니 말이야. 제일 좋고 살찐 것은 그들의 식탁으로 끌려가고 제일 아름다운 미인은 그들의 침상으로 끌려가지. 가장 훌륭하고 용감한 전사들은 외국 장수의 병사가 되어 머나먼 이국 땅에 뼈를 묻어, 이곳에는 불운한 색슨 인들을 지켜줄 의지나 힘을 가진 사람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 오, 하느님 우리 세드릭 나리를 지켜주세요. 나리는 우리 색슨 인을 지키려고 혼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레지날 프롱 드 봬프(Reginald Front-de-Boeuf)가 이 고장으로 직접 내려오려고 하고 있으니 세드릭 나리의 수고가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볼 날도 얼마 안 남았군. 이봐, 이봐!

    거스는 목청을 높여 다시 소리쳤다.

    그래! 그래! 잘 했다, 팽즈! 이제 돼지들을 모두 앞에 모았으니 용감하게 데리고 오렴.

    거스, 자네가 나를 바보 취급한다는 것은 알고 있어. 그렇잖으면 그렇게 경솔하게 내 입에 머리를 처박으려고 하진 않았을 것 아니야. 레지날 프롱 드 봬프나 필리프 드 말부아상(Philip de Malvoisin)에게 자네가 노르만 인들에게 반역하는 말을 했다고 한마디라도 일러바치는 날에는 자네 같은 하찮은 돼지치기 하나쯤이야 높은 분들에게 욕을 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징벌로 이 나무들 가운데 하나에 매달아 놓을 걸.

    뭐라고, 내게 연신 불리한 말을 하게 꼬드기고는 설마 나를 밀고하지는 않겠지?

    자네를 밀고한다고! 아니, 그야 영리한 작자들이나 하는 수작이지. 광대는 자기 몸 하나 추스르기도 벅차다고. 그런데, 조용히 해봐. 누가 오는 것 같은데?

    광대는 그때 들리기 시작한 말발굽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가 오든 무슨 상관이야.

    거스는 팽즈의 도움으로 이미 돼지 떼를 앞에 모아 놓고 아까 우리가 묘사하려고 애썼던 그 어두컴컴한 먼 풍경들 중 하나로 돼지들을 몰아내려 가며 지껄였다.

    아니야, 말 탄 사람들이 누구인지 꼭 봐야겠어. 아마도 오베론 왕(King Oberon, 중세 프랑스 시 보르도의 위옹에 나오는 요정의 왕으로서 숲에 살면서 주인공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마술적인 힘을 지녔다)의 전갈을 갖고 요정 나라에서 왔는지도 모르니까.

    이런 망할 자식! 무시무시한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바로 몇 리 앞에서 요동치고 있는데도 그런 말을 지껄이고 있어? 저 천둥치는 소리 좀 들어보라고! 게다가 여름비치고 저렇게 굵은 빗발이 구름 속에서 곧바로 죽죽 쏟아지고 있는 것은 처음 본단 말이야. 이렇게 평온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떡갈나무마저 마치 폭풍우가 오고 있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 큰 가지를 마구 흔들며 쉭쉭거리고 삐걱거리고 난리잖아. 자네도 마음만 먹으면 사리분별은 할 수 있겠지. 이번만큼은 내 말을 좀 들으란 말이야. 자, 밤이 되면 심해질 테니 폭풍우가 시작되기 전에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왐바도 이 호소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자기 옆 풀밭 위에 놓아두었던 기다란 육척봉을 집어든 후 갈 길을 재촉하기 시작한 거스를 따라나섰다. 이 제2의 에우마이오스(Eumaeus,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충직한 돼지치기 ; 역주)는 팽즈의 도움으로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는 돼지 떼를 전부 몰아 숲의 빈터로 황급히 내려갔다.

    2장

    그 누구도 당할 자 없는 멋진 승려 하나 있었으니,

    사냥을 좋아하는 능숙한 승마 솜씨,

    유능한 수도원장에 어울릴 씩씩한 사람이었고

    마구간은 뛰어난 말들로 가득 찼네.

    말을 몰고 달릴 때면 말굴레 소리는

    그 자신이 지키는 교회의 종소리처럼 크고,

    속삭이는 바람에 청아하게 울렸네.

    초서(Chaucer)

    동료 거스의 몇 차례에 걸친 간곡한 권고와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말발굽 소리가 계속 가까워졌으므로 왐바는 온갖 구실을 만들어 가끔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개암나무에서 아직 절반밖에 익지 않은 열매를 한 송이 따는가 하면 가는 길에 마주친 시골 처녀 뒤를 곁눈질하느라 얼굴을 돌리기도 했다. 그래서 곧 말을 탄 사람들에게 따라 잡히고 말았다.

    기마대 일행의 수는 열 명 정도 되었는데, 제일 앞에 선 두 사람은 상당히 중요한 인물처럼 보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의 수행원인 것 같았다. 이들 중 한 사람의 신분과 지위를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고위층 성직자였다. 그가 입은 복장은 시토회 수도사가 입는 것이었지만 수도회의 규율이 허용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좋은 재질로 만든 것이었다. 외투와 두건은 최상품의 플랑드르 천이었고 잘생겼지만 약간 뚱뚱한 몸 주위로 넉넉하고 우아한 주름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복장이 속세의 화려함을 경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듯이 용모에서도 절제의 흔적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눈썹 아래로 조심스러운 방탕아임을 나타내는 그 교활한 쾌락주의적 눈빛이 숨어있지 않았더라면 그의 용모는 그런 대로 훌륭하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밖의 점에서는, 직업과 지위 덕분에 언제든 마음대로 안색을 바꾸는 것이 몸에 배었으므로, 타고난 표정은 자못 쾌활하고 사교적이었지만 수시로 엄숙한 표정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이 고위 성직자의 소매는 수도원의 규율과 교황과 종교회의의 칙령에 구애받지 않고, 값비싼 모피로 안과 밖을 댄 것이었다. 외투는 목 부위에서 걸쇠로 잠겨 있었는데, 그의 지위에 걸맞는 전체 복장은 오늘날 퀘이커 교도 미인의 옷만큼 세련되게 꾸민 것이었다. 퀘이커 교도 미인은 교파의 의상과 복장을 그대로 간직하여 옷감의 선택과 배합 방식은 그 간소함을 변함 없이 따르지만 속세의 허영심이 상당히 많이 가미된 일종의 요염한 매력적 분위기를 풍기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 고귀한 성직자는 천천히 걷는 살찐 노새를 타고 있었는데, 마구 역시 잘 장식되어 있었다. 굴레에는 당시의 유행에 따라 은방울이 달려 있었다. 말을 타고 있는 모습에는 수도사에게 의례 따르는 어색한 점은 전혀 없었고 잘 훈련된 기수의 여유 있고 몸에 밴 우아함이 드러났다. 사실, 그것은 노새치고는 아주 수수한 탈 것이었으므로 아무리 좋은 경우라 하더라도, 또 아무리 싹싹하고 고분고분한 발걸음으로 길들여져 있다 하더라도 길을 여행하는데는 이 수도사나 쓰고 있었던 것 같다.

    수행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어떤 평신도는 성직자가 다른 경우에 쓸 목적으로, 그 당시 부호와 고관들이 쓸 수 있게 상인들이 커다란 수고와 위험을 무릅쓰고 수입해온 안달루시아 태생의 가장 훌륭한 스페인 조랑말 중 한 마리를 끌고 있었다. 이 뛰어난 말의 안장과 장식은 주교관과 십자가, 그 밖의 교회의 문장들이 화려하게 수놓인 기다란 말 덮개가 거의 바닥까지 닿을 정도로 덮여 있었다. 또 다른 평신도는 아마도 이 고위 성직자의 짐을 실은 듯이 보이는 짐 나르는 데에만 쓰이는 노새를 한 마리를 끌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교파에 속했지만 지위는 더 낮은 두 수도사가 행렬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은 채 웃고 떠들며 그 뒤를 나란히 따르고 있었다.

    고위 성직자의 동행은 마흔이 지난 나이에 마르고 강인하며 키가 크고 근육이 잘 발달된 남자였다. 오랜 피로와 끊임없는 군사 훈련으로 몸의 부드러운 부분이라고는 전혀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강건한 풍채는 몸 전체가 근육과 뼈와 힘줄만으로 이루어져 수많은 노고를 견디어왔고 앞으로도 수많은 노고를 견뎌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에는 모피로 단을 댄 진홍빛 모자를 썼는데, 절구를 뒤집은 형태와 비슷하다 하여 프랑스어로 모르티에(mortier, 절구라는 의미 ; 역주)라 불리던 종류의 모자였다. 그러므로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 보였는데, 그 표정은 낯선 사람에게는 공포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선천적으로 강인하면서도 표정이 매우 풍부한 오만한 용모는 열대 지방의 햇볕에 끊임없이 드러난 탓에 거의 흑인처럼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는데, 평상시에는 열정의 폭풍우가 지나간 뒤 잠자고 있다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차분했다. 그러나 앞이마의 툭 불거진 혈관과 조그만 감정에도 바르르 떨 윗입술과 짙고 검은 콧수염은 그러한 열정의 폭풍이 언제 느닷없이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날카롭고도 찌를 듯한 검은 눈은 매번 깜빡일 때마다 이제까지 갖은 고난을 극복해 왔고 위험을 무릅써 왔다는 것을 드러냈고, 단호한 용기와 의지력으로 앞길을 가로막는 것을 일소하는 기쁨을 맛보기 위해 자신의 소망에 반대하는 사람에게 도전하겠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마의 깊은 상처로 인해 그의 모습은 한층 험하게 보였고, 이마에 상처를 입었을 때 약간 다쳤던 한쪽 눈의 음흉한 표정은 비록 시력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약간 뒤틀려 있었다.

    이 사나이가 입고 있는 상의는 수도사의 기다란 망토로서 생긴 형태는 동행인 수도사의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진홍빛인 색상을 보면 그가 네 개의 정규 교단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망토의 오른쪽 어깨 위로는 하얀 천으로 만들어진 특이한 형태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다. 이 상의는 첫눈에 그 모양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 즉 같은 재질의 소매와 장갑이 달린 쇠사슬 갑옷의 셔츠를 가리고 있었다. 이 쇠사슬 갑옷은 오늘날 양말직기로 훨씬 부드러운 재료로 짠 것만큼 정교하게 엮고 짜여져 몸에 맞게 유연하게 잘 움직였다. 망토의 주름 사이로 드러난 허벅지의 앞쪽도 쇠사슬 갑옷으로 덮여 있었다. 무릎과 발은 미늘, 혹은 서로 솜씨 좋게 연결되어 있는 얇은 강판으로 보호되고 있었으며 무릎에서 발까지 닿은 쇠사슬 양말은 기사의 몸을 보호하는 갑옷을 완성하고 있었다. 허리띠에는 기다란 쌍날 단검을 차고 있었는데, 그것이 몸에 지니고 있는 유일한 공격용 무기였다.

    이 사나이는 동행인 수도사처럼 노새가 아니라 튼튼한 승마용 말을 타고 자신의 훌륭한 군마는 아끼기로 했다. 말 투구 즉 앞에 짧은 대못이 나와 있는 엮어서 만든 머리 가리개로 전투 장구를 완전히 갖추고 있던 그의 군마는 뒤에서 시종 한 사람이 끌고 있었다. 안장 한쪽에는 다마스쿠스의 조각이 풍부하게 새겨진 짧은 전투용 도끼가 매달려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당시 기사들이 쓰던 양손으로 다루는 긴 칼과 함께 말 타는 이의 깃털 장식이 달린 투구와 쇠사슬 머리 덮개가 걸려 있었다. 또 한 명의 시종은 주인의 망토에 수놓은 것과 똑같은 모양의 십자가가 그려진 작은 깃발이 끝에서 나부끼고 있는 주인의 창을 높이 쳐들고 있었다. 시종은 또한 주인의 작은 삼각방패를 들고 있었는데, 방패는 부분이 가슴을 보호할 정도로 충분히 넓지만 그 아래로는 한 점으로 점점 줄어들다가눈에 띄지 않도록 진홍빛 천으로 덮여 있었다.

    이 두 시종 뒤로는 두 명의 수행원이 따르고 있었는데그들의 검은 얼굴, 하얀 터번, 동방의 외형을 띤 옷으로 보아 머나먼 동쪽 나라 태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전사와 그 수행원들의 전체적인 모습은 거칠고 어딘가 색달랐다. 시종들의 옷은 화려했으며, 동방의 수행원들은 목 둘레에 은으로 만든 고리를 두르고 있었으며 거무스레한 다리와 팔에도 역시 은으로 만든 팔찌를 차고 있었다. 팔은 팔꿈치부터, 다리는 중간부터 발목까지 드러나 있었다. 그들의 옷은 비단과 장식으로 두드러졌으며 그 주인의 부와 높은 신분을 나타내 주었다. 동시에 주인의 복장의 군인다운 수수함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칼자루와 칼을 차는 수대에 금으로 무늬를 박아 넣은 구부러진 기병도를 차고 있어 훨씬 많은 돈을 들여 만든 터키 단검과 잘 어울렸다. 수행원들은 각기 안장 앞 테에 날카로운 강철 촉이 달린 넉 자 길이의 투창을 한 묶음씩 달고 있었다. 이것은 사라센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쓰이는 무기로서, 그 풍습은 동방의 나라에서 여전히 실행되고 있는 엘 제리드(El Jerrid, 투창)라는 무예에 남아 있었다.

    이 수행원들의 말은 겉보기에도 말 탄 사람들처럼 외국산이었다. 그 말들은 사라센 산의 아라비아 혈통으로서가느다랗고 날씬한 다리, 발굽 뒤의 짧은 털, 엷은 갈기, 여유 있는 경쾌한 동작이 당시 플랑드르와 노르망디에서 기르던 품종으로 판금 투구와 쇠사슬 갑옷을 입은 무장 군사용의 관절이 커다란 육중한 말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 육중한 말들은 동방의 준마와 비교하면 실체의 화신과 그림자의 화신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 기마대 일행의 특이한 모습은 왐바의 관심은 물론 그다지 들뜨지 않는 거스의 호기심마저 불러 일으켰다. 거스는 그 수도사가 사냥과 연회를 좋아하고 들리는 소문이 틀리지만 않는다면 수도사의 서약과는 한층 더 모순되는 그 밖의 세속적 쾌락을 좋아한다고 그 근처 일대에 널리 알려져 있던 조르보 수도원(Jorvaulx Abbey)의 수도원장이라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다.

    교구에 속해 있든 수도회에 속해 있든 상관없이 당시에는 성직자의 품행에 대한 사고방식이 매우 관대했으므로 에이머 수도원장(Prior Aymer)은 자신의 수도원 인근에서 좋은 평판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유롭고 쾌활한 기질과, 웬만한 과실들은 모두 흔쾌히 용서해 주는 덕분에 그는 귀족과 상류 사회에서 인기를 얻었는데, 이들 중 몇 사람과는 혈연 관계에 있었으며 그 자신이 저명한 노르만 가문 출신이기도 했다. 특히 부인들은 여성 숭배자라고 자임하며 옛 봉건 영주의 성에 있는 연회장과 부인의 내실에 엄습하기 쉬운 따분함을 없애 주는 수단을 많이 갖고 있는 남자의 품행을 그다지 꼼꼼하게 캐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수도원장은 적당한 정도를 뛰어넘는 열의로 야외의 오락 활동에 참가하였고 노스라이딩(North Riding, 요크셔의 한 구)에서 잘 훈련된 매와 가장 빠른 그레이하운드를 갖고 있는 것이 묵인되었다. 오히려 이러한 점들이 젊은 신사들의 인기를 끄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노인들을 상대할 경우에는 그에 맞게 행동했는데, 필요할 경우에는 매우 예의바른 태도를 소화해낼 수 있었다. 아무리 피상적이기는 하지만 책에 대한 지식은 무지한 속인들에게 그의 소문난 학식에 대한 존경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고, 태도와 언어의 엄숙함은 교회와 성직의 권위를 나타내는데 위력을 발휘한 숭고한 말투와 함께 더욱 거룩하다는 평가를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윗사람들의 행위를 호되게 비판한 평민들조차 에이머 수도원장의 어리석은 짓에는 연민을 품었다. 수도원장은 관대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이, 자선 행위는 성경 속에 그렇게 하도록 명시되어 있는 것 이상으로 많은 죄악을 덮어 주는 것이었다.

    대부분을 자신의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었던 수도원의 수입은 수도원장 자신이 쓰는 상당한 비용을 조달하는 수단이 되어 준 동시에 또한 농부들에게 많은 부조를 니누어 줄 수 있는 여력을 주었다. 그 부조로 수도원장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곤궁을 자주 덜어 주었다. 만일 에이머 수도원장이 사냥에 매우 열중해 있거나 연회에 오랫동안 남아 있더라도, 또 야음을 틈타 이루어졌던 밀회를 마치고 이른 새벽에 돌아오다가 수도원 뒷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눈에 띄더라도 사람들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 어떠한 죄가 되었든 그것을 속죄할 아무런 품성도 갖추고 있지 않은 많은 신도들이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수도원장의 그러한 부정 행위를 묵인하고 말았다. 그래서, 에이머 수도원장과 그의 평판은 우리 색슨 노예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으므로, 이들은 아무렇게나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고 베네디시테 메스 필즈(자네들에게도 신의 가호가 있기를)라는 답례를 받았다.

    그러나 수도원장의 동행과 그 수행원들의 기이한 모습이 주의를 끌고 놀라움을 자아냈으므로 조르보 수도원장이 근처에 하룻밤 묵어갈 만한 곳이 있는지 아느냐고 물어보았어도 두 사람은 수도원장의 질문이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가무잡잡한 이방인의 수도사 같기도 하고 군인 같기도 한 모습과 동방의 수행원들이 차린 거친 옷과 무기에 무척이나 놀랐던 것이다. 또한 축복의 답례를 내려 주고 길을 물어보았던 그 말이 비록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색슨 농노들의 귀에는 퉁명스럽게 들렸을 수도 있다.

    그러자 수도원장은 노르만 인들과 색슨 인들이 대화를 나눌 때에 쓰던 혼성어인 프랑크 어를 사용하여 언성을 높여 물었다.

    여봐라, 물어볼 말이 있는데, 이 근방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교회에 헌신하는 마음에서 교회의 가장 겸허한 두 사도와 그 수행원들에게 하룻밤의 환대와 먹을 것을 내어 줄 선량한 사람이 있느냐?

    수도원장은 일부러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였는데, 이는 그가 쓰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한 겸손한 말투와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교회의 가장 겸허한 두 사도라고요!

    왐바는 혼자서 되뇌었다. 하지만, 비록 바보이긴 했지만 자신의 말이 남에게 들리지 않도록 주의했다.

    어디 그 교회의 집사와, 주방장과, 다른 중요한 하인들을 보고 싶군!

    수도원장의 말에 속으로는 이렇게 대꾸하며 왐바는 눈을 들어 질문에 대답했다.

    만약 거룩한 신부님들께서 훌륭한 음식과 부드러운 잠자리를 좋아하신다면 조금만 가시면 브링크스워스(Brinxworth) 수도원에 다다르실 겁니다. 그곳에 가시면 훌륭한 접대를 받으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참회의 밤을 보내고 싶다면 발길을 돌려 저쪽 잡목 사이의 공터로 내려가시면 코프만허스트(Copmanhurst) 암자에 이르실 것입니다. 그곳의 신앙심 깊은 은자는 밤을 지새고 가도록 자기의 방과 기도의 은혜를 나누어 줄 것입니다.

    수도원장은 두 제안에 모두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보게, 믿음직한 친구. 모자에 달린 그 방울 소리에 사리 분별이 흐려지지 않았다면 자네도 클레리쿠스 클레리쿰 논 데시마트(성직자는 다른 성직자의 십일조에 손을 대지 않는다)라는 말을 알 것 아닌가. 다시 말해서 우리 성직자들은 같은 성직자들에게 폐를 끼치기보다는 평신도들의 대접을 받는단 말일세. 그렇게 함으로써 평신도들에게도 하느님이 정하신 사도들을 예우하고 도와줌으로써 하느님을 섬길 기회를 주는 거지.

    옳은 말씀이십니다, 소인은 나귀처럼 멍청하고 영광스럽게도 신부님의 노새처럼 방울을 달고 있긴 해도 교회와 사도의 사랑은 다른 사랑처럼 남보다 먼저 가족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자 말 탄 기사가 높고 무서운 음성으로 왐바의 농담을 가로막으며 꾸짖었다.

    이 녀석, 건방진 소리 집어치우고 할 수 있다면 말해 보란 말이다, 어디로 가는 길 말이야 … 에이머 수도원장님, 그 지주의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세드릭. 색슨 인 세드릭이요 … 이보게, 말해 보게. 세드릭의 집이 여기서 가까운가?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줄 수 있겠나?

    그곳을 찾는 길이 쉽진 않을 텐데요. 그리고 세드릭 나리의 식구들은 일찍 주무십니다. 처음으로 침묵을 깨고 거스가 끼어들어 대답했다.

    그러자 기사가 언성을 높였다.

    쳇, 입 닥치지 못해, 이 녀석. 그네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와 같은 나그네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은 일도 아니란 말이야. 우리는 요구할 권리가 있는 환대를 일부러 굽실거려 청하지는 않는단 말야.

    이에 거스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기꺼이 선심을 베풀어 달라고 부탁해야 할 잠자리를 권리처럼 요구하는 분들에게 저희 주인님의 집을 가르쳐 주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녀석, 노예 주제에 나랑 한 번 해 보자는 거냐!

    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말에 박차를 가해 길을 가로질러 말을 반 바퀴 선회시켰고 동시에 무엄하다고 생각되는 농노의 행동을 혼내 줄 목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높이 쳐들었다.

    거스는 몹시 화가 나 앙심을 품은 찌푸린 얼굴로 기사를 노려보며 난폭하면서도 주저하는 몸짓으로 단도 자루에 손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에이머 수도원장이 타고 있던 노새를 기사와 돼지치기 사이로 몰아넣으며 금방이라도 벌어질 듯한 폭력 사태를 막았다.

    아니, 성모 마리아께 맹세코, 브리앙 형제, 당신이 지금 이교도 투르크 인들과 사라센 인들을 무찌르며 팔레스타인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섬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벌하는 거룩한 교회의 체벌을 제외하고는 폭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수도원장은 왐바에게로 말머리를 돌려 은화 한 닢으로 자신의 말을 두둔하며 물었다.

    이보게, 색슨 인 세드릭의 집으로 가는 길을 말해 주게. 자네가 그것을 모를 리 없지 않나. 그리고 설령 우리보다 인품이 덜 고결하다고 해도 나그네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 자네의 의무란 말일세.

    사실은, 신부님. 신부님의 오른쪽에 계신 동료분의 그 사라센 사람 같은 얼굴에 놀라서 그만 집으로 가는 길을 까먹고 말았습니다. 소인 자신도 오늘 밤 집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체, 마음만 먹는다면 가르쳐 줄 수 있을 텐데. 이 거룩한 형제님은 성묘를 탈환하기 위해 평생을 사라센 인들 틈에서 싸우신 분으로서 성전 기사단원(Knights Templars)이라네, 자네도 들어보았을 테지. 그러니 반은 수도사이고 반은 전사인 셈이지.

    절반은 수도사이시라니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비록 그들이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질문에 빨리 대답하지 않는다고 해도 전적으로 부당하게 대하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 말에 수도원장이 대답했다.

    세드릭의 저택으로 가는 길을 알려 준다면 자네의 그 농담도 용서해 주지.

    좋아요, 그렇다면 이 길을 따라 쭉 가세요, 그럼 땅 위로 50여 센티 나와 있을까한 묻힌 십자가가 나올 겁니다. 그 십자가 있는 곳이 바로 사거리니까 왼쪽으로 가세요. 그러면 폭풍우가 닥치기 전에 쉴 곳을 찾으실 겁니다.

    수도원장은 노련하게 길을 가르쳐 준 왐바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기마대 일행은 말에 박차를 가해 한밤의 폭풍우가 불어닥치기 전에 숙소에 도착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급히 달렸다. 그들의 말발굽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거스가 동료에게 말했다.

    만일 자네의 그 현명한 지시에 따른다면 저 신부님들은 오늘 밤 안으로 로더우드에 도착하기 힘들 텐데.

    그럼, 어림없지. 하지만 운이 좋다면 셰필드에 닿을 수도 있지. 그곳이라면 그 작자들에게 딱 맞는 곳이지. 나는 개가 사슴을 쫓게 할 생각이 없으면서도 사슴이 어디 있는지 개에게 알려 줄 만큼 나쁜 나무꾼은 아니라고.

    자네 말이 옳아. 에이머 수도원장이 로웨나(Rowena) 공주님을 보면 안 좋을 거야. 게다가 세드릭 나리는 성미가 불 같으시니 저 성전 기사단원과 싸우기 십상일 텐데, 그랬다간 더 안 좋을 것 아냐. 하지만 훌륭한 하인들처럼 우리는 그저 듣고 보기만 할 뿐 아예 조금 전 일은 못 본 척 입을 봉하세.

    이쯤에서 기마대 일행에게 돌아가 보기로 하자. 그들은 두 농노들을 뒤로하고 멀리 떠나 색슨 인의 후예임을 여전히 자랑하고 싶어하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개 상류 계급에서 썼던 노르만 프랑스어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성전 기사가 시토회 수도원장에게 먼저 물었다.

    저토록 제멋대로 무엄하게 굴다니 저 녀석들을 어쩔 셈이죠? 그리고 왜 녀석들을 혼내지 못하게 막으셨지요?

    이런, 브리앙 형제.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따라 지껄이는 바보 녀석에게 이유를 대기란 힘든 일이죠. 그리고 또 다른 녀석은 난폭하고 거칠고, 다루기 힘든 위인이란 말입니다. 제가 자주 말씀 드렸듯이 피정복자 색슨 인의 후손들 가운데 여전히 눈에 띄는 녀석들인데, 이들은 자기들이 가진 온갖 수단을 다하여 정복자에게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을 최고의 낙으로 삼고 있죠.

    저라면 그 녀석들에게 경을 쳐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었을 텐데. 저는 그런 놈들을 다루는 데는 이골이 나 있거든요. 저희가 잡은 터키 포로들은 오딘(Odin, 북유럽 최고의 신 ; 역주) 신이 그랬을까 싶을 만큼 무척이나 난폭해서 다루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제 집에서 노예 감독의 관리 하에 두 달 동안 두었더니 겸손하고 순종적이고, 쓸 만한 녀석이 되어 명령을 잘 지키게 되었답니다. 참, 신부님도 독약과 단도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신부님이 조금만 기회를 주면 그 녀석들은 거리낌 없이 그것들을 쓰려고 들 것입니다.

    옳아요, 하지만 어느 지방이고 각기 고유한 예의범절과 풍습이 있답니다. 게다가 이 녀석들을 때려눕힌다면 세드릭의 집으로 가는 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그곳으로 가는 길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당신과 그 녀석 사이에는 반드시 싸움이 벌어졌을 테 고요. 제가 하는 말을 잊지 마십시오. 이 부유한 지주는 거만하고 사납고, 질투심이 많으며 화를 잘 내기 때문에 귀족들과도 대립한답니다. 심지어 겨루기 만만치 않은 상대인 이웃들, 레지날 프롱 드 봬프와 필리프 말부아상에게도 대들고 있지요. 그는 자기 종족의 특권을 단호하게 옹호하고 옛 앵글로색슨의 7왕국(Kent, Sussex, Wessex, Essex, Northumbria, EastAnglia, Mercia왕국을 말함 ; 역주) 시절의 유명한 용사 헤러워드(Hereward)의 유구한 혈통임을 자랑하고 있지요. 그래서 색슨 인 세드릭으로 널리 불리고 있답니다. 행여 피정복자에게 가해지는 재앙이나 가혹함을 피하기 위해 자기의 혈통을 숨기느라 급급한 사람들이 많은데 이자는 오히려 그 종족에 속한다는 것을 뽐내고 있답니다.

    에이머 수도원장님, 당신은 연애에 능통한 분으로 미의 연구에 조예가 깊고 구애에 대한 일이라면 음유시인처럼 노련하다지요. 하지만 로웨나 공주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신 그 불온한 작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제가 노력해야 할 자제심과 인내를 보상할 만큼 이 유명한 로웨나 공주의 아름다움이 뛰어나다고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세드릭은 로웨나 공주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저 먼 친척일 뿐입니다. 로웨나 공주는 심지어 세드릭이 주제넘게 주장하는 혈통보다도 훨씬 지체 높은 가문 출신으로 세드릭과는 먼 혈연 관계일 뿐이죠. 하지만 그가 로웨나 공주의 후견인이기는 하죠, 제 생각엔 이것도 자기가 자처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러나 친자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피후견인을 소중하게 여긴답니다. 로웨나 공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곧 당신이 직접 판단하시지요. 만약 로웨나 공주의 청순한 얼굴빛과 온화한 푸른 눈의 당당하면서도 부드러운 표정이 당신의 기억에서 팔레스타인의 그 검은머리 처녀들과 옛 이슬람 낙원에 있는 그 요염한 미희들을 몰아내지 못한다면 제가 이교도요 교회의 진정한 아들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침이 마르게 자랑하는 그 미인이 제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무엇을 거시겠습니까?

    카이오스 포도주 열 통에 저의 금목걸이를 걸기로 하겠습니다. 그 포도주 통은 이미 수도원 저장실에 넣고 제 식료품 보관인인 늙은 데니스가 간수하고 있는 것처럼 거의 제 것이나 마찬가지로군요.

    그럼 저 자신이 스스로 감식가가 되어 작년 성령 강림절 이후 그렇게 아름다운 처녀를 본 적이 없다고 시인할 만큼 스스로 깨닫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술술 풀리지 않는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수도원장님, 당신의 목걸이는 좀 위태롭군요. 아슈비 드 라 주시(Ashby-de-la-Zouche)의 시합장에 나갈 때 제 가슴 덮개 위에 그 목걸이를 걸겠습니다.

    어디 멋지게 이겨서 당신 좋으실 대로 걸어 보시지요. 귀하가 기사로서 또 성직자로서 참된 대답을 하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형제여, 제 충고를 받아들여 이교도의 포로들과 동방의 노예들을 부리는데 익숙해 있던 그 위압적인 기질보다는 좀 더 예의를 갖추도록 말씨를 다듬으십시오. 색슨 인 세드릭은 일단 화가 나기 시작하면, 더구나 그자는 보통 다혈질이 아니거든요, 귀하가 기사 신분이건, 제가 높은 직책에 있건, 그 어느 쪽의 존엄함에도 상관하지 않고 우리들을 집 밖으로 쫓아내어 아무리 한밤중이라 할지라도 종달새와 함께 자게 만들고 말 위인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로웨나 공주를 쳐다보는 눈길에 주의하십시오. 세드릭이 그 처녀를 무척이나 세심하게 애지중지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그런 의혹을 사서 세드릭이 경계를 하는 날에는 우리는 그대로 내쫓기는 신세가 될 겁니다. 실제로 그의 유일한 외아들이 이 미인에게 그러한 연정의 눈길을 품었다고 해서 내쫓아버렸다고 하니까요. 그러니 로웨나 공주는 그저 멀리서 우러러보는 것은 괜찮겠지만 동정녀 마리아의 성소에 바치는 것 이상의 생각을 품고 접근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그래요,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그만 하시죠. 오늘 하룻밤만큼은 어쩔 수 없이 꾹 참고 처녀처럼 유순하게 보내지요. 하지만 폭력을 써서 우리를 쫓아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대해서는 나와 시종들이 하멧과 압달라(Hamet and Abdalla, 흑인 노예들)와 함께 그런 치욕은 당하지 않게 할 것을 보장하니 걱정 마십시오. 우리라면 하룻밤 지낼 숙소를 차지할 정도로 충분히 강하니 염려 놓으십시오.

    그런 사태까지는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지요. 그건 그렇고, 아까 그 광대가 말한 십자가가 여기 있는 것 같은데, 밤이 너무 어두워 어느 길을 따라가야 할지 잘 모르겠군요. 그 녀석이 왼쪽으로 돌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제 기억으로는 확실히 오른쪽이었습니다.

    왼쪽, 분명히, 왼쪽이었어요. 그 녀석이 나무칼로 가리킨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예, 하지만 그 녀석은 칼을 왼손에 들고 있다가 몸을 가로질러 반대쪽을 가리켰다니까요.

    이런 경우에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둘 다 매우 끈질기게 자기 의견을 고집했고, 수행원들에게도 물어보았지만 그들은 왐바가 길을 가르쳐 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브리앙이 처음에는 어두워서 잘 알아볼 수 없었던 형체를 알아채고는 말했다.

    여기 십자가 밑에 자고 있는 건지 죽어 있는 건지 누군가가 있군요 … 이봐, 위그(Hugo). 창 끝으로 저자를 찔러보게.

    그러나 바로 그렇게 하기 전에 형체가 일어나더니 능숙한 프랑스어로 외쳤다.

    누구이신지 모르지만 제 생각을 이렇게 방해하다니 무례한거 아닙니까?

    그러자 수도원장이 나서서 대답했다.

    우리는 그저 색슨 인 세드릭의 거처인 로더우드로 가는 길을 묻고 싶었을 뿐이라네.

    마침 저 자신도 그곳으로 가는 길입니다. 말이 있다면 제가 안내해 드릴 수도 있을 텐데. 저는 잘 알고 있지만 길이 좀 복잡해서요.

    세드릭의 집까지 무사히 안내해 준다면 자네에게 치사는 물론 보수도 주겠네.

    수도원장은 수행원들 가운데 한 사람을 끌고 온 말에 타도록 하고 그가 타고 온 말은 안내를 자청하고 나선 나그네에게 내주도록 했다.

    그들의 길잡이는 왐바가 길을 잘못 들게 할 목적으로 가르쳐 주었던 길과는 반대쪽 길을 따라갔다. 길은 곧 숲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고 여러 개의 개울을 건넜는데, 개울이 흐르는 옆의 늪지 때문에 개울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위험했다. 그러나 나그네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라도 하듯 길의 가장 단단한 지면과 안전한 지점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신중하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하여 이제까지 보아온 것보다 더 넓은 가로수 길로 일행을 무사히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저쪽 끝에 있는 커다랗고 얕으면서도 들쭉날쭉한 건물을 가리키며 수도원장에게 말했다.

    저기가 바로 색슨 인 세드릭의 집인 로더우드입니다.

    에이머에게 이 말은 무척이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다지 담력이 강하지 못했던 데다 위험한 늪지를 지나는 동안 흥분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으므로 길잡이에게 무엇을 물어볼 호기심조차 생기지 않았던 터였다. 이제 마음이 놓이고 쉬어갈 거처에도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자 호기심이 발동하여 길잡이에게 이름은 무엇이며 직업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이제 막 성지에서 돌아온 순례자입니다.

    그러자 성전 기사가 끼어 들었다.

    차라리 그곳에 남아 성묘를 되찾기 위하여 싸우는 편이 나을 걸 그랬구먼.

    성전 기사의 얼굴을 익히 알고 있는 듯한 순례자가 그 말에 대꾸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기사님. 하지만 성지를 회복하겠다고 맹세한 분들이 자기의 의무와는 이렇게 동떨어진 곳을 여행하고 있는 판국에 저처럼 평화를 옹호하는 농부가 그분들이 버리신 임무를 마다하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겠는지요?

    성전 기사는 화가 치밀어 뭐라고 대꾸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수도원장이 가로막았다. 수도원장은 길잡이에게 그토록 오랜만에 돌아왔는데도 그 숲길을 그렇게 완벽하게 알고 있는 것이 놀랍다고 다시 한 번 토로했다.

    저는 이곳 태생입니다.

    순례자가 대답하는 사이 일행은 어느새 세드릭의 저택 앞에 이르렀다. 그곳은 안뜰이나 구내가 몇 개나 있으며 상당히 넓은 대지 위로 뻗어있는 낮고 들쭉날쭉한 건물로서, 비록 그 규모로 보면 집 주인이 상당한 부호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노르만 귀족들의 거주지로서 당시 온 잉글랜드를 통하여 보편적인 건축 양식이 되었던 크고 망루가 있는 성곽풍의 건물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로더우드라고 해서 아무런 방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시대에는 그와 같은 방비를 하지 않았다가는 다음 날 미처 날이 밝기도 전에 약탈당하고 방화될 위험에서 자유로운 집이 한 채도 없었기 때문이다. 깊은 해자 또는 도랑이 전체 건물 주위로 파여 있었고 부근의 시내에서 끌어온 물로 채워져 있었다. 가까운 산에서 가져온 끝이 뾰족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이중 방책, 즉 울타리는 해자의 안쪽과 바깥쪽 둑을 방어했다. 바깥쪽 둑으로부터 서쪽에 출입구가 있었는데 도개교로 안쪽 방호벽의 유사한 출입구와 통하도록 되어 있었다. 여러 각도에서 이 출입구를 지키도록 예방조치가 취해졌는데, 위급할 경우에는 활이나 투석기로 출입구의 측면을 지킬 수도 있었다.

    이 출입구 앞에서 성전 기사는 자신의 뿔나팔을 소리 높여 불었다. 금세라도 내릴 것 같던 비가 어느새 무서운 기세로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3장

    그때(안타까운 구원이어라!) 북해의 성난 파도 소리

    들리는 황량한 바닷가에, 한창 피어나는, 강건한,

    금빛 머리칼에 푸른 눈빛의 색슨 인이 나타났네.

    톰슨(Thomson)의 「자유」(Liberty)

    그 길이와 넓이에 비해 천장이 유난히 낮은 연회장에서는 산에서 잘라온 형태 그대로 다듬지 않고 윤도 거의 내지 않은 기다란 떡갈나무 식탁 위에 색슨 인 세드릭의 저녁 식사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들보와 서까래로 이루어진 지붕은 판자와 짚을 제외하고는 하늘과 방을 갈라놓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연회장 양끝에는 커다란 벽난로가 있었지만 굴뚝이 매우 형편없이 만들어졌으므로 적어도 그 굴뚝의 환기구를 통해 빠져나가는 것과 같은 양의 연기가 방안으로도 흘러들었다.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계속 흘러들었으므로 천장이 낮은 이 연회장의 들보와 서까래는 검은 그을음으로 덮여 제법 윤까지 났다. 연회장의 벽면에는 무기와 사냥 도구가 걸려 있었고, 각 구석에는 접이식 문이 달려 있어 이 거대한 건물의 다른 부분으로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 저택의 다른 설비들은 색슨 시대의 거칠고 소박한 기풍을 띠고 있었는데, 세드릭은 그렇게 유지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마루는 요사이 헛간 바닥을 만드는데 곧잘 사용되는 것과 같이 석회를 섞어 발라서 굳힌 흙으로 되어 있었다. 연회장 길이의 4분의 1 정도는 바닥이 한 단 정도 높여져 있었는데, 상석이라고 불리는 이 공간은 가족의 중요한 식구들과 귀한 손님들만이 차지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목적에서, 진홍빛 천으로 화려하게 덮인 식탁이 그 상단을 가로질러 놓여 있었고, 이 식탁 중간쯤에서 하인들이나 상것들이 식사를 하는 좀 더 길고 낮은 식탁이 연회장 아래쪽을 향해 길게 놓여 있었다. 그 전체적인 모습은 T자 형태이거나 지금도 옥스퍼드(Oxford)나 케임브리지(Cambridge)의 오래 된 대학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구식 식탁과 형태가 비슷했다. 상석에는 커다란 의자와 베어낸 떡갈나무로 만든 등이 높은 장의자가 놓여 있었고 이 좌석들과 좀 더 높은 식탁 위로는 천으로 만든 차양이 매어져 있었다. 이는 고약한 날씨, 특히 서투르게 지어진 지붕으로 빗방울이 여기저기 떨어지는 것을 막아 이 상석을 차지하고 앉은 높은 분들을 어느 정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연회장의 위쪽 벽에는 상석의 길이만큼 커튼이 덮여 있었고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둘 다 화려한 아니 다소 야한 색상으로 태피스트리나 자수에 짜넣는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아래 식탁의 위쪽으로는 이미 언급했듯이 아무런 덮개도 없었다. 거칠거칠한 회반죽 벽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채였고, 거친 흙바닥에는 아무것도 깔려 있지 않았다. 식탁에는 식탁보 하나 씌워 있지 않았으며 단단하고 육중한 나무 등걸이 의자를 대신하고 있었다.

    위쪽 식탁 한가운데에는 다른 의자보다 더 높은 의자가 두 개 있었는데, 이는 그 가족의 주인과 안주인을 위한 것이었다. 주인 부부는 환대를 주재하는 사람들로서 그렇게 하는 데서 ‘빵을 나누는 사람들’(the Dividers of bread)을 의미하는 그들의 영예로운 색슨 칭호가 유래된 것이었다.

    이 두 의자에는 각기 정교한 조각과 상아를 박아 넣은 발판이 딸려 있었는데 이 특징이 다른 의자에는 없다는 것이 차이점이었다. 이 의자 하나에 지금 색슨 인 세드릭이 앉아 있었는데, 비록 호족의 지위이거나 또는 노르만 인들이 부르는 대로 지주의 신분에 지나지 않지만 예나 지금이나 우두머리에게 어울린다고 생각될 정도로 저녁 식사가 지연되는 것에 참을 수 없이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로, 이 지주는 생김새에서부터 솔직하기는 하지만 성급하고 화를 잘 내는 기질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키는 중키를 넘지 않았지만 떡 벌어진 어깨와 긴 팔에, 전쟁과 사냥의 노역을 견디는데 익숙해진 사람처럼 몸집이 단단했다. 커다란 푸른 눈을 지닌 얼굴은 넓적했고 관대하고 솔직한 용모였으며 치아가 곱고 머리통도 잘생겼다. 또한 갑자기 화를 벌컥 낼 때도 자주 있었지만 대체로 기분이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에는 자부심과 질투심이 어려 있었는데, 이는 늘 침해받기 쉬운 권리를 옹호하는데 평생을 보낸 탓이었다. 이 사나이는 성급하고 불같이 단호한 기질로 인해 자기가 처한 주변 상황 때문에 끊임없이 긴장을 늦추지 않아 온 것이다. 기다란 금발은 이마와 머리 꼭대기에서 똑같이 갈라져 잘 빗질하여 양어깨까지 흘러내려 있었다. 세드릭은 예순이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백발의 기미는 거의 없었다.

    세드릭이 입고 있는 옷은 암녹색에 미네버라 불리는 털로 목과 소매 끝을 덧댄 튜닉이었다. 이것은 흰 담비 모피보다 못한 재질의 털로서 회색 다람쥐 가죽으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허리가 잘록한 이 남성용 상의는 세드릭의 몸에 꼭맞는 진홍빛 꽉 끼는 옷 위에 단추를 채우지 않은 채 걸쳐져 있었다. 그리고 같은 색상의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이것은 허벅지 아랫 부분까지 내려오지 않아 무릎이 드러난 채였다. 발에는 농부들이 신는 것과 똑같은 모양이지만 재질은 더 좋고 황금 걸쇠로 앞에서 잠그게 되어 있는 샌들을 신고 있었다. 팔에는 금팔찌를, 목에도 폭 넓은 금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허리 주위에는 화려하게 장식 단추를 박아 넣은 허리띠를 둘렀고, 허리띠에는 끝이 날카롭고 곧은 짧은 양날 검이 곧게 배치되어 옆구리에 거의 수직으로 매달릴 정도로 꽂혀 있었다. 세드릭의 의자 뒤에는 모피로 안을 댄 진홍빛 모직 외투와 화려하게 수놓은 모직 모자가 걸려 있었다. 이는 이 부유한 지주가 외출하려고 할 때에 복장을 완전히 갖추어 주는 것이었다. 또한 의자 뒤에 기대어 놓은 폭이 넓고 빛나는 강철 끝이 달린 짧은 멧돼지 투창은 그가 나다닐 때에 경우에 따라 지팡이나 무기로 쓰이는 것이었다.

    주인의 훌륭한 복장과 돼지치기 거스의 초라하고 간소한 의복의 중간 정도에서 천차만별로 다양한 의복을 입은 하인들 몇 사람은 색슨 고위 인물의 표정을 살피고 명령을 기다렸다. 그 중에서도 지위가 높은 두세 명의 하인은 상석의 주인 뒤에 서 있었다. 나머지 하인들은 연회장의 낮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상석에 있는 다른 시종들이라고는 그 종류가 각기 다른 것으로서 그 당시 사슴과 늑대를 사냥할 때 주로 쓰던 것과 같은 크고 텁수룩한 그레이하운드 두세 마리, 목이 굵고 머리가 크고 귀가 길며 뼈대가 굵은 품종의 슬로우하운드 두세 마리, 지금의 테리어라 불리는 작은 개 한두 마리였다. 이 녀석들은 초조하게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들 품종 특유의 현명한 관상학 지식을 동원하여 주인의 침울한 침묵을 방해하는 짓은 삼가고 있었다. 이는 아마도 이 네 발 달린 시종이 나서는 것을 쫓을 목적으로 세드릭의 접시 옆에 놓아둔 작은 흰 몽둥이를 무서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늙은 늑대 개 한 마리만이 주인의 귀여움을 한껏 독차지하여 주인의 자리 가까이 다가가 가끔 주인의 무릎에 그 털이 수북한 커다란 머리를 올려놓거나 코를 주인의 손에 비빔으로써 대담하게 주의를 끌려고 했다. 그러나 이 개마저도 단호한 명령에 내쫓기고 말았다.

    내려가, 발더(Balder). 내려가라니까! 장난할 기분이 아니다.

    이미 말했듯이, 사실 세드릭은 그다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멀리 떨어진 교회로 저녁 미사에 참석하러 집을 나섰던 로웨나 공주가 방금 집으로 돌아와, 폭풍우에 흠뻑 젖은 옷을 갈아입고 있는 중이었다. 벌써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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