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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 동화전집: 어른을 위한 동화
안데르센 동화전집: 어른을 위한 동화
안데르센 동화전집: 어른을 위한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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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 동화전집: 어른을 위한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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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is ebook

인어공주, 눈의 여왕, 성냥팔이 소녀 등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동화의 원작!
국내 최초 168편 완역본으로 만나다.

그동안 안데르센의 전 작품은 총 156편으로 국내에 소개되었으나, 이번에 현대지성에서 12편을 추가로 수록하여 국내 최초로 총 168편을 한 권에 모두 담아 출간하였다. 또한 64장의 클래식 일러스트를 곁들여, 읽는 즐거움을 더해 준다.

안데르센 동화는 모든 세대가 함께 읽는 책이다. 안데르센 동화는 삶의 모습들을 거울에 비치듯 있는 그대로 비춰줌으로써 독자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되돌아보도록 해 준다. 아이들은 상상과 공상의 세계를 즐기면서 이러한 세계를 자연스럽게 경험하고, 어른들은 작품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보편적 진리와 사회적 진실을 통해 인생의 심오한 진리를 깨닫는다. 안데르센 동화가 시대를 초월하여 어른과 아이들 모두 즐겨 읽는 세계적인 고전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작품이 지니는 이러한 보편성 때문일 것이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현대지성
Release dateNov 1, 2018
ISBN9791187142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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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데르센 동화전집 -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1

    부싯깃 통

    등에 배낭을 메고 옆구리에 칼을 찬 병사가 큰 길을 걷고 있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병사는 전쟁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참 길을 가는데 갑자기 소름끼치게 생긴 늙은 마녀가 나타나 병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녀의 아랫입술은 가슴까지 흉측하게 늘어져 있었다.

    안녕하시우, 군인 양반. 멋진 칼과 큰 배낭을 메고 있는 걸 보니 진짜 군인이구먼! 원하는 만큼 돈을 갖게 해주지.

    고맙습니다, 마녀 할머니.

    저 큰 나무가 보이지? 마녀가 근처에 서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저 나무는 속이 텅 비어 있다네.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면 구멍이 보일 게야. 구멍 속으로 깊숙이 내려가 보라구. 자네 몸에 밧줄을 감았다가 안에서 날 부르면 끌어당겨 주지.

    저 안에 들어가서 무얼 하게요?

    돈을 꺼내 오지. 나무 밑바닥으로 내려가면 넓은 복도가 나온다네. 그곳에는 수많은 등불이 켜져 있어서 아주 환하지. 복도에는 문이 세 개 있는데, 자물쇠에 열쇠가 꽂혀 있어 쉽게 열린다네.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가면, 방바닥 한가운데에 큰 상자가 놓여 있을 거야. 그 상자 위에는 개 한 마리가 찻잔처럼 큰 눈을 부릅뜨고 앉아 있지. 하지만 무서워할 건 없어. 푸른 바둑판 무늬가 있는 앞치마를 줄 테니까 그 앞치마를 바닥에 펴고 개를 붙잡아 앉히게. 그러면 상자를 열고 원하는 대로 돈을 꺼내올 수 있을 게야. 하지만 그 돈은 모두 구리로 된 동전이라네. 은화를 갖고 싶으면 두 번째 방으로 들어가야 하지. 그곳에도 개 한 마리 앉아 있는데, 풍차 바퀴만한 큰 눈을 부릅뜨고 있지. 하지만 무서워할 것 없어. 이번에도 앞치마 위에 개를 앉히고 돈을 꺼내 오면 되니까. 금화를 갖고 싶다면 세 번째 방으로 가게나. 거기에는 금화가 가득 든 상자가 있고 그 위에 개가 앉아 있지. 탑처럼 큰 눈을 하고 있어 무시무시하다네. 이번에도 무서워할 것 없어. 앞치마 위에 앉혀 놓으면 자넬 절대로 해치지 못할 테니까. 자네는 원하는 만큼 금화만 꺼내 오면 되지.

    한참 길을 가는데 갑자기 소름끼치게 생긴 늙은 마녀가 나타나 병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귀가 솔깃하군요. 하지만 그 대가로 바라는 게 있겠죠? 뭘 원하죠?

    난 한 푼도 필요 없네. 그저 낡은 부싯깃 통 하나만 가져다주면 돼. 옛날에 우리 할머니가 깜박 잊어버리고 두고 온 것이지.

    좋아요. 그럼 내 몸에 밧줄을 감으세요. 병사는 마녀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자, 다 감았네. 그리고 이건 푸른 바둑무늬 앞치마야.

    병사는 밧줄을 감자 곧바로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 구멍 속으로 내려갔다. 정말 마녀의 말대로 수많은 등불이 켜져 있는 넓은 복도가 나왔다. 병사는 첫 번째 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과연 찻잔만한 눈을 가진 개가 병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 착하지. 병사는 개를 어르면서 마녀의 앞치마 위에 앉히고 두 호주머니에 동전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는 상자를 닫고 개를 다시 앉힌 뒤,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풍차 바퀴만한 눈을 부릅뜬 개가 앉아 있었다.

    그렇게 노려보지 않는 게 좋을 걸. 그러면 눈에서 눈물이 나올 테니까 말야. 병사는 개를 마녀의 앞치마 위에 앉히고 상자 뚜껑을 열었다. 거기에는 은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병사는 너무 좋아서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동전을 모두 꺼내 던져 버리고 호주머니와 배낭에 은화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세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마녀의 말대로 무시무시한 개가 탑처럼 커다란 두 눈을 부릅뜨고 앉아 있었다. 개는 수레바퀴처럼 두 눈을 빙빙 돌렸다.

    안녕?

    병사는 자기도 모르게 모자에 손을 얹고 경례를 했다. 지금까지 그런 큰 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개를 자세히 본 병사는 자신이 너무 예의를 차렸다고 생각하고는 앞치마에 개를 앉히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엄청나게 많은 금화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사탕, 장난감 병정, 채찍, 흔들 목마를 모두 사고도 남았으며, 도시 전체를 사고도 남을 만큼 많았다. 병사는 호주머니와 배낭에 채웠던 은화를 버리고 대신 금화를 가득 넣었다. 호주머니와 배낭뿐만 아니라 모자와 부츠에까지 가득 채워서 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제 부자가 된 병사는 개를 상자 위에 올려놓고 방을 나와서 위를 향해 소리쳤다.

    끌어올려 줘요, 마녀 할머니!

    부싯깃 통은 찾았나? 마녀가 물었다.

    참, 그걸 잊었군. 병사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서 부싯깃 통을 찾아왔다.

    병사는 마녀가 끌어올려 주어 무사히 밖으로 나왔다. 호주머니, 배낭, 모자, 그리고 장화에까지 금화를 가득 채우고서 말이다.

    이 부싯깃 통으로 뭘 하려구요? 병사가 물었다.

    그건 알 것 없네. 자넨 돈을 가졌으니 이제 그 부싯깃 통을 주게나. 마녀가 부싯깃 통을 달라고 재촉했다.

    병사는 마녀가 끌어올려 주어 무사히 밖으로 나왔다.

    경고하는데, 이걸로 뭘 할 건지 말하지 않으면 칼로 당신 머리를 베어 버리겠어요.

    안 돼!

    병사는 즉시 칼을 꺼내 마녀의 머리를 베고 말았다. 마녀는 땅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병사는 금화를 마녀의 앞치마에 싸서 보따리처럼 등에 맨 다음 부싯깃 통을 주머니에 넣고 곧장 도시로 나갔다. 도시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했다.

    병사는 제일 좋은 여관으로 들어가 좋아하는 음식을 시켰다. 그는 이제 돈이 많은 부자였던 것이다. 장화를 닦아준 하인은 어마어마한 부자가 낡아빠진 장화를 신고 다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다음날, 병사는 새 부츠와 좋은 옷을 샀다. 이제 병사는 어엿한 신사였다. 사람들은 그를 찾아와 도시에서 일어난 온갖 신기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사는 아름다운 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디 가면 공주를 볼 수 있지요? 병사가 물었다.

    아무도 공주님을 볼 수 없답니다. 공주님은 구리로 만든 거대한 성에 살거든요. 그 성은 사방이 벽과 탑으로 둘러싸여 있지요. 왕 말고는 아무도 그곳을 드나들 수 없답니다. 공주님이 평범한 군인과 결혼할 것이라는 예언 때문에 왕이 그곳에 가둬 둔 거예요. 왕은 공주님이 그런 사람과 결혼하는 걸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거든요. 사람들이 말했다.

    ‘공주님을 꼭 한 번 보고 싶어.’ 하지만 병사는 그 성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병사는 극장에도 가고, 왕이 사는 정원도 거닐면서 즐겁게 지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주는 착한 일도 했다. 부자가 되어 좋은 옷도 사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된 병사는 주머니에 동전 한 푼 없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들은 그를 매우 훌륭한 진짜 신사라고 칭찬했으며, 병사는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돈은 곧 바닥이 나고 말았다. 들어오는 것이 없이 매일 많은 돈을 썼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이라곤 2실링뿐이었다. 그래서 병사는 좋은 여관에서 나와 비좁은 다락방으로 옮겼다. 그는 이제 장화도 직접 닦았고 떨어진 장화를 큰 바늘로 직접 기우기도 했다. 그가 사는 다락방까지 올라가려면 끝도 없는 계단을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찾아오는 친구도 없었다. 병사는 초 한 자루 살 돈도 없어 밤이면 어둠 속에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컴컴한 방 안에 앉아 있던 병사는 문득 오래된 나무 구멍 속에서 가져온 부싯깃 통 속의 초토막이 생각났다. 병사는 얼른 부싯깃 통을 꺼내 와 부싯돌을 쇠에 문질렀다. 그러자 불꽃이 날아오르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문 앞에 개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나무 밑둥 아래에서 보았던 눈이 찻잔만한 개였다.

    분부를 내리십시오, 주인님. 개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야, 이것 참 신기한 부싯깃 통이네. 원하는 것을 뭐든지 가져다주는 모양이군.’ 병사는 이렇게 생각하며 개에게 말했다.

    돈을 가져오너라.

    그러자 개는 휘익 사라지더니 금세 동전 한보따리를 입에 물고 왔다. 병사는 그때서야 비로소 부싯깃 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부싯돌을 한 번 치면 동전 상자 위에 앉았던 개가, 두 번 치면 은화 상자를 지키던 개가, 그리고 세 번 치면 금화를 지키던 개가 나왔다.

    병사는 다시 예전처럼 부자가 되어 좋은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가 좋은 옷을 입고 다시 나타나자 친구들은 금방 병사를 알아보고 예전처럼 그를 떠받들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병사는 아무도 공주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했다. ‘모두들 공주가 예쁘다고 하지만 높은 탑 속에 갇혀 지내면 무슨 소용이람? 공주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가만! 부싯깃 통이 어디 있더라?’

    병사가 부싯깃 통에서 부싯돌을 꺼내 한 번 쳤다. 그러자 찻잔만한 눈을 가진 개가 나타났다.

    한밤중이지만 잠깐만이라도 공주님을 보고 싶구나.

    그러자 개는 휘익 사라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공주를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개의 등 위에 누워 잠들어 있는 공주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병사는 자기도 모르게 공주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는 용감한 병사였으니까. 그러자 개는 공주를 데리고 다시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하던 공주는 어젯밤에 아주 기이한 꿈을 꾸었다고 얘기했다. 개 등을 타고 어디론가 갔는데, 병사가 자기에게 입을 맞추었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희한한 꿈이로구나! 왕비가 감탄했다.

    그날 밤, 왕비는 늙은 시녀에게 공주의 침대맡을 지키게 했다. 그것이 진짜 꿈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병사는 아름다운 공주가 다시 보고 싶었다. 밤이 되자, 그는 부싯돌을 쳐서 개에게 공주를 데려오라고 명했다. 개는 공주를 업고 힘껏 달렸다. 그러나 늙은 시녀가 장화를 신고 잽싸게 뒤쫓아 왔다. 시녀는 개가 공주를 데리고 커다란 집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분필로 대문에 커다랗게 십자가 표시를 해 놓았다. 그리고는 눈치 채지 못하게 얼른 되돌아왔다.

    얼마 후, 병사의 집에서 공주를 데리고 나온 개는 대문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개는 시녀가 병사의 집을 찾지 못하도록 도시에 있는 모든 집 대문에 분필로 똑같이 십자가를 그려 놓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왕과 왕비는 늙은 시녀와 관리들을 앞세우고 공주가 갔다는 집을 찾아 나섰다.

    저 집이군! 십자가가 그려진 첫 번째 대문을 본 왕이 말했다.

    아니에요, 저 집이에요. 십자가가 그려진 두 번째 대문을 본 왕비가 말했다.

    아니,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네.

    시녀와 관리들이 웅성댔다. 대문마다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찾아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비는 매우 영리한 여자였다. 그녀는 마차를 타고 다니며 거드름이나 피우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왕비는 금으로 된 커다란 가위를 꺼내 비단 헝겊을 네모로 자른 다음, 작고 귀여운 주머니를 만들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메밀가루를 가득 채워 공주의 목에 매달아서 공주가 지나가는 길에 가루가 뿌려지도록 주머니에 작은 구멍을 뚫었다.

    한편, 병사는 그날 밤에도 공주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공주에게 완전히 빠진 병사는 자신이 공주와 결혼할 수 있는 왕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는 그날도 개를 불렀다. 개는 공주를 등에 업고 쏜살같이 병사에게로 달려갔다. 개는 앞만 보고 달리느라고 메밀가루가 성에서부터 병사의 집에까지, 그리고 그가 공주를 업고 뛰어들어간 창문에까지 뿌려진 것을 까맣게 몰랐다.

    다음날 아침, 공주가 갔던 곳을 알아낸 왕과 왕비는 병사를 끌어다 어둡고 더러운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넌 내일 목매달려 죽을 거야. 사람들이 병사를 비웃었다.

    소름끼치는 말이었다. 게다가 부싯돌을 여관에 놓고 왔으니 큰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쇠창살을 통해 사람들이 떼지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가 죽는 것을 구경하려고 몰려든 사람들이었다. 북소리와 함께 군인들이 행진해 오는 것도 보였다. 모두들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야단법석이었다. 그 중에는 가죽 앞치마를 두르고 슬리퍼를 신은 구둣방 견습공 소년도 있었다. 그런데 소년이 급히 뛰는 바람에 슬리퍼 한 짝이 벗겨지고 말았다. 슬리퍼는 병사가 갇혀 있는 쇠창살 앞에 떨어졌다.

    병사가 소년에게 소리쳤다.

    이봐, 구두 견습공,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내가 나가기 전에는 볼 게 없거든. 내 부탁 하나 들어줄래? 내가 지내던 여관으로 가서 내 부싯깃 통 좀 가져다 줘. 그러면 4실링을 주지. 하지만 급히 서둘러야 한다.

    소년은 4실링이 갖고 싶어 부지런히 뛰어가서 부싯깃 통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성문 밖에는 커다란 교수대가 세워졌고, 그 주위로 군인들과 수많은 군중이 빙 둘러섰다. 왕과 왕비는 판사들과 추밀원 고문관들 맞은 편에 있는 화려한 옥좌에 앉아 있었다. 병사가 교수대에 세워지고 사람들이 달려들어 목에 밧줄을 묶으려고 했다. 그때 병사가 죽기 전에 불쌍한 죄수의 마지막 청을 들어 달라며 왕에게 애원했다.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것이었다. 왕은 청을 거절할 수 없어 그러라고 허락했다. 그러자 병사는 부싯돌을 꺼내 한 번, 두 번, 세 번을 쳤다. 한순간에 개 세 마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찻잔만한 눈을 가진 개, 풍차 바퀴만한 눈을 가진 개, 둥근 탑처럼 큰 눈을 가진 개였다.

    내가 교수형을 당하지 않도록 도와다오! 병사가 소리쳤다.

    그러자 개들이 판사와 추밀원 고문관들에게 덤벼들어 다리를 물고 코를 물어뜯어 멀리 내동댕이쳤다.

    내겐 손대지 말라!

    왕이 소리치자 제일 큰 개가 으르렁거리며 왕과 왕비를 내동댕이쳤다. 그러자 군인들과 군중들이 겁에 질려 소리 높여 외쳤다.

    병사님,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아름다운 공주님과 결혼해 주십시오.

    그들은 병사를 왕의 마차에 태웠다. 세 마리의 개가 마차 앞을 달리며 만세를 외쳤고, 아이들은 손가락 사이로 휘파람을 불고, 군인들은 받들어 총을 하여 존경의 뜻을 나타냈다. 공주는 성에서 나와 왕비가 되었다. 공주로서는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결혼식 잔치는 1주일이나 계속되었다. 물론 세 마리의 개들도 식탁에 앉아 눈을 크게 뜨고 함께 어울렸다.

    그들은 병사를 왕의 마차에 태웠다. 세 마리의 개가 마차 앞을 달리며 만세를 외쳤다.

    2

    장다리 클라우스와 꺼꾸리 클라우스

    어느 마을에 이름이 똑같은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둘 다 클라우스였다. 한 클라우스는 말 네 필을 갖고 있었지만, 다른 클라우스는 한 필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두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 말 네 필을 가진 클라우스를 ‘장다리 클라우스’, 말 한 필을 가진 클라우스를 ‘꺼꾸리 클라우스’라고 불렀다. 이제 두 클라우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들어보기로 하자. 이 이야기는 사실이다.

    꺼꾸리 클라우스는 1주일 내내 장다리 클라우스네 밭을 매주고 한 필뿐인 말을 빌려 주어야 했다. 물론 장다리 클라우스도 꺼꾸리 클라우스에게 말 네 필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1주일에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일요일에만. 일요일이면 꺼꾸리 클라우스는 마치 자기 말이나 되는 것처럼 다섯 필의 말에 채찍을 휘두르며 열심히 일했다. 태양은 눈부시게 빛나고 교회 종이 유쾌하게 울려 퍼졌으며,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성경책을 겨드랑이에 끼고 지나갔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러 교회에 가는 것이다. 다섯 필의 말로 밭을 맬 때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면 꺼꾸리 클라우스는 너무나 자랑스러워 더욱 힘있게 채찍을 휘두르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랴, 다섯 마리 내 말들아!

    그러면 장다리 클라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 한 마리만 네 거잖아.

    그러나 꺼꾸리 클라우스는 사람들이 옆을 지나갈 때면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이랴, 다섯 마리 내 말들아!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지 말랬잖아. 한 번만 더 그러면 네 말을 죽여 버릴 테야.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만들어 버리겠어! 화가 난 장다리 클라우스는 꺼꾸리 클라우스에게 이렇게 경고하곤 했다. 그러면 꺼꾸리 클라우스는 다시는 안 그럴게. 정말이야. 하고 빌었다. 그러나 다시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고개를 끄떡여 인사하자, 꺼꾸리 클라우스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그는 다섯 필의 말을 끌며 밭을 매는 것이 아주 멋져 보일 거라고 생각하고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랴, 다섯 마리 내 말들아!

    어디 맛 좀 봐라!

    장다리 클라우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래서 꺼꾸리 클라우스의 말을 망치로 쳐서 죽이고 말았다.

    꺼꾸리 클라우스의 말을 망치로 쳐서 죽이고 말았다.

    아, 난 이제 말이 한 필도 없구나.

    꺼꾸리 클라우스는 슬피 울었다. 그는 말가죽을 벗겨서 바람에 잘 말린 뒤 자루 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말가죽을 팔려고 도시로 향했다. 그런데 도시로 가려면 어두운 숲을 지나 매우 먼 길을 가야 했다.

    그가 숲 한가운데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폭풍우가 일기 시작했다. 꺼꾸리 클라우스는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이리저리 길을 찾아 헤맸으나 도시로 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날이 점점 저물어 오고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도시에 닿으려면 아직도 멀었고 그렇다고 너무 멀리 왔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때 길가에 서 있는 큰 농가가 눈에 띄었다. 덧문은 모두 닫혀 있었지만 위쪽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저기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해야지.’ 꺼꾸리 클라우스는 이렇게 생각하며 농가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한 부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하지만 부인은 꺼꾸리 클라우스의 절박한 사정을 듣고도 남편이 낯선 사람을 집에 들여놓지 못하게 한다면서 거절했다.

    그렇다면 여기 문 밖에서라도 자야겠군요. 꺼꾸리 클라우스가 말했다. 그러자 부인은 쾅 하고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때마침 농가 옆에는 건초 더미가 있었고, 건초 더미와 농가 사이에는 초가 지붕을 얹은 작은 헛간이 있었다.

    옳지, 저 위에서 자면 되겠구나. 꺼꾸리 클라우스는 초가 지붕을 바라보면서 기뻐했다. 근사한 침대가 되겠어. 설마 황새가 날아와서 다리를 물지는 않겠지?

    그런데 그의 말대로 초가 지붕 위에는 둥지를 틀고 있는 황새 한 마리가 있었다. 헛간 지붕 위로 기어올라간 꺼꾸리 클라우스가 자리를 잡고 돌아눕는데 나무로 된 농가의 덧문이 보였다. 덧문은 창문 꼭대기까지 가리지 않아서 방 안이 들여다보였다. 방 안에는 큰 식탁이 있었고, 식탁 위에는 포도주, 구운 고기, 먹음직스런 생선이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식탁에는 농부의 아내와 교회지기가 앉아 있었다. 부인은 교회지기에게 포도주를 따라 주고 생선을 권했다. 생선은 교회지기가 즐겨 먹는 음식인 모양이었다.

    ‘나도 먹고 싶은걸.’ 꺼꾸리 클라우스는 군침을 삼키며 목을 길게 빼고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 안에는 커다랗고 맛있는 파이가 잔뜩 있었다. 꼭 잔칫집 같았다.

    그때 길 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농부가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농부는 마음씨가 아주 착했지만 교회지기를 몹시 싫어했다. 그는 교회지기만 보면 꼭 미친 사람처럼 흥분하곤 했다. 그래서 교회지기는 농부가 집을 비울 때만 찾아왔고, 마음씨 착한 부인은 교회지기에게 정성껏 음식을 대접하곤 했던 것이다.

    남편이 돌아오는 소리를 듣자 부인이 기겁하며 교회지기에게 방 안에 있는 커다란 빈 상자 속에 숨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포도주를 치우고 음식을 모두 오븐 속에 감추었다. 남편이 보게 되면 틀림없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런! 꺼꾸리 클라우스는 음식이 없어지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 소리쳤다.

    거기 누가 있소? 왜 거기 누워 있소? 내려오시오. 어서 우리 집으로 갑시다. 농부가 꺼꾸리 클라우스를 올려다보았다.

    꺼꾸리 클라우스는 길을 잃었다면서 하룻밤 묵게 해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좋소, 하지만 먼저 배 좀 채웁시다.

    이번에는 부인도 꺼꾸리 클라우스를 친절하게 대했다. 하지만 귀리죽만 내놓았다. 배가 고팠던 농부는 맛있게 먹었지만 꺼꾸리 클라우스는 오븐 속에 들어 있는 구운 고기며 생선이며 파이가 눈에 어른거려 귀리죽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꾀를 냈다. 발치에 놓아 둔 자루 위에 발을 올려놓자 말가죽이 들어 있는 자루 속에서 소리가 났다.

    쉿! 꺼꾸리 클라우스가 자루를 보며 이렇게 말하고는 또 한 번 자루를 밟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 큰 소리가 났다.

    아니, 자루 속에 뭐가 들어 있소? 농부가 물었다.

    아, 이 속에 마법사가 있답니다. 귀리죽을 먹지 말라고 하는군요. 우리를 위해 오븐 속에 구운 고기와 생선과 파이를 만들어 놓았다는데요.

    아주 멋지군요! 농부는 벌떡 일어나서 오븐으로 갔다. 거기에는 농부의 아내가 숨겨 둔 맛있는 음식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러나 농부는 식탁 아래 있는 마법사가 만든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농부의 아내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그들에게 음식을 차려 주었다. 두 사람은 생선과 고기와 파이를 맛있게 먹었다.

    꺼꾸리 클라우스는 다시 자루를 밟아 소리를 냈다.

    이번엔 또 뭐라고 하는 거요? 농부가 신기한 듯이 물었다.

    포도주 세 병을 갖다 놓았으니까 먹으라는데요. 저기 오븐 옆 구석에 있다는군요.

    부인은 하는 수 없이 감춰 두었던 포도주도 내와야 했다. 농부는 술을 마시자 몹시 기분이 좋아졌다. 농부도 자루 속에 든 마법사가 갖고 싶었다.

    마법사가 악마도 부를 수 있을까요? 기분이 좋으니까 악마도 한 번 보고 싶군요.

    그러지요. 마법사는 내 부탁이면 뭐든지 들어주니까요. 이봐, 그렇지? 그러면서 꺼꾸리 클라우스는 자루를 건드려 소리가 나게 했다. 들리지요? 마법사가 그렇다라고 대답하는군요. 하지만 악마가 너무 흉측해서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나을 거라는데요.

    아니, 하나도 겁날 것 없소. 대체 악마는 어떻게 생겼소?

    악마는 교회지기와 꼭 닮았지요.

    그래? 그렇담 참으로 소름끼치겠군. 내가 얼마나 교회지기를 싫어하는지 아시오? 하지만 뭐 괜찮소. 어떻게 생겼는지 알 만하오. 자, 이제 준비됐으니 악마를 부르시오. 하지만 내게 너무 가까이 오게 하지는 마시오.

    잠깐, 마법사에게 물어보지요. 꺼꾸리 클라우스는 자루를 밟으며 귀를 가까이 갖다 댔다.

    뭐라고 그러오?

    구석에 있는 상자를 열어 보면, 그 안에 악마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는군요. 하지만 악마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뚜껑을 꼭 붙들고 있어야 한답니다.

    자, 와서 뚜껑 좀 붙들어 주시겠소?

    농부는 교회지기가 숨어 있는 상자로 다가갔다. 교회지기는 잔뜩 겁을 먹고 가슴을 조이고 있었다. 농부가 살짝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 악마다! 정말 교회지기처럼 생겼군. 아, 흉측해. 농부는 이렇게 외치며 퉁기듯이 뒤로 물러났다. 악마를 본 농부는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밤이 이슥해지도록 술잔을 주고받았다.

    내게 그 마법사를 팔 수 없겠소? 돈은 원하는 대로 주리다. 그래, 금을 한 됫박 주지. 거나하게 취한 농부가 말했다.

    아니, 그럴 수 없어요. 이 마법사는 내게 매우 소중하답니다. 뭐든지 원하는 것을 주니까요.

    그래도 그 마법사를 꼭 갖고 싶소. 농부는 마법사를 팔라고 졸라댔다.

    정 그러시다면, 이렇게 하룻밤 재워 주기도 했는데 거절할 수가 없군요. 약속대로 금 한 됫박을 주시지요. 가득 담아서 말입니다. 당신 마음씨가 좋아서 할 수 없이 파는 겁니다. 마침내 꺼꾸리 클라우스가 승낙했다.

    물론이지요! 그리고 악마가 들어 있는 상자는 가져가 버리시오. 한시도 저 상자를 내 집에 두고 싶지 않소. 악마가 아직도 저 안에 들어 있는지 모르겠군.

    이렇게 해서 꺼꾸리 클라우스는 말린 말가죽이 들어 있는 자루를 농부에게 주고 돈을 한 됫박 꼭꼭 채워서 받았다. 농부는 돈과 상자를 싣도록 큰 짐수레까지 주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꺼꾸리 클라우스는 돈과 교회지기가 숨어 있는 상자를 가지고 길을 떠났다. 숲에 이르자 꺼꾸리 클라우스는 숲 한 쪽으로 흐르는 강 위로 놓인 다리 위에 멈추어 섰다. 넓고 깊은 강은 물살이 세서 일단 빠지면 헤엄쳐 살아 나오기 힘들었다. 꺼꾸리 클라우스는 다리 한가운데에 서서 상자 안의 교회지기가 들으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 이 바보 같은 상자를 가져가서 뭘 하겠어? 무겁기만 하지. 안에 돌덩이가 들었나? 굉장히 무겁군. 더 이상 가지고 가다간 지쳐서 쓰러지겠어. 차라리 강에다 던져 버려야겠군. 상자가 강물을 타고서 집까지 날 쫓아온다면 다행이고, 안 그러면 그만이지 뭐.

    꺼꾸리 클라우스는 당장이라도 강물 속에 던져 버릴 것처럼 상자를 높이 들어올렸다.

    잠깐, 멈추시오! 제발 날 먼저 꺼내 주시오! 교회지기가 상자 안에서 다급하게 외쳤다.

    어? 악마가 아직도 있군. 빨리 강물에 던져 죽여 버려야지. 꺼꾸리 클라우스는 무서워하는 척하며 말했다.

    안 돼! 안 돼! 날 살려 주면 돈을 한 됫박 줄게. 교회지기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 그렇다면 문제가 좀 다르지.

    꺼꾸리 클라우스는 상자를 열었다. 교회지기는 상자에서 기어 나와 빈 상자를 강물에 던져 버리고는 집으로 갔다. 물론 꺼꾸리 클라우스는 교회지기에게 돈 한 됫박을 받았다. 이제 손수레는 돈으로 가득했다.

    말 값을 아주 톡톡히 받았는걸. 꺼꾸리 클라우스는 너무 기뻤다. 집으로 돌아온 꺼꾸리 클라우스는 방바닥에 산더미처럼 돈을 쌓아 놓았다. 죽은 말 덕분에 이렇게 부자가 된 걸 알면 장다리 클라우스가 얼마나 약오를까! 그러니 사실대로 얘기하지 말아야지.

    꺼꾸리 클라우스는 이웃집 소년을 시켜 장다리 클라우스에게 재는 됫박을 빌려 오게 했다.

    ‘이걸로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이상하게 생각한 장다리 클라우스는 됫박 바닥에다 타르를 칠해 놓았다. 그러면 됫박에 담은 물건이 조금이라도 붙기 때문이었다. 장다리 클라우스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됫박을 되돌려 받았을 때 그 안에는 은화 세 개가 붙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장다리 클라우스는 즉시 꺼꾸리 클라우스에게 달려갔다.

    어디서 그 많은 돈이 생겼지? 장다리 클라우스가 다그쳐 물었다.

    아, 그건 죽은 내 말가죽 값이야. 어제 팔았지.

    정말 값을 잘 받았구나.

    욕심이 생긴 장다리 클라우스는 급히 집으로 달려와 말 네 마리를 모두 죽여서 가죽을 벗겼다. 그리고는 말가죽을 팔러 도시로 갔다.

    말가죽 사세요, 가죽이오! 가죽 사세요! 장다리 클라우스는 큰 소리로 외치면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구두장이들이 몰려나와 얼마냐고 물었다.

    가죽 하나에 은화 한 됫박이오. 장다리 클라우스가 얼른 대답했다.

    정말 미친놈이로구먼. 누가 그렇게 비싸게 쳐준대?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가죽이오, 가죽. 가죽 사시오! 장다리 클라우스는 이렇게 외치며 사람들이 값을 물을 때마다 은화 한 됫박이라고 대답했다.

    우릴 바보로 아는구먼. 화가 난 사람들이 장다리 클라우스에게 달려들었다. 구두장이들은 가죽끈을, 무두장이들은 가죽 앞치마를 들고 나와서 장다리 클라우스를 마구 두들겨 팼다.

    가죽이오, 가죽? 그들은 장다리 클라우스를 흉내 내며 비웃었다. 우리를 바보로 아는 너 같은 놈은 혼나야 해. 네 가죽을 퍼렇게 만들어 주지. 당장 이 도시에서 꺼져!

    장다리 클라우스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쳤다. 그렇게 죽도록 맞아 보긴 처음이었다.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 장다리 클라우스는 화가 났다.

    꺼꾸리 클라우스에게 다 갚아 줄 거야. 죽도록 패 주겠어

    얼마 후 꺼꾸리 클라우스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꺼꾸리 클라우스를 항상 못살게 굴며 차갑게 대했었지만 꺼꾸리 클라우스는 몹시 슬펐다. 꺼꾸리 클라우스는 할머니를 따뜻한 자기 침대에 뉘었다. 혹시나 다시 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래서 그날 밤 할머니는 꺼꾸리 클라우스의 침대에 편안하게 누워 있었고, 꺼꾸리 클라우스는 방구석에 놓인 의자에서 잠을 잤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자주 있었다.

    밤이 이슥해지자 문이 살그머니 열리더니 도끼를 든 장다리 클라우스가 나타났다. 그는 꺼꾸리 클라우스의 침대가 있는 곳을 잘 알고 있었다. 장다리 클라우스는 곧장 침대로 가서 도끼를 힘껏 내리쳤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을 꺼꾸리 클라우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나쁜 놈! 이제 더 이상 날 속이지 못할 거다. 장다리 클라우스는 이렇게 소리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정말 못된 친구군. 날 죽이려 하다니. 할머니가 이미 돌아가셨기에 망정이지 살아 계셨더라면 큰일날 뻔했어’ 하고 꺼꾸리 클라우스는 생각했다.

    꺼꾸리 클라우스는 할머니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이웃집에서 말을 빌려 마차에 매달았다. 그리고는 마차 뒷자리에 할머니를 앉히고 숲을 지나 달렸다. 해가 뜰 무렵 꺼꾸리 클라우스는 어느 큰 주막 앞에 닿았다. 그는 마차를 멈추고 요기를 하려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막 주인은 부자에다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성질이 여간 급한 게 아니었다.

    어서 오게. 오늘은 일찍 왔군. 주막 주인이 꺼꾸리 클라우스를 맞았다.

    네, 할머니와 도시에 나가는 길이거든요. 저기 마차에 앉아 계시지요. 할머니에게 꿀술 한 잔 갖다 주시겠어요? 하지만 할머니는 귀가 안 들리니까 크게 말씀하셔야 해요.

    그래, 그렇게 하지.

    주막 주인은 유리잔에 꿀술을 따라서 죽은 할머니에게로 가져갔다. 할머니는 꼼짝도 않고 마차 뒷좌석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이거 드시오, 손자가 드리는 술이라오. 주막 주인이 술을 내밀었지만 할머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안 들리세요? 이 술 드시라구요. 당신 손자가 갖다 주라고 했다구요! 술집 주인은 할머니의 귀에 바짝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술집 주인이 몇 번이고 소리쳤지만 할머니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었다. 화가 난 술집 주인은 술잔을 할머니의 얼굴에 내던졌다. 그 바람에 술잔이 할머니의 코에 부딪혔고, 할머니는 그만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할머니를 묶지 않고 마차 뒤에 앉혀만 놨었던 것이다.

    꺼꾸리 클라우스가 문 밖으로 뛰쳐나와 주막 주인의 멱살을 잡았다. 이게 무슨 짓이오! 당신이 우리 할머니를 죽였어! 당신이 죽였다구! 할머니 머리에 이렇게 구멍이 나 버렸어.

    정말 안됐네. 모든 게 이 놈의 고약한 성질 때문일세. 이보게, 꺼꾸리 클라우스, 내 자네한테 한 됫박 돈을 줌세. 그리고 내 할머니처럼 잘 묻어 주지. 이왕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어떡하겠나? 그저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말 말아 주게나. 그렇지 않으면 난 목이 달아날 걸세. 생각만 해도 정말 끔찍하네. 주막 주인이 괴로워서 손을 비틀며 얘기했다.

    이렇게 해서 꺼꾸리 클라우스는 또 한 됫박의 돈을 얻었고, 술집 주인은 할머니를 자기 할머니처럼 정성껏 묻어 주었다. 많은 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꺼꾸리 클라우스는 다시 이웃집 소년을 장다리 클라우스에게 보내 재는 됫박을 빌려 오게 했다.

    뭐라구? 꺼꾸리 클라우스가 죽지 않았단 말이야?.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지.

    장다리 클라우스는 직접 재는 됫박을 들고 꺼꾸리 클라우스를 찾아갔다. 아니, 그 많은 돈을 어디서 났지? 장다리 클라우스는 꺼꾸리 클라우스가 가진 돈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며 물었다.

    그날 침대에 누워 있었던 사람은 바로 우리 할머니였어. 네가 우리 할머니를 죽인 거지. 그래서 한 됫박 돈을 받고 할머니를 팔았어.

    정말 잘 받았구나.

    집에 돌아온 장다리 클라우스는 도끼로 할머니를 죽여 버렸다. 그리고는 할머니를 마차에 싣고 약제사를 찾아가 죽은 사람을 사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구요? 어디서 발견했소? 약제사가 물었다.

    바로 우리 할머니지요. 돈을 벌려고 제가 죽였답니다. 장다리 클라우스가 신이 나서 말했다.

    오, 하느님, 우리를 굽어살피소서! 정말 정신 나간 사람이군. 그런 말은 입 밖에 꺼내지도 마시오. 또 한 번만 그랬다간 당신 목이 달아날 줄 아시오. 약제사는 할머니를 죽인 것이 얼마나 나쁜 짓인가를 설명하고 그런 짓을 하면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덜컥 겁이 난 장다리 클라우스는 얼른 그곳을 빠져나와 마차를 몰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약제사와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며 난폭하게 마차를 몰아도 내버려두었다.

    꼭 복수하고 말 테다! 두고 보자, 꺼꾸리 클라우스. 큰길로 들어섰을 때 장다리 클라우스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집에 도착한 장다리 클라우스는 큰 자루를 가지고 꺼꾸리 클라우스에게 달려갔다. 또 날 속였어. 내가 말을 때려죽인 것도 할머니를 죽인 것도 다 너 때문이야.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날 바보로 만들 수 없을걸.

    장다리 클라우스는 꺼꾸리 클라우스의 몸을 꽁꽁 묶어 자루 속에 집어넣었다. 널 강물에 던져 버릴 테다.

    장다리 클라우스는 자루를 메고 강으로 향했다. 강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게다가 꺼꾸리 클라우스는 여간 무거운 게 아니었다. 교회 옆을 지날 때 오르간 소리와 찬송가 소리가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 잠깐 교회에 들어가 찬송가를 듣고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장다리 클라우스는 꺼꾸리 클라우스가 든 자루를 교회 문 옆에 내려놓고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꺼꾸리 클라우스가 빠져나올 리도 없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교회에 와 있으니 안전했다.

    아이쿠, 사람 살려! 꺼꾸리 클라우스는 자루 안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밧줄이 꽁꽁 묶여 있어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때 백발이 성성한 한 늙은 목자가 교회 쪽으로 다가왔다. 긴 막대기를 들고 소 떼를 몰고 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만 꺼꾸리 클라우스가 들어 있는 자루가 소 떼들의 발길에 채어 뒤집히고 말았다.

    아이쿠! 난 아직 젊은데 벌써 하늘 나라에 갈 때가 왔나? 꺼꾸리 클라우스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 불쌍한 내 신세. 난 늙었는데도 아직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오. 늙은 목자가 한탄했다.

    자루를 풀어 주세요. 나 대신 여기 들어와 있으면 곧 하늘 나라로 갈 수 있어요. 꺼꾸리 클라우스가 소리쳤다.

    그래? 그럼 그리 하지. 늙은 목자가 자루를 풀어 주자 꺼꾸리 클라우스는 얼른 자루에서 나왔다.

    젊은이, 나 대신 가축을 잘 돌봐 주겠나? 노인이 자루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그럼요. 꺼꾸리 클라우스는 자루를 단단히 묶어 놓고 소 떼를 몰고 도망갔다.

    잠시 후 장다리 클라우스가 교회에서 나와 다시 자루를 등에 메었다. 자루는 아까보다 훨씬 더 가벼웠다. 늙은 목자는 몸무게가 꺼꾸리 클라우스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왜 이렇게 가볍지? 아, 교회에 갔다 와서 그럴 거야.’ 장다리 클라우스는 이렇게 생각하며 강으로 향했다. 그는 깊고 넓은 강물 속에 자루를 힘껏 던졌다. 그 안에 꺼꾸리 클라우스가 들어 있으리라 생각하고 말이다.

    물 속에서 잘 살아라, 나쁜 놈아! 이제 날 속이지 못할 거다!

    장다리 클라우스는 드디어 꺼꾸리 클라우스가 없어졌다고 생각하자 속이 후련했다. 그는 기분 좋게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두 길이 만나는 곳에 꺼꾸리 클라우스가 나타난 게 아닌가. 게다가 그는 소 떼를 몰고 있었다. 장다리 클라우스는 깜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된 거지? 방금 널 강물에 던져 버리고 오는 중인데 말이야?

    그래, 맞아. 넌 30분 전에 날 강물에 내던졌지. 꺼꾸리 클라우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이 소들은 어디서 난 거니?

    이것들은 바다 소라고 하지. 날 물에 빠뜨려 줘서 고마워. 이제 난 너보다 더 부자야. 자루 속에 꽁꽁 묶여 있을 땐 정말 무서워 죽을 뻔했지. 네가 날 다리 위에서 차가운 강물 속으로 던질 때, 찬바람이 귀를 스쳤어. 이제 죽었구나 싶었지. 곧 강바닥 깊숙이 가라앉았는데, 강바닥에는 아름답고 연한 풀들이 자라고 있어서 하나도 다치지 않았어. 그런데 잠시 후 자루가 열리고 사랑스런 소녀가 다가왔지. 소녀는 눈처럼 하얀 옷에 젖은 머리에는 녹색 잎으로 만든 화관을 쓰고 있었어. 소녀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지. ‘오셨군요, 꺼꾸리 클라우스님. 먼저 이 소 떼를 드릴게요. 저 길로 1마일 가면 또 소 떼가 나올 거예요. 모두 당신 거예요.’ 강은 바다에 사는 사람들이 다니는 큰길이었어. 바다 사람들은 바다에서부터 강이 끝나는 육지까지 걷기도 하고 물살을 타고 다니기도 했지. 강바닥에는 온갖 아름다운 꽃과 싱싱한 풀들이 자라고 있었고 물고기들은 새가 공중을 날 듯이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가곤 했어. 그곳 사람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 게다가 구릉과 계곡에서 풀을 뜯는 근사한 가축들이라니!

    그렇담, 왜 다시 나온 거야? 그렇게 아름답다면 말야? 나 같으면 돌아오지 않았을 텐데. 장다리 클라우스가 호기심에 찬 눈으로 말했다.

    다 이유가 있지. 아까 들었지? 바다 소녀가 1마일 가면 소 떼가 나온다고 했다는 이야기 말야. 한데 소녀가 말한 길이란 바로 강을 말하는 것이었어. 강은 얼마나 꼬불꼬불한지 몰라. 오른쪽으로 굽었다 왼쪽으로 굽었다 해서 강을 따라가자면 너무 멀지. 그래서 지름길로 가려고 육지로 올라온 거야. 들판을 가로질러 강까지 가면 반 마일을 줄일 수 있지. 그러면 소도 더 빨리 가질 수 있을 테고 말이야.

    넌 참 좋겠다! 나도 강바닥에 가면 너처럼 바다 소를 얻을 수 있을까? 장다리 클라우스가 부러운 눈으로 물었다.

    그럼. 하지만 넌 너무 무거워서 자루에 넣어서 강까지 들고 갈 수가 없어. 네가 그곳에 먼저 가서 자루 속에 들어가 있으면 내가 던져 줄게.

    정말 고마워. 하지만 명심해! 만약 내가 바다 소를 얻지 못하면 그땐 올라와서 널 가만 두지 않을 테야!

    그래, 알았어. 너무 흥분하지 마.

    두 사람은 강으로 갔다. 강에 다다르자 목이 말랐던 소 떼는 물을 보고 강가로 달려갔다.

    저것 봐. 저 소들이 달려가는 걸 말야. 다시 강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 꺼꾸리 클라우스가 말했다.

    자, 어서 날 도와줘. 안 그러면 패 줄 테니까. 장다리 클라우스가 바다 소를 어서 갖고 싶어 재촉했다. 그리고는 소 등에 실려 있던 자루 속으로 들어갔다.

    자루를 단단히 묶고는 발로 걷어찼다.

    돌을 집어넣어. 안 그러면 가라앉지 않을지도 몰라.

    그건 염려 마. 꺼꾸리 클라우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큰 돌을 자루 속에 넣었다. 그리고 자루를 단단히 묶고는 발로 걷어찼다. ‘첨벙!’ 하고 장다리 클라우스를 담은 자루가 강물 속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장다리 클라우스가 바다 소를 찾지 못할까 봐 걱정이군. 꺼꾸리 클라우스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소 떼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

    3

    완두콩 공주

    옛날에 진짜 공주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왕자가 살고 있었다. 왕자는 진짜 공주를 찾으려고 온 세상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딜 가도 공주는 많았지만 마음에 쏙 드는 공주는 없었다. 그들은 진짜 공주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왕자는 진짜 공주와 결혼하고 싶은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슬퍼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저녁, 왕자가 사는 왕국에 폭풍우가 몰아쳤다. 무시무시하게 번개가 치고 고막을 뚫을 듯한 천둥소리가 울리면서 장대 같은 비가 쏟아졌다. 정말 무시무시했다. 그런데 그 빗속에서 성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왕이 직접 나가 문을 열자 문 앞에 공주가 서 있었다. 가엾게도 공주는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머리카락과 옷에서 줄줄 흘러내린 빗물이 구두 뒤축으로 들어갔다가 앞부리로 나왔다. 그런 누추한 모습을 보면 공주가 아닌 것 같았지만 공주는 자기가 진짜 공주라고 말했다.

    왕이 직접 나가 문을 열자 문 앞에 공주가 서 있었다.

    ‘정말인지 빨리 알아봐야겠군.’ 공주의 말을 들은 왕비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왕비는 곧 손님용 침실로 들어가 침대보를 걷고 완두콩 한 알을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침대요 스무 장을 덮고, 그 위에 또 솜이불 스무 장을 덮었다. 그리고 공주를 그곳에서 자게 했다.

    아침이 되어 잘 잤느냐고 묻자 공주가 대답했다. 얼마나 끔찍했는지 몰라요. 밤새도록 한숨도 못 잤어요. 침대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거예요. 침대 밑에 딱딱한 것이 있었거든요. 온몸에 멍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가 진짜 공주라고 생각했다. 침대요 스무 장과 솜이불 스무 장을 깔았는데도 그 밑에 완두콩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건 공주가 틀림없었다. 진짜 공주가 아니고서야 누가 그렇게 예민할 수 있겠는가. 왕자는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그 완두콩은 왕궁 박물관에 전시했다. 누가 훔쳐가지 않았다면 여러분도 가서 그 완두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진짜이다.

    그리고 그 완두콩은 왕궁 박물관에 전시했다.

    4

    꼬마 이다의 꽃

    불쌍하게도 내 꽃들이 말라죽어 버렸어요! 어제 저녁만 해도 참 예뻤는데. 그런데 잎들이 전부 시들어 버렸어요. 왜 그러죠?

    꼬마 이다는 소파에 앉아 있는 대학생 아저씨에게 물었다. 이다는 그 아저씨가 매우 좋았다. 아저씨는 아름다운 옛날 이야기도 해 주고 꽃뿐만 아니라 하트 모양, 춤추는 소녀, 문이 열려 있는 큰 궁전 등, 예쁜 그림들을 오려 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기분 좋은 사람이었다.

    오늘은 왜 꽃들이 이렇게 병들어 보여요? 이다는 시든 꽃 한 송이를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니? 꽃들은 어젯밤 무도회에 갔었단다. 그래서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는 거지.

    하지만 꽃들이 어떻게 춤을 춰요? 꽃은 춤을 못 추잖아요. 이다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렇지 않아. 꽃도 춤을 출 줄 안단다. 어둠이 내리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잠들면 꽃들은 이리저리 즐겁게 뛰어다니지. 꽃들은 밤마다 무도회를 연단다.

    어린 꽃들도 무도회에 가나요?

    그럼. 골짜기에 피어 있는 어린 데이지 꽃과 백합들도 무도회에 간단다.

    그 예쁜 꽃들은 어디서 춤을 추나요?

    성문 밖에 있는 큰 궁전 알지? 여름에는 왕이 살고, 정원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곳 말야. 그곳에서 백조도 보았지? 빵 부스러기를 던져 주면 헤엄쳐 오는 백조들 말야. 무도회장은 바로 그곳에 있단다. 정말이야.

    어제 엄마랑 그 정원에 갔었어요. 하지만 나뭇잎들이 다 떨어져서 나무가 벌거벗고 있었어요. 꽃은 하나도 보이지 않던걸요. 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여름에는 그렇게 많았는데 말예요.

    꽃들은 모두 궁전 안으로 들어갔단다. 아저씨가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왕과 신하들이 모두 시내로 나오면 꽃들은 궁전으로 달려가 신나게 놀지. 먼저 가장 아름다운 장미 두 송이가 옥좌에 앉는단다. 바로 왕과 왕비지. 그리고 붉은 맨드라미꽃들이 허리를 굽히고 양쪽으로 늘어선단다. 이들은 시종들이라고 해. 곧이어 예쁜 꽃들이 들어서면 화려한 무도회가 시작되지. 푸른 제비꽃들은 히아신스와 크로커스 꽃들과 춤을 추는데, 푸른 제비꽃은 바로 해군 사관학교 생도들이고, 히아신스와 크로커스는 젊은 아가씨들이란다. 튤립과 노란 색 참나리 꽃은 늙은 귀부인들이야. 그들은 앉아서 꽃들이 춤추는 걸 지켜보지. 무도회가 잘 진행되는지 감독하는 것이란다.

    그럼, 꽃들이 궁전에서 춤춰도 혼내는 사람이 없나요?

    꽃들의 무도회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가끔 밤중에 늙은 궁전 관리인이 오긴 하지. 하지만 큰 열쇠 꾸러미를 갖고 있어서 걸을 때마다 열쇠들이 딸랑거린단다. 열쇠 소리가 들리면 꽃들은 얼른 긴 커튼 뒤에 숨어서 고개만 내밀고 궁전 관리인을 살피지. 그러면 늙은 관리인은 꽃향기가 나는 것 같은데, 하고 말하지만 꽃들을 찾아내진 못한단다.

    정말 멋져요! 이다는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나도 꽃들을 볼 수 있나요?

    그럼, 볼 수 있고 말고. 다음에 그곳에 가면 잊지 말고 창문으로 들여다보렴. 그럼 꽃들이 보일 거야. 나도 오늘 봤지. 소파 위에 노란 색 긴 백합이 몸을 뻗고 누워 있더구나. 그 꽃은 시녀였지.

    식물원에 있는 꽃들도 무도회에 갈 수 있나요? 그렇게 멀리까지 갈 수 있어요?

    물론이지. 꽃들은 마음만 먹으면 날 수 있단다. 예쁜 나비들을 알지? 붉은 색, 노란 색, 흰색 나비들 말야. 꼭 꽃처럼 보이지 않니? 그 나비들이 사실은 꽃이란다. 꽃들은 꽃줄기에서 높이 뛰어올라 잎들을 날개인 양 퍼덕이며 날지. 꽃들은 착하게 굴면 줄기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아도 된단다. 낮에는 이리저리 날아다녀도 좋다는 허락을 받지. 그러면 꽃잎들이 진짜 날개가 되는 거지. 하지만 식물원에 있는 꽃들은 궁전에 가본 적이 없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밤이 되면 그곳에서 벌어지는 즐거운 무도회에 대해 전혀 모를 수도 있지. 그래서 말인데, 옆집에 사는 식물학 교수님 있잖니, 너도 알지? 그분이 이 이야기를 알게 되면 정말 놀라실 거야. 옆집 정원에 가게 되거든 꽃 하나에게 살짝 얘기해 주렴. 궁전에서 큰 무도회가 열린다고 말이야. 그러면 그 꽃이 다른 꽃들에게 그 말을 전하게 될 거고, 그러면 그 꽃들은 서둘러 무도회장으로 날아갈 거야. 그럼 교수님이 정원에 나와 보고 깜짝 놀라겠지? 꽃이 한 송이도 없을 테니까 말야. 꽃들이 어디로 가 버렸는지 의아해하실 거야.

    하지만 꽃이 다른 꽃에게 어떻게 말을 전해요? 꽃들은 말을 못 하잖아요!

    물론 말을 못 하지. 하지만 꽃들은 몸짓으로 말을 주고받는단다. 바람이 불때면 꽃들이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초록색 잎을 흔드는 걸 보았지? 바로 그렇게 말을 주고받는 거야.

    교수님도 그런 말을 이해해요?

    물론이지. 어느 날 아침, 정원에 나온 교수님은 쐐기풀이 아름답고 붉은 카네이션에게 말하는 걸 들었지. 쐐기풀은 ‘너 정말 예쁘구나. 난 네가 마음에 들어’ 하고 말했지. 하지만 교수님은 그런 모습이 보기 싫었어. 그래서 그만두라고 쐐기풀을 손으로 쳤어. 그러자 쐐기풀의 손가락인 이파리들이 교수님을 찔러 버렸지. 그 뒤 교수님은 쐐기풀을 건드리지 않는단다.

    정말 재미있어요! 이다는 소리내서 웃으며 말했다.

    어린 아이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다니, 쯧쯧. 마침 그 집에 왔다가 얘기를 듣게 된 법률학자가 말했다. 유머라고는 전혀 모르는 그 법률학자는 그 대학생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생이 이다에게 재미있는 그림을 오려 주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대학생은 가끔 교수대에 목을 매고 손에 심장을 든 사나이나, 콧잔등 위에 남편을 싣고 빗자루를 타고 날아가는 늙은 마귀할멈 그림을 오려 주었다. 그러나 법률학자는 그런 우스꽝스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원, 어린아이에게 바보 같은 환상을 심어 주다니! 엉터리 같은 이야기나 하고 말야 하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러나 꼬마 이다는 대학생 아저씨가 들려준 이야기가 정말 재미있었다. 이다는 꽃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꽃들이 밤새 내내 춤을 추어서 피곤하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거야. 아픈 게 틀림없어.’

    그래서 이다는 꽃들을 방으로 가져갔다. 방에는 작고 아담한 책상 위에 장난감들이 수북했고 서랍 속에는 예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이다의 인형 소피는 침대에 잠들어 있었다. 이다는 잠든 소피를 깨우며 말했다. 소피야, 일어나. 오늘 밤엔 서랍 속에서 자. 불쌍한 꽃들이 병들었거든. 오늘 밤 이 꽃들이 네 침대에서 자면 병이 나을 거야.

    이다는 소피를 안아 올렸다. 소피는 몹시 못마땅한 듯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침대를 빼앗겨 화가 난 것이다. 이다는 꽃들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는 차를 끓일 동안 얌전히 누워 있으라고 하면서, 차를 마시면 내일 아침에 병이 나아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해가 비쳐 눈부시지 않게 작은 침대에 달린 커튼을 꼭 여며 주었다.

    그날 저녁 내내 이다는 대학생 아저씨가 해 준 이야기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다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창문에 걸려 있는 커튼 틈새로 정원을 내다보았다. 거기에는 엄마가 심어 놓은 튤립과 히아신스를 비롯한 아름다운 꽃들이 서 있었다. 이다는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너희들 오늘 밤 무도회에 가지? 난 알아.

    그러나 꽃들은 못 들은 척했다. 이파리 하나 꼼짝하지 않았다. 그래도 꼬마 이다는 꽃들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이다는 아름다운 꽃들이 궁전에서 춤추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하며 한동안 침대에서 뒤척였다.

    내 꽃들은 무도회에 가 보았을까? 이다는 이렇게 중얼거리다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이다는 잠이 깼다. 꿈속에서 꽃들과 대학생 아저씨가 보였다. 법률학자가 대학생 아저씨를 야단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다의 침실은 쥐죽은듯이 고요했다. 책상 위에서는 램프가 훨훨 타올랐고, 엄마, 아빠는 잠들어 있었다.

    ‘내 꽃들이 아직 소피의 침대에 누워 있을까? 가 봐야지.’

    이다는 살짝 몸을 일으켜 꽃과 장난감들이 누워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방문은 약간 열려 있었다. 귀를 기울이자 방 안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피아노 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여태까지 들어보지 못한 아름다운 곡이었다.

    ‘틀림없이 꽃들이 춤을 추고 있을 거야. 정말 보고 싶어!’

    하지만 이다는 엄마, 아빠가 깰까 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다는 ‘꽃들이 이리 와 주면 좋겠는데’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꽃들은 오지 않았다. 이다는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침대에서 살며시 기어 나와 발소리를 죽이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앗, 그런데 방 안에서는 정말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방 안에는 램프가 없었지만 창문을 통해 새어 들어온 달빛이 마루 바닥을 비추어 사방이 대낮처럼 환했다. 히아신스와 튤립은 방 양쪽에 길게 두 줄로 서 있었고, 창턱에 놓여 있는 화분들은 모두 비어 있었다. 꽃들은 번갈아 가며 긴 잎을 잡고 마루 위에서 빙빙 돌며 멋진 춤을 추었다. 피아노 앞에는 노란 색 큰 백합이 앉아 있었다. 이다가 지난 여름에 보았던 바로 그 백합이 분명했다. 대학생 아저씨가 그 백합을 보고 이다의 친구인 리나를 닮았다고 말했고,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한 대학생 아저씨를 놀렸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키가 큰 노란 백합이 정말 숙녀 같았다. 아름다운 음악에 맞추어 노란 색 긴 얼굴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피아노를 치는 모습도 영락없이 리나였다.

    커다란 자주색 크로커스가 장난감들이 서 있는 책상 한가운데로 폴짝 뛰어오르더니 인형의 침대로 가서 커튼을 열어 젖혔다. 바로 병든 꽃들이 누워 있던 침대였다. 그 꽃들은 크로커스를 보더니 벌떡 일어나 함께 춤추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입술이 깨진 나이 많은 신사 인형이 일어서서 예쁜 꽃들에게 인사했다. 꽃들은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씩씩해 보였으며 신나게 노느라고 꼬마 이다가 엿보고 있는 것도 몰랐다.

    그때 무엇인가 책상에서 굴러 떨어졌다. 돌아보니 바로 사육제 지팡이였다. 지팡이는 꽃들하고 어울려 춤을 추었다. 매끄럽고 날렵한 그 지팡이 위에는 납 인형이 앉아 있었는데, 납 인형은 법률학자가 쓴 것과 똑같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사육제 지팡이는 붉은 색 뻗정다리로 꽃들 사이에서 껑충껑충 뛰면서 발을 세게 굴렀다. 지팡이가 추는 춤은 마주르카였다. 꽃들은 너무 가벼워서 발을 세게 구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마주르카를 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사육제 지팡이 위의 납 인형이 점점 더 커지더니 몸을 돌려 꽃들에게 소리쳤다.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그런 환상을 심어 줄 수 있나? 그건 말도 안되는 환상이야!

    그러자 납 인형은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법률학자의 모습과 똑같아졌다. 늙은 법률학자처럼 의심 많고 심술궂어 보였다. 그러나 종이 인형들이 납 인형의 가는 다리를 때리자 납 인형은 다시 오그라들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이다는 너무나 재미있어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사육제 지팡이가 계속 춤을 추자 법률학자를 닮은 납 인형도 춤을 춰야 했다. 납 인형은 법률학자처럼 몸이 커지든, 커다란 검은 모자를 쓴 작은 인형으로 있든 간에 춤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꽃들이 지팡이에게 간청했다. 특히 병들어 인형의 침대에 누워 있던 꽃들이 애써 주었다. 사육제 지팡이는 그제야 춤을 멈추었다. 그때 서랍 속에서 벽을 쾅쾅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다의 인형인 소피와 장난감들이 누워 있는 서랍이었다. 늙은 신사 인형이 책상으로 달려가 납작 엎드려서 서랍을 열었다. 그러자 소피가 일어나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늘 밤, 여기서 무도회가 열리는 모양이지요? 그런데 왜 내게 말해 주지 않았어요? 소피가 물었다.

    나와 춤추지 않겠나? 늙은 신사 인형이 정중하게 청했다.

    좋아요. 당신이 적당한 상대 같군요. 소피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새침하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꽃들 중 누가 와서 춤을 청할 것이라 생각하며 서랍 끝에 걸터앉았다. 그러나 춤을 청하는 꽃은 하나도 없었다. 소피는 들으라는 듯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누추한 늙은 신사는 혼자서 춤을 추었는데 그 모습이 그리 흉해 보이지는 않았다. 소피는 아무도 자기에게 신경을 써 주지 않자 쿵 하고 서랍에서 마룻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꽃들이 일제히 달려와 다치지 않았느냐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특히 소피의 침대를 썼던 꽃들이 더 걱정했다. 다행히 소피는 다친 데가 없었다. 꽃들은 소피가 침대를 내어 준 것을 알고 고마워하며 소피에게 더 잘해 주었다. 꽃들은 달빛이 환히 비치는 마루 한가운데로 소피를 데려가 함께 춤을 추었으며 다른 꽃들도 그들 주위로 원을 그리며 춤을 추었다. 소피는 몹시 행복했다. 그래서 꽃들에게 자기 침대를 계속 써도 좋으며, 자기는 서랍에서 자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꽃들이 고마워하며 말했다. 우린 오래 살지 못해. 날이 밝으면 모두 죽을 거야. 꼬마 이다에게 말해 줘. 카나리아 무덤 곁에 우릴 묻어 달라고. 그럼 우린 여름에 다시 깨어날 거야. 그땐 훨씬 더 예쁘게 피어날 거야.

    소피를 데려가 함께 춤을 추었으며 다른 꽃들도 그들 주위로 원을 그리며 춤을 추었다.

    아냐, 죽지 마! 소피는 애원하며 꽃들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면서 화려한 꽃들이 춤을 추며 들어왔다. 이다는 그 꽃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궁전에서 온 꽃들임에는 분명했다. 맨 먼저 머리에 황금빛 작은 왕관을 쓴 두 송이의 장미꽃이 들어왔다. 그들은 왕과 왕비였다. 뒤이어 귀여운 비단향꽃무와 카네이션들이 들어와 꽃들에게 인사했다. 악대도 함께였다. 큰 양귀비꽃과 작약꽃들은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완두콩 껍질로 나팔을 불었고, 푸른색 히아신스와 흰색의 작은 아네모네는 종처럼 생긴 꽃송이를 딸랑거렸다. 그 뒤로 푸른 제비꽃, 삼색 제비꽃, 데이지꽃, 골짜기의 백합이 몰려와서 한데 어우러져 입을 맞추며 춤을 추었다. 참으로 사랑스런 모습이었다.

    이윽고 꽃들은 서로 작별 인사를 했다. 꼬마 이다도 슬그머니 침대로 들어가 이 모든 광경을 다시 떠올리며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이다는 잠에서 깨자마자 꽃들이 아직도 누워 있는지 보려고 작은 책상으로 달려가 침대 커튼을 젖혔다. 과연, 꽃들은 그대로 누워 있었다. 하지만 어제보다 훨씬 더 기운이 없어 보였다. 소피는 이다가 뉘어 놓은 대로 서랍 속에 들어 있었으나 무척 졸리는 듯했다.

    꽃들이 내게 전하라고 한 말 기억나? 꼬마 이다가 물었지만 소피는 멍청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너 아주 못됐구나! 꽃들이 너와 함께 춤도 춰 주었는데 꽃들의 부탁을 잊어버리다니. 이다는 곧 귀여운 새들이 그려진 작은 종이 상자를 가져와 시든 꽃들을 뉘었다. 이게 너희들의 아름다운 관이란다. 나중에 사촌들이 오면 너희들을 저기 바깥 정원에 묻는 걸 도와줄 거야. 그럼 내년 여름에 다시 아름답게 피어나겠지?

    그때 방문이 열리면서 화려한 꽃들이 춤을 추며 들어왔다.

    이다에게는 요나스와 아돌프라는 마음 착한 두 사촌이 있었다. 두 사촌은 아버지에게 활을 선물 받았는데 이다에게 자랑하려고 찾아왔다. 그래서 이다는 가엾은 죽은 꽃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꽃들을 묻어 주자고 했다. 요나스와 아돌프는 활을 어깨에 메고 앞장섰고, 이다는 시든 꽃이 든 예쁜 상자를 들고 뒤따랐다. 그들은 정원에 작은 무덤을 팠다. 이다는 꽃들에게 입을 맞추고 꽃 상자를 흙 속에 묻었다. 요나스와 아돌프는 애도의 뜻으로 하늘 높이 활을 쏘아 올렸다.

    5

    엄지 아가씨

    아주 옛날, 작은 아이를 몹시 갖고 싶어하는 부인이 살았다. 그러나 부인은 그 소망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던 끝에 부인은 한 요정을 찾아갔다.

    정말이지 작은 아이를 갖고 싶은데, 어디 가면 얻을 수 있을까요?

    그거야 아주 쉽답니다. 여기 보리 낟알이 하나 있는데, 이건 농부의 밭에서 자라는 보리나 닭들이 쪼아먹는 보리와는 다르답니다. 이걸 화분에 심고 지켜보세요. 요정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부인은 보리 낟알 값으로 요정에게 12실링을 주었다. 그리고는 곧 집으로 돌아와 보리 낟알을 심었다. 얼마 후 커다랗고 눈부신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그 꽃은 꼭 튤립 같았으나 꽃잎들은 꽃봉오리처럼 꼭 오므라져 있었다.

    참 아름답기도 하지!

    부인은 붉고 노란 꽃잎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꽃잎이 하나 둘씩 펴지면서 꽃봉오리가 열렸다. 정말 튤립이었다. 그런데 꽃 속에는 벨벳처럼 부드러운 녹색 수술 위에 아주 가냘프고 얌전한 작은 소녀가 앉아 있지 않은가! 깜찍하고 귀여운 그 소녀는 엄지손가락 반도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엄지 아가씨라고 불렀다. 엄지 아가씨는 밤에는 푸른 제비 꽃잎과 장미 꽃잎을 이불 삼아 멋진 호두 껍질에서 잤다. 그리고 낮에는 식탁 위에서 놀았다. 부인은 수반에 물을 가득 담아 가장자리에 빙 둘러서 꽃을 꽂은 다음 물 위에 커다란 튤립 꽃잎 하나를 띄워 놓곤 했다. 이 튤립 꽃잎은 엄지 아가씨의 보트였다. 엄지 아가씨는 튤립 꽃잎 위에 앉아 흰 말털로 노를 저어 물 위를 오가면서 놀았다. 엄지 아가씨는 노래도 잘 불렀는데,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부드럽고 달콤한 노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아주 크고 못생긴 두꺼비 한 마리가 깨진 유리창 틈새를 통해 살금살금 기어들어 왔다. 그리고는 엄지 아가씨가 장미 꽃잎을 덮고 잠들어 있는 식탁으로 펄쩍 뛰어올라 갔다.

    참 작고 예쁘군. 며느리로 삼아야지.

    두꺼비는 엄지 아가씨가 잠들어 있는 호두 껍질을 물고 창문을 통해 정원으로 뛰어내렸다. 두꺼비는 바로 정원에 있는 질퍽질퍽한 시냇가에서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엄마 두꺼비보다 얼굴이 더 흉측하게 생긴 아들 두꺼비는 예쁜 엄지 아가씨를 보자 너무 기뻐서 꺼억, 꺼억 하고 소리를 냈다.

    그렇게 소리지르지 마라, 깰라. 그럼 도망가 버릴지도 몰라. 백조 깃털처럼 가벼우니까. 어서 시냇물에 떠 있는 연꽃잎에다 옮겨 놓자. 이렇게 작고 가벼운 아이에게는 연꽃잎이 섬처럼 커 보일 거야. 그러니 도망칠 수도 없겠지. 자, 어서 옮겨 놓고 습지 밑에 신방을 꾸미자꾸나. 엄마 두꺼비가 말했다.

    시냇물에는 연꽃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커다란 녹색 연꽃잎들은 마치 물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물결 따라 살랑살랑 춤을 추었다. 그 중 제일 큰 잎은 다른 잎들보다 더 멀리 있었는데, 엄마 두꺼비는 큰 연꽃잎으로 헤엄쳐 가서 엄지 아가씨가 잠들어 있는 호두 껍질을 그 위에 살짝 놓았다.

    아침 일찍 잠이 깬 엄지 아가씨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곤 커다란 녹색 잎들과 시냇물뿐이었다. 도저히 땅으로 헤엄쳐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겁이 덜컥 난 엄지 아가씨는 그만 엉엉 울어 버리고 말았다.

    그 시간에 엄마 두꺼비는 골풀과 노란색 야생화로 늪지 아래에 신방을 꾸미느라 매우 바빴다. 엄마 두꺼비는 새며느리에게 정말 예쁜 방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신방을 다 꾸민 엄마 두꺼비는 흉측하게 생긴 아들과 함께 엄지 아가씨가 있는 연꽃잎으로 헤엄쳐 갔다. 엄마 두꺼비는 엄지 아가씨를 빨리 신방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그래서 엄지 아가씨에게 인사를 건네고 이렇게 말했다. 얘가 내 아들이란다. 네 남편 될 사람이지. 넌 시냇가 늪지에서 행복하게 살게 될 거야.

    꺼억, 꺼억, 꺼억 아들 두꺼비가 기쁘다는 듯이 웃어댔다.

    엄마 두꺼비는 엄지 아가씨를 녹색 꽃잎 위에 혼자 놔둔 채 우아한 침대만 가지고 가 버렸다. 혼자 남은 엄지 아가씨는 무서워서 목이 쉬도록 울고 또 울었다. 못생긴 엄마 두꺼비와 함께 살 것을 생각하니 소름끼쳤으며 흉측한 아들 두꺼비를 남편으로 맞아야 하는 신세가 서글펐다. 마침 물 속을 헤엄쳐 다니던 작은 물고기들이 두꺼비 모자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고기들은 고개를 내밀고 엄지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예쁜 아가씨가 흉측한 두꺼비 모자와 살아야 하다니! 안 돼. 그냥 보고 있을 수만 없어!’ 물고기들은 엄지 아가씨가 너무도 가여웠다. 물고기들은 엄지 아가씨가 앉아 있는 녹색 연꽃 줄기를 힘껏 물어뜯었다. 그러자 연꽃잎이 두꺼비들이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엄지 아가씨를 싣고 멀리멀리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연꽃잎은 여러 마을을 지나 계속 흘러갔다. 숲 속에서 작은 새들이 엄지 아가씨를 보고 노래를 불렀다. 어쩜, 저렇게 귀엽고 작을까!

    이렇게 해서 엄지 아가씨는 다른 나라 땅에 닿을 때까지 시냇물을 따라 멀리멀리 여행하게 되었다. 아주 작은 하얀 나비가 팔랑거리며 엄지 아가씨를 따라오다 연꽃잎에 내려앉았다. 나비는 엄지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다.

    엄지 아가씨는 두꺼비들에게서 벗어나게 된 것이 몹시 기뻤다. 게다가 이렇게 멋진 여행을 하게 되다니 꿈만 같았다. 스쳐가는 고요한 시골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다웠으며 시냇물은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났다. 엄지 아가씨는 허리띠를 풀어서 한 쪽은 나비에, 다른 한 쪽은 꽃잎에 묶었다. 그러자 연꽃잎이 나비의 날갯짓에 힘입어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떠내려갔다. 엄지 아가씨는 일어서서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는 풍경을 구경했다. 어디선가 큰 풍뎅이 한 마리가 날아왔다. 풍뎅이는 엄지 아가씨를 발견하자 엄지 아가씨의 날씬한 몸을 감싸 안고 나무 위로 날아갔다. 하지만 연꽃잎은 시냇물을 따라 계속 흘러갔다. 나비도 함께였다. 나비는 연꽃잎에 꼭 묶여 있어서 날아갈 수가 없었다.

    아주 작은 하얀 나비가 팔랑거리며 엄지 아가씨를 따라오다 연꽃잎에 내려앉았다.

    풍뎅이에게 붙잡힌 엄지 아가씨는 너무 무서웠다. 그리고 연꽃잎에 묶여서 떠내려간 아름답고 하얀 나비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나비가 줄을 풀지 못한다면 굶어 죽으리라. 그러나 풍뎅이는 그런 것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풍뎅이는 엄지 아가씨를 가장 큰 나뭇잎 위에 앉히고 자기도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꽃에서 딴 꿀을 주며 엄지 아가씨가 자기와는 전혀 다르게 생겼지만 그래도 아주 예쁘다고 말했다. 다른 풍뎅이들도 엄지 아가씨를 구경하러 왔다. 풍뎅이들은 엄지 아가씨를 요모조모 뜯어보더니 촉각을 찡그리며 말했다.

    어머, 다리가 두 개밖에 없네. 흉하기도 해라!

    촉각도 없잖아!

    허리 좀 봐. 정말 날씬하네! 꼭 사람처럼 생겼어! 풍뎅이들이 한 마디씩 했다.

    어머, 정말 못생겼다! 여자 풍뎅이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엄지 아가씨를 데려온 풍뎅이는 그녀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다른 풍뎅이들이 자꾸만 못생겼다고 하자 마침내 그 풍뎅이도 그렇게 믿고 말았다. 풍뎅이는 엄지 아가씨를 데이지꽃 위에 데려다 놓고 어디든 가고 싶은 대로 가라고 말하고는 날아가 버렸다. 엄지 아가씨는 자신이 못생겨서 풍뎅이들조차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생각이 들자 몹시 슬펐다. 그러나 사실, 엄지 아가씨는 세상에서 제일 예뻤으며 아름다운 장미처럼 부드럽고 달콤했다.

    불쌍한 엄지 아가씨는 여름 내내 큰 숲에서 혼자 외롭게 지냈다. 그녀는 풀잎으로 침대를 엮어서 커다란 클로버 잎 아래 걸어 비를 피했다. 그리고 꽃에서 나오는 꿀로 식사하고 아침마다 잎에 맺힌 이슬을 마셨다.

    이윽고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갔다. 이제 춥고 기나긴 겨울이었다. 감미로운 노래를 불러 주던 새들은 모두 날아가 버리고 꽃과 나무도 시들어 버렸다. 엄지 아가씨가 지내던 커다란 클로버 잎도 이제는 힘없이 오그라져 버리고 노랗게 시든 줄기만이 남았다. 엄지 아가씨는 몹시 추웠다. 입고 있던 옷이 이제는 다 해지고 닳아져 있었다. 더구나 엄지 아가씨는 추위를 견디기에는 너무나 작고 연약했다. 가련한 엄지 아가씨는 얼어죽을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눈송이는 또 어찌나 큰지! 우리들에게는 눈송이가 보잘것없이 작게 보이지만 엄지손가락보다도 작은 엄지 아가씨에게는 커다란 산처럼 보였다. 시든 잎으로 몸을 감싸 보기도 했지만 곧 부스러져 버려 추위를 막아 주지 못했다. 엄지 아가씨는 추워서 오들오들 떨었다.

    엄지 아가씨가 살고 있는 숲 바로 가까이에는 옥수수 밭이 있었다. 옥수수는 이미 오래 전에 다 베어지고, 헐벗고 마른 그루터기들만 언 땅 위로 솟아 있었다. 엄지 아가씨는 이가 부딪히도록 덜덜 떨며 옥수수 밭으로 갔다. 큰 숲을 헤치고 옥수수 밭까지 가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엄지 아가씨는 옥수수 그루터기 밑에 있는 작은 굴에 사는 들쥐 아줌마를 찾아갔다. 들쥐 아줌마는 방안 가득 곡식을 쌓아 놓고 따뜻하고 편하게 살고 있었다. 근사한 부엌과 식당도 있었다. 가엾은 엄지 아가씨는 거지 소녀처럼 들쥐 아줌마 집 문 앞에 서서 구걸을 했다. 벌써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것이다.

    작은 보리 낟알 조각이라도 좋으니 먹을 것 좀 주세요.

    딱하기도 해라! 자, 어서 따뜻한 방으로 들어오렴. 같이 밥을 먹자꾸나! 마음씨 좋은 들쥐 아줌마가 말했다. 엄지 아가씨를 보고 마음에 든 들쥐 아줌마는 이렇게 덧붙였다. 원한다면 봄이 올 때까지 내 집에서 지내렴. 하지만 항상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내게 이야기를 해 줘야 한다. 난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거든.

    엄지 아가씨는 마음씨 좋은 들쥐 아줌마가 해 달라는 대로 해주었다. 그래서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곧 손님이 오실 거야.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 이웃인데 나보다 훨씬 더 부자지. 방이 여러 개 있고 항상 멋진 검은 색 벨벳 옷을 입고 다닌단다. 그를 남편으로 맞을 수만 있다면, 넌 호강하며 살 거야. 눈이 어두운 게 흠이지만 말야. 그에게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렴.

    들쥐 아줌마는 두더지가 아주 부자에다 학식도 많다고 자랑했다. 그리고 그의 집은 들쥐 아줌마 집의 스무 배나 된다고 했다. 그러나 엄지 아가씨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는 두더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두더지가 검은 벨벳 옷을 멋드러지게 차려입고 찾아왔다. 그는 실제로 부자에다 유식했다. 하지만 해님과 아름다운 꽃들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두더지는 지금까지 그런 것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엄지 아가씨는 그에게 노래를 불러 줘야 했다. 그래서 ‘무당벌레야, 무당벌레야, 날아라’ 등,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두더지는 엄지 아가씨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고 홀딱 반해 버렸지만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두더지는 신중한 신사였던 것이다. 그 대신 두더지는 자기가 파 놓은 굴에 가 보자고 들쥐 아줌마를 초대했다. 얼마 전에 들쥐 아줌마의 집에서 자기 집까지 땅 밑에 긴 굴을 파 놓았는데, 엄지 아가씨를 데리고 가 봐도 좋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굴에 죽은 새가 있으니까 너무 놀라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부리와 깃털이 달린 멋진 그 새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거라고 덧붙였다.

    두더지가 빛이 나는 나무토막을 입에 물자, 나무토막이 어둠 속에서 불빛처럼 빛을 냈다. 엄지 아가씨와 들쥐 아줌마는 두더지를 따라서 길고 어두운 길을 걸어갔다. 새가 누워 있는 곳에 이르자 두더지는 넓적한 코를 천장에 대고 받치더니 흙을 밀어냈다. 그러자 큰 구멍이 생기면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길 한가운데에 죽어 누워 있는 제비가 보였다. 아름다운 날개는 옆으로 축 처져 있었고 발과 머리는 깃털 속에 파묻혀 있었다.

    얼마 전에 들쥐 아줌마의 집에서 자기 집까지 땅 밑에 긴 굴을 파 놓았는데,

    엄지 아가씨를 데리고 가 봐도 좋다는 것이었다.

    엄지 아가씨는 죽은 새를 보자 마음이 무척 아팠다. 여름 내내 그토록 아름답고 감미롭게 노래를 불러 주고 지저귀던 새들이 아니던가.

    두더지는 구부정한 다리로 제비를 차며 매몰차게 말했다. 이젠 더 이상 울지도 않겠군. 작은 새로 태어난다는 건 참 비참해. 내 자식들은 이런 새처럼 되지 않을 테니 얼마나 다행이야. 새들은 ‘짹짹, 짹짹’ 하고 우는 것밖에 할 줄 몰라. 그러니 겨울이 오면 굶어 죽는 게 당연하지.

    지당한 말이에요! 빗종빗종 노래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겨울이 오면 굶어 죽거나 얼어죽기 딱 알맞지요. 그래도 새들은 본데 있게 자라지요. 들쥐 아줌마가 맞장구를 쳤다.

    엄지 아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들쥐 아줌마와 두더지가 돌아서자 얼른 몸을 굽혀 머리를 덮고 있는 깃털을 헤치고 제비의 두 눈에 입을 맞추었다.

    ‘어쩌면, 지난 여름 내게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준 바로 그 제비일지도 몰라.’

    두더지는 곧 햇빛이 새어 들어오는 구멍을 막고는 엄지 아가씨와 들쥐 아줌마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날 밤, 엄지 아가씨는 죽은 제비가 자꾸만 생각나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잠자리에서 일어나 마른 풀로 크고 아름다운 양탄자를 짜 가지고 가서 죽은 새를 덮어 주었다. 그리고 들쥐 아줌마의 방에서 찾아 낸 양모처럼 부드러운 천으로 새의 옆구리를 감싸주었다. 이제 제비는 차가운 땅 속에서나마 따뜻하게 누워 있을 수 있으리라.

    잘 자, 작고 예쁜 새야! 푸른 잎이 우거지고 따뜻한 해님이 내리쬐던 지난 여름, 찬란한 노래를 불러 주었지. 정말 고마워. 잊지 못할 거야. 이렇게 말하고 엄지 아가씨는 흐느끼며 새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그 순간 엄지 아가씨는 깜짝 놀랐다. 무언가가 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바로 새의 심장이었다. 새는 죽은 게 아니었다. 단지 추위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가 몸이 따뜻해지자 다시 정신이 든 것이다. 가을이 되자 제비들이 모두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날아갔는데, 이 제비는 그만 추위에 갇혀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몸이 꽁꽁 언 채 땅에 떨어져 그렇게 죽은 것처럼 누워 있었던 것이다.

    엄지 아가씨는 너무 놀라 온 몸이 후들거렸다. 제비는 엄지손가락만한 엄지 아가씨에게는 너무도 거대해 보였기 때문에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엄지 아가씨는 용기를 내어 더욱 따뜻하게 제비의 몸을 감싸주고는 자기가 덮고 잤던 잎사귀를 가져와서 제비의 머리를 덮어 주었다.

    다음날 아침, 엄지 아가씨는 다시 살그머니 집을 빠져나와 제비에게 가 보았다. 제비는 숨을 쉬고 있었지만 아직 기운을 못 차렸다. 제비는 살짝 눈을 떠서 등불 대신 인광이 나는 썩은 나무를 들고 서 있는 엄지 아가씨를 힘겹게 바라볼 뿐이었다.

    고맙다, 귀엽고 작은 아이야. 네가 정성껏 돌봐 주어서 곧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따뜻한 햇빛 속으로 날아갈 수 있겠지. 제비가 온 힘을 다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엄지 아가씨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안 돼요. 바깥은 지금 몹시 추워요. 눈이 와서 온 세상이 꽁꽁 얼었는걸요! 여기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어요. 내가 잘 돌봐 줄게요.

    엄지 아가씨는 꽃잎에다 물을 떠다 주었다. 제비는 물을 달게 마시고는 자기가 이곳에 떨어지기까지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제비는 다른 제비들과 함께 겨울을 보내려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가시덤불에 날개 하나가 찢겨 빨리 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혼자 뒤처지게 된 제비는 남쪽을 향해 날아가던 중 기운을 잃고 떨어지고 말았다. 제비는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했다. 어떻게 자기가 여기까지 왔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했다.

    제비는 겨울 내내 엄지 아가씨의 사랑과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으며 땅 속에서 지냈다. 두더지도 들쥐 아줌마도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그들은 제비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곧이어 해님이 방긋방긋 온 세상을 따스하게 비추는 봄이 왔다. 이제 엄지 아가씨와 제비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제비는 엄지 아가씨에게 잘 있으라는 인사를 하고 두더지가 만들어 놓은 구멍을 열었다. 찬란한 햇살이 스며들어 눈이 부셨다. 제비는 엄지 아가씨에게 함께 가겠느냐고 물었다. 등에 업고 저 멀리 초록의 숲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엄지 아가씨는 아무 말도 없이 떠나 버리면 매우 슬퍼할 들쥐 아줌마가 눈에 어른거려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난 그럴 수 없어요.

    그럼, 잘 있어, 마음 착한 귀여운 아가씨.

    제비는 지지배배, 지지배배 하고 노래하며 초록색 숲으로 날아가 버렸다. 제비의 뒷모습이 아련히 멀어져 갔다. 엄지 아가씨의 두 눈에 커다란 눈물 방울이 맺혔다. 엄지 아가씨는 그 가엾은 제비를 매우 좋아했던 것이다.

    들쥐 아줌마집 위에 있는 논에서는 곡식이 무럭무럭 자랐다. 엄지손가락보다 작은 불쌍한 엄지 아가씨에게는 그 들판이 아주 빽빽한 숲처럼 보였다. 엄지 아가씨는 밖으로 나가 따뜻한 햇빛을 쬐고 싶었지만 들쥐 아줌마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들쥐 아줌마가 엄지 아가씨를 앞에 앉혀 놓고 말했다.

    이제 넌 결혼하게 된단다. 두더지가 청혼했지 뭐냐. 너 같은 불쌍한 아이에겐 정말 행운이지. 자, 서둘러서 결혼식에 입을 옷을 만들자. 모직과 린네르로 말야. 두더지 아내가 되면 부러울 게 없을 거야.

    엄지 아가씨는 밤낮없이 물레를 돌렸다. 들쥐 아줌마는 엄지 아가씨를 위해 거미 네 마리를 고용하여 밤낮으로 실을 잣고 천을 짜게 했다. 두더지는 저녁마다 찾아와 여름이 끝나면 지금처럼 햇살이 뜨겁지 않을 것이며 땅이 돌처럼 딱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름만 지나가면 두더지는 엄지 아가씨와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엄지 아가씨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두더지가 진저리 났다. 엄지 아가씨는 해님이 떠오르는 아침과 해님이 지는 저녁이면 문 밖으로 살짝 나갔다. 바람이 불어 양쪽으로 갈라진 곡식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바깥 세상은 너무도 찬란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엄지 아가씨는 봄에 떠난 사랑스런 제비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제비는 돌아오지 않았다. 제비는 멀고 먼 아름다운 녹색 숲으로 날아간 모양이었다.

    들쥐 아줌마는 엄지 아가씨를 위해 거미 네 마리를 고용하여 밤낮으로 실을 잣고 천을 짜게 했다.

    이윽고 뜨거운 태양이 한풀 꺾인 풍성한 가을이 왔다. 엄지 아가씨의 혼숫감은 모두 준비되었다.

    한 달만 지나면 결혼식을 올릴 거야. 들쥐 아줌마가 들떠서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말했다.

    엄지 아가씨는 울면서 그 지겨운 두더지와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뭐라구? 자, 고집 부리지 마. 자꾸 그러면 이빨로 물어뜯어 버릴 테다! 얼마나 근사한 신랑감인지 아직도 모르겠니? 왕비도 그렇게 아름다운 모피는 없을걸. 게다가 부엌과 광도 곡식으로 가득 차 있어. 그런 행운을 고맙게 생각해야지.

    드디어 결혼식 날짜가 정해졌다. 그날은 두더지가 엄지 아가씨를 데려가기로 되어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면 엄지 아가씨는 두더지와 함께 땅 속 깊은 곳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면 다시는 찬란한 햇빛을 보지 못하리라. 두더지는 해님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름다운 해님에게 영원히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엄지 아가씨는 몹시 슬펐다. 그래도 들쥐 아줌마의 집에서는 문간에서나마 해님을 볼 수 있었다. 엄지 아가씨는 들쥐 아줌마의 허락을 얻어 마지막으로 해님을 보러 밖으로 나갔다.

    잘 있어. 밝은 해야! 엄지 아가씨는 들쥐 아줌마 집 앞으로 나와 두 팔을 높이 쳐들며 외쳤다. 이제 들판에는 곡식을 다 거둬들여 마른 그루터기만이 남아 있었다. 엄지 아가씨는 옆에 있는 붉을 꽃을 양팔로 감싸안으며 말했다.

    안녕, 잘 있어. 작은 제비를 보거든 내 인사를 전해 줘!

    지지배배, 지지배배. 그때 갑자기 머리 위에서 제비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엄지 아가씨는 깜짝 놀라 위를 보았다. 병들어 땅 속에 누워 있던 바로 그 제비가 날아오고 있지 않은가. 엄지 아가씨를 본 제비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엄지 아가씨도 기뻤다. 그러나 엄지 아가씨는 곧 흐느끼며 못생긴 두더지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햇빛이라곤 전혀 들지 않는 컴컴한 땅 속에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했다.

    이야기를 들은 제비는 엄지 아가씨가 한없이 가여웠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곧 추운 겨울이 올 거야. 지금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는 중인데, 나랑 같이 안 갈래? 내 등에 업혀서 말야. 네 허리띠로 꼭 묶으면 떨어지지 않을 거야. 그러면 캄캄한 방에서 흉측한 두더지와 함께 살지 않아도 되잖아.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먼 나라로 가는 거야. 여기보다 더 찬란한 해님이 미소짓고 화려한 꽃들이 피는 곳으로. 거기는 1년 내내 여름이지. 나랑 같이 가자. 내가 널 구해 줄게. 너도 캄캄한 땅 속에서 얼어죽어 가던 날 구해 줬잖아.

    그래, 너랑 함께 갈 테야. 엄지 아가씨가 결심한 듯 말했다. 그리고는 제비 등에 앉아서 두 발을 제비의 날개 위에 얹고 허리띠를 단단한 깃털에 묶었다.

    제비는 힘차게 날개를 퍼덕이며 날았다. 숲을 지나고 바다를 건넜으며 눈으로 덮인 높은 산도 지나갔다. 엄지 아가씨는 찬바람에 꽁꽁 얼지 않도록 머리만 밖으로 내밀고 새의 따뜻한 깃털로 몸을 감쌌다. 아름다운 풍경들이 그림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날다 보니 따뜻한 남쪽 나라가 보였다. 그곳에서는 햇살이 환하게 부서지고 하늘이 매우 높아 보였다. 울타리와 길가에서는 자주색, 녹색, 흰색의 아름다운 포도가 자라고, 숲에는 레몬과 오렌지가 열려 있었으며, 사방에 은매화와 오렌지 꽃향기가 그윽했다. 귀여운 아이들이 화려하고 큰 나비들과 함께 뛰어 놀았다. 멀리 날아갈수록 아래로 펼쳐진 풍경이 더욱더 아름다웠다.

    제비 등에 앉아서 두 발을 제비의 날개 위에 얹고 허리띠를 단단한 깃털에 묶었다.

    드디어 그들은 푸른 호숫가에 당도했다. 호숫가의 짙푸른 나무 아래에는 눈부시게 흰 대리석으로 된 오래된 성이 서 있었다. 높다란 기둥에는 포도 넝쿨이 뻗어 있었고 맨 꼭대기에는 수많은 제비 둥지가 있었다. 그 중 한 둥지에는 엄지 아가씨를 데려온 제비 가족이 살고 있었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하지만 여긴 네가 살기에는 불편할 거야. 저기 아래쪽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 하나를 골라. 그럼 내가 데려다 줄게. 거기서라면 마음놓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제비가 말했다.

    정말 근사하다! 엄지 아가씨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아래쪽에는 커다란 대리석 기둥 하나가 무너져 세 동강이 나 있었는데, 그 사이로 아주 아름다운 흰 꽃들이 피어 있었다. 제비는 그곳으로 엄지 아가씨를 데려가 가장 큰 잎에 내려놓았다. 그곳에 내려선 엄지 아가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꽃 한가운데에 유리로 만든 것처럼 하얗고 투명한 작은 소년이 앉아 있지 않은가. 소년은 머리에 황금 왕관을 쓰고 있었고 어깨에는 우아한 날개를 달고 있었다. 그 역시 엄지 아가씨보다 별로 크지 않았다. 그는 바로 꽃의 천사였다. 모든 꽃에는 그렇게 작은 천사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소년은 바로 왕자였던 것이다.

    정말 잘 생겼네요! 엄지 아가씨가 제비에게 속삭였다.

    작은 왕자는 제비를 처음 보자 덜컥 겁이 났다. 작고 연약한 왕자의 눈에는 제비가 거대한 괴물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엄지 아가씨를 보자 몹시 기뻐했다. 꽃의 천사들 중에서도 그렇게 아름다운 소녀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왕자는 황금 왕관을 벗어 엄지 아가씨의 머리에 씌워 주고는 이름을 물었다. 그리고 자기의 아내이자 모든 꽃을 지배하는 여왕이 되어 줄 수 있는지를 정중하게 물었다.

    왕자는 흉측한 두꺼비의 아들이나 검은 모피를 입은 두더지와는 비교가 안 되는 신랑감이었다. 엄지 아가씨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모든 꽃잎들이 일제히 열리고 천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참으로 황홀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천사들은 모두 엄지 아가씨에게 하나씩 선물을 주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귀한 선물은 하얗고 커다란 날개 한 쌍이었다. 그들은 엄지 아가씨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다닐 수 있도록 날개를 어깨에 묶어 주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둥지에 앉아 이 모습을 바라보던 작은 제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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