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cover millions of ebooks, audiobooks, and so much more with a free trial

Only $11.99/month after trial. Cancel anytime.

뉴욕좀비
뉴욕좀비
뉴욕좀비
Ebook282 pages6 hours

뉴욕좀비

Rating: 0 out of 5 stars

()

Read preview

About this ebook

“나는 코리안 차이니즈 아메리칸입니다”

망명 작가 슌하오 리우, 중심부 세계의 민낯을 그려내다

뉴욕 한복판에서 좀비처럼 살아가는 그들 혹은 우리의 이야기

생의 본능과 에로티시즘에 관한 자화상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재미교포 작가 슌하오 리우의 장편소설이다. 중국에서 박해받고 미국으로 망명한 작가인 내가 세계 문화의 중심지이자 본능이 만개한 도시 뉴욕에서의 삶을 담은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뉴욕의 중심인 타임스퀘어와 맨해튼, 센트럴파크를 지나 뒷골목 이민자 사회와 영주권을 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난민들의 삶을 배경으로 성과 욕망, 좀비 등의 키워드를 통해 인간의 내밀한 감정과 인간성에 질문을 던진다. 소설은 허구와 사실이 교묘하게 교차하면서 생생한 질감의 현장을 그려나가며 인물들을 더욱 입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느끼게 한다.

슌하오 리우는 리얼리티에 기반을 둔 스토리텔링으로, 삶의 모든 순간을 소설화하는 서사 구성 능력이 뛰어난 작가로 평가받는다. 나(리우)와 세 여자(루시, 채희, 샹샹)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욕망을 구체화하거나 성취하거나 전복시키기 위해 온힘을 다한다. 욕망은 좀비처럼 스스로를 물어뜯고 타인을 물어뜯으며 끝없이 순환한다. 모두에게 마치 운명처럼 좀비가 찾아오는 것이다. 누군가를 공격하면서 억눌렸던 욕구를 터뜨릴 수 있기에, 또 순간의 쾌락과 찰나의 정점을 성취할 수 있기에 감염은 계속된다. 이처럼 모두의 현실은 불안하고 고단하며 외롭다. 하지만 욕망과 불완전함 너머의 세계를 꿈꾸며 나아간다.

이 작품은 ‘에로티시즘을 통한 좀비의 사랑과 죽음의 변주곡’이기도 하고, ‘인간의 구원과 진짜 사랑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며, ‘내 안의 천사와 야수가 벌이는 싸움의 기록’이기도 하다. ‘좀비’라는 키워드는 우리의 감정과 욕망을 솔직하고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한다. 이 작품은 뉴욕의 뒷골목에서 또 뒷골목으로 들어간 비주류 이민자 사회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뉴욕 전체,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도 벌어지는 생의 본능과 에로티시즘에 관한 우리들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Language한국어
Release dateAug 9, 2019
ISBN9791189809102
뉴욕좀비

Related to 뉴욕좀비

Related ebooks

Reviews for 뉴욕좀비

Rating: 0 out of 5 stars
0 ratings

0 ratings0 reviews

What did you think?

Tap to rate

Review must be at least 10 words

    Book preview

    뉴욕좀비 - 슌하오 리우

    뉴욕좀비

    1판1쇄 발행 2019년 7월 25일

    지 은 이 슌하오 리우

    펴 낸 이 김형근

    펴 낸 곳 서울셀렉션㈜

    편     집 진선희, 문화주

    디 자 인 홍성욱

    마 케 팅 김종현, 김은빈, 황순애

    등     록 2003년 1월 28일(제1-3169호)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6 출판문화회관 지하 1층 (03062)

    편 집 부 전화 02-734-9567 팩스 02-734-9562

    영 업 부 전화 02-734-9565 팩스 02-734-9563

    홈페이지 www.seoulselection.com

    ⓒ2019 슌하오 리우

    ISBN 979-11-89809-12-6


    본 전자책은 빌드북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주소│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로 6길 39 명성빌딩 401호

    대표전화│070-7848-9387

    대표팩스│070-7848-9388


    이 전자책은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시에는 형사/민사상의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본 컨텐츠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회의의 KoPub서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1

    ‘내추럴 럭셔리’를 표방한 화장품이 한창 인기일 때, 한 수녀가 프랑스에서 놀러 온 친구를 데리고 우리 성당에 왔다. 에뮐씨옹 에꼴로지끄라는 유명한 로션을 판매하던 그 친구는 화장발이 전혀 먹히지 않는 사람도 자기네 회사의 이 로션을 바르면 10년은 젊어진다고 큰소리쳤다. 워낙 유명한 로션이라 수녀들이 너도나도 공짜 화장을 받아보고 싶어 했지만, 신부 추천으로 루시가 선발되었다. 신부는 이 로션에 유해 환경으로부터 피부를 지켜줄 인삼, 로즈메리 등에서 얻은 식물 추출물이 다량 함유돼 있어 아무리 예민한 피부를 가진 사람이라도 부작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황한 제품 설명을 싫은 내색 하지 않고 다 듣고 나서는 오히려 이런 말을 던졌다.

    화장 안 한 여자가 더 예쁘다고 하면 남자들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겠지만, 루시 자매라면 남자들이 할 말이 없겠어요.

    신부의 말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사람은, 이 성당으로 나를 데리고 왔던 샹샹이었다. 샹샹은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조금 복잡한 영어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몰래 내 곁으로 와서 옷깃을 잡아당기면서 소곤거렸다.

    아저씨, 신부님이 방금 뭐라고 했어?

    루시가 예쁘다고 했단다.

    나는 그냥 간단하게 의미만 알려주었지만 샹샹은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신부님은 그렇게 짧게 말하지 않았는데?

    결론적으로는 예쁘다는 뜻이야.

    저 금발 여자가 예쁜 거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샹샹은 이내 심드렁해 했다.

    델란시 성당의 모든 사람 중에서 신부한테서 예쁘다고 칭찬받은 여자는 루시 말고는 없었다. 게다가 신부 말대로 루시는 민낯 그대로 충분히 예뻐서 화장이 필요 없어 보였다.

    신부님이 루시를 예쁘다고 칭찬하셨대요.

    수녀들 사이에서 이렇게 떠돌던 말은 신부님께서 루시를 얼마나 예뻐하는지 몰라요.라고 와전되었다. 주일 미사가 끝나면 그다음 주일까지 신부가 강론 도중에 어느 수녀한테 눈길을 주었고 이름을 몇 번 언급했으며, 친교 시간에는 어느 수녀랑 마주 서서 커피를 마셨다는 등의 별스러울 것도 없는 내용이 수녀들 입담에 오르내리는 정도였으니 루시에 대한 이 정도의 찬사는 적어도 몇 개월 동안 이슈 거리가 될 만했다.

    신부님, 저에 대해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루시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길로 신부 얼굴을 바라보았다. 신부의 본명은 클레타 페레즈였다. 페레즈 신부는 황망히 머리를 끄떡였다.

    아, 루시. 그건 사실이라오.

    그러자 루시는 다시 한 번 확인하려는 듯이 물었다.

    제가 별로 예쁘지 않은 건 저도 잘 알아요. 설마 반대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시지요?

    루시의 당돌한 질문에 신부는 여간 당황해하지 않았다.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루시는 천사나 다름없었다. 남녀 문제에서도 루시는 천사처럼 깔끔했다. 그녀의 남자는 내가 아는 한, 과거에 맨해튼 소호 남쪽 트라이베카의 한 액자가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할 때 만났던 젊은 아티스트 그레고리 보내트뿐이다. 그는 휠체어에서 생활한 지 4년째 접어든 상이군인 출신이었다.

    그레고리는 루시와 함께 미대를 다녔다고 한다. 둘은 뉴욕 근교의 한 뮤지엄 아트스쿨에서 만났고, 졸업 후 루시는 파슨스 인근의 한 갤러리에서 일했다. 당시는 제2차 걸프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2003년 4월 9일, 미군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함락했고, 그해 12월 13일에는 24년간 이라크를 통치해왔던 사담 후세인이 체포됨으로써 전쟁이 끝난 듯했다. 하지만 이후 1년 동안 이라크에 남아 지뢰 제거작업을 해왔던 병사들 가운데 젊은 미대생 출신의 공병 그레고리 보내트가 있었을 줄이야.

    그레고리의 친구들도 NYU 피셔스쿨 석사과정에 있던 그가 반전단체인 ‘평화와 정의를 위한 연대’에 참여하여 그림도 그려주고 포스터도 만들면서 열심히 활동했는데, 갑자기 걸프전에 참전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루시는 너무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레고리는 그때 시위대에서 1차 걸프전에 참전했던 상이군인을 만나 전쟁 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거예요. 탱크에 깔린 시체가 땅바닥에 낙지처럼 달라붙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돌아와 갑자기 입대를 신청했어요. 그때 그레고리와 많이 싸웠어요. 울고불고하면서 협박도 했지요. 입대하면 끝이라고요. 하지만 그레고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더라고요. 나는 그의 친구들까지 동원해 말렸죠. 그런데 그레고리의 입대 신청서를 취소하러 갔던 친구 몇몇이 오히려 모병관의 감언이설에 속아 입대하게 되었죠. 1년에 보너스만 2만 달러라느니, 원하는 지역에서 근무할 수 있다느니 하는 꼬드김에 넘어간 거죠. 그들은 2, 3개월간 훈련하고 나서 바로 이라크로 파견되었어요.

    루시와 그레고리가 사랑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한 계기는 이 전쟁이 발발하기 며칠 전에 있었던 반전 시위 때문이었다. 경찰은 센트럴파크의 잔디밭을 훼손했다는 죄목으로 시위대 핵심 멤버들을 체포하려고 출동했으며, 오전 10시쯤에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루시는 마침 퍼포먼스 중이었다. 그레고리가 냈던 아이디어로 시위대 참가자들에게 입고 있던 치마를 한 자락씩 찢어서 나눠주었다. 근처에서 지켜보던 경찰이 치마가 계속 짧아져 팬티까지 보이게 되면 체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루시는 다시 등과 가슴 쪽 옷을 찢기 시작했다. 평소 노브라였던 루시는 이날도 노브라 차림이어서 금세 가슴이 드러났다.

    남녀 모두에게 토플리스¹ 권리를 달라.

    1 topless, 상반신 노출.

    전쟁이 선정적이지, 내 가슴은 선정적이지 않다.

    이런 슬로건을 내걸고 뉴욕의 젊은 여자들이 당당하게 가슴을 드러내놓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된 건 그로부터 10여 년 뒤였다. 뉴욕주는 2013년부터 여성의 상반신 노출을 합법화했다. 루시는 자신이야말로 오늘의 ‘고 토플리스 데이(Go Topless Day)’를 있게 한 선각자의 하나였다고 자랑스러워한다.

    그날 시위대가 강제로 해산될 때, 경찰은 거의 발가벗은 상태로 뛰는 루시를 향해 총까지 쏘았다. 아침나절부터 뿌옇게 흐렸던 하늘에서는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고 질척한 잔디밭은 총소리에 놀라 이리저리 달아나던 사람들의 발에 짓밟혔다. 총을 쏘았던 경찰은 루시를 뒤쫓다가 넘어졌다. 경찰이 총까지 쏠 정도로 화가 난 것은, 루시가 젖가슴을 가렸던 타월을 경찰에게 홱 던졌는데, 빗물에 젖은 타월이 그의 얼굴에 찰싹 들러붙었고, 그 틈에 그레고리가 루시를 빼돌리려고 달려와 머리로 경찰 옆구리를 들이박았기 때문이었다.

    오 마이 갓!

    몸이 평형을 잃는 순간, 거구인 경찰은 아주 처참하게 넘어졌다. 다행히도 엉덩이가 타월에 떨어졌는데, 그가 비명을 지르면서 다시 일어서려고 버둥거리는 순간, 그 타월을 잡아당긴 남자가 있었다. 시위대를 취재하던 기자였다. 그 바람에 경찰은 맹랑하게도 다시 한 번 엉덩방아를 찧었다. 경찰은 홧김에 권총을 뽑아 들었다. 총소리가 울리는 데도 그 남자는 타월을 들고 루시에게 달려갔다. 카메라는 손 대신 가슴에 매달린 채 제멋대로 흔들렸다.

    Thanks! You're a star!

    타월을 받아 든 루시는 그 경황 중에도 ‘땡큐’에 당신 최고예요!라는 말까지 한마디 더 보태고야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이것이 10여 년 전, 나와 루시의 첫 만남이었다.

    그 기자가 바로 나였음을 나와 루시, 그레고리까지 세 사람이 한참 후에 우연히 만나 그때 일을 주고받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말하게 되었다. 그 당시 루시 나이가 겨우 열여덟이었다는 걸 알고 나는 내심 놀랐다.

    2

    그레고리의 스튜디오가 센트럴파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서쪽 5번가에 있어, 우리는 《섹스 앤 더 시티》에도 나오는 사라베스에서 브런치를 겸하여 커피를 마셨다. 사라베스는 센트럴파크의 맛집으로 유명하다.

    내 걱정은 말고 당신은 리우와 함께 예전에 시위했던 잔디밭에 가 봐. 쉬면서 스케치도 하고. 저녁때쯤 돌아올게.

    그레고리가 루시에게 말하고는 휠체어 바퀴를 부지런히 돌리며 웨스트 빌리지 쪽으로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고 토플리스 데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나는 그 잔디밭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청했더니 두 사람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한창 전시에 출품할 작품을 만드느라 바삐 보내던 그레고리가 일이 있다며 빠지게 되었다.

    사라베스의 문 앞은 계단이었는데도 휠체어는 루시 도움 없이도 잘 내려갔다. 이라크에서 지뢰를 제거하다가 하반신을 통째로 잃어버린 그레고리는 경사진 곳이나 구덩이, 계단 등을 만나면 꼼짝없이 루시에게 의지해야 했던 날들과 서서히 결별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휠체어 중간에 손잡이 하나를 부착했는데, 이 손잡이는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휠체어 바퀴 테두리 사이의 지지레버를 간단히 작동시켰다. 손잡이를 앞으로 밀면 휠체어가 전진하고 당기면 멈추었다.

    루시한테 좀 더 들어보니, 이 부부가 한동안 캐나다 밴쿠버에서 산 적이 있었다.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코퀴틀람이었는데, 루시가 스케치를 하여 먹고 살았다. 그때 페레즈 신부도 밴쿠버의 한 신학대에서 공부하던 중이었다. 신부는 공부를 마치고 이 지역의 한 자그마한 성당에 부임했는데, 루시와 그레고리도 마침 그 지역으로 이사한 것이다.

    페레즈 신부는 강론 중에 그레고리를 도울 아이디어를 달라고 호소했다. 숱한 사람이 머리를 짜낸 끝에 휠체어 바퀴 양 축에 자전거용 래칫²을 부착했다. 새롭게 추가한 이 장치 덕분에 경사진 곳으로 올라갈 때도 휠체어가 뒤로 밀리지 않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레고리가 손잡이를 붙여 뒤로 젖히면 래칫이 풀어지게 해, 몸을 앞뒤로 움직여 무게중심을 이동하는 방법으로 계단도 쉽게 오르내릴 수 있게 되었다.

    2 ratchet, 한쪽 방향으로만 회전하는 톱니 장치.

    이 정도면 특허를 신청해도 되겠어요.

    휠체어 개조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그레고리와 루시 부부 집에 처음 초대받은 페레즈 신부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면서 진심으로 축하했다.

    이 특허가 팔린다면 두 분은 아마 큰 부자가 될 거예요.

    그레고리는 루시 손을 잡고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루시, 이제 당신이 돈 벌겠다고 추운 날 스케치하러 나가지 않아도 되겠어.

    아니, 부자가 돼도 그림은 계속 그릴 거야.

    루시는 머리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레고리, 내가 돈 때문에 그림 그리는 게 아닌 거 당신도 알잖아. 당신처럼 대단한 경지는 아니지만, 공원에 나가 스케치하는 거 정말 행복해.

    나중에 ‘계단 오르는 휠체어’ 특허가 나왔다. 특허로 꽤 많은 돈을 벌게 되자 그레고리는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전의 작품이 캔버스 안에 갇혀 있었다면, 이제는 캔버스를 깨고 나오는 실험을 시도했다.

    그 후 페레즈 신부가 가톨릭 뉴욕교구의 초청을 받아 고향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레고리와 루시도 다시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해 뉴욕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신부는 루시에게도 그레고리처럼 자신의 작품 활동을 해보라고 권했다.

    신부는 그레고리와 루시에게 늘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보내는 둘도 없이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레고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주었다. 그런 신부가 루시는 한없이 고맙기만 했다. 그레고리와 루시도 서로에게 ‘큰 사람이 작아지고 작은 사람이 커지는 가정’을 만들어주는 행복한 부부였다. 누가 봐도 그렇게 보였다. 신부뿐만 아니라 성당의 모든 형제와 자매가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루시는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일루미나리 랜턴 축제가 열리던 밴쿠버 트라우트호수 근처의 자그마한 동네에서 살 때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때 집 주변에 남자가 얼씬거리면, 노인이건 어린아이건 가리지 않고 자신을 의심하는 그레고리에게 질릴 대로 질렸다.

    한때 페레즈 신부를 향해서도 강렬한 의심의 빛을 섬광처럼 뿜어낸 적이 있었다. 독신 서약을 하고 신부 서품을 받은 걸 잘 알면서도 루시가 신부의 도움으로 밴쿠버의 한 한인학교 미술교사로 취직하자 거의 한 달 가까이 대놓고 루시를 괴롭혔다.

    신부 주변에 젊고 예쁜 수녀가 한 명이라도 있어? 모두 못난이, 뚱보 아니면 늙어빠진 할머니뿐이잖아.

    그레고리의 이런 불평을 들을 때마다 루시의 가슴은 커다란 돌덩이에 짓눌리는 것 같았다. 뉴욕만 떠나면 절대 사람을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뉴욕에서 그레고리가 의심했던 사람들은 누구였어요?

    주로 대학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었어요. 물론 저한테 프러포즈했던 애들도 있었지요. 지금은 다들 결혼해서 잘살고 있는데도 그레고리는 의심을 거두지 않아요. 사실 그들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저를 의심한 거죠. 전 그게 정말 싫었어요. 한 번씩 의처증이 도지는 날은 정말 지옥 같은 밤이 찾아왔어요.

    여기까지 얘기하다 루시는 갑자기 티셔츠를 훌렁 벗었다. 등이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그레고리가 채찍질한 거라고 했다. 이리저리 찢긴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와 말라붙은 등을 상상하니 끔찍했다. 채찍질 당할 때면 루시는 주문에라도 걸린 듯 이불을 뒤집어쓰고 꼼짝하지 않았다고 했다.

    참 이상하게도 그렇게 맞아도 아프지 않았어요.

    내 상상과 달리 그렇게 말하는 루시는 무엇엔가 홀린 표정이었다.

    그레고리가 처음부터 무작정 채찍질을 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레고리는 두 손을 목발처럼 사용했다. 두 손을 바닥에 짚고 휠체어에서 뛰어내려 루시 곁으로 다가왔다. 마음이 급하면 침팬지가 점프하듯 두 손에 힘을 주어 몸을 훌쩍 날리기도 했다. 그레고리의 몸이 루시 엉덩이에 올라탈 때면 루시는 본능적으로 두 다리를 한껏 벌려주기도 했다. 하반신 대신 그의 상반신을 그대로 몸 안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레고리는 때로는 혀로, 때로는 손으로, 때로는 뭉툭한 상반신으로 그녀를 애무했다.

    정말 미칠 것만 같았어요. 제가 참지 못하고 신음을 내면 그레고리는 채찍을 휘둘러요. 그러면 불개미 수천 마리가 몸 위에서 바글거리는 느낌이에요. 저는 채찍 손잡이가 남자 성기처럼 생겨서 그레고리가 그걸 제 질 속에 밀어 넣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한 번도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제 몸이 계속 처녀로 남아 있길 바란 걸까요? 남자들은 모두 바보 같아요. 그때 전 이미 처녀가 아니었어요. 고등학생 때 몇 번 경험했거든요. 가방에 늘 콘돔이 있었어요. 우리 학교에는 저처럼 금발에 푸른 눈의 여자애가 많지 않았어요. 남자애들은 모두 저랑 자고 싶어 했어요.

    봇물이 터진 듯 루시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매년 핼러윈 시즌 때면 트라우트호숫가에서 수백 개의 빛나는 등불을 바라보면서 잃어버린 영혼의 절정을 경험했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그레고리가 밤새도록 자신에게 얼마나 기괴한 짓을 했는지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됐어요. 그레고리는 저한테 마법을 건 거였어요.

    나는 루시 이야기를 들으면서 루시와 페레즈 신부 사이에서 어떤 일이 있었으리라고 전혀 상상하지 않았다.

    2010년, 페레즈 신부가 뉴욕 차이나타운 델란시 스트리트의 성당에 있을 때 샹샹을 비롯한 많은 아시안이 무료로 영어를 배우러 몰려들었다. 중국어와 한국어를 잘했던 신부는 강론할 때도 중국어와 한국어, 영어를 섞은 멋진 강론으로 인기를 얻었다. 페레즈 신부처럼 고상한 미국인은 처음이었다. 신부는 성경과 관련한 강론을 많이 하지 않았다. 신앙과 영어가 왜 필요한지를 늘 강조했다.

    여러분도 미국 주류사회에 충분히 진출할 수 있습니다. 신앙과 영어, 두 가지 기본만 갖추면 됩니다. 언제라도 여러분 앞을 가로막은 장벽을 허물 수 있습니다.

    미사가 끝나자 한 한국인이 사람들을 비집고 루시에게 다가왔다.

    This place seems even more beautiful when you’re here.

    (이곳은 왠지 당신이 있어 더 아름다운 것 같아요.)

    미국인 못지않은 유창한 영어로 루시를 칭찬한 사람은 얼마 전 플러싱에 차 정비소를 연 한국계 미국인 김기중이었다. 그는 나를 볼 때마다 형님은 미국 생활이 몇 해째인데 아직 차가 없냐면서 내가 차를 사면 정비는 이 아우가 영원히 무료로 해주겠노라고 장담했다. 나이가 마흔에 가까웠던 그는 한국 여자 열댓 명과 연애했지만 아직 미혼이었다.

    한국 여자와 연애할 순 있지만 결혼까지는 하기 싫어요. 결혼은 꼭 다른 인종과 할 거예요.

    자넨 다른 사람과 거꾸로구먼. 남들은 연애는 다른 인종과 해도 결혼은 꼭 한국 사람과 한다던데. 왜 이러시나? 장가들지 않기로 아예 작정한 건가?

    내가 핀잔했더니 그가 정색하고 속내를 드러냈다.

    형님, 저는 진짜입니다. 그냥 한국 여자하고 결혼할 거면 뭐 하러 미국에 살겠습니까. 결혼해서라도 미국 주류사회에 진출하고 싶은 게 평생의 꿈입니다. 형님은 그렇지 않으신가 봅니다.

    그는 친교 시간이면 늘 내 곁에 다가오는 루시에 대해 무척 알고 싶어 하는 눈치다.

    ‘자식,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루시는 안 돼.’

    3

    3월경, 나는 맨해튼에서 더는 배겨내지 못하고 엘머스트로 옮겼다가 다시 플러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처음 살았던 폐차장 근처였다.

    저녁 무렵, 샹샹이 위챗³에 올라왔다.

    3 중국인이 많이 사용하는 채팅 서비스 앱.

    아저씨, 오늘 너무 바빠서 죽는 줄 알았어. 손님들이 끝없이 들어와 점심 먹을 새도 없이 줄곧 일만 했어. 아저씨 방 청소하느라 어제 하루 못 번 돈 오늘 다 벌었지. 어때요? 나 장하죠? 히힛.

    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혼자 지껄이고는 훌쩍 사라져버렸다. 다시 한 시간쯤 지나자 이번에는 핸드폰이 울렸다.

    아저씨, 우리 오늘 외식할래? 내가 살게.

    자식, 외식하면 내가 내야지. 나 때문에 어제 일 못 했다며.

    오늘 다 벌었는데 뭐.

    안 돼. 무조건 내가 내야 외식할 거야.

    그동안 계속 아저씨한테 얻어먹기만 했잖아. 이제는 나도 돈 많이 번단 말이야. 한 번은 사게 해줘.

    한 번이 아니라 반 번도 안 돼.

    엥, 알았어. 8시까지 루스벨트와 프린스 사이에 있는 빵집 앞에서 기다려요. 차가 막히지 않으면 8시 전에 도착할 수 있어.

    샹샹은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오랜만에 외식해서 무척 즐거운 듯했다.

    샹샹은 열여섯 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밀입국했다. 그러나 부모는 국경경비대에 체포되고 혼자만 들어왔던 샹샹은 중국인 브로커의 도움으로 이 폐차장 동네에서 살기 시작했다. 동네 근처에 폐차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동네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나는 이 동네를 ‘쥐동네’라고 불렀다. 한자로는 ‘鼠村(서촌)’, 중국말로는 ‘쑤춘’이다. 폐차 더미 사이에 얼마나 쥐가 많은지, 비 오는 날이면 고양이만큼 큰 쥐들이 진창길 복판에 나와 노는 걸 보기도 한다. 행인이 뜸해서인지 길 한복판에서 쥐들이 재롱이라도 부리듯 지그재그 뛰어가면서 물이 닿지 않은 마른 땅만 골라 딛고 가는 모습은 묘기에 가까워 혀가 내둘러질 지경이었다.

    나 혼자 지어 부르던 동네 이름을, 하우스에서 함께 사는 세입자들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 번은 방이 비자 셋방 광고를 냈던 주인할머니가 전화를 받으면서 건물 위치를 알려주었다.

    폐차장 서촌이오. 쥐가 좀 많지만, 그래도 방세가 싸잖소.

    주인할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보던 샹샹은 바로 쪼르르 다락방으로 뛰어 올라왔다.

    아저씨, 아저씨. 빨리 문 열어줘. 방금 주인할머니가 뭐라고 한 줄 알아. 방 구하는 사람이 주소를 물었더니, 여기가 폐차장 서촌이래. 아저씨한테 다 전염됐어.

    오, 됐다, 알았어, 그만, 아저씨 더 자야 하니까 방해하지 마.

    샹샹을 달래고, 계단 내려가는 아이의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샹샹은 내려가는 척 발걸음 소리를 내고는 문가에 숨어 있기를 좋아했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문 커튼 자락을 들었다가 불쑥 얼굴을 들이대는 샹샹 때문에 놀라 자빠질 뻔한 적이 있었다.

    아저씨, 방에 또 누가 왔구나!

    샹샹은 문을 걷어차면서 고함을 질렀다.

    다행히도 그날은 나 혼자 있었다. 나는 문을 활짝 열고 샹샹을 꾸짖었다.

    "계집애야, 왜 이리도 버릇없이 굴어. 중국 시골에 살 때 하던 버릇 그대로잖아. 넌 아빠와 엄마 자는 방에도 이런

    Enjoying the preview?
    Page 1 of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