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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미술 조선화 너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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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미술 조선화 너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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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미술 조선화 너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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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is ebook

• 美 조지타운대 교수가 6년간 9차례 평양 방문을 통해 만난 생생한 북한 미술의 현장
• 현대 북한 미술작품(주제화 및 집체화)과 제작현장 최초 공개
• 평양미술의 꽃 조선화에 대한 본격적 독창적 소개
• 세계 미술사의 ‘사회주의 사실주의 미술’ 항목은 다시 쓰여야 한다.

美 조지타운대 미술과 문범강 교수가 6년간 9차례 북한 평양을 방문하여 이뤄낸 북한 미술에 관한 기록이다. 그동안 철저히 베일에 쌓여 있던 집체화와 북한 현대 미술의 작업현장이 최초로 공개되며, 현지 화가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북한 미술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작품을 볼 기회조차 거의 없었던 국내에 북한 미술을 본격적으로 소개한다는 점에서 이 책의 출간은 큰 의미를 지니며, 향후 북한 미술 연구의 분수령이 될 것이다.
Language한국어
Release dateNov 26, 2018
ISBN9788997639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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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미술 조선화 너는 누구냐 - 문범강

    이 책을 쓴

    나는

    너는 누구냐

    !

    하고

    쏘아볼

    눈을

    지닌

    감성의 눈을 가진 자만이

    이 책을 독파할 영광을

    누릴 것이다.

    이 책은

    시각 자료의 집적이자 지적 궤적의 산물이다.

    지구에 태어난 한 생명체의

    비교적 억압받지 않은 영혼과

    사색할 수 있는 영광의 흔적이다.

    지적 궤적은 일견 타의 영향도 있었으나 대부분 나의 고유 유산이다.

    이 유산은 이 생을 포함해 내가 경험한 숱한 생의 퇴적이다.

    화가로서 현생을 지나가고 있는 ‘나’라는 생명체는

    필연이라는 생명체의 연결고리를 저버릴 수

    없어 이 집필물을 만들게 되었다.

    학술적 표현은 되도록 피했다.

    지극히 감성적이고 예술적인 자유혼의 갈망이

    도도한 강물처럼 흐르길 바랐다.

    출처가 명기되지 않은 모든 사진은 저자가 직접 촬영한 원본입니다.

    © 2018 BG Muhn. 이 책은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저자의 서면 허락 없이는 텍스트나 사진의 어떤 부분도 복제나 전자기기를 통한 저장 및 배포를 할 수 없습니다.

    * 이 책에 사용된 작품의 도판들은 저작권자로부터 동의를 받았습니다.

    저작권자를 찾지 못한 일부 작품은 연락주시면 저작권 계약과 더불어 그에 상응하는 사용료를 지불하겠습니다.

    All rights are reserved. No part of this publication may be reproduced, stored in a retrieval system

    or transmitted in any form, or by any means; electrostatic, magnetic tape, mechanical.

    이 시각 집필물은 평양미술에 관한, 특히 조선화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동시에 내가 경험한 조선, 한국, 중국, 미국의 미술과 연관된 역사와

    문화 속에서 캐낸 출토물의 일부다.

    고약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의 분단, 핵, ICBM, 유엔 제재가 핫 이슈로 연일 세계 언론 프론트 페이지에 오르는 한반도의 긴장 상황. 하지만, 이런 위기와 갈등의 와중에서도 문화는 논해져야 한다. 결국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피의 논리로써 이 명제는 존중되어야 한다.

    인간만이 지닌 정신력의 향유, 성찰. 그러나 성찰은 인류공동체의 아픔에 접목이 되지 않는 한 허구다. 허구에 발을 헛디디지 않기를 기원하며 집필했다.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 가난과 폐쇄, 이런 단어로 대표되는 국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화를 논하면서 이 단어들이 지닌 무게를 어깨에 지고 사색해야 했던 지난 6년은 무척 비감한 시간이었다. 비감의 치맛자락을 수채화 물감이 퍼지듯 풀어헤친다.

    반드시 한반도는 평화롭게 자리 잡을 것이라는 기원과 희망을 안고 한반도 문화유산의 일부가 될 평양미술을 논한다.

    평양미술을 논하면서 나의 논리에서 조선 여성의 감성을 잃지 않으려 했다. 자연스러운 수줍음과 절제된 당당함은 조선 문화 곳곳에 배어 있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매력이다. 평양미술의 심장 조선화는 사람 냄새 물씬한 기막힌 신파다.

    한반도 남과 북의 책방에 동시에 배포되어 읽히길 희망한다.

    그러나 이 희망은 환청처럼 현실에서 유리되어 있음을 안다. 내가 남북 양쪽 미술에 세운 날이 꽤 날카롭다. 결코 한반도 전체에서 이 책에 대한 환대는 없을 것이기에 칼끝을 외롭게 응시할 뿐이다. 내가 세운 비평의 시각이 어느 정도로 공정성을 유지하는가가 집필자인 나의 최대 관심사다.

    이 책의 몇 가지 시도

    평양미술에 관한 원래의 저술 기획은 방대했다. ‘평양미술 바이블’을 집필하겠다는 의욕으로 600페이지 분량의 글을 시도하고 있었다. 각종 전시, 만수대창작사, 모사와 위작, 수인화, 화가의 삶과 죽음, 조선화 및 유화 그리고 산수화의 분석, 해외전시와 옥션 등을 망라한 평양미술계의 전반적 구조를 분석하려는 야심 찬 기획이었다.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그러는 사이에 6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우선 가장 핵심 부분인 ‘조선화’를 따로 분리해 먼저 출간한다. 《평양미술 조선화 너는 누구냐》라는 제목이다. 나머지를 묶은 두 번째 책은 평양미술에 관한 에세이 형식으로 나올 예정이다. 두 책 모두 한글판과 영문판으로 출간될 것이다.

    첫째_ 전문 학술 저서의 난해하고 고루한 정형을 깨고자 했다. 어려운 전문 용어는 해설을 곁들였다. 전문가와 일반인, 중3 학생이 공유할 수 있는 책이 되도록 했다.

    둘째_ 에세이를 곳곳에 넣어 내용의 유연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독자들은 여러 곳에서 나의 독단과 독설을 만날 것이다. 또한 자주 등장하는 각주는 나의 사고 세계를 들여다보는 내통자 역할을 한다.

    셋째_ 가능하면 함경도, 전라도, 경상도 지역의 사투리를 서울 표준어로 바꾸지 않고 사용했다. 더 문학적이고 향토적이어서다.

    넷째_ 화가인 내가 작품 창작을 밀쳐두고 이 책 집필에 6년을 집중하며 직접 디자인했으니, 이 책은 글로 만든 나의 회화작품이다. 따라서 곳곳에서 읽기에 그리 편하지 않은 페이지도 만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_ 한반도에서 태어나 한반도를 벗어나 살아가고 있는 한 예술가가 한반도에 바치는 헌정獻呈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음을 밝힌다.

    나는 ‘필자’라는 어정쩡한 말을 거부한다. ‘나’라고 칭한 것은 당당하게 이 글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확고함의 표현이다. 또한 예술가의 도도함을 감추고 싶지 않기에 이 단어를 서슴없이 사용한다. 서러운 예술가는 최소한의 도도함이라도 있어야 세상과 맞대할 수 있다.

    TWO

    KOREAS:

    호칭에

    관하여

    The Two Koreas : A Contemporary History

    단 오버도퍼Don Oberdorfer가 주 저자로, 로버트 칼린Robert Carlin이 합세해 공동집필한 책이다. 두 번에 걸쳐 개정판을 냈고, 2014년에 최종판을 완성했다.

    미국인들이 남북의 첨예한 문제들을 파헤쳐 쓴 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사다.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쓴 역저로, 그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오버도퍼는 25년 동안 <워싱턴포스트> 기자로 활동했으며, 1972~75년 사이에는 동북아시아 지역 특파원이기도 했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판은 《두 개의 한국》이란 제목을 달고 나왔다.

    The Two Koreas를 ‘두 개의 한국’으로 번역한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실 ‘두 개의 한국’이라는 번역이 언어의 묘미상, 간략함을 추구하는 제목의 속성상, 그리고 한국인들의 인식상 제목으로는 보기가 좋다. 그리고 늘 그렇게 생각해 왔기에 그런 표현에 익숙해 있다. 그렇다고 오역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두 개의 한국’은 매우 부정확한 번역이다. The Two Koreas의 보다 공정하고 정확한 번역은 ‘두 개의 나라, 한국과 공화국’쯤이 되어야 바르다고 본다. 좀 더 억지를 부리면, ‘하나지만 두 개의 나라, 한국과 공화국’으로 번역할 수 있으리라. 한국은 공화국이 아니고, 공화국은 한국이 아니다. 그러므로 ‘두 개의 한국’은 부정확하다. 만약에 공화국에서 The Two Koreas를 번역했다면 ‘두 개의 공화국’ 아니면 ‘두 개의 조선’이라고 역시 오역했을 것이다.

    영어로,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와 Republic of Korea(대한민국)의 표기에서 Korea를 추출하여 Two Koreas로 제목을 달았는데, 영어 표현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저자가 의미한 Koreas는 한국(남한)들이 아니다.

    한반도The Korean Peninsula의 남북으로 분단된 두 나라를 얘기하고 있다.

    이 책을 쓰면서도 남북을 지칭하는 문제는 무척 껄끄러웠다. 하지만 내 개인의 주관적 판단과 아울러 세계적 시각을 반영해 호칭을 정했다.

    내가 세운

    호칭의 규정:

    한반도

    휴전선 이남을

    대한민국 또는 한국,

    휴전선 이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또는 줄여서

    공화국이나 조선으로

    표기한다.

    ‘북한’이라는 단어는 한국인들에게는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단어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North Korea라고 공공연히 언급되고 있기에 무난하게 들린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북한’은 정확한 표기가 아니다. 왜 그런가?

    한국인들에게 감이 잘 안 잡히는 단어 하나를 소개한다. 한국에서 일컫는 ‘6·25’ 혹은 ‘한국전쟁’을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른다. 38선 이남을 해방시켜야 할 ‘조국’으로 보는 견해다. 소름 끼친다고 느낄 필요까지는 없다. 영토에 대한 시각 차이일 뿐이다. 대한민국 헌법 역시 도서를 포함한 한반도 전체를 한국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다. 남북 각각이 한반도 전체를 자기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데서 비롯된 견해일 뿐이다. 이런 견해는 시정되어야 한다.

    2018년, 이 시각의 현실을 직시한다면 휴전선으로 나뉜 두 지역은 독립된 각각의 국가다. 한반도 전체를 자국 영토로 보는 것은 현실을 외면한 해석이다. 통일을 이룰 때까지 두 지역은 엄연히 독자적인 두 국가로 보아야 한다. 남조선과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더불어, 영어 North Korea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북한’이라고 표기해야 한다는 개념은 한국 사람들의 의식 속에 고정되어 버린 잘못된 인식이다. 휴전선 이북은 북한이 아니다. ‘북쪽의 한국’이 아닌 것이다. 공화국 역시 한국을 ‘남조선’이라 표현하는 것을 한국인들은 익히 들어왔지만, 한국인 중에서 일상 대화나 공식 자리에서 자국을 남조선이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국 역시 ‘남쪽의 조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문화적 특성을 논하는 이 책에서는 가능하면 ‘북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편의성에 대항하는 공정성의 내세움이다.

    휴전선 이북은 대부분 조선, 혹은 공화국이라 칭할 것을 예고한다.

    조선화는 과연 동양화인가

    동양화, 한국화 그리고 조선화

    중국의 종이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음 직한 ‘종이 위의 그림’인 동양화. 나라마다 국수주의 바람이 불어 한국화, 중국화(줄여서 국화國畵라고 한다), 일본화 그리고 조선화로 불리기를 강요당한 동양화는 그냥 종이 위의 그림일 뿐이다. 나라 이름을 앞에 붙인다고 그림 내용이 천양지차이지 않다. 약간 다른 특징이 눈에 띌 정도다.

    그러나 내가 내린 이 정의 또한 틀렸다. 고의로 부정확성을 부추긴 정의다. 조선화의 행보와 동시대 현상을 점검하면 조선화는, 특히 인물을 다루는 주제화일 경우 중국, 일본, 한국의 인물을 주제로 한 동양화와 현저하게 다른 독보적인 위상을 점하고 있다.

    동양화라는 단어는 현시대가 외면하기 십상인 단어다. 낡은 느낌이 드는 것 역시 당연하다. 각국의 동양화가들은 현대라는 물살을 피해 가면 곧 괴멸이나 당할까 두려워 동시대의 시류에 합승한다. 그런가 하면, 전통을 버릴 수 없다고, 전통을 벗어나는 방법을 모른다고, 아니면 전통의 계승이 보람된 작업이라며 짙은 먹 냄새를 고수하는 동양화가들도 동시대의 기류 곁에서 묵묵히 자기 길을 가고 있다.

    한국화라고 부르는 한국의 동양화는 한국 전체 화단에서 비주류다. 그 흔한 아트페어에 당당히 걸리는 한국화는 드물다.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에 내놓을 한국을 대표하는 작품 중에 동양화는 없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닐 정도다.

    남관과 이응로를 거명할지도 모르겠다. 작품성을 떠나 두 작가가 활동했던 프랑스를 벗어나서는 그들의 작품이나 작가명은 세계 미술사에서 미미하다. 이들 작가의 역량 문제가 아니다. 더 큰 무리가 필요하다. 더 큰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다수의 한국 화가가 절실하다. 한국 내에서의 동양화 문제는 스스로의 작업에 치열하게 고민하고 도전하며 발전해 온 작가 수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국화 화단에 나의 시선을 잡는 네 명의 작가가 있어 약간은 안도한다. 박대성, 이은실, 이진주, 최영걸이 그들이다.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높은 낙찰률을 보이는 최영걸의 극사실 작품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동양화의 예다. 그러나 상업적 성공이 작품성 심도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사회주의 사실주의와 조선화

    예술이든 과학이든 ‘세계 최첨단’이라고 하면 항상 귀가 솔깃해지는 이유는 ‘최고’와 ‘독보성’ 때문이다. 과연 공화국 문화계나 과학계를 통틀어 세계 최첨단을 달리는 분야가 한 곳이라도 있는가. 폐쇄, 억압, 독재, 가난 그리고 핵으로 대변되는 공화국 환경에서 세계 최고라는 단어가 붙을 분야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있다. 조선화가 그 장본인이다. 나의 공화국 미술 연구는 사실상 조선화에 매력을 느껴 시작되었고 연구를 지속할수록 이 분야를 탐닉하게 된 이유가 분명해졌다.

    한국화와 마찬가지로 세계 미술사에서 조선화에 관한 언급은 전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실주의 미술의 특징을 논하는 부분에서 조선화의 영역은 조만간 확보되리라 예감한다. 외부 세계에 노출되지 않고 있는 폐쇄성만 제거된다면, 조선화는 일반 동양화에 대한 편견을 무너뜨릴 스펙을 적잖게 장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사를 개관해보면,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대해 한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회주의 사실주의는 1990년대에 끝난 미술 흐름이 아니다. 2018년 이 시점에도 아직 사회주의 사실주의 예술을 꽃피우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미술이 있기 때문이다. 공화국 미술이 외부에 활발히 노출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 오류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공화국 미술 중에서 특히 조선화는 여러 측면에서 조명되어야 할 특이한 미술 장르며, 조선화 70년을 개관한다면 세계 미술사의 사회주의 사실주의 대목은 공화국 미술에 관한 서술로 두어 페이지를 할애할 만하다.

    오직 한 구멍을 뚫고 내려간 조선화의 시간

    조선화가 오늘에 와서 독보적인 위상에 올라설 수 있게 된 토양은 다음과 같다.

    첫째, 폐쇄적 체제

    둘째, 멈춰진 시간

    셋째, 우리식 자긍의 착암기鑿巖機

    1945년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면서 사실상 남북은 갈렸다. 38도선을 경계로 이북은 소련군이 이남은 미군이 점령하여 군정을 시작했다. 이후 이북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독립 정부를 창건했다. 그로부터 한국과는 완전히 별개의 국가로 나뉘었다. 폐쇄적 체제가 시작되었고 이 체제는 외부를 차단하는 공고한 울타리를 쳐서 시간이 앞으로, 옆으로, 사방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았다. 시간은 앞만 보고 달려가지는 않는다. 시간은 앞으로 가면서 사방을 간섭하며 주위와 같이 나아간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공간뿐 아니라 시간마저 가두어졌다.

    * 언제부터인가 ‘일제 강점기’라는 말이 일제 식민기를 대체하여 쓰이고 있다. 대단한 위험이 도사린 표현이다. 역사를 바르게 보려는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치욕스러운 일이지만 한국은 분명 일본의 식민지였다. 그것도 36년간이나. 그 사실을 ‘강점’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덮으려는 의도가 비친다. ‘강점’이란 단어는 ‘강제로 점령’한 후 점령자(일본)와 피점령자(한국)의 관계를 명백하게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강제 점령의 행위 자체 또는 점령된 상태 외에 다른 외연外延은 유보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식민’은 ‘통치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기에 두 단어는 결코 호환될 수 없다. ‘강점’에는 ‘창씨개명’이나 ‘위안부’라는 비굴, 유린의 뉘앙스가 들어설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누구나 인지하는 사실을 자의적으로 편하게 고쳐 부르는 것은 바른 역사의식이 아니다. ‘식민, 위안부’라는 아픈 상처를 되새기면서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다짐하는 편이 역사의 진실성을 존중하는 발상이라고 본다.

    갇힌 시간은 전진하지 못하고 서성이게 되었다. 서성이다 멈추어 선 시간, 공화국의 시간. 역사의 시간은 지속적으로 흘러갔지만 공화국의 시계는 멈추었다.

    전진을 멈춘 채 갈 곳이 없는 시간은, 방향을 아래로 잡아 파고들었다. 땅속 깊이 착암기로 뚫고 내려갔다. 착암기의 지속적 돌파력은 ‘우리식 사회주의 최고’라는 자긍지상주의自矜至上主義가 착암기 속의 압축공기 역할을 하여 가능했다. 아래로 파고 내려간 시간, 70년 응축의 시간은 다름 아닌 조선화의 사실주의 천착으로 응집되는 시간이었다. 오직 한 구멍을 뚫고 내려간 조선화의 사실성은 마침내 끓는 마그마를 뽑아 올리게 되었다.

    불 뿜는 용암에서 피어난 한 송이 이글거리는 꽃, 조선화!

    위 그림 「희천2호발전소」는 폭 5미터의 대형 집체작이다. 동양화로 나타낼 수 있는 입체감, 특히 얼굴 표정의 미묘한 3-D효과는 공화국 조선화의 특징인 동시에 조선화가 이룩한 독보적 경지다. 섬세한 디테일과 선묘가 제시하는 미학적 성취가 ‘동양화’라는 고정관념의 전형을 부수고 있다.

    장자오허蔣兆和¹가 추진한 중국 인물화의 서양식 발전도 공화국 조선화의 극치한 묘사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베이징 현지 미술계에서 나온 말이다.² 화선지 위에 먹과 물감으로 표현한 조선화는 땅속 깊숙이에서 끓고 있는 마그마를 뽑아 올린 결과물이라고 한 나의 표현은 결코 도에 넘치는 예찬이 아니다.

    ¹ 장자오허蔣兆和(1904~1986). 민중의 삶을 자신만의 사실주의 화풍으로 창작하여 중국 수묵 인물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20세기 최고의 중국 인물화가. 대표작으로 「유민도」를 꼽는다.

    ² 베이징청년국제문화예술협회 회장인 왕지에王皆의 발언이다. 그는 화가이면서 이 협회를 설립하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불교, 중국 문화대혁명, 조선 미술, 중국 술 등에 박식하고, 사안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어 나는 그를 만나 대화 나누는 것을 즐긴다. 많은 문화인이 그를 존중하여 그와 나의 만남에 동참하곤 한다. 그는 말한다. 이제 중국에서는 조선화와 같은 그림이 나올 수 없다고.

    외견상 조선화는 그대로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초창기 1950~60년대의 조선화와 오늘의 조선화를 비교하면 큰 맥락에서는 달라진 것이 없다. 화조는 화조요, 산수는 산수 그대로다. 여전히 화조화를 그리고 아직도 풍경화(산수화)를 그린다. 그 당시에도 지금도 주제화를 그리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조선화는 시간의 정체성停滯性이 강하다.

    이 정체성이 조선화 답보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혁신이 되었다. 아이러니다.

    앞으로 나갈 수 없자 생존의 길을 아래쪽으로 파기[착암] 시작했다. 조선화가 사실주의 미술이 도달할 수 있는 동양화 최고의 경지*를 성취하게 된 배경에는 사방이 막혀버린 시간의 정체성이 크게 기여했다.

    * 이런 비학자적인 독단을 앞으로 더러 만날 것이다. 나의 독선은 학술계의 반발을 부를 것이다. 나는 학자들이 조심하면서 피력하는, 보험금 두둑이 든 견해를 단연코 거부한다. 자고자대自高自大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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