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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 산다: 자폐인이 보는 세상은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 산다: 자폐인이 보는 세상은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 산다: 자폐인이 보는 세상은 어떻게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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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 산다: 자폐인이 보는 세상은 어떻게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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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is ebook

한 자폐인이 촘촘히 기록한,
자폐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흥미로운 관점


“자신이 경험한 자폐 스펙트럼을
놀랍도록 유머러스하고 담담하게 풀어냈다.”

조우성 변호사_ 드라마 에 일부 에피소드 제공

“삶이 반복적으로 무너져 내릴 때,
인생을 긍정하는 지혜를 그에게서 배웠다.”

리단 작가_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저자

만 6세까지 말을 하지 못했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지적 능력이 없다는 판정을 받기도 했던 저자는 지금껏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자폐인의 내면세계와 자폐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흥미로운 관점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사실 자신이 평생 겪어온(지금도 겪는) 이야기들은 꽤 아프기도 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도 많지만 저자는 많은 에피소드 속에서도 한 가지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 사람은 어떤 한 가지 설명에 가둘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자폐증은 자기 키가 195센티미터라는 것처럼 여러 특징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각각이 살아가는 세상은 모두 독특하고 살 만하다는 것이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현대지성
Release dateSep 2, 2022
ISBN9791139707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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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 산다 - 조제프 쇼바네크

    이누이트 문화처럼 유구한 문화에서는 얼핏 보기에 무척 이상한 문학 장르가 있다. 바로 탄생 또는 태내의 기억을 기록한 글이다. 어느 학회에 참석했다가 그 분야의 전문가인 베르나르 살라댕 당글뤼르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때의 일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한동안 그 만남이 자주 생각났다. 그는 그 문학 장르가 잊히기 전에 누나빅⁸에서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나에게도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지 않다. 몇몇 영상이 떠오르긴 하지만, 정말 있었던 일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누나는 나보다 운이 좋아서 유년의 몇몇 순간을 기억한다. 그녀보다 덜 조숙한 이 남동생은 할 이야기가 하나도 없지만.

    8캐나다 퀘벡 북극 지역의 이누이트 거주지

    내 오랜 기억은 대부분 스위스의 풍광과 관련이 있다. 사람 혹은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으며, 그나마 떠오르는 것도 윤곽만 희미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스위스가 여러 번 등장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스위스 시민이 아니고 심지어 그 나라에 은행 계좌도 없다. 그저 독일어권 스위스 쪽 알프스산맥에서 보낸 긴 휴가가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형성했고, 그 시간을 아직 잊을 수 없을 뿐이다.

    말은 못 하면서 중세 라틴어 문서를 읽는다고?

    불교 승원⁹에 입회할 때 지원자가 가장 먼저 받는 질문은 당신은 사람인가 아니면 영혼인가?라고 한다. 서구문화에서 ‘인간’을 정의하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언어 능력’을 중심으로 일종의 기준이 정립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기준은 무척 합당해보인다. 구체적으로 말해 내가 몇 년간 전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사람일까? 이 경우 자기실현적 예언¹⁰을 하게 될 위험이 있다. 말할 능력이 없다고 판정된 아이는 대부분 말을 배울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그러다 보면 말할 능력을 영영 갖추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9승려가 불상을 모시고 불도(佛道)를 닦으며 교법을 펴는 집

    10심리학이나 사회학에서 어떤 주장이나 믿음을 사실이라고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개념

    나는 운 좋게도 말하는 법을 배웠다. 내가 언제 말문을 뗐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다만 오랜 시간 힘겨운 과정을 겪으면서 의사표현 능력이 서서히 나아진 것은 분명하다. 내가 예닐곱 살 때쯤에는 부모님과 누나만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내 말을 알아듣겠답시고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하게 한 뒤 결국 ‘통역’해주기를 바라며 부모님을 바라보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린이에게 무엇을 요구하기에 앞서 ‘말하기’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어른처럼 능숙하게 말하길 원하는가 아니면 그 나이에 걸맞게 말하길 원하는가? 맥락을 이해하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대체 어떤 맥락을 이해해야 하는가? 쓸데없는 질문은 아니다. 어떤 어린이가 중세 라틴어 문서를 줄줄 읽고 심지어 그에 대한 주석을 글로 쓸 줄 알지만 말할 줄 모른다면, 그 아이는 저능아일까? 거기 더해 그 아이가 지금껏 중세 라틴어 문서를 한 번도 접한 적 없다면? 지금 우리는 오늘날의 학교교육이 당면한 문제로 서서히 다가가는 중이다. 굴렁쇠를 굴릴 줄 모르고 신발 끈을 묶지도 못하지만 미분 계산을 아주 좋아한다면, 그 아이는 학교에서 다음 학년으로 진급할 능력을 충분히 갖춘 걸까? 그 아이는 이른바 공부를 제대로 시작한 것인가?

    나는 일부 자폐 아동들처럼 특이하지는 않았지만, 나만의 독특함이 있었다. 지금은 여유로이 웃어넘기는 일들이 그때는 하나같이 비극으로 다가왔다. 말할 때 겪는 어려움에 또 다른 문제들이 추가되었다. 나는 발성은 완벽했더라도 상대가 대체로 이해하지 못할 단어를 말하곤 했다. 별 이름 목록이 단적인 예다. 당신이 심리상담사라고 가정해보자. 누군가 자폐 아동을 당신에게 데려왔는데, 아이가 처음부터 이런 단어들을 말한다. 알니타크, 알닐람, 민타카. 당신은 자폐증이 인간적인 의사소통을 저해한다고 여기면서 아이의 증상이 소아 정신병에 해당한다고 진단할 것인가? 아니면 오리온자리의 허리띠를 이루는 별 세 개의 이름을 알아듣고 천문학과 관련된 소재를 꺼내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갈 것인가? 이는 내가 직접 경험한 상황이다. 심리상담사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말이다.

    내 부모님의 친구인 어느 아주머니가 처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아주머니와 잠시 동안 단둘이 남겨졌을 때 그분에게 프랑스가 다시 왕국이 되지 않은 이유를 체코어로 물었다. 당연히 내가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한 후에야 그분은 내 의도를 이해했고,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와는 그런 대화를 나누지 않는 법이니까.

    비슷한 기억이 하나 더 있다. 체코 태생인 부모님은 파리에 사는 체코인 소모임에 자주 참석했다. 나는 가끔 그 모임에서 관심사인 천문학에 대해 ‘주제 발표’를 하곤 했다. 나는 일고여덟 살 때부터 수년간 천문학에 푹 빠져 있었다. 어른들은 땅딸막한 꼬마가 이런저런 별의 특징에 대해 말하는 걸 재미있어했다. 어쩌면 아이가 흥분해서 떠든다고 생각하며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정신과 의사가 그곳에 있었다면 ‘정신병’을 이겨내도록 내게 약을 주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 시기에 사회적인 담화, 즉 관계를 만들어내는 담화, 더 근본적으로는 말한 사람을 ‘정신이 온전한 인간’으로 보게 만드는 담화를 할 능력이 거의 없었다.

    내 생각에는 글쓰기가 말하기보다 쉬운 것 같다. 움직임이 동시에 이루어지도록 조절하는 일이 덜 까다롭기 때문이다. 원하면 속도를 늦추거나 멈출 수 있다. 글을 쓰기 위해서 키를 누르기만 하면 되는 자판을 얻기 전부터 그랬다. 내가 다른 자폐 아동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말하는 법을 체득하기 전에 읽고 쓸 줄 알게 된 것이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내가 언제, 어떻게 읽고 쓰기를 배웠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몇몇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1983년 12월, 나의 만 2세 생일날(어쩌면 성탄절일지도 모른다) 집에 소포가 도착했다. 부모님의 친구들이 누나와 내게 선물을 보냈는데, 그중에는 평범한 남자아이가 좋아할 만한 장난감 트럭과 유아가 가지고 노는 작은 인형이 있었다. 지금도 우리 가족은 내가 그 털북숭이 작은 인형을 그린 그림을 가지고 있다. 서투르지만 내가 지금 끼적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솜씨다. 난 그 인형 그림에 탄생(도착) 날짜와 몇몇 단어를 적었다. 대문자 알파벳 몇 개는 거꾸로 썼다. 왼쪽과 오른쪽을 구분하는 것은 내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난 동쪽과 서쪽도 단번에 구분하지 못한다. 유럽 지도를 대충 알지만 누가 나더러 독일 서쪽에 있는 나라를 하나 말해보라고 한다면, 내가 지도에서 동쪽의 위치를 올바르게 떠올리는 몇 초 동안 그 자리에 껄끄러운 침묵이 감돌 것이다.

    그 그림의 뒷면에 쓴 글에서 나의 또 다른 특징 하나가 보인다. 난 아이들을 위해서―네 이름을 적으렴이라고 쓴 다음 내 성(姓)인 쇼바네크를 적었다. 보통 세 살짜리 아이가 말을 하거나 글을 쓸 줄 알면 자신을 성이 아닌 이름 또는 별칭으로 가리키는 법이다.

    이렇듯 난 독서와 글쓰기로 학습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말로 듣는 것보다 글로 읽는 것이 더 쉽다. 말하기와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손으로 직접 쓰거나 자판으로 입력하는 것이 말보다 쉽다. 그러니 나는 자크 데리다(프랑스 철학자)의 ‘문자론’ 프로젝트에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언어학이 말로 구현된 언어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문자론은 쓰인 글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글을 쓸 때나 말을 할 때 중요한 것은 단지 그 ‘행위’가 아니다. 각각의 발언 이면의 사회적 기대는 단어보다 강하다. 어떤 질문이나 요구는 상당히 명료하다(예를 들어, 선분 AB의 센티미터 단위 길이는 얼마인가?). 하지만 의미가 모호하면서 단어로 기호화되지 않은 것도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뒤에서 당신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그는 당신더러 돌아서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부른 건 당신이 아니라 동명이인인 누군가일 수도 있다. 그런데 많은 자폐 아동이 이런 사실을 매우 불안하게 여긴다. 그래서 어떤 자폐인은 사람들을 자동차 번호판이나 사회보장 번호로 식별한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번호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들 하지만, 사람을 어떤 이름 안에 집어넣는 것도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은 스위스에서 끔찍한 경험을 했다. 나를 잃어버린 것이다. 사실 난 그때 엄마 아빠의 바로 앞의 덤불 속에 있었다. 하지만 두 분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생기면 때 소리 질러 답해야 한다고 내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걷는 법을 배우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걸음이 늦었다. 뒤늦게 걷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팔을 붙들어주었지만 난 허공에 다리를 쳐들고 휘저을 뿐이었다. 여러 움직임을 동시에 하지 못하다 보니 걸을 수 없었다. 가족 영상에는 그런 장면이 가득하다. 지금도 나는 이상하게 걷는다. 학창 시절 같은 반 여학생 한 명은 나더러 춤을 춘다고 했다. 아마도 최대한 돌려 말하느라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학생은 내가 복도나 계단에 혼자 있을 때면 나의 오래된 즐거움을 과감하게 만끽한다는 사실, 즉 내가 두 팔을 번쩍 들고(허공에 쳐들고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내 두 팔은 언제나 허공에서 허우적댄다) 걷는다는 사실은 몰랐다.

    현재 나는 자폐증을 가진 아동의 부모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부모가 느끼는 절망감이 얼마나 큰지 깨닫는다. 가령 아이가 아예 걷지 않는다. 또는 제대로 걷지 않거나,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걷는다. 오늘 아침에 만난 한 여인의 자녀는 비로소 걷기 시작했지만 나이에 비해 걸음걸이가 서툴다. 그러다 보니 바닥이 조금만 울퉁불퉁해도 나이 많은 노인처럼 넘어지곤 한다.

    학교를 왜 다녀야 할까?

    어떤 질문에는 아쉽게도 딱 떨어지는 답이 없다. 학교에 가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도 그런 질문 중 하나다. 물론 공식적인 답이 있긴 하다. 즉,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것을 배우기 위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미셸 푸코가 언급한 ‘신체에 대한 규율’을 내세울 수도 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미덕을 말한다. 나는 ‘취학 의무’라는 일방적인 원칙을 답으로 택했다. 취학 의무가 지닌 여러 결점이 있지만 난 그 의무를 고맙게 여겼다. 나는 학교가 ‘필요한 배움이 진정으로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단, 그 배움이 항상 교육과정에 명시된 내용은 아니다.

    사람들은 나를 학교에 그만 보내라고, 적어도 유급은 시켜야 한다고 여러 차례 권했다. 여기에서 나는 일부러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특정하지 않았다. 나를 실패하게 만들려는 ‘대마왕’이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입장이 옳다고 확신하거나 권한을 지닌 사람이 내린 지시를 따르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 학교 교육의 각 단계가 교활한 적으로 돌변하기라도 하듯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어떤 집단에 맞서 싸운다는 느낌을 많은 부모가 줄기차게 받는다.

    내가 처음 접한 학교라는 존재는 유아학교 마지막 학년인 5세반이었다.¹¹ 거기에서 나는 오전 반나절만 보냈다. 오후까지 학교에 머무르는 건 불가능했다. 입학에 앞서 교장선생님과 면담했던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물론 어른들의 이야기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부모님은 교장선생님이 망설이다 결국 타협안을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유아학교 5세반이 끝나자 담임선생님을 비롯해 모든 사람이 유급을 권했다. 초등학교에서 공부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만약 내가 그런 능력을 갖출 때까지 기다렸다면 나는 아직도 5세반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읽고 쓸 줄 알며 여러 종류의 곰팡이에 깊이 빠져들 수는 있었지만 반 친구들과 함께 굴렁쇠 놀이를 하지 못했으니까. 문제는, 자폐를 지닌 아동이 갖추기 힘든 능력을 기준으로 해서 그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그런 능력들은 대체로 흥미롭지 않다. 3중적분과 음악 반주기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그 둘이 어렵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폐를 지닌 아동 중 상당수가 3중적분에는 흥미를 느끼지만 음악 반주기에 맞춰 노래하는 것에는 대체로 흥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는 자폐를 지닌 사람이 남과 교제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하지만 자폐인은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격하게 소리를 지르고 몸을 움직이며 느끼는 즐거움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11프랑스의 학제는 중등교육까지 유아학교 3년(만 3~5세), 초등학교 5년(만 6~10세), 중학교 4년(만 11~14세), 고등학교 3년(만 15~17세)이다.

    사회적인 면에서 나는 혼자였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무서웠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 두려움은 이성적인 분별에서 비롯되었다. 매일 얻어맞았기 때문이다. 어떤 단체 놀이는 나를 두들겨 패는 방향으로 조직되곤 했다. 질 나쁜 학교에만 학교폭력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학생 수가 적고 평판이 상당히 좋은 학교에 다녔다. 당시에 학교 감독인¹²은 어린이가 얻어맞지 않도록 지켜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금은 어떨까? 확신은 못 하겠지만, 아마도 주의 깊게 살필 거라고 믿고 싶다. 더 나쁜 사실은, 내게 닥친 사회적 불운의 원인을 나의 장애 탓으로 몰아갔다는 점이다. 만약 어린이 네 명으로 이루어진 집단에서 세 아이가 자폐를 지닌 A와 놀기를 거부한다면, 대부분 A의 특수성이 문제라고 지적할 뿐 세 아이가 내린 비난받을 만한 결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결국 A는 이중으로 고통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거의 모든 단계에서 이런 일을 겪게 된다.

    12수업 이외의 시간에 학생들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교사는 아니다.

    통찰력과 관찰력이 뛰어난 내 부모님은 놀랄 만한 대응책을 찾아냈다. 사람들에게 내가 외국인 또는 체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상황이 분명하게 설명된다. 내가 부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인 것이다. 내가 선생님의 지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학교 식당에서 먹지 않는 것도 내가 어느 멀고 낯선 지역의 식습관에 길들여져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연스러웠다. 몇 년 전에 나는 스웨덴에서 태어난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내가 겪은 일과 아주 흡사한 경험을 이야기해주었다. 단지 체코 사람이 스웨덴 사람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내 부모님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어떤 틀에도 들어맞지 않는 아이

    어린이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즐거워한다. 참으로 뿌리 깊은 믿음이다. 그런데 자폐를 지닌 아동에게는 더없이 불길한 믿음이기도 하다. 어른들은 등교를 거부하는 아이에게 학교에 가면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말로 설득하지 않는가? 부모님은 내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만약 그랬다면 내 화만 돋우었을 것이다. ‘친구’(copain)라는 단어는 대체 무엇을 뜻할까?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이 글을 쓸 때 그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분명히 설명했는데¹³, 어째서 그 말을 계속 쓰는 걸까? 자폐 아동에게는 그 ‘친구’들이 자기를 흠씬 두들겨 패는 작은 괴물들이라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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