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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택한 조선의 선비들: 역사가 기억해야 할 조선의 죽음과 희생정신
죽음을 택한 조선의 선비들: 역사가 기억해야 할 조선의 죽음과 희생정신
죽음을 택한 조선의 선비들: 역사가 기억해야 할 조선의 죽음과 희생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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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택한 조선의 선비들: 역사가 기억해야 할 조선의 죽음과 희생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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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택한 조선의 선비들』에서는 자결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시대의 사람들이 목숨과 바꾸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책이다.조선시대에는 마음가짐에 따라 자살을 세 가지 등급으로 나누었다. 가장 높은 등급은 인(仁)을 이루고 의(義)를 취하기 위해 자살하는 것, 그다음 등급은 비분강개하여 자기 몸을 희생하는 것, 마지막 등급은 형세가 반드시 환난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자결하는 것이다. 저자 정구선은 역사에서 배제되었거나 잘 드러내지 않았던 자살을 통해 조선시대의 정치적·역사적 사건의 이면과 사회적인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고 있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애플북스
Release dateApr 27, 2016
ISBN979115771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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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을 택한 조선의 선비들 - 정 구선

    저자소개

    정구선 鄭求先


    동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논문<조선시대의 천거제 연구>로 박사학위(한국사 전공)를 받았다. 한성디지털대 겸임교수, 동국대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동대학원과 학부 등에서 후진을 지도하며, 연구와 집필을 계속하고 있다. 저서로는 <조선시대 천거제도연구> <한국관리등용제도사연구> <공녀> <성,역사와문화(공저)> <한국사의 새로운 인식> <중세시대의 환관과 공녀> <조선시대 처사 열전> <한국중세의 천거제도> <한국 근대 관리임용 연구> <조선의 발칙한 지식인을 만나다> <조선의 출셋길, 장원급제>등이 있으며, 그밖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

    자살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 또는 자발적 내지 의도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를 가리킨다. 또한 자결은 의분을 참지 못하거나 지조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을 뜻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점에서 자결은 자살의 동의어 내지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살과 같은 의미의 단어로는 자진自盡이 있다. 자살과 자결이 자의적 자살이라면 자진은 타의에 의한 자살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즈음 우리나라를 자살공화국이라고들 한다.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2009년 한 해에 모두 1만 5,413명이 자살하여 하루 42명꼴로 자살한 결과를 낳았다. 이는 2008년에 비해 20퍼센트가량 증가한 수치로, 우리나라는 OECD 가입국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이어가고 있다. 또한 자살은 한국인의 주된 사망 원인인 암, 뇌혈관 질환, 심장 질환에 이어 네 번째를 차지할 정도로 그 비중이 높다.

    근래에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대기업 회장과 임원, 저명인사와 연예인 들이 잇달아 죽음을 택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들의 자살은 우리를 한없이 우울하게 한다.

    과연 그들은 왜 자살했을까. 이것이 정말 궁금하다. 그런 자살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인생무상, 권력무상을 실감하게 되며, 각자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쉽게 결론을 내기 힘든 문제며, 자살에 대한 이야기는 조심스럽기만 하다. 한 번뿐인 삶, 남겨진 사람들, 극단적인 선택의 이유, 죽음과 개인의 자유의지, 다른 선택의 가능성 등과 같은 문제를 생각할 때 어찌 단순 명료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살이 결코 문제의 근본적이고 현명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최근 종교 지도자들이 강조하듯, 어떤 경우에도 자살은 용납될 수 없으며 고통에서 도피하는 수단이나 문제 해결 방법이 될 수 없다는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자살의 원인 80퍼센트는 우울증과 관련 있다고 하며, 그 밖에도 약물 중독, 불명예 또는 저마다의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나려고 자살을 시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사이는 각 분야에서 정상급 위치를 굳혀 일반인이 보기에 남부러울 것이 없는데도 부귀영화를 포기한 채 목숨을 버리는 일이 많은데,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치열한 경쟁 사회가 낳은 병리 현상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자살은 삶, 돈, 사랑 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자살에 대한 관점은 민족이나 문화, 종교, 법, 사회제도 등에 따라 다양하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자살을 죄나 부도덕한 행위로 여기며, 서구에서는 자살을 범죄로 여겨 재산 몰수 등과 같은 처벌을 내리기도 했다. 대개 서구 사회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아시아에서는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의 영향으로 자살을 범죄 내지 부도덕한 행위로 여긴다. 특히 가톨릭과 기독교 전통에서는 자살한 사람은 무조건 지옥에 떨어지며, 영원히 회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라 하여 종교적 장례 의식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어땠을까? 특히 조선시대 사람들은 자살을 어떻게 바라보았으며 자살의 주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인조 대의 문신 홍호에 따르면 자살에도 그 마음가짐에 따라 세 등급이 있다고 한다. 그중 가장 높은 것은 인仁을 이루고 의義를 취하기 위해 죽는 것으로 이것은 감히 논할 수 없는 경지다. 그다음은 비분강개하여 자기 몸을 희생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형세가 반드시 환난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자결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자살 또는 자결에 대해 살펴볼 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여성들의 죽음이다. 남성들에게 사회, 정치적 명예가 중시되었듯 조선의 여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명예는 정절이었다. 이를 지키지 못할 위기에 처하거나 몸을 더럽혔을 때 선택한 자살은 뭇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으며 열녀문을 세워주는 등 나라에서 은전을 내리기까지 했다. 물론 조선시대 여성들의 ‘정절’이란 오늘날 우리에게 미덕이라기보다는 강요된 이데올로기이자 그 시대 여성들의 힘겨운 삶을 상상하게 하는 면이 더 크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조선의 집권층인 양반 사대부들은 대개 정치적으로 패배하거나 역모에 실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힘없는 백성들이나 여인네들은 관리들의 착취에 저항하고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한 많은 세상을 등졌다. 다시 말해, 권력자들이나 관리들은 대체로 정치적 이유로 자결했고, 일반 백성들은 체제 저항의 수단으로 죽음의 길을 택했으며, 여인들은 윤리 도덕적인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다. 요즈음처럼 우울증이나 생활고 같은 개인적 문제에 의한 충동적, 염세적 자살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들은 때로는 칼로 목을 찌르고, 독약을 마시고, 몸을 불태우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이 모든 자살 내지 자결 사건들에는 단순한 개인의 사연을 넘어 당시 사회의 정치 상황과 사회문제, 풍속, 가치관 등이 다양하게 녹아 있으니, 조선의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일면을 들여다보는 거울로 삼기에 충분하리라.

    2010년 10월

    정구선

    들어가는 말

      왕실을 둘러싼 자살사건

    자살이냐 타살이냐 단종        

    조선시대판 쇼생크 탈출 폐세자 이지

    인조반정으로 자살한 폐세자의 장인 박승종·박자흥 부자

    왕족으로 태어난 것이 화근 이공과 이탄

    아버지가 내린 자결 명령 사도세자

    태종의 외척 견제의 희생양 민무구 형제

    사돈의 눈 밖에 난 세종의 장인 심온   

    ● 자살하려 한 임금들

     정치적 암투와 그 패자들의 죽음

    자살의 길을 택한 사육신 유성원

    기묘사화로 인해 자결한 사림파 김식

    기축옥사로 이어진 실패한 반란 정여립    

    당쟁의 산물이 된 죽음 최영경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은 당파 싸움 유영경

    처남의 도움에도 살아남지 못한 이이첨의 장남 이대엽

    더럽혀진 명예 박이창

    ● 연좌, 악법의 잔인한 올가미

     여인들의 한스러운 자결

    자살이냐 병사냐 신숙주의 부인 윤씨

    남편의 명예 회복을 위해 김정의 부인 송씨

    첩의 딸로 태어나 정경부인으로 정난정

    질투가 부른 비극 귀인 조씨

    당쟁 앞에 무너진 왕비의 꿈 장희빈

    남편을 따라 죽다 화순옹주

    두 가문의 혈투로 번진 산송 박문랑

    오랑캐, 그리고 그녀들의 선택 황해도의 열녀 126인

    ● 은장도 쥐여주는 사회

     전쟁터에서의 의로운 결단

    진주성에서 맞은 장렬한 최후 김천일

    전쟁에 휩쓸린 형제의 운명 신립·신급 형제

    신립을 따라 강에 투신하다 김여물

    처자와 함께 불에 몸을 던지다 김준

    오해의 불씨를 남긴 분신자살 김상용     

    강 너머 다가오는 적들을 보며 강화도의 순절자들

    치욕스러운 항복 결정 정온·김상헌

    죽음보다 더한, 살아남은 자의 고통 윤선거

    ● 환향녀, 전쟁포로들의 서글픈 귀향

     민초들의 마지막 선택

    무고로 자결한 사람들

    나약한 백성들을 괴롭혀 죽음에 이르게 하다

    군역, 죽거나 출가하거나

    사민정책이 낳은 죽음 북방 이주민

    중국에 바쳐진 처녀들 공녀      

    ● 자살로 위장한 타살

    애도할 수만은 없는 죽음

    망나니 부마의 죽음 신의

    계모와 재산 다툼을 벌인 패륜아 박저생

    자살해버린 죄수들

    부모를 죽인 시역 죄인 윤승손·이상신

    사형에 해당하는 죄, 간통    

    ● 조선 땅에서 자살한 일본인들

    단종은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에 책봉되고, 2년 뒤 문종이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병약했던 문종은 죽기 직전에 황보인, 김종서 등의 신하들에게 나이 어린 세자의 보필을 부탁했고,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도 좌우에서 힘을 모아 도와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1453년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권남, 한명회 등과 함께 황보인,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나라의 모든 권한을 장악하자 단종은 이름뿐인 왕이 되었다. 2년 후 단종은 한명회 등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1456년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모두 처형된 뒤, 이듬해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그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된 숙부 금성대군이 다시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자,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10월에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단종의 죽음에 대해서는 수양대군, 즉 세조와 그 측근들에 의한 타살설이 대세지만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금성대군 등의 복위 운동이 실패한 직후 자살한 것으로 나온다.

    금성대군의 거사가 발각된 후인 세조 3년1457 10월에 영의정 정인지 등이 반역 죄인인 금성대군 이유, 화의군 이영, 한남군 이어, 영풍군 이전 등의 종친과 정종, 송현수 등의 일당을 처형할 것을 강력하게 주청했다. 그러자 임금은 이유는 사약을 내리고, 이영 등은 논하지 말라고 명했다.

    정인지 등이 다시 나머지도 처형해야 한다고 아뢰자 임금은 불가하다. 옛사람의 말에 ‘괴수들은 섬멸할 것이로되, 협박에 못 이겨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는다’ 했고, 또한 성인聖人은 너무 심한 것은 하지 않았으니 이제 만약 아울러서 법대로 다스린다면 이는 너무 심하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는 교형絞刑에 처하고 나머지는 논하지 말게 했다. 정인지 등이 다시 이영 등을 유배지로 보낼 것을 청하니, 이를 윤허했다. 노산군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죽으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세조실록》 권9, 3년 10월 신해

    이처럼 실록에는 단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역사학자 대부분은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실록의 기록은 믿을 수 없으며 단종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세조에게 살해되었다고 보고 있다. 또한 많은 소설에서도 그의 타살을 묘사한 것을 볼 수 있다.

    조선 전기 이래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인정된 단종 자살설은 숙종 대에 접어들어 타살설에 자리를 내주고, 그때부터 이것이 정설이 된 것으로 보인다. 노산군으로 강봉되었던 단종은 숙종 24년1698에 복위되었는데, 이듬해에 하직하는 수령을 만나 유시하는 자리에서 숙종이 한 말을 보면 당시에 단종의 타살설이 이미 굳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종 대왕이 영월에 피하여 계실 적에 금부도사 왕방연이 고을에 도착해 머뭇거리면서 감히 들어가지 못했고, 뜰에 들어왔을 때 단종 대왕께서 관복冠服을 갖추고 마루로 나오시어 온 이유를 하문하셨으나 왕방연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임금의 명령을 받든 신하로서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그때 앞에서 늘 모시던 공생貢生(향교의 생도) 하나가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가 즉시 아홉 구멍으로 피를 쏟고 죽었다. 하늘의 도리는 논해야겠으니, 그 공생의 성명이 전해 와서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으면 영월에서 조사해 보고하게 하라.

    《숙종실록》 권33, 25년 1월 임신

    이 기록을 보면,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려고 했으나 차마 실행하지 못하자 공생이 단종을 죽인 사실을 숙종이 이미 알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임금이 알 정도니 그 이전부터 단종의 타살설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을 것이다. 타살설이 나돌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 현종 대를 전후로 한 시기인 듯하다. 실록에 따르면, 그전에는 이런 말이 전혀 없다가 현종 10년 1월에 당시 판부사로 있던 송시열이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서 장사를 치른 것으로 알려진 엄흥도의 자손을 등용해야 한다고 임금에게 건의하면서 노산군이 해를 입었다遇害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 후 정조 대에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등과 같은 각종 역사서적 내지 야사류에도 단종의 타살설이 기술됨으로써 이후 타살설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타살설은 그 뒤 계속 이어져 내려와 일제강점기에 김진구는 단종의 타살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수양대군은 문종의 애제愛弟이며 단종의 숙부로서 왕위를 찬탈하려고 스스로 당을 결성하여 문종의 유신遺臣과 단종의 충량忠良을 모조리 도륙하고 천하에 호령했다. 그러고서도 부족함이 있었던지 단종을 영월에 귀양 보내고 다시 독살하려다가 드디어 한 공생의 손에 목을 매여 자리개질해서 죽이고 그 시체는 강에 던져서 어복魚腹에 장사했다. 천고 만대에 이러한 잔인함도 있으며 이와 같은 비절 통절의 역사가 또 어디 있겠느냐?

    <역대인물쾌사록歷代人物快死錄(1)>(《별건곤》 제10호, 1927년 12월)

    이광수도 《단종애사》에서 다음과 같이 단종이 죽음을 당한 것으로 묘사했다. 1928년 11월부터 1929년 12월까지 〈동아일보〉에 총 217회에 걸쳐 연재된 《단종애사》는 단종이 태어나서 영월에서 사망할 때까지를 다룬 연대기적 소설로, 세종과 문종을 모시던 수구파와 세조를 옹위하던 개혁파 사이의 다툼에서 희생된 단종의 슬픈 생을 그리고 있다.

    정축년1457 10월 24일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가지고 왔으나 단종이 없어서 울고만 있는데, 유시酉時에 공생이 활줄로 단종의 목을 매어 한 많은 숨을 거두게 된다. 공생은 문을 나가다 피를 토하여 죽고, 노산군의 시체는 금강에 띄운다. 밤에 영월의 호장戶長 엄흥도가 몰래 시체를 건져 싸두었다가 관에 넣어 평토장平土葬을 하고 돌을 얹어 표를 해두었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제기된 타살설이 정설화되면서 대부분의 역사학자나 소설가 등은 단종이 세조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으로 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조와 그 신하들이 단종을 죽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자살설을 퍼뜨렸다는 주장이 널리 유포되기에 이르렀다.

    어린 나이에 버거운 자리에 올라 가까운 사람에게 도움을 받기는커녕 권력을 둘러싼 암투에 매정하게 희생당한 단종은 실로 비운의 임금이었다. 어머니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은 지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뒤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어른들에 둘러싸인 채 끝내 비참한 죽음을 당한 십대 소년의 외로움과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 다만 그 억울한 죽음을 둘러싼 진실이 늦게나마 밝혀진 것으로 역사는 위안을 삼아야 하리라.

    팀 로빈슨과 모건 프리먼 주연의 1994년작 <쇼생크 탈출>은 종신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교도소에서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다는 이야기로 한 인간의 자유를 향한 열망과 끈질긴 집념을 잘 표현한 영화다. 영화에서 살인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선고받아 쇼생크 교도소에 갇힌 앤디팀 로빈슨는 15센티미터 길이의 돌망치로 20여 년에 걸쳐 수용실 벽을 야금야금 뚫어 긴 터널을 만들고 마침내 탈옥에 성공한다.

    이 영화처럼 성공한 탈출담은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는 귀양지에서 실제로 땅을 파서 탈출을 시도한 사건이 있었다. 게다가 탈출을 시도한 인물은 다름 아닌 왕세자로, 인조반정으로 세자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강화도에 위리안치된 광해군의 세자 이지가 그 주인공이다. 위리안치란 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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