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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 서양철학사
틸리 서양철학사
틸리 서양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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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 서양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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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이 스스로 말하게 한다”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쓰인 『서양철학사』

『틸리 서양철학사』는 20세기 전반에 걸쳐 미국 주요 대학에서 철학 교재로 사용됨과 동시에, 일반 독자들에게 교양서로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철학의 명문인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철학 교수로 평생 봉직한 프랭크 틸리 교수가 쓴 이 책의 가장 탁월한 특징은 객관성과 공정성이다. 틸리 교수는 철학사에서 나중에 등장하는 체계들이 앞선 학파에 대해 아주 훌륭한 비판을 제공한다는 확신을 갖고서 자신의 비판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이 책의 꾸준한 성공 비결을 설명하는 또 다른 특징은 사상가들이 철학 운동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제시하는 데서 드러난 균형 감각이다. 틸리는 역사적 발전에서 내적 논리를 분별해내면서도 개별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는 사회·정치·문화적 요소들을 인정했다. 철학자를 철학 운동 안에 놓고 보는 틸리의 솜씨는 근대철학의 구조를 짜는 데서 특히 뛰어났다.
이 책이 보여주는 마지막 특징은 틸리 교수가 가진 문체의 명료함과 단순성이다. 틸리는 역사적 철학자들과 그들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명료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이 책을 썼고, 이러한 명료함은 이 책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철학사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단지 과거의 업적을 기록하려는 역사적 골동품 애호가의 것도 아니고, 이념과 개념의 지속성만을 추적하는 사상사가의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철학사를 철학적 이념의 진열장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의 통찰을 끌어온 철학자의 관심이었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현대지성
Release dateMar 23, 2020
ISBN9791190398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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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틸리 서양철학사 - 프랭크 틸리

    제1장

    자연 철학

    1. 초기 그리스 사상의 기원과 발전

    그리스 철학의 역사

    고대 민족 가운데 신화적 단계를 넘어선 민족이 별로 없고, 아마 그리스인을 제외하면 진정한 철학을 발전시켰다고 말할 수 있는 민족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 철학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하겠다. 그들은 후속되는 서양 사상의 모든 체계를 떠받치는 초석을 놓았을 뿐만 아니라, 유럽 문명이 2천 년 동안 관심을 기울였던 거의 모든 문제를 분명히 밝히고 거의 모든 문제를 제시했다. 그들의 철학은 단순한 신화적 출발부터 복잡하고 포괄적인 체계로 나아가는 인간 사유의 발전을 제시한 가장 훌륭한 예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스 사상가들을 고무시킨 독립의 정신과 진리의 사랑에 능가하는 것이 없었고 견줄 만한 것도 거의 없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 철학의 연구는 높은 사색적 사유에 관심을 갖는 연구가에게 매력적이며 가치있는 분야임에 틀림없다.

    그리스 철학의 역사란, 그리스 세계에서 발생하고 발전한 지적 운동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인의 사상 체계뿐만 아니라, 아테네나 로마나 알렉산드리아나 소아시아나 어디서 융성했든지 상관없이 그리스 사유의 본질적 특징을 보여주며 명백히 그리스 문명의 산물에 속하는 것들도 거기에 포함시킬 것이다.

    환경

    우리가 연구하려는 철학의 민족은 산악지인 그리스 반도에 살았는데, 이 지역의 자연적 특성은 강력하고 활동적인 민족이 발달되는 데 유리했으며, 많은 항구들은 항해와 상업을 장려했으며, 섬을 지나 저 너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출구 노릇을 했다. 그리스 식민지는 본토에서 소아시아의 해안으로, 결국 이집트, 시칠리아, 남 이탈리아, 헤라클레스의 기둥(지브롤터 해협의 동쪽 끝에 솟아 있는 2개의 바위)으로 단절없이 이어지며 건설되었다. 이 식민지는 본국과 지속적인 접촉을 유지하면서, 상이한 관습과 전통과 제도를 가진 민족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통하여 얻기 쉬운 유익을 향유했다. 그런 상황에서 기인하는 놀라운 경제적 발전, 상업과 공업과 무역의 발전, 도시의 발흥, 부의 축적, 분업의 증가는 전체 그리스 세계의 사회적·정치적·지적·종교적 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새롭고 더 풍부한 문명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이 물리적·인간적 상황은 지성과 의지를 고무하는 데 유익했다. 이 환경은 사람들에게 인생과 세계에 관한 좀 더 넓은 전망을 제공했으며, 비판과 성찰의 정신에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독특한 개성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인간적 사유와 활동의 온갖 노선을 따라 다양한 발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예민하고 살아 있는 지성, 지식에 대한 불타는 욕구, 아름다움에 대한 세련된 감각, 실천적 활동력과 야심을 본성적으로 구비한 한 만족에게, 이 환경은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재료를 제공했고, 정치와 종교와 도덕과 문학과 철학의 분야에서 급속한 발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정치

    본토와 식민지에서 그리스 도시 정치의 정치적 운명은 어떤 공통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우리는 도처에서 가부장적 군주제로부터 귀족주의를 거쳐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발전을 발견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서술하는 사회는 계급 사회이며, 정치 형태는 가부장적 군주제이다. 소수에 의한 부와 문화의 획득은 귀족주의적 정체를 낳았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과두제를 낳았다. 변화하는 사회적 조건과 더불어, 시민 계급(the Demos)이 등장하여 특권 계급의 지도력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6, 7세기 동안 정체(政體)가 귀족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했는데, 이는 그리스 세계 도처에서 귀족의 권력을 억지로 빼앗고 독재를 수립하는 담대하고 야심적인 사람들의 활동 때문이었다. 결국 민중이 정권을 잡고, 독재는 물러가고, 민주주의가 자리잡았다.

    문학

    우리는 이처럼 변화하는 사회적·정치적 상황을 그리스 의식의 자각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새로운 운동은 계몽의 증후와 원인이다. 이는 전통적인 것에 대한 점진적인 반성과 비판을 보여주는 외적 표시이다. 이는 옛 제도에 대한 항거와 개혁에 대한 요구로 이어진다. 기원전 6세기 이전 그리스 문학사는 정치 생활에서 표출된 것과 비슷한 반성과 비판의 정신의 발전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의 순진성을 반영하는 호메로스의 유쾌함과 객관성은 점차 사라진다. 시인은 낙관성을 점차 상실하고 더욱 비판적이며 주관적이게 된다. 호메로스에게서도 우리는 인간의 행동, 죽을 인생의 어리석음, 인생의 비참함과 무상함, 부정의의 사악함에 대한 이따금씩의 도덕적 반성을 발견한다.

    헤시오도스에게서 비판과 비관론의 어조는 점점 거세진다. 그의 「일과 날」(Works and Days)은, 소박한 덕을 칭송하고 좋은 옛 시절의 몰락을 한탄하며, 그 시대의 약점을 공격하고 인생의 도덕적 준칙과 실천 규칙을 제공하는 도덕 교과서이다. 7세기의 시인들(알카이오스, 시모니데스, 아르킬로코스)은 음울하고 풍자적인 어투로 참주제(tyrannis)의 발흥을 비난하지만, 사람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용감하게 맞이하고 신들에게 그 결과를 맡기라고 권고하면서도 사람들의 연약함을 개탄한다.

    교훈적이며 비관론적 정신은 6세기의 시(詩)에 훨씬 현저히 드러난다. 민중의 정치적 운명이 비평의 주제가 되었고, 새로운 사물의 질서는 종종 매우 신랄하게 비난받았다. 이 시기에 속하는 인물로는 우화 작가 이솝과 소위 격언 시인들(솔론, 포킬리데스, 테오그니스)이 있다. 윤리적 성찰을 구현하는 이들의 지혜로운 격언은 미발달한 도덕 철학으로 특징지을 수 있겠다. 개인이 삶을 영위할 뿐만 아니라 삶을 분석하고 비판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는 삶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자기 민족의 전통적 개념과 이상을 표명하는 것에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며, 자신의 개인적인 윤리적·정치적·종교적 사상과 열망을 표출하도록 격려받는다. 결국 더욱 크고 복잡한 경험에서 기인하는 탐구와 불만의 이런 정신은 윤리학과 정치학의 이론이라는 형식을 취하고서 인간 행동에 대한 철학적 연구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그리스 철학의 종교적 기원

    그리스인의 종교 생활은 그리스 철학사의 연구에 특별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리스 세계에서 종교와 철학의 관계는 친밀한 만큼 복잡하다. 그리스 종교와 철학의 상호 작용은 그리스 종교가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복잡하다. (1) 첫 번째 측면에서 그리스 종교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의하여 친숙하게 된 올림포스 신들의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종교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신들은 매우 웅장하긴 하지만 인간적 정념과 인간사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2) 기원전 6세기의 종교 부흥에서 두드러지는 그리스 종교의 두 번째 측면은 소위 신비 종파와 관계있다. 신인동형론적 측면에서 그리스 종교는 가장 초창기부터 기원전 4, 5세기 그리스 문명의 절정기까지 세련되어져 가는 길고긴 발전 과정을 겪는다. 그리고 이 발전은 철학의 발전과 얽히고설킨다.

    신들 가운데 최고신인 제우스의 개념 발전은 철학적·종교적 이념의 상호 침투를 잘 설명한다. 호메로스에서 제우스는 다른 신들과 마찬가지로 운명에 종속되지만, 수세기 지나서 아이스킬로스의 희곡에서는 운명이 제우스의 최고 의지와 동일시되기에 이르렀다. 올림포스 신들의 종교가 철학에 영향을 끼쳐 왔지만, 결국 철학이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개념에 의하여 도로 영향을 입고 만다. 운명에 종속되는 신들이라는 호메로스의 신 개념은 1세기 그리스 철학을 산출하는 지성 태도에 공헌했을 것이다. 소위 기원전 6세기 밀레토스의 자연철학 말이다. 의문의 여지 없이 6세기의 새롭고 전혀 상이한 종교성에 영향을 입은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과 아울러 밀레토스 철학의 발전은 우리가 아이스킬로스의 제우스에게서 발견하는 일신론적 경향의 지적 배경을 제공했다. 이런 영향과 그 밖의 다른 많은 영향이 기원전 4세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일신론에서 뒤섞인다.

    철학이 그리스의 지성 생활의 다른 요소들과 분명하게 구분되기에 이르렀을 때, 특정 시점의 종교 정신은 사교와 신비 종교로 표현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으로도 표출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상 그리스 종교는 매우 조직적이며 전문화된 형식이 없기 때문에 종종 예술과 시와 철학으로 그 신학을 표현하곤 한다. 그리스 문화에 등장하는 이 모든 다양한 측면의 상호 침투성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는 호메로스의 시에서 드러나는 시심(詩心)과 올림포스 신들의 종교의 혼융이다.

    신들에 대한 사색은 그리스 시인들 가운데 두 번째 서열에 해당하는 헤시오도스에게서 더욱 지성화되었다. 기원전 8세기에 기록된 그의 「신통기」(Theogony)는 신적 존재 혹은 전통적 신화라는 측면에서 세계의 현상을 최초로 설명하려 했던 일단의 서사시를 대표한다. 사실상 그런 작품들은 우주의 구조를 다루는 한, 하나의 우주론을 제시한다. 신들의 본성에 대한 관심을 보일 때는, 하나의 신학을 제시한다. 세계와 신들의 기원에 관하여 설명하면서는, 우주발생론과 신발생론을 제공한다.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신들도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우주발생론과 신발생론에서 심지어 다른 모든 사물 이전에 존재했던 카오스 혹은 텅 빈 공간도 태어났다고 선언한다.

    카오스 이후에, 하늘과 땅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늘과 땅과 같은 시대에 속하는 에로스 혹은 사랑이 하늘과 땅을 연합시켰다. 이 연합으로부터, 에로스의 힘으로 생긴 일련의 연합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세계의 자연력들은 에로스의 힘에서 시적(詩的)·신화적(神話的) 설명을 얻는다. 어둠과 밤이 함께 낮을 발생시키고, 하늘에 의하여 결실된 땅은 강들을 낳는다. 타이탄들은 하늘과 땅의 결혼에서 생긴 자손이며, 그들은 결국 제우스와 다른 올림포스 신들로 대표되는 좀 더 질서정연한 힘에 의하여 대체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헤시오도스와 그와 비슷한 자들을 초기 원시적 신학자라고 부르며, 신발생론의 저술가들은 교설을 표명하고 신화적 형태로 설명하려고 했던 반면에 최초의 철학자들은 엄격한 증거의 방법으로 진행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방법을 최초의 철학자들의 그것과 대조시킨다. 신발생론은 엄격한 의미에서 철학이 아니지만 철학을 위한 토대를 준비했다. 그것들은 호메로스의 순전히 신화적인 접근법과 대조할 때 합리적인 설명을 향한 발전을 표시한다. 신들의 발생과 관계를 지배하는 헤시오도스의 에로스는 자연 법칙의 교설이라는 방향에서 호메로스의 신화론적 운명 개념을 넘어선 진보이다. 헤시오도스의 에로스 개념은 후대 철학자들의 특징인 하나의 자연적 원리라는 개념의 싹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초기 신발생론은 사물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하되,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으로가 아니라 시적 상상력과 대중적 신화의 방법으로 한다.

    6세기 말경, 그리스 지성에 활기를 불어넣은 종교 감정의 부흥은 소위 신비 종파에 큰 신세를 졌다. 호메로스의 시들은 대체로 신비 종파를 무시했지만, 그리스인들은 올림포스 신들과 아울러 땅과 싸워야 하는 자신들에게 중요한 자연력을 상징하는 지방 신들을 숭배했다. 참으로 이 신들은 귀족주의적 신화의 신들보다 의식상 훨씬 큰 중요성을 갖고 있었고, 올림포스 신들의 이름이 붙게 된 후에도 옛적의 특성을 종종 유지했다. 그러다가 이 신들이 자신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향토적인 숭배 형식이 도시로 들어갔고, 이 새로운 신들의 숭배가 당대 독재자들에 의하여 선동 수단으로 장려되었다.

    아테네인에게 전달되어 한 시대 동안 그리스 시골에 이식되어 숭배되던, 야만적인 트라키아 신 디오니소스는 아폴론의 사제들에게 즉각 환영을 받았다. 토착 시골의 여신 데메테르도 올림포스 신들에게 곧 동화되었다. 디오니소스 숭배는 종교 르네상스의 의식적 측면에서 핵심적인 것이었다. 엘루시스에서 집중적으로 숭배했던 데메테르와 같이, 디오니소스는 죽음 이후의 부활 혹은 사라진 신의 귀환을 상징하는 봄철 대지의 소생과 연관되어 있었다. 아티카에서는 디오니소스를 포도나무의 신으로 숭배했고, 데메테르를 곡물의 여신으로 숭배했다. 장소마다 다르지만 핵심적으로 비의(秘儀: 비밀스러운 종교 의식)라고 불리는 제식을 갖고 있는 점에서 디오니소스 숭배와 비슷한 것들이 그리스 세계 도처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비의에 의하여 입문자들은 신과의 합일을 이룩한다고들 생각했다.

    비의(비의를 뜻하는 그리스어에 해당하는 라틴어가 나중에 영어 sacrament[성례]가 되었다)와 관련된 비의적 숭배 외에도, 이 숭배의 공식적 형식이 있었다. 디오니소스교의 경우에는 비의적 의식이 종종 주신제(酒神祭)적 성격을 띠었지만, 시민들에 의해 수용되면서 수정되었다. 사실 잘 알려져 있듯이, 공적인 디오니소스교와 관련된 축제는 아티카 희곡의 발전과 상당한 관계가 있었다.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제사는 오르페우스라는 이름과 관련된 종교 제사와 혼동되면서 더욱 변형되었다. 오르페우스 운동은 디오니소스 운동보다 덜 야만적이며, 신과의 하나됨을 통하여 불멸성을 추구하는 점에서 윤리적 요소를 갖고 있다. 사실 오르페우스와 관련된 의식 가운데 많은 것이 많은 비의 의식(秘儀 儀式)의 주신제 대신 금욕적 식사법을 시행했다. 오르페우스 운동은 디오니소스교의 정화(淨化)를 상징한다. 오르페우스의 모습은 길들여지고 옷입은 디오니소스로 묘사되어 왔다.

    철학에서 추적 가능한 6세기 종교 부흥의 영향력은 대부분 오르페우스교에서 비롯한다. 이 영향력 가운데, 오르페우스교의 영혼론이 있다. 특별히 오르페우스교가 피타고라스주의에서 취한 변형된 형태의 영혼론이 그렇다. 오르페우스교는 영혼의 윤회를 믿었다. 영혼이 불멸적이며, 시초에 복된 상태에서 추락했는데 계속적인 환생을 통하여 다시 복된 상태로 돌아가려 한다고들 생각했다. 특별히 오르페우스교의 형태로 일어난 6세기의 종교 부흥은 피타고라스 학파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종교 지향적 철학의 발전에 유리한 배경을 제공한다.

    그리스 철학의 개관

    그리스 철학은 객관적 세계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된다. 이 철학은 그 눈을 외부 자연으로부터 안으로 인간 자신에게로 점차 돌린다. 자연에서 인간으로의 관심 변화는 인간 지성과 인간 행동에 대한 연구를 낳는다. 즉 논리학과 윤리학과 심리학과 정치학과 시학의 연구를 낳는다. 이 연구들 가운데 윤리학에 좀 더 특별한 관심이 집중된다. 그리고 이제 철학의 주된 질문은 다음과 같아진다: 최고선(最高善)이 무엇인가? 삶의 목적과 목표가 무엇인가? 이런 탐구 과정에서 형이상학과 인간 지식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인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 신의 문제, 그리고 인간과 신의 관계의 문제가 전면에 부각되며, 그리스 철학은 시작할 때처럼 종교로 마친다.

    (1) 첫 번째 큰 문제인 외부 자연의 문제는 소피스트 이전 시기에 제기되었다. 이 시기는 기원전 585년부터 5세기 중반까지이다. 이 시기에 철학의 무대는 식민지 세계이다. 철학은 이오니아, 남부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발전한다. 가장 초창기의 그리스 철학은 자연주의적이다. 그 관심이 자연에 쏠려 있다. 이 철학은 대체로 물활론적이다: 자연을 살아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 철학은 존재론적이다: 사물의 본질을 탐구한다. 이 철학은 주로 일원론적이다: 단일한 원리로 자연의 현상을 설명하려 한다. 이 철학은 독단적이다: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간 지성의 능력을 순진하게 전제한다.

    자연주의 시기의 철학자들은 외부 자연에 관한 두 가지 상호 의존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첫째는 실체의 문제였다: 자연적 대상들을 구성하고 그것들이 기원하는 기본적 실체 혹은 실체들은 무엇인가? 두 번째는 변화의 문제였다. 기본 실체 혹은 실체들이 감각의 친숙한 대상들로 변하는 과정의 본질은 무엇인가? 밀레토스 학파의 가장 초창기 자연 철학자들(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가운데서와 피타고라스학파 가운데서는 두 가지 문제가 거의 구분될 수 없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사물의 기본 재료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하는 문제와 기본 재료가 어떻게 사물로 변하는가 하는 문제의 구분을 탐색할 수 있다. 변화의 문제는 헤라클레이토스와 엘레아학파(파르메니데스가 가장 중요한 주창자이다)에서 급진적인 형태로 등장한다. 그들에게 문제는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변화라는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는 변화가 궁극적인 것이며 항구성은 한낱 감각적 현상에 불과하다. 파르메니데스에게는 항구성이 근본적인 것이며 변화란 단순한 현상이다. 이 철학자들에게 실체의 문제는 부차적인 위치로 격하되었다.

    자연주의 시대의 후기에 해당하는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의 철학에서는 실체와 변화의 문제가 모두 관심의 대상이 된다. 전체 시기가 외부 자연에 관한 절대적인 관심을 보이며 자연주의적이다. 지식과 행동에 대한 인본주의적 문제들은 오직 부수적으로 논의된다. 가령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에 암시되어 있는 이성과 감각의 구분에서, 피타고라스학파의 조잡한 윤리관에서 그리고 데모크리토스의 쾌락주의적 윤리학에서처럼.

    (2) 그리스 철학의 두 번째 발전 국면인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시대는 외부 세계의 구성과 기원에 관한 존재론적 우주론적 사색에서 돌이켜, 인간의 문제, 인간의 지식과 행동의 문제에 거의 배타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5세기에 해당하는 소피스트 운동은 이행의 한 국면이다. 이 운동은 세계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간 지성의 능력에 대한 점차적인 불신과 따라서 전통적 개념과 제도에 대한 신뢰의 결여를 보여준다. 이는 회의적·급진적·혁명적 운동이며, 형이상학적 사변에 무감각하거나 적대적인 운동이다. 하지만 이 운동은 사람의 문제에 관심을 촉구하면서, 지식의 문제와 행동의 문제에 대한 좀 더 철저한 탐구를 필요하게 만들며, 소크라테스의 시대를 예고한다. 아테네가 이 새로운 계몽 운동과 거기서 발전하여 나온 위대한 철학 학파들의 본거지이다.

    기원전 430년에서 320년에 걸쳐 있는 소크라테스의 시대는, 재구성의 시대이다. 소크라테스는 회의론의 공격에 맞서 지식을 옹호하며, 논리적 방법의 사용에 의하여 어떻게 진리에 도달할 수 있겠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그는 선(善)의 의미를 정의하려는 노력에서 윤리학을 위한 길을 닦는다.

    (3) 고대의 위대한 두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적 시대는 철학의 모든 문제에 관한 관심이 그 특징을 이룬다. 실재에 관한 형이상학적 문제, 인간의 지식과 행동과 세계 질서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에 관련된 인본주의적 문제 말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소크라테스가 닦은 토대 위에 체계를 세워, 지식(논리학), 행동(윤리학), 국가(정치학)의 합리적 이론을 구축한다. 그들은 똑같이 사변적 사유의 포괄적 체계(형이상학)를 만들며, 지성 혹은 이성의 측면에서 우주를 해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철학을 비판적 철학으로 특징지을 것이다. 이 철학은 합리론적으로 지식의 원리를 탐구한다. 인본주의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이성의 능력을 받아들인다. 유심론(唯心論)적으로 혹은 관념론적으로 인간을 연구한다. 이 철학은 지성이 실재를 설명하는 제일 요소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 또한 질료를 지성에 부차적인 것이긴 하지만 실재 속의 한 요소로 보는 점에서 이 철학은 이원론적이다.

    (4) 마지막으로, 윤리-종교 시대이다. 이는 기원전 320년부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철학자들의 학교를 폐교시킨 서기 529년까지인데, 아리스토텔레스 후기 시대라고 불린다. 그 무대는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로마이다. 두 국면을 주목할 수 있겠는데, 윤리적 국면과 신학적 국면이다. (a) 스토아학파 제논과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의 최고 물음은 행동의 문제이다. 합리적 인간 활동의 목표 즉 최고선은 무엇인가?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의 생활에서 해답을 찾는다. 스토아학파는 덕의 생활에서 그것을 찾는다. 두 학파는 논리학과 형이상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전자는, 그런 지식이 미신과 무지를 타파하고 행복에 공헌할 것이므로 관심을 가지며, 후자는 그런 지식이 합리적 우주의 일부로서 인간의 의무를 가르쳐 줄 것이므로 관심을 가진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유물론자와 기계론자이다.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우주는 신적 이성의 표현이다. (b) 알렉산드리아에서 발흥한 신학 운동은 그리스 철학과 동양 종교의 접촉에서 기인했다. 이 운동은 그 최고 발전 형태인 신플라톤주의에서, 세계를 모든 존재의 원천과 목표인 초월적 신으로부터의 방출로서 설명하려 한다.

    2. 소피스트 이전 철학의 발전

    맨 처음 사변적 충동은 신화적 존재에 호소하지 않고 자연의 원인에 의하여 현상을 설명하려 하는 이오니아의 자연과학자들, 피타고라스학파, 헤라클레이토스, 엘레아학파, 엠페도클레스, 원자론자들, 아낙사고라스에게서 참되게 표현된다. 소피스트 이전 철학의 발전은 주목할 만한 논리적 패턴을 보여준다: 이 시기는 각각의 문제가 이전의 문제로부터 자연스럽게 출현하며 가능한 여러 해결책이 거의 체계적인 방식으로 탐구되는 구조적 체계를 갖고 있다. 아마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철학사에서 문제와 해결책의 역사적 순서가 논리적 체계의 원리가 요구하는 순서와 거의 일치하는 시기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지적했듯이, 이들 초창기 철학자들이 다루었던 첫 번째 문제는 실체의 문제였으며, 밀레토스 철학자들이 각각 근본적인 것으로 선택한 실체는 구체적 실체였다. 그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세계를 구성하는 기초적 재료는 무엇인가? 그리고 물이나 공기 혹은 감각 대상이 도출되어 나온다고 가정되는 미분화적 덩어리와 같이 감각 지각의 구체적 대상이라는 측면에서 대답한다. 그들은 단일 원리(일원론)를 이용하여, 상이한 물체들의 성질과 시원적 재료의 변형인 그들의 변화를 설명하려 한다. 관찰을 통해서 볼 때, 실체들은 다른 실체들로 변하며(가령 물은 김이나 증기가 된다), 비슷한 절차에 의하여 원래의 요소가 우리의 현재적 경험 세계에서 발견되는 상이한 실체로 변화되었음에 틀림없다.

    밀레토스 철학자들은 변화의 문제를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제가 실체의 문제와 구별되어 등장하지는 않았다. 변화의 사실은 실재가 살아 있다는 견해에 의하여 설명된다. 이는 모든 초기 그리스 사상가들이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바이다. 최초의 실체는 운동과 변화의 원인을 자기 안에 갖고 있다(물활론).

    개별 철학자들은 변화와 운동의 원인이 시원적 실체에 활력을 제공하며 독자적 원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점에서 모두 물활론자들이지만, 어떻게 사물들이 시원적 재료에서 등장하는가에 대한 서술에서는 의견을 달리한다. 그래서 탈레스는 제일 원리인 물이 단지 다른 사물들로 생성된다고 순진하게 가정한다. 즉 사물들이 물의 변화에 의하여 산출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낙시만드로스는 사물들이 좌우간 무한정자(無限定者)로부터 분리된다는 좀 더 정교한 견해를 제시한다. 사물들은 원래 무한정자 안에서 뒤섞인 상태로 혹은 혼융된 상태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아낙시메네스는 다양한 사물들이 원초적 실체인 공기로부터 농후화와 희박화의 과정에 의해 등장한다고 서술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 사상가들은 도출된 수많은 사물들이 어떻게 원초적인 일차적 실체로부터 나오는가의 문제에 대하여 세 가지 중요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1) 정확한 변화의 특징을 서술하려는 좀 더 깊은 시도가 없이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로 변하는 순수한 변형에 의하여. 이는 아마 탈레스가 채택한 태도일 것이다. (2) 사물들의 동질적 혼합 혹은 혼융인 일차적 실체로부터 사물들의 분리에 의하여. 이 견해는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는 암묵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는 명시적으로 나타난다. (3) 농후화와 희박화에 의하여. 이는 아낙시메네스가 주장한 견해이다. 그가 보기에 공기가 농축될 때는 물이 되고 팽창될 때는 불이 된다.

    실체의 문제는 피타고라스학파의 일차적 관심사이기도 하다. 그는 추상적인 수이론(數理論)을 제시한다: 수가 사물의 일차적 원인이다. 그들은 구체적이며 감각적으로 파악되는 실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 세계 내의 질서나 통일성이나 조화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는 수로 표현될 수 있으므로, 그들은 수를 실체로 삼는다.

    변화의 문제는 헤라클레이토스와 엘레아학파에게서 핵심적 중요성을 갖는다. 이들은 변화의 존재 혹은 부재라는 쟁점에서 나뉜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실체의 문제는 남아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살아 있는 실체(불)를 원리로 가정하는 점에서 이오니아학파와 비슷하지만, 명확한 의식을 갖고서 변화 혹은 생성의 사실을 중요한 것으로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세계는 끊임없는 변화 가운데 있다. 모든 사물은 유동(流動)의 상태에 있다. 사물에는 진정한 항구성이 없다. 또한 그는 선배들보다 더욱 분명하게, 세계에는 그 발생을 통제하는 하나의 이성이 있다는 사상을 제시한다. 엘레아학파도 역시 변화의 관념에 관심을 돌리지만, 그것을 절대적으로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고 거부한다. 불과 같이 하나의 요소가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하나의 사물은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하는 그대로 남아 있음에 틀림없다. 변화가 아니라 항구성이 실재의 중요한 특징이다.

    헤라클레이토스와 엘레아학파 사이의 근본 쟁점은, 변화의 철학과 항구성의 철학 사이에 타협을 모색하던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에게 도전이었다.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는, 절대적 변화란 불가능하며 어떤 것도 문자 그대로 자신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엘레아학파와 의견을 같이한다. 무(無)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 무(無) 속으로는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다. 어떤 것도 자신과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변화할 수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헤라클레이토스와 의견을 같이하여, 사물들이 변화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 변화는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게 아니다. 서로 결합하여 물체를 형성하는 항구적 요소 혹은 소립자가 있다: 이것이 기원이다. 물체의 부분들은 분리된다: 이것이 쇠퇴이다. 참으로 어떤 것도 절대적 의미에서 변화하거나 생성하거나 사라질 수 없다. 오히려 세계의 항구적이며 변할 수 없는 요소들이 서로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고 변화시킨다.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는 대부분의 선배들이 보여준 특징인 물활론으로부터 중대하게 이탈한다. 운동과 변화의 원인들은 원초적 실체 안에 있고 실체들에게 생기를 주기보다는 요소들로부터 분리되는 경향이 있다. 엠페도클레스의 사랑과 미움, 아낙사고라스의 정신은 그처럼 분리되어 활동하는 원리이다.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에 따르면, 모든 사물을 구성하는 요소적 실체들은 질적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그들이 공유하는 견해는, 레우키포스(Leucippus)와 데모크리토스의 양적 원자론과 구분하여 질적 원자론이라 명명된다. 양적 원자론자들은 변화하지 않는 요소들과 변화하는 관계들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와 의견을 달리한다: 후자는 요소들 그리고 분리되어 활동하는 원리를 가정하지만,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라고 불리는 무수하고 미세하고 분리 불가능한 물질 소립자를 가정하며 운동을 원자들에게 내재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다음에 나오는 세 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고찰할 것이다. (1) ⓐ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의 구체적 실체 이론, ⓑ 피타고라스의 추상적 수이론에 관련된 실체 문제; (2) ⓐ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의 철학과 ⓑ 엘레아학파의 존재의 철학 사이에 쟁점이 되는 변화의 문제; (3) ⓐ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의 질적 원자론과 ⓑ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양적 원자론에서 보이는 실체와 변화의 문제. 소피스트들은, 세계 문제에서 확실한 지식이란 불가능하다는 근거에서 세계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들을 부질없는 것으로 선언하면서 이 모든 이론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취한다.

    3. 실체의 문제

    탈레스(Thales)

    탈레스는 기원전 624년 그리스 식민지인 밀레토스에서 태어나 기원전 554년과 548년 사이에 죽었다. 그는 정치가, 수학자, 천문학자로 유명했고,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였다. 일설에는, 그가 585년 5월 28일에 일어난 일식을 예언했다고 한다. 그리스의 칠현인(七賢人)을 열거하는 저술가들은 모두 탈레스의 이름을 포함시킨다. 탈레스는 아마 저술을 전혀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그의 작품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가 썼다고 하는 「항해 천문학」이라는 책은 가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교훈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이차 자료에 제한된다.

    탈레스의 중요성은 철학적 물음을 정면으로 제기하고 신화적 존재를 언급하지 않으면서 그 물음에 답했다는 데 있다.

    그는, 생명에 필요한 양분과 열과 씨가 습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 위에 자신의 결론을 놓고, 물이 원초적 재료라고 선언했다. 탈레스는 물을 자신의 일차적 실체로 선택할 때, 오케아노스(Oceanos)와 테티스(Tethys)의 신화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주장은 그리스 철학이 그리스의 신화와 종교에서 출현했다는 견해에서 상당한 신빙성을 갖는다. 물은 고체와 액체와 증기의 형태를 취할 능력을 갖고 있고, 그래서 사람이 볼 때 변형의 과정 중에 있는 것 같다. 물은 태양열에 증기가 되는데, 탈레스는 이것을 물이 불로 변화하는 것으로 즉각 해석한다. 물은 비로 다시 떨어져 대지에 흡수된다. 이는 물이 흙으로 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물은 생명에 필수적이다.

    존 버넷(John Burnet)은 탈레스가 물을 선택한 이유들을 조사할 때, 생물학적 이유들이 후대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들을 도외시한다. 물로부터 만물이 나온다. 그는 하나의 실체가 다른 실체로 변하는 것을 경험의 사실로 받아들였고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변하는가를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분명히 그는 초기의 모든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자연을 살아 있는 것으로, 움직이고 활동하고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그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히폴리투스의 말을 믿을 수 있다면, 탈레스는 만물이 물에서 나올 뿐만 아니라 물로 돌아간다고 본다. 아마 탈레스는 물을 일종의 점액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점액은 고체와 액체, 생물의 기원을 모두 가장 만족스럽게 설명해 주었을 것이다. 탈레스 철학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대개가 추측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탈레스의 견해들은 셋으로 환원 가능하다: (1) 만물은 신들로 충만하다; (2) 땅은 물 위에 떠다니는 평평한 원반이다; (3) 물은 만물의 질료인이다.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r)

    아낙시만드로스는 기원전 611년에 밀레토스에서 태어나 기원전 547년 혹은 546년에 죽었다. 그는 탈레스의 제자로 언급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동료 시민으로서 탈레스의 견해를 잘 알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겠다. 우리는 그가 천문학과 지리학과 우주론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지구 및 천체도를 만들었으며, 해시계를 그리스에 소개했다는 것을 안다. 현재 단편으로만 남아 있는 그의 「자연론」이라는 논문은, 우리가 아는 한 그리스에서 기록된 최초의 철학서이며 그리스어로 된 최초의 산문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다음과 같이 추론했다: 사물의 본질 혹은 원리는 탈레스가 주장하듯이 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물 자체가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원하고, 사멸 불가능한 실체로 파악되는 무한정자 혹은 무한자이다. 만물은 그것으로부터 만들어지고 그것으로 돌아간다.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하는 무한정자는 한계가 없고 공간을 채우고 생기적 덩어리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는 이 덩어리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성질이 이 본질로부터 나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에 대한 상충하는 많은 해석들 가운데서, 버넷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열거한다. (1) 무한정자는 그것으로부터 사물들이 분리에 의하여 생성되어 나오는 혼합물이다. 이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일 원리를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의 혼합과 대립시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소 의문스러운 구절에 근거한 해석이다. (2) 무한정자는 무규정적이며 불확정적이며 질적으로 무차별적인 질료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무규정적이며 가능적인 질료를 미리 말해 주는 것이다. (3) 무한정자는 관찰 가능한 요소들 사이에서 가령 공기와 물 혹은 공기와 불 사이에서 매개하는 것이다. 두 번째 해석은 모호하긴 하지만 — 어쩌면 그것 때문에 — 상당히 그럴듯하다. 버넷이 주장하듯이, 아마 이 견해들의 조화가 가능하다. 그는 이렇게 순진하게 추론한다: 무한정자는 무한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범위에서 무한정하다. 그렇지 않다면 사물의 창조에서 소진되었을 것이다.

    미분화된 질료라는 이 거대한 덩어리로부터, 상이한 실체들이 질료의 영원한 운동 결과로 분리된다. 첫째로, 뜨거운 것과 찬 것이 분리되며, 뜨거운 것은 화구(火球)로서 차가운 것을 둘러싼다. 불꽃의 열이 차가운 것을 습기로 변하게 하고 그런 다음 공기로 변하게 한다. 공기는 불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해체시켜 바퀴 모양의 고리가 되게 한다. 고리는 플루트의 구멍처럼 입구가 있고, 그것을 통하여 불이 흘러나온다. 이 구멍들은 천체이며, 이 천체들을 둘러싸는 대기는 땅을 중심으로 이 천체들을 운동하게 한다. 태양은 하늘에서 가장 멀리 있는 물체이며, 그 다음으로는 달이 있고, 그 다음에 항성과 행성이 있다. 이 체계의 중심에 있는 지구는 원통 모양의 물체이다. 지구가 어떤 것에 의하여 지탱되지 않고 다른 천체들에 의하여 균형을 유지하는 원통이라고 보는 이 개념은, 세계 안에 절대적인 성쇠가 없다는 흐릿한 인식을 담고 있다. 참으로 아낙시만드로스의 우주론은 공상적인 부분이 많긴 하지만, 현대 천문학에서 말하는 우주의 몇몇 특징을 미리 보여준다.

    최초의 생물은 습한 요소에서 나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피조물들 가운데 몇몇은 물에서 나와 육지의 마른 곳으로 들어갔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다. 사람은 다른 모든 동물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물고기였다. 생물의 기원에 관한 아낙시만드로스의 사변은 그의 우주론적 사변과 마찬가지로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다. 만물은 그것이 출현한 시원적 덩어리로 다시 돌아가야 하며, 새롭게 무한히 산출될 뿐이다. 이는 초기 사상에 만연한 세계 변화의 이론이다.

    주기적 순환이라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에 따르면, 무수한 세계는 아마 시순(時順)적으로 연속하지, 공존하지 않는다. 사물의 창조는, 사물들이 현재의 존재가 됨으로써 무한적인 것을 강탈하는 부정의(不正義)이며, 정의는 사물이 무한적인 것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시원적 실체로부터의 분리와 그것으로의 귀환이라는 영원하고 주기적인 순환이 존재한다. (이 우주론적 가설은 참으로 현대 주기적 역사 이론의 원초적 출처이다. 이 역사 이론은 역사가 상이한 문화적 매체로 자신을 반복한다는 견해이다. 물론 아낙시만드로스의 가설과 이 역사 이론은 차이점이 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사유는 탈레스의 사유를 넘어선다. 첫째로 탈레스가 하나의 원리로 수립하는 요소를 파생적인 것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둘째로 생성 과정의 단계들을 서술하려는 시도에서 그렇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질료의 파멸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무한정자에 성질을 부여하지 않는 그의 태도는, 선배의 구체적이며 감각적으로 파악되는 실체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보다 더 추상적인 사고 방식의 경향을 보인다.

    이 말은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가 추상적 무한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이며 무규정적인 실체이다. 그러나 추상을 향한 경향이 그의 사유에 명백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무한정자를 추상적 혹은 논리적 측면으로 해석하는 (헤겔이 부추기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수학자의 추상적 무한성이 아니다. 그것은 무한하고 구체적인 덩어리이다. 첼러(Zeller)가 표현했듯이, 무한정자는 술어이지 주어가 아니다. 무한정자는 구체적이며 추상적이지 않지만, 감관이 관찰 가능한 구체적 사물들과 구별된다. 물과 같이 관찰 가능한 요소와 구별되는 하나의 설명 원리를 채택한 것은 철학적 정교화에서 진보이다. 아낙시만드로스의 독창적인 생물학적 이론은 아마 가장 최초의 진화론으로 언급될 것이다. 반면에 그의 천체 이론은 후속되는 천문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역시 밀레토스의 시민인 아낙시메네스(기원전 588-524)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였다고 한다. 그는 이오니아 방언으로 산문 작품을 썼고, 오늘날은 단편만이 남아 있다.

    아낙시메네스에 따르면, 사물들의 제일 원리 혹은 근본 실체는, 스승이 주장했듯이 하나이며 무한하다. 그러나 그것은 무규정적인 게 아니라, 공기나 증기나 안개이다. 아마 공기를 제일 원리로 선택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공기가 건조하며 차가우며 따라서 따뜻하고 건조한 요소인 불과 차갑고 습한 요소인 물을 매개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공기는 우리의 신체에서 생명의 원리이다: 호흡이 끊어지면 유기체는 죽는다. 공기 혹은 호흡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요소이듯이, 우주의 원리이기도 하다. 아낙시메네스는 세계를 호흡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공기인 인간의 영혼이 인간을 붙들듯이, 호흡 혹은 공기는 전세계를 둘러싸고 유지한다. 우주적 공기는 살아 있고 공간을 통하여 무한히 확장된다.

    선배 아낙시만드로스를 넘어서는 아낙시메네스의 중요한 발전은 일차적 실체로부터 관찰 가능한 요소들의 출현을 설명하는 농후화와 희박화의 이론이다. 공기를 통하여 만물은 농후화와 희박화의 과정에 의하여 생긴다. 공기가 희박해지면 불이 된다. 농후화하면 바람, 구름, 물, 흙, 돌이 된다. 일차적 실체로부터 요소들의 출현을 설명하는 농후화와 희박화에 대한 아낙시메네스의 이론은 참으로 과학적인 설명 양식을 향한 일보 진전으로서 중요하다. 농후화와 희박화는 순전히 양적 개념이다. 전자는 주어진 부피를 차지하는 질료의 양에서 증가를, 후자는 감소를 말한다. 그래서 그의 이론은 질적 차이를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서 아주 분명하게 선언되는 양적 용어로 환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장족의 진전이다. 혹은 아낙시메네스의 진보를 이렇게 달리 표현할 수 있다: 그는 모든 변화를 운동으로 환원하려 했다. 모든 변화는 운동에 의하여 산출되며, 운동은 영원하다.

    이후 밀레토스학파의 추종자들로는 히포(기원전 5세기), 이다이우스, 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기원전 440-425년) 등이 있다.

    피타고라스와 그의 학파

    이 학파의 창설자는 피타고라스(Pythagoras)였다. 이 사람에 관해서는 많은 공상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특별히 그의 시대 이후 여러 세기의 저술가들이 쓴 이야기들이 그렇다. 그는 널리 여행을 다녔고 지나가는 나라에서 사상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설명들은 신뢰할 수 없다. 그는 기원전 580년과 570년 사이에 사모스에서 태어났고, 529년 경에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그리스 식민지로 이주했다. 일설에는 그가 폴리크라테스의 독재를 반대하고 귀족파에 충절을 지키느라고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크로토나에 정주하고 한 단체를 창설했는데, 그 목적은 윤리적·종교적·정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상은 추종자들 가운데 정치적 덕성을 계발하고, 그들로 국가의 선을 위하여 활동하고 전체에 자신을 종속시키도록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는 도덕 훈련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개인은 자신을 통제하고, 자신의 정념을 굴복시키고, 자신의 영혼을 조화시키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는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 연장자와 선생과 국가의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

    피타고라스학파의 단체는 시민 자격을 위한 실제적인 훈련소였던 것 같다. 여기서 스승의 이상이 검증되었다. 단체의 구성원들은 우정의 덕목을 함양하고, 인품을 발전시킬 목적으로 자기 점검의 관행을 실천했다. 그들은 대가족처럼 함께 모여 살고, 공동으로 식사하고, 똑같은 옷을 입고, 음악과 의학과 특별히 수학의 연구는 물론이고 예술과 기술을 연마하는 공동체를 결성했다. 구성원들은 통상적으로 수련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그 표어는 이렇다: 먼저 듣고 그 다음에 알라. 아마 이 사회는 원래 당시 그리스에서 생겼고, 삶의 정화와 전체 인민의 예배 참석(특별히 비의와 같은 형식의 예배 참석)을 목표로 하는 크고 대중적인 종교 부흥의 한 형식이었을 것이다. 이 비의의 가르침에서, 영혼의 장차 운명은 지상 생활 동안의 행동에 의존했으며, 행동의 관리를 위한 지침이 정해졌다.

    피타고라스학파의 사회는 하층 계급 사이에 전파되고 있었던 이 종교 운동의 유용성을 확장시킨 공로가 있다. 피타고라스주의 단체의 정치적 경향은 지지자들을 확보했던 많은 도시의 정치 당국과 갈등을 빚었고, 궁극적으로 사회의 심각한 박해를 불러일으켰다. 아마 이 소요의 결과로, 피타고라스는 메타폰툼에 도피하지 않을 수 없었고, 거기서 기원전 500년 경에 죽었다. 반면에 그의 많은 추종자들은 이탈리아에서 쫓겨나 그리스에서 본거지를 발견했다. 이런 불행들로 인하여 피타고라스학파는 끝났다. 물론 스승 피타고라스의 제자들은 수백년 동안 그의 교설을 가르치고 발전시켰다. 피타고라스주의는 기원전 5세기 말 테베에서 필로라우스에 의하여 가르쳐졌고, 훨씬 후대에는 정치가 타레눔의 아르키투스가 피타고라스의 교설을 꺼냈다.

    피타고라스는 아무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언급된 윤리적·정치적·종교적 가르침만 확신있게 그의 것으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피타고라스학파의 교설에서 핵심 사상을 형성하며 앞으로 우리가 살필 수이론의 창시자일 것이다. 우리에게 이어져 내려온 이 체계는 기원전 5세기 후반기에 필로라우스가 만든 것이며, 이 학파의 다른 구성원들(아르키타스, 리시스)이 4세기에도 계속 견지했던 것이다.

    우리가 방금 고찰한 사상가들은 사물의 본질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다: 세계를 구성하는 재료는 무엇인가? 그들은 그 재료를 물이나 공기와 같은 규정적 실체나 그런 요소들이 분화되는 무규정적 실체로, 구체적 실체로 보았다. 우리는 이제 철학자의 학파를 살피도록 하자. 즉 피타고라스학파이다. 그들은 실체보다 형상과 사물들의 관계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수학자들인 그들은 계량 가능한 양적 관계에 관심이 있었고, 수를 실체로 만들고 그것을 모든 존재의 원리로 수립함으로써 세계 내의 조화나 규칙성의 문제를 사색하고 그 사실을 설명하려 했다.

    피타고라스학파의 수이론 피타고라스학파는 세계 내의 형식과 관계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수로 표현할 수 있는 척도, 질서, 비례, 통일적 순환을 발견한다. 수(數)가 없으면 그런 관계와 통일성, 질서, 법칙이 있을 수 없다고 그들은 추론한다. 그러므로 만물의 기초에 수가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수는 참된 실재, 사물의 근거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수의 표현이다.

    피타고라스학파에게 수는 사물의 원리인데, 밀레토스학파의 의미에서 사물의 재료나 실체가 아니라 사물의 형식적 혹은 관계적 구조를 형성하는 것으로서 사물의 원리이다. 사물은 수의 모사(模寫) 혹은 모방이다. 후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체계에 핵심적인 질료와 형상의 구분은 수와 사물을 구분하는 피타고라스주의적 구분에 의하여 예시되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수를 실체로 삼았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연의 법칙을 실체로 보고 자연 법칙들을 모든 발생하는 것의 원인으로 말하는 것과 같다. 가령 그들은 현의 길이와 음의 고저 사이에 수적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즐거워하면서, 관계의 상징 혹은 표현에 불과한 수를 그 관계의 원인이라고 불렀고, 수를 현상들의 근본 원리와 토대로서 그 배후에 두었다.

    그런데 수가 사물의 본질이라면, 수에 타당한 것은 사물에도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피타고라스학파는 수에서 발견 가능한 무수한 구체적인 것에 대한 연구에 전념하며, 이 구체적인 것들을 우주의 성질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수는 홀수와 짝수로 나누어지는데 — 홀수는 둘로 나누어질 수 없고 짝수만 나누어질 수 있다 — 전자는 제한적이며 후자는 무한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홀수와 짝수, 유한과 무한, 제한되는 것과 제한되지 않는 것은 수와 실재의 본질을 형성한다. 자연 자체가 대립자, 홀수와 짝수, 제한되는 것과 제한되지 않는 것의 연합이다. 그와 같은 대립자 열 개의 표가 제시되었다: 제한되는 것과 제한되지 않는 것, 홀수와 짝수, 일자와 다자, 오른편과 왼편, 남성과 여성, 휴식과 운동, 곧음과 굽음, 밝음과 어둠, 선과 악, 정사각형과 직사각형.

    피타고라스학파가 가르치는 제한되는 것과 제한되지 않는 것의 이원론과 그것들의 조화는 의심할 나위 없이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에게로 추적 가능하다. 대립자의 충돌이라는 이론은 아낙시만드로스에 의하여 이미 예시되었다. 그리고 제한되지 않는 것의 개념은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가 공유하던 바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제한되지 않는 것을 제한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보았다. 개별 사물은, 공간에 형식을 부과함에 의해 무제한적인 공간을 제한하는 데서 생긴다.

    물질적 세계도 역시, 단위에 근거하는 수적인 것이다. 점은 1, 선은 2, 도형은 3, 입체는 4이다. 또 땅은 입방체이며, 불은 4면체이고, 대기는 8면체이며, 물은 20면체이다. 즉, 물체의 선과 면은 독립적 실존을 갖고 있는 존재로 파악되었다. 왜냐하면 선과 면이 없는 물체는 있을 수 없으며, 반면에 선과 면은 물체 없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간의 형식은 물체의 원인이며, 이 형식들이 수로 표현될 수 있기에 수는 궁극적 원인이다. 그래서 산수의 구분은 물리적 세계로 넘어간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이와 같은 전이에 의하여 공간 내의 제한적인 물체와 대조를 이루는 무제한적 공간 혹은 진공의 이론에 도달했다. 피타고라스학파의 수 형이상학이 물리학과 천문학에 끼친 영향은 상당했다. 가령 케플러의 이론은 피타고라스학파와 신(新)피타고라스학파의 현저한 영향력을 보여준다.

    수와 사물의 부조리하고 공상적인 상관관계를 주장하긴 해도, 피타고라스학파의 수비론(數秘論)의 역사적 의의는, 이 형이상학이 사물 내의 지속적인 질서와 합법성을 발견하고 이 질서를 수와 수적 관계의 추상적 개념적 용어로 표현하려는 보기 드물게 고집스러운 시도를 보여주는 사실에 있다. 확실히 이는 근대 과학과 철학의 핵심에 속하는, 수학적으로 표현 가능한 자연 법칙이라는 개념의 중요한 역사적 원천에 속한다.

    천문학 피타고라스학파는 천문학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여, 주목할 만한 천문가들을 많이 배출했다. 그들은 형태상으로 구체(球體)인 우주의 중심에 중앙의 불을 두었다. 불 주위에는 행성들이 공전하는데, 이 행성들은 그것들이 붙어 있는 투명하고 움직이는 구체들 때문에 회전된다. 피타고라스주의적 형이상학을 지배하는 제한되는 것과 제한되지 않는 것의 대립은 천문학에도 나타난다. 즉 상대적으로 고정되고 통일성을 유지하는 별들과 이상적 세계의 질서가 결여된 지상 영역 사이의 이원론에도 나타난다. 두 개의 천문학적 영역을 뚜렷하게 나누는 이 구분은 후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 천문학 체계에 통합되며, 근대까지 심각한 도전을 받지 않았다.

    항성은 하늘의 가장 높은 둥근 천장에 고정되어 있고, 이 천장은 36,000년 동안 중앙의 불을 공전한다. 그 아래에는 동심원을 이루는 구체들인, 토성, 목성, 화성, 수성, 금성, 태양, 달, 지구가 있다. 그러나 10이 완전수이므로, 천체는 10개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은 지구와 중앙의 불 사이에 또다른 지구가 있다고 한다. 이 또다른 지구는 중앙의 불의 광선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해 준다. 지구와 부(副)지구는 매일 중앙의 불을 공전하는데, 지구는 언제나 부지구와 중앙의 불에 같은 면을 마주하고 돌기 때문에 지구의 반대편에 사는 우리는 중앙의 불을 보지 못한다. 일년에 한 번 중앙의 불을 도는 태양은 이 불의 빛을 되비춘다. 구체의 운동은 옥타브를 표시하며, 따라서 화음을 이룬다. 모든 구체는 자신의 음을 내며, 천체의 화음은 그들의 조화에서 생긴다.

    이 천문학적 개념들은 근거없어 보이지만, 기원전 280년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가 제시한 태양중심론의 형성을 위한 길을 닦았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부지구와 중앙의 불은 포기되었고, 히케타스와 엑판투스는 지구의 축에 의한 회전을 가르쳤다. 헤라클리데스는 모든 행성이 동심원적 구체로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한다는 견해를 버릴 만한 이유를 발견했고, 행성들의 운동을 태양의 운동과 연관지었다. 아리스타르코스는 다른 행성보다 큰 태양의 크기로부터, 태양이 지구를 공전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고,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하였다.

    윤리학 피타고라스주의 철학은 윤리학을 포함한다. 이는 수비론(數秘論)에 뿌리박은 것이다.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은 물질적 사물에 타당한 해석을 비물질적인 사물에 적용했다: 사랑, 우정, 정의, 덕, 건강 등은 수에 근거한다. 사랑과 우정은 숫자 8로 표현된다. 왜냐하면 사랑과 우정은 화음을 이루며, 옥타브가 화음이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는 유명한 직유를 사용하여 삶을 공적인 게임에 비교하면서 판매자와 구매자에 상응하는 세 계급의 사람들을 구분지었다고 한다: 이익을 얻을 기회가 없으면 게임에 관심이 없는 판매자, 칭찬과 명예를 얻는 게임 참가자, 이익도 명예도 아닌 지혜를 목표로 삼은 관객이 그들이다.

    4. 변화의 문제

    항구성과 변화

    이오니아의 자연과학자들은 사물의 실체적 본질에 관심을 가졌고,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은 양적 관계와 질서와 조화와 수에 관심을 가졌다. 그 다음으로 관심을 끄는 문제는 변화 혹은 생성의 문제였다. 최초의 철학자들은 변화, 변형, 기원, 쇠퇴의 과정을 순진하게 객관적인 방법으로 말했다. 이는 그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변화의 개념에 관하여 사색하기를 중단하지 않고, 설명할 때 성찰없이 변화의 개념을 사용했다. 그들은 어떻게 만물이 (그들이 가정한) 시원적 통일성에서 출현했다가 그 통일성으로 돌아가는지를 서술했다. 가령 공기가 어떻게 구름이 되며, 구름이 어떻게 물이 되고, 물이 어떻게 흙이 되는지, 그리고 이 모든 실체들이 다시금 원초적 기체(基體, substratum)로 다시 변할 수 있는지를 서술했다. 이 모든 실체 변형 이론에는,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발생하거나 소실될 수 없다는 가정이 암시되어 있었다. 이는 때로는 물로, 때로는 구름으로, 때로는 흙으로 나타나는 동일한 원리이다. 어떤 사상가가 변화와 성장과 기원과 쇠퇴의 현상을 분리시켜, 변화의 개념을 자신의 체계에 핵심적인 것으로 삼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을 따름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그렇게 했다. 그는 세계 내의 변화라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아 변화가 우주의 생명을 형성하고 어떤 것도 참으로 항구적이지 않으며, 항구성이란 환상이며, 사물들이 늘 안정적인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끊임없이 생성의 과정 가운데, 일정한 유동의 상태에 있다고 확언한다. 엘레아학파는 정반대의 견해를 취하여, 변화나 생성의 가능성을 부인한다. 그들에게는 실재가 변화하며 한 사물이 실제로 참으로 다른 어떤 것이 되는 것이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변화란 착각이며 단지 감각적 현상이고, 존재란 항구적이며 영원하다고 선언한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35-475년)는 에페소스에서 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민주주의에 극단적인 경멸감을 보이며, 평생 강경한 귀족주의자로 지냈다. 그는 진지하고 비판적이고 비관론적이며,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에 상관하지 않고 독단적이고 교만했으며 흠잡기를 좋아했다. 그는 헤시오도스와 피타고라스와 크세노파네스와 심지어 호메로스를 비판적으로 말하며, 독학한 것을 자랑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박식은 지성을 훈련시키지 못한다. 그랬더라면, 헤시오도스와 피타고라스와 크세노파네스는 박식하여 지혜로웠을 것이다. 그의 문체는 모호한데, 아마 의도적으로 그렇게 쓴 것 같다. 실제로 그는 모호한 사람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지혜롭고 독창적인 말을 많이 구사한, 설득력 있는 저술가였으며,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지고도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제목 「자연론」으로 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그의 작품은 현재 단편으로만 남아 있으며, 아마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 같다: 물리적·윤리적·정치적 부분. 그가 썼다고 하는 「서간」은 가짜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가르침에서 근본적인 사상은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우주란 끊임없는 변화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동일한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물이 계속하여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보편적 유전(流轉) 단절없는 활동이라는 개념을 표시하기 위하여,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신이 아는 가장 활발한 실체, 결코 쉴 것 같지 않은 것 즉 영원히 살아 있는 불을 자신의 제일 원리로 선택한다. 때때로 그는 이 불을 증기나 호흡이라고 부르곤 했으며, 이를 유기체의 생명적 원리이며 영혼의 본질이라고 간주한다. 몇몇 해석가들에 따르면, 불의 원리는 쉬지 않는 활동이나 과정을 상징하는 구체적인 물리적 상징에 불과하며, 그 자체는 실체가 아니며 사실상 모든 실체의 거부이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가 그렇게 멋진 요점으로 추론했을 법하지 않다. 그는, 양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끊임없이 변하는 하나의 원리를 갖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불은 이 요구를 만족시킨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은 선배들의 항구적 기체(基體)와 다르다. 그것은 한결같이 다른 사물로 변형하고 있는 것이다.

    불은 물로 변하며, 그 다음에 흙으로 변하고, 흙은 다시 물과 불로 변한다. 왜냐하면 위로 가는 길과 아래로 가는 길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물은 불로 바뀌고, 불은 만물로 바뀐다. 물건을 금으로 바꾸고 금을 물건으로 바꾸는 것처럼 말이다. 사물들은, 우리가 그 안에서 끊임없는 운동을 파악하지 못하며, 그것들이 한편으로 잃는 것을 다른 한편으로 얻기 때문에 항구적인 듯이 보인다. 태양조차도 뜰 때는 밝아지고 질 때는 꺼지면서, 매일 새롭다.

    대립자와 그들의 연합 시원적 통일 자체가 한결같은 운동과 변화 가운데 있다. 그것의 창조는 파괴이며, 그것의 파괴는 창조이다. 그 통일이 다른 어떤 것이 될 때, 즉 불에서 물이 될 때, 불은 새로운 존재 방식에서 사라진다. 만물은 자신의 대립자로 변화하며, 그러므로 만물은 대립적 성질의 연합이다. 지속적 성질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것도 그것의 성질 때문에 항구적인 게 아니다. 만물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적 과정은 하나의 조건에서 반대의 조건으로 나아가는 이행이며, 이런 의미에서 만물은 자신 안에서 대립자와 연합한다. 그런 대립만이 세상을 가능하게 만든다. 가령, 음악의 화음은 높은 음과 낮은 음의 조합에서, 즉 대립자의 연합에서 기인한다.

    세계는 투쟁에 의하여 다스려진다.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이며 만물의 왕이다. 만일 투쟁이나 대립이 없다면, 세계는 정체되고 죽을 것이다. 한 방울의 물약도 휘젓지 않을 때 그 성분들로 분해된다. 대립과 모순은 연합되며, 조화는 그 결과이다. 참으로 자신의 고유한 대립과 모순을 가진 운동이나 변화가 없는 질서는 있을 수 없다. 궁극적으로 대립은 우주적 원리에서 모두 화해를 이룰 것이다. 세계는, 이성이기도 한 시원적인 불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한 것과 나쁜 것은 동일하다. 삶과 죽음, 깨어남과 잠듦, 젊음과 노년은 동일하다. 왜냐하면 후자는 변화하여 전자가 되며, 전자는 다시 후자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신에게는 만물이 공정하고 선하고 정의롭다. 왜냐하면 신은 만물을 마땅히 있어야 할 그대로 질서정연하게 만들고, 전체의 조화 가운데 만물을 완전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것은 부정의하고 어떤 것은 정의롭다고 잘못 주장한다. 조화는 대립자의 연합이며, 동시에 변화의 과정을 지배하는 법칙이다. 이 법칙은 그 과정보다 높은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변화의 과정과 그 법칙은 하나다.

    조화와 이성의 법칙 그러므로 우주적 과정은 우연이나 변덕이 아니라, 고정된 척도와 일치한다. 혹은 오늘날 우리의 표현대로, 법칙에 의하여 지배된다. 사물의 이 한 가지 질서는 신들의 질서도 아니며 인간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고정된 척도에 따라 켜지고 고정된 척도에 의하여 꺼지는 영원히 살아 있는 불이었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때때로 사물의 질서를 운명 혹은 정의의 일이라고 말하며, 그것에 의하여 필연성의 개념을 자신의 변화 철학에 도입한다. 모든 변화와 모순의 한가운데에서, 지속하는 혹은 동일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모든 운동과 변화와 대립의 기초를 이루는 냉혹한 법칙이다. 이는 사물 안의 이성 즉 로고스이다. 그러므로 제일 원리는 이성적 원리이며, 그것은 살아 있고 이성을 부여받았다. 만물을 통하여 만물을 지도하는 지성을 이해하는 것만이 지혜롭다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한다. 그가 지성을 의식적 지성으로 파악했는지, 비인격적인 합리성으로 이해했는지 우리는 절대적 확실성을 갖고 대답할 수 없다. 로고스 이론은 후대 철학에 미친 그 영향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모두 해석되지만, 아마도 후자의 방법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좀 더 많다.

    심리학과 윤리학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런 우주론 위에 자신의 심리학과 윤리학을 둔다. 사람의 영혼은 보편적 불의 일부이며, 그것에 의하여 보호받는다. 우리는 그 불을 호흡하며, 우리의 감관을 통하여 그것을 받아들인다. 가장 건조하고 따뜻한 영혼은 최고의 영혼인데, 이는 우주적인 불의 영혼과 가장 비슷하다. 감각 지식은 이성보다 열등하며, 눈과 귀는 형편없는 증인이다. 성찰 없는 지각은 숨겨진 진리를 우리에게 계시하지 못한다. 이 진리는 이성으로만 분간할 수 있다.

    인간의 지배적 요소는, 신적 추론과 비슷한 영혼이다. 인간은 도덕적 행위에서 자신을 보편적 이성에 종속시켜야, 만물에 스며 있는 법칙에 종속시켜야 한다. 마치 도시가 법률을 고수하는 것처럼 지성을 가지고 말하는 자들은 만물 안에 있는 보편적 요소를 굳게 붙잡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더욱 굳게 잡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법칙은 신적인 법칙에 의하여 자라기 때문이다. 윤리적이라는 것은 이성적인 삶을 영위하고, 이성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며 온세계에 동일하다. 그런데 이성은 보편적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독특한 지성을 갖고 있는 듯이 살고 있다. 도덕성은 법칙에 대한 존중, 자기 훈련, 정념의 통제를 뜻한다. 도덕이라는 것은 이성적 원리에 의하여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의 저술에서 뽑은 다음의 발췌문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윤리학의 높은 이상론을 잘 보여준다: 사람들은 성벽을 지키기 위하여 싸우듯이 자신의 법칙을 위하여 싸워야 한다. 성품은 사람의 수호신이다. 방종은 화재보다 먼저 꺼야 할 것이다. 정념과 싸우는 것은 힘들다. 왜냐하면 정념은 영혼을 희생시켜서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을 사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한 사람이 매우 훌륭하다면 만 명과 진배없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많은 사람이 나쁘고 소수가 선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음유 시인을 따르고 군중을 스승으로 삼고 짐승처럼 배를 채우는 대중이라는 낮은 대중관을 갖고 있었다. 삶은 기껏해야 유감스러운 게임이다: 인생은 밤중의 등불처럼 켜졌다가 꺼진다. 대중 종교에 대해서도 그는 그저 경멸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진흙을 씻어내려고 진흙탕으로 들어가는 사람처럼 피로써 자신을 정화한다. 어떤 사람이 그 짓을 하고 있는 그를 본다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마치 사람이 집과 이야기하듯이 그들은 이 신상들에게 기도하는데, 이는 신과 영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엘레아학파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와 운동의 현상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엘레아학파는 변화와 운동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사물의 원리는 항구적이며 움직이지 않고 결코 변하지 않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이 학파는 학파의 창시자인 파르메니데스의 고향, 남부 이탈리아의 엘레아 읍에서 그 이름을 땄다. 우리는 이 철학을 세 국면으로 구분한다: (1) 크세노파네스. 그는 엘레아주의 철학의 선구자로 간주될 만하다. 왜냐하면 신학적 형태로 이 철학의 근본 통찰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엘레아 학파를 창설한 공로를 인정받기 힘들다. 왜냐하면 그는 신의 항구성이라는 입론을 개진하지만 항구적인 신(神)과 나란히 변화하는 세계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2) 파르메니데스가 이 철학의 진짜 창시자인데, 항구성의 이론을 존재론의 완벽한 체계로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3) 제논과 멜리소스는 이 이론의 옹호자이다. 그들은 이 학파의 변증가들이다. 전자는 엘레아학파의 입론을 입증하되, 그 반론의 부조리성을 보여 줌으로써 입증하려 한다. 반면에 후자는 이 학파의 이론을 지지하는 적극적 증거를 제시한다.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크세노파네스(기원전 570-480년)는 시인이며 회의론자이며 신학자로서 소아시아 콜로폰에서 남부 이탈리아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그는 음유 시인으로서 이곳 저곳을 배회했다. 그는 철학자라기보다 풍자 시인이었다. 그는 그리스의 예절과 신념을 비판했다. 그의 주된 비판은 종교의 신인동형론과 다신론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종교적 태도는 회의론적이다. 그러나 그의 회의론은 명확하게 정식화되고 추론된 철학적 회의론이 아니라 지성의 기질이며 태도에 해당한다. 아마 그는 글을 조금밖에 쓰지 않았고 현재 그의 저술은 단편으로만 남아 있다

    크세노파네스에게서 우리는 그리스 사상에서 처음으로 회의론의 흔적을 식별한다: 신들과 자연의 본질에 관한 어떤 지식들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신학적 추정을 개진할 자유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 사색이 진리에 접근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크세노파네스는 철학자라기보다 사변적 신학자이다. 그는 피타고라스처럼, 6세기 대중 종교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당대의 만연한 다신론과 그 신인동형론을 공격하며, 신의 통일성과 변화불가능성을 선언한다. 그러나 죽을 인생은 신들이 자기들처럼 태어나며 자기들처럼 지각을 갖고 있고 목소리와 음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그러면 소나 사자가 손을 갖고 있어서 사람처럼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말은 신들의 형상을 말처럼, 소는 소처럼 그릴 것이다. 각자는 각자의 형상에 따라 신체를 가진 신들을 묘사할 것이다. 그처럼 이집트인들은 자기네 신들을 검고 들창코를 가진 존재로 만든다. 트라키아인들은 자기네 신들을 붉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가진 존재로 만든다.

    신은 하나이며, 신체나 지성을 가진 인생과 다르다. 그는 고생하지 않고 자신의 지성의 사유로 만물을 통치한다. 그는 한 장소에 거하며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만물을 굽어보고 생각하고 듣는다. 즉 자신의 모든 부분으로 그렇게 한다. 신은 영원하다. 처음이나 끝이 없다. 그는 자기 옆에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에서 제한되지 않으며, 자신이 하나의 영역, 하나의 완전한 형식이며 형상 없는 무한이 아니라는 점에서 제한된다. 그는 전체로서 움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운동은 존재의 통일성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부분들에는 운동이나 변화가 있다.

    크세노파네스는 범신론자로서, 신을 우주의 영원한 원리로, 만물이 그 안에 존재하는 하나이자 전체로서 파악한다: 다른 말로 하면 신은 세계이다; 신은 순수한 정신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연의 전체이다. 신과 세계를 동일시하는 크세노파네스의 범신론적 견해에서, 강조점은 신이 아니라 세계에 놓여 있다; 그는 신을 자연력의 수준으로 환원하는 데 관심이 있지, 세계를 신적 차원으로 격상시키는 데 있지 않다. 크세노파네스는 부동자(不動者)와 끊임없이 변화하는 감각 세계 사이의 양립 불가능성을 결코 해소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범신론에 나타나는 이 대립은 그 후계자들에게 하나의 도전이었다. 그래서 크세노파네스는 자연을 살아 있는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초기 그리스인의 물활론을 받아들인다. 만일 그가 다신론의 신들을 믿는다 해도, 그들을 세계의 일부로, 자연 현상으로 파악한다. 그의 신학에서 말하는 신은 세계에 생기를 공급하는 신이다.

    크세노파네스는 광범위한 존재론적 우주론적 가설을 정식화하지 않았지만, 몇몇 자연과학적 이론을 제시했다. 조가비와 돌에 남아 있는 해산물의 흔적을 증거로 삼아, 인간을 포함하여 존재하고 성장하는 만물이 땅과 물에서 나왔다고 추론한다. 한때 땅은 바다와 섞여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땅이 습기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언젠가 땅은 다시 바다로 가라앉아 다시 진흙이 되고 인류는 새로 시작해야 될 것이다. 그는 태양과 별을, 매일 꺼졌다가 다시 불붙는 구름으로 본다. 별들이 무인지역(無人地域)을 넘어갈 때 소멸된다는 흥미로운 의견을 그는 제시한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

    파르메니데스는 엘레아학파의 형이상학자였다. 그는 만물이 변하며, 불이 물이 되고 물이 흙이 되고 흙이 불이 되며, 사물이 처음에 존재하다가 나중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가르침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어떻게 한 사물이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가? 어떻게 그런 모순을 생각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한 사물이 그 성질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의 성질이 다른 성질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이 존재하고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것이 무로부터 나올 수 있으며 어떤 것이 무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다른 식으로 논거를 펼치면, 만일 존재가 생성한다면, 존재는 비존재(非存在)로부터 나오거나 존재로부터 나와야 한다. 만일 비존재로부터 나온다면, 무로부터 나왔으며, 그리고 이는 불가능하다. 만일 존재로부터 나온다면, 자신으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이는 존재가 자신과 동일하며 따라서 언제나 있어 왔다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므로 존재로부터만 존재가 나올 수 있으며, 무가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없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존재했고 앞으로 존재할 것이며, 모든 것은 지금과 같이 남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오직 하나의 영원하고 파생적이지 않고 변할 수 없는 존재만 있을 수 있다. 존재는 모두 동일하고 그 안에는 존재 외에 있을 수 없으므로, 존재는 지속적이며 분리 불가능함에 틀림없다. 존재 안에는 단절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단절이 실재하다면 그것 자체가 존재이며 그래서 존재는 결국 지속적이다. 반면에 단절이 실재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존재이며 따라서 존재는 지속적이다. 더욱이 존재는 움직일 수 없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존재가 움직일 수 있는 비존재(텅 빈 공간)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존재와 사유(思惟)는 하나이다. 왜냐하면 사유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즉 비존재는 사유될 수 없다. 즉 사유와 존재는 동일하다. 사유되는 모든 것은 존재를 갖고 있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는 이성적 혹은 변증론적 관념론자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또한 파르메니데스는, 실재가 지성을 부여받았다는 의미에서 존재와 사유가 하나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심론적 관념론을 그가 주장했다고 할 충분한 증거는 거의 없다.

    존재 혹은 실재는 동질적이며, 지속적이며, 무규정적인 덩어리이다. 파르메니데스의 미적인 상상력은 그 덩어리를 하나의 구체로 묘사한다. 이 덩어리는 이성을 부여받았고, 영원하고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변화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감각의 세계는 착각이다. 우리가 감관으로 파악하는 것을 참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존재와 비존재를 혼동하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이성에 대한 굳건한 신념을 보여준다: 실재는 이성과 일치하고, 사유와 모순되는 것은 실재할 수 없다.

    우리가 방금 개략적으로 밝힌 진리의 이론 외에도, 파르메니데스는 감각 지각에 근거한 착각의 이론을 제시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존재와 비존재가 있고 따라서 운동과 변화가 있다. 세계는 두 원리, 따뜻하고 밝은 요소와 차갑고 어두운 요소의 혼합, 결합이다. 유기체적 존재는 점액질에서 나왔다. 인간의 사유는 그의 신체에 있는 요소들의 혼합에 의존한다. 따뜻한 요소는 세계 내에서 온기와 빛을 파악하고, 다른 요소는 정반대의 것을 파악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의 참된 가르침으로, 논리적 사유에 따를 경우 우리가 세계를 하나의 통일체로, 변화할 수 없고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감각 지각은 다원성과 변화의 세계를 우리에게 계시한다. 이는 현상과 억견의 세계이다. 그런 세계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으며 혹은 그런 세계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지를 그는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항구성에 대한 착각을 변화 과정의 각 단계에서 유지되는 일정한 균형으로 설명했던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에서 상당히 그럴듯했던 사유와 착각의 구분은 파르메니데스의 구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동질적이며 지속적인 존재에서 오류와 착각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아마 파르메니데스에게서 배울 가장 중요한 교훈은, 추상적 사유와 언어의 대상을 본체화하고 실체화하는 것이란 감각 세계의 질적 차이를 지워버리는 것이라는 소극적인 교훈일 것이다. 러셀은 「서양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에서 파르메니데스가 언어에서 실재로 논증해 들어가는 언어학적 오류의 희생자였다고 주장했다. 파르메니데스의 추론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

    파르메니데스의 추론은 철학에서 사유와 언어로부터 전체 세계로의 논증을 보여주는 첫 번째 예이다. 물론 이는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진리를 담고 있는지를 알아볼 만하다. …… 전체 논증은 언어로부터 형이상학적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그리고 이런 유의 오류적 논증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란 대부분의 형이상학자들이 시행했던 것보다 언어의 논리적·심리학적 연구를 가일층 밀고 나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제논의 변증법

    제논(기원전 490-430년 경)은 엘레아의 정치가이며 파르메니데스의 제자로서 엘레아학파의 이론을 입증하되, 그 반론들의 부조리성을 지적함으로써 입증하려 했다. 그는, 만일 우리가 다원성과 운동을 가정할 경우 모순에 빠진다고 주장했다; 그런 개념들은 자기 모순적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다원성을 반박한다: 만일 존재의 전체가 다원성이라면, 그것은 많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전체는 무한히 작거나 무한히 큰 것으로 입증될 수 있다: 무한히 작다고 함은, 이 전체가 무한히 작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어떤 부분은 아무리 작더라도 언제나 더욱 쪼개질 수 있다) 그런 부분들의 합이란 무한히 작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한히 크다고 함은, 어떤 유한한 부분에든지 언제나 무한한 수의 다른 부분들을 우리가 언제나 첨가할 수 있고(아무리 크다 해도 존재들의 총체를 넘어서 더 많은 존재가 항상 있다) 전체는 무한히 클 것이다. 하나의 동일한 전체가 무한히 작으면서 무한히 크다고 말하는 것은 부조리하다. 그래서 우리는 시초에 제기한 다원성의 가정을 전적으로 배격해야 한다.

    운동과 공간은 동일한 이유들 때문에 불가능하다. 우리가 만일 모든 존재가 공간 안에 있다고 말한다면, 이 공간은 하나의 공간 안에 있으며, 그와 같은 관계는 무한히 존재할 것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비슷하게, 한 물체가 공간을 관통하여 운동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공간을 관통하기 위하여 먼저 그 공간의 절반을 관통했어야 한다. 이 절반의 공간을 관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절반의 절반을 관통했어야 한다. 그와 같이 무한히 진행되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 물체는 결코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운동은 불가능하다.

    운동의 역설들 제논은 운동의 불가능성에 대한 네 가지 유명한 증명을 개진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재현한 이것을 흔히들 제논의 운동의 역설이라고 언급한다. 이 논증들 가운데 첫 번째는 하나의 위치에서 목표로 운동하는 것이 불가능함으로 증명한다. 왜냐하면 출발점과 목표 사이의 무한한 수의 점을 관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아킬레스와 거북의 역설은 움직이는 목표를 통과할 수 없음을 증명한다: 아킬레스는 훨씬 속도가 빠르지만 거북을 따라잡을 수 없는데, 아킬레스가 시초의 출발점에서 거북의 맨 처음 출발점까지 움직이고 있는 동안 거북이 어떤 거리를 움직였고 이후의 계속되는 간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논증(움직이는 화살의 역설)은, 과녁을 향하여 날아가는 듯이 보이는 화살이 어떤 순간에 공간의 한 정해진 위치에 있음을 증명한다. 즉 화살은 휴식 상태이거나 운동 정지 상태에 있다. 그런데 정지의 종합은 운동을 산출할 수 없다. 이 세 가지 논증은 모두, 공간과 시간이 분리된 순간과 점으로 구성된다는 의심스러운 가설에 근거한다. 제논은 또한 네 번째 논증을 개진하는데, 이는 관찰된 운동의 상대성에 호소한다: 움직이는 대상이 다양한 속도로 정지의 위치에서 관찰되든지 운동의 위치에서 관찰되든지 상관없이, 감관의 변하기 쉽고 상충하는 증거는 운동의 가능성을 무너뜨린다. 이 논증은 다른 세 개의 논증과 전제가 다르지만, 똑같이 흥미롭다. 확실히 제논의 역설은 해소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속과 실재에 대한 수학적·물리적·혹은 철학적 이론들이라는 맥락에서만 가능하다.

    사모스의 멜리소스

    성공한 해군 제독인 그는 엘레아주의의 이론에 대한 증명을 시도했다. 파르메니데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존재가 하나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존재는 발생했을 리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존재가 있기 전에 비존재가 있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존재로부터는 존재가 생길 수 없다. 그래서 존재는 시간적으로 무한하다. 혹은 영원하다. 멜리소스는, 존재가 공간에서도 무한하다고 확언했다. 존재의 공간적 무한성에 대한 그의 이론은, 존재란 유한한 구체라고 하는 파르메니데스의 가르침과 상충할 뿐만 아니라, 무한자를 무의미하고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배격하던 그리스 사상의 전반적 경향과 상충한다. 멜리소스에 따르면, 텅 빈 공간이나 비존재는 없고, 따라서 공간을 요구하는 운동은 불가능하다. 만일 복수성이나 운동이 없다면, 분리나 결합이 있을 수 없고, 변화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감관은 운동과 변화를 제시하면서 우리를 기만한다.

    5. 질적(質的) 이론들

    변화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책

    이전의 모든 자연 철학자들은, 무엇이 발생하거나 사라질 수 없으며 절대적 창조나 파멸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가정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생각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엘레아학파의 사상가들은 이 공리를 충분히 의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추론에서 그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할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것을 사유의 절대적 원리로서 확언하고 엄격하게 적용했다. 아무것도 발생하거나 사라질 수 없으며,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 변할 수 없다. 하나의 성질이 다른 성질로 바뀔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편으로 한 성질의 사라짐을, 다른 한편으로 한 성질의 창조를 뜻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재는 항구적이며 변할 수 없다. 변화는 감관이 일으키는 허구이다.

    그래도 사물은 존속하는 것처럼 보이며 또 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물들이 존속하면서도 변화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이 난국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철학은 이 문제를 그렇게 방치할 수 없다. 항구성과 변화의 수수께끼는 해결되어야 했으며, 세계에 대한 정적(靜的) 견해와 동적(動的) 견해는 어떤 식으로 화해되어야 했다.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후계자들은 그런 화해를 시도했다.

    일반적으로 이 수수께끼의 해소는 다음과 같은 노선을 따라 진행된다: 절대적 변화는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엘레아학파는 옳다. 한 사물이 무에서 나온다든지, 무가 된다든지, 절대적으로 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적 의미에서 기원과 쇠퇴, 성장과 변화를 말할 권리가 있다. 항구적이며, 시원적이며, 사멸 불가능하고, 파생적이지 않은 존재 혹은 실재의 입자가 있으며, 이것들은 다른 어떤 것으로 변화할 수 없다. 엘레아학파가 주장하듯이, 이것들은 지금 존재하는 대로이며 틀림없이 그렇게 존속할 것이다. 하지만 이 존재들, 혹은 실재의 입자들은 결합되고 분리될 수 있으며, 결합될 때는 다시 요소들로 해체될 수 있는 물체를 형성한다. 실재의 시원적 부분들은 창조되거나 파괴될 수 없고 그 성질을 변화시킬 수 없지만, 서로간의 관계는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변화의 의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요소들의 절대적 변화는 불가능하지만, 상대적 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기원이란 결합을 뜻하며, 쇠퇴란 분리를 뜻한다. 변화는 요소들의 상호 관계의 변경이다.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와 원자론자들은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가 제기한 문제에 동일하게 일반적인 해답을 제공한다. 그들은 절대적 변화는 불가능하지만 상대적 변화는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하지만 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면서 의견을 달리한다: (1) 세계를 구성하는 실재의 입자들의 본질은 무엇인가? (2) 이 입자들이 결합하고 분리하게 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에 따르면, 요소들은 일정한 성질을 갖고 있다. 양적 원자론자들에 따르면 요소들은 성질이 없다. 엠페도클레스는 네 가지 질적 요소가 있다고 확언한다: 흙, 공기, 불, 물. 아낙사고라스는 그런 요소들이 무수히 많다고 확언한다. 엠페도클레스에 따르면, 두 개의 신화적 존재인 사랑과 미움이 요소들을 결합되고 분리되게 만든다. 아낙사고라스에 따르면, 요소들 바깥의 한 지성이 운동을 시작한다. 양적 원자론자들인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는 운동이 요소들 안에 내재한다고 확언한다.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엠페도클레스는 기원전 495년 남부 시칠리아의 아그리겐툼에서 부유하고 애국심 넘치는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오랫동안 고향 도시의 민주주의의 지도자였으며, 일설에는 그가 왕직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아마도 추방당해서 기원전 435년 펠로폰네소스에서 죽었던 것 같다. 그가 에트나 산의 분화구에 떨어져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전설에 불과하다. 엠페도클레스는 정치가와 웅변가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 교사와 의사와 시인과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가 행한 기적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으며, 아마 그는 자신의 마술 능력을 믿었던 게 분명하다. 우리는 두 시의 단편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우주론에 해당하는 「자연론」이며, 다른 하나는 「정화」라는 제목을 가진 종교시이다.

    엠페도클레스에게는 엄격한 의미에서 기원이나 쇠퇴가 없고, 다만 혼합과 분리만 있다. 왜냐하면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어떤 것이 발생할 수 없고, 존재하는 것이 사멸한다는 것도 불가능하고 들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사람이 어디에 계속 두든지 간에 항상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네 개의 요소 혹은 사물의 뿌리가 있고, 각각은 자신의 특수한 본질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흙, 공기, 불, 물이다. 이들은 파생되지 않았고 변할 수 없고 파괴될 수 없다. 물체는 이 요소들이 결합에 의하여 형성되고, 그들의 해체에 의하여 파괴된다.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미치는 영향은 하나에게서 나온 유출물이 알맞는 다른 것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설명된다.

    요소들을 결합시키고 분리시키는 원인은 무엇인가? 엠페도클레스는 네 개의 요소 외에 이 요소들의 결합과 분리를 통제하는 두 개의 신화적 세력인 사랑과 다툼 혹은 미움을 가정함으로써 변화를 설명한다. 엠페도클레스는, 소위 인력(引力, attraction)과 척력(斥力, repulsion)이라는 두 개의 동인력(動因力)이 공존하며, 전자는 물체가 형성되게 하고 후자는 물체가 파괴되게 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원래 모든 요소들은, 사랑이 최고의 통치권을 발휘했고 미움이 배제된 한 구체라는 형식으로 혼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점차 다툼이 세력을 얻으면서 들어와 요소들을 흩어 놓았다. 요소들이 부분적으로 분리되는 이 매개적 단계에서 사물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미움의 궁극적 승리와 더불어 요소들이 완전히 서로 분리되고 더 이상 어떤 종류의 개별 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과정이 역전되어, 사랑이 다시 들어와 점차 원초적인 동질적 혼합을 재수립한다. 그런 다음 해체의 과정이 새롭게 시작되며, 그처럼 주기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두 개의 극단적 상태 즉 완전한 결합의 상태와 완전한 분열의 상태에서는 개별 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의 현상태로 예시되는 개별 물체들의 단계는 부분적 혼합과 부분적 분열의 중간적 단계이다.

    우주의 현상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공기 혹은 첫 번째로 분리된 요소가 하늘의 궁륭을 형성했고, 그 다음 불이 나와 그 아래 별들의 영역을 형성했고, 순환적 운동에 의해 물이 흙에서 짜여져 나와 바다가 형성되었고, 하늘의 불에 의한 물의 증발이 아랫쪽 대기를 만들었다. 유기체적 생명은 흙에서 발생했다: 처음에는 식물, 그 다음에는 동물들의 다양한 부분, 팔과 눈과 머리가 나왔다. 이 부분들이 결합되어, 얼굴이 둘 달린 생물, 인간의 얼굴을 한 황소, 황소의 머리를 한 아이 등 우연히 온갖 모양없는 덩어리와 괴물을 만들었다. 이것이 분리되어 많은 시행 착오를 거친 다음, 살기에 적합한 형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생산에 의하여 영속된다.

    사람은 네 개의 요소로 구성되는데, 이는 네 요소 각각을 알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설명해 준다: 같은 것은 같은 것에 의하여 인식된다; 우리는 흙에 의하여 흙을 본다; 물에 의하여 물을, 공기에 의하여 찬란한 공기를 본다. 감각 지각은 물체들이 감관에 미치는 활동에 의하여 설명된다. 가령, 시각에서 불과 물의 입자들은 보이는 대상으로부터 나와 눈에 도달한다. 그리고 눈에서 이 입자들은 바깥에서 온 입자들의 인력에 영향을 받아 눈의 구멍을 관통하여 나오는 비슷한 입자와 만난다. 이 물체들의 접촉에 의하여 눈의 표면 근처에서 상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런 입자만이 눈의 구멍에 맞는 것으로서 눈에 영향을 준다. 들을 때에는, 공기가 귀로 들어가서 소리를 만든다. 맛과 냄새에서는 입자들이 코와 입으로 들어간다. 마음은 지성의 좌소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초기 그리스 자연 철학자들의 물활론적 방식으로, 모든 사물에 정신적 생명을 귀속시킨다: 만물은 사유의 능력을 갖고 있다. 그는 종교적인 작품에서, 인간의 타락과 영혼의 윤회를 가르친다. 이 이론은 그가 그리스 전역에 영향을 끼쳤던 거대한 오르페우스 종파와 관계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아낙사고라스(기원전 500-428년)는 소아시아 클라조메나이에서 태어났지만 아테네에다 거처를 정했고, 아테네를 그리스의 정치적 중심뿐만 아니라 지적 중심으로 만들려 했던 대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친구가 되었다. 아낙사고라스는 후원자의 원수들에게서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당하고는 30년 동안(464-434년) 거주했던 아테네를 떠나서 람프사쿠스에 정착하여 거기서 죽었다. 그는 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저명한 수학자와 천문학자였다. 명쾌하고 단순한 산문으로 기록된 「자연론」이라는 그의 저서의 중요한 단편이 남아 있다.

    아낙사고라스의 문제는 엠페도클레스의 문제처럼 변화의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는 절대적 변화가 불가능하며, 하나의 성질이 다른 성질이 될 수 없으며, 실재가 근본적 본질에서 항구적이며 변할 수 없다는 엘레아학파의 관념을 받아들였다: 아무것도 존재하게 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변화의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상대적인 변화는 존재한다. 사물들은 요소들의 혼합과 분리라는 의미에서 생기고 사라진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요소의 수는 엠페도클레스가 제시한 네 개보다 많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세계처럼 풍요롭고 충만한 세계는 소수의 요소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흙과 공기와 불과 물은 요소가 아니다. 그것들은 다른 실체들의 혼합물이다.

    그러므로 아낙사고라스는 무한히 많은 특정 성질의 실체들을 자신의 궁극자로 가정했다. 이들은 온갖 형태와 색과 맛을 갖고 있으며 살과 머리카락과 피와 뼈와 은과 금 등의 입자들이다. 그처럼 지극히 작지만 분리 불가능한 미립자는 야기되지 않았고 변화없다. 살이 살이 아닌 것에서 어떻게 나올 수 있었겠는가? 그들의 성질뿐만 아니라 양도 한결같다. 더해지거나 빼앗기거나 성질에서 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성찰에 의하여 이런 견해에 도달했다: 몸은 피부와 뼈와 피와 살 등으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밝음과 어둠에서, 열과 차가움, 부드러움과 딱딱함에서 다르다. 몸은 음식을 먹고 유지되며, 따라서 음식은 몸을 구성하는 그런 실체들을 얼마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음식은 흙과 물과 공기와 태양에서 그 성분을 끌어오므로, 후자들은 음식을 형성하는 실체들을 공급함에 틀림없다.

    따라서 소위 엠페도클레스의 단순한 요소들은 실제로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복잡한 사물들이다. 그것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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