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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56: 본기, 세가, 열전 서의 명편들
사마천 사기 56: 본기, 세가, 열전 서의 명편들
사마천 사기 56: 본기, 세가, 열전 서의 명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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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56: 본기, 세가, 열전 서의 명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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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영웅전』과 함께 인물 전기 최고의 고전!
진시황, 항우, 유방, 공자 등 총56편 수록
한 권으로 만나는 『사기』의 정수

외부인들이 중국을 이해하기 위하여 가장 많이 읽는 책은 바로 사마천의 『사기』라고 한다. 왜냐
하면 『사기』야말로 오늘날까지 중국의 문화와 정신을 면면히 조형(造型)해 온 중요한 역사적 원
천이었기 때문이다.
『사기』는 ‘본기(本紀)’와 ‘세가(世家)’, ‘표(表)’, ‘서(書)’, 그리고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
다. ‘본기(本紀)’는 연대순으로 제왕의 언행과 업적을 기술하고 있고, ‘세가(世家)’는 제후국의 흥
망성쇠와 영웅들의 업적을 기술하였으며, ‘표(表)’는 연대별로 각 시기의 중대 사건을 기록하였
고, ‘서(書)’는 각종 제도의 연혁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열전(列傳)’은 다양한 대표적 인물들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사마천은 창조적으로 이 다섯 가지 부분을 종합하여 하나의 완전한 통일
체계를 완성시켰다.
『사기』 전체는 총130편으로, 사실 지나치게 방대하고 또 현대에 이르러 효용성이 없는 부분
도 적지 않은 점에 비추어 이 책에서는 사기의 정수를 계승하되 뜻이 깊고 문장 구성이 탁월한
56편을 중국 전문가 소준섭 박사가 엄선하여 한 권에 담았다. 또한 각 편을 시작하기 전에 소준
섭 박사가 관련된 해설을 붙였으며, 원문에 사용되고 있는 각종 용어와 제도를 정확하게 해석
하고, 그 기원을 폭넓게 살피기 위한 주석(註釋) 작업에도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총845개의 각
주를 달았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현대지성
Release dateJun 26, 2019
ISBN9791187142133
사마천 사기 56: 본기, 세가, 열전 서의 명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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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천 사기 56 - 사마천

    1. 진시황 본기

    ‐ 천하 통일은 어려웠지만 붕괴는 신속하였다

    (여불위 열전과 이사 열전 포함)

    한낱 변방의 작은 나라에 지나지 않았던 진나라가 강성해진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법을 현실에 맞춰 개혁하면서 체제를 안정시킨 데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특권적 영주의 권한을 박탈하고 왕권을 강화시킨 정책이 매우 효과적이었다. 맹상군이나 평원군 같은 왕에 비견될 만한 호족들이 유독 진나라에서는 보이지 않음도 그 이유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진나라는 국론을 통일시키고 부국강병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함곡관의 요새로 둘러싸여 방어에 대단히 유리한 지리적 이점 외에도 군대의 동원 능력에서 진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하게 뛰어났으며 그것은 바로 왕권 강화에 의한 중앙집권적 단일지배 체제에서 비롯될 수 있었다.

    진나라가 강성한 또 다른 이유로는 경제 발전을 들 수 있다. 사회가 안정되어 경제가 안정될 수 있었으며, 특히 파촉(巴蜀) 지역을 점령한 이후 그 비옥한 땅으로부터 생산력이 급속하게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전국시대 말기에 이르러 진나라 영토는 중국 전역의 1/3에 지나지 않았으나 경제력은 무려 60%를 넘어서고 있었다.

    또한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무수히 일어났던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상대적으로 벗어나 있던 지리적 여건도 경제 발전에 한 몫을 단단히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나라는 관념적인 유교가 지배한 데 반해 진나라는 실용주의적인 묵가의 사상이 번성한 점 또한 경제를 융성하게 한 요인으로 들 수 있다.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장의의 연횡책이 성공을 거둠으로써 진나라의 강력함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다. 특히 6국의 합종책을 깨뜨린 것은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진나라의 개혁적 분위기는 보수적이었던 다른 나라의 현실에 싫증을 내고 있던 많은 인재들을 진나라로 모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유능한 인재를 모아 천하통일의 패도를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상앙을 비롯하여 장의, 범저, 이사, 여불위 등 진나라를 이끌었던 중신들이 대부분 외국에서 온 이른바 ‘외인부대’였던 점은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진나라는 합종책을 분쇄하고 연횡책을 관철시킴으로써 6국을 각개 격파하여 영토를 확장해갔으며, 이어서 범저의 원교근공책은 진나라의 우위를 확고하게 정착시킨 전략이 되었다. 또한 장평의 싸움에서는 명장 백기의 활약으로 천하통일의 가장 큰 관문을 통과했으며, 왕전과 몽염 장군의 활약 역시 컸다. 그리고 이사의 법가 사상과 적국에 대한 이간 및 약화 공작, 그리고 군현 제도의 정착은 진나라의 천하통일을 앞당기는 중요한 정책이었다.

    그리하여 한(韓)나라를 멸망시킨 지 불과 10년 만에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시키기에 이른 것이었다.

    순자(荀子)는 진나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진나라의 산천 계곡은 매우 아름답고 천연 산물이 많다. 백성은 순박하고 음악은 음란하지 않으며 의복은 화려하지 않다. 관공서는 근검절약과 충성, 그리고 엄숙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대신들은 사사로움이 없어 죄를 짓지 않고 아침에 집을 나서면 궁궐로 곧장 가며 저녁에는 또한 궁궐에서 즉시 집으로 돌아간다. 또한 당파를 만들지 않으며 업무를 처리함에 항상 공명정대함을 유지한다. 조정은 모든 일을 그때그때 즉시 처리할 뿐 아니라 합리적이며 융통성이 있다.

    - 역자 해설

    기화(奇貨)를 놓치지 말라

    중국 역사에서 진시황이 누구의 자식인가는 계속 세인의 관심사였다. 사마천은 진시황이 사생아라는 점을 확신한다. 그는 이 점을 『사기』 〈열전〉 「여불위 열전」에서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이 「여불위 열전」에서 소개되는 여불위를 비롯하여, 자초, 진시황의 어머니, 노애 그리고 진시황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물에 대하여 사마천이 동정심(同情心)을 가지고 우호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사람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진시황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성과 이름도 밝히지 않음으로써 이미 경멸의 뜻을 담고 있으며, 그녀에 대한 묘사의 중점 역시 오로지 그녀의 방탕 음란에 맞춰져 있다. 그리하여 「여불위 열전」의 전편(全篇)에 흐르고 있는 것은 증오와 경멸로 묘사된 한 편의 집단 스캔들이라 할 만하다.

    임금을 사 두리라

    여불위는 한나라 양책(陽責)의 대상인이었다. 여러 나라를 왕래하며 값이 쌀 때 물건을 사 놓았다가 시기를 보아 비쌀 때 파는 방법에 의해 천금의 재산을 모았다. 그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 견문이 넓었으며 모든 일에 대한 감식안이 비상하였다.

    진나라는 소왕 40년에 태자가 죽고 2년 후에 차남인 안국군(安國君)이 태자가 되었다. 안국군에게는 20여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총애를 받고 있었던 화양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 20여 명의 아들 가운데 자초(子楚)라는 왕자가 있었다. 자초의 생모인 하희(夏姬)는 안국군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자초는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취급되어 조나라에 인질로 보내졌다. 자초는 사랑받지 못하는 첩의 자식인데다 인질의 몸이었기 때문에 매우 곤궁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더구나 진나라가 조나라를 자주 공격하였으므로 인질로 간 자초는 갈수록 조나라의 냉대를 받아야 했다.

    여불위가 어느 날 장삿일로 조나라 수도 한단에 갔다. 그런데 거기에서 인질로 보내어진 자초를 만나게 되었다. 여불위는 자초를 보는 순간, ‘이것은 기화(奇貨)이다. 구해놓고 보자! 옛말에도 ‘기화가거(奇貨可居)’라고 했지 않는가!’라고 생각하였다.¹)

    1) 기화奇貨란 진귀한 상품 즉, 뜻하지 않게 찾아낸 물건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기화가거奇貨可居란 보존하였다가 비싸지기를 기다려 팔 수 있는 진귀한 물건이라는 뜻이다. 보통 사람은 그다지 중시하지 않지만 전문가의 눈에는 매우 가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비록 지금은 값어치가 없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된다. 실로 여불위는 자초를 점찍고 키워냄으로써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으며, 천하통일을 이룬 진시황도 여불위가 없었다면 역사상의 인물로 기록되지 못했을 것이다. - 역주

    자초를 본 여불위는 집에 돌아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농사를 지으면 몇 배의 이익이 남습니까? 아버지는 글쎄, 열 배쯤 남을까.라고 대답했다. 여불위가 또 보물을 갖고 있으면 이익이 몇 배나 되겠습니까?라고 묻자 아버지는 백배는 되겠지.라 대답하였다. 여불위가 다시 그러면 임금이 될 사람을 사두면 이익이 몇 배가 될까요?라 묻자 아버지는 그야 계산할 수 없을 정도겠지.라고 말했다. 그러자 여불위가 말했다. 농사를 지어서 얻는 이익이란 그저 추위에 떨지 않고 배를 곯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장차 나라의 대권을 잡을 왕을 키워 주면 그 혜택은 두고두고 남을 것입니다. 지금 조나라에는 진나라의 왕자가 인질로 와 있습니다. 저는 이 기화를 사 놓겠습니다.

    여불위는 말을 마치고 곧장 자초를 다시 찾아갔다. 이 무렵 자초는 매일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무료하게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여불위가 큰 절을 하면서 자초에게 바싹 다가서며 말했다. 제가 이제부터 왕자님의 대문을 크게 해드리겠습니다. 자초는 힘없이 웃음을 짓고 말했다. 먼저 당신의 대문을 크게 만들고 나서 나의 대문을 크게 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여불위는 공자께서는 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저의 대문은 공자의 대문이 커지는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자초는 여불위의 뜻을 알아채고 안방으로 불러들여 깊은 얘기를 나눴다. 여불위는 차근차근 말하였다.

    지금 진나라 왕은 연세가 많고 공자의 아버님 안국군은 태자로 계십니다. 안국군은 화양부인을 총애하고 있는데 그 부인에게는 후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후계를 정하는 데는 화양부인의 힘이 크게 작용할 것에 틀림없습니다. 공자는 20여 명의 형제 중 중간쯤 태어나신 분으로 아버님의 관심도 별로 없고 오랫동안 외국에서 인질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안국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 당연히 후계를 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항상 옆에 있는 큰 형님이나 다른 형제분에 비해 공자께서 훨씬 불리한 입장인 것입니다.

    자초가 사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좋은 방도가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여불위는 공자께서는 경제적 여유도 없으며 따라서 아버님에 대한 선물은 고사하고 찾아오는 손님들과 교제하는 일도 어렵습니다. 저도 별로 여유는 없습니다만, 이제부터 제가 가지고 있는 천금의 전 재산을 던져서라도 안국군과 화양부인에게 당신을 후계자로 삼으라는 공작을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자초는 깊이 머리를 숙였다. 제발 잘 부탁드립니다. 성공하면 진나라의 반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색이 쇠하면 사랑도 사라진다

    여불위는 5백 금을 자초에게 교제비로 나누어 주고 나머지 5백 금으로는 조나라의 진귀한 물건들을 사가지고 진나라로 돌아갔다. 그는 즉시 화양부인을 가장 잘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인 화양부인의 언니를 만났다. 그 언니는 여불위가 이전부터 몇 번 장사 관계로 만나 선물도 많이 바쳤던 사람이었다.²) 여불위는 선물로 사왔던 물건을 모두 그들 자매에게 바치면서 넌지시 떠보았다. 지금 진나라에 계신 자초 왕자님은 각국의 유명 인사들과 널리 접촉하여 그 명성이 날로 높아가고 있는 총명한 분입니다. 그분은 항상 ‘화양부인을 하늘처럼 존경한다. 아버님과 부인을 사모하여 밤낮으로 눈물을 흘린다.’고 말씀하십니다.

    2) 여불위가 처음에 자초를 기화로 판단한 것도 이러한 인맥 관계를 잘 활용하면 승산이 있다고 여긴 때문이었다.

    이 말을 듣게 되자 화양부인의 언니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여불위는 언니에게 다음과 같이 화양부인께 말씀드리라고 일러두었다. 듣건대 ‘색(色)으로 남을 섬기는 자는 색이 쇠하면 사랑도 잃는다.’³)고 합니다. 지금 당신은 태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후사가 없습니다. 지금부터 총명하고 효심이 두터운 분을 골라 태자의 후계를 정하고 그를 양자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태자가 살아계실 때는 물론이고 또한 태자에게 만일의 일이 생겨도 양자가 왕위에 오르기 때문에 당신은 권세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영원한 이로움을 얻는다고 합니다. 젊을 때 발판을 튼튼히 해둬야 합니다. 색향(色香)이 쇠하고 총애를 잃은 뒤에는 이미 늦습니다. 자초는 총명한 분입니다. 그는 형제들의 순서로 보아도 그렇고, 생모의 순위로 보더라도 후계자로 전혀 생각지 않을 것이므로 당신을 끝까지 섬길 것입니다. 그러니 자초를 후계자로 정해 놓으면 당신은 평생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3) 원문은 色衰而愛弛.

    화양부인이 들으니 그럴 듯했다. 얼마 후 화양부인은 태자에게 자초가 총명하며, 또 그와 교제하고 있는 많은 제후들이 얼마나 그를 칭찬하고 있는가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는 다행히도 태자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아들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자초를 후계자로 정하여 저의 장래를 맡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안국군은 그 청을 받아들였다. 이후 안국군과 화양부인은 자초에게 많은 액수의 자금을 보내게 되었고 여불위에게 자초를 잘 돌봐 주도록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자초의 명성은 제후들 사이에 갈수록 높아져 갔다.

    진시황 출생의 비밀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은 예로부터 미인향(美人鄕)으로 잘 알려져 있던 풍류의 도시였다.⁴) 돈 많은 여불위⁵)는 돈의 위력으로 미모의 무희(舞姬)들을 집에 들여 놓고 있었다. 어느 날 자초가 여불위의 집에 초대되었는데 가장 아름다운 무희를 보는 순간 반해 버렸다. 자초는 축배를 들자마자 그 여자를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 무희는 이미 여불위의 애첩이 되어 아이까지 임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초의 청을 거절하게 되면 이제까지 전 재산을 던져 투자한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었다. 그리하여 여불위는 그녀를 자초에게 이 여인이 금란(金卵)을 낳아줄 것입니다. 하며 넘겨주었다.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숨긴 채 자초에게 재가해 갔다. 후에 그녀는 자초와의 사이에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의 이름이 정(政)이며, 이 정이야말로 바로 6국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했으며 뒤에 ‘호랑(虎狼)’이라 칭해졌던 진시황이었다.

    4) ‘덧없는 꿈’을 말하는 ‘한단지몽邯鄲之夢’이라는 고사성어도 한단을 배경으로 할 만큼 한단은 꿈의 도시였다.

    5) 훗날 한나라 시대에 보통 사람들의 재산이 열 금이었다는 사실에 비춰본다면 천금의 재산을 가졌던 여불위의 부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즈음 진나라는 백기 장군이 장평에서 조나라의 40만 대군을 격파하고 뒤이어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했다. 이때 자초는 목숨을 빼앗길 위기에 몰렸지만 여불위가 황금 6백 근으로 관리를 매수하여 자초는 조나라를 탈출할 수 있었다. 조나라는 자초의 처자를 죽이려고 했는데 자초의 부인은 원래 조나라에서도 갑부로 꼽히는 집안의 딸이었기 때문에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이윽고 진나라 왕이 죽고 안국군이 즉위하자 자초는 태자가 되었다. 조나라에서도 자초의 부인과 아들 정을 극진하게 대접하여 진나라로 보내게 되었다. 안국군은 즉위한 지 불과 1년 만에 죽고 말았으며, 그 뒤를 자초가 진나라 왕위를 계승하니 그가 바로 장양왕이다.⁶) 여불위는 승상에 임명되었고 낙양 지역의 10만 호를 식읍으로 삼았다. 생모 하희는 하태후로 칭해졌으며, 화양부인은 화양태후로서 존경을 받으며 살았다.

    6) 자초는 역시 여불위가 지목한 대로 기화였던 것이다.

    그러나 장양왕 역시 재위 3년 만에 죽고 드디어 태자 영정(嬴政)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바로 훗날의 진시황이다. 그러나 새로 즉위한 왕은 이제 겨우 열세 살이었다. 여불위는 더욱 완벽하게 권력을 장악하여 승상보다 높은 상국(相國)으로 올랐으며, 또한 중부⁷)로 칭해지며 집안에 무려 만 명의 노비를 부리는 등 일세를 호령하였다.

    7) 중부仲父, 아버지와 다름없는 사람이란 뜻으로 제나라 환공이 관중을 예우해 부르던 명칭. 아부亞父라고도 한다.

    때를 얻으면 놓치지 말라

    이사(李斯)는 원래 초나라 상채(上蔡) 사람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작은 마을의 말단 관리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사는 관청 부근의 변소에서 불결한 찌꺼기를 먹던 쥐를 보았는데 그것은 사람이나 개가 올 때마다 깜짝 놀라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양식 창고에 가보니 그곳에도 역시 쥐가 있었지만 좋은 쌀을 먹고 있었으며 넓은 지붕 밑에 살면서 사람이나 개 때문에 놀랄 필요도 없었다. 이사는 한탄했다. 사람이 어질다거나 어리석다고 하는 것도 쥐의 경우와 같아 그가 어느 환경에 속해 있느냐가 문제로구나! 그리하여 이사는 순자를 찾아가 제왕(帝王)의 천하 통치학에 대해 공부하였다. 학업을 마치자 초나라 왕은 섬기기에 부족하고 6국은 모두 약소하여 큰 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생각해 진(秦)나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순자에게 작별인사를 드렸다.

    때를 얻으면 놓치지 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모든 나라는 서로 세력을 다투고 유세객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더욱이 진나라 왕은 여러 나라를 병합하여 스스로 황제라 칭하면서 천하를 통일하려고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선비가 바삐 일해야 할 때이며, 유세객으로서는 다시없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비천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는 자는 마치 초식동물이 고기를 앞에 두고서 먹을 수도 없고 먹을 생각도 없이 단지 한 장의 사람 그림이 나타나자 도망쳐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비천한 것보다 더한 부끄러움은 없으며 가난보다 더한 슬픔은 없습니다. 비천하고 가난한 처지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세상의 부귀를 비난하고 남의 출세를 미워하며 몸을 무위자연의 심경에 맡겨 스스로 고상하다고 하는 것은 선비로서의 올바른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서쪽으로 가서 진나라에서 일해 보고자 합니다.

    이사는 진나라로 가 여불위의 식객이 되었다. 여불위는 그의 현명함을 간파하고 그에게 벼슬을 내렸다. 그 후 이사는 드디어 진나라의 왕⁸)을 만날 기회를 얻어 이렇게 말했다.

    8) 훗날의 진시황.

    평범한 사람은 자주 좋은 기회를 놓치지만 위대한 성취를 이루는 사람은 기회를 이용하여 과감하게 시행합니다. 옛날 진나라 목공이 패자가 되고서도 끝내 6국을 병합할 수 없었던 것은 제후들이 여전히 강했고, 주나라 왕실의 덕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춘추오패가 차례로 일어나서 주나라 왕실을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 효공 이후 주나라 왕실은 쇠퇴하고 제후들이 서로 합병하여 함곡관 동쪽에 6국이 세워졌고 진나라가 다른 제후를 부리게 된 지 이미 6대째가 되었습니다. 이제 제후들이 진나라에 복종하는 모습은 마치 중앙에 예속된 군현들과 같습니다. 지금 진나라의 강대한 힘과 대왕의 현명함으로써 모든 나라를 멸망시켜 제업(帝業)을 이루고 천하를 통일하는 것은 마치 부엌에 있는 먼지를 털어내는 것처럼 손쉬운 일입니다. 이는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절호의 기회⁹)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지금 머뭇거리다가 대사(大事)를 이루지 못한다면 제후들은 곧 다시 강성해져서 서로 연합하여 합종을 맺게 되고 이렇게 되면 황제(黃帝)의 재능을 가지고도 결코 6국을 병합할 수 없을 것입니다.

    9) 천재일우千載一遇

    왕이 이 말을 듣고 매우 마음에 흡족하게 생각하여 이사의 벼슬을 올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계책도 받아들여 모사들에게 황금을 주어 몰래 제후들을 설득하도록 하였다. 각국의 유명한 인물들 중 매수할 수 있는 사람은 뇌물을 후하게 주면서 매수하도록 하고, 그래도 말을 잘 듣지 않는 자는 날카로운 검으로 죽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제후와 신하 사이를 이간질시킨 다음 뛰어난 장군을 파견하여 공격하도록 하였다. 왕은 이사를 객경(客卿)에 임명하였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버리지 않는다

    그 무렵 한나라 사람 정국(鄭國)이 진나라를 교란시킬 목적으로 대규모 관개수로 공사를 꾸미다가 그 음모가 발각되었다. 정국이 만들던 관개수로는 자그마치 3백 리에 이르는 대규모 공사로서 진나라의 인력과 비용을 탕진시켜 국력을 약화시키려는 한나라의 계략이었다.¹⁰)

    10)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진나라를 피폐시키려는 이 운하가 황무지를 비옥한 땅으로 바꿔 진나라의 국력을 강화시킨 결과로 나타났으며 이후 중국의 농업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진나라 종실 대신들이 모두 왕에게 타국에서 온 자들은 진나라를 섬기는 척하지만 실은 군주와 신하 사이를 이간하려는 첩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모두 추방시켜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타국인에 대한 이른바 축객령(逐客令)이 내려졌고, 추방 대상자 중에는 물론 이사도 포함되어 파면되었다. 이에 이사는 다음과 같이 글을 올렸다.

    〈지금 관리들이 타국인의 추방을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옛날 목공은 인재를 구하면서 완 지방의 백리해를 비롯하여 융족의 유여, 송나라의 건숙, 그리고 진(晋)나라의 비표와 공손지를 등용했습니다. 이 다섯 사람은 진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목공은 그들을 중용하여 서융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또 효공은 상앙의 법을 채택하여 나라의 질서를 잡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부유해지고 국가는 부강해졌습니다. 그로 인해 제후들이 속속 복속하였고 초나라와 위나라를 격파하여 천 리의 영토를 넓혔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진나라가 융성함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혜왕은 장의의 계책에 따라 삼천(三川)의 땅¹¹)을 빼앗고 파촉을 병합했으며, 북으로 상군을 취하고 남으로는 한중을 취하였습니다.

    11) 황하, 낙수, 이수가 합치는 한나라의 땅.

    뿐만 아니라 초나라의 언과 영을 점령하고 동쪽으로는 비옥한 성고의 땅을 빼앗았으며, 드디어 6국의 합종을 깨뜨리고 진나라를 섬기도록 하여 그 공적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소왕은 범저를 얻어 양후를 내쫓고 왕실의 권위를 높여 결국 주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의 제업(帝業)을 이루도록 하였습니다. 이 네 분의 군주는 모두 타국인을 객경으로 중용하여 성공을 거뒀습니다. 만일 네 분의 군주가 타국인을 배척하여 등용하지 않고 인재를 멀리하였다면 진나라의 강대함은 결코 이뤄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곤륜산에서 나는 옥을 바치게 하시고 화씨(和氏)의 구슬¹²)을 갖고 계시며, 허리에는 밝은 달처럼 빛나는 진주가 달려 있는 태아(太阿)의 검¹³)을 차고 계시며, 섬리(纖離)의 명마¹⁴)를 타시고 비취색 봉황 깃털로 장식한 깃발을 세우고 계십니다. 이 여러 가지 보물 중 진나라에서 나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반드시 진나라에서 나는 것이어야 한다면 정나라와 위나라의 여자를 후궁으로 둘 수 없고 아름답고 그윽한 조나라의 여자도 폐하 곁에 두실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인물이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진나라 사람이 아니면 물리치고 타국인은 무조건 추방하시려 합니다만 그렇다면 결국 여자와 주옥은 다른 나라의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인재만은 예외로 취급하는 것이 됩니다.

    12) 초나라의 유명한 옥玉.

    13) 초나라 태아라는 사람이 만든 명검.

    14) 준마의 명칭.

    ‘땅이 넓으면 곡식이 많이 나고, 나라가 크면 백성이 많으며, 군대가 강하면 병사가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태산은 한줌의 흙도 버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클 수 있었던 것이고,¹⁵) 하해는 아무리 작은 시냇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깊을 수 있는 것입니다.

    15) 원문은 泰山不讓土讓 故能成其大.

    지금 진나라가 타국인을 무조건 추방시키는 것은 천하의 인재를 다른 나라로 가게 만들어 적을 이롭게 할 뿐입니다. ‘적에게 무기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식량을 대준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진실로 진나라에서 나지 않는 물건도 소중한 것이 많으며, 진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나 진나라에 충성하려는 사람도 많습니다. 지금 타국인을 추방하려는 것은 적국을 이롭게 하고 원수를 도우는 격이며, 이는 안으로는 스스로 인재를 버리고 밖으로는 제후들의 원한을 사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나라가 부강과 발전을 원해도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글에 감명 받은 왕은 축객령을 취소하고 이사도 복직시켰다. 그리고 그의 계책은 다시 중용되었으며, 이윽고 이사의 벼슬도 높아져 정위(廷尉)로 올라갔다.

    그 뒤 이사가 진왕에게 먼저 한(韓)나라를 제압하여 제후국들에게 위협을 가할 것을 건의하자, 진왕은 이사를 파견하여 한나라를 함락시키려 하였다. 한왕(韓王)이 이를 걱정하여 한비자를 불러들여 상의하였다. 이때 위나라 대량 사람인 위료(尉繚)¹⁶)가 와서 진왕에게 권하였다.

    16) 병법가로서 원래 성은 위魏였으나, 진나라의 국위國尉로 임명된 뒤 위료尉繚로 칭해졌다.

    지금 진나라의 강대함으로 인하여 제후들은 단지 군현의 군주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다만 제후들이 연합하여 갑자기 진나라를 공격해 올 우려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백과 부차 그리고 민왕(湣王)이 망한 까닭입니다. 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재물을 아끼지 마시고 각 제후국의 세력 있는 대신들에게 주어 그들의 모략을 깬다면 불과 30만 금을 쓰고서 각국의 제후들을 모두 소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왕은 그의 계략을 받아들여 위료를 회견할 때는 언제나 최상급의 예우로써 대했고, 자신의 의복과 음식을 위료와 동등하게 하였다. 위료는 사석에서 진왕의 용모는 높은 콧등, 긴 눈, 맹금(猛禽) 같은 가슴, 승냥이 같은 목소리에 인덕이 부족하고 호랑이와 이리 같은 마음을 가져서 곤궁한 때에는 다른 사람에게 쉽게 겸손함을 나타내 보인다. 하지만 일단 뜻을 얻으면 역시 쉽게 사람을 삼켜 버린다. 나는 평민 신분에 지나지 않지만 나를 볼 때마다 항상 나에게 몸을 낮추고 있으나, 만약 진왕이 천하에서 뜻을 이루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자와는 더불어 오래 교유하지 못한다.라고 말하였다. 그러고는 진나라를 떠나려고 하자, 진왕이 그 사실을 알고서 그에게 한사코 머무를 것을 권유하며 진나라의 국위로 삼아서 결국 그의 계책을 채택하였다. 이때 이사가 국가의 대권을 장악하였다.

    한비자, 친구의 계략에 목숨을 잃다

    한비자는 한나라 왕족의 집안이었으나 말더듬이였기 때문에 시종 등용되지 못했다. 그는 법률을 공부했으며 저술에도 뛰어난 재질을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이사는 순자의 문하에서 한비자와 함께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재주에 있어서는 한비자가 한 수 위라는 것을 이사도 인정할 정도였다.

    한비자는 인재 등용에 있어서 개인적인 관계를 버리고 오직 능력을 중시해야 하며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격하게 법을 적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특히 그의 가르침은 반 유교적 경향이 강했는데, ‘백성을 대하되 덕망으로 하라.’는 유교의 가르침을 반대하였다. 이를테면 종기가 난 사람을 그냥 그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놓아둔다면 죽을 수도 있으므로 그가 아파서 참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종기를 칼로 째서 치료해야 하듯이 옳은 일을 위해서라면 강제로라도 백성을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한비자의 논리는 결국 군주의 강력한 통치를 강화시키고 합리화하는 것으로서 진시황에게 대단한 만족감을 주게 되었다. 진시황은 한비자가 쓴 책을 열심히 읽었으며 한비자를 만나보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를 정신적 지주로 삼을 만큼 그의 주장에 빠졌다. 어느 날 진시황은 한비자의 책을 열심히 읽다가 문득 아! 내가 이 저자를 만나 얘기해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으련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곁에 있던 이사가 말했다. 이 책들은 한비자가 저술한 것입니다.

    왕은 한비자를 만날 생각으로 급히 한나라를 공격하였다. 한나라 왕은 계속 한비자를 등용하지 않았으나 사정이 급하게 되자 한비자를 사자로 삼아 진나라에 보냈다. 진왕은 한비자를 만나 적지 않게 마음에 들어 했으나 아직 그에 대해 완전한 신임을 갖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사는 한비자가 기용되게 되면 자기가 왕으로부터 멀어질 것을 겁내 그를 비방하였다. 한비자는 한나라 왕족의 집안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천하를 제패하시려는 큰 생각을 가지고 계실 때 한비자를 기용한다면 결국 그는 한나라를 위해 일하지 진나라를 위해 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대왕께서 한비자를 등용하시지 않으면서도 오랫동안 머물러 있게만 하고 돌려 보내신다면 훗날 큰 두통거리가 될 뿐입니다. 지금 그를 없애 버림이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되옵니다.

    왕은 과연 그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해 관리의 손에 넘겨 처치하도록 하였다. 이사는 혹시 왕의 마음이 변할까 염려하여 급히 사자를 한비자에게 보내 독약을 먹고 자살하도록 강요하였다. 한비자가 직접 왕을 만나 뵙자고 청하였으나 거부되었고, 결국 한비자는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한편 왕은 한비자를 죽이라고 한 것을 후회하고 곧 사자를 보내 풀어주려 했으나 한비자는 이미 죽은 후였다.¹⁷)

    17) 한비자는 유세遊說의 어려움과 함께 그 비법을 설명한 『세난說難』이라는 책을 지었는데 끝내 ‘세난’을 피하지 못하고 그 화를 당해야 했던 것이다.

    여불위의 최후

    당시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 조나라의 평원군, 그리고 제나라의 맹상군 등은 모두 선비를 우대하고 식객 모셔오기에 서로 경쟁하고 있었는데 상국 여불위는 강대국인 진나라에 그러한 인물이 없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마침내 자신도 식객들을 불러 모으니 그 수가 3천명이나 되어 그 명성이 제후 이상으로 높아지게 되었다.

    이 무렵 각국에는 많은 유세객이 있었고 순자의 저서 같은 것은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 그러자 여불위는 식객들 모두에게 배운 것을 저술하게 하고 그것을 모아 ‘천지 만물과 고금(古今)의 일을 모두 망라하는’ 책을 만들게 하니 그 책의 글자 수만 해도 자그마치 20여만 자가 되었으며 사람들은 이를 『여씨춘추』라고 불렀다. 여불위는 이 책 위에 천금을 얹은 뒤, 제후의 유세객이나 빈객들에게 호언하였다.

    이 책에서 한 글자라도 고칠 수 있는 자에게 이 천금을 주겠다.¹⁸)

    18) 훌륭한 문장을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태후는 자주 여불위와 사통하였다. 장양왕 자초가 중병에 걸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무렵 여불위는 문병을 가는 길에 자기의 옛날 애첩이었던 태후에게 아직 사모하고 있다는 편지를 건넸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의 사이는 다시 불붙게 되었고 드디어 자초가 죽자 여불위는 이제 태후가 된 옛 애인의 거처를 수시로 찾았다.

    진시황이 성장한 이후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시황제가 성장해감에 따라 여불위의 불안도 커졌다. 여불위는 고심 끝에 거대한 남근(男根)을 가진 ‘대음인(大陰人)’¹⁹)인 노애라는 자를 식객으로 들였다. 그리고 잔치를 열어서 여흥 시간에 일부러 노애의 ‘물건’에 오동나무 바퀴를 달아서 그것을 굴리도록 시켰다. 이 소문이 태후에게 들어가 태후의 관심을 끌려는 계획이었다. 얼마 후 과연 태후로부터 그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전갈이 왔다. 여불위는 노애가 궁형(宮刑)에 상당하는 죄를 범했다고 고발해 놓고 태후에게 비밀리에 전했다. 궁형에 처해 거세되었다고 해두면 마음 놓고 옆에 데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19) 음陰은 생식기를 지칭한다.

    태후는 관리를 시켜 형을 집행하지 말고 집행한 것처럼 꾸미라고 지시하였다. 그렇게 하여 노애는 턱수염과 눈썹을 뽑고 환관이 되어 태후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태후는 이윽고 애까지 임신하게 되었다. 그러자 점쟁이를 매수하여 ‘옹(雍) 지방에서 살아야 한다.’라는 점괘가 나오도록 꾸미고 옹 지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노애는 장신후(長信侯)로 봉해졌으며 하인이 수천 명에 이르고 식객도 천 명이 넘었다. 태후는 옹에서 아들을 둘이나 낳았다. 진왕은 노애에게 산양(山陽) 땅을 주어 그곳에 살게 하고 궁실, 거마, 의복, 원유(苑囿)²⁰) 등을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했다. 또 하서(河西)의 태원군(太原郡)을 노애의 봉지로 삼았다.

    20) 동물을 키우는 곳

    진왕 9년, 고발장이 들어왔다.

    노애가 환관이라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태후와 몰래 관계를 가져 아이를 둘이나 낳았고 더구나 왕이 죽으면 그 아이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진왕은 즉시 조사를 명령하였다. 노애는 왕의 옥새와 태후의 인장을 위조하여 현(縣)²¹)의 군사 및 호위군사, 관아의 기병, 융적(戎翟)의 우두머리, 가신들을 동원하여 반란을 꾀하였다. 진왕이 그 사실을 알고 상국 창평군(昌平君)과 창문군(昌文君)을 파견하여 노애를 공략하도록 하여 함양에서 수백 명을 베었다. 노애가 패하여 달아나자 전국에 명령을 내려 그를 생포하는 자에게는 100만 냥을 하사하고 그를 죽이는 자에게는 50만 냥을 하사한다고 선포하였다. 결국 노애 등이 모두 잡혔다. 진왕은 노애의 친족을 모두 죽이고 태후가 낳은 두 아이도 죽여 버렸다. 진왕은 처음에는 여불위도 죽일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라의 큰 공신이었고 또 여러 대신들과 유세객들이 그를 변호하였기 때문에 단념하였다. 대신 여불위를 파면시키고 하남 땅에 칩거하도록 명을 내렸다. 그러나 여불위의 명성은 여전했으며 제후들의 손님들과 사신들이 여불위를 만나기 위해 날마다 줄을 이었다.

    21) 황제가 관리하는 경도京都 천 리 이내의 땅, 경기京畿라고 한다.

    이때 제나라 사람 모초(茅焦)가 진왕에게 진나라는 장차 천하 제패를 대사로 삼고 있는데 대왕께서 노애 사건 때문에 모태후(母太后)를 유배시켰다는 소문이 있으니, 이 소문을 들은 제후들이 그 일로 인하여 진나라를 배반할까 우려되옵니다.라고 고하자 진왕은 옹(雍)에서 태후를 맞아들여 함양에 살도록 했다가 다시 감천궁(甘泉宮)에서 기거하게 했다.

    진왕 12년, 여불위의 모반을 두려워한 시황은 친서를 보냈다.

    〈귀공께서는 무슨 공적이 있어 하남 땅을 가지게 되었으며 10만 호의 영지를 받았는가? 또 진나라와 어떤 혈연 관계가 있어 중부로 행세하고 있는가? 즉시 일가를 이끌고 촉으로 옮겨 살 것을 바라노라!〉

    여불위는 ‘이러다가 끝내 주살되고 말 것이다. 치욕스럽게 죽느니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라고 생각하고는 짐독(鴆毒)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문하 빈객이 몰래 그를 낙양 부근의 북망산에 묻었다. 장례식에 참가하여 곡을 한 사람 중 진(晋)나라 사람은 방릉으로 축출하였고, 진(秦)나라 사람으로 봉록이 6백 섬 이상인 사람은 관직을 삭탈하였으며, 봉록이 5백 섬 이하로서 곡을 하지 않은 사람은 방릉으로 옮기게 하되 관직은 삭탈하지 않았다.

    태사공은 말한다.

    여불위와 노애는 일세를 풍미하여 문신후로 봉해졌다. 어떤 사람이 노애를 고발했는데, 노애도 그 사실을 알았다. 진왕이 관리들에게 조사를 시켰지만 아직 밖으로 공표하지 않았다. 진왕이 옹성 교외에 나가자 노애는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일당들과 모의하고 태후의 옥새를 위조하여 군대를 동원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진왕은 관리를 파견하고 군대를 이끌고 노애를 공격하여 그의 종족을 주멸하였다. 여불위도 이로 인하여 강등되어 축출되었다. 공자가 말하는 그러한 ‘견문이 넓은’ 자는 여불위와 같은 사람이지 않은가?

    진왕, 최초의 황제(皇帝)로 되다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진나라 장양왕(莊襄王)의 아들이다. 장양왕은 진나라의 인질로 조나라에 있을 때 여불위의 첩을 보고 크게 좋아하여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시황(始皇)을 낳았다. 시황은 소왕 48년 정월에 한단에서 태어났는데 이름을 정(政), 성을 조(趙)라고 하였다. 정이 13세 되던 해 장양왕이 죽자 그는 왕위를 계승하여 진왕(秦王)이 되었다. 당시 진나라는 이미 파촉, 한중, 월, 완을 점령하였고, 북쪽으로는 상군(上郡) 동쪽을 공략하여 태원과 상당, 그리고 하동에 군을 설치하고 동쪽으로는 삼천군을 설치하였다. 재상 여불위는 봉록이 10만 호였고 문신후로 봉해졌으며, 천하의 빈객과 유사(遊士)를 불러 모아 천하통일을 꾀하였다. 진왕은 아직 나이가 어려 국가 대사는 대신들의 손에 의하여 처리되었다.

    진왕 원년, 진양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군 몽오가 평정하였다. 3년에는 몽오가 한(韓)나라를 공격하여 13개 성을 점령하였다. 4년에는 창과 유궤를 함락시켰다. 이 해에 조나라에 보냈던 진나라의 인질이 귀국하였고, 대신 조나라의 태자는 본국으로 돌아갔다. 10월 경인일에 메뚜기 떼가 동쪽으로부터 날아와서 하늘을 온통 뒤덮었다. 천하에 전염병이 돌았고, 식량 천 섬을 헌납한 백성에게는 작위(爵位) 일급(一級)을 하사하였다.

    5년에는 몽오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산조, 연, 허, 장평(長平), 옹구(雍丘), 산양성(山陽城)을 모두 평정하고 20개의 성을 빼앗았으며, 처음으로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6년에는 한, 조, 위, 연, 초나라가 함께 진나라를 공격하여 수릉을 점령하였다. 진나라가 출병하자 다섯 나라는 군사를 거두었다. 진나라가 승세를 타고 위나라에 진격해 들어가자, 위나라 왕 각(角)이 야왕(野王)으로 도읍을 옮겨 험한 산세에 의지하여 위나라를 지켰다.

    7년, 몽오 장군이 용(龍), 고(孤), 경도(慶都)를 공격하고 또 회군하여 급(汲)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다. 혜성이 서쪽에 16일 동안 나타났다. 8년에는 진왕의 아우 성교(成蟜)가 조나라를 공격하는 도중에 반란을 일으켜 처형되었고 그의 군리(軍吏)들도 모두 참살되었다. 성교가 처형된 후 반란에 참여했던 군졸들은 모두 육시를 당하였다. 황하가 범람하여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들이 땅으로 떠다니게 되자, 사람들이 수레와 말들을 몰고 와서 물고기를 잡아먹었다.

    9년에 혜성이 자주 나타났다. 10년에는 상국 여불위가 노애의 반란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진왕이 진나라에 와 있는 유세객들을 대규모로 조사하여 추방시키려고 하자, 이사가 글을 올려 간하였고 이에 진왕은 축객령(逐客令)을 취소시켰다.

    14년, 한비자가 진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자, 진나라는 이사의 계략을 채용하여 한비자를 억류하였고 결국 한비자는 운양에서 죽었다. 그러자 한왕(韓王)이 신하가 되기를 청했다. 15년, 진왕이 대군을 일으켜서 한 부대는 업(鄴)을 공격하고 다른 부대는 태원을 공격하여 낭맹(狼孟)을 빼앗았다. 이 해에 지진이 발생했다.

    16년 9월에 다시 한나라를 공격하여 남양을 손에 넣고 등(騰)을 잠시 군수로 삼았다. 남자의 나이를 등록하도록 명을 내렸다. 위나라가 진(秦)나라에 땅을 바쳤다.

    18년, 대군으로써 조나라를 공격하였다. 왕전은 정형(井陘)을 공격하였으며, 양단화는 하내(河內)의 군사를 거느리고 강외(羌瘣) 역시 군사를 이끌어 조나라를 토벌하였다.

    19년, 왕전과 강외가 조나라의 동양(東陽)을 모두 평정하여 빼앗고, 조왕(趙王) 천(遷)을 사로잡았다. 그런 연후에 다시 연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중산(中山)에 주둔했다. 진왕은 한단에 가서 일찍이 자신이 조나라에서 태어날 때 모친의 집과 원한이 있었던 사람들을 모두 생매장시켰다. 진왕은 태원과 상군을 거쳐서 진나라로 돌아왔다. 시황제의 모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조나라 공자 가(嘉)가 종족 수백 명을 이끌고 대(代)로 가서 스스로 대왕(代王)에 즉위했으며, 동쪽으로 연나라와 연합하여 상곡(上谷)에 병사들을 주둔시켰다.

    20년, 연나라 태자 단(丹)은 진나라의 침략을 걱정하고 형가를 파견하여 진왕을 암살하고자 하였다. 진왕은 형가의 사지를 찢어 백성들에게 보이고, 왕전과 신승(辛勝)을 파견하여 연나라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연나라와 대나라가 군사를 일으켜서 진나라에게 반격을 시도했으나, 진나라는 역수(易水) 서쪽에서 연나라를 격파하였다.

    21년, 왕분(王賁)이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진왕은 군사를 증원하여 왕전의 군대를 도왔다. 진나라는 마침내 연나라 태자의 군사를 격파하고 연나라의 계성(薊城)을 점령하였으며, 태자 단의 목을 참하였다. 연왕은 동쪽으로 도망가 요동을 점령하고 그곳의 왕이 되었다. 왕전이 늙고 병든 것을 핑계로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신정(新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겨울에 큰 눈이 내렸는데, 높이가 두 자 다섯 치나 되었다.

    22년, 왕분이 위나라를 공격하면서 하구(河溝)를 파고 엄청난 물을 위나라 도읍 대량으로 흘러가게 하자 마침내 대량의 성벽이 붕괴되었다. 위나라 왕은 항복하였고 진나라는 위나라의 땅을 모두 빼앗았다.

    23년, 진왕이 왕전을 다시 불러 기용하였고, 초나라 공격을 명하여 진(陳)의 남쪽부터 평여(平輿)까지 점령하고 초나라 왕을 사로잡았다. 진왕이 영(郢)과 진(陳)까지 행차했다. 초나라 장수 항연(項燕)이 창평군을 초왕으로 세웠고, 회하 남쪽에서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24년, 왕전과 몽무(蒙武)가 초나라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창평군이 죽자 항연도 따라서 자살하였다.

    25년, 진왕은 대군을 일으켜 왕분으로 하여금 연나라의 요동을 공격하도록 하여 연왕 희(喜)를 사로잡았다. 귀로 중에 대나라도 공격하여 대왕(代王) 가(嘉)를 사로잡았다. 이어서 왕전은 초나라의 강남 지역을 평정하여 월나라 군주를 항복시키고 그곳에 회계군을 설치하였다. 5월, 한, 조, 위, 연, 초의 다섯 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천하에 커다란 군중 연회를 베풀도록 허락하였다.

    26년, 제왕(齊王) 전건과 그의 상국 후승(后勝)이 군사를 일으켜서 서쪽 변경 지대를 지키며 진나라와의 내왕을 끊었다. 진왕은 왕분으로 하여금 연나라의 남쪽으로부터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하여 제왕 전건을 사로잡았다.

    진왕이 막 천하를 통일한 뒤 신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천하는 이미 통일되었는데 이 크나큰 업적을 영원히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는 이 제왕(帝王)이라는 호칭에 대하여 의논해 보기를 바란다. 그대들의 의견을 말해 보라.

    그러자 승상 왕관, 어사대부 풍겁, 정위 이사 등이 모두 아뢰었다.

    옛날 오제 때에는 땅이 사방 천리에 지나지 않았고, 그 바깥에는 후복(侯服),²²) 이복(夷服) 등의 제후가 있었는데, 그들이 어떤 때에는 조현(朝見)하고 어떤 때에는 조현하지 않아 천자는 그들을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어 잔적(殘敵)을 토벌하시고 천하를 평정하여 전국에 군현을 설치하고 법령을 하나로 통일시키셨으니, 이는 상고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로서 비록 오제라고 할지라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박사(博士)²³)들과 함께 ‘고대에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태황이 가장 존귀했다.’라고 논의하였습니다. 신들이 황공하옵게도 존호를 올리오니 왕을 ‘태황(泰皇)’이라고 칭하고 명(命)을 ‘제(制)’라고 하며, 영(令)을 ‘조(詔)’라고 하고 천자가 스스로를 칭할 때는 ‘짐(朕)’이라고 하십시오.

    22) 주제周制에 의하면 천자가 기거하는 경성京城 밖의 직경 천 리의 땅은 왕기王幾이고, 그 밖의 곳을 구복九服이라 하여, 가까이부터 멀리까지 매 5백 리마다 일복一服으로 하였다. 그 순서는 후복侯服, 전복甸服, 남복男服, 채복采服, 위복衛服, 만복蠻服, 이복夷服, 진복鎭服, 번복藩服으로 하였다. 여기에서 후복과 이복은 경성 이외의 지방을 말한다.

    23) 관직 이름으로서 사사史事와 전적典籍 그리고 도서圖書를 관장하며 의정議政에 참여했다.

    그러자 진왕은 태(泰)자를 없애고 황(皇)자를 취하며, 상고시대의 제(帝)라는 호칭을 택하여 ‘황제(皇帝)’라고 칭할 것이고 다른 사항은 그대들이 논의한 대로 하라.라고 명하였다. 그때부터 진왕은 황제로 칭해졌다. 그 후 진시황은 다시 짐은 최초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시황제(始皇帝)라 부르기로 한다. 짐의 뒤는 차례대로 2세, 3세 등으로 하여 이를 천만세까지 이어 나갈 것이다.라고 하여 진나라가 영원히 존재할 것으로 확신하였다.²⁴)

    24) 그러나 진나라는 어이없게도 천만 세는커녕 겨우 2세에 이르러 멸망당해 15년의 짧은 왕조로 끝나 버렸다.

    전국을 36군(郡)으로 나누고 군에는 수(守), 위(尉), 감(監)을 설치하였다. 백성은 ‘검수(黔首)’라 칭하였다. 천하의 병기를 모아 함양으로 옮기도록 하고 모두 녹여 종과 악기를 만들고, 12개의 동상을 만들었는데 모두 1천 석 무게였으며 궁정 안에 배치하였다. 또 법률제도와 도량형 표준을 통일시켰고 마차의 바퀴 간 거리를 통일시키도록 규정하고 문서는 통일된 서체를 사용하도록 하였다.²⁵)

    25) 車同軌. 書同文字. 여기에 나오는 ‘서동문자書同文字’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문자를 통일시켰다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전국시대 각국마다 여러 가지 서체가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렇게 서로 다른 서체를 진시황이 천하 통일 후 진나라가 사용하던 소전小篆체로 통일시켰다는 의미이다. 즉, 진나라는 천하통일 후 정부 문건의 표준 서체를 소전小篆체로 통일시킨 것이다. 이후 한나라 시기에는 예서隸書로 통일하였다.

    분서갱유(焚書坑儒)

    천하통일이 이룩된 후 이사는 승상이라는 최고의 벼슬에 올라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시황제 34년 어느 날, 함양궁에서 연회가 베풀어졌는데 주청신 등이 시황제의 위엄과 덕망을 칭송하였다. 이때 순우월이 나서 황제에게 말했다.

    은나라와 주나라가 천 년 동안 사직을 보존한 까닭은 왕의 아들이나 아우 그리고 공신들을 제후로 삼아 왕실을 돕는 지주로 삼았기 때문이라 합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천하를 가지셨지만 폐하의 아들이나 아우들은 일반 백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무슨 불행한 일이라도 생기면 보필할 만한 신하가 없으니 어떻게 나라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옛것을 모범으로 삼지 않고 오랫동안 융성했다는 사례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주청신 등의 아첨배들이 폐하의 과오를 더욱 무겁게 하니 어찌 충신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시황제는 이 의견을 신하들에게 검토하도록 했다. 이때 이사가 글을 올려 순우월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제 황제께서 가까스로 천하를 통일하셨는데 그 땅들을 공신과 왕자들에게 나눠 주는 것은 절대로 안 될 일입니다. 춘추전국 시대에 천하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은 주나라가 그 가족과 공신들에게 나라를 나눠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월이 흐르면서 그 자손들 사이가 차츰 멀어지고 그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게 되어 이윽고 원수처럼 싸우게 되었으나 주나라 왕실에서도 그것을 제지할 수 없었으므로 전쟁이 그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갈등과 전쟁으로 인하여 주나라조차 멸망당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나라를 나눠 주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근본 원인이 되고 천하 통일도 빈껍데기가 될 뿐입니다. 지금 가장 좋은 방법은 오직 황제께서 천하를 몸소 다스리시는 일일 뿐입니다. 서른여섯 개의 군(郡)으로 나라를 나누고 그 밑에 현(縣)을 두어 조직적으로 일사분란하게 통치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사직이 온전히 보존될 것입니다.²⁶)

    26) 실로 이사의 이러한 군현 제도야말로 이사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군현 제도에 의한 중앙집권제와 관료제는 진나라의 멸망 이후에도 역대 중국의 왕조들이 모두 채택한 탁월한 행정 제도였던 것이다.

    또한 옛날에는 각 나라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으나 아무도 감히 통일을 이룩할 수 없어 제후들이 서로 다투어 일어나 자기주장만을 내세웠으며 학자들은 말끝마다 옛것을 들먹이며 현실을 비방하고 진실을 어지럽혔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시고 흑백을 가려 하나의 기준을 확립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사사로이 학문을 전수하며 법을 비난하고 자기가 배운 것만을 기준으로 하여 시비를 따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정에서는 마음속으로 황제의 일을 비난하고, 나가서는 거리에서 떠들어대며 군주와 의견을 달리함으로써 자기 자신만의 명성을 얻으려 하면서 백성들을 자극하고 황제를 비방하는 말들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금지시키지 않으면, 위로는 군주의 권위가 떨어지고 아래로는 당파가 만들어집니다.

    신은 주장합니다. 사관이 갖고 있는 자료 중 진나라의 기록이 아닌 것은 모두 불태우고 개인이 『시경』과 『서경』 및 제자백가의 책을 갖고 있으면 모두 관청에 바치게 한 후 태우도록 하십시오. 또 『시경』 과 『서경』을 들먹이며 주장하는 자는 길거리에서 처형시키고, 옛것을 들먹이며 현실을 비방하는 자는 삼족을 멸하되 만약 관리가 그것을 알고도 처벌하지 않으면 똑같은 죄로 처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명령이 내린 지 30일이 지나도 불태우지 않는 자는 얼굴에 문신을 넣은 후 성곽을 쌓는 노비로 삼아야 합니다. 다만 폐기하지 않아도 좋을 책은 의약과 역서(易書) 그리고 농사관계 서적뿐이라고 생각하옵니다. 그리고 만약 법령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관리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게 하면 될 것입니다.〉

    시황제는 이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즉시 시행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시경』과 『서경』 그리고 제자백가의 책은 모조리 몰수되어 불태워졌고 옛것을 언급해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모든 사람은 처형되었다.²⁷) 법을 제정하고 명령을 내리는 것은 오직 시황제의 권한으로 되었으며, 문자와 도량형이 통일되고 별궁이 곳곳에 지어졌다.

    27) 이것이 유명한 분서焚書로, 후에 우민정책과 강권통치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용어가 되었다.

    한편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진시황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제나라 사람 서불(徐市)²⁸)이 상소를 올려 바다 가운데 세 개의 신산(神山)이 있는데,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이라 하며 그곳에는 신선들이 살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목욕재계하고 나서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신선을 찾아 나설 수 있도록 해 주옵소서.라고 청하자, 진시황은 즉시 서불에게 수천 명의 동남동녀를 선발하여 바다로 나아가 신선을 찾도록 하였다.

    28) 서복徐福이라고도 한다.

    그 후 진시황은 스스로 신선이라 칭하는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을 불러들였다. 노생이 진시황에게 말했다.

    제가 동해로 나가 영약을 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은 어떤 좋지 못한 기운이 방해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황제께서 몸을 숨겨 악귀를 피하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악귀를 피하신다면 진인(眞人)²⁹)이 될 수 있습니다. 진인이란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으며 구름을 타고 공중을 날며 천지가 있는 한 영원히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임금의 거처를 신하들이 알면 입신(入神)의 경지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거처하시는 곳을 사람들이 모르게 하십시오. 그러면 불로장생의 약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29) 도가에서 진리를 닦아 도를 얻은 사람이나 신선이 된 사람을 가리킨다.

    이 말을 들은 진시황은 나는 오늘부터 진인이 되고 싶다. 이제 나는 짐(朕)이라 하지 않고 진인이라 칭하겠다. 하고 선포했다. 그러고는 명을 내려 함양 부근 200리 안의 궁궐 207곳을 구름다리와 용도(甬道)로 서로 연결시키고 휘장, 종고(鍾鼓 종과 북), 미인들로 그곳을 채웠다. 황제가 행차하여 머무를 때 그 거처를 말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했다. 이 무렵 진시황이 양산궁(梁山宮)에 행차했는데, 산 위에서 승상의 거마(車馬)가 많은 것을 보고 언짢아하였다. 황궁의 어떤 사람이 그 사실을 승상에게 말하자 승상은 즉시 거마의 숫자를 줄였다. 진시황이 크게 노하여 이는 궁중의 누군가가 내 말을 발설한 것이로다!라고 말하고는 한 명씩 불러들여 심문했으나 죄를 인정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자 그 당시 주위에 있던 자들을 모두 잡아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그 뒤로 황제가 행차한 곳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진시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생과 후생은 불로장생의 약을 찾지 못했다. 노생과 후생이 서로 상의하였다.

    진시황은 천성이 흉폭하고 오만하여 스스로 제후의 신분에서 출발하여 천하를 겸병하였으며, 만사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하고 싶은 것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고 이래로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는 특별히 감옥을 관리하는 관리를 임용하여 그들을 매우 총애하고 있다. 박사는 비록 70여 명이 있지만 그것은 인원을 충당하는 숫자일 뿐 전혀 신임을 받고 있지 않다. 승상과 대신 모두 이미 결정된 명령만을 받을 뿐 모든 일들은 황제 한 사람에 의해 처리된다. 황제는 형벌을 이용하여 살육함으로써 위엄을 확립하는 것을 좋아하여 천하 사람들이 죄를 얻는 것을 두려워하고 오직 자리만 보존하기 위하여 아무도 감히 충성을 다하려 하지 않는다. 황제는 자기의 과실을 들을 수 없고 점점 교만하고 미쳐가고 있으며 신하들은 두려워서 굴복하고 기만으로써 황제의 환심을 사고 있다. 진나라 법률에 의하면, 한 사람이 두 가지 직업을 가질 수 없도록 되어 있는데, 한 직업에 정통하지 못한 것으로 조사되면 곧 처형된다. 이처럼 잔혹하니 하늘도 나쁜 징조를 보이고 있는데, 천체 기상을 관찰하는 3백여 명은 능력이 매우 뛰어나지만 진시황에 아부만 할 뿐 그의 과실을 정면으로 지적하지 못한다. 천하의 일은 크건 작건 모두 황제가 결정하고, 심지어 문서를 무게를 달아 심사하며 공문은 하루에 정해진 양이 있어 이에 미치지 못하면 휴식할 수 없다. 권세를 탐하는 정도가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이런 사람을 위하여 선약(仙藥)을 찾아줄 수는 없다

    그러고는 함께 도망쳐 버렸다. 진시황은 두 사람이 도망친 사실을 듣고 대단히 분노하였다. 나는 전에 천하의 서적을 몰수하여 적합하지 않는 것은 모두 불태웠다. 그리고 많은 선비들과 방사들을 불러들여 국가를 태평하게 하였고 이들 방사들에게 묘약을 구하도록 하였다. 내가 이들을 존경하고 엄청나게 상을 내렸는데도 도리어 이들은 나를 비방하고 나의 불인(不仁)을 무겁게 하였다. 함양에 사는 일부 유생들에 대하여 사람을 보내 살펴보니 일부에서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사에게 유생을 심문하도록 하여 반드시 서로 상대의 잘못을 고해야 비로소 자기의 죄에서 풀려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법령을 어긴 자는 4백 6십여 명에 이르렀고, 구덩이를 파서 이들 모두를 산 채로 묻어 버림으로써³⁰)모든 사람이 이를 알도록 하였고 이로써 후세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하였다. 또 더욱 많은 죄수와 노예들을 징발하여 변경을 지키도록 하였다.

    30) 이것이 이른바 ‘갱유坑儒’ 사건이다.

    이에 진시황의 장자 부소가 권하였다.

    천하가 태평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고 멀리 있는 백성들은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습니다. 유생들은 모두 공자를 공부하고 본을 받고자 하는데, 폐하께서 엄중한 형벌로써 그들을 다스리시니 저는 천하에 변란이 생길까 걱정됩니다. 이 일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진시황은 크게 화를 내고 부소를 북쪽 상군(商郡)으로 내보내 몽염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아방궁과 시황릉, 그리고 만리장성

    진시황은 죽음을 그렇게 피하려 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열세 살 즉위할 때부터 자기가 죽어서 들어갈 묏자리를 파고 있었다. 그래서 죽을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묘가 완성되었으니 일평생 죽을 준비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³¹)

    31) 시황릉(일명 여산릉)은 높이가 116m, 주위의 길이가 2.5m, 사방이 각각 600m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로 무려 70여만 명의 죄수를 동원하여 공사했다.

    진시황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산을 파고 정리하여 천하를 통일한 후 다시 70여만의 죄수를 파견하여 노역하도록 하고 굴을 물이 보이는 곳까지 깊게 판 뒤 구리물을 부어 굳게 하고 관재를 그 안에 놓았다. 무덤 안에는 궁궐과 백관(百官: 모든 벼슬아치) 그리고 각종 진기한 보물 모두를 배치하였다. 또한 장인(匠人)에게 활과 화살을 제조하도록 하여 무덤을 도굴하려고 접근하여 그 기계를 만지게 되면 곧 화살에 맞아 죽게 하였다. 수은(水銀)으로 백천(百川)과 강 그리고 바다를 만들었으며 기계를 이용하여 서로 흘러가도록 만들었다. 무덤 위로는 천문(天文)을 장식하고 지하에는 지리(地理)의 모형을 설치했으며, 고래의 지방(도룡농 기름설도 있음)을 이용한 초를 만들어 오랫동안 꺼지지 않도록 하였다. 2세 황제는 선제의 후궁과 희첩 중 자식이 없는 자를 궁궐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좋지 않다. 모두 순장하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순장된 사람은 엄청나게 많았다. 매장이 끝나자 어떤 사람이 장인(匠人)이 기계를 만들고 보물을 매장했으므로 무덤의 사정에 대하여 너무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되면 비밀이 곧 누설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장례가 끝나자 무덤 안의 굴은 모두 폐쇄되었고 무덤 밖의 굴도 모두 폐쇄되어 장인들은 한 명도 도망칠 수 없었다. 그 뒤 무덤 위에는 각종 풀과 나무를 심어 산처럼 꾸몄다.

    무덤 안에는 진시황을 모시는 시중과 신하 그리고 호위병과 군마 등 수만 개의 도용(陶俑)³²)을 배치하였으며 심지어 산 채로 끓는 구리물을 뒤집어 씌워 만든 것도 있었다.

    32) 유명한 중국 영화였던 ‘진용’은 바로 이러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도용陶俑이란 실물 크기의 흙 인형을 말한다.

    한편 진시황은 그동안 사용해 오던 함양궁이 협소하여 천하를 통일한 황제의 위엄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새로이 거대한 궁을 짓도록 하였는데 그 궁이 바로 아방궁이다.³³) 그 안에는 곧바로 남산을 통하는 고가도로를 만들었으며 위수(渭水)를 건너 함양으로 연결되는 복도도 만들었다.

    33) 아방궁의 규모는 동서의 길이가 약 700m, 남북의 길이가 115m로서 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앉을 수 있고 아래층에는 약 11.5m 높이의 깃발을 세울 수 있을 만큼이나 높았다.

    그러나 아방궁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진나라는 멸망당하고 말았다.

    일찍이 진시황 32년 동해로 불로장생의 약을 구하러 갔던 연나라 사람 노생이 돌아와서 귀신에 관한 일에 대하여 참위(讖緯)³⁴)의 글월을 상주하였다. 거기에는 진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호(胡)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진시황은 그것이 오랑캐 호족(胡族), 즉 흉노족으로 생각하고 장군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군사 30만 명을 이끌고 북쪽으로 호인(胡人)을 공격하게 하여 하남 지역을 점령하였다.

    34) 미래의 길흉화복의 조짐이나 앞일에 대한 예언

    천하통일을 이룬 진시황에게도 계속 커다란 부담을 느끼게 하는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흉노족이었다. 진시황은 근본적으로 흉노족을 방어하기 위하여 북쪽 국경에 거대한 장성을 쌓도록 하고 몽염 장군에게 그 임무를 맡도록 하였다. 몽염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요새를 구축했으며, 10여 년 만에 임조(臨兆)에서 시작하여 요동에 이르는 총 길이 1만여 리의 대장성을 만들었다. 이 공사를 위하여 30만 명의 군사, 아니 잡역부들이 동원되어 길거리에서 잠을 자야 했으며 몽염 자신도 10여 년 동안 밖을 나오지 못했다. 이 대공사는 백성들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그렇게 무리한 사업이 원인이 되어 진나라에서는 각 지방에 반란들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후에 진나라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진승, 오광의 반란도 기실 만리장성 쌓는 고통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한편 만리장성 축조 공사가 한창이던 어느 북쪽 변방에 제나라에서 맹강녀(孟姜女)라는 여인이 찾아왔다. 그녀는 두툼한 겨울옷을 남편에게 주기 위해 머나먼 길을 찾아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맞이한 것은 그리운 남편이 아니라 남편이 이미 죽었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유해라도 찾아야겠다고 미친 듯이 돌아다녔으나 유해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녀가 체념하여 장성 앞에서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자 갑자기 성벽이 무너지면서 남편의 유해가 나타났다. 그녀가 시체를 안고 애달프게 통곡하고 있는데 병사들이 나타나 장성을 파괴했다는 죄목으로 그녀를 끌고 갔다. 그런데 맹강녀는 워낙 미인이었으므로 때마침 시찰을 온 진시황의 눈에 띄게 되었다. 이에 진시황은 그녀에게 수청을 들라고 강요했으며 이에 그녀는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그러하겠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맹강녀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 직후 칼을 물고 엎어져 자결하였다.

    결국 죽음을 피하지 못한 진시황

    사실 진시황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강력한 추진력으로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통일 국가를 실현시켰던 것이다. 진시황의 왕성한 의욕은 대단해서 하루에 1석³⁵)의 서류를 결재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을 정도였다. 전국 시찰만 해도 통일 후 다섯 번이나 강행군했다.

    35) 한 석은 약 30kg에 달한다.

    시황제 37년 10월, 황제는 다섯 번째 지방 시찰에 나서 회계산에 다녀오는 길에 해안을 끼고 북상하고 있었다. 방사(方士) 서불 등이 바다로 나아가 신약(神藥)을 구했으나 몇 년 동안 얻지 못하고 비용만 많이 낭비하자, 그는 문책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 진시황에게 거짓으로 고했다. 봉래산의 신약은 구할 수는 있으나 항상 커다란 상어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 그곳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상어를 잘 잡는 사람과 같이 가서 상어가 나타나면 즉시 큰 활로 그것을 죽일 수 있습니다. 진시황이 꿈에서 해신(海神)과 싸웠는데 해신의 모습이 마치 사람의 형상과 같았다. 해몽을 하는 박사에게 물어보자 박사는 해신은 원래 볼 수 없는 것이지만, 종종 커다란 상어나 용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지금 황제께서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제사를 지냈지만 이러한 흉신(凶神)이 나타났으니, 이 흉신을 없애야 비로소 선신(善神)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진시황은 바다에 들어가 고기를 잡는 어부에게 대어를 잡는 도구를 준비하도록 하고, 자신이 직접 커다란 활을 가지고 상어를 기다렸다가 쏘려고 하였다. 낭야 북쪽에서 출발하여 노산(勞山)과 성산(成山)까지 갔지만 상어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부(之罘)에 이르러 비로소 상어가 나타나 화살을 쏘아 한 마리를 죽였다.

    황제의 마지막 시찰에는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가 수행하였으며 조고가 옥새를 관리하는 일을 겸임하고 있었다. 시황제에게는 20여 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맏아들 부소는 멀리 북쪽의 상군 지방에서 변경 지방의 군대를 감독하고 있었다. 당시 상군 지방의 군사를 지휘했던 사람은 몽염이었다. 한편 시황제는 작은 아들 호해(胡亥)를 귀여워하여 이번 시찰에도 아들 중 유일하게 동행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시황제가 평원진(平原津)에 이르자 그의 병이 위독해졌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자 진시황제는 조고를 시켜 맏아들 부소에게 편지를 써보내도록 하였다.

    〈군대는 몽염에게 맡기고 함양으로 돌아와 함양에 나를 안장하라!〉

    편지는 봉해졌으나 사자를 보내기 전에 황제는 죽고 말았다. 황제의 편지와 옥새는 중거부령(中車府令) 조고(趙高)의 관부(官府)에 놓인 채 사자에게는 주지 않았다. 시황제의 죽음은 일체 비밀에 부쳐졌으며 오직 호해와 이사, 조고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사는 외지에서 황제가 죽었고 또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진시황의 서거 사실을 비밀에 부치게 했던 것이다. 유해는 온량거(轀輬車)³⁶)에 안치된 채 시찰이 계속되었다.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신하가 정사를 아뢰고 황제의 수라상도 올려졌다. 결재도 온량거 안에 있는 환관이 수행하였다.

    36) 밀폐할 수도 있고 통풍도 가능하며 누울 수 있는 수레로서 훗날에 이르게 되면 장례수레를 지칭하였다.

    환관 조고에 의해 결정된 진나라의 미래

    조고(趙高)는 조나라 왕족의 먼 친척으로 조나라가 멸망하면서 그의 형제들은 모두 환관이 되었고 어머니는 처형당했다. 그러나 시황제는 조고가 열심히 공부하고 법에 밝다는 말을 듣고 등용하게 되었는데 조고는 몰래 공자 호해에게 접근하여 문자와 형옥법률(刑獄法律)을 가르쳤다.

    조고는 시황제가 죽자 호해를 황제로 만들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조고는 시황제가 부탁한 부소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내지 않은 채 호해를 떠보았다.

    폐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만 맏아들 부소에게 서한을 내리셨을 뿐 누구를 황제로 지명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부소가 돌아오면 곧 황제가 될 터인데 공자께는 한 치의 땅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자 호해는 당연한 일이 아니오? 어진 임금은 신하를 알고 지혜로운 아버지는 자식을 안다고 했소.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며 아무런 후계도 정하시지 않으셨는데 상식에 따라 결정되는 것 아니겠소?라고 물었다.

    이에 조고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천하의 권력을 얻고 잃음은 공자님과 저 그리고 승상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남을 신하로 부리는 것과 남의 신하가 되는 것, 그리고 남을 지배하는 것과 남의 지배를 받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말했다.

    형을 제치고 동생을 세우는 것은 불의이며 아버님의 유언을 받들지 않는 것은 불효입니다. 또 능력이 적으면서 남의 손을 빌려 성공하는 것은 무능이오. 이 세 가지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며, 그렇게 한다고 해도 천하가 복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도 위험에 빠지고 나라도 위태로워지는 것이오. 호해는 계속 조고의 권유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조고는 포기하지 않고 호해를 설득하였다. "그렇다면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이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 분들도 군주를 시해했습니다만 천하는 그분들을 불충을 범했다고 비난하기는커녕 잘한 일이라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또 위나라 임금은 부친을 죽였습니다만 그는 덕망 높은 임금으로 추앙되었으며 공자도 이때의 일을 기록하면서 불효라고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큰 일을 도모하려면 작은 예절에 구애됨이 없어야 하며, 큰 덕을 갖춘 사람은 조그만 관습에 속박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고을마다 그 관습이 다르며 관리의 임무도 각기 다릅니다. 그러므로 작은 일을 돌아보다 큰 일을 잊으면 반드시 해를 입기 마련이고 의심하여 머뭇거리면 반드시 후회하게 마련입니다. 결단을 내려 실행하면 귀신도 길을 비키며 반드시 성공한다고 합니다. 결단을 내리십시오."

    호해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 천자의 승하도 공표되지 않았고 장례도 치르지 않았는데, 어찌 이러한 일을 승상에게 의논하겠소? 호해가 흔들리고 있음을 알아챈 조고는 채근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각을 다투는 일입니다.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마침내 호해가 머리를 끄덕이자 조고는 승상의 찬성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제가 승상을 만나보지요.라고 말하고는 곧 이사를 만났다.

    주상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장자에게 유서를 내려 함양에 와 유해를 맡으라고 한 것은 그를 후사로 세운 것이오. 그러나 유서를 보내기 전에 주상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소. 지금 유서와 옥새는 모두 호해가 가지고 있는데 이제 태자를 정하는 일은 당신과 나의 손에 달려 있소. 어떻게 해야 좋겠소?

    그러자 이사가 버럭 화를 냈다.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이것은 신하들이 논의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승상께서는 몽염과 비교하여 누가 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또 업적의 크기와 계책이 원대하고 실수하지 않는 점에서 그리고 부소와의 신뢰 관계에서 누가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오?

    모든 면에서 내가 부족하다. 그런데 왜 그런 것을 묻는가?

    나는 본래 환관으로 비천한 몸이나 다행히 등용되어 20년 동안 궁전에서 일을 하였소. 그러나 그간 진나라에서는 승상이나 공신이 면직되고 나서 그 직위가 자손 대까지 유지된 것을 보지 못하였고 결국 모두 처형되고 말았소. 부소는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사람을 신뢰하는 사람이오. 그가 즉위하면 반드시 몽염을 승상으로 기용할 터인데 그때 승상께서 무사히 고향에서 사실 수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소. 내가 호해를 가르치고 법사(法事)를 익히게 한 지 몇 년이 되었는데 그는 인자하고 돈독한 성품으로 재물을 아끼지 않으며 인재를 중히 생각하는 사람이오. 마땅히 후사로 삼을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오. 한번 잘 생각해 보시오.

    그러나 이사는 여전히 단호했다. 그대는 그대의 위치로 돌아가고 나는 군주의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명을 들을 것이지, 어찌 우리가 결정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조고도 물러서지 않고 다시 말하였다. 평안함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고 또 위태로움을 평안함으로 바꿀 수도 있소. 평안함과 위태로움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어찌 승상을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소?

    나는 한낱 시골뜨기에 불과했지만 주상의 은덕으로 자손까지 모두 높은 지위와 많은 녹을 누리고 있다. 어찌 그 은혜를 배반할 수 있는가? 그대는 두말하지 말라! 내가 죄를 지을까 두렵다.

    그러나 조고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성인은 고정된 규범에 따르지 않고 때와 변화에 잘 대처하며 끝을 보면 처음을 알고 처음을 보면 끝을 안다고 했소. 지금 천하의 운명과 권력은 호해 공자에게 있소. 서리가 내리면 초목이 시들고 얼음이 풀리면 만물이 소생하는 것이오. 아직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오?

    진(晋)나라는 태자를 바꾸어 3대에 걸쳐 안정을 얻지 못했고, 제나라 환공의 형제들은 왕위 다툼으로 모두 죽임을 당했으며, 은나라 주왕은 친척들을 죽였기 때문에 마침내 망했던 것이다. 이 모두 하늘을 거역했기 때문이었다. 내 어찌 그런 음모에 가담할 수 있겠는가?

    상하가 협력하면 영원히 번영을 누리고 안팎이 하나가 되면 의혹이 생길 리 없소. 당신이 찬성만 하면 자손만대까지 부귀를 누리고 반드시 왕자교(王子喬)나 적송자(赤松子)³⁷)와 같은 장수(長壽)를 얻을 것이며 공자나 묵자와 같은 현인으로 추앙받을 것이오. 그러나 만일 거절하시면 자손까지 그 화가 미칠 것이오. 유능한 사람은 화를 복으로 바꿀 줄 아는 법이오. 어느 쪽을 택하시겠소?

    37) 두 사람 모두 전설상의 신선이다.

    이사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탄하고 눈물을 흘렸다. 아! 난세에 태어나 이미 죽을 수도 없으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다는 말인가! 이사는 마침내 동의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호해, 조고, 이사는 시황의 유언을 승상이 받았다고 꾸며 호해를 태자로 세운 후 다시 부소에게 내리는 조서를 만들었다.

    〈짐은 천하를 시찰하여 명산의 신들에게 제사지냄으로써 장수를 빌고 있다. 그런데 부소는 장군 몽염과 함께 수십 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변경에 주둔한 지 10여 년이 지났건만 한 치도 진격하지 못한 채 병사들만 잃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여러 차례 글을 보내 짐이 하는 일에 불손한 비방을 일삼고 태자가 되지 못함을 밤낮으로 원망하고 있다. 부소는 자식으로 불효한 자다. 이에 하사하는 칼로써 자결하라. 또한 장군 몽염은 부소와 함께 지내면서 그의 잘못을 고쳐주지 못했으니 그 음흉한 음모를 짐작할 수 있다. 참으로 불충한 신하이다. 따라서 자결을 명한다. 군의 지휘는 부장 왕리에게 위임하라.〉

    그들은 이 조서를 황제의 옥새로 봉인한 후 호해의 식객을 시켜 부소에게 전달하였다. 서한을 소지한 사자가 도착하여 서한을 건네자 부소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내실로 들어가 자살하려고 했다. 그러자 몽염이 제지하였다. 폐하께서 궁전을 떠나 밖에 계시며 아직 태자도 세우지 않은 상태입니다. 폐하께서는 저에게 30만의 군사를 주어 변경을 지키게 하셨고 공자님께 감독을 맡기셨습니다. 지금 사자가 왔다고 자결하시려 하는데 그것이 진짜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한번 폐하께 확인해 보시기 바라옵니다. 확인한 후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자 사자가 자결할 것을 계속 재촉하였다. 천성이 착했던 부소가 몽염에게 말했다. 아버님께서 죽음을 명하셨는데 어떻게 확인을 요청할 수 있겠소! 그러고는 곧 자결하였다. 그러나 몽염은 자결을 결단코 거부했기 때문에 사자가 옥리에게 넘겨 감옥에 가두었다.

    사자가 돌아와 이 사실을 보고하니 호해, 조고, 이사가 크게 기뻐하였다. 그들은 즉시 함양에 도착하여 시황의 죽음을 발표하였고 호해는 2세 황제로 즉위하였다.

    사람을 많이 죽인 자가 ‘충신’으로 칭해지다

    어느 날 호해, 즉 2세 황제가 조고를 불렀다. 사람이 태어나 세상에 사는 것은 마치 여섯 마리의 말이 수레를 끌고 겨우 문틈 사이를 순식간에 지나치는 것과 같도다! 나는 이미 황제로 군림하고 있으니 좋아하는 것은 모두 하고 싶고 즐거운 것도 모두 해 보고 싶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그러자 조고가 말했다.

    그것은 현명한 군주만 할 수 있으며 어리석고 분별없는 군주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법을 엄격히 하고 처벌을 가혹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자는 연좌제를 적용하여 모든 일가친척을 죽여 없애고 궁중에서는 대신들을 없애며 폐하의 가족까지 멀리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시황제께서 임명한 옛 신하들은 모두 파면하고 폐하께서 신임하는 사람만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폐하는 베개를 높이 베고 마음껏 즐기실 수 있습니다.

    2세 황제는 조고의 말에 따라 엄격한 법을 만들어 죄를 지은 사람을 모두 조고에게 넘겨 처벌토록 했다. 그리하여 몽염 장군을 비롯하여 왕자 12명이 시장에서 공개 처형되었으며 공주 열 명이 기둥에 묶인 채 창에 찔려 죽었다. 그리고 여기에 연루되어 처형된 사람들만도 부지기수로 많았다. 왕자 고(高)는 도망치려 했으나 온 가족이 처형될까 두려워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시황제께서 살아 계실 때 신은 궁중에 들어가 식사를 하사받았고 나올 때는 수레에 태워 내보내 주셨습니다. 신은 마땅히 시황제를 따라 죽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으니 아들로서도 불효를 범했고 신하로서도 불충을 범한 것입니다. 신은 이제야 따라 죽고자 합니다. 바라옵건대 여산 기슭에 묻어 주십시오. 오직 폐하께서 가엾게 여겨 허락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이 글을 읽어 본 호해는 크게 기뻐하고 조고를 불러 그것을 보이며 물었다.

    무슨 음모가 있는 건 아닐까?

    그러자 조고가 웃으며 대답했다.

    자기 죽음도 걱정하기 바쁜데 어떻게 음모를 꾸밀 수 있겠습니까?

    호해는 10만 전을 하사하여 장례를 허가하였다.

    법과 형벌이 날로 가혹해지자 사람들의 불만은 커져 갔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사람까지 생기게 되었다. 더구나 아방궁을 짓고 황제의 전용 도로를 건설하여 세금은 엄청나게 무거워지고 군대 징발과 부역 징발은 갈수록 심해졌다. 드디어 진승과 오광 등이 난을 일으켜 산동 지방에서 봉기하고 여기저기서 호걸들이 일어나 왕을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켜 어느 때는 수도 근교까지 밀고 들어왔다가 격퇴되기도 했다. 이사는 2세 황제가 한가한 틈에 여러 차례 사실을 말하려 했으나 2세는 듣지 않고 오히려 책망할 뿐이었다.

    나는 나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소. 옛날 요임금은 문지기의 생활보다 가난하게 살았으며 순임금은 너무 열심히 일해 손과 발이 거칠게 굳었고 얼굴은 검게 타 결국 외지에서 죽었다고 들었소. 그러나 이는 못난 사람이나 하는 짓이지 현자가 할 일이 못된다고 생각하오. 자기 한 몸의 이익도 찾지 못하는 자가 어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소? 나는 나의 뜻을 마음껏 펴고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하면서 영원히 즐기고 싶소. 더 이상 나의 일에 상관하지 말기를 바라오.

    이사의 아들 이유는 삼천의 태수였으나 진승, 오광의 반란군이 그 지역을 침략했을 때 진압하지 못했다. 겨우 장한 장군이 반란군을 몰아냈으나 이유의 죄상을 조사하는 사자가 삼천을 수 차 왕래하였고, 그들은 이사가 승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어떻게 도둑들이 이토록 창궐하도록 방치했는가를 비판하였다. 이사는 당황하여 2세에게 아부하는 글월을 올렸다.

    〈현명한 군주는 반드시 도덕을 보존하고 감독권을 엄격하게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군주는 홀로 천하를 지배하고 나의 간섭을 받지 않으면서 쾌락을 끝까지 즐기실 수 있습니다. 신불해(申不害)³⁸)는 ‘천하를 보유하고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면 이른바 천하를 자신의 질곡(차꼬와 수갑)으로 하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그릇되게 자기 몸을 수고롭게 하는 요임금이나 우임금 같은 경우가 이른바 질곡인 것입니다. 예부터 현자를 존중하는 것은 그 지위가 존귀하기 때문이며 못난 자를 미워하는 것은 그 지위가 비천하기 때문입니다. 또 한비자는 ‘자애로운 어머니에게서는 패륜아가 나오고, 엄격한 집에는 난폭한 노예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엄격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상앙의 법에 ‘길가에 재를 버리는 자는 신체의 일부를 자른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감히 재를 버리지 못하고 범죄를 저지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38) 신불해는 원래 정나라 천민 출신으로 법률을 배워 한나라의 재상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가 재상으로 재임한 15년 동안이 약소국 한나라의 유일한 전성기였다. 그의 저서는 『신자申字』로 불리는데 주로 군주를 섬기는 방법으로 이루어져 군주학의 서적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임기응변에 능했다고 후세에 전하는 것도 군주의 태도에 따라 그의 생각을 수시로 바꿨기 때문이다.

    가벼운 죄도 크게 다스리는 것은 명군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한비자가 ‘하찮은 베 조각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값비싼 금이 있어도 도둑이 훔쳐가지 않는다.’고 한 것은 사람들이 도덕적이고 도둑이 깨끗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법에 의해서 엄하게 처벌받기 때문입니다. 만약 처벌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이리 떼가 되고 도둑이 될 것입니다. 명군과 성왕이 오래도록 그 자리를 유지하고 권세를 가져 천하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것은 별다른 비법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독재를 잘하여 감독하고 반드시 엄하게 처벌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백성들이 죄를 짓게 되는 근본을 엄히 다스리지 않는 것은 성인의 참뜻을 살피지 못한 결과이니 군주로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근검을 실천하며 어질고 의로운 자가 조정에 있으면 군주는 마음껏 쾌락을 추구할 수 없으며, 직언을 잘하고 의리를 따지는 신하가 있으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고, 절개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열사의 행동이 칭송되면 음란한 즐거움을 맛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주는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을 멀리하고 홀로 법을 시행하며 감독하고 권력을 독점할 때 비로소 그 지위도 존귀해지고 권세도 높아지며 죽은 후에는 지혜로움을 칭송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신불해와 한비자의 통치술을 터득하고 상앙의 법을 제대로 실천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글을 읽은 2세 황제는 매우 흡족해했다. 이때부터 관리 감독 제도는 더욱 엄격해졌고,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는 관리는 ‘명리(明吏)’라고 칭해졌다. 2세 황제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관리 감독을 잘하는 자들이다.라고 말하였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 중 형벌을 받은 자가 반이나 되고 처형 받아 죽은 시체가 매일 길바닥에 쌓였다. 사람을 많이 죽인 자가 ‘충신’으로 칭해졌다.

    일찍이 조고가 낭중령(郎中令)일 때 그에 의해 살해되고 개인적인 원한으로 보복을 당한 사람이 많아 대신들이 입조하여 정사를 논할 때 자신을 비방할까 두려워 2세 황제에게 말했다.

    천자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신하들이 단지 그 음성만 들을 수 있고 그 얼굴을 보지 못하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래 천자를 짐(朕)이라고 칭하는 것입니다.³⁹) 또한 폐하께서는 아직 나이가 젊으시기 때문에 모든 일을 다 아실 수 없을 것이오니 혹시 대신들에게 실수라도 하시면 좋은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궁중에서 팔짱을 낀 채 법에 숙달한 저나 시중과 함께 기다리고 계시다 상소가 올라오면 저희들의 자문을 받아 처리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대신들은 감히 의심스러운 상소를 올리지 못할 것이며 천하는 폐하를 성군으로 칭송할 것입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이 세상의 번잡함을 피해 온갖 즐거움만을 만끽하며 영원한 삶을 누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39) 사실 원래 ‘짐朕’이라는 말은 조짐, 즉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징조라는 뜻이다.

    2세 황제는 조고의 계책대로 그 후 두 번 다시 조정에 앉아 대신들을 직접 만나지 않았으며 모든 일은 조고의 손에서 결정되었다.

    진나라의 폐허 위에 사슴 떼가 뛰노는 것을 보게 되리라

    조고는 이사가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는 소식을 듣자 그를 만나 부추겼다.

    지금 각지에서 도적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는데도 황제께서는 세금을 가혹하게 매기시고 아방궁을 지으시고 있소. 내가 말하려 해도 지위가 천하여 감히 하지 못하고 있는데 당신께서 하시는 것이 좋을 듯하오.

    이사가 그 말에 찬성하여 말했다.

    그대가 충신인 줄 이제 알 수 있겠소. 실은 나도 오래 전부터 아뢰고자 했지만 주상께서 조정에 나오시지 않고 깊은 궁궐 안에만 계시니 말씀을 전할 기회가 없었소.

    이에 조고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폐하께서 한가하실 때를 찾아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2세 황제가 술잔치를 베풀고 미희들을 앞에 앉혀놓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를 기다려 이사에게 연락하였다. 폐하께서 마침 한가하시니 말씀 아뢰오. 그러자 이사가 급히 달려와 접견을 청했다. 이러한 일은 여러 번 되풀이되었다. 마침내 2세 황제가 크게 화를 냈다. 내가 한가할 때가 많고도 많은데 승상은 오지 않더니 꼭 내가 쉬고 즐거움을 가지려 할 때마다 나를 귀찮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나를 어리다고 깔보는 건가, 아니면 괴롭히려고 작정했다는 말인가?

    조고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이사를 비방하였다. 참으로 위험한 징조입니다. 지난날 폐하와 신 그리고 승상이 함께 일을 꾸몄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황제가 되었으나 승상은 신분이 더 이상 높아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땅을 더 차지해서 왕이 되고자 하는 듯합니다. 폐하께서 신에게 묻지 않으셔서 가만히 있었습니다만, 승상의 장남 이유는 진승의 반란군이 공공연히 그가 맡은 지방을 지나갈 때도 그냥 방치했었습니다. 신이 듣기로는 진승의 고향이 바로 승상의 고향 근처이기 때문에 눈감아줬다는 것이며 더욱이 이유가 반란군과 비밀문서를 주고받은 일까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습니다. 특히 승상은 궁궐 밖에 살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그의 권세가 폐하보다도 더 높은 실정입니다.

    2세 황제는 이 말을 듣고 이사를 처벌하기로 작정하여 우선 그의 아들 이유가 반란군과 내통한 사실 여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사가 이 사실을 알고 즉시 2세 황제를 만나고자 했으나 황제가 궁전에서 씨름 경기와 연극을 즐기고 있어 만나지 못하고 대신 글을 올려 조고를 비판하였다.

    〈‘신하가 군주와 위아래가 없게 되면 위태롭지 않은 나라가 없고, 처첩이 주인과 위아래가 없게 되면 위태롭지 않은 집이 없다.’고 합니다. 지금 폐하 곁에는 폐하와 전혀 차별이 없이 자기 멋대로 권세를 휘두르는 신하가 있습니다. 이전에 자한(子罕)은 송나라 재상이 되자 직접 형벌권을 쥐고 권세를 부리더니 결국 1년 후 그 군주를 내쫓았습니다. 또 제나라의 전상은 간공의 신하였으나 재산이 왕실을 능가했고 벼슬도 따를 자가 없었는데 결국 간공을 살해하고 나라를 탈취했습니다. 지금 조고는 못된 뜻을 품고 위험한 반역의 행동을 일삼고 있어 마치 자한이 송나라 재상을 지낼 때와 같고 또한 재산도 전상을 능가할 정도입니다. 폐하께서 즉시 조치하시지 않는다면 그가 변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2세 황제가 글을 읽고 이사를 불렀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조고는 본래 환관 출신인데 행실이 깨끗하고 착한 일에 힘쓰며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여 현재의 지위를 얻었소. 그래서 충성으로써 승진하고 신의로써 지위를 지키므로 짐은 그를 현명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믿고 있소. 왜 그대가 그를 의심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소. 짐은 어린 시절에 부친을 잃고 아는 것이 적어 백성을 다스리는 데 익숙하지 못하오. 또한 그대마저 노경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짐이 조고를 믿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말이오? 그는 깨끗하고 부지런하여 아래로는 백성들의 실정을 알고 위로는 짐의 뜻을 잘 알고 있는 충신이오. 더 이상 그를 의심하지 마시오.

    그러자 이사가 말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조고는 본래 비천한 사람입니다. 도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탐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으며 이익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위세 부리는 것은 임금과 다름없이 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위험한 사람입니다.

    2세 황제는 이미 조고를 철석같이 신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사가 조고를 죽이지 않을까 걱정하여 몰래 조고에게 이 말들을 알렸다. 그러자 조고는 지금 승상의 걱정거리는 이 조고 한 사람뿐입니다. 조고가 죽으면 승상은 곧 전상 같은 행동을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드디어 2세는 명령을 내렸다.

    이사를 조고에게 넘겨 조사하도록 하라!

    이사는 체포되어 형구에 묶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해 마지않았다.

    "참으로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무도한 임금과 어찌 천하를 의논하리오! 옛날 걸왕은 관용봉을 죽이고 주왕은 비간을 죽였으며 오나라 부차는 오자서를 죽였다. 이 세 사람은 결코 불충한 신하가 아니었지만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것은 충성을 다했던 임금이 무도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지혜가 이 세 사람에 미치지 못하고 2세 황제의 무도함은 걸왕, 주왕, 부차보다 오히려 더하니 내가 죽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2세 황제의 다스림은 세상을 크게 어지럽히게 될 것이니 오직 그것이 걱정이다. 그는 형 부소를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여 충신은 죽이고 간신 조고를 귀하게 기용했으며 아방궁 건설에 백성들을 대규모로 노역시키고 있으며 천하에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있다.

    옛날 성왕들은 음식에도 절도가 있었고 수레를 타는 데도 일정한 한도가 있었으며 궁전을 짓는 데 있어서도 제한이 있었다. 그리고 공사를 할 때에도 경비가 많이 들어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2세 황제는 형제를 죽이고도 죄를 반성하지 않고, 충신을 살해하고도 뉘우치지 않으며, 대규모 궁궐을 지으면서 백성들의 피땀을 쥐어짜고 있다. 이 세 가지 일만으로도 천하의 인심은 이반되니 벌써 반역의 무리가 천하의 반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2세 황제는 사실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고 오직 조고만을 옆에 끼고 아첨과 아부 속에 묻혀 살고 있다. 내 반드시 반란군이 함양을 함락시키고 진나라를 멸망시켜 그 폐허에 사슴 떼가 뛰노는 것을 보게 되리라."

    이사, 7가지 죄를 지고 목숨을 잃다

    드디어 2세 황제는 이사가 아들 이유와 함께 모반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워 그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조고는 이사를 심문하면서 천여 번에 걸쳐 매질하고 고문한 끝에 마침내 이사가 반란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이사가 자결하지 않은 것은 실제 스스로 반란을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데다가 진나라에 공로가 있어 마지막으로 황제에게 글을 올려 호소를 하면 혹시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사는 옥중에서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신은 승상이 된 지 30년이나 되었습니다. 신은 진나라의 땅이 좁을 때부터 벼슬길에 올랐사오며 그때 진나라 땅은 겨우 사방 천리였고 군대도 수십 만에 불과했습니다. 신은 부족한 재능을 바쳐 법령을 만들고 똑똑한 신하를 뽑아 몰래 황금과 보물을 주어 제후를 설득하게 하였으며 또 정치와 교육을 정비했고 공적이 있는 용사들을 중용하였습니다. 그 결과 한나라를 위협하고 위나라를 약화시켰으며 연나라와 조나라를 평정하여 마침내 6국을 병합하고 그 임금을 사로잡아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이것이 신의 첫 번째 죄입니다.

    그 후에 영토는 좁지 않았으나 다시 북쪽으로 호족의 오랑캐를 물리치고 남쪽의 백월(百越)을 정벌하여 진나라의 위력을 과시했습니다. 이것이 신의 두 번째 죄입니다.

    대신을 존중하고 벼슬을 높여줌으로써 임금과 신하 사이의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신의 세 번째 죄입니다.

    종묘사직을 온전히 보전하고 가꿈으로써 황제의 어진 덕을 만천하에 밝혔습니다. 이것이 신의 네 번째 죄입니다.

    도량형을 통일시키고 문물제도를 천하에 보급하여 진나라의 명성을 드날리게 했습니다. 이것이 신의 다섯 번째 죄입니다.

    황제께서 시찰하시도록 도로를 만들고 관광 시설을 갖추어 황제를 섬겼습니다. 이것이 신의 여섯 번째 죄입니다.

    형벌을 너그럽게 하고 조세를 가볍게 하여 인심을 모으고 백성이 황제에게 죽음으로써 충성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신의 일곱 번째 죄입니다.

    신(臣) 이사가 이러한 죄를 지었으니 죽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황제의 크나큰 은혜를 입어 부족한 능력을 다하고 살아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이 충정을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이 글은 황제에게 올라갔지만 조고가 관리를 시켜 없애도록 하고 보고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어찌 죄수가 상서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조고는 자기 집의 식객 십여 명을 시켜 거짓으로 어사, 시중인 것처럼 꾸미게 하고 차례로 가서 이사를 계속 심문하게 했다. 이사가 사실을 밝히고 호소하면 가차 없이 매를 때렸다. 그러기를 수십 번, 드디어 2세 황제가 사람을 보내 이사를 심문할 때 이사는 전과 같은 줄 알고 아예 호소할 생각도 않고 반란을 계획했다고 말했다. 조고는 판결문을 올렸고 2세 황제는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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