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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탄생: 돈의 기원부터 비트코인까지 5,000년 화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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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탄생: 돈의 기원부터 비트코인까지 5,000년 화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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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기원부터 비트코인까지
파란만장한 5,000년 화폐의 역사

역사가 시작된 이래 모든 경제활동의 핵심에는 ‘돈’이 있었다. 물물교환에 불편함을 느낀 인류는 지불수단으로 화폐를 발명했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금융 시스템은 정교하게 발전해갔다. 돈의 형태도 조개껍데기부터 구리, 금, 은, 종이, 플라스틱, 가상화폐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거듭했다. 역사적으로도 돈을 지배한 자는 승자가 된 반면, 거기서 밀려난 자는 실패자가 되었다. 로마제국은 화폐로 강성해졌고, 대항해시대에 세계의 은화를 독점한 서양은 동양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17세기 네덜란드, 18~19세기 영국, 20세기 미국이 세계 패권 국가로 올라선 배경에도 막강한 화폐 권력이 있었다. 이제 전 세계는 글로벌 금융 위기의 진원지인 미국 달러를 대체할 세계 단일 통화를 꿈꾼다. 세계 단일 통화는 비트코인과 같은 디지털화폐 형태를 띨 것이며, 달러에 밀렸던 금과 은이 본위화폐로 귀환할 전망이다.
『돈의 탄생』은 문명의 발생과 더불어 태어난 돈이 어떻게 발전해왔고 미래 화폐는 어떻게 달라질지 파란만장한 5,000년 화폐의 역사를 살펴본다. 경제학뿐만 아니라 정치학, 역사학, 법학, 철학 등을 섭렵한 저자는 동서고금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거의 모든 돈의 역사”를 담아냈다.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돈의 역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독자라면 지적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은 물론, 미래의 화폐 흐름을 통찰하는 안목까지 키울 수 있을 것이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현대지성
Release dateMar 18, 2021
ISBN9791166812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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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의 탄생 - 먀오옌보

    01

    농업혁명

    기원전 9000년경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면서 기후는 점차 따뜻해졌다. 기후변화에 따라 인류도 수렵·채집시대에서 벗어나 정착생활을 하며 농사를 짓는 농업시대로 들어섰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전환기를 ‘농업혁명’이라고 부른다. 이때를 기점으로 인류는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넘어갔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새로운 도구의 발명과 토기 제작이다. 인류는 농사에 적합하도록 이전보다 훨씬 날카롭게 갈아 만든 돌낫, 긴 자루 톱니 낫, 맷돌, 절굿공이 등의 노동 도구를 발명했을 뿐 아니라 곡식과 물을 담을 수 있는 토기도 만들었다. 토기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논밭에 물을 대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고, 곡식을 저장하고 물을 길어 올리고 음식을 조리할 수 있게 되었다. 토기의 출현은 식사 방식을 개선하고 음식의 종류를 늘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세기 미국의 민족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인 루이스 헨리 모건(Lewis Henry Morgan, 1818년~1881년)은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토기 제작 기술의 출현이 생활을 개선하고 가사 노동을 편리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새로운 시대의 또 다른 중대한 기술 발전은 실을 뽑아 옷감을 만드는 기술의 발명을 통해 이루어졌다. 방직 기술은 입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을 뿐 아니라 어업 경제의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인류는 방직 기술을 이용해 더 좋고 더 많은 그물을 만들 수 있었다.

    생산도구가 발전하자 인류의 생산방식과 생활방식에도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 변화는 원시 농업과 원시 목축업이 각각 채집경제와 수렵경제로부터 분리되어 나오면서 시작되었다.

    인류는 오랜 세월 채집 활동을 통해 식물의 특성과 성장 법칙 및 재배 방법을 점차 터득하며 원시 농업의 기틀을 다져왔다. 세계적으로 농업의 발상지는 주로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중앙아메리카 세 지역으로 분류된다. 농업혁명은 서아시아의 두 강 유역에서 최초로 발생했다. 이 두 강은 터키 아르메니아고원의 토로스산맥에서 발원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가리킨다. 두 강 유역의 중하류 지역에는 평탄한 지세가 펼쳐져 있는데,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곳을 ‘두 강 사이’를 뜻하는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라고 불렀다. 봄철에 눈이 녹아 두 강이 정기적으로 범람하면 강에서 흘러내려온 토사가 퇴적했다. 메소포타미아는 이렇게 형성된 충적평야로 토지가 비옥해 재배업에 적합했다.

    바로 이곳에서 초기 형태의 농업 촌락 유적이 발견되었다. 최초로 발견된 곳은 이라크 북부에 있는 자위 케미(Zawi Chemi) 유적지인데, 형성 시기는 기원전 900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지에서 돌을 갈아 만든 절구, 절굿공이, 맷돌 등이 출토되었다. 기원전 8000년경에 형성된 팔레스타인 요르단강의 강변 나투프(Natuf) 유적지에서 출토된 도구도 돌을 갈아 만든 낫과 호미, 곡식을 으깨는 절구와 절굿공이 등이었다. 기원전 9000년~기원전 7000년경 이라크 북부 자그로스(Zagros)산 기슭에 있던 자르모(Jarmo) 유적지에서는 불에 구워 말린 진흙으로 만든 25채의 집터 침전물에서 많은 양의 보리, 밀, 기타 농작물의 씨앗이 나왔다.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지역은 벼, 좁쌀, 면화 농업의 발상지다. 태국과 중국 저장(浙江)의 허무두(河姆渡) 유적지에서 기원전 5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볍씨와 호미, 삽 등 마광(磨光)석기가 출토되었다. 이는 세계 최초로 발견된 재배 볍씨의 흔적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중국 시안(西安)의 반포(半坡), 허난(河南)의 페이리강(裴李崗)과 하베이(河北)의 츠산(磁山) 유적지에서 모두 기원전 6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불에 탄 낟알과 돌로 만든 절구, 낫, 칼, 호미, 삽 등의 도구가 발견되었다. 벼의 낟알도 중국에서 최초로 기원했다는 사실을 설명해준다. 지리적으로 남아시아에 있는 인도는 목화를 최초로 재배한 목화의 고향이다.

    중앙아메리카는 옥수수, 감자, 고구마 등 다양한 작물의 고향이다. 일찍이 기원전 5000년경에 멕시코에 거주하던 인디언들은 옥수수, 호박, 고추, 감자, 고구마 등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페루에 살던 인디언들은 기원전 3000년경에 콩과 오이를 재배했다.

    신석기시대에는 좀 더 뾰족하고 날카로운 포획용 도구가 만들어지면서 인류가 사냥할 수 있는 동물의 수가 증가했다. 인류는 사냥한 동물을 한꺼번에 다 먹을 수 없자 남은 동물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그 대상은 주로 온순한 동물이었다. 중석기시대에는 개와 면양을 길렀고, 신석기시대에는 그동안 순한 동물을 키운 경험을 바탕으로 돼지, 소, 말, 나귀, 낙타 등 대형동물을 길들여 가축으로 키웠다. 이때부터 원시 목축업이 생겨났다. 두 강 유역에서 발견된 기원전 9000년경의 유적에서 동물 뼈가 대량으로 출토되었고, 집에서 기르던 면양의 뼈는 물론 태어난 지 일 년 남짓한 새끼 숫양의 뼈도 발견되었다. 기원전 8000년에 속하는 간지 다레(Ganj Dareh) 유적지에서 발견된 동물 뼈 중 90퍼센트가 산양의 뼈였다.

    기원전 8500년경에 형성된 이라크 북부 카림 샤히르(Karim Shahir) 유적지에서는 돼지 뼈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이곳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최초의 양돈업 유적지이기도 하다. 중국 저장의 허무두, 산시(陕西)의 반파 등 유적지에서도 돼지, 닭, 개, 양, 물소의 유해가 나왔다. 이 유적들은 모두 신석기시대에 가축을 사육하는 일이 아주 흔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농업과 목축업이 발달하면서 인류는 처음으로 자연 산물에 온전히 의존하던 상황에서 벗어나 사료를 먹여 키운 가축을 통해 고기와 젖, 가죽을 얻었고, 가축의 노동력을 이용해 쟁기를 끌고 물건을 수송할 수 있었다. 이처럼 농업과 목축업의 탄생 및 발전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농업과 목축업은 모두 인류의 성장과 발전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한편 농업과 목축업의 발전은 새로운 노동 도구와 노동 방법을 발명하고 창조해내는 인류의 잠재력을 깨우기도 했다. 더불어 최초의 수학·의학·천문학 등이 출현했는데, 이런 과학기술 지식의 출현과 발달이 다시 농업과 경제의 발전을 대대적으로 촉진했다. 고대 두 강 유역에 살던 사람들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농서인 『농인역서(農人歷書)』를 편찬했다. 이 책에서 늙은 농부는 아들에게 관개용수를 절약하는 법, 가축이 밭을 짓밟지 않게 하는 법, 논에 찾아드는 새를 쫓아내는 법, 제때 작물을 수확하는 법 등 농경 기술을 꼼꼼히 알려주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이미 도랑을 파고 제방을 만들어 논밭에 물을 대는 법을 알고 있었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사람들은 거대한 수로를 만들고, 댐과 제방과 기타 건축물을 지었다. 당시 관개 기술이 비교적 발달해 국가 소유의 관개망을 전국적으로 이용했다. 국가의 중요한 책임 중 하나는 관개망을 유지·보수하고 새로운 관개수로를 만들고 기타 공공 공사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각 지역의 관개망은 모두 현지의 부락 공동체가 관리했다. 이 무렵 부락 공동체는 고대 농업사회의 토대를 이루고 있었다.

    중국은 기원전 3000년경에 이미 부계씨족사회로 진입했고, 금속시대로 이어지는 과도기를 맞이했다. 씨족사회 후반에 공공씨(共工氏) 부족이 제방을 쌓아 강물의 범람을 막는 방법을 찾아내고, 뒤를 이어 곤(鲧)과 우(禹)가 홍수를 다스렸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주족(周族) 부락의 수장 설(契)과 동이(東夷) 부락의 대비(大費)가 각각 경작과 목축에 능해 세상에 널리 이름을 알렸고, 백익(伯益)이 우물과 같은 농목업 시설을 발명하기도 했다. 하대(夏代)에 이르러 ‘음력’과 『하소정(夏小正)』(중국 선진[先秦]에서 집필된 기후 관련 저서―옮긴이)이 나왔다. 음력의 출현은 당시 농업기술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중국 양쯔강(揚子江) 중하류 지역에서 발견된 허무두 유적지에서 약 6,000점에 달하는 각종 물품이 출토되었다. 그 안에는 생활용품, 생산도구, 작은 장난감, 장식품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7,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대량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 약 6,000~7,000년 전에 이미 촌락 형태의 농업사회로 진입한 허무두인이 농업을 중심으로 목축업을 병행하면서 정착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농업혁명을 통해 인류의 생활 방식은 구석기시대의 이주 생활에서 신석기시대의 정착 생활로 점차 전환되었다. 정착 생활 방식이 자리 잡으면서 씨족사회를 형성했고, 나아가 사회적 분업과 물물교환이 생기면서 도시와 국가의 출현을 위한 경제·사회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농업혁명은 인류 문명의 발생을 촉진했다. 인류의 경제·사회 발전사를 공부하려면 반드시 상고시대에 발생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농업혁명부터 살펴봐야 한다.

    02

    사회 대분업

    위에서 말한 농업혁명이 인류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인류가 이미 기본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생산하고, 나아가 노동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더 많은 잉여 식량과 제품을 생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금속 기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호미로 땅을 갈던 원시적 농업에서 소에 쟁기를 걸어 밭을 가는 농업으로 대체되었고, 이를 통해 농업 생산도 전문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농업 생산에 적합한 지역에 거주하는 각 부락은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농업 부락을 형성했다. 이와 함께 목축업에 적합한 지역의 부락은 목축업 위주의 목축 부락을 만들었다. 농업 부락과 목축 부락의 전문적인 생산력은 농업과 목축업이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의존적인 양대 생산 부문이 되는 데 일조했다. 이것이 인류 역사상 나타난 ‘제1차 사회 대분업’인 농업과 목축업의 분리다. 엥겔스의 말을 빌리자면, 유목부락이 나머지 야만인 무리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회 대분업의 가장 큰 결과는 인류가 생산한 제품이 처음으로 노동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양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잉여 제품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농업 부락과 목축 부락 사이에 제품이 교환되기 시작했다. 특히 목축 부락에서 생산된 제품이 농업 부락의 제품보다 상대적으로 많았다. 그래서 목축 부락은 잉여 육류 및 유제품이나 잉여 모피를 자신들에게 부족하거나 얻기 힘든 제품으로 교환했다. 예를 들어 육류나 모피 등을 농업 부락에서 생산되는 곡물과 맞바꾸었다. 이런 식으로 물건과 물건을 교환하는 행위는 자신의 장점을 이용해 필요한 물품을 손에 넣는 일이었다. 이런 교환 형태는 사회의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점점 일상화되었다. 이 흐름을 따라 인류의 삶도 다채로워지고 생활수준과 삶의 질도 한 단계 높아졌다. 이것은 인류가 좀 더 성숙한 문명 세계를 향해 이미 나아가고 있다는 지표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인류는 대자연의 혜택에 의지하던 수동적인 원시생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농업과 목축업의 발전은 수공업의 발전을 촉진했다. 실제로 신석기시대에 물이나 물건을 담는 데 쓰는 도기를 만들면서 인류는 이미 수공업 시대를 열었다. 도기의 제조는 원시 수공업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류가 진정한 의미의 수공업 시대로 접어든 것은 광석 제련과 금속가공 기술을 사용하면서부터였다. 기원전 4000년경부터 기원전 3000년경까지 서남아시아, 이집트, 중국, 남유럽, 중유럽에서 앞다투어 구리를 제련하기 시작했다. 인류가 구리를 이용해 만든 최초의 물건은 고리, 팔찌, 목걸이와 같은 장신구였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구리로 그릇과 무기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차츰 알게 되었다. 기원전 3000년 중반에 이르러 인류는 청동을 제련하는 법을 배웠다. 최초로 청동을 사용한 곳은 두 강 유역과 인더스강 유역이었고, 기원전 2000년대에 이르러 이집트, 중국, 기타 일부 지역에서도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동과 주석의 합금인 청동은 단조가 쉽고, 순동보다 경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용해점이 낮다. 청동기시대에도 청동기는 석기와 병존했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의 인디언은 구리 도끼와 구리 끌을 만들 수 있었지만, 여전히 돌칼과 돌도끼 같은 석기를 사용했다. 이처럼 석기는 기나긴 역사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갔을 뿐 청동기의 출현과 동시에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인류의 발전 과정에서 이러한 관성적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은 늘 존재했다.

    야철 기술은 기원전 1000년경에 서아시아에서 처음 출현했고, 이후 남아시아, 북아프리카, 동남유럽 등지에서 연이어 나타났다. 철은 구리보다 훨씬 단단할 뿐 아니라 값이 저렴해 출현과 동시에 석기와 청동기를 빠르게 대체했다.

    앞서 말한 청동기와 철기 말고도 인류의 원시 수공업은 도자기 제조, 가죽 제조, 기름 짜기, 술 빚기, 배 만들기 등 갈수록 복잡하고 전문적으로 변했다. 특히 배나 술처럼 비교적 복잡한 과정과 기술이 필요한 분야는 이미 한 사람의 힘으로 완성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면서 ‘수공업’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독립적인 업종을 탄생시켰다. 이때부터 수공업과 농업이 분리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제2차 사회 대분업’이다.

    제2차 사회 대분업의 직접적인 결과는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상품의 생산이었다. 이 시기의 교환 행위는 이전보다 훨씬 복잡해져 다른 부락은 물론이고 자기 부락 내부로도 깊숙이 파고들었다. 한 부락 안에서도 서로 다른 노동에 종사하는 집단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수공업 기술을 가진 사람은 전문적인 수공업자로 자리를 잡았고, 기술이 없는 사람은 계속 농업이나 목축업에 종사했다. 그래서 부락 내부에서도 수공업자가 자신이 만든 수공 제품을 곡물, 옷 등 생활용품과 교환했다. 농업이나 목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양식, 모피, 육류 등을 도자기, 술, 장식품 등과 맞바꾸었다. 이때 수공업자와 다른 생산자 사이의 교환은 온전히 일대일로 이루어질 뿐, 중간에 중개인이 끼어 있지 않았다. 자신의 생활과 생산을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을 물물교환하는 자발적인 행위였으므로 이윤이나 차익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교환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의 수요가 다르다 보니 필요한 물건과 교환하는 일은 직접 생산할 때보다 더 많은 난관이 뒤따랐다.

    예를 들어,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이 그릇을 생산했는데 그것을 필요로 하는 부락 주민이 아무도 없다고 가정해보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에 먹을 것마저 거의 다 떨어졌다. 이 상태면 식구들이 입에 풀칠하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도자기 장인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자기가 만든 그릇을 짊어지고 다른 부락으로 찾아갔다. 도착해보니 다행히 남은 식량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부락 사람들은 당장 도자기 그릇보다 삼베가 더 필요했다. 도자기 장인은 하는 수 없이 모든 것을 운에 맡긴 채 또 다른 부락으로 향했다. 다행히 그 부락에 사는 사람들은 도자기 그릇이 필요하던 차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삼베만 있을 뿐 여분의 식량이 없었다. 낙담한 도자기 장인의 머릿속에 불현듯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앞서 들렀던 부락에서 삼베가 필요하다는 말을 기억해냈다. 그는 곧바로 그릇을 삼베와 맞바꾼 뒤, 곡식은 남아돌지만 삼베가 필요한 부락으로 다시 찾아갔다. 그러고는 마침내 자신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곡식을 구할 수 있었다. 기원전 3000년대 고대 이집트 왕국 시절의 벽화에도 질항아리를 물고기와 바꾸거나 파 한 다발을 부채와 교환하는 등 물물교환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사회적 분업이 강화될수록 인류의 자급자족도 한계에 부딪혔고, 그럴수록 더 광범위한 교류와 소통이 필요했다. 게다가 부락마다 수요를 뛰어넘는 여분 생산물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런 상황이 그곳의 여분 생산물을 필요로 하는 다른 부락이나 개인의 수요와 맞바꾸고자 하는 수공업자들의 생각을 부추겼다. 이들은 부락 간의 물물교환으로 욕망을 채우면서 상업의 서막을 열어나갔다.

    그러나 앞서 말한 물물교환 행위는 아직 상업 행위라고 할 수 없었다. 진정한 상업은 생산자와 수요자가 직접 만나 제품을 교환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교환이 빈번해지고 교환 지역이 끊임없이 확대되어 생산자와 판매자가 직접 만날 수 없게 되었을 때, 전문적으로 매매에 종사하며 교환을 조직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산 업종에서 떨어져 나와야 한다. 이런 식의 매입과 매도를 통해 교환 행위에 전문적으로 종사해야 비로소 상업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상업이 출현하면서 제품 생산에 종사하지 않지만 제품 교환에 종사하는 계층, 즉 상인의 존재가 만들어졌다. 상인의 출현은 ‘제3차 사회 대분업’을 의미했다.

    제3차 사회 대분업으로 인류는 물물교환의 원시적 형태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다. 사회 대분업의 협력 모델이 계속 정비되고 발전하면서 각 업종에서 만들어낸 사회적 부의 수량과 종류도 전보다 훨씬 증가했다. 이쯤 되자 인류는 제품의 교환 행위를 위해 더 편리하고 빠른 방법과 매개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03

    북적이는 장삿길

    기원전 5000년경 고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주민은 도자기 만드는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이 만든 도자기 제품은 당시 사람들이 일상에서 주로 사용하는 술잔, 기름통, 난로, 등잔 등이었다. 도자기 제조업은 두 강 유역의 중요한 수공업 분야 중 하나였다. 도자기 제조 외에도 두 강 유역의 주민들은 일찌감치 유리를 만들 수 있었고, 그중에는 알록달록한 유리 제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청동 제련 기술도 발명해 2톤 가까이 되는 청동 주물을 제작했을 뿐 아니라 도끼, 톱, 칼, 검 등 도구와 무기도 만들었다. 그러나 두 강 유역에는 구리 광산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무역이나 전쟁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부터 구리 광석을 들여와야 했다. 아르메니아 산간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철을 제련했다. 최초의 철광석은 우주 공간에서 날아온 운석일 가능성이 크다. 청동기가 철기로 점차 대체되었고, 석기는 두 강 유역에서 점차 모습을 감추었다.

    두 강 유역은 도자기 외에 방직품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이곳 사람들은 방직품을 자신들에게 부족한 금속 광산물이나 목재와 교환했고, 이들이 만든 아마와 양모 방직품은 서아시아 등지로 멀리 팔려 나갔다.

    기원전 19세기에 세워진 고대 바빌로니아왕국의 수공업도 매우 발달했다. 이 시기에 이미 수공업자를 고용해 상품을 대량 생산하는 공방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고대 바빌론의 수공업은 방직, 벽돌 제작, 가죽 공예, 보석 공예 등 수십 개의 영역으로 분류되었고, 각 업종에 고용된 사람들은 매일 보수를 받으며 일했다. 바빌론의 상업과 무역은 상당히 발달했다. 국내 무역에서는 주로 도시와 농촌 사이에 서로에게 필요한 농목축업 제품인 식품, 유류, 양피 등을 교환했다. 대외무역에서는 주로 곡물, 유류, 대추, 직물, 가죽, 항아리, 그릇 등을 수출하고, 금, 은, 구리, 돌, 목재, 소금, 노예, 향료, 염료, 각종 사치품 등을 들여왔다. 왕실과 사원에서 대량 무역을 독점했는데, 이들의 상업대리인을 ‘다무카’, 그의 조수를 ‘사마루’라고 불렀다. 상업대리인들은 나라의 세금을 관리하고 고리대금업에 종사했다. 당시 바빌론, 니푸르, 칼사 등은 모두 두 강 유역의 중요한 상업 중심지였다.

    기원전 16세기 고대 이집트의 수공업과 상업도 비교적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다. 이집트인은 돌을 가공해 도구, 기구, 무기, 예술품을 만들었다. 특히 돌을 쌓아 만든 피라미드와 신전은 고대 이집트의 건축 기술이 얼마나 앞섰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고대 이집트인은 납, 구리, 금, 철 등 금속 원료를 이용한 수공예 기술이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이미 목재를 가공하는 도구 세트를 발명해 가장 선진적인 목선을 제작하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인이 제작한 아마 제품의 씨실과 날실은 1제곱센티미터당 63×74개의 밀도를 가지고 있고, 와식(臥式) 방직기와 두 사람이 조작하는 입식(立式) 방직기를 사용해 폭이 넓은 천을 짤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에는 이미 수공업 작업장과 공장이 있었고, 각 공장에서 고용한 사람의 수가 20명 이상일 정도로 분업이 비교적 세분화되었다. 수공업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은 이집트의 자유인이거나 노예였다.

    사회적 분업이 갈수록 발달하면서 고대 이집트 각 지방 간 무역, 이집트 남부와 북부의 무역, 이집트와 다른 국가의 무역도 가속화되었다. 이집트와 이웃 나라의 무역은 해상뿐 아니라 육로를 통해서도 진행되었다. 이집트인은 주로 금속, 상아, 금제품, 목재, 방직물 등을 수입하고, 소맥, 삼베, 고급 도자기 등을 수출했다. 당시 고대 이집트의 해외무역은 동아프리카 일대를 아울렀다. 동쪽으로는 아랍해와 페르시아만, 북쪽으로는 지중해 연안, 남쪽으로는 누비아, 북쪽으로는 팔레스타인까지 이어졌다. 고대 이집트인은 증빙서류를 사용해 주문을 주고받는 서면계약을 만들어냈다.

    중국의 상업은 신농씨(神農氏)가 황제가 되던 시기에 시작되었는데, 그 근거가 『주역계사(周易繫辭)』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포희씨(庖犧氏)가 몰락하고 신농씨가 일어났는데 땅을 경작하는 이로움으로 천하를 다스리니 어찌 두루 이로움을 취하지 않았겠는가. 한낮에 시장을 열어 천하의 백성이 모여들고 천하의 물건이 거래되니 각자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었다.라고 쓰여 있다. 복희씨 시대에 중국에는 성읍이 있었는데, 이곳을 한 나라로 삼았다. 사람들은 성읍에 거주하며 그 주위를 담으로 둘러치고 ‘성(城)’이라 불렀다. 성 안에서 재물을 모아 거래하고 이를 시장이라고 지칭했다. 이때부터 성(城)과 시(市)가 결합해 ‘성시(城市)’, 즉 도시의 개념이 탄생했다. 도시에서 사람들은 여분 생산물을 저장해두었다가 필요한 사람이 나타나면 자신이 필요한 것과 맞바꾸었다. 이런 거래 방식을 통해 자신에게 없는 것을 구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좌상과 행상이 등장했다.

    복희 시대의 역사는 고고학상의 전앙소 문화와 대체로 엇비슷하며, 지금으로부터 약 7,000~5,000년 전에 해당한다. 복희 시대에는 원시 목축업이 크게 발전했고 원시 농업도 등장했다. 그 당시에 발명된 것들은 앙소 문화 시기 원시 문명의 굴곡진 반응이었다. 복희는 역사 시기의 문화적 상징이자 문화적 기호이며, 복희의 전설은 특정한 문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복희는 중국 민족이 우러러보는 인문의 시조이자 삼황(三皇)의 으뜸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500년 전 황제 시기가 도래했을 때 사회적 분업이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황제는 교통을 이롭게 하려고 마차를 만들고, 이수(隶首)는 계산을 이롭게 하려고 도량을 제정하고, 창힐(倉頡)은 교류를 이롭게 하려고 문자를 만들고, 누조(縷祖)는 방직을 이롭게 하려고 양잠을 보급하고, 호조(胡曹)는 복식을 이롭게 하려고 옷을 만들고, 적장(赤將)은 일용품을 이롭게 하려고 가구를 제작하고, 공고(共鼓)와 화적(貨狄)은 운수를 이롭게 하려고 배를 만들었다. 그야말로 다방면에 걸친 대발명이 이루어진 셈이다. 당시의 발명은 모두 상업 발전과 번영이라는 기본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역사 발전의 관점에서 볼 때 황제 시기부터 중국의 첫 번째 계급 통치 국가 정권인 하대(夏代)에 이르기까지 400여 년 동안 중국의 사회경제 형태는 거대한 변화를 겪었다. 이런 변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중국이 이미 단순한 농경 사회에서 상공과 농경이 함께 발전하는 새로운 사회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거대한 변화를 일으킨 근본적인 동인은 상공업의 발흥이었다. 상공업이 발흥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원시적 농경 사회에서 상공과 농경이 함께 발전하는 문명사회로 진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하대의 건립도 상공업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회남자(淮南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요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 물가에 사는 자들은 물고기를 잡게 했고, 산에 사는 자들은 나무를 하게 했고, 계곡에 사는 자들은 목축업을 하게 했고, 육지에 사는 자들은 농사를 짓게 했다. 땅은 그 일에 맞게 쓰고 일은 그 환경에 맞춰서 하게 했으니, 연못이나 늪지대에서는 그물을 짜게 했고, 언덕의 비탈진 곳에서는 밭을 갈게 했다. 이렇게 해서 얻은 것은 필요한 것과 바꾸도록 했다.

    요나라 시대에 사회적 분업이 점차 규모 있게 변화하고, 각 업종 간에 서로 필요한 상품을 교환하는 일이 흔해졌다. 사람들은 자신이 잘 만드는 제품을 자신이 만들 수 없는 상품과 바꾸었다. 다시 말해, 각자의 재능을 이용해 원하는 바를 얻은 것이다.

    요의 후계자인 순(舜)은 동방에 거주하면서 일찍이 직접 밭을 갈고 물고기를 잡고 도자기를 만들며 지냈다. 순은 동이(東夷, 지금의 산둥)의 여러 부락으로 가서 분쟁을 해결했다. 그의 중재를 통해 동이의 모든 부락이 침범과 분쟁에서 벗어나 단결할 수 있었다. 이처럼 순은 생산한 토기의 품질이 떨어지거나 나쁜 물건을 좋은 물건처럼 속여 파는 문제를 해결해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는 각 부락을 연합해 대부락을 형성하고 스스로 추장이 되었을 뿐 아니라 도성을 건축했다. 자체 제작한 도자기 등 수공업 제품을 곳곳에 팔며 다른 부락과 거래했고, 나중에는 제품 교환을 편리하게 하려고 아예 부락의 중심(도성)을 부하(負夏, 지금의 허난성) 동부 푸양(濮陽) 근처로 옮겼다.

    이때 부락 우두머리가 종종 부락을 대표해 밖으로 나가 교환 활동을 했고, 순은 특히 그런 방면으로 일가견이 있었다. 더 많고 더 좋은 제품을 교환해 부락의 수요를 채우기 위해 자기 부락의 잉여 제품을 돈구(頓丘, 지금의 허난성 칭펑현 서남쪽)까지 운반해서 교환했다. 순은 제품을 비교적 많이 생산하는 지역에서 제품을 들여왔고, 이 제품을 물품이 부족한 지역으로 가져가 유리한 입지에서 더 많은 제품과 교환했다. 이 물품은 농수산물을 비롯해 수공업으로 제조한 각종 가정용 일상용품과 도자기 등이었다. 순 본인도 뛰어난 능력을 지닌 도기 장인이었다. 그는 도자기 제작 기술을 발전시켜 더 완벽한 도자기를 만들었고, 도자기를 생산하지 않는 돈구 등지로 운반해 더 많은 현지 상품과 교환했다. 심지어 제품을 먼저 가져간 뒤 다른 제품으로 상환할 수도 있었다. 이것이 바로 ‘외상 판매’와 ‘외상 구매’의 모태다. 외상 거래가 생기면서 ‘빚’의 개념도 나타났다.

    순은 해주에서 도자기나 농수산물 등을 팔고 생필품인 소금을 사들였다. 요의 계승자로 추대된 순은 부락의 중심을 염전이 있는 포주(蒲州, 지금의 산시성 융지현)로 옮기고 소금 생산을 대대적으로 늘렸다. 순은 오현금(五弦琴)을 만들어 연주를 즐기기도 했는데, 그가 연주한 「남풍의 시」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남풍이 불어오니 우리 백성의 노여움을 풀어줄 만하네. 남풍이 불 때는 우리 백성의 재물도 넘쳐나겠구나.

    도자기와 일상용품을 잘 만들던 순은 수공업의 발전을 매우 중시했다. 순의 지시를 받아 먹줄 등 목공 도구를 발명한 교수(巧倕)는 목공의 시조라 불릴 만큼 혁혁한 공을 세웠다. 순 시대에는 칠기를 제작해 물물교환에 이용하기도 했다.

    순은 황제 시기에 만들어진 도량형도 정비했다. 그는 제위에 오른 뒤 ‘도량형(度量衡)’을 ‘동률(同律)’로 만들기 위해 규칙을 반포했다. 다시 말해, 긴 자, 곡두, 저울추를 통일한다고 선포했다.

    순은 수해(水害)를 다스리기 위해 천하의 통치권을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치수 방면으로 천부적 재능을 가진 우(禹)에게 맡겼다. 우의 부친 곤(鯀)은 치수에 실패해 우산(羽山)으로 귀양을 갔지만, 우는 부친의 불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는 13년 동안 외지를 떠돌며 온갖 시련과 고초 속에서 구주(九州)가 서로 통하는 아홉 개의 길을 내고, 제방을 쌓아 아홉 개의 댐을 만들었다. 아홉 개의 산에 길을 뚫는 토목공사를 시작해 동서남북의 화물이 구주를 통해 사방으로 순조롭게 유통되도록 했다. 『사기(史記)』의 기록을 보면, 당시 제주(濟州)의 칠기, 누에, 금수, 청주(靑州)의 소금, 갈포(葛布, 칡껍질로 만든 직물), 해산물, 서주(徐州)의 꿩, 오동나무, 검은 비단, 양주(揚州)의 대나무, 새털, 귤, 형주(荊州)의 비단, 진주, 상아, 예주(豫州)의 비단, 삼베, 반석, 양주(梁州)의 은, 가죽, 담요, 옹주(雍州)의 옥, 보석, 모피가 아홉 개 길을 통해 천하의 중심인 기주(冀州)로 운반되었다.

    우는 ‘남는 것으로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경제정책도 수립해 구주가 서로 함께 나누며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어려움을 해소하도록 했다. 그럼으로써 사해가 하나 되고, 천하가 평안하고, 구족이 화목하고, 창고가 가득 찬 ‘화하(華夏)의 태평성세’ 시대가 열렸다. 다채롭고 광범위하다는 의미의 ‘화하’는 이때부터 중화민족의 통칭이 되었다. 광범위하고 위대한 업적에 힘입어 우는 ‘선양’의 전통을 깨고 천하의 통치권을 자기 아들 계(啓)에게 세습했다. 이로써 과거의 ‘공천하(公天下)’에서 벗어나 중국 역사상 첫 번째 ‘가천하(家天下)’, 즉 하왕조가 들어섰다. 하왕조는 제1대부터 제17대에 이르는 왕을 배출하며 470여 년을 이어 나갔다(기원전 2070년~기원전 1600년경).

    하대의 제품 교환은 이전보다 다소 발전했고, 제품 교환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이 시기에 주로 씨족 부락 간에 진행된 교환은 귀족이 주도해 자신의 부를 늘리는 수단으로 삼았다. 상(商)왕조 사람들의 조상인 왕해(王亥)는 하(夏)나라 때 소달구지에 비단을 싣고 직접 다른 부락으로 가서 무역을 하고 다른 중개인의 손은 빌리지 않았다. 하나라 시대에 부락에서 물건의 교환을 주도한 사람은 사무를 진두지휘하며 판매·운송·교환에 대량의 노예를 동원한 수령과 그 관리인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품 교환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자유 상인’이 등장하지 않았고, 그런 일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업종인 상업도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상인과 상업이 출현한 시기는 비교적 늦은 때인 노예사회 중기(상나라 시대 이후) 정도였다. 이것은 중국 상업 역사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다.

    일찍이 하나라 시대에 장거리 판매를 하는 행상이 등장했다. 전설에 따르면 상왕 탕(湯)의 제11대 조상 상토(相土)가 마차를 발명했고, 제7대 조상 왕해가 달구지를 발명했다고 한다.

    『시경(詩經)』 「상송(商頌)」의 기록을 보면, 상토는 위세가 당당하여 멀리 해외까지 평정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다시 말해서 상나라의 조상이 이미 먼 지역까지 나가 무역 활동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해는 직접 멀리까지 가서 장사했고, 황하 유역에서 역(易)씨 부락과 매매를 했다. 훗날 그는 무역 분쟁 때문에 역씨 부락의 군주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아들 상갑미(上甲微)가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역씨 부락을 무너뜨렸다. 이를 계기로 상나라 세력도 크게 강화되었다. 이때부터 상나라 사람은 왕해의 전통을 이어받아 주변의 작은 나라나 부락을 앞다투어 찾아다니며 장사했다. 왕해와 상나라의 토템 숭배도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왕해의 ‘해’ 자는 돼지 해(亥)와 새 조(鳥) 자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 토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초기 상나라 사람들이 새를 토템으로 삼았다는 사실과 후대 상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왕해의 지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왕해는 상나라의 대표적인 왕이다. 그가 활동한 지역은 남박(南亳)을 중심으로 하는 하남 상구(商丘) 일대였다. 이때 농업과 목축업은 상당히 발전한 상태였고 상업도 번성하기 시작했다. 왕해가 유역(有易)이라는 마을에서 크게 환영받았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중국 최초의 상인이었다. ‘상업(商業)’이라는 이름은 상나라 사람이 경영한 업종이라는 데서 기원했고, 상구는 중국 상업의 발원지였다. 왕해는 중국 상인의 시조 중 한 명인 셈이다.

    위에서 인용한 『시경(詩經)』의 기록에서 ‘해외’의 범주를 두고 누군가는 지금의 동해와 발해를 제외한 곳이라 말하고, 또 누군가는 뇌택(雷澤)과 거야택(巨野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해외’의 범주가 어찌 됐든 일찍이 하나라 시대에 상인들이 장사한 발자취가 이미 ‘바다 안팎’에 두루 다다랐다는 사실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하나라 시대에는 원시 도시도 이미 출현했다. 제품의 교환이 확대되면서 교환 장소인 ‘시(市)’도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노예의 주인들은 모여 사는 곳에 성곽을 짓고 도랑을 만들었으며, 성안에 귀족의 거주지와 궁전 건축물도 세웠다. 이는 폭도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본능에서 시작되었다. 이때 하읍(夏邑), 안읍(安邑), 양성(陽城), 양적(陽翟), 짐심(斟尋), 추구(帚邱), 짐관(斟灌) 등 성벽으로 둘러싸인 원시 도시(보루)가 출현했다. 하대 이전의 황하 중하류에도 작은 성이 곳곳에 만들어졌지만, 크기와 기능은 단지 성루에 국한되었을 뿐 도시의 규모는 아니었다.

    토템과 상업은 인류의 활동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새로운 생활방식과 향락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제품의 가치를 가늠하는 단위로 삼을 화폐의 탄생을 앞당겼다.

    04

    화폐의 탄생

    물물교환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지만 이에 못지않게 많은 어려움과 불편함을 안겨주었다.

    우선 물물교환 과정에서 물건의 가치를 계산하는 것이 지나치게 복잡했다. 거래에서 하나의 상품을 다양한 상품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양 한 마리를 쌀 40근이나 철 한 조각과 교환할 수 있었고, 가죽 한 장을 양 5분의 1이나 도끼 한 자루의 가치로 매겼다. 그런데 이런 계산은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정확도도 떨어져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불편함은 점차 제품 교환 속도에도 영향을 미쳤고 제품의 질도 떨어뜨렸다.

    물물교환은 거래의 실패를 초래하기도 쉬웠다. 예컨대 양과 도끼의 단순한 등가교환이라면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내가 가진 물건을 상대가 늘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므로 거래의 우여곡절이 따를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한 도공도 도자기를 곡물과 교환하려 했지만 도자기를 원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어렵사리 도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도 정작 그는 도공에게 필요한 곡물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처럼 물물교환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치고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지기 쉽다. 사회 발전이 빠르고 복잡해지면 상품의 교환 과정도 점점 복잡해지고 물물교환은 태생적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물물교환은 분쟁을 일으키기 쉽다. 만족스러운 물품으로 바꾸지 못했거나 쌍방이 교환하고자 하는 물품의 가치를 두고 이견을 보이면 거래의 실패와 분쟁으로 이어진다.

    물물교환은 결코 편리한 수단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기나긴 역사를 거쳐 왔다. 인류가 물물교환을 행한 기간은 화폐를 사용한 기간보다 훨씬 길었다. 이처럼 오랜 세월 물물교환을 통해 거래해오면서 사람들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대다수 사람이 선호하는 물건을 만들고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과 교환할 수 있어야 비로소 거래 성공률이 높아지고 물건의 직접적 교환으로 발생하게 되는 갈등과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계속되는 선별 과정을 거쳐 사람들은 수많은 상품 가운데 교환이 빈번하고 선호도가 높은 제품에 주목했고, 이런 제품을 이용해 모든 상품의 가치를 표현했다. 이것이 ‘일반 등가물’이다. 일정 지역 안에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주목받는 상품을 일반 등가물로 선정해 다른 모든 상품과 직접 교환할 수 있도록 했고, 그 결과 원래의 물물교환은 일반 등가물을 매개로 하는 상품교환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명확히 해야 할 문제는 일반 등가물과 화폐 사이의 관계다. 일반 등가물과 (훗날 사람들이 말하는) 화폐의 본질을 말하자면, 사실 두 가지는 실질적으로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일반 등가물은 그다지 안정적이지 않아 독립적인 지위를 얻지 못했다. 사실 복잡한 사회경제 안에서 두 가지를 엄격히 구분하는 일은 어렵다. 이 때문에 인류의 역사에서 고정적으로 일반 등가물의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화폐라 할 수 있다.

    상품 가치의 형식은 일반적 가치 형식 단계로 발전했고, 여러 종류의 상품이 일반 등가물의 역할을 담당했다. 예를 들어 가축, 가죽, 포목, 양식, 소금, 조개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물물교환 시대에 낫을 이용해 곡물과 방직품 등을 교환할 수 있었다. 상품의 교환이 갈수록 빈번해지고 발전하면서 곡물이 일반 등가물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정해졌고, 나중에는 구리 조각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광활한 영토를 지닌 고대 중국은 각 지역의 불균형한 경제 발전 때문에 일반 등가물이 다원적이었다. 부계사회로부터 하·상나라에 이르기까지 이미 수많은 상품이 일반 등가물의 역할을 했다. 가령 조개껍데기, 옥, 칼, 삽, 활, 화살, 가죽, 소, 말 등이 모두 각기 다른 지역에서 일반 등가물로 사용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떤 물품은 계산이 불편했고, 유통 과정에서 훼손되거나 지나치게 무거워 점차 사용되지 않았다. 그중 조개껍데기만 지속적으로 사용되었고, 상나라 시대에 중요한 일반 등가물인 화폐의 형식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개껍데기는 형태가 화려하고 광택이 흘러 사람들의 장식품으로 손색이 없었다. 한때는 아름다움의 상징이었고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며 행운을 가져다주는 물건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둘째, 바다에서만 나오는 조개껍데기를 육지 주민들은 교환을 통해서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중화민족의 발원지인 중원(中原) 지역만 해도 바다에서 나오는 조개껍데기를 얻기 힘들기 때문에 수집하고 감상하는 데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셋째, 조개껍데기는 하나하나 계산하기가 쉬웠고 견고하고 마모가 잘 되지 않아 휴대하기 편했다.

    따라서 세계적으로 수많은 민족의 역사를 돌아봐도 조개를 일반 등가물의 형태로 사용한 흔적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이 사용한 조개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는데, 가장 많이 사용한 조개는 ‘돈개오지(Monetaria moneta)’였다.

    지금으로부터 3,800년 전에 등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의 이리두(二里头) 유적지 무덤에서도 이미 조개가 발견되었다. 『염철론(鹽鐵論)』 「착폐(錯幣)」 편을 보면, 시대에 따라 화폐도 바뀌니 하나라 이후에는 검은색 조개껍데기를 화폐로 삼았다.라고 적혀 있다. 이 내용만 봐도 하나라 시대에 조개를 화폐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리두 문화 유적지 무덤에서 발견된 중국 최초의 화폐 형태인 조개

    실제로 중국은 순 시대에 이미 가장 원시적인 화폐 형태가 탄생했다. 화폐 형태의 탄생은 제품의 대량 교환이 가져온 결과였다. 교환이 많아지면서 물품의 귀천 개념도 점차 형성되었고, 교환가치의 형식은 이미 원래의 물물교환에서 일반 등가물의 단계로 발전했다. 당시의 일반 등가물(화폐)은 주로 조개였다. 마가요(馬家窯) 유적과 마창(馬廠) 유적, 제가(齊家) 문화 말기 유적과 용산(龍山) 문화 유적에서 조개 및 모조 골패, 석패, 방패 등이 대량으로 발견되었고, 이 조개와 모조품들은 이미 장식품이 아니라 화폐로 사용되었다. 조개는 바닷가에서 자라는 생물로, 그것을 꿰어 만든 장식품은 부와 지위를 상징하기도 했다. 조개는 가볍고 쉽게 얻을 수 없고(바다에서 인접한 곳에서만 얻을 수 있음) 비교적 단단해서, 파손되지 않고 부피가 작아 이동이 편하고 장식품으로 손색이 없기 때문에 인도양과 태평양 연안의 인도, 미얀마, 방글라데시, 태국 등에서도 조개를 화폐로 사용했다. 천연 조개는 중국의 황제와 요·순시대(신석기시대 말기)에 상품교환에 사용된 중국 최초의 화폐였다.

    조개 외에 주옥도 화폐로 사용되었다. 주옥은 원래 가치가 귀한 고급 장식품으로 개인의 소비 수량이 한정되어 있고, 먹을 수 없고, 부피가 작아 휴대하기가 간편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사용가치가 없어 일정 수량이 모이면 다른 물건으로 교환하기 위해 화폐로 사용하는 편이 나았다. 이런 화폐를 ‘상폐(上幣)’ 또는 ‘대폐(大弊)’로 불렀고, 상류층 사이에서만 유통되었다. 반면, 조개는 일반 등가물로 광범위하게 사용하기에 적합했다.

    화폐의 출현은 상업의 발전을 크게 촉진했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물물교환이라는 방식 대신 화폐를 제품 교환의 매개체로 삼았다. 조개는 크기와 색에 따라 대략 가치가 정해지고 그 가치에 맞춰 필요한 제품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제품을 얻기 위해 힘들게 사방으로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하나라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형태를 갖춘 화폐가 생겨났다. 하대의 화폐는 검은 조개였고, 상나라 상족(商族)과 남방 민족과의 교환을 통해 조개의 출처가 점차 늘어났다. 하나라에서는 보통 검은색 조개를 선별하거나 조개를 채색해 사용했다. 포폐(布幣), 도폐(刀幣)가 출현한 것은 상나라 시대 이후였다.

    상나라 시대에 이르러 화폐의 형태가 더 확실해졌다. 상나라 무덤에 시신과 함께 묻혀 있던 대량의 조개가 발견되기도 했다. 심지어 수천 개의 조개가 발견되는 경우도 있었다. 상왕 무정(武丁)의 부인 중 한 명인 부호(婦好)의 묘에 부장한 조개의 수는 무려 6,600여 개나 될 정도였다. 상나라 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조개 화폐는 작은 구멍이 한 개 또는 두 개가 뚫려 있거나 큰 구멍이 뚫려 있기도 하고 등이 닳아 있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조개 화폐가 지닌 가치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복사(卜辞, 은[殷]나라 시대에 점을 본 시간·원인·결과 등을 수골[獸骨]이나 귀갑[龜甲]에 새겨놓은 기록―옮긴이)와 상나라 시대 청동기에 쓰인 명문(銘文)에는 취패(取貝), 역패(易貝), 상패(賞貝), 수패(囚貝), 망패(亡貝)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역패’, 즉 ‘사패(賜貝)’는 상을 하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랫사람이 공을 세우거나 그의 집안에 초상이 났을 때 상급자가 하사하던 조개 화폐를 가리킨다.

    조개는 개수로 계산하는 것 외에 ‘붕(朋)’ 단위로도 사용되었다. 복사를 보면 개수로 계산한 100개, 600개 등의 표현이 나오고, 붕으로 계산한 2붕, 5붕, 7붕, 8붕, 10붕, 30붕, 50붕, 70붕 등도 등장한다. 1붕의 조개 개수는 보통 10개다.

    ▶중국 최초의 주화인 상나라의 동패

    중국 상나라 시대에는 해패(海貝) 외에도 석패(石貝), 골패(骨貝), 방패(蚌貝), 옥패(玉貝), 동패(銅貝) 등이 있었다. 그중 동패는 중국 최초의 주조 화폐일 가능성이 있다. 기타 각종 재질의 조개도 장식품이라기보다 화폐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심지어 바다 조개가 아닌 다른 재질을 가진 조개의 가치는 바다 조개보다 훨씬 높았을 것이다. 이런 조개는 가공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를 모조 조개라고 불렀는데, 그 가치는 천연 조개보다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 중에는 동패의 가치가 가장 높았을 것이다. 게다가 청동은 무게를 재서 가치를 확인하는 칭량(秤量)화폐가 분명했다.

    한자가 만들어진 시기는 조개가 화폐인 시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자 중 가치나 부의 의미를 지닌 글자에 ‘조개(貝)’가 많이 따라붙었다. 예를 들어, 재(財), 자(資), 대(貨), 귀(貴), 천(賤), 상(賞), 사(賜), 증(贈), 매(買), 매(賣), 보(寶), 가(價), 무(貿), 비(費), 관(貫), 진(賑), 공(貢), 하(賀), 저(貯), 사(賒), 임(賃), 영(贏), 잠(賺), 배(賠), 속(贖), 빈(貧), 탐(貪), 도(賭), 회(賄), 뇌(賂), 적(賊), 장(贓), 폄(貶) 등의 글자가 이에 해당한다.

    이런 기록으로 볼 때 중국은 적어도 하나라 시대(기원전 2070년~기원전 1600년)와 상나라 시대(기원전 1600년~기원전 1046년)에 이미 고정적인 화폐 형태가 생겨났고, 나라에서 직접 화폐를 발행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000년 사이에 중국에는 이미 국가에서 발행하는 화폐가 탄생했고, 국가의 화폐제도도 이 시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 볼 때 화폐제도와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18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고대 바빌로니아왕국의 함무라비가 세운 바빌론 왕조 기간에 등장한다. 함무라비는 재위 기간(기원전 1792년~기원전 1750년)에 사건을 심리하고 판결하기 위해 각국의 기존 법률 및 법령을 폐지하고 전국적으로 통일된 성문 법전인 ‘함무라비법전’을 제정하라고 명했다. ‘함무라비법전’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성문 법전으로, 함무라비가 즉위한 지 30년째 되던 해(기원전 1762년)에 반포되었다. 이 법전은 서두, 본문, 결론 세 부분으로 나뉘고, 282개의 법조문이 총 49단락, 3,500줄, 8,000여 자에 달하는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법전의 조항을 보면 계약과 손해배상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법전 제196조부터 제199조까지의 규정에 따르면 평민이 귀족의 눈을 쳐서 빠지게 하면 똑같이 평민의 눈을 빼고, 평민이 귀족의 뼈를 부러뜨리면 평민의 뼈도 부러뜨리도록 했다. 귀족이 평민 노예의 눈이나 뼈를 다치게 하면 노예 몸값의 2분의 1을 그 주인이 물어주어야 한다. 법전 제214조~제217조와 제221조~제223조의 규정에 따르면 의사가 안과 수술을 해서 병을 치료했는데 환자가 귀족이면 은 10셰켈(Sheqel)을 받고, 환자가 자유인(왕실 토지의 예속인 또는 외지인)이면 5셰켈을 받는다. 환자가 노예라면 그 주인에게 은 2셰켈을 받는다. 만약 의사가 귀족의 부러진 뼈나 상처를 치료했다면 5셰켈을 받고, 환자가 자유민이라면 3셰켈을 받는다. 환자가 누군가의 노예라면 그 주인에게 은 2셰켈을 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셰켈은 은의 계량단위다. 법전에서 타인의 신체에 상해를 입힌 행위에 대해 배상해야 하는 은의 액수가 명문으로 규정된 것만 봐도 당시 은이 이미 바빌로니아왕국의 법정화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셰켈은 바빌로니아왕국의 화폐인 은의 계량단위이고, 그 성격은 오늘날의 달러, 유로, 런민비(人民幣)의 위안(元)에 상당했다. 이처럼 적어도 기원전 18세기, 즉 지금으로부터 약 3,700년 전에 인류는 이미 법정화폐를 발명했고, 화폐의 계량단위를 명확히 정했다. 다만 당시의 화폐인 은에 대한 계량은 은의 길이와 중량으로만 계산했는데, 이는 지금과 비교했을 때 무게를 가늠하는 기준과 방식만 다를 뿐이다.

    ▶고대 서아시아 함무라비 시대의 은화

    고대 이집트왕조에서는 구리와 백은을 화폐로 사용했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7세기 고대 왕조 시대에 귀중품을 교환할 때 금고리나 동고리를 사용했다. 이는 이집트에서 최초로 금속을 상품교환의 매개물로 삼았다는 역사적 기록이기도 하다. 다만 당시 백은의 양이 비교적 적어 가격이 금보다 훨씬 비쌌고, 이런 교환 형식은 여전히 물물교환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4,800년 전에 고대 이집트에서 화폐를 발명했고 심지어 법정화폐가 출현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만한 충분한 증거도 아직 없다. 기원전 11세기 이집트 제21왕조(기원전 672년~기원전 525년)에 이르러서야 백은은 비로소 주요 교환 매개물이 되었고, 이때부터 나라에서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역사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요컨대, 세계적으로 볼 때 고대 중국과 고대 서아시아는 인류가 최초로 화폐를 사용한 지역이고, 적어도 기원전 18세기부터 국가에서 발행하는 통일된 화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05

    동서양의 화폐 기원론

    동양의 화폐 기원론

    고대 중국을 돌아보면 화폐의 기원론을 두고 다양한 관점이 존재해왔다. 그 내용을 종합해보면 다음의 몇 가지 가설로 나눌 수 있다.

    ① 백성 구제설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인 기원전 6세기 주경왕(周景王) 21년(기원전 524년), 서주(西周)의 경사(卿士) 단기(單旗)가 주경왕의 화폐 주조를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예로부터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 선왕이 화폐를 만들어 물건의 가치를 가늠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데 이용하였습니다.

    『관자(管子)』에서는 백성을 어떻게 구제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관자(管子)』 「산권수(山權數)」에서 이르길, 상나라 탕 임금이 다스릴 때 7년 동안 가뭄이 들고, 하나라 우 임금이 다스릴 때 5년 동안 큰 홍수가 나서 백성이 먹을 것이 없어 자식을 파는 사람마저 생겨났다. 탕 임금은 장산(庄山)의 금속으로 화폐를 주조해 백성 가운데 먹을 것이 없는 이들을 구제했다.라고 했다. 이것이 단기가 말한 ‘백성 구제’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우·탕 시대까지 화폐 주조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중국 최초의 주화는 서주 시기(기원전 1122년~기원전 771년)에 만들어졌다. 당시에 이미 삽 모양의 원시적 주화가 있었는데, 훗날 그것을 ‘원시포(原始布)’라고 불렀다. 중국 원시 주화와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그래서 『관자』에서 우·탕 시기에 주화로 ‘백성을 구제’했다는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화폐가 구황에서 비롯되었다는 이론은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셈이다.

    ② 상품유통설

    중국 고대에는 화폐가 상품의 유통 과정에서 생겨났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마천(司馬遷)은 농업, 공업, 상업의 상호 교역이 이루어지면, 귀(龜), 패(貝), 금(金), 전(錢), 도(刀), 포(布) 등과 같은 화폐가 바로 흥기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화폐가 상품의 유통 과정에서 저절로 생겨나며 선왕이 창조한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하대에 이미 주화가 나왔다고 믿었다. 이때는 고신씨(高辛氏) 이전 시대다. 고신씨는 중국 상고시대 오제(五帝) 중 한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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