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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계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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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계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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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블런 효과’로 불리는 소비 심리 이론을 제시한 명저
과시적 소비 현상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비판한 경제학 고전

이 책은 ‘현대지성 클래식’ 24권, 소스타인 베블런의 대표작 『유한계급론』 완역본이다. 베블런은 이 책을 통해 당대 주류 경제 이론인 수요와 공급 법칙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당시 경제학자들은 수요와 공급이 반비례 관계에 있다고 주장했지만 베블런은 다르게 생각했다. 유한계급, 즉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은 재산을 명성과 동일시하며, 자신의 명성을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비싼 물건을 망설임 없이 구입한다. 베블런은 이러한 현상을 근거로 물건의 가격이 올라도 수요가 늘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베블런의 식견과 주장은 당대는 물론이고, 오늘 우리 사회에 더 정확하게 적용된다. 이처럼 베블런의 분석과 주장은 참신하고, 예리했으며, 시대를 앞섰다. 그의 주장은 ‘베블런 효과’라는 경제학 용어로 압축되어 소비로 자신을 규정하고 과시하는 오늘 우리의 과시적 소비 심리와 낭비 행태를 꼬집을 때 인용되고 있다. 독자들은 자본주의 경제제도의 모순을 비판한 이 책을 통해 사회를 더 깊이 바라보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현대지성
Release dateOct 1, 2018
ISBN9791187142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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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한계급론 - 소스타인 베블런

    제1장

    서장

    유한계급¹이라는 제도는 야만적 문화의 후기 단계에 이르러 가장 잘 발달이 되었다. 예를 들어, 중세 유럽이나 중세 일본이 좋은 사례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계급간의 구분이 아주 엄격하게 준수되었다. 이런 계급 구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유의미한 특징은, 각각의 계급이 담당하는 일을 아주 엄격하게 구분한다는 것이다. 상류 계급은 관례에 의하여 생산 업무로부터 면제되거나 제외되며, 그 대신에 상당한 명예가 따르는 일을 하게 된다. 중세 사회의 명예로운 일들 중에서 으뜸을 든다면 전쟁에 나가는 전사戰士이고, 그 다음은 종교 업무에 종사하는 사제직이다. 만약 야만 사회가 전쟁을 주로 하지 않는 사회라면 사제직이 유한계급 업무의 으뜸이 되고 전사는 그 다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전사든 사제든 상류계급은 생산직에 종사하지 않으며 이러한 노동 면제는 그들의 우월한 지위를 경제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이다. 야만사회에서 이러한 일반 원칙은 거의 예외 없이 유지된다. 브라만이 사회 계급의 꼭짓점에 있던 인도는 이 두 계급이 완전히 생산 노동으로부터 제외되어 있었다.

    1 유한계급有閑階級: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소유한 재산으로 소비만 하는 계층.

    야만적 문화의 후기 단계에 도달한 사회에서는, 폭넓게 말해서 유한계급이라고 불리는 계급 내에 상당히 분화된 하위 계급들이 있었다. 유한계급이라 하면 전반적으로 보아 귀족과 사제 계급, 그리고 그들의 수행원 상당수를 의미했다. 따라서 이 계급의 직업도 분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생산직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생산직에 종사하지 않는 상류 계급의 직업은 대체로 말해서 통치(정부 관리), 전쟁(전사), 종교적 예배(사제), 스포츠(사냥) 등이었다.

    야만문화의 초기 단계와 업무의 분화

    야만 문화의 초기 단계에서(하지만 첫 시작 단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유한계급은 덜 분화된 형태로 존재했다. 계급 구분도 직업상의 구분도 세밀하거나 복잡하지 않았다. 폴리네시아 섬 주민들은 이런 발전 단계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그 섬에는 커다란 사냥감 짐승들이 없었으므로, 사냥은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명예로운 일의 지위를 누리지 못했다. 사가Saga(중세의 북유럽 영웅 전설)가 만들어지던 아이슬란드 사회도 그런 사례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에서 계급 간 구분은 엄격했으며 각 계급이 담당하는 업무의 구분도 철저했다. 육체 노동, 생산직, 생계를 위한 일상생활 중의 일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일 등은 전적으로 하층 계급이 담당하는 것이었다. 이 하층 계급은 노예, 하인, 그리고 모든 여성을 포함했다. 귀족제가 발달되어 있다면 높은 신분의 여성들은 생산 업무에 종사하지 않거나 적어도 각종 육체 노동은 하지 않았다. 상류 계급의 남자들은 생산직에 종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 관습상 그런 일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런 일은 통치, 전쟁, 종교적 예배, 스포츠 등이었다.

    이 4대 활동이 상류 계급 남자들의 주된 일상생활 중 행위였고 아주 신분 높은 사람들 ― 가령 왕이나 족장 ― 은 사회적 상식과 관습에 비추어 오로지 이 활동만 해야 되었다. 이런 생활양식이 완전하게 정착된 사회에서, 최고위층에 속한 인사는 스포츠 행위를 하는 것이 다소 의심스럽게 여겨졌다. 유한계급의 하층부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다른 일도 할 수 있었지만, 그 다른 일이라는 것은 결국 4대 행위에서 부수되거나 파생되는 일들이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무기와 의복의 제작과 유지, 전쟁용 카누의 제작, 말·개·매의 훈련, 종교 행사에 필요한 도구의 준비 등이었다. 하층 계급의 사람들은 이런 부차적 업무에서도 배제되었다. 그들은 주로 생산직 일을 했고, 때때로 4대 행위와는 아주 희미하게 관련이 있는 생산 업무에 종사했다.

    우리가 이런 후대 야만 문화보다 훨씬 이른 시기의 야만 단계를 살펴본다면, 거기에는 잘 발달된 유한계급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 초창기 단계에서도 이미 유한계급이 생겨날 만한 관례, 동기, 상황 등이 존재하여 그 배아적胚芽的 상태의 성장 단계를 보여준다. 전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유목-수렵 부족들은 이런 업무 분화分化의 원시적 단계를 잘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북 아메리카의 수렵 부족들은 그 어느 부족이 되었든 좋은 사례가 된다. 이 부족들은 잘 규정된 유한계급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기능의 구분은 있었고, 그 구분을 바탕으로 한 계급의 구분은 있었다. 하지만 상위 계급이 아주 완벽하게 생산 노동에서 면제가 된 것은 아니어서 유한계급이라는 용어는 적용하기가 어렵다. 이런 유목 부족들의 경제적 수준에서, 경제활동의 분화는 결국 남녀 간의 활동 구분 정도였고, 그러한 구분은 차별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런 유목 부족 사회에서 여자들은 사회적 규범에 의하여 결국 생산직 업무로 발전되는 일만 했다. 반면에 남자들은 이런 천한 일로부터 면제되어 전쟁, 사냥, 스포츠, 종교 의식 등의 일만 했다. 이렇게 볼 때 남녀 간에는 아주 명확하게 일이 구분되어 있었다.

    이러한 노동의 분업은 후대 야만 문화에서 등장하게 되는 노동 계급과 유한계급의 구분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일의 다양화와 특수화가 진행되면서, 남녀라는 구분의 경계선이 결국 생산직과 비생산직의 구분이 되었다. 초창기 야만 단계에서 남자들이 했던 일은, 후대에 들어와 생산직이 생겨나는 모태가 되지 않았다. 남자들의 일은 나중 단계에 들어와 비생산적인 일, 가령 전쟁, 정치, 스포츠, 학문, 제사 등의 일로 발전했다. 이에 대한 예외가 있다면 어업漁業과, 위에 말한 4대 행위의 부수적 일들, 가령 무기, 종교적 도구, 스포츠 용품 등의 제작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모든 생산적 업무는 사실상 원시 야만 공동체에서 여자들의 일이 발전된 형태이다.

    초창기 야만 문화에서 남자들의 일은 여자들의 그것 못지않게 공동체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남자들의 일은 식량 조달과 기타 생필품 마련이 주된 일이었다. 실제로 이런 생산적 특징이 너무나 현저하여, 전통적인 경제학 책들은 사냥을 원시적 산업의 한 가지 유형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야만인들은 이 문제를 그런 식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 야만인 남자의 눈으로 볼 때, 그는 노동자가 아니며 따라서 여자와 함께 분류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일이 여자들의 천한 일, 노동, 생산업 등과 같은 것으로 분류되어 남녀의 일이 혼동될 정도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모든 야만 사회에서는 남자의 일과 여자의 일 사이에 엄격한 구분이 있었다. 남자의 일이 공동체의 존속에 기여하기는 하지만, 그 탁월함이나 효율성에 있어서 여자들의 사소하면서도 지루한 일과는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원시 문화의 더 앞선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 가령 아주 야만적인 부족들 ― 일의 분화는 그리 정교하지 않으며, 계급이나 일의 차별적 구분은 그리 일관된 것도 아니고 또 엄격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남녀 간이나 계급간의 구분이 거의 없는 완벽한 원시 야만 문화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원시 야만이라고 규정되는 집단들조차도 좀 더 발전된 문화적 단계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원시적 야만의 특징을 다소 충실하게 보여주는 몇몇 집단들 ― 이런 집단 중 몇몇은 퇴행의 결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 이 있다. 이 집단의 문화는 유한계급이 없다는 점과, 그 계급을 만들어 내는 공격적이거나 차별적인 마음이 없다는 점에서 다른 야만 사회와는 구분된다.

    그러나 경제적 위계질서가 없는 이런 원시 야만의 공동체는 인류 분포에서 거의 무시할 만한 정도이다. 이런 문화 단계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는 인도의 안다만 부족이나 닐기리 산간山間 지대의 토다 족이 있다. 이 인도 부족들은 유럽인들과 최초로 접촉하던 당시에 유한계급이 없는 사회적 특징을 보여주었다. 또다른 사례로는 예조의 아이누 족이나, 다소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몇몇 부시맨이나 에스키모 집단이 있다. 몇몇 푸에블로 공동체도 같은 범주에 넣어볼 수 있다. 이런 공동체들은 모두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중 대부분이 처음부터 계급 구분이 없었던 사회가 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라기보다, 발달된 야만 상태로부터 원시 상태로 퇴화된 경우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들 공동체는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원시적 주민들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유한계급이 없는 공동체

    이렇다 할 유한계급이 없는 이들 공동체는 사회적 구조와 생활 방식에서는 유한계급이 있는 공동체와 서로 닮아 있다. 그 공동체는 소규모 집단이지만 단순한(원시적) 구조를 갖고 있다. 그 사회는 대체로 평화롭고 정주적定住的이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개인의 소유권이 경제 제도의 주된 특징으로 확립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집단이 기존 공동체의 가장 작은 단위라는 얘기는 아니고, 또 그들의 사회 구조가 모든 면에서 전혀 분화되지 않았다는 뜻도 아니다. 이 공동체는 가장 평화로운 ― 아주 특징적으로 평화로운 ― 원시적 집단의 사람들을 포함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이 공동체들에게 공통되는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그 구성원들이 폭력이나 기만에 직면했을 때에도 온순하면서도 비효율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폭력과 기만의 원어는 force and fraud이다. 폭력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불법적 폭력violence과는 구분되는 것으로서, 개인의 신체적 힘이나 집단의 무력을 가리킨다. 기만은 우월한 입장에 있는 개인이나 집단이 상대방을 속여서 그의 재물이나 사람을 약탈해 오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유한계급의 약탈적 기질과 관련하여 이 두 특징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 : 옮긴이).

    아직 발전이 안 된 낮은 단계에 있는 공동체의 관습이나 문화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여준다. 즉, 유한계급의 제도는 원시 사회 단계에서 야만 사회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발전해 온 것이다. 다시 말해, 평화로운 생활 습관에서 지속적인 전쟁의 습관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지속적인 형태의 유한계급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조건이 필수적이다.

    (1) 그 공동체는 약탈적 생활 습관을 갖고 있어야 한다. 약탈적 행위는 전쟁, 커다란 짐승의 사냥 혹은 두 가지 모두를 가리킨다. 이 경우 배아기 상태의 유한계급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무력이나 전략으로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2) 생필품의 획득이 비교적 용이해져서 그 공동체의 상당수 구성원들이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노동으로부터 면제될 정도가 되어야 한다.

    유한계급은 아주 이른 시기에 여러 가지 일들을 서로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난 것인데 이로 인해 어떤 일은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다른 것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오래전의 구분에 의하면, 가치 있는 일은 약탈로 분류될 수 있는 일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반면에 가치 없는 일은 높이 평가되는 약탈의 요소가 전혀 없는 일상적인 일을 가리켰다.

    이러한 구분은 현대의 산업 공동체에서는 그다지 뚜렷한 의미를 갖지 못했고,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그 구분을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현대의 경제적 논의를 주도하는 상식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형식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현대 생활에서도 아주 일반적인 전제조건으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가령 우리가 육체노동을 싫어하는 것이 그 구체적 사례이다. 그것은 어떤 개인의 우월함과 열등함을 구분해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문화의 초창기 단계에서, 개인의 신체적 힘이 사태에 즉각적이면서도 명백한 위력을 발휘할 때, 약탈의 요소는 일상생활 중에 더 큰 힘으로 간주된다. 이해관계는 상당 부분 그 개인적 힘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이를 바탕으로 한 구분은 오늘날의 구분보다는 훨씬 더 강제적이면서도 결정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사회가 계속 발전함에 있어서 그런 구분(개인적 힘의 있고 없음)은 실질적인 것이고 또 아주 타당하고 일관된 근거가 되었다.

    사실들을 구분하는 밑바탕 근거는 그 사실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면 그에 따라 같이 바뀌게 된다. 이런 주변 사실들은 당대의 이해관계가 집중되는 뚜렷하고 실질적인 근거가 된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또다른 목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 구분은 무의미하게 보인다. 그러나 다양한 목적과 활동 방향을 구분하고 분류하는 습관은 언제 어디에서나 반드시 힘을 얻게 되어 있다. 인생에 통용되는 이론이나 적절한 생활양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런 습관이 필수적인 까닭이다.

    인생의 사실들을 분류하는데 아주 중요한 기준으로 활용되는 어떤 특정한 관점이나 기준은 어떻게 힘을 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사실들을 분류하는데 적용되는 이해관계가 어떤 것이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구분의 근거와 사실 분류의 통상적 절차는 문화가 성장하면서 발전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인생의 사실들을 이해하는 목적이 바뀌면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의 어떤 단계에서 어떤 사회 계급이나 활동이 뚜렷하고 결정적인 특징으로 여겨졌으나, 나중에 문화의 후대 단계에 이르면 그 계급이나 활동은 상대적 중요성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생산직과 비생산직의 구분

    그러나 기준과 관점의 변화는 어디까지나 점진적 과정으로서, 과거 한때 받아들여졌던 기준이나 관점이 통째로 폐기되거나 억압되는 일은 거의 없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생산직과 비생산직의 구분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런 현대적 구분은 야만 시대에 약탈하는 일(힘으로 빼앗는 일)과 천한 일을 서로 구분했던 것이 변용된 형태이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전쟁, 정치, 공공 예배, 공공 축제 등의 일은 생활의 물질적 수단을 얻기 위해서 하는 노동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현대에 들어와 생산과 비생산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초창기 야만 문화의 그것과는 같지 않지만, 그래도 생산을 기준점으로 하는 개괄적 구분은 여전히 통용된다.

    오늘날에 통용되는 묵시적이면서도 상식적인 구분은 이런 것이다.

    어떤 활동이 인간을 제외한 다른 물질 혹은 생물을 활용하여 뭔가 만들어 내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그것은 산업적(생산적) 활동으로 간주된다. 인간이 강제력(폭력)을 동원하여 인간을 활용하는 것은 산업적 기능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 외부의 환경을 활용하여 인간의 생활을 향상시키려는 활동은 산업적 행위로 간주된다. 고전적 전통을 이어받아 수호하는 경제학자들은, 인간이 갖고 있는 자연에 대한 힘이 산업적 생산성의 특징적 요소라고 주장한다. 자연을 제압하는 이런 산업적 능력은 모든 동식물과 자연 환경을 통제하는 인간의 힘을 가리킨다. 이렇게 하여 인간과 자연의 야생 동식물 사이에 구분선이 그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시대에, 다른 전제조건을 가진 인간들의 사회에서, 그들의 경계선은 우리가 오늘날 긋고 있는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원시 시대 혹은 야만 시대에, 그 경계선은 다른 장소에서 다른 방식으로 그어졌다. 야만 문화가 지배하던 모든 공동체에서는, 다음 두 가지 포괄적인 현상을 아주 분명하게 구분했다.

    (1) 야만인 자신도 포함되어 있는 현상.

    (2) 식량이 있는 현상.

    다시 말해, 식량이 야만인과 그의 주변 환경을 갈라놓는 경계선이었다. 또한 경제적 현상과 비경제적 현상도 명확하게 구분했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적 의미의 구분은 아니었다. 현대에서는 인간과 동식물 및 자연환경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서 구분했지만, 야만시대에는 생명 있는animate 사물인가 아니면 생명 없는inanimate 사물인가를 기준으로 구분을 했다.

    이렇게 설명하면 지나친 노파심일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야만인들이 사용한 생명 있는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살아 있는living이라는 단어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생명 있는이라는 단어는 반드시 살아 있는 것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그 외에 다른 많은 것도 의미했다. 가령 폭풍우, 질병, 폭포 같은 자연현상도 생명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반면에 과일이나 약초, 집파리, 구더기, 레밍, 양 등 사소한 동물들은 집단적으로 가리킬 경우를 제외하고는 살아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또한 이 단어(살아 있는)는 반드시 사물에 내재한 영혼이나 혼령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애니미즘을 신봉했던 야만인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 무섭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살아 있는 것의 범주에 들어갔다. 이러한 범주에는 다수의 자연 풍물과 자연 현상이 들어갔다. 이처럼 생명 있는 사물과 생명 없는 사물을 구분하는 것은 심지어 오늘날에도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어른거리고 있으며, 인생과 자연과정을 바라보는 이론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문화와 사상의 초창기 단계에서 애니미즘이 일생생활 중에 발휘했던 것 같은, 폭넓고 원대한 실제적 영향력이 오늘날 현대인의 일상생활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야만인의 눈으로 본다면, 움직이지 않는 자연이 제공하는 것을 잘 가공하여 활용하는 행위는 그(야만인)가 생명 있는 사물이나 힘에 대응하는 행위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생명 있는 사물과 생명 없는 사물의 구분선은 다소 막연하고 가변적인 것이지만, 그래도 그런 폭넓은 구분은 원시인의 생활양식에 영향을 줄 정도로 실제적이고 강력한 것이었다. 야만인은 생명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물들의 클래스(부류)에다, 어떤 목적에 연계된 활동을 결부시켰다. 바로 이런 목적론적 관점 때문에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생명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단순한 원시인이나 야만인이 자신을 방해하는 자연 중의 어떤 행위를 만나게 되면, 그는 자신이 즉각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의 관점으로 그것을 해석한다. 그 관점이라는 것은, 야만인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는 그 자신의 의식 속에서 즉각 떠오르는 관점을 말한다(야만인은 무서운 바람 소리를 들으면 자신의 분노하면서 소리치는 행위를 연상한다는 뜻 : 옮긴이).

    따라서 자연 중의 행위는 인간의 행위와 동화되고 살아 있는 사물에게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어떤 행동을 한다고 여겨지게 된다. 이러한 성격의 자연 현상 ― 특히 인간을 무섭게 하고 좌절시키는 현상 ― 은, 야만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비활성非活性 사물과는 다른 종류의 정신적 태도와 신체적 능력으로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자연현상에 성공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열심히 일해서 생산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인 약탈exploit의 차원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근면이 아니라 용맹성prowess이 발휘되어 얻어낸 결과였다.

    (약탈을 가리키는 원어인 exploit는 이 책에서 많이 나오는 중요한 용어이다. 야만인이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아 가지는 행위를 가리킨다.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를 저자는 때때로 용맹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야만인은 선사시대의 야만인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대 국가가 정립되어 법치가 완전히 제자리를 잡기 이전의 모든 시대의 사람, 즉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을 당연시하던 시대, 가령 중세의 사람도 함께 가리킨다 : 옮긴이).

    약탈과 노동의 구분

    활성活性과 비활성非活性이라는 이런 투박한 구분의 관점에서 본다면 원시적 사회 집단의 행위는 두 가지 분류로 나뉘는데, 현대식 용어로 말해 보자면 약탈exploit과 노동industry이다(저자는 이 책에서 산업, 생산, 노동을 때때로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 옮긴이). 노동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데 들어간 에너지를 가리키는데, 그 제작자가 수동적인 비활성 물질brute material로부터 뭔가를 만들어서 그 물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반면에 약탈은 그 행위자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는 행동이며, 을이라는 행위자가 전에 다른 목적으로 쏟아 부었던 에너지를 갑(약탈자)의 목적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비활성 물질은 야만인들이 그 물질에 부여한 심오한 의미를 그대로 간직한 상태를 말한다.

    약탈과 노동의 구분은 곧 남자와 여자의 구분과 부합한다. 남녀는 신장이나 완력뿐만 아니라 기질에 있어서도 아주 다르다. 이 때문에 아주 초창기부터 그에 부합하는 노동의 분업이 이루어졌다. 약탈에 해당하는 폭넓은 범위의 활동은 남자들의 몫이었다. 그들이 더 힘이 세고 덩치가 크고 갑작스럽고 난폭한 완력의 행사를 더 잘하고, 자기주장이 강하고 적극적으로 경쟁하고 공격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남녀 간의 덩치 차이, 생리적 특징, 기질적 차이 등은 원시 부족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주 오래된 원시 사회에서는 그런 남녀 간의 차이가 비교적 사소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던 듯하다. 이에 대해서는 인도의 안다만 부족이 좋은 사례이다.

    그러나 이런 신체와 기질의 차이에 바탕을 둔 기능의 구분이 일단 정착되자, 당초의 남녀 구분의 범위는 점차 넓어지기 시작했다. 일의 분업에 선별적으로 적응하는 과정이 점점 축적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야만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상당한 완력에 의한 대응을 필요로 하는 동식물이 많은 지역일수록 이런 구분이 촉진되었다. 덩치 큰 짐승을 정기적으로 사냥하려면 덩치, 민첩함, 맹렬함 등 남성적 기질이 필요했고, 이것이 남녀 간의 기능 구분을 더욱 촉진하고 넓혀놓았다. 그리고 한 집단이 다른 집단들과 적대적 관계에 돌입하면서, 이러한 기능의 분화는 약탈과 노동의 구분이라는 더욱 세련된 형태로 발전했다.

    이러한 약탈적 사냥꾼 집단에서 전투와 사냥은 당연히 튼튼한 몸을 가진 남자의 일이 되었다. 여자들은 그 이외의 나머지 일들을 담당했다. 남자의 일을 할 수 없는 다른 집단 구성원들도 여자와 마찬가지로 분류되었다. 남자의 사냥과 전투는 똑같은 특성을 가진 것으로서 곧 약탈적 기질의 표현이다. 전사와 사냥꾼은 자신이 직접 씨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들인다. 남자들은 폭력과 전략을 공격적으로 사용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데 이것은 여자들이 비활성 물질을 근면하게 다듬어서 물건을 만들어 내는 사소한 행위와는 명확하게 구분된다. 남자의 일은 생산에 종사하는 노동이 아니라 약탈 행위로 남의 물건을 빼앗아오는 것이다. 이처럼 여자들의 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것이 야만인 사회에서 남자의 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용맹성이 가미되지 않은 행위는 남자들의 품위에 못 미치는 일로 치부되었다. 전통에 의하여 이러한 구분이 일관성을 얻게 되자, 공동체 내에서 통용되는 상식은 그것을 하나의 행동 규범으로 삼았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의 발전 단계에서, 용맹성 즉 폭력과 기만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일이나 물품의 획득은 그 사회의 남자들에게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랜 숙달 과정을 통하여 약탈적 생활 습관이 그 집단 내에 정착되면서 사회 경제 내에서 유능한 남자가 해야 할 일은, 생존 경쟁에서 그에게 저항하거나 불복하는 자를 죽이거나 파괴하고 또 주변 환경 속에서 반항적으로 나오는 낯선 세력을 정복하여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약탈과 노동을 이처럼 정교하게 구분하는 이론은 아주 철저하면서도 세련되게 확립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수렵 부족들 사이에서, 남자는 자신이 죽인 큰 짐승을 직접 집으로 가져오면 안 되었고, 그런 천한 운반 업무는 여자들에게 시켜야 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약탈과 노동의 구분은 여러 가지 일들을 차별적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약탈로 분류되는 일은 가치 있고, 명예롭고, 고상했다. 약탈의 요소가 가미되지 않은 다른 일들, 특히 복종이나 굴복이 수반되는 일들은 무가치하고, 비천하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어떤 개인이나 개인적 행동에 부여되는 위엄, 가치, 명예 등의 개념은 계급이나 계급 구분을 발전시키는 일차적 원인이었다. 따라서 그런 개념이 어떻게 생겨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심리적 바탕은 다음과 같이 개괄적으로 설명해 볼 수 있다.

    하나의 선택적 필요로서 인간은 행위를 해야 하는 행위자이다. 그는 자신을 뭔가 추진하는 행위, 즉 목적론적 행위를 수행하는 중추적 행위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행위에서 어떤 구체적·객관적·몰개성적 목적을 달성하기를 바라는 행위자이다. 이런 목적을 가진 행위자이기 때문에 그는 효과를 올릴 수 있는 일을 좋아하고, 그렇지 못한 무의미한 노력은 싫어한다. 그는 효용성 혹은 효율성을 좋게 평가하고 무의미, 낭비, 무능력 등을 나쁘게 평가한다. 이러한 관점 혹은 경향은 일솜씨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생활 속의 상황이나 전통이 효율성의 측면에서 갑과 을의 능력을 항상 비교한다면, 일솜씨 본능은 경쟁적 혹은 차별적 관점에서 갑과 을을 비교하면서 발휘되게 된다. 이런 결과(경쟁적 혹은 차별적 관점)가 어느 정도 성취되는가 하는 문제는 상당 부분 그 집단 주민들의 기질에 달려 있다. 갑과 을의 차별적 비교가 항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에서는, 그 경쟁에서의 가시적 성공이 곧 추구해야 할 유용한 목적이 되고 또 존경의 기반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남자들은 객관적 증거로 자신의 효율성을 제시함으로써 사회 내의 존경을 얻으려 하고 가능한 한 비난을 피하려고 한다. 그 결과, 한 개인의 일솜씨는 그가 가진 경쟁력을 과시하는데 기여한다.

    사회 발전의 원시적 단계에서, 공동체는 늘 평화로웠고, 어느 한 지역에 모여서 사는 정주사회였고, 차별적 소유권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 이런 공동체에서 한 개인의 효율성은 주로 그 집단의 전반적 생활에 기여하는 어떤 일에 의해 정기적으로 드러났다. 이런 집단에서 그 구성원들 사이의 경제적 경쟁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주로 생산적 효용성의 경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경쟁을 유도하는 동기가 그리 강력하지 않았고 또 경쟁의 범위도 그리 넓지 않았다.

    평화적인 원시 단계와 약탈적인 야만 단계

    공동체가 평화로운 원시 단계에서 약탈적인 야만 단계로 넘어가면서, 경쟁의 조건들은 바뀌었다. 경쟁을 유도하는 기회와 요인은 그 범위와 긴급성이 더 크고 넓어졌다. 인간의 행위는 점점 더 약탈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 사냥꾼 혹은 전사를 다른 사냥꾼 혹은 전사와 차별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점점 흔해지고 또 쉬워졌다. 용맹성의 구체적 증거 ― 전리품 ― 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인생의 필수 장식품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전리품, 사냥과 습격의 기념품 등은 뛰어난 힘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물로 높이 평가되었다. 공격성은 널리 인정받는 것이 되었고 전리품은 성공적 공격 행위를 보여주는 객관적 증거물이 되었다.

    이 문화적 단계에서, 자기주장의 가치 있는 형태로 인정되는 것은 경쟁이었다. 몰수(폭력)나 강제에 의해 획득된 유익한 물품이나 서비스는 경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을 보여주는 관습적 증거물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약탈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얻은 물품은 전성기의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졌다. 생산적인 일 혹은 어떤 개인에게 봉사하는 일 등은 같은 이유로 인해 혐오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하여 약탈과 폭력에 의한 획득과, 근면한 생산에 의한 획득이라는 차별적 구분이 생겨났다. 생산 노동은 거기에 따르는 불명예 때문에 성가신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비록 그 소박한 개념이 후대의 분화와 파생적 의미로 인해 다소 불분명해지기는 했지만, 원시 야만인들의 사회에서 명예로운이라는 개념은 우월적인 힘의 과시를 의미했다. 명예로운무서운이었고, 가치 있는능력 있는이었다. 명예로운 행동은 결국 성공을 거둔 공격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공격성이 곧 사람이나 짐승과의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특별히 명예롭게 여겨지는 행위는 강인한 힘의 발휘였다. 원시 시대에는 모든 힘의 발현을 개성 혹은 의지력의 관점에서 해석했는데, 이것은 전통적으로 강인한 완력을 칭송하던 태도를 크게 강화시켰다. 야만 부족들과 후대의 더 발전된 문명사회의 사람들 사이에서, 명예로운 별명이라고 하면 주로 이런 완력과 관련되는 명예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족장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과 별명, 그리고 왕과 신들에게 간원할 때 사용하는 호칭과 별명은 압도적인 폭력과 저항할 수 없는 파괴력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오늘날의 한층 문명된 공동체에서도 어느 정도 통용되는 진실이다. 왕가나 귀족 가문의 문장紋章에 사나운 맹수나 맹금을 즐겨 그려 넣은 것은 이런 공격성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런 가치와 명예를 중시하는 야만 사회의 상식으로 볼 때, 목숨을 빼앗는 것 ― 사람이든 짐승이든 무서운 경쟁자를 죽이는 것 ― 은 가장 높은 수준의 명예로 칭송되었다. 살해 행위를 살해자의 최고 능력의 표현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것은 모든 살해 행위와 그에 관련된 모든 도구와 보조 수단 또한 귀중한 것으로 보게 만들었다. 무기는 명예로운 것이었고, 들판에서 몸집이 작은 사소한 동물을 죽이는데 그 무기를 사용하는 행위 또한 명예로운 일이 되었다. 동시에 물품 생산에 종사하는 일은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생산에 사용되는 도구와 장비를 사용하는 것은 유능한 남자의 체면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 되었다. 한 마디로 노동은 짜증나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는 문화의 단계가 다음과 같이 발전해 왔다고 가정한다. 즉, 원시 시대의 인간 집단은 최초의 평화로운 단계에서 전투가 그 집단의 중요하고 특징적인 일로 간주되는 야만의 단계로 이행했다. 그렇지만 평화와 선의가 늘 지속되던 시대가 어느 순간 갑자기 전투를 중시하는 더 높은 생활 단계로 이행된 것은 아니다. 사회가 약탈적인 문화의 단계로 이행하면서 모든 평화로운 산업(생산 업무)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가정하지도 않는다. 사회 발전의 아주 초창기 단계(평화가 지배하던 아주 원시적인 사회)에서도 싸움은 있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때의 싸움은 주로 남녀 양성간의 경쟁을 통하여 벌어졌을 것이다(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싸우는 경우 : 옮긴이). 원시 부족들의 잘 알려진 습관이나 영장류 원숭이의 생활 습관, 그리고 잘 알려진 인간성의 특징들도 그런 추정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이 책에서 가정된 바, 평화로운 생활이 지속된 최초의 원시 사회라는 것은 아예 없었던 게 아니냐는 반박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싸움이 아예 없었던 문화 발전의 단계를 논의하는 건 무의미하다. 여기서 요점은 싸움이 가끔 혹은 산발적으로 벌어졌는가, 혹은 빈번하게 습관적으로 벌어졌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요점은 습관적인 호전적 심리 상태가 있었는가 여부이다. 다시 말해, 전투의 관점에서 사실과 사건을 판단하는 사고방식이 정립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의 약탈적 단계가 도래하는 것은 다음 세 가지가 충족되었을 때이다.

    (1)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약탈적 태도가 습관적인 것이 되고 또 약탈적인 사고방식이 널리 인정을 받을 때.

    (2) 싸움이 생활 방식에서 주도적인 양태가 되었을 때.

    (3) 전투에서의 수행 능력을 가지고서 사람이나 사물을 높이 평가하는 상식이 통용될 때.

    평화 단계와 약탈 단계의 구분선

    따라서 문화의 평화 단계와 약탈 단계를 갈라놓는 결정적 구분선은 기계적인 것(가령 전투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 옮긴이)이라기보다 정신적인 차이라 할 수 있다. 정신적 태도에 변화가 오게 된 것은 그 공동체 생활의 물질적 측면이 변화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다. 약탈적 태도를 촉진하는 물질적 환경이 조성되면서 서서히 그런 태도가 생겨났다. 그리고 생산 문화가 상한선에 도달하면서 비로소 약탈 문화가 생겨났다. 다시 말해, 생산 방법이 잘 발달되어 잉여물(이것이 전투의 목표가 된다)이 생겨나고 또 생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생계유지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생산물이 생겨날 때, 비로소 약탈은 어떤 집단 혹은 계급의 습관적·관습적 획득 수단이 된다. 따라서 평화에서 약탈로의 이행은 생산 기술의 발달과 도구의 이용에 달려 있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약탈 문화는 아주 원시 시대에는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무기가 개발되어 인간이 무서운 동물로 등장하는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약탈 문화가 태동했다. 따라서 도구와 무기의 초창기 발달은 두 가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도구와 무기를 평화와 약탈의 두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뜻으로, 도구가 발달해서 생산물이 늘어나 그 잉여물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 옮긴이).

    설혹 싸움이 벌어진다 해도 그 싸움이 구성원의 사고방식에서 핵심 요소가 아니고 또 일상생활의 주도적 특징이 아니라면, 그 공동체의 생활은 평화로운 것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그렇지만 생활양식이나 행동 규범이 약탈적 기절에 의해 좌지우지될 정도라면 그 집단은 분명 약탈적 문화에 돌입한 것이다. 따라서 문화의 약탈적 단계는 약탈적 능력, 습관, 전통 등이 누적되는 과정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생겨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성장 결과는 그 생활 집단의 환경 변화에 의한 것이다. 평화로운 생활보다는 약탈적 생활을 선호하는 인간성의 특징, 공동체의 전통, 생활 규범 등을 보존하고 발전한 결과 사회의 성격이 그렇게 바뀐 것이다.

    원시 시대에 평화를 사랑하는 문화의 단계가 있었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대체로 문화인류학보다는 심리학에서 가져온 것인데 여기서는 상술하지 않겠다. 그것은 현대의 문화에서 원시적인 인간성의 특징이 존속하는 현상을 논의한 뒷장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제2장

    금전적 경쟁

    문화 발전의 여러 단계에서 유한계급의 출현은 시기적으로 소유권의 시작과 일치한다. 이것은 명백한 진실인데 두 제도(유한계급과 소유권)가 동일한 세트의 경제적 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두 제도는 발전의 초창기 단계에서 사회적 구조의 동일한 사실들을 서로 다르게 보여주는 양상에 지나지 않았다.

    여가와 소유가 우리의 논의에서 관심사가 되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 구조의 요소들 ― 관습적인 사실들 ― 이기 때문이다. 일을 상습적으로 게을리 한다고 해서 그것이 유한계급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유용한 물품의 사용과 소비라는 기계적 사실이 소유권을 형성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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