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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 계시록의 구조를 보여주는 놀라운 계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 계시록의 구조를 보여주는 놀라운 계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 계시록의 구조를 보여주는 놀라운 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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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 계시록의 구조를 보여주는 놀라운 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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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25-29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계시’와 ‘연구’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구약성경의 저자인 선지자들도 계시만 받지 않았습니다. 받은 계시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고, 상고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

하물며 저와 여러분이겠습니까? 계시에만 의존하지 말고 성실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바울이 성령을 “지혜와 계시의 영”이라고 불렀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 둘 다를 주십니다. 성경저자들에게 특별계시를 주셨고, 우리에게는 성경을 깨닫도록 그와 다른 종류의 계시를 주십니다. 또,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해 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지혜를 사용하여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고, 상고해야만 합니다.

사람이 전진하려면 오른발과 왼발을 차례로 사용해야 합니다. 성경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시’라는 오른발과 ‘연구’라는 왼발을 모두 사용해야 합니다. 성경해석은 ‘지혜’와 ‘계시’가 \'날줄(=날실)\'과 \'씨줄(=씨실)\'이 되어 완성되어 갑니다. 두 가지가 서로 협력해서 올바른 해석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라는 말에 나타나 있듯이, ‘이 예언이 이 사람에 대한 것일까? 저 사람에 대한 것일까?’, ‘이 때 이루어질까? 저 때 이루어질까?’ 등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때로는 아니 자주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 원만한 이해에 도달하게 됩니다.

제가 계시록을 해석하는 과정도 정확히 그랬습니다. 각장 제목에 그에 관한 빛이 임한 날을 기록한 것처럼, 분명히 ‘계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계시적인 생각들이 부어졌고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생각들은 대개는 맞았습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만 옳거나 때로는 틀린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으며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사용하여 많은 시간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고, 상고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나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본서에 나오는 해석이 대부분 바르고 정확할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감히 본서가 계시록 해석에 신기원을 열어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오류가 전혀 없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본서의 일부는 훗날 수정될 수도 있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Language한국어
Release dateJan 28, 2020
ISBN9791190341288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 계시록의 구조를 보여주는 놀라운 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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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 - 변승우

    1581282687317_61581289391745_0

    지은이  변승우

    발행인  변승우

    발행처  도서출판 거룩한진주

    주   소  서울 송파구 위례성대로22길 27-22 (우) 05655

    전   화  02-586-3079

    팩   스  02-523-3079

    Website  http://www.belovedc.com, http://cafe.daum.net/Bigchurch(B 대문자), http://www.youtube.com/user/gfctvmedia

    ISBN  979-11-90341-28-8  05230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이 책의 일부 또는 전체를 무단 복제, 전재, 발췌하면 저작권법에 의해 처벌을 받습니다.

    저자소개

    변승우

    사랑하는교회 당회장

    한기총 공동회장

    한기총 이단사이비대책위원

    예장 부흥 증경총회장

    성령신학교 학장

    도서출판 거룩한진주 대표

    저서

    대표작인 『능력으로 관통되는 복음!』을 비롯하여 『예정론의 최고난제: 토기장이의 비유 풀이!』, 『다이아몬드 같은 진리!』, 『정통보다 더 성경적인 교회!』, 『십일조 대논쟁!』,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등 120권의 저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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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

    Ⅰ 요한계시록을 연구하게 된 발단

    1. 다니엘 70이레: 요한계시록 해석의 실마리!

    (1) 무슨 근거로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는가?

    (2) 무슨 근거로 69이레와 마지막 이레 사이에 간격이 있다고 하나?

    2. 로이드 존즈와 한 판!

    3. 그릇된 해석 확인사살!

    4. 뜻밖의 수확! - 지혜 있는 자만 깨달을 수 있는 일곱 머리

    (1) 일곱 머리는 일곱 산이라는 장소 즉 로마를 가리킨다.

    (2) 일곱 머리는 사람 즉 일곱 왕(황제)을 가리킨다.

    5. 십사만 사천 명 상상과 추측은 금물이다.

    Ⅱ 요한계시록 연구의 선결과제

    1. 불가능해 보이지만 가능한 작업

    2. 환난 후 휴거설이 옳다는 성경의 명확한 증거

    (1) 다니엘 7장의 넷째 짐승

    (2) 다니엘 12장 1-2절

    (3)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언!

    (4) 사도 바울이 기록한 말세의 징조

    (5) 계시록을 쓴 사도 요한의 재림관

    3. 환난 전 휴거설로 오해하기 쉬운 성구와 반론들

    (1) 히브리서 9:28

    (2) 누가복음 21:36

    (3) 요한계시록 3:10

    (4) 데살로니가전서 4:16-17

    1) 보좌가 하늘에 있다는 통념

    2) 천국이 하늘에 있다는 통념

    (5) 데살로니가전서 5:1-6

    1)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은 다음 두 구절에 의존한 것이다.

    2) 주의 날이라는 표현도 공중재림이 아니라 지상재림을 뜻한다.

    3) 바울은 심판이 임하는 주의 날이 신자들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4) 여기서 평안과 안전은 불신자의 입장에서 본 거짓 안전과 거짓 평화이다.

    Ⅲ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보여주는 놀라운 계시!

    1. 일곱 인봉한 두루마리의 비밀 (2월 5일 구정 새벽 1시경)

    (1) 일곱 인봉한 두루마리가 갑자기 등장하는 이유!

    (2) 일곱 인봉한 두루마리의 내용은 언제부터인가?

    1) 인을 다 떼야 내용을 볼 수 있다는 증거들

    인 사이의 간격이 불규칙하다. | 계시록 자체의 내용에 의해 증명된다. | 일곱 인봉은 비밀 즉 완전한 비밀을 뜻한다.

    2) 제3의 견해

    일곱 인을 떼기 전뿐 아니라 후에도 인과 내용이 무관하다는 주장 | 일곱 인봉한 두루마리와 작은 책이 같은 책이라는 주장

    3) 두루마리를 통해 알게 된 계시록 구조의 중요성!

    2. 말세의 징조에 대한 눈이 열리다! (2월 10일 주일 1부 예배 후 휴식 때)

    (1) 흰 말 탄 자는 누구인가?

    (2) 계시록 6장은 말세의 징조장인가 아닌가?

    1) 흰 말 탄 자에 대한 그릇된 해석

    2) 환난 전 휴거설 때문에 왜곡된 말세의 징조

    (3) 말세의 징조와 세 가지 시대 구분!

    1) 세 가지 말세의 징조

    일반적인 말세의 징조들 | 대표적인 말세의 징조 | 마지막 말세의 징조

    2) 말세의 징조에 의한 세 가지 시대 구분

    3. 인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 (3월 4일 새벽 3시경)

    (1) 십사만 사천 명은 유대인인가 교회인가?

    1) 작위적으로 곱하기로 하는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다.

    2) 이스라엘은 교회를 뜻할 수 있어도 열두 지파는 교회를 뜻할 수 없다.

    3) 십사만 사천은 처음 익은 열매이므로 교회 전체일 수 없다.

    처음 익은 열매를 유대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처음 익은 열매를 첫 열매로 해석할 수도 있다.

    4) 열두 지파가 나오더라도 유대인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

    그들은 요한 당시에는 12지파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12지파의 이름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5) 십사만 사천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다른 집단이다!

    6) 십사만 사천을 교회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십사만 사천은 시온 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있다. | 십사만 사천의 이마에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다. | 십사만 사천에 대해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간다고 했다.

    7) 십사만 사천 명은 교회가 아니라 유대인이다!

    다니엘 70이레 예언 때문이다. | 일곱 인봉한 두루마리 때문이다.

    (2) 십사만 사천 명은 유대인 중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1) 무엇을 위한 인인가?

    2) 왜 십사만 사천 명만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는가?

    3) 왜 순결과 정직과 흠이 없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는가?

    4.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3월 1일부터 2일까지)

    (1)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과연 누구인가?

    (2) 휴거라면 왜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 있는가?

    (3) 손에 왜 종려 가지를 들고 있는가?

    (4) 이들이 휴거한 사람들이라면 왜 7장에 기록되어 있는가?

    5. 계시록 8-9장은 어느 시대인가?

    (1) 인 맞은 십사만 사천과 8-9장의 관계가 그 증거다!

    (2) 8장에서 드디어 일곱 인봉한 두루마리가 열린다.

    (3) 8-9장의 위치 자체가 전 삼년 반 시대라는 증거이다.

    (4) 계시록 7장과 8장의 범상치 않은 시작이 그 증거다!

    (5) 계시록 6장 뒤처럼 9장 뒤에도 삽입이 나온다!

    (6) 영적인 진통이 점점 심해지는 것이 그것을 보여준다.

    (7) 두 증인이 사역한 1,260일 후에 재림이 일어나지 않았다.

    (8) 계시록 12장은 대환난의 서막, 개론 혹은 총론이다.

    (9) 두 장에 재앙은 있는데 적그리스도의 활동이 없다.

    6. 대환난은 유대인 중심으로 서술되었다! (2월 8일 금요일 밤 교회에서 집에 가기 직전과 차 안에서)

    (1) 성전과 제단은 교회가 아니라 유대인이다.

    (2) 모세와 엘리야와 방불한 두 증인도 교회가 아니다.

    1) 두 증인은 교회에 대한 상징이 아니다!

    2) 두 증인이 교회가 아니라는 7가지 증거!

    3) 계시록의 두 증인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3) 광야로 도피한 여인도 교회가 아니라 믿는 유대인이다.

    1) 요셉의 꿈과 여자에 관한 묘사가 일치한다.

    2) 본문의 여자는 신부가 아니라 어머니다.

    3) 도망하여 피하는 것이 다니엘의 예언과 일치한다.

    4) 도망하여 피하는 것이 예수님의 예언과 일치한다.

    5) 도망하여 피하는 것이 11장 1-2절과도 일치한다.

    6) 여자를 이스라엘로 보아야 남은 자손이 이해가 된다!

    7) 대환난 때 교회 전체가 보호를 받지는 않는다!

    7. 화! 화!! 화!!! - 세 가지 화에 대한 계시 (2월 11일 낮 수양관에서 대화 중)

    (1) 첫째 화 - 다섯째 나팔 재앙

    (2) 둘째 화 - 여섯째 나팔 재앙

    (3) 셋째 화 - 일곱째 나팔 재앙

    8. 순교자의 탄원과 하나님의 신원 (2월 10일 밤 수양관 가기 전 집에 들렀을 때)

    (1) 곡식추수는 심판을 의미하지 않는다.

    (2) 곡식추수는 휴거를 의미한다.

    (3) 드디어 하나님의 신원이 시작되다!

    (4) 대환난은 15장 이전과 이후로 구분이 가능하다.

    9. 예수님의 재림, 천년왕국, 흰 보좌 심판! (2월 9일 토요일 밤과 2월 11-12일 재림과 천년왕국에 대한 궁금증들이 풀림)

    (1) 예수님의 재림

    1) 통과설이면 지상재림 때 휴거가 일어나는데 휴거는 어디에 있나?

    우리는 기름 준비를 하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즉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한다(열 처녀 비유). | 우리는 받은 달란트를 충성되게 사용해야 한다. 즉 자기의 은사와 부르심이 무엇인지 깨닫고 주님께 충성을 다해야 한다(달란트 비유). | 우리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베풀고 나눔으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한다(양과 염소의 비유).

    2) 하나님은 왜 재림 전에 전무후무한 대환난을 허용하시나?

    3)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오시는가? 백마를 타고 오시는가?

    (2) 천년왕국

    1) 천년왕국의 세 가지 설 중 어느 것이 옳은가?

    무천년설 | 후천년설

    2) 통과설이 옳다면 천년왕국의 백성은 누구인가?

    아마겟돈전쟁 때 불신자는 모두 멸망하는가? | 적그리스도의 군대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은 모두 천년왕국의 백성이 되는가? | 천년왕국 백성들에 대한 세 가지 의문점!

    3) 천년왕국에 대한 구절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실한 증거다!

    천년왕국 때 어떻게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백 세가 못 되어 죽거나 저주받을 수 있는가? | 왜 재림 때가 아니라 천년왕국 끝에 일어나는 곡과 마곡전쟁 뒤에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나? | 천년왕국 때 어떻게 이스라엘이 침공을 당하고 초막절은 또 왜 지키나?

    4) 천년왕국이 존재할 필요가 있나?

    다니엘의 예언대로 세상 나라를 성도들이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 천년왕국에 관한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 때문이다. | 천년왕국에 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때문이다. |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 전체 새로운 피조물의 완성을 위해서 필요하다.

    5) 다니엘서에 나오는 천이백구십 일과 천삼백삼십오 일!

    (3) 흰 보좌 심판

    1) 흰 보좌 심판은 천년왕국 후에 있다.

    2) 성도들의 심판은 재림 때 이루어진다.

    10. 새 예루살렘과 새 하늘과 새 땅!

    (1) 새 하늘과 새 땅, 갱신인가 창조인가?

    1) 다른 책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

    2) 한 장 전에 나오는 표현

    3) 이 구절의 원어

    4) 하늘과 땅이 없어질 것을 말하는 성구들

    5) 처음 하늘 처음 땅과 새 하늘 새 땅의 차이

    (2) 천국과 새 하늘과 새 땅 어떻게 다른가?

    1) 사람이 죽으면 어디에 가는가? 낙원에 가는가 천국에 가는가?

        심판 때까지 낙원에서 기다리는가 아니면 천국에 들어가는가?

    2) 천국은 구체적으로 어떤 세계일까?

    3) 새 예루살렘성의 재료인 보석들은 실제인가 상징인가?

    (3) 과연 누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가?

    (4) 새 예루살렘성은 실제인가? 상징인가?

    (5) 만국과 땅의 왕들은 누구인가?

    (6) 성 밖은 어디인가?

    (7) 외계인은 과연 존재하는가?

    1) 천지창조

    2) 지구와 인간

    3) 새 하늘과 새 땅

    4) 새 예루살렘성의 이름들!

    5) 성경에 나오는 창조의 목록!

      후기

    서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계시’와 ‘연구’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구약성경의 저자인 선지자들도 계시만 받지 않았습니다. 받은 계시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고, 상고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10-11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하물며 저와 여러분이겠습니까? 계시에만 의존하지 말고 성실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바울이 성령을 지혜와 계시의 영이라고 불렀는지도 모릅니다.

    에베소서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 둘 다를 주십니다. 성경저자들에게 특별계시를 주셨고, 우리에게는 성경을 깨닫도록 그와 다른 종류의 계시를 주십니다. 또,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해 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지혜를 사용하여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고, 상고해야만 합니다.

    사람이 전진하려면 오른발과 왼발을 차례로 사용해야 합니다. 성경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시’라는 오른발과 ‘연구’라는 왼발을 모두 사용해야 합니다. 성경해석은 ‘지혜’와 ‘계시’가 ‘날줄(=날실)’과 ‘씨줄(=씨실)’이 되어 완성되어 갑니다.¹두 가지가 서로 협력해서 올바른 해석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라는 말에 나타나 있듯이, ‘이 예언이 이 사람에 대한 것일까? 저 사람에 대한 것일까?’, ‘이때 이루어질까? 저 때 이루어질까?’ 등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때로는 아니 자주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 원만한 이해에 도달하게 됩니다.

    1  ‘날줄’은 ‘천이나 그물을 짤 때, 세로 방향으로 놓인 팽팽하게 고정되어 있는 실’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씨줄’은 ‘천이나 그물을 짤 때, 가로 방향으로 놓인 실’을 의미합니다. ‘베’는 ‘씨줄’과 ‘날줄’로 서로 엇갈리면서 짜게 되는데, 세로 줄을 ‘날’이라고 부르며 가로 줄은 ‘씨’라고 부릅니다.

    제가 계시록을 해석하는 과정도 정확히 그랬습니다. 각 장 제목에 그에 관한 빛이 임한 날을 기록한 것처럼, 분명히 ‘계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계시적인 생각들이 부어졌고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생각들은 대개는 맞았습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만 옳거나 때로는 틀린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으며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사용하여 많은 시간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고, 상고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나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본서에 나오는 해석이 대부분 바르고 정확할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감히 본서가 계시록 해석에 신기원을 열어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오류가 전혀 없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본서의 일부는 훗날 수정될 수도 있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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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요한계시록을 설교하면서 본문이 계시록이 아니고 이곳일까 궁금하시죠?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본래 저는 이 시리즈 설교의 제목을 이 설교를 들으면 요한계시록이 보인다!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해석이 거의 완성될 무렵 성령님께서 제목을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로 바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설교는 그 진리를 시위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설교의 제목은 고린도전서 1장 25절에서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은 문자 그대로 저의 심금을 울린 구절입니다.

    고린도전서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1 때 저는 통합 소속 울산전하교회 학생회장이었습니다. 하루는 학생회예배 때 목사님이 설교 중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때 너무 크게 감동이 되어 마음으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이 구절이 말하는 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머리가 좋지도, 공부를 잘하지도 않았고, 몸도 약한 데다, 집도 매우 가난했습니다. 제가 정확히 이 구절에 나오는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그리고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학생회 담당목사님도 저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성경에서 하나님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저 같은 자를 택하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순간 ‘이게 바로 내가 목회자로 선택받은 이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한없이 감사하게 느껴져서 심령으로 울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전 절을 한없이 중요한 계시록 설교의 제목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주신 이 제목을 통해 저는 왜 성령님이 계시록 해석을 제게 부으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계시록 해석이 초자연적으로 부어질 때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습니다.

    ‘왜 내게 계시록 해석을 주시지… 나는 적임자가 아닌데… 자격이 없는데… 왜 이렇게 하시지?’

    그런데 제목을 통해 그 답을 알았습니다. 제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자격이 없지만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고전 3:7).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됩니다(고전 15:10). 은혜 받기에 합당한 자격은 주제파악밖에 없습니다. 주제파악하고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것, 그리고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셔서 높여주실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이것이 은혜 받기에 합당한 유일한 자격입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바라보고 의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눈에 띕니다(대하 16:9). 그래서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 구절로 넘어가겠습니다. 바울은 연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7-28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얼마나 감미로운 말인지요. ‘아~ 바로 이런 일을 이루시려고 하나님이 나같이 천한 것을 택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역전이 가능한 이유는, 25절에 나와 있듯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저의 태생적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면, 그래서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미련한 나도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날부터 저는 그것을 90%나 99%가 아니라 100% 믿었습니다. 어차피 저의 지혜로는 지혜로운 자들을 이길 수도 없고 중간도 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했습니다.

    특히, 성경해석에 있어서 그랬습니다! 저는 제 머리나 지식이나 분별력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약 1:5), 눈을 열어주시고(시 119:18), 성령으로 가르쳐 주시고(고전 2:13), 말씀을 주시기를(엡 6:19) 여러 해 동안 구하고, 구하고, 또 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제게 지혜와 말씀의 은사를 부어주셨고 세 가지 극적인 확증을 주셨습니다. 그중 하나가 신학교 1학년 때 꾼 꿈입니다.

    신학생 시절, 저는 특이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저는 학교 앞에 있었던 성문순복음교회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설교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왜 하나님은 나에게 방언통변의 은사를 주시지 않는 걸까?’ 평소부터 궁금했던 의문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오랫동안 방언통변의 은사를 구해왔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받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나에게 방언통변의 은사를 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강사 목사님은 잠시 설교를 중단하고 기도를 하시다가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사님에게 성경을 한 권 보여주셨답니다. 그 성경은 제가 신학생 시절 읽던 것으로 겉장 가죽이 닳아서 세 번이나 갈았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적게 줄 친 곳이 최소한 다섯 번이고, 여기저기 낡고 구멍이 뚫려서 스카치테이프로 보수공사를 해놓은 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경을 보여주셨는데, 저의 눈에도 보였습니다.

    분명히 저의 성경인데, 겉장과 속장이 모두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이 덮여 있는데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눈에 다 보였습니다. 또 여백에 성경을 읽으며 깨달은 것을 빽빽하게 적어놓았는데, 그 책의 여백에도 빼곡하게 적혀있었습니다. 그 양이 큰 도서관 하나를 채울 만했습니다. 성경 66권에 대한 전체적이고 정확한 해석이 적혀 있었고 책이 덮여 있는데도 전부 한눈에 다 보였습니다. 이것을 보여주신 후 성령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통하구나. 이것을 어찌 방언통변이나 다른 은사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은사를 누구에게 줄까? 미국, 영국, 독일…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사람을 찾다가 너를 발견하고 너에게 이 은사를 주었다. 그런데 이 은사로 인해 내게 한 번이라도 감사한 일이 있느냐? 늘 방언통변이나 신유의 은사를 주지 않는다고 불평만 하지 않았느냐? 내가 다른 작은 은사들을 주고도 감사기도를 받는데 이런 엄청난 은사를 주고도 불평만 듣고 있으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꿈에서 깨어난 후 저는 제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은사들을 구하는 것을 그만두고 말씀에 착념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이 꿈은 본문 고린도전서 1장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 주신 이 설교의 제목과 완전한 조화를 이룹니다. 왜냐하면 꿈에 이런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은사를 누구에게 줄까? 미국, 영국, 독일…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사람을 찾다가 너를 발견하고 너에게 이 은사를 주었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에게 역대하 16장 9절을 상기시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전심으로 자기를 향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찾으십니다. 그들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그들에게 능력도 주시고 모든 좋은 것들을 주십니다.

    감사하게도 저는 어릴 때부터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하나님만 100% 믿고 의지했습니다. 제가 하나님 은혜로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실제로 하나님만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때도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중학교 때도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도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신학교 때도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목회하면서도 실제로 저는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제가 자주 고백한 것처럼, 저는 어려서부터 여러 해 동안 하나님만 전적으로 바라보고 배고픈 거지가 밥 한 술 구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구하고, 또 구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 후에도 저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일례로, 저는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 후에 수십 년 동안 많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또 많은 설교들을 했습니다. 115권이나 되는 많은 책들도 썼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릴 때와 다름없이 여전히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설교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책을 씁니다. 그런 일은 거의 없지만, 설교할 것이 생각이 안 나면 설교할 자료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립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지 않으면 설교를 작성할 엄두도 내지 않습니다. 내 힘만으로는 좋은 설교를 작성할 수 없다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 이렇게 아룁니다.

    아버지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긍휼히 여기소서. 자비를 베푸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주님이 말씀해주시지 않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무뇌인과 같아서 설교도, 목회도, 사역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처절한 심정으로 매달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을 주십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렇게 목회를 해왔습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 큰 은혜를 받으려면, 자기에 대해 100% 절망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처절한 절망감을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으로 전환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 눈에 띕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보다 지혜로운 하나님의 미련한 것과 사람보다 강한 하나님의 약한 것을 부어주십니다. 그 결과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고,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고, 있는 것들을 폐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사람이 영광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연이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앞에서 저는 신학생 때 꾼 꿈의 유리처럼 투명한 성경 얘기를 했습니다.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러 그 꿈을 꾼 지 35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그 꿈을 떠올릴 때마다 두 가지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하나는, ‘아닌데! 나는 로마서 9장을 해석할 수가 없는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로마서 9장을 해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죽을 때까지 해석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하나님의 은혜로 드디어 로마서 9장을 해석할 수 있었고 『예정론의 최고난제: 토기장이의 비유 풀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또 하나는, 요한계시록이었습니다. 로마서 9장과 마찬가지로 계시록도 거의 2,000년 동안 바르게 해석된 일이 없습니다. 게다가 계시록은 로마서 9장보다 더 길고 해석하기도 7배나 더 어렵습니다. 덕담처럼 되어버린 영성운동 진영의 예언처럼, 일곱 인이 떼어졌지만 봉인된 것처럼 아무리 읽어도 알 수가 없는 요한계시록! 온갖 상상들이 난무하고 해석이 소설화되어 버린 요한계시록! 그런데 어찌 제가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해석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오래전부터 저는 제가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 같은 저와 차원이 다른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이 나와서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번도 제가 적임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정도로 계시록 해석은 저에게 미션 임파써블 즉 완전히 불가능한 임무였습니다. 심지어 저는 많은 입신 간증들처럼 계시록도 어쩌면 엉터리 계시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니면 2,000년 동안이나 안 풀릴 이유가 있나? 어쩌면 엉터리인데 우리가 그걸 성경이라고 믿고 해석하기 위해 헛수고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힘들었습니다. 이제 계시록 해석이 제게 얼마나 불가능해 보였는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은 신학생 때 요한계시록 해석까지 환히 보이는 것을 보여주셨고, 샨 볼츠는 하나님께서 목사님에게 계시록을 풀어주실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샨이 계시록 해석이 얼마나 어렵고 불가능한 작업인지 몰라서 저런 예언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예언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정도로 계시록 해석은 저에게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니면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해야 할까요? 갑자기 계시록을 해석할 수 있는 지혜가 제게 임했습니다. 얼마나 경이로웠는지요! 그러나 저는 자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지혜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계시록 해석이 부어지면서 계속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은, 제가 잘나거나 똑똑하거나 훌륭하거나 영성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그 원리에 의해 못난 제가 하나님의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소위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부어졌기 때문입니다(고전 1:25).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 말은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 해석을 통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계시록 설교의 서론, 본론, 결론 모두가 인간의 지혜를 초월한 것들입니다. 저는 계시록을 연구하는 동안 평생을 다니엘이나 계시록을 연구한 학자나 목회자가 깨달을 수 없었던 부분들을, 관심을 가진 지 30분이나 1시간 안에 완전히 해석되는 것을 상시적으로 경험했습니다. 가장 늦은 것이 그 다음 날 해석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벅차고 경이로운 시간들이었는지 모릅니다. 이는 인간의 지혜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전문가들이 수십 년을 연구해도 풀리지 않고, 거의 2,000년간 축적된 지식을 갖고도 풀리지 않던 난제들이 술술 풀리는 것이 어떻게 사람의 지혜로 가능합니까? 그래서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가장 지혜로운 자들이 2,000년 동안 풀지 못한 계시록이 풀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이 정도면 하나님의 지혜는 어떻겠는가? 또 하나님의 깊은 지혜는 어떻겠는가? 얼마나 더 초월적이고 경이롭겠는가?’

    저는 그것을 가늠하기는커녕 상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바울처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롬 11:33)라고 고백하며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서론을 마치고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설교를 듣기 원하는 모든 분에게 정중히 부탁과 경고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제가 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을 들으면 여러분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착각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과 바울의 설교는 모두 바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대다수가 그 설교를 듣고도 믿지 않았다는 것을 아십니까? 마찬가지로 제가 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해도 모두가 다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보는 눈과 들을 귀와 깨닫는 마음이 있는 사람만 받아들일 것입니다.

    계시록뿐 아니라 모든 설교를 듣는 데 사활적으로 필요한 보는 눈과 들을 귀와 깨닫는 마음은 겸손과 직접적이고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5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복음이나 진리는 그냥 들으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에게도 지혜와 계시의 영이 역사해야 하고 듣는 이들 속에서도 지혜와 계시의 영이 역사해야 합니다. 성령에 의해 진리가 드러나고 공명이 돼야 합니다. 그럴 때 말씀이 깨달아지고 믿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또 그래서 사도 요한이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4:5-6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말씀을 들어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교만한 자들에게는 성령에 의해 진리가 드러나고 공명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겸손한 자들에게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계시록을 이해하고 싶으면 교만한 마음부터 버리시기 바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반 설교를 듣는 것보다 계시록 해석을 듣는 것에는 배나 더 겸손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주석과 강해집들의 저자들에게 다음 성구들과 매우 유사한 일들이 일어난 것을 제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18-20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많은 이들이 자신이 계시록을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어리석습니다. 그들은 계시록을 해석하기 위해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여러 가지 꾀를 내었고 어리석게도 자기 꾀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해석 중 대부분을 헛것으로 아십니다.

    고린도전서 8: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한, 많은 이들이 자신들이 요한계시록에 대해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섣불리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무엇을 진짜로 알려면 자기가 모른다는 것부터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주석을 쓰지 않은 칼빈은 제외하더라도 금세기 최고의 복음주의 신학자라는 존 스토트가 계시록 2-3장만 강해하고 멈춘 것 아닐까요?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저 계시록에 관한 책 수십 권을 읽고 머리를 굴린 뒤에 자기가 계시록을 안다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용감하게 계시록 강해설교도 하고, 책도 쓰고, 세미나나 부흥회도 인도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계시록을 모릅니다. 그들은 정말로 알게 된 후에 안다고 말해야 하는데, 너무 빨리 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충분히 연구하거나 분별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과거를 볼 때 주어진 제목으로 자유롭게 글을 쓰는 것처럼, 요한계시록을 소재로 해석이랍시고 제각각 소설을 썼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해석을 빙자해 계시록을 난도질했습니다. 그들은 예언서를 역사서나 교회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교만하여 자기가 모른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저는 계시록을 안다고 생각하는 분들의 말들을 주의 깊게 들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유명한 학자, 유명한 설교자 그리고 유명 영성운동가의 글들도 읽어보았지만 엉터리였습니다. 저는 특히 요한계시록 주석을 쓴 학자들과 강해집을 낸 목사님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계시록을 모릅니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느냐고요? 물론 제가 읽은 책들에 한하는 것이지만, 만약 여러분이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해석했다면 제가 겸손히 배웠을 것입니다. 제가 안 읽은 책들의 저자들도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정말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해석했다면 그 소문이 퍼졌을 것이고 제가 배우기 위해 그 책을 읽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안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겸손히 백지상태에서 배우십시오!

    진실로 요한계시록 해석을 들으려면 백지상태에서 겸손히 듣고 배워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해가면서, 계시록의 다른 부분과 다른 성경에 있는 많은 성구들과 그에 대한 견해들을 사용하여 설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계시록 설교를 끝내기 전에, 적절한 때 그 성구들과 견해에 대해 저의 이해가 옳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완벽하게 증명해드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다른 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 설명을 위해 사용하는 성구와 해석들까지 일일이 다 옳다는 것을 그때마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설명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²그러므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더라도 일단 자기의 견해를 접고 저의 견해를 신뢰하고 들어야 합니다.

    2 설교할 때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례대로 부분을 설명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책은 전체 내용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설명을 위해 사용하는 성구와 해석들에 관한 바른 해석이 이 책의 몇 페이지에 있는지 주를 다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중도에 편견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왜곡된 지식 때문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저를 맹신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 설명에 대한 설명을 다룰 때까지 믿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겸손한 마음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도에 왜곡된 자기 지식으로 성급히 판단하고 마음을 닫아버리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계시록 해석을 끝까지 들을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끝까지 들으면 다 이해가 되게 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바른 해석인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으로 백지상태로 듣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계시록 설교를 통해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깨닫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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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16일, 저는 양평에 있는 힐하우스에서 현 한기총 대표회장 목사님과 단둘이 5시간 넘게 장시간 대화를 했습니다. 그때 나눈 대화 중 하나가 요한계시록이었습니다. 그때 계시록에 대해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1. 짐승의 일곱 머리에 대한 해석

    2. 워치만 니와 일치하는 휴거에 대한 견해

    3. 다니엘 70이레의 마지막 이레가 요한계시록으로 떨어졌다는 것

    이 중 3번이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도 과거에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 연구를 포기하고 선반에 올려놓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잊은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다니엘 70이레의 마지막 이레가 요한계시록으로 떨어졌다. 그것만 알면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 새롭게 들렸고 요한계시록을 연구하고 싶은 의욕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계시록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전에 로마서 9장을 해석할 때처럼 왠지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과 자신감이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요한계시록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계시록 연구를 시작하게 된 날은 정확히 2019년 1월 17일입니다.

    1. 다니엘 70이레: 요한계시록 해석의 실마리!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다니엘서는 전편이고 계시록은 후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다니엘서의 70이레 예언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요한계시록 해석의 실마리와 발판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70이레 예언을 모르면 요한계시록은 오리무중이 되어 버립니다. 아무리 연구해도 사상누각이 되기 십상입니다. 사실은 70이레 예언을 몰라도 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사람을 저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처럼 그것을 아는 사람은 예외지만, 그 외의 분들은 계시록을 해석하려면 반드시 70이레 예언을 알아야 합니다.

    다니엘 9:24-27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이것이 70이레 예언입니다. 저는 따분하게 70이레 예언을 자세히 설명할 마음은 없습니다. 총신대 이한수 교수님의 계시록 주해에 나오는 70이레 해석의 요약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문자적인 해석을 선호하는 세대주의 학자들은 1,260일=삼년 반=42달이 다니엘서 9:24-27에 언급된 ‘70이레’와 연관된다고 해석해왔다(Walvoord, 1966: 178). 한 이레를 7년 주간으로 계산한다면 70이레는 490년의 기간을 가리키게 된다. 그들의 해석에 따르면, 고레스가 성전 중건명령을 내린 때부터(BC 457) 성전이 완공될 때까지 7이레(49년), 그 후 다니엘 9:25이 예언한 대로 기름부음을 받은 왕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 62이레(434년)의 기간이 지나고, 그 후 메시아의 죽음, 디도 장군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이스라엘의 멸망이 이루어지고(단 9:26), 2000년의 긴 신약시대가 지난 뒤에 마지막 한 이레, 즉 문자적인 7년대환난 기간이 도래하는데 그중에서도 후 삼년 반은 계시록에 언급된 심판이 집중적으로 임하는 기간이다.

    ³

    이것이 꼭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제가 대략적으로 동의하는 70이레 예언에 대한 해석입니다.

    참고로, 이한수 교수님 외 다수의 학자들이 이 해석을 거부합니다. 저명한 강해설교자 로이드 존즈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해석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후 그것을 100% 증명해드릴 것입니다. 그 전에 예비적으로 가볍게 그들의 주장을 다뤄보겠습니다. 제가 동의하는 70이레 예언의 해석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1) 무슨 근거로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는가?

    일례로, 로이드 존즈는 70이레는 490일을 의미하고 선지서에서 하루는 언제나 한 해를 뜻하므로 칠십 이레는 반드시 490년을 가리킨다는 주장이 있다면서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선지서에서 하루는 언제나 1년을 의미하는가라는 논의를 면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이것은 반박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즉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이 70이레 예언의 하루를 1년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한 때 두 때 반 때(단 7:25, 12:7)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는 적그리스도가 성도를 박해할 기간입니다. 70이레에 나오는 이레의 절반과 정확히 같은 기간입니다.

    다니엘 9: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그 증거로 12장에도 이와 일치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다니엘 12:11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 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정말 서로 일치하지요! 그런데 이곳에서 이레의 절반한 때 두 때 반 때에 관하여 천이백구십 일이라고 했습니다. 거의 3년 6개월이지요! 어떤 분은 3년 반이면 천이백육십 일인데 왜 30일이 더 많은 천이백구십 일이냐? 고 물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중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보다 더 정확한 근거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데, 요한은 한 때 두 때 반 때 즉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성도들을 핍박할 기간을 마흔두 달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1:2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요한계시록 13:5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이번엔 정확히 3년 6개월이지요! 그러므로 70이레의 하루는 정확히 1년입니다.

    이뿐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보면 한 때 두 때 반 때(12:14)와 마흔두 달 혹은 천이백육십 일이 호환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1:2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요한계시록 13:5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요한계시록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요한계시록 12: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그러므로 70이레의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여러분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거짓 해석들을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요한계시록의 권위자라는 보쿰이나 이필찬 교수 등은 한 때 두 때 반 때를 교회시대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한 때 두 때 반 때를 해석한 것이 곧 마흔두 달천이백육십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해석이므로 이것을 다시 상징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면 요한이 받은 계시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무슨 근거로 69이레와 마지막 이레 사이에 간격이 있다고 하나?

    이를 ‘간격이론’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이것을 부정합니다. 그들은 다니엘 70이레 예언에서 69이레와 마지막 이레 사이에 긴 시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69이레에서 바로 마지막 이레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70이레의 문맥을 보면 그들의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70이레 예언을 실제로 해석해 보면 그들의 말이 옳지 않다는 것이 신기하게 명확히 드러납니다. 그 해석은 잠시 후에 들려드리고 먼저 예비적인 설명부터 하겠습니다.

    우선, 이들의 반론은 성경에 나오는 예언들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간격이론은 70이레 예언에 처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서 7장에 보면 바벨론, 메대 바사, 헬라, 로마제국을 네 짐승으로 표현했습니다. 다니엘은 넷째 짐승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질문했을 때 천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니엘 7:23-27 "모신 자가 이처럼 이르되 넷째 짐승은 곧 땅의 넷째 나라인데 이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라서 온 천하를 삼키고 밟아 부서뜨릴 것이며 그 열 뿔은 그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또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면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완전히 멸망할 것이요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

    이 짐승은 로마입니다. 그리고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재림 전에 적그리스도가 성도들을 박해하는 기간입니다. 갑자기 로마시대에서 대환난으로 건너뛴 것입니다. 즉 로마제국에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까지의 긴 기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간격이 존재합니다.⁵

    5   다니엘 2장 32-34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여기서 ‘쇠로 된 다리’는 로마입니다. 그런데 뜨인 돌이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립니다. 여기에도 로마시대와 예수님의 재림 사이의 간격이 존재합니다.

    또, 계시록 12장에 보면 남자를 낳은 여자가 나오는데, 예수님을 뜻하는 그 남자가 승천하고 난 후 광야로 도피하여 천이백육십 일(6) 즉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14)를 양육받습니다. 그래서 보쿰이나 이필찬 교수가 한 때 두 때 반 때가 교회시대라고 착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지만, 그 장은 교회시대가 아니라 대환난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장이기 때문입니다.⁶그래서 논점에 맞게 과감하게 그 사이의 긴 기간을 생략하고 바로 한 때 두 때 반 때에 대해서 쓴 것입니다. 거기에도 간격이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70이레의 예언에도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아도 간격이 존재합니다. 간격이론은 성경적인 것이고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6  당장 확인하고 싶은 분들은 Ⅲ. 3. (3) 광야로 도피한 여인도 교회가 아니라 믿는 유대인이다.를 읽어보십시오.

    다음으로, 70이레 예언 자체에 69이레와 마지막 이레에 간격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타나 있습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읽고 이스라엘의 장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70이레 예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다니엘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이처럼 70이레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과 예루살렘성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69이레와 마지막 이레 사이에는 유대인과 상관없는 긴 기간이 있습니다. 즉 이방인의 때 즉 교회시대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기간이 그 사이에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간격이론은 비성경적이거나 잘못된 이론이 아닙니다.

    잘 들으셨습니까? 이제 왜 70이레 예언을 저와 같이 이해해야 하는지 아시겠지요!

    3   이한수 『요한계시록』 서울: 솔로몬, 2018. p. 35.

    4   로이드 존즈 『교회와 종말에 일어날 일』 장광수 옮김.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0. p. 151.

    2. 로이드 존즈와 한 판!

    앞에서 설명해드린 것은 워밍업에 불과합니다. 지금부터 계시록 해석의 실마리와 기초가 되는 70이레 예언을 진짜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즉 저는 저처럼 이해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100% 완벽하게 증명해드릴 것입니다.

    저는 2019년 1월 17일, 70이레의 마지막 이레에서 실마리를 얻어 계시록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70이레에 대한 완벽한 해석이 저에게 주어진 것은 계시록 해석을 거의 다 마칠 무렵인 2019년 2월 16일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계시록 해석을 거의 마친 상태였고, 이 예언에 대한 해석이 크게 둘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70이레에 대한 저의 견해가 100% 옳고 다른 이들의 견해가 틀렸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지 않으면 저의 계시록 해석이 도전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70이레에 대해 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은 제 계시록 해석을 달게 받아들이겠지만, 반대편 사람들은 엉터리라고 속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70이레에 대한 저의 견해가 100% 옳다는 것을 완벽하게 증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서재에서 로이드 존즈의 『교회와 종말에 일어날 일』이라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호기심에 그 책의 목차를 읽던 중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장들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제12장 다니엘 9:24-27의 해석과 제13장 다니엘 9장의 결론과 감추어진(예비) 휴거가 그것입니다. 저는 순서를 무시하고 그것들부터 읽었습니다. 12장을 읽을 때는 별 게 없었습니다. 싱겁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13장을 읽고 저는 멘붕이 되었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로이드 존즈가 다니엘 9장의 문맥을 통해 저의 견해에 치명적인 두 가지 태클을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먼저, 로이드 존즈는 24절을 통해 제 해석에 태클을 걸었습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이 구절에 대해 로이드 존즈는 이렇게 썼습니다.

    "24절을 보면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거기에는 칠십 이레에 이 백성과 그들의 성에 절정에 이른 맹렬한 어떤 것이 일어날 것이라는 암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첫째, ‘허물이 마치며’ 그것이 최종적인 끝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끝나며’ 죄를 처리하고, 죄를 소멸시킨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마지막으로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약 전체에서 그것을 볼 수 없습니까? 어떻게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지 못하는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허물이 마치며’라는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AD 70년에 그 사람들에게 최후의 심판의 한 종류가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주님은 그 백성에게 경고하셨고 마지막에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

    그러고 나서 ‘죄가 끝나며’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복되고 영광스러운 복음이 아닙니까? 그 기간 동안에 죄에 대해 종말이 이루어집니다. 죄와 부정을 씻는 샘이 갈보리 언덕에 열려있습니다. 속죄의 길이 열려있습니다. 사죄의 길이 실제로 나타났습니다. …

    그러고 나서 그것을 이런 방식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죄악이 영속되며’ 무엇이 우리에게 위탁된 복음입니까? 그것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사’(고후 5:19) …

    그 외에 어떤 말씀이 남아 있습니까?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 영원한 의는 우리 복되신 구주와 그분의 완전한 삶 그리고 죄에 대한 제물로 자신을 친히 드리심에 의해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롭게 하시는 방법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 이것은 영원한 의이며 다른 의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 그것은 실로 영원한 의입니다. 우리 주님 안에서 드러나는 영원한 의 때문에 주님이 ‘이상과 예언이 응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 그러므로 당연히 이상과 예언이 응하게 됩니다. … 그러고 나서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분은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 신약성경은 하나님이 그분에게 기름 부으신 사실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그분은 메시아이십니다. 그러므로 24절은 전적으로 메시아적인 말씀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완전한 사역을 행하시려고 오실 때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두 가지 충격을 받았습니다.

    먼저, 다니엘이 70이레 이후에 될 일을 24절에 기록했는데, 그것이 로이드 존즈가 설명한 대로 초림 때 일어난 일과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집니다. 그 결과 70이레 예언은 종말에 대한 것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간격이론이 와르르 무너집니다. 그래서 70이레 예언은 계시록을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가 없게 됩니다.

    또한, 로이드 존즈의 해석에 따르면 24절의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가 초림하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25절과 26절에 나오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와 동일인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25-26절에 나오는 기름부음 받은 자는 초림하실 예수님이 확실합니다. 따라서 70이레 예언은 초림을 예언한 것일 뿐 재림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즈의 해석이 옳다는 것이 확실해보였습니다.

    이미 말했듯, 제게 계시록 해석의 단초가 된 것은 70이레 예언이었습니다. 그런데 뿌리부터 송두리째 흔들리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비상이 걸린 저는 꼼꼼하게 70이레 예언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참으로 놀라운 것을 저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먼저, 그동안 제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부분인데, 진짜로 24절이 70이레 후에 일어날 일을 기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때문에 공동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정하신 기간인 칠십 주간이 지나야 네 겨레와 네 거룩한 도읍으로 하여금 다시는 거역하지 않게 하시고 죄악에서 손을 떼게 하실 것이다. 죄를 벗겨주시고 영원한 정의를 펴실 것이다. 환상으로 내리신 예언을 틀림없이 이루시어 더없이 거룩한 이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성별하여 세우실 것이다."

    또, 새번역성경도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의 백성과 거룩한 도성에 일흔 이레의 기한을 정하셨다. 이 기간이 지나가야, 반역이 그치고, 죄가 끝나고, 속죄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영원한 의를 세우시고, 환상에서 보이신 것과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고, 가장 거룩한 곳에 기름을 부으며, 거룩하게 구별하실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하게도 이 번역들은 제게 문제뿐 아니라 해답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공동번역 성경의 번역이 그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정하신 기간인 칠십 주간이 지나야 네 겨레와 네 거룩한 도읍으로 하여금 다시는 거역하지 않게 하시고 죄악에서 손을 떼게 하실 것이다. 죄를 벗겨주시고 영원한 정의를 펴실 것이다. 환상으로 내리신 예언을 틀림없이 이루시어 더없이 거룩한 이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성별하여 세우실 것이다.

    이 번역을 통해 저는 24절이 70이레 후에 일어날 일을 기록한 것일 뿐 아니라, 초림이 아닌 재림에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동시에 늘 수수께끼처럼 모호하게만 보였던 24절의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라는 부분이 선명하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먼저, 허물이 그치며는 이스라엘에 대한 보응과 심판이 끝난다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즈는 이것을 예수님이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언한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멸망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으나 이것을 마지막 때 적그리스도가 유대인들을 박해하는 것으로 보면 더 잘 어울립니다.

    누가복음 21:20-22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곧 여러분에게 증명해드리겠지만, 이것은 이중예언입니다.⁸ 이 구절은 예루살렘 함락뿐 아니라 대환난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징벌의 날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허물이 그치며는 초림 때보다 재림에 더 잘 어울립니다. 왜냐하면 주후 70년에 징벌이 끝난 것이 아니라 대환난 때 끝나기 때문입니다.

    8  당장 확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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