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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라이즈 29권
메모라이즈 2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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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라이즈 2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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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is ebook

◆ 본 작품은 15세 이용가 개정판입니다 ◆

현대와는 다른 세상 홀 플레인.
김수현은 군 전역을 신고하고 집으로 귀가하던 도중 홀 플레인의 세상에 강제로 소환 당한다.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고 끝끝내 정상에 오르는데 성공하지만, 홀 플레인에서 활동한 10년의 세월은 이미 너무나도 슬픈 과거로 얼룩진 상태였다.
김수현은 슬픈 과거를 바꾸기 위해, 제로 코드의 힘을 10년의 시간을 되돌리는데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WHISTLE BOOK
Release dateJun 3, 2019
ISBN9791132757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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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라이즈 29권 - 로유진

    1. 게헨나(Gehenna)

    우리는 마침내 강철 산맥을 통과하고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이제는 굳이 주변 풍경을 볼 필요도 없다.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가 가장 명백한 증거였으니까.

    이 메시지는 비단 나뿐만이 아닌, 원정대에 소속된 모든 사용자들에게도 출력됐을 것이다.

    ‘하나, 둘, 셋…….’

    나는 속으로 하나하나 숫자를 셌다.

    그리고 정확히 3초를 센 순간.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새로운 대륙이 떠나갈 듯한 엄청난 환호가 귓전을 쩌렁쩌렁하게 울려왔다. 사용자들의 합창이 땅을 울리고 하늘 저편으로 멀리멀리 퍼져나간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동서남북 가릴 것 없이 모두 하나가 되어 함성을 지르고 있는 듯했다. 강철 산맥을 통과했다는 사실이 그만큼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이리라.

    머셔너리 로드! 총사령관의 전언입니다!

    시간이 흘러도 함성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에는 한소영이 전령을 보내왔다. 마침 점심 식사 시간이 됐으니 적당한 장소를 찾아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기꺼이 그 요청에 응해주기로 했다. 마침 부근에 적당한 장소를 알고 있거니와, 후방에 있는 사용자들도 얼른 새로운 대륙의 풍경을 보고 싶을 것이다.

    나는 곧바로 손을 들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정렬하고, 출발하겠습니다!

    그리고 재개된 진군은 약 30분 후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지점에 이르고 나서야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다.

    전 원정대의 분위기는 아직도 떠들썩했다. 아마 한소영도 이 분위기에서는 정상적인 진군이 어렵다고 판단, 그래서 최대한 빨리 적당한 장소를 찾으라는 전령을 보냈을 것이다. 식사 시간을 통해서 어느 정도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의도였다.

    ‘하기야, 도시를 발견할 때까지는 원정이 끝난 게 아니니까.’

    이 상황에서도 냉정한 이성을 유지하는 한소영에게 감탄하면서 나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클랜원들은 식사 준비에 들어간 상태였다.

    김한별은 풍경을 구경하려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백한결은 주먹 쥔 손으로 눈을 닦으며 울었고, 정하연은 달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안현, 이유정, 진수현, 사샤 네 명은 만세를 부르고 강강술래를 돌며 기뻐했고, 표혜미, 아니 제갈해솔은 어색하게 웃음 짓는 차소림의 손을 붙잡고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식사를 준비하던 고연주는 스튜를 살짝 찍어 먹어보고는 아쉬워하는 얼굴로 우유가 있으면 참 좋겠는데…….라고 중얼거렸다. 마침 옆을 지나가던 원혜수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더니 양팔로 가슴을 가리며 도망갔다. 고연주가 고개를 갸웃하자 옆에서 식사 준비를 돕던 임한나가 쓰게 웃었다.

    김동석과 박다솜은 무에 그리 즐거운지 키득키득 웃고 있었고, 남다은과 비비앙은 서로 꼭 붙어 앉은 채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박현우는 홀로 주먹을 불끈 쥔 채 남쪽을 바라보며 으아아아! 하고 괴성을 질렀다.

    선유운, 우정민, 허준영 세 명은 서로 등을 맞대고 앉은 채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신재룡이 자리에 침낭을 깔고 안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자 구예지가 살금살금 다가와 안솔의 볼을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남쪽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떼를 지어 흘러가고 있었고, 그 아래 구름 그림자가 드리운 풀빛 초원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참으로 한가로운 풍경이요, 경치였으나 사실 내 입장에서는 아픈 기억이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제4지역.’

    이곳은 1회차에서 제4지역으로 명명된 지역으로, 아틀란타 탈환전이 벌어진 장소였다. 그 당시 거의 승리 직전까지 몰아붙인 찰나, 적군이 거의 자폭격으로 마녀를 이용해 소환한 지옥 대공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만 했다. 이후 지옥 대공이 역소환되기 전까지는 아틀란타에 얼씬도 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조금 우울해지기는 했지만, 나는 곧 털어버리고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른 사용자들처럼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마녀였던 차희영은 지금 내 손아귀에 있거니와, 1회차는 1회차일 뿐이니까. 지금은 2회차니까.

    그래, 현재 지옥 대공이 소환될 건더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좋았어! 내가 첫 번째다!

    무슨 소리! 내가 첫 번째야!

    그렇게 생각한 나는 돌연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아까 강강술래를 돌던 네 명이 하나같이 시냇물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시냇물을 꿀꺽꿀꺽 들이켰는지 번쩍 머리를 치켜든 안현이 캬! 하고 탄성을 지르며 입을 쓱 닦는다.

    물맛이 장난이 아닌데? 전신으로 청량감이 스며드는 기분이야!

    맞아! 은근히 톡톡 쏘는 맛이 있는 게, 뭔가 몸 안에 활력이 도는 것 같아!

    이어서 고개를 들어 올린 이유정이 끄덕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이내 진수현이 내부의 변화를 느껴 보겠다고 자세를 잡는 걸 보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고작 시냇물에 뭘 기대하는 걸까?

    하기야, 새로운 대륙에 들어온 만큼 뭔가 특별한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이후 네 명은 ‘치료에 효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로 의견을 모아 안솔을 시냇물에 담그려는 시도를 했으나, 신재룡이 아픈 사람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고 엄한 목소리로 주의를 줌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사용자들은 킥킥 웃었고, 나는 한적한 곳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바보 네 명이 자꾸만 시냇물에 특별한 효능이 있기를 강요하니 창피한 기분을 억누를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냇물도 상당히 억울하겠군.’

    스스로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나는 적당한 곳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한동안 그러고 있자 지난 3년간의 기억이 하나하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드디어 아틀란타로 왔다.’

    그것도 단 3년 만에. 만일 나 말고 다른 1회차 사용자가 있다면 거짓말이라고 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해냈다. 해내고야 말았다. 1회차 때 걸렸던 것보다 훨씬 단축된 시간에 아틀란타로 오는 데 성공했다.

    말인즉, 그동안 흐릿하게만 느껴왔던, 집에 돌아간다는 목표가 이제야 눈에 잡힐 듯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 * *

    잿빛 세상.

    하늘도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고, 황폐화된 대지도 재색 일색인 척박한 세상. 생기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죽은 기운만이 드리운 칙칙하기 짝이 없는 세상. 모든 것이 고정된,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세상.

    이 공간의 실존을 아는 존재들을 해당 세상을 가리켜 ‘무간지옥’이라 부른다.

    무간지옥(無間地獄).

    언뜻 보면 악마들이 활동하는 마계와 비슷한 부분이 있으나, 실상은 그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다. 팔열지옥(八熱地獄) 중 최하층의 구간으로, 한눈에 봐도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잿빛만이 눈에 들어올 뿐, 그저 허무한 공허밖에 보이지 않는 죽은 공간이다.

    그러나 딱 하나 눈에 띄는 게 있다면 바로 무간지옥 정중앙에 배치된,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어탑(御榻). 사방을 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상이기는 했지만, 오직 어탑 하나만큼은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잿빛 세상에 보이는 거라고는 오직 우뚝 솟은 어탑 하나뿐이었으나, 그곳에서… 정확히는 어탑 아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은 무간지옥 전체를 채우고도 남음이 있었다.

    철그렁, 철그렁.

    그때, 잿빛 세상 어딘가에서 기분 나쁜 쇳소리가 울려오기 시작했다.

    소음의 근원은 다름 아닌 어탑을 향해 걸어가는 해골이었다.

    그냥 해골이 아니다. 크기는 보통 성인 남성만 했으나, 연신 불쾌한 소음을 내는 시꺼먼 갑옷과 탐스러울 정도의 반사광을 내뿜는 검으로 미루어보면 전사 혹은 기사가 분명했다. 무엇보다 뾰족한 뿔 투구 아래 퀭한 동공에서 흘러나오는 악기(惡氣)는 그 해골이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해골 기사가 목적지에 다다랐다. 어탑에 도착한 후, 이어지는 해골의 행동은 굉장히 이상했다.

    차마 눈도 마주칠 수 없다는 듯 동공을 내리깔더니 그대로 무릎을 꿇어 부복한 것이다. 그것도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등활 구간이 점령당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흡사 쇠를 가는 듯 거슬리는 목소리.

    해골 기사가 부복하는 방향에는 어탑이 있었고, 어탑 아래는 분명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아까 무간지옥을 채우던 존재감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해골 기사의 말을 듣지 못한 걸까? 기록이라도 읽고 있는지 그저 사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골 기사는 미동도 보이지 않고 그대로 부복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침략자 중 예전 초열 구간까지 들어온 놈이 포함돼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사락, 사락.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와 비슷한 힘을 지닌 존재가 추가로 3개체가 감지됐으며, 또한 이전에 섭취하신 개체와 동급의 존재도 여럿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사락, 사락.

    저번 침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입니다. 이대로 있으면 저번처럼 대규환 구간까지는 단번에 뚫릴지도 모릅니다.

    사락, 사락.

    대공이시여, 결단을. 저희 토벌대에게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탁!

    그 순간이었다. 마침 기록을 모두 읽었는지 세차게 덮는 소리가 들려왔다.

    콰르르르!

    이어서 무언가를 불태워 버리는 파괴적인 기운까지.

    해골 기사는 곧바로 입을 다물고는 반사적으로 온몸을 움츠렸다.

    그때였다.

    기다려라.

    마침내 어탑에 앉은 존재, 아니 대공이라 불린 존재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이한 마력이 담긴 음성이었다.

    일견 듣기로 해골 기사가 보고한 침략 사실은 대공이라는 존재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하는 듯 보였다. 목소리 자체는 여성 특유의 톤이 들어간, 무척 아름다운 음색이었으나 낮은 음성은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 일말의 고저도 보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기다리면 알아서 찾아올 것이다.

    한 번 더 목소리가 들려오자 한순간 뻥 뚫린 눈구멍에서 안광이 번쩍였다.

    해골 기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오면…….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여기까지였다. 대공의 목소리가 곤두선 순간, 해골 기사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허리를 숙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해골 기사는 몸을 돌렸고 어딘가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철그렁, 철그렁.

    그렇게 쇳소리도 서서히 사라져갈 즈음.

    차원 이동진이라. 흑염 녀석, 제법 재미있는 일을 꾸미는구나.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한참 동안 앉아있던 대공이 돌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어탑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양손을 올려 천천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원래는 상대할 가치도 없는 저급한 녀석이지만…….

    그것은 한 폭의 그림 같은 광경이었다.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살결에 연한 불빛이 덧대어진 손. 그리고 섬섬옥수를 연상케 하는, 옥을 깎아지른 듯 매끈한 손가락은 일견 보기에도 너무나 매력적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풍성하게 넘어가는 머리칼은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이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용암 폭포가 콰르르 쏟아지는 것처럼 폭발적인 마력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심심하니 한번 어울려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도톰한 붉은 입술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아스타로트의 계획은 간단했다.

    한마디로 정리해 보면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뜻으로, 한 세력을 이용해 다른 세력을 제어한다는 뜻이다.

    말인즉, 북 대륙 사용자들이 아틀란타로 도착하기 직전 지옥 대공을 강제로 인간 세상―정확히는 아틀란타―으로 보내버려 서로 싸우게 만들겠다는 소리였다.

    악마들의 입장에서는 성공만 하면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는 계획이다.

    물론 설령 지옥 대공이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 작용하는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인간 세상에 소환되는 즉시 힘의 상당 부분을 제한받게 된다. 그러나 지옥 대공의 전력(全力)을 생각해 보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아무리 제한된 힘이라 할지라도 나약한 사용자들을 상대로 학살을 벌이기에는 차고 넘칠 정도였으니까.

    여기서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지옥 대공을 데려오느냐?’는 것이다.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전제돼야만 한다.

    하나는 지옥 대공을 보내버릴 ‘차원 이동진’을 준비하는 것. 다른 하나는 진을 완성하고 발동한 후, 온전한 상태의 지옥 대공을 끌어들이는 것.

    처음 조건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차원 이동진을 준비하는 게 굉장히 번거로운 작업임은 부인할 수 없으나, 까짓것 한 번 구성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지옥 대공을 온전한 상태로 진의 발동 지점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마(魔)의 정점에 군림하는 대악마라 할지라도 100% 자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계획의 성공을 위해 아스타로트는 자신이 미끼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저번 지옥 침략 때 메피스토펠레스―악마 14군주 중 하나로, ‘미친 불꽃’이라는 이명을 갖고 있다―의 희생으로 얻을 수 있었던, ‘지옥 대공은 불에 이상할 정도로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정보를 활용한 것이다.

    물론 이것 또한 지옥 대공이 생각대로 움직여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지금 열심히 지옥 구간을 넘고 있는 아스타로트는 나름 자신 있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아스타로트도 아주 조금은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예전 초열지옥까지 내려갔을 때는 구간마다 막아서는 마수들로 상당한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가로막기는커녕 마수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실상은 이미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지옥 대공이 기다리라는 명을 전했기 때문이나, 그걸 알 턱이 없는 아스타로트로서는 당연히 가질 법한 의문이었다.

    어쨌든 일은 벌려놨고 계획은 시작됐다. 악마들은 이미 등활지옥을 점령한 상태였다. 지금쯤 주법에 일가견이 있는 벨제부브가 한창 차원 이동진을 구성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다 바알과 아스모데우스까지 따라왔으니 아스타로트가 자신 있어 하는 것도 나름 이해가 갈 만한 일이었다. 이 정도의 전력이라면 지옥 대공을 이기지는 못해도, 나름 버틸 수는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한참 동안 달리던 아스타로트는 멀리 어탑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현재 아스타로트가 가로지른 구간은 ‘대규환지옥’으로, 팔열지옥 중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구간이다. 이다음 구간이 바로 여섯 번째인 ‘초열지옥’으로, 예전 아스타로트가 지옥 대공에게 패배해 도망친 구간이기도 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미간을 찡그린 아스타로트는 이내 어탑까지 20미터를 남겨두고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걸음도 정지했다. 전방을 바라보는 아스타로트의 시선은 어느새 황당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우뚝 솟은 어탑 아래에는 전신에서 은은한 붉은 빛을 흘리고 있는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미끈한 두 다리는 꼭 붙인 채 비스듬하게 기울였고, 양손은 가지런히 모아 왼쪽 무릎에 얌전히 얹었다. 약간 멍해 보이는 눈동자는 먼 산을 향하고 있다. 마치 하염없이 애인을 기다리는 여인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여인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스타로트는 숨이 막힐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 투명한 살결도 그렇지만, 교교하게 가라앉은 두 눈동자는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그윽한 빛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아스타로트는 한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을 맛봤지만.

    네놈은 여전히 행동이 굼뜨구나.

    이내 지옥 대공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굼뜨다…고?

    그래. 며칠을 기다렸는데도 오지 않으니 결국에는 이 몸이 직접 올라올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 느릿하기 짝이 없는 것.

    아스타로트가 더듬거리자 지옥 대공이 어탑에서 우아한 자태로 일어나며 말했다. 목소리는 고요했지만, 말은 상대를 조롱하려는 의도를 다분히 품고 있었다. 아스타로트의 입이 비틀렸다.

    이야, 이거 기분 좋은데. 너 정도나 되는 존재가 이렇게 친히 올라오시다니 말이야. …그렇게나 나의 힘이 탐나는 건가?

    헛소리도 그 정도면 수준급이구나.

    아스타로트가 천연덕스레 말을 꺼냈지만, 코웃음 친 지옥 대공은 헛소리로 일축해 버렸다.

    "확실히 저번에 일말의 관심을 두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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