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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라이즈 17권
메모라이즈 1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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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라이즈 1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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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is ebook

◆ 본 작품은 15세 이용가 개정판입니다 ◆

현대와는 다른 세상 홀 플레인.
김수현은 군 전역을 신고하고 집으로 귀가하던 도중 홀 플레인의 세상에 강제로 소환 당한다.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고 끝끝내 정상에 오르는데 성공하지만, 홀 플레인에서 활동한 10년의 세월은 이미 너무나도 슬픈 과거로 얼룩진 상태였다.
김수현은 슬픈 과거를 바꾸기 위해, 제로 코드의 힘을 10년의 시간을 되돌리는데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WHISTLE BOOK
Release dateJun 3, 2019
ISBN9791132757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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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라이즈 17권 - 로유진

    1. 늦어버린 한 걸음

    후웅! 철썩!

    흑!

    낭창낭창 휘어 들어오는 채찍을 간신히 걷어내며 검후는 깊은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는 정말 한계라고.

    와. 대단하네. 그 상처를 입고서. 혹시 시크릿 클래스?

    채찍을 든 여인이 이채를 띠었지만, 검후는 이제 대꾸할 힘도 없었다. 부랑자들과의 전투 후 체력은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그 상태에서 불의의 일격에 복부가 꿰뚫리고 바닥에 두세 번 내동댕이쳐졌다. 정신력으로 겨우 일어나기는 했어도 이미 내구는 심각히 저하된 상태였다.

    어쩌면 지금껏 홀로 맞상대한 게 기적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그만큼 검후의 상태는 심각했다.

    자꾸만 아득해지는 정신을 악착같이 붙잡으며 검후는 곁눈질을 했다. 아까와 같은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어쩌면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쓰러진 남자와 그를 둘러싼 채 울부짖는 세 명만이 보일 뿐이었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걸 확인하자 검후의 눈에 암담함이 스쳤다. 그때였다.

    전투 중에 한눈을 팔면 어떡해.

    푹!

    아악!

    그것은 정말로 아차 한 순간이었다. 검후가 낙담한 사이를 노린 여인이 그녀를 정확히 찔러온 것이다. 검후는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지만, 결국 채찍이 오른쪽 어깨를 후려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설아를 놓쳤고, 이내 몸을 허물어뜨렸다.

    휘리릭! 착!

    이윽고 채찍을 회수한 여인, 유리나는 손을 털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체 다섯 구가 보였지만, 아까 달려 나간 떠돌이들은 못해도 네 배는 되는 인원이었다. 눈앞의 사용자들에게 몰려 도망쳤다고 생각하기는 힘들고, 누군가에 쫓겨 급히 달아난 모양이었다.

    시몬이 주변만 살피고 오라고 했었지?

    그래도 확실히 해야겠다고 생각해 유리나는 남은 세 명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하나같이 슬픔에 젖은 얼굴로 한 남자를 끌어안고 흐느끼는 중이었다. 그녀는 잠깐 고개를 갸웃하곤 어느 정도 거리를 남긴 채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왼손을 무릎에 짚고 살짝 허리를 숙이며 말을 걸었다.

    저기, 있잖아.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혹시 여기로 약간 뚱뚱한 남자가 오지 않았니?

    약간 뚱뚱한 남자란 유리나의 시선에서 본 이강산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말을 알아들을 수 없기도 했거니와, 비로소 정신을 차린 안현이 분노 가득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유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안현이 창을 집고 일어나려는 순간, 지체 않고 채찍을 휘갈겼다.

    푹.

    채찍은 무방비 상태의 가슴에 손쉽게 꽂혔다. 울컥 터져 나오는 핏물과 함께 높은 비명이 사방을 울렸다. 담담한 얼굴로 채찍을 회수하자 끈에 달린 가시에 피와 살점들이 딸려 나왔다. 창을 쥔 자세 그대로 안현의 몸이 무너졌다.

    아, 안현? 이 XX 년이……!

    그 상태 그대로 유리나는 다시 한 번 채찍을 휘둘렀다.

    푹.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던 이유정의 움직임이 일순 뚝 멈췄다. 한순간 믿을 수 없다는 빛이 얼굴을 스쳤다. 이윽고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옆구리를 응시했다. 이미 벌어져있던 상처였는데, 그 틈을 뚫고 들어온 게 있었다.

    이유정은 떨리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안솔… 도망…….

    풀썩!

    이어서 몸을 허물어뜨리는 이유정을 보자 안솔은 순간적으로 호흡을 멈췄다. 잠시 후 한순간 정신이 나간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저 갑작스레 온몸에 힘이 빠져 다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언제나 반짝반짝했던 눈동자가 서서히 빛을 잃어 잿빛으로 변하였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텅 비어버린 내면에서 오직 아까부터 박동하는 심장만이 안솔을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온 유리나는 다시금 상냥히 물었다.

    그 남자 못 봤어? 여기 온 게 맞아?

    아…….

    떠돌이들의 시체는 너희들이 처리한 거야? 혹시 어디로 갔는지 기억하니?

    안…….

    의미 없이 돌아오는 대답에 유리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만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오른손을 한 번 살짝 흔들었다. 채찍은 S자를 그리며 짝, 소리가 날 정도로 대지를 내리쳤고, 이내 끝이 튀어 올라 뱀처럼 쇄도했다.

    그때였다. 금 간 구슬 하나가 채찍의 진로로 불쑥 끼어들었다.

    우웅! 쨍그랑!

    응?

    유리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분명히 목을 노렸음에도 불구하고 채찍은 안솔에 닿지 못했다.

    구슬의 정체는 바로 개량형 수호의 방패였다. 부랑자 때 보호막이 깨져 타격을 입긴 했지만, 구슬 자체가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주인인 안솔의 위험을 감지한 순간, 불완전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뛰어든 것이다.

    푸스스. 푸스스스…….

    방금 전의 보호막이 마지막 힘이었는지 극히 일부만 남은 구슬이 대지에 떨어져 굴렀다. 산산이 부서진 파편은 서글프게 허공을 흩날렸다.

    안 돼…….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파편 속에서 안솔은 읊조렸다.

    뭐지?

    유리나는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그러나 조각난 구슬을 보고는 채찍을 고쳐 잡았다. 그에 따라 끈이 곡선으로 길게 늘어지고, 땅에 닿았다. 이윽고 그녀는 채찍을 잡은 손에 약간 힘을 주었다.

    안솔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안 돼……!

    그때.

    한없이 치솟아 오르던 안솔의 박동이, 진동이 최고조에 오르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게 정지했다.

    쿵쾅쿵쾅 뛰던 심장이 멎고, 몸에 흐르던 떨림도 사그라졌다. 마치 속 빈 인형처럼 그녀는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했고,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다.

    잘 가.

    휘리릭!

    이윽고 안솔의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지는 것과 동시에 채찍이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그리고 여지없이 그녀의 복부를 부드럽게 관통한다.

    복부를 뚫은 감촉은 아픔으로 바뀌었다. 이어서 전신으로 퍼지는 고통에 비명이 나오려는 순간, 시간이 완만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그 찰나의 순간, 안솔의 시선에 주변에서 벌어진 모든 광경이 눈에 들었다.

    멀리 죽은 듯 쓰러져있는 검후가 보였다.

    둥그런 피웅덩이에 몸을 누인 안현이, 이유정이 보였다.

    그리고 어느새 싸늘하게 식은 채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신상용이 보였다.

    모두가 쓰러져 있었다. 아무도 자신을 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든 광경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그것은 끝이 났다. 곧바로 정상으로 돌아온 것과 함께 몸이 밀린 안솔의 고개가 번쩍 치켜 들렸다.

    이윽고 정지했던 박동이.

    두근!

    멈췄던 진동이.

    두근!

    안 돼애애애애애!

    비로소 안솔의 입술이 떼어진 바로 그 순간,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각성의 조건을 만족합니다. 당신의 간절한 기원에 응답하여 각성 시크릿 클래스 ‘광휘의 사제(Priest Of Brilliance)’의 계승을 실행합니다.]

    우우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안솔의 전신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 * *

    수현. 잠시만요.

    한창 들판을 질주하던 도중, 고연주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달리는 그대로 고개를 돌리자 날카로운 눈빛을 사방에 뿌리는 그녀가 보였다.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사용자들이나 적들이나, 갑자기 수가 줄었어요. 아니,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요.

    흠.

    고연주의 말에 나는 마력 감지로 주변의 기척을 잡아보았다.

    확실히 그랬다. 정하연에 이어 신재룡, 그리고 김한별과 해밀 클랜원들을 구할 때까지만 해도 제법 많은 수의 적을 상대하고 피했었다. 그러나 고연주를 만난 이후부터 갑작스레 적들의 출현이 잦아들었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적들의 목적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사각지대일지도 모릅니다.

    사각지대요?

    전위 부대가 앞서서 길을 뚫고, 그 뒤를 수뇌부들이 따라가는 방식이죠.

    그렇다면…….

    머리 회전이 빠른 고연주는 단박에 내 말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바로 얼굴이 핼쑥하게 변하는 게, 약간의 망설임이 이는 모양이다.

    두려우면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헛소리 말아요.

    고연주는 일견 나를 째려보았다. 사실상 무조건 돕겠다고 따라온 그녀였기에 나를 혼자 놔두고 갈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림자 여왕’ 정도라면 적잖은 도움을 기대할 수 있기에 나 또한 흔쾌히 허락한 상태였고.

    아무튼 나로서는 반길 만한 상황이었다. 남은 인원을 구해낸 다음 운만 따라준다면, 원래 목표한 수뇌부 몇 명은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애들의 운반은 고연주에게 맡길 예정이었다.

    이제 남은 인원은 안현, 안솔, 이유정, 신상용이었다. 그리고 네 명은 공교롭게도 함께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거의 비슷한 위치에 몰려있었다. 대충 가늠해 보아 이 최고 속도를 유지한다면 곧 도착할 수 있다.

    아무튼 나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한 애들이었고, 무엇보다 안솔을 잃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해서 얼른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박차를 가한 찰나였다.

    [사용자 신상용의 정보를 갱신합니다.]

    갑작스레 떠오른 메시지에 나는 정보를 확인했다.

    ‘응?’

    그러나 정보가 떠오르지 않는다. 전장의 가호가 전해주는 정보는 위기에 몰린 아군의 위치를 전해주는 것. 애들의 정보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신상용의 정보는 사라졌다.

    불현듯 불안한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

    멀리서 거대한 빛의 기둥 하나가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아 올랐다. 그것은 곧 하늘에 둥그런 타원을 그렸고, 구멍 사이로 거대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눈을 꼭 감은 채 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형상은 꼭 천사라는 느낌을 주었다.

    고오오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갑작스레 하늘에 투영된 천사. 눈앞의 광경은 분명히 1회차 때 단 한 번 본 기억이 있었다.

    그래. 이것은 바로…….

    [각성 시크릿 클래스. 광휘의 사제가 출현했습니다!]

    [기적(Miracle)의 발동을 확인합니다!]

    ‘기적이다!’

    그때, 감겨있던 천사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화아아악!

    그리고 천사의 눈이 완전히 떠진 순간, 천사의 전신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일대를 뒤덮을 정도로 내리쬐는 강렬한 빛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살며시 눈을 뜨자 내려온 빛이 내게 스며드는 광경을 볼 수 있었고, 허공에 새로운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모든 체력이 회복됩니다!]

    [모든 마력이 회복됩니다!]

    [모든 상태 이상이 회복됩니다!]

    한순간 몸 상태가 전부 회복됐다. 전장을 휘젓느라 알게 모르게 지쳐 있었는데, 단숨에 원상태로 돌아온 것이다.

    아니, 원상태도 아니다. 화정을 얻은 이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활력이 전신을 맴돌고 있었다. 이 정도로 몸이 최고조에 오른 것은 정말 간만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어머?

    고연주도 새된 음성을 내질렀다. 약간 당황한 얼굴을 하면서도 팔을 움직이는 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광휘의 사제의 고유 능력, 기적.

    이것이 발동됐다는 소리는…….

    수현!

    그 순간, 나는 지체 않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주변 풍경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

    분명 안솔의 광휘의 사제 전직은 기뻐할 일이었다. 내가 생각해 둔 계획들을 적어도 두 배, 아니 세 배는 빠르게 앞당길 수 있으니까.

    그러나 까닭 없는 불안감이 마음을 엄습하는 건 도대체 왜일까?

    해답은 바로 알 수 있었다. 한껏 예민해진 감각에 드디어 애들의 기척이 감지된 것이다. 그리고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줄어들었을 즈음, 나는 깊은 신음을 흘렸다.

    먼저 보이는 건, 검후가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문제가 아니었다. 부근에는 안현도, 이유정도, 신상용도 하나같이 피웅덩이 속에 몸을 누인 상황이었다.

    한순간 머리가 멍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범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가시 달린 채찍이 쥐어져 있었다.

    하. 어리어리해 보여서는, 무서운 힘을 숨기고 있었네.

    중얼거리는 여인의 앞에는 등에 하얀 날개를 일렁이는 안솔이 눈을 꾹 감은 채 앉아있었다.

    이윽고 여인이 채찍을 하늘 높이 들었다. 거리는 아직 남아있었다.

    나는 지체 않고 빅토리아의 영광을 들어 있는 힘껏 여인을 향해 던졌다.

    쐐액!

    응?

    그 순간,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바로 제3단 비행을 펼쳤다.

    퉁! 팟! 쿵!

    도약, 이형환위, 궁신탄영 후 눈을 뜨자 뒤늦게 들어온 검이 여인에게 짓쳐드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챙!

    꺄악!

    오, 오라버니?

    옆으로 검이 튀어 오르는 소리와 함께 높은 비명이 들린 순간, 미약한 목소리가 나를 일깨웠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눈을 뜬 안솔이 나를 올려다보는 게 보였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왜… 왜 이렇게 늦게……. 다… 다…….

    자신이 한 일을 모르는 걸까? 안솔의 목멘 어조가 귓가로 흘러든다.

    나는 어떤 일보다 먼저 제3의 눈으로 주변을 확인했다. 어느덧 품에 둔 엘릭서 한 병을 꽉 쥔 채로.

    [사용자 남다은(정상)]

    [사용자 안현(정상)]

    [사용자 이유정(정상)]

    그러나 제3의 눈으로 확인한 세 명은 살아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몸은 쓰러져 있었지만, 그들 또한 기적의 효과를 받은 게 틀림없었다. 나는 다급한 와중 가슴을 쓸어내리며 남은 한 명을 응시했다.

    [사용자 신상용(사망)]

    ‘…….’

    그러나 신상용이 사망했다.

    그 순간, 나는 홀린 듯 다가가 신상용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몸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다. 아무래도 채찍을 든 여인의 소행인 듯하다. 무척 아팠을 터인데, 얼굴은 고통이 아닌 편안하고 잔잔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그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나는 조용히 신상용을 응시했다.

    ‘…….’

    아무렇지도 않다. 어차피 한두 명은 죽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게 고연주나 안솔이었다면 아까웠겠지만, ‘키메라 연금술사’는 비비앙이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다. 그냥 담담한 기분이었다. 사람을 잃어본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익숙한 상황이었다.

    분명히 신상용의 죽음을 확인했음에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

    아니.

    아무런 기분도 느끼지 못했다.

    * * *

    안솔의 눈에 보이는 허공에는 여러 메시지들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단 하나, 김수현뿐이었다.

    오라버니…….

    안솔은 김수현의 등을 응시했다.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눈에 띄는 상처는 보이지 않지만, 그의 등은 처참했다. 갈기갈기 찢어진 푸른 용기사의 외투부터 내부에 덕지덕지 묻은 핏자국까지. 그동안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여과 없이 알려주는 외관에 문득 안솔은 부끄러움이란 감정을 느꼈다. 이윽고 그녀가 조심스레 손을 뻗으려는 찰나였다.

    하…….

    나직한 한숨과 함께 김수현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순간, 주변의 모든 공기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한순간 턱 막혀오는 숨에 안솔은 절로 손을 떨어뜨렸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몸이 먼저 반응했던 걸까.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화륵! 화르륵!

    순간 얼굴을 치켜든 김수현의 눈에서 한 줄기 맑은 불꽃이 흘러나온다. 그와 동시에 강둑을 범람하는 홍수처럼 모든 것을 깡그리 집어삼킬 듯한 가공(可恐)할 기운이 세차게 뿜어졌다.

    기운은 순식간에 일대를 점령했다. 흐르는 기운 속에서 그 누구도 함부로 움직일 생각을 못했다. 그것은 명명백백한 살기를 품고 있었다.

    터벅터벅.

    김수현은 담담한 얼굴로 걸어 바닥에 떨어진 빅토리아의 영광을 주워들었다. 유리나는 괴어있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한 행동은 처음부터 분명 허점을 보이고 있음에도 그녀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으니까. 여기서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바로 죽는다는 것을.

    * * *

    문득, 목이 바짝 타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아무 의미 없이 머리카락을 세게 쓸어 넘겼다. 그리고 아직 미동도 않은 채 서있는 적에게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노엘 유리나.

    이름을 부르자 유리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나… 나를 알고 있어?

    알고 있고말고.

    적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친다. 나는 대답 대신 검을 상단으로 들었다. 그리고 손목을 살짝 비틀어 빅토리아의 영광을 세로로 돌렸다.

    회의 때도 몇 번 거론됐었고, 제3의 정보로도 확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1회차 때 ‘악녀’로 불리며 시몬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던 여인, 아니 적.

    그러나 내가 유리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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