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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스물다섯 선박 기관사의 단짠단짠 승선 라이프
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스물다섯 선박 기관사의 단짠단짠 승선 라이프
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스물다섯 선박 기관사의 단짠단짠 승선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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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스물다섯 선박 기관사의 단짠단짠 승선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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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발 딛고 선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바다와 저마다의 항해가 있는 거니까

인생의 방향타를 잡지 못해
수없이 흔들리고 불안할 때마다…
기억하세요.

당신만의 바다에서는 마음껏 헤엄치기만 하면 된다고,
어느 길로 가든 자신을 믿고 가면 그게 정답이라고,
결국엔 내 선택이 옳았다고 증명할 힘도 내게 있다고.

뱃사람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침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인생에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큰 파도가 불어닥쳐도 좌절하지 않고 뚫고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내면이 단단한 사람, 그것이 진정한 뱃사람의 모습 아닐까.
– 본문 중에서

Language한국어
Publisher현대지성
Release dateApr 5, 2022
ISBN9791139703641
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스물다섯 선박 기관사의 단짠단짠 승선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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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 전소현

    뼛속까지

    섬집 아기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혼자 남아 집을 보던 아기가 바닷소리를 듣고 저절로 잠이 들었다는 기적과도 같은 이야기.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자장가 ‘섬집 아기’다. 징그럽게 잠 안 자는 아기를 키워본 엄마라면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지 공감할 것이다. 자장가 속에나 나오는,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 전설일 뿐이라고 툴툴댈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기적이라는 게 정말 있기도 한 것 같다. 소현이그랬다. 소현은 바다와는 아무 상관없는 서울에서 태어나 쭉 수도권에서 자랐다. 물을 무서워해 수영도 배우지 못했다. 여름철에 바다로 피서를 가면 열심히 헤엄치며 노는 사람들 사이에서 물에 발만 살짝 담갔다가 얼른 물러나곤 했다.

    바다가 무서웠지만 왠지 싫지는 않았다. 물에 들어가는 게 무서웠을 뿐 바라보는 건 좋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고 푸른 바다를 보고 있으면 가슴속까지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런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누구나 바다에서 그런 기분을 느끼기 때문에 자기가 바다를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들 이야기는 달랐다. 소현은 태어나서부터 바다를 ‘특별히’ 좋아하는 아이였다.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모두 하나같이 소현이 참 키우기 힘든 아이였다고 입을 모았다. 아기가 잠만 잘 자면 효도한다는 말이 있는데 소현은 아예 잠을 ‘거부하는’ 아기였다. 요즘 엄마들 말로 ‘등 센서’를 장착하고 태어나 등을 바닥에 대기만 하면 번쩍 눈을 뜨고 자지러지게 울었다.

    24시간 내내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울기만 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엄마는 이 첫 아이를 외할머니와 부둥켜안고 울면서 키웠다. 여자 셋이 밤마다 번갈아가면서 눈물 콧물 흘리는 나날이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직장에 나가면서 외할머니 댁에서 지내게 됐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외삼촌은 소현이 밤마다 울어대는 통에 아예 잠을 못 잤다고 토로했다.

    결국 엄마는 소현을 잠시 친가에 보내기로 했다. 외가는 가까워서 아침에 맡기고 저녁에 데려올 수 있었지만 친가는 한번 맡기면 주말에나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가까이에 두려고 했지만 소현이 밤마다 어른들의 잠을 싹 빼앗아가는 통에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그 정도로 잠투정이 극성이었다.

    할머니 댁은 바다로 둘러싸인 섬, 제주도였다. 아빠가 대학 때 서울로 올라온 뒤 명절 외에는 거의 방문하지 못했던 아빠의 고향이었다. 소현은 비행기 안에서도 통제 불능이었다. 1시간 내내 발악을 하며 울어댔다. 제주도에 가기도 전에 기진맥진한 엄마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소현이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갑자기 울음을 뚝 그쳤다. 엄마는 지금도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아기가 제주도 섬을 밟자마자 거짓말처럼 방긋방긋 웃었다. 엄마는 소현이 제발 조금이라도 덜 울길 바라면서 친가에 맡겼다. 친할머니는 이미 설명을 충분히 듣고 마음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며칠 뒤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시작부터 핀잔이었다.

    애가 이렇게 잘 자는데 넌 뭐가 힘들다고 그러니.

    엄마는 할 말을 잃었다. 일단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는 그렇게 안 자던 애가 마침내 자기 집을 찾아가니 마음이 편안한가 보다고 시어머니의 노고에 에둘러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소현을 재운 건 할머니도, 아빠의 고향집도 아니었다. 바다였다. 익숙한 엄마와 외할머니가 있을 때도 칭얼대던 소현이 난생처음 보는 친할머니 곁에서 울음을 그친 건 바다 때문이었다. 나중에 들은 말인데 잠을 안 자고 칭얼거릴 때 집 앞 바다로 업고 나가면 바로 잠이 들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업어가도 모를 만큼 쿨쿨. 할머니가 아빠를 키울 때 불렀던 자장가 ‘섬집 아기’는 부를 필요도 없었다. 거의 기적이었다.

    할머니 입에서 역시 육지 것들은 모르는 바다의 맛을 아네!라는 말이 기분 좋게 나올 만큼 제주도에서 잘 먹고 잘 잤다. 바다만 보여주면 새근새근 잠들던 아기는 자라서 1년 내내 바다 위에서 일하는 어른이 됐다. 그리고 이제는 바다에 태풍이 몰아쳐도 모르고 쿨쿨 잔다. 마치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가를 듣는 것처럼.

    K-장녀의

    방은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장녀로 살아남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딸-딸-아들 집안의 큰딸은 더더욱 그렇다. 21세기가 된 지가 언젠데 세상이 큰딸에게 기대하는 바는 아직도 20세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소현 역시 어려서부터 ‘넌 우리 집안의 기둥이야’, ‘동생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지’부터 시작해서 ‘큰딸은 살림 밑천이야’라는 고릿적 이야기까지 듣고 살았다.

    자연스럽게 알 수 없는 책임감에 시달렸다. 소현은 뭐든지 잘하는 아이여야만 했다. 동생들은 미술, 요리, 체육 등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볼 수 있었다. 심지어 남동생은 막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받는 행운아였다. 하지만 소현은 그러면 안 되는 K-장녀였다. 부모님이 해라 해라 그러지 않아도 열심히 했고, 동생들이 원하지 않아도 알아서 매사 양보했다.

    가족끼리 방을 나눌 때도 그랬다. 다섯 식구가 사는 집에 방은 많아야 3개였고, 동생 하나는 남자였다. 어릴 때는 엄마와 함께 방을 썼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성별이 같은 여자 둘이 한 방으로 묶이고, 남동생은 떡하니 방 하나를 차지하는 부당한 상황이 벌어졌다. 공부는 열심히 해야 했고 방은 양보해야 했다. 그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바쁜 부모님 대신 서로 의지하면서 챙겨주는 동생들이 있어 든든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자기만의 방을 갖고 싶었다. 무슨 버지니아 울프도 아니고 혼자 고독을 씹고 싶은 문학소녀도 아니었지만 친구들과 키득거리는 통화 한번 편하게 못 해보는 집이 답답한 것도 사실이었다.

    화장실도 딱 하나였다. 혼자만의 화장실에서 우아하게 머리를 감고 학교로 향하는 아침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한창 학교에 다니는 아이 셋에 맞벌이하는 부모님까지 출근, 등교 시간이 겹친 화장실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반은 칫솔 물고 밖에서 기다리면 하나는 세수하고 하나는 옆에서 볼일 보는 식이었다.

    전주에 위치한 상산고로 진학하면서 기숙사로 들어가게 됐다. 드디어 좁은 집을 벗어나나 싶었다. 그런데 웬걸,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작은 방 하나를 5명이 함께 쓰는 구조였다. 그것도 가족이 아닌 고등학생 다섯이었다. 매일 나오는 머리카락만 산더미였다. 모아서 매주 가발을 하나씩 만들어도 될 정도였다.

    화장실 줄 서는 건 집에서나 여기서나 마찬가지였다. 볼일 좀 마음 편히 보는 게 소원이란 생각에 찔끔 눈물이 나면서,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하는 자괴감에 휩싸였다. 이 생활은 대학교까지 계속됐다. 함께 방을 쓰는 인원은 둘로 확 줄었지만 좁아터지고 사생활 보장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여기도 답답, 저기도 답답했다.

    혼자만의 방을 선사한 건 뜻밖에도 바다였다. 모든 해기사들에겐 각자 방이 하나씩 제공된다. 배를 타면서 마침내 20여 년 만에 자기 방을 갖게 됐다. 당당히 자기 힘으로 얻은 방이었다. 생애 첫 혼자만의 방문을 열어보면서 배 타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대 사관학교 상산고에서

    뜬금없이 해양대로?

    소현은 어려서부터 똑똑했다. 또래보다 말을 빨리 시작했고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한글을 혼자서 다 떼버렸다. 능력은 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옛말처럼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아이였다. 특히 수학을 잘했다. 수학이 본격적으로 성적을 좌우하기 시작하는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전교 1등을 도맡아 했다.

    타고난 머리만 믿고 게으름 피우는 일도 없었다. 성실함이 최고의 장점이라고 부모님도 인정할 만큼 한순간도 허투루 보내는 법 없는 모범생이었다. 재능과 노력으로 무장한 소현에게 적수는 없었다. 이름보다 ‘전교 1등’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였다. 물론 그중에서도 수학은 가장 자신 있었다.

    그러니 수재들의 집합소인 상산고에 원서를 넣은 건 당연했다. 상산고는 대치동에서 세 살부터 사교육에 둘러싸여 준비한 아이들도 족족 떨어진다는 자타공인 최고의 명문이었다. 강남 한복판이 아닌 경기도 외곽 출신에 고액 과외 한번 받아본 적 없었지만 높은 성적으로 당당하게 상산고에 합격했다. 상산고는 ‘의대 사관학교’로 불릴 정도로 졸업생 대부분이 의대로 진학한다. 부모님은 딸이 벌써 의사라도 된 것처럼 기뻐했다. 자신감이 충만한 소현도 그대로 졸업해 의사가 될 줄 알았더랬다.

    그런데 인생이 항상 그렇게 장밋빛일 리는 없었다. 1학년 첫 학기부터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성적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첫 시험부터 전교 꼴찌에 가까운 점수가 나왔다. 충격이었다. 몇 번이나 성적표를 다시 봤지만 세 자리 수는 그대로였다.

    이럴 리가 없는데. 원래도 열심히 했지만 더는 열심히 할 수 없을 만큼 이를 악물었다. 기숙사 자습실 문을 제일 먼저 열고 들어가 제일 늦게 닫고 나왔다. 잠은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을 만큼만 잤다. 그런데도 성적은 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자신 있었던 수학 점수가 달랑 50점이었다. 정말 충격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존심이 상했다. 잠 안 오는 약까지 먹어가면서 공부했지만 바로 어제까지 옆에서 게임하다가 시험 본 친구는 100점, 자기는 50점이었다. 이쯤 되자 자기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의심은 학교생활이 계속되면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어려서부터 머리 좋다, 똑똑하다, 수재다, 천재다 소리만 듣고 자라 자기가 정말 그런 사람인 줄 착각했었다. 결국 머리가 좋은 게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적은 제자리였다.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타고난 머리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인정하자 학교생활은 지옥으로 변했다. 중학교 때 수재로 이름을 날리던 언니가 특목고에 진학했다가 낮은 성적에 충격을 받고 한 학기 만에 자퇴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도 혹시 그렇게 되는 건 아닐까. 극도의 스트레스와 떨어진 자존감으로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곧 의대에 진학할 딸의 모습을 그리며 열심히 뒷바라지하고 계신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 사이에 잠 못 드는 나날이 계속됐다.

    항상 1등이었다가 전교 꼴찌가 된 심정이란.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속속들이 털어놓을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도 결과가 그렇다는 사실이 더욱 비참했다. 자존감은 끝없이 추락했고 시험 때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매번 쾌감과 희열을 선사해 마음 깊이 애정했던 공부에게 완전히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단 한 번도 놓아본 적 없었던 공부가 싫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험을 앞두고는 밥이 아예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빈속인데 시험만 보면 토하고 양호실로 가기 일쑤였다. 시험 시간에는 손이 덜덜 떨리고 앞이 하얘져 글씨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청심환을 달고 살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우울증, 자퇴, 검정고시 같은 단어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결국 고등학교 3년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그만두지도 못하고 잘하지도 못한 채. 전교생 대다수가 SKY와 의대, 치대, 한의대에 진학하는 분위기 속에서 다른 학교를 선택할 자유조차 없었다. 안 될 걸 알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성균관대 의대를 목표로 준비했다. 하지만 스스로 알고 있었다. 의사는 멀어진 꿈이란 걸.

    너무나 예상 가능하게 수능을 망쳤지만, 그럼에도 절망했다. 학창 시절 내내 공부 말고는 한 게 없었다. 특히 고등학교 3년 동안은 공부만 죽어라 했다. 노력하면 답이 올 줄 알았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그 끝은 의대 원서조차 내지 못할 초라한 수능 성적이었다.

    돌이켜 보면 간절함은 부족했다. 투철한 사명감이나 대단한 계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공부 잘하니까 당연히 의대를 목표로 했다. 의사가 적성에 맞을지, 의대에 진학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의사가 되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절망스러웠다. 미래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의사만 목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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