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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라이즈 35권
메모라이즈 3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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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라이즈 3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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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is ebook

◆ 본 작품은 15세 이용가 개정판입니다 ◆

현대와는 다른 세상 홀 플레인.
김수현은 군 전역을 신고하고 집으로 귀가하던 도중 홀 플레인의 세상에 강제로 소환 당한다.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고 끝끝내 정상에 오르는데 성공하지만, 홀 플레인에서 활동한 10년의 세월은 이미 너무나도 슬픈 과거로 얼룩진 상태였다.
김수현은 슬픈 과거를 바꾸기 위해, 제로 코드의 힘을 10년의 시간을 되돌리는데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WHISTLE BOOK
Release dateJun 3, 2019
ISBN9791132757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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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라이즈 35권 - 로유진

    1. 본처(本妻) 강림(降臨) (2)

    은은히 흐르는 달빛조차 살라 먹는 어두운 저녁, 밤공기는 상당히 차가웠다. 쉴 틈 없이 칼바람이 몰아치는 설산보다야 낫지만, 그렇다고 설원의 밤이 따뜻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이지, 사실 춥기는 매한가지였다.

    타닥, 타닥타닥!

    불똥이 튀기는 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를 때렸다.

    신기한 일이었다. 장작은커녕 주변에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데, 눈밭에 불이 타오르고 있다. 세기도 생각보다 강렬해 설원에 고요히 쌓인 월광(月光)에 붉은빛이 섞여 일부나마 어둠을 밝힐 정도였다.

    그렇게 불씨가 분분히 흩날리는 장소에서는 여러 명이 둥글게 둘러싸 불을 쬐고 있다. 주변에는 천막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있고, 약간 작아 보이는 왼쪽 천막은 안에서 미세한 불빛이 새어나온다. 중간중간 움직이는 기척이 들리기도 했고 가끔 콧노래 부르는 소리도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불 주변에 기이할 정도의 침묵이 흐르는 건 저 콧노래를 듣기 위함인가, 아니면 다른 까닭이라도 있는 건가.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불 따라 나부끼듯 요동친다.

    김수현이 쓰러진 이후, 게헨나를 제외한 열세 명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 신전에서 느닷없이 도망치듯 벗어난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수현마저 갑자기 쓰러졌다. 거기다 악몽과도 다름없는 게헨나까지 툭 나타났으니 어찌 놀라지 않고 배기랴.

    그러나 동료들은 간신히 짧은 시간에 진정할 수 있었다. 게헨나의 차분한 설명과 적의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업적 보상으로 출력된 메시지가 혼란을 가라앉히는 데 크게 일조했다. 또한 김수현이 소진한 생명력을 게헨나만이 채워줄 수 있다는데, 달리 선택할 길이 없기도 했다.

    결국 서둘러 철수한 열네 명은 황급히 야영지를 건설했고, 현재 노심초사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물론 가만히 앉아있기만 한 건 아니었고, 갑작스럽게 맞이한 상황을 이해하려 나름 애를 쓰고 있었다.

    우선 게헨나의 등장 배경은 이해했다. 안솔이 살그머니 손을 들어 죄(?)를 고백한 것이다. 소환 과정을 정확히 본 건 아니지만, ‘괴물 소환 상자 4’와 ‘기적’의 조합이 현재로서는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이었다.

    게헨나가 악신을 물리쳤다는 것도 이해했다. 사실 이해할 것도 없는 게, 허공에 출력된 메시지가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게헨나의 공헌은 그 누구보다 압도적으로 높았으니까. 심지어 김수현보다도.

    여기까지라면 사용자들도 어찌어찌 드러난 사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결과가 좋다고 해도 과정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는 없다. 특히 게헨나, 아니 지옥 대공의 공포는 사용자 대부분의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된 상태였다. 하기야, 단신으로 일만의 사용자를 휘저은 존재를 어찌 잊겠느냐마는.

    왜 우리를 도왔는가, 어째서 예전과 달리 태도가 돌변했나, 무슨 까닭으로 클랜 로드를 살리는 건가, 클랜 로드와는 정확히 어떤 관계인가 등등. 비록 목숨을 구원받은 처지이기는 하나 짚고 넘어갈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특히 몇몇 여인은 게헨나가 김수현을 ‘부군(夫君)’이라고 부르는 것과 한껏 부푼 배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사용자 중에서는 그 의문에 어느 정도 답변할 수 있는 여인이 있었다. 이후 시선은 예전에 김수현과 함께 생환한 여인에게로 쏠렸고, 김한별은 자신이 아는 한도 안에서 차근차근 답변했다. 기본적으로 말을 아끼기는 했지만, 게헨나가 적이 아니라는 점과 돌아올 수 있었던 경위는 확실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길고 긴 침묵을 깨고 누군가 나직한 침음을 흘렸다.

    남다은은 멍하니 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붉은빛이 스민 낯빛은 어딘가 모르게 망연해 보였고, 발그스름한 눈동자는 흔들리는 불꽃처럼 힘없이 춤을 춘다.

    입을 연 채 한참을 가만히 있던 남다은은 눈만 움직여 건너편을 바라봤다.

    그 지옥의 왕이라는 존재를 잉태시켜 주는 걸 조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거니?

    제가 보고 들은 것만 말씀드렸을 뿐이에요. 그 이상은 추측에 불과하겠죠.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쌀쌀맞은 음성이 돌아온다.

    김한별은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이상은 오빠한테 듣는 게 정확할 거예요. 물론 깨어나시면요.

    그렇게 말하고는 침울한 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에…….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요…….

    안솔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아까부터 눈치를 살피고 있다. 마치 ‘내가 왜 이런 짓을 한 걸까.’ 하고 자책하는 듯이.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요? 상대는 엄~청 강하고 목숨은 소중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빌미로 협박했다면…….

    동의를 구하려는 듯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반응은커녕 입도 열지 않았다. 몹시 경직된 분위기에 안솔의 양어깨가 축 늘어졌다.

    후…….

    이유정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두 무릎을 모았다. 깍지 낀 손등에 얹은 얼굴은 온통 수심이 드리웠다. 속으로 오만 복잡한 감정이 몰아치고, 가슴 한편이 육중한 바위에 짓눌려 질식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내 입가로 우습지도 않은데 꾸며 웃는 억지 미소가 지어졌다.

    ‘뭐, 그러네. 어쩔 수 없었잖아? 그리고 따지고 보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 어쨌든 원정도 성공적으로 끝났는데, 이렇게 있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아,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뭐야, 그게. 잉태시켜 주는 걸 조건으로 돌려보내 준다고? 이게 말로만 듣던 임신 공격인가? 어휴, 안솔 쟤는 왜 그런 짓을 해서는…….

    안솔의 몸이 움찔 움츠려졌다. 1초 후, 이유정은 속내에 흐르는 생각과 입 밖으로 꺼내려던 말을 반대로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만큼 심경이 복잡하다는 방증이었다.

    아, 아니! 미안! 그게 아니라…….

    왜? 나는 형님이 부러운데.

    이유정이 한껏 당황한 낯으로 손사래를 친 찰나, 진수현이 두 손으로 머리 뒤를 받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낙천적인 음성이었다. 전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아니, 그렇잖아요. 그 무지막지한 괴물에게서 구해 줬고, 안솔도 어떻게 못하는 걸 스스로 생명을 나눠 주면서까지 살려주고. 이건 오히려 우리가 고마워해야 하는 입장 아닙니까?

    확실히 진수현의 말 그대로였다. 그래서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는 것도 있고. 그러나 간과한 점이 하나 있다면 여인의 속내까지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그런 조건을 달았다고는 해도. 그리고 남녀의 육체관계라는 게 원래 미묘해요.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오빠가 자기 되고, 자기가 여보 되고. 그러니까 형님이랑 그 누님은…….

    그러나 아는 체하며 중얼거리던 진수현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쏠린 시선 중 서너 개의 눈초리가 진한 살의로 변했기 때문이다. 특히 백한결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분하다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리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도 할 때와 안 할 때를 가려야 한다.

    왕이라는 존재는 중요합니다. 특히 이런 세상에서는 더더욱이요.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나가는 분위기를 환기하려는지 하승우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지옥이라는 차원이 어떤 세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직접 겪어보지를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사용자 김한별의 말대로 몇천 년이나 왕이 없었다면, 또 왕의 탄생이 굉장히 절박한 숙원이었다면……. 어떻게 이해 못할 것도 아니라 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만.

    마지막 말은 한 박자 늦게 이어졌다. 여러 뜻이 맞물리고 내포돼 있는 만큼 상당히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단, 이것만큼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지요.

    문득 하승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상대가 꼭 클랜 로드, 그러니까 김수현이라는 사내여야만 했는가. 저는 오히려 이 점이 궁금합니다.

    그때였다.

    바스락!

    천막의 휘장을 젖히는 소리에 이어 가볍게 눈을 밟는 소리가 울렸다.

    마침내 이야기의 물꼬가 터진 가운데, 한 여인이 천막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불은 좀 괜찮으냐.

    피로한 낯으로 걸어 나오는 여인은 바로 게헨나였다.

    몇몇 사용자가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게헨나가 손을 젓자 주춤거렸다.

    오늘 밤은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네, 네? 혹시 잘못되기라도……!

    아니, 생명은 확실히 구했다. 그래도 타인의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시간은 필요하단다. 아마 며칠 안으로 깨어나겠지.

    아…….

    게헨나는 흡사 어머니처럼 자상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짧은 탄성이 울리는 사이 적당한 자리에 몸을 앉혔다. 그러자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허준영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입고 있던 트렌치(Trench) 코트를 벗어 게헨나에게 걸쳐줬다.

    오해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군. 임산부에게 추위는 좋지 않으니까.

    게헨나가 묘한 눈으로 쳐다보자 흥, 콧소리를 내며 무심한 음성으로 말한다.

    호오. 추위 따위야 나를 침범할 수 없지만, 그래도 호의는 고맙게 받아들이마.

    게헨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는 차분히 주변을 돌아봤다. 동시에 천천히 배를 어루만지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모였다.

    저, 그 배는…….

    응? 아, 임산부는 처음 보느냐.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물론 그이의 아이란다.

    게헨나가 천막을 흘깃거리며 말하자 곳곳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일었다. 사방에서 호기심 어린, 서글퍼하는, 애끓는, 애타는 시선이 쏟아졌다. 그런 눈초리를 느끼며 게헨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적어도 하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긴 밤이 될 것 같구나.’

    그렇게 생각한 게헨나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강한 햇살이 눈을 두드렸다. 가볍게 숨을 들이켜니 따뜻한 공기와 달콤한 살 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햇살을 보면 새벽이거나 아침 시간이 분명한데, 찬 공기가 아니라고? 이 무슨 역설적인 현상인가. 그러고 보니 배에서 오묘한 압박감도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한데.

    눈을 뜨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뜨고 싶지 않다. 전신이 따뜻하고 촉촉한 스펀지에 둘러싸인 것 같은 기분이다. 가끔 뺨을 살살 쓸어주는 감촉은 흡사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듯하다. 거기다 푹신한 침대가 몸을 받쳐주니 이보다 금상첨화가 어디 있겠는가.

    …아니. 잠깐만.

    푹신한 침대라고?

    거기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마치 언제나 잠을 자는 집무실의 침대에서 자는 것 같다. 정신은 이대로 자라고 강요하고 있었으나 나는 억지로, 간신히 눈을 떠 앞을 쳐다봤다.

    …….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용암을 연상케 하는, 풍성하게 흐르는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서서히 시선을 내리자 고요히 눈을 감은, 그리고 아늑한 얼굴로 잠들어있는 게헨나의 얼굴이 보였다. 몸을 찰싹 붙인 채 가슴에 고개를 묻고 얌전히 잠들어있다. 색색 숨을 내쉴 때마다 입안으로 단맛이 퍼지는 느낌이다.

    그랬구나.

    게헨나였어.

    게헨나는 아직 가지 않았어.

    나를 기다려준 거야.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야.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끄러미 게헨나를 응시했다. 한데 아까 내 볼을 매만지는 감촉을 느꼈는데. 그럼 자는 척을 하고 있는 건가?

    한참을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러자 역시나. 다가오는 걸 느꼈는지 게헨나의 두 눈이 반짝 떠졌다. 이제 막 잠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선명한 선홍빛 눈동자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나는 접근을 멈추고 계속 게헨나를 바라봤다. 정말이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얼굴이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그때 서너 번 눈을 깜빡인 게헨나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왜 계속 바라보는 것이냐.

    왜? 쳐다보면 안 돼?

    진심으로 궁금해 반문했으나 게헨나는 가벼운 한숨을 흘렸다.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심히 부담스러우니 말이다.

    싫어. 계속 봐도 보고 싶은 걸 어떻게 해?

    화끈.

    무, 무…….

    그렇게 말한 순간, 게헨나가 눈에 띄게 당황해하며 낯을 붉혔다. 시선 둘 곳을 모르겠다는 듯 이리저리 눈을 돌리더니 갑자기 분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흘겨본다.

    왜 저러지? 나는 그냥 솔직하게 속내를 말했을 뿐인데.

    갸웃한 찰나, 게헨나의 손이 기습적으로 내 입을 살며시 거머쥐었다.

    게, 게헨나?

    그러나 말할 틈도 없이 게헨나는 손을 요리조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 입이냐.

    즘끈(잠깐)!

    내가 어쩔 줄 몰라 하기를 바라는 밉살스러운 입이 요 입이냐는 말이다.

    즈, 즘스믄(자, 잠시만.)!

    게헨나의 뺨에 서린 홍조가 서서히 사라져 갈 즈음, 나는 간신히 벗어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얼얼한 입을 문지르며 주변을 둘러보자 눈에 들어온 광경은 나를 크게 놀라게 만들었다.

    2. 내조(內助)의 여왕

    집무실, 서재, 테라스, 욕실, 침실을 아우르는, 100평이 넘는 방대한 공간이 하나하나 시야로 들어온다. 잘 정돈된 커다란 책상. 둥근 탁자와 고풍스러운 소파. 황금색 테두리를 번쩍이는 푹신한 레드 카펫. 벽면을 치장하는 화려한 장식물 등등.

    여기는…….

    내 방이잖아?

    머셔너리 캐슬, 4층 집무실이지 않은가. 잠결에 익숙한 감촉을 느끼기는 했으나 설마 정말 집무실 침대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꽤 괜찮은 공간이더구나.

    천연덕스러운 음성이 들려온다. 어느새 침대에서 내려간 게헨나는 오른손으로 왼 팔꿈치를 잡은 채 느긋이 몸을 펴고 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화려히 기지개를 켜는 붉은 장미를 금빛으로 물들인다. 그냥 일상생활이 화보구나.

    …응?

    그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묶어 정리하던 게헨나가 흘깃 나를 쳐다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살그머니 손을 오므렸다. 이런, 나도 모르는 사이 넋을 잃은 건가.

    어색한 헛기침 후, 나는 간신히 원래의 놀라움(?)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게헨나.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으음? 이건 네 방이지 않느냐.

    왜 나한테 물어보느냐는 투로 말하기는 했지만, 게헨나의 낯에는 숨길 수 없는 장난기가 서려있다. 아무래도 그냥 말해 줄 것 같지는 않은데.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며칠이나 잠들어 있었지?

    쓰러진 직후, 나흘을 내리 잤으니 오늘이 닷새째겠지.

    흠. 그럼 또 목숨을 구원받은 건가?

    그렇기는 하다만, 낯간지러운 소리는 되었다. 인간에게 생명력을 나눠주는 일 따위, 대양(大洋)에서 바닷물 몇 바가지 푸는 것과 다름없으니.

    별것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으나 게헨나의 목소리는 굉장히 지엄했다. 이번 기회를 빌미로 또 부끄러운 말을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왠지 이번에는 입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아 그냥 조용히 있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우선 차곡차곡 쌓인 의문부터 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금번 빙하의 설원 원정은 장장 왕복 삼 개월로 계획된 먼 길이었다. 이것도 제갈해솔의 수송 어빌리티를 계산해 잡은 일정이다. 말인즉, 가는 데 45일이 걸렸으니 오는 데 45일이 걸리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45일이라는 시간을 건너뛸 수 있었던 걸까? 공간을 도약하지 않고서야…….

    아.

    문득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내 탄성을 들었는지 게헨나는 싱겁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대가 쓰러져있는 동안 이 세상에 대해 조금 알아봤다. …사실, 조금 놀랍더구나.

    그렇게 말한 게헨나는 돌연 입을 닫았다. 나를 빤히 응시하는 얼굴에서 말할까 말까 갈등하는 낯빛이 스치듯 지나쳤다.

    어땠는데?

    궁금한 기분에 묻자.

    모르겠다. 고작 수백 년이 지났을 뿐인데,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퇴보했어. 아니, 실로 퇴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야.

    게헨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발끈하지는 않았다. 왜냐면 사실이니까. 시간차가 있기는 하나, 용이 잠든 산맥에서 조우했던 영웅들과 현재의 거주민들을 생각해 보면 수긍할 수밖에 없다. 게헨나의 말대로 퇴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설마설마했지만, 공간 이동도 제대로 못할 줄이야. 조금은 한심하다고 느꼈다.

    공간 이동은… 그래도 제갈해솔이…….

    아, 그 아이 말인가. 보기는 봤는데, 상당히 야만스럽고 원시적인 방법이더구나. 효율적인 운용은커녕 마력을 무작정 쏟아붓는 방식이더군.

    그, 그래?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도 천재라고 극찬한 제갈해솔이 게헨나 앞에서는 예외 없이 평가 절하된다. 뭐,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인가.

    …뭐, 현 세태를 감안하면 나름 창의적이기는 하다만.

    게헨나는 쯧쯧 혀를 차다가 나를 흘끗거리며 말을 이었다. 조금 심했나, 눈치 보며 말을 정정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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