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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살로 읽는 세계사: 중세 유럽의 의문사부터 김정남 암살 사건까지, 은밀하고 잔혹한 역사의 뒷골목
독살로 읽는 세계사: 중세 유럽의 의문사부터 김정남 암살 사건까지, 은밀하고 잔혹한 역사의 뒷골목
독살로 읽는 세계사: 중세 유럽의 의문사부터 김정남 암살 사건까지, 은밀하고 잔혹한 역사의 뒷골목
Ebook346 pages3 hours

독살로 읽는 세계사: 중세 유럽의 의문사부터 김정남 암살 사건까지, 은밀하고 잔혹한 역사의 뒷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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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독살 스캔들의 전모를 밝히다
재미와 지식을 한 권에 담은 알짜배기 역사책!

식탁 가득 산해진미가 차려졌다. 하지만 왕은 마음 편히 수저를 들 수 없었다. 음식에 독이 들어 있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독살은 자연사로 위장할 수 있고 진범을 찾기가 어려워서 권력을 탐하거나 누군가에게 앙심을 품은 이들이 널리 사용하던 수법이었다. 그래서 군주제가 성립된 뒤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왕족이나 귀족, 유명 인사의 석연치 않은 죽음 뒤에는 어김없이 독살 의혹이 뒤따랐다.
이 책은 철저한 고증과 최신 법의학 지식을 토대로 당대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독살 사건의 진상을 추적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독을 감별하고 해독제를 만든다며 야단법석을 떨던 사람들이 도리어 지저분한 생활환경, 사람 잡는 화장품, 어처구니없는 치료법 때문에 병들고 죽어갔다는 사실을 밝히며, 욕망과 음모와 살인이 들끓었던 유럽 왕실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김정남 암살 사건처럼 더욱 정교하고 악랄해진 오늘날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구시대의 유물인 줄 알았던 정치적 독살이 지금도 진행 중임을 일깨운다.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충격적인 내용, 소설처럼 흥미로운 전개로 권력의 속성과 인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이 책을 통해서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눈과 예리한 통찰력을 얻게 될 것이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현대지성
Release dateApr 27, 2021
ISBN9791166815072
독살로 읽는 세계사: 중세 유럽의 의문사부터 김정남 암살 사건까지, 은밀하고 잔혹한 역사의 뒷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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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살로 읽는 세계사 - 엘리너 허먼

    지은이

    엘리너 허먼ELEANOR HERMAN

    무겁고 어려운 주제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풀어내면서도 핵심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역사는 무척 매혹적이어서 지루하게 서술할 이유가 없다라는 호언장담이 허세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다빈치 코드』의 댄 브라운보다 재미있고(워싱턴포스트), 역사광을 흡족하게 할 만큼(퍼블리셔스 위클리) 놀라운 필력을 지녔다.

    엘리너 허먼은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타우슨 대학교에서 언론학을 전공한 뒤 유럽으로 건너가 여러 언어를 공부하고 독일의 묀히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히스토리, 아메리칸 히어로즈의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여러 역사 문제를 다루었으며 영화 《에이리언 팩터》, 《나이트비스트》에 조연 배우로 참여한 경력도 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인 『침실 권력』을 비롯해 Mistress of the Vatican, Sex with Presidents 등 독특하고 흥미진진하면서도 내용까지 알찬 대중 역사서를 썼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주 매클레인에서 남편과 함께 점잖은 고양이 네 마리를 키우면서 살고 있다. 가끔씩 극장에 가는 이유는 영화 관람이 아니라 오로지 따끈따끈한 버터 팝콘을 먹기 위해서다.

    옮긴이

    솝희

    서강대학교에서 철학과 신문방송학을 전공했고 짧은 직장 생활 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심리학을 공부했다. 현재 바른번역미디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나쁜 조언』, 『이디스 워튼 단편선』 등이 있다.

    The Royal Art of Poison

    Eleanor Herman ⓒ 2018

    All rights reserved.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21 by HYUNDAEJISUNG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ed with InkWell Management, LLC

    through EYA (Eric Yang Agency).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EYA (Eric Yang Agency)를 통해 InkWell Management, LLC와 독점 계약한 (주)현대지성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하여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incover

    일러두기

    1. 인명과 지명은 외래어 표기법을 따랐다.

    2. 군주를 비롯해 국내에 잘 알려진 인명은 원어를 병기하지 않았다.

    3. 서양 인명에 접두어나 관사류가 붙을 경우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편찬 지침』에 따라 뒤의 이름에 붙여 썼다.

    예) 데메디치(de Medici), 드라베르뉴(de La Vergne), 드퐁탕주(de Fontanges)

    러시아의 언론인이자 시민운동가

    블라디미르 카라 무르자(Vladimir Kara-Murza)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러시아 정부가 두 차례나 독살을 시도했지만 꿋꿋이 살아남았고,

    바로크 시대와 함께 막을 내린 줄 알았던 정치적 독살이

    디지털 시대에도 건재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당신은

    암울한 역사의 산증인입니다.

    감사의 말

    나는 1995년부터 매년 열리는 메릴랜드 대학교 ‘역사 임상병리학 콘퍼런스’의 연례 보고서를 꼼꼼히 읽어왔다. 유명인의 의문사를 의학적으로 규명한 내용이었다. 참석한 의사들은 탐정이 되어 기원전 4세기 헤롯왕의 은밀한 부위에 괴저가 생긴 원인이 무엇인지, 1791년에 모차르트가 돼지고기 요리를 먹고 죽은 것이 사실인지, 1865년에 암살된 에이브러햄 링컨이 만약 시간을 뛰어넘어 현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지 등을 알아내려고 애썼다.

    콘퍼런스는 전염병 전문가 필립 맥코비액(Philip A. Mackowiak) 박사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메릴랜드 의대 교수인 그는 『검시: 역사 속 의학 난제를 풀다』(Post Mortem: Solving History’s Great Medical Mysteries, and Diagnosing)와 『거인들: 세상을 바꾼 환자 13인의 미스터리』(Giants: Solving the Medical Mysteries of Thirteen Patients Who Changed the World)라는 흥미로운 책을 썼다. 맥코비액 박사는 마치 셜록 홈스처럼 역사 속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며 누가 범인인지, 만약 자연사라면 왜 그런 죽음을 맞이했는지 밝혀나간다.

    맥코비액 박사는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내게 큰 도움을 주었다.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의 사인(死因)을 알아내려면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했는데 맥코비액 박사 외에는 적임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그는 내 질문에 성심껏 답했고, 원고에서 의료과실 부분을 전반적으로 검토해주었으며, 심지어 문법까지 교정해주었다.

    토스카나의 대공 프란체스코(Francesco) 1세와 그의 아내 비앙카 카펠로(Bianca Cappello)의 독살에 대한 질문에 선뜻 답해주고 유용한 자료까지 제공해준 피렌체 대학교 도나텔라 리피(Donatella Lippi) 교수에게 감사드린다.

    유명한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Tycho Brahe)의 유해를 발굴하고 연구한 덴마크 오르후스 대학교의 옌스 벨레우(Jens Vellev)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그가 수준 높은 연구 결과물을 보내준 덕분에 브라헤의 죽음을 다루는 과정에서 생겨난 의문이 해소되었다.

    버지니아 대학교의 클로드 무어 건강학 도서관 직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저명인사의 무덤 발굴과 현대에 실시된 부검 결과를 다룬 의학 논문들을 찾도록 도와주었다.

    롱우드 대학교에서 중세 문학을 가르치는 내 친구 라리사 트레이시(Larissa Tracy)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그녀가 편집한 『중세와 근대 초기의 살인』(Medieval and Early Modern Murder)을 읽고 앞선 시기의 시각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듀크 대학교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채플힐 캠퍼스에서 강의하는 매슈 러빈(Matthew Lubin)의 글, 근대 초 베네치아의 암살 도구인 독에서 큰 도움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원고를 쓰는 동안 온갖 어려움을 묵묵히 견뎌준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남편은 저녁 식사 내내 질병에 대한 구체적 묘사를 비롯해서 삐거덕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리는 곰팡이투성이 관, 검시와 연구를 하기 위해 발굴한 유해와 미라 등 끔찍한 이야기를 고스란히 들었다. 당신, 나랑 결혼할 때만 해도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겠지?

    들어가는 말

    화려함에 가려진 추악한 이야기

    누군가 독을 탔어!

    스물여섯 살의 아름다운 헨리에타(Henrietta) 공주는 치커리 차를 마시다가 갑자기 옆구리를 부여잡으면서 소리쳤다. 1670년 프랑스의 생클루궁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시녀들이 재빨리 토사물로 범벅이 된 옷을 벗기고 침대에 눕혔지만 그녀는 극심한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뻘겋게 달궈진 수천 개의 칼이 몸속을 헤집는 것 같았다. 공주는 땀으로 흠뻑 젖은 침대보와 한 덩어리가 되어 신에게 애원했다.

    제발 이 끔찍한 아픔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하지만 신은 그녀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했다. 한참 동안 흐느끼며 신음하던 그녀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공주가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면서부터 차라리 자비의 손길이라고 할 만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는 아홉 시간이 걸렸다. 겉으로 나타난 증상을 보면 중독이 분명했다. 살해 용의자는 누구였을까? 놀랍게도 루이 14세의 동생이자 오를레앙 공작이면서 그녀의 남편이기도 한 필리프(Philippe)였다. 동성애자인 그는 왕에게 고자질해서 자신의 애인을 쫓아내도록 부추긴 아내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왕족의 사랑 이야기를 쓰려고 자료를 검토하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젊고 아름다우며 재능과 권력까지 가진 이들 중 상당수가 인생의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린 것이다. 수 세기 동안 젊은 왕족이 죽은 뒤에는 독살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과연 독 때문이었을까? 자연의 섭리에 따른 죽음은 아니었을까?

    법의학과 역사가 정교하게 어우러진 이 주제는 내게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놀랍고 끔찍하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겁쟁이들은 오줌을 찔끔 지릴 만큼 잔혹한 16세기 해부법과 방부 처리법을 배웠으며 수은, 비소, 납, 오줌, 인간의 지방을 사용한 르네상스 미용법을 읽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왕족의 시신을 검시했을 때 미심쩍은 독성물질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의 논문을 탐독했고,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왕실의 중독 방지법을 찾아내기도 했다. 이처럼 이 분야에 깊이 빠져들면서 수백 년 전 유럽의 궁전은 온갖 종류의 독으로 넘쳐났다는 사실(물론 모든 독이 치사량에 이를 정도로 쓰인 것은 아니지만)을 알아냈다.

    과거 왕족의 초상화를 보면 하나같이 멋진 옷을 입고 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 장식이 빛나는 옷으로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오랫동안 씻지 않아 악취가 나고, 두피와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는 이가 들끓고, 오염된 물과 비위생적으로 조리한 음식을 섭취해서 치명적인 세균에 감염되었으며, 몸속에 암이 퍼져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겠는가? 요강이 넘쳐 오물이 흐르는 바닥, 신하들이 오줌을 누던 계단에서 올라오는 역한 냄새를 역사 기록에서 맡을 수는 없다. 질병보다 위험한 치료법을 경험할 수도 없고 종종 목숨까지 앗아갔던 화장품을 볼 수도 없다. 그러다 보니 실체에 다가가기 어렵다.

    이제부터 독자들을 숭고한 아름다움과 지저분한 오물이 공존하는 세계로 안내하려 한다. 먼저 왕실의 중독 방지법 및 해독법을 살펴보고 치명적인 화장품과 생명을 위협하는 의사들, 끔찍할 만큼 비위생적이었던 환경을 다룰 것이다. 그런 다음 유럽의 왕족들, 나폴레옹이나 모차르트 같은 유명인들부터 14세기 이탈리아의 군사 지도자, 당대에는 유명했으나 오늘날에는 이름조차 생소한 16세기 나바라왕국의 여왕에 이르기까지 독살 소문이 나돌았던 17가지 사례를 샅샅이 검토할 것이다.

    과거의 궁정 의사들은 질병과 죽음의 원인을 밝히느라 진땀을 흘렸지만 현대 과학은 미심쩍은 죽음을 맞이한 왕실 인사들이 실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밝힐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그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당대에 했던 검시 기록과 오늘날의 진단 결과를 살펴볼 것이다. 객관적인 자료가 부족한 경우에는 그들의 증상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사인을 제시할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독을 두려워했지만 어이없게도 평소에 복용하는 약이나 자주 사용하는 화장품 그리고 생활환경으로 말미암아 자기도 모르게 중독되었다. 또한 유럽의 눈부신 궁전과 보석으로 장식된 문 뒤에는 질병과 무지, 추잡함뿐만 아니라 살인까지 들끓었다.

    정적을 독살하는 행위가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마지막 장에서는 르네상스 궁전에서 일어난 일 못지않게 사악한 정치적 독살이 오늘날에도 건재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것이다.

    1장

    식탁부터 속옷까지

    안전지대는 없다

    떡 벌어지게 차린 수라상이 왕 앞에 놓였다. 알맞게 구운 고기와 감칠맛 나는 소스, 벌꿀을 발라 윤기가 자르르한 케이크에 고급 포도주까지! 보기만 했는데도 입에 침이 고이고 배에서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났다. 하지만 왕은 이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쓰러지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곧바로 입맛이 뚝 떨어져버렸다.

    지나친 망상일까? 젊은 나이에 급사한 왕족들은 그저 우연히 의사가 손쓸 수 없는 질병으로 쓰러진 것일까? 그럴 리 없다. 독살에 대한 소문이 전부 사실은 아니겠지만 남겨진 기록을 보면 독에 대한 두려움을 단지 왕족의 편집증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이탈리아는 독약 거래의 심장부였다. 메디치 가문이 다스리던 토스카나와 베네치아공화국에는 독약과 해독제를 만드는 제조소가 있었다. 동물과 사형수를 대상으로 독성 실험을 하기도 했다. 식물에서 추출한 독으로 제국의 권력 계승자나 못마땅한 계모를 살해했던 고대 로마인들과 달리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인체에 치명적인 4대 중금속, 즉 비소, 안티몬, 수은, 납을 사용했다.

    피렌체 메디치 아카이브에 소장된 400만 종의 문서 중에는 독을 언급한 것이 많다. 1548년 코시모 1세는 메디치가의 통치를 반대했던 군대 수장 피에로 스트로치(Piero Strozzi)를 독살하기로 했다. 그는 같은 해 2월 익명의 조력자에게 암호가 담긴 편지를 받았다. 피에로 스토로치가 여행 중 잠시 멈춰 목을 축일 것입니다. 그때를 노려야 합니다. 그가 마실 물이나 포도주에 무슨 독을 어떤 비율로 섞어야 할지 알려주십시오.

    1590년 코시모 대공(유럽에서 소국의 군주를 이르는 말)의 아들 페르디난도는 3년 전 자기 형 프란체스코를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는 밀라노의 대리인에게 이런 내용을 전했다. 독약을 조금 보냈다. 사용법은 전달한 사람에게 들어라. 이 일을 잘 해내면 은화 3천 스쿠디(교황 직할지의 화폐 단위), 아니 4천 스쿠디까지 기꺼이 내줄 생각이다. 독약은 포도주 한 병과 섞기에 충분한 양이며 냄새도 없고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아 효과가 크다. 포도주 한 잔에 적어도 15그램 이상 넣고 잘 섞어야 한다.

    1310년부터 1797년까지 베네치아공화국에서 활동하던 비밀 정치조직인 ‘10인 위원회’는 독약을 언급하면서 조심스러우면서도 능수능란한 방식으로 비밀리에 암살할 것을 지시했다. 듀크 대학교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채플힐 캠퍼스에서 역사를 강의하는 매슈 러빈은 1431년에서 1767년 사이에 베네치아공화국이 배후에서 조종했던 정치적 독살 사례 34건을 찾아냈다. 그중 9건은 성공하고 11건은 실패했다. 2건은 대상이 독을 삼키기 전에 자연사했으며 나머지 12건은 결과를 알 수 없다. 이런저런 가능성을 따져보면 베네치아에서는 정적을 독살하려는 시도가 기록된 수보다 훨씬 많았다고 추정된다.

    10인 위원회는 식물학자를 고용하고 파도바 대학교 근처에서 독약을 제조했다. 1540년과 1544년의 위원회 연보에는 두 가지 조제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독약의 재료는 승홍(수은의 염화물로 독성을 띠는 물질), 비소 혹은 붉은 비소, 석황(노란색 삼황화비소 결정), 염화암모늄(암모늄과 염화수소를 반응시켜 만든 흰 고체), 암염, 녹청(부식된 구리에서 나온 것으로 푸르거나 초록빛을 띠는 가루), 12월에 베네치아에서 피는 시클라멘꽃의 증류액이었다.

    독약은 17세기까지 활발하게 거래되었다. 줄리아 토파나(Giulia Toffana)라는 여성은 나폴리와 로마에서 50년 동안 독약을 팔다가 1659년에 처형되었다. 그녀는 무려 600명의 목숨을 빼앗을 만한 분량을 거래했는데 주요 고객은 미망인이 되고 싶어 하는 여성들이었다. 그녀가 제조한 독약은 비소, 납, 벨라도나(가짓과의 여러해살이풀)의 혼합물로 빛깔과 냄새가 없고 포도주와 잘 섞였다. ‘아쿠아 토파나’(Aqua Toffana)라는 이름의 이 독약은 그녀가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인기를 끌었다. 그녀는 당국의 감시를 피하려고 성인(聖人)이 그려진 유리병에 독약을 담아 성수(聖水)로 위장하거나 화장품 용기에 넣어 팔았다.

    1676년에는 브랑빌리에 후작 부인이었던 44세의 마리 마들렌 마르그리트 도브레(Marie Madeleine Marguerite d’Aubray)가 땅을 상속받기 위해 아버지와 두 형제를 독살한 죄로 파리에서 처형당했다. 이때 쓰인 독이 아쿠아 토파나였다. 그녀는 신문 과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상류층 절반은 이런 일에 연루되어 있어요. 내가 입을 열면 여럿 다칩니다. 3년 뒤 그녀의 말처럼 관료들을 포함해 319명이 파리와 인근에서 체포되었고 그중 3명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죽이려는 자 vs. 막으려는 자

    헨리 8세가 통치하던 시절 영국의 햄프턴궁에는 식사를 담당하는 사람만 200여 명이 있었다. 요리사뿐 아니라 설거지를 맡은 하녀, 식기 관리자, 고기 써는 사람, 음식 나르는 사람, 제빵사, 도살업자, 집사, 채소 재배인, 식료품 저장 관리인 등을 포함한 수였다. 왕궁의 주방에서는 동물의 털을 뽑는 일부터 재료를 다듬고, 끓이고, 굽고, 옮기고, 고명을 얹고, 접시에 담는 일까지 다양한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수많은 하인이 그곳을 들락거리면서 하루에도 수백 명분의 식사를 차려냈다. 이들 중 단 한 명만 자기편으로 만들면 왕의 음식에 무언가를 살짝 넣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그처럼 불안할 정도로 많은 손을 거친 음식이 앞에 놓였을 때 왕은 어떤 조치를 취했을까? 독살을 피하는 방법을 가장 먼저 조언한 사람은 저명한 유대인 의사이자 철학자였던 마이모니데스(Maimonides)였다. 그가 1198년에 쓴 논문을 보면, 자신의 주군이자 이집트와 시리아의 술탄이었던 살라딘에게 수프나 스튜처럼 식감이 고르지 않은 음식 그리고 향신료를 피하라고 했다. 음식을 먹을 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시큼하거나 톡 쏘거나 풍미가 강한 것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약한 냄새가 나거나 양파와 마늘이 들어가는 요리도 매한가지입니다. 이런 음식은 독이 들어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없으니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십시오.

    마이모니데스에 따르면 포도주에 탄 독은 유독 감지하기 어렵고 위험하다. 독은 포도주와 섞었을 때 효과가 크다. 포도주는 독의 색깔과 맛, 냄새를 가린 채로 심장까지 금세 도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의심이 들 때 포도주를 마시는 것처럼 정신 나간 짓도 없다.

    16세기 후반 스페인의 강력한 수상이었던 올리바레스의 가스파르 데구스만(Gaspa de Guzmán) 공작은 독을 탄 포도주의 위험성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피렌체 메디치 아카이브에는 그가 발렌시아에서 식사할 때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문서가 있다. 첫 잔을 받아 마시는데 포도주에서 이상한 맛이 났다. 공포에 질린 수상은 황급히 식탁을 벗어나면서 해독제를 찾았다. 그 말을 들은 포도주 담당 하인은 병을 식초와 소금으로 닦은 뒤 제대로 헹구지 않아 그런 것이라면서 그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수상은 하인이 같은 포도주를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지롤라모 루셀리(Girolamo Ruscelli)도 마이모니데스와 같은 의견이었다. 그가 쓴 『피에몬테의 마이스터 알렉시스의 비법』(The Secrets of the Reverend Maister Alexis of Piemont)은 1555년에 출간된 후 수많은 번역본과 편집본이 나와 전 유럽을 휩쓸었다. 이 책의 중독을 피하는 법이라는 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향이 진하거나 지나치게 단 음식을 조심해야 한다. 강한 단맛과 신맛, 짠맛 등이 독의 악취와 쓴맛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왕을 네 명이나 섬겼던 의사 앙브루아즈 파레(Ambroise Paré)는 1585년 독에 대한 논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독을 피하기란 무척 어렵다. 달콤하고 향긋한 식재료와 섞으면 제아무리 경험 많은 사람이라도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맛, 짠맛, 신맛을 비롯해서 다양한 맛이 나도록 요리한 고기를 먹을 때는 주의해야 한다. 허기가 지더라도 허겁지겁 먹지 말고 신중하게 맛을 음미해야 한다.

    수천 년 동안 왕들은 독 감별사를 두어 음식을 먼저 맛보게 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삼키자마자 목을 붙잡고 바닥에 쓰러지는 것은 영화 또는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엄청난 양의 비소를 섭취한다고 해서 곧바로 몸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신체 조건이나 유전적 특질, 건강 상태 그리고 위장 속 음식물의 양에 따라 독의 흡수 속도가 달라져 복통, 구토, 설사 등이 다양하게 나타나며 대체로 첫 번째 증상을 보이기까지는 얼마간 시간이 걸린다.

    아주 드물게 곧바로 증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1867년 일리노이의 한 호텔에서 투숙객 20명이 비소로 만든 비스킷을 먹었다. 요리사가 비소를 밀가루로 착각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쓰러졌고 나머지는 몇 시간 동안 고통을 겪었다. 피해자 모두 구토와 설사를 했는데, 위장이 타는 듯한 통증과 식도 수축, 위경련 및 발작 같은 증상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일부는 몇 주 동안 설사를 하고 배뇨곤란증을 겪기도 했지만 죽은 사람은 없었다.

    왕과 궁에서 일하는 의사들은 음식에 독이 있다면 감별사가 먹는 즉시 구역질을 할 것이라고 여겼다. 또한 특이한 맛이나 의심스러운 식감을 알아채리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감별사가 맛을 본 뒤 경과를 지켜보느라 한두 시간씩 기다렸다가 음식을 먹지는 않았다.

    마이모니데스는 왕이나 감별사에게 불순한 의도를 품었다고 의심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음식을 잔뜩 떠먹게 하라고 말했다. 그자가 먼저 충분한 양을 먹기 전까지는 음식에 입을 대지 말라. 그저 한입 떠먹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요리사들이 왕 앞에서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헨리 8세는 어렵게 얻은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보호하기 위해서 왕자가 우유, 빵, 고기, 달걀, 버터 등을 먹기 전에 감별사가 충분한 양을 먹어보도록 했다.

    중세까지 왕의 식사를 검식(檢食)하는 일은 복잡한 의전, 의례, 보호책으로 발전해왔다. 독을 감별하는 작업은 왕실의 주방에서 시작되었다. 조지 네빌(George Neville)이 요크 대주교로 임명된 것을 축하하는 1465년 만찬 보고서의 내용이다. 조리장은 시약으로 모든 요리를 검사한 다음 뭉근하게 끓인 스튜, 굽고 데치고 삶은 생선, 과자나 파이, 젤리처럼 조리한 고기, 머스터드를 비롯한 소스를 조금씩 덜어서 요리사와 보조들에게 먹인다.

    미트파이처럼 껍질이 있는 요리는 감별사들이 겉을 부수고 안쪽 깊숙한 부분까지 떠냈다. 그러다 보니 왕이 음식 한 접시를 받았을 때쯤이면 해기스(순대와 비슷한 내장 요리)는 미지근해질 뿐만 아니라 개밥에 가까운 모양새가 되었다. 하인들은 검사가 끝난 요리들을 식당으로 들고 와 ‘크레덴자’(credenza)라고 부르는 보관함에 두었는데, 이 명칭은 그곳에서 이루어진 ‘신용’(credence) 검사에서 유래했다. 하인들은 자신이 나른 요리를 맛보았으며 수상한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무장한 보초가 음식을 지켰다.

    물이든 포도주든 맥주든 왕이 마시는 음료도 당연히 검식 대상이었다. 감별사는 ‘시약 용기’에 음료를 몇 방울 떨어뜨리고 그것을 마셨다. 왕이 손을 씻는 물도 마찬가지였다. 하인 한 명이 식사 전후에 직접 손을 담가서 따끔하거나 가렵거나 화끈거리는지 확인했다.

    음식물만 검사한 것이 아니었다. 하인들은 왕의 식탁보와 의자에 입을 맞추기도 했는데 그때 입술이 부어오르거나 가렵지 않으면 독이 묻어 있지 않다고 여겼다.

    소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관리자는 크고 화려한 접시에 담긴 소금을 약간 떠서 그것을 가져온 하인의 입에 넣었다. 보관함에서 냅킨을 가져온 하인은 목에 그것을 둘러서 독이 묻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1465년 보고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고기를 써는 하인은 어깨에 두른 냅킨에 입을 맞춘 뒤 그것을 왕에게 전달했다. 그다음 숟가락을 들어 물기를 닦고 입을 맞췄다. 이처럼 왕이 사용하는 모든 식기에 여러 사람이 입을 대다 보니 왕은 독이 아니라 세균 때문에 병들 지경이었다.

    프랑스의 『연례 행정 보고서』(État de la France) 1712년판에 따르면 루이 14세가 말년일 때 베르사유궁에는 음식 시중을 드는 자가 324명이나 있었다. 왕은 보통 오후 1시에 사저에서 혼자 먹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인들과 신하들을 비롯해 사절들까지 그를 지켜보며 서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복잡한 격식을 따라야 했으며 궁전이나 왕족들의 연회에서는 평민들이 지나다니면서 군주가 음식 씹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기도 했다.

    하인들은 루이 14세가 쓸 식탁보, 냅킨, 컵, 접시, 포크와 숟가락, 이쑤시개 등에 입을 맞추고 그것들을 피부에 문질렀다. 때로는 빵을 식기에 문지른 다음 입에 넣었다. 심지어 하인 한 명은 왕이 사용하는 고급 리넨 소재의 냅킨을 물에 적셔 손에 문지른 뒤 접어서 왕의 자리에 올려두었다. 그래서 왕은 늘 더럽고 축축한 냅킨을 써야 했다.

    그러는 동안 주방 하인들은 음식을 일일이 검식했다. 음식에 이상이 없으면 은제(銀製) 지휘봉을 든 책임자들과 무장한 보초들 옆에 의기양양한 태도로 줄을 맞춰 섰다. 이들의 행렬은 주방에서 왕의 식탁까지 길게 이어졌다. 주방을 나선 그들은 길을 건너 궁전의 남관으로 들어선 뒤 긴 계단을 오르고 복도 여러 곳을 통과한 다음 왕의 경호병이 머무는 공간을 지나 왕의 사저에 붙어 있는 대기실에 이르렀다. 그쯤 되면 음식은 이미 식어 있었다. 미지근하기라도 하면 다행이었다. 이어서 식탁에서는 하인들이 식사 시간 내내 왕이 먹을 음식을 조금씩 잘라내어 먹었다.

    튜더 왕가 사람들은 궁 안의 사저에서 좀 더 간소화된 절차로 편안하게 식사를 즐겼다. 이들은 개인 주방을 따로 두었다. 추운 궁전 뜰을 지나지 않아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으며, 믿을 만한 하인이 음식을 장만했기 때문에 독살의 위험도 비교적 적었다.

    포도주와 물은 마실 때마다 새로 따랐다. 왕이 마시고 싶다는 내색을 하면 담당자는 즉시 감별을 했다. 왕이 사냥을 나갈 때도 하인들이 음식과 음료를 검사했다. 약이나 가톨릭의 성체성사 의식에서 쓰는 제병(누룩 없이 만든 둥근 빵)을 제외하고는 모든 음식이 독을 감별한 후에야 왕의 입에 들어갔다.

    만약 왕에게 탈이라도 생기면 하인들은 시뻘겋게 달궈진 쇠붙이로 몸을 지지는 등의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고통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이라도 했을 때는 사지를 자르거나 목을 매달아 죽였다. 따라서 하인들에게는 왕을 안심시켜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감별사들 때문에 음식에 독을 넣기가 어려워지자 몇몇은 더 창의적인 방법을 고안했다. 1604년 5월 26일 프랑스의 앙리 4세는 신부가 주는 제병을 먹으려고 입을 벌렸다. 그때 왕의 개가 그의 옷자락을 물고 뒤로 당겼다. 왕이 몸을 앞으로 기울여 제병을 받으려고 하자 개는 다시 그를 뒤로 잡아끌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왕은 신부에게 제병을 먹으라고 명했다. 주저하던 신부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입에 넣었다.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편지에는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신부는 제병을 먹자마자 몸이 퉁퉁 부어오르더니 결국 뻥 터져서 두 동강이 났다. 아직까지 사람 몸을 둘로 나눌 수 있는 독은 없다. 따라서 편지를 쓴 사람이 설사와 구토의 끔찍함을 과장했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당하는 사람은 몸이 둘로 찢기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편지에는 사건의 결과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사태의 전말이 밝혀졌다. 음모에 가담한 몇몇 귀족들은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었다.

    먹일 수 없다면 묻혀라

    군주들이 먹을 때만 주의하면 그만인 게 아니었다. 피부로 독이 흡수될 수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만질 때도 두려워했다. 16세기 프랑스 왕실 외과의였던 앙브루아즈 파레는 이제 먹이는 것뿐만 아니라 바르거나 묻히는 방법으로도 독살이 가능하다라고 썼다.

    헨리 8세의 침소를 돌보던 하인들은 독이 묻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왕의 몸에 닿는 침대보, 베개, 이불에 입을 맞췄다. 왕은 정적들이 아들의 옷에 독을 묻힐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옷을 지으면 왕자에게 곧바로 입히지 않고 먼저 세탁을 한 뒤 잘 말렸다. 또한 왕자가 옷을 입기 전에 하인들이 옷의 겉감은 물론 속까지 뒤집어 피부에 문지르도록 지시했다. 그 옷을 왕자와 체구가 비슷한 소년에게 입혀서 피부가 타들어가는지, 비명을 지르는지 관찰하기도 했다.

    왕은 누구도 허락 없이 왕자를 만질 수 없다는 명을 내리기까지 했다. 자격을 얻은 사람이라도 왕자의 손에 입맞춤하려면 검사를 거쳐야 했다.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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