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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눈으로 본 열국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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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눈으로 본 열국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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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중국 명明나라 말엽의 작가 풍몽룡馮夢龍이 중국의 기원전 8세기~3세기에 이르는 약 600년의 춘추 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의 장구한 역사를 형상화한 소설 『동주 열국지(東周列國志)』를 거꾸로 역사적으로 비교하며 탐색한 책이다.
즉, 『동주 열국지』란 소설 속에 용해되거나 함축된 동시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좌구명左丘明의 『춘추좌전(春秋左傳)』, 『국어(國語)』,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유향劉向의 『전국책(戰國策)』, 『설원(說苑)』, 한비韓非의 『한비자(韓非子)』, 안자晏子의 『안자춘추(晏子春秋)』, 여불위呂不韋의 『여씨춘추(呂氏春秋)』, 『논어(論語)』, 맹자孟子의 『맹자(孟子)』, 장자莊子의 『장자(莊子)』 등에 기록되거나 전해지는 역사적 사실이나 일화와 비교하여 무엇은 사실이고 무엇은 허구인지를 가려보려는 참신하고 이색적인 책이다.
이 책은 첫째, 각 권마다 『동주 열국지』의 역사 소설을 압축한 소설 부분, 『동주 열국지』와 그 시대 배경이 되는 사서들을 세밀하게 비교·분석한 팩트체크(fact-check) 부분, 그리고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등에 관한, 참고 문헌에서 기록·소개하고 있는 일화, 비평, 보충 설명 등을 담은 브리핑(briefing) + 덤의 세 가지 부분으로 구획되어 있어서 소설의 흥미뿐만 아니라 역사 지식의 정보도 제공하고 있고,
둘째, 중국 고대 인명의 경우 그 사람의 관직, 봉읍封邑, 시호諡號 등에 따라 상이하여 동일인 여부 판단이 상당히 어려워 애를 먹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에서는 인명이나 지명의 경우 사서와 상이한 것은 별도로 표기하려고 하여 동일인 여부 판단에 많은 도움을 제공하고 있고,
셋째, 각 사건의 과정 과정마다 일일이 사서들을 비교 확인하여 서기 환산 연도(왕이나 제후의 재위 기간 표기가 아니라 기원전 표기)로 표기하였는데, 이는 열국지의 사건을 단발적인 일화 수준이 아닌 춘추 전국 시대의 종합적이고도 연계적인 사건 구조로 파악할 수 있게 구성하고 있는 점이 기존의 『열국지』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며, 역사 소설을 역사적으로 검증하려는 새로운 장르의 실험적인 시도이자 가치를 담은 반소설 겸 역사 반입문서이다.
우리가 역사 소설을 즐겨 읽는 것은,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인간의 본성에 바탕을 둔 욕망, 야망, 사랑, 증오, 배신과 복수, 시혜와 보은 등의 인간 삶의 양태樣態의 동질성을 발견할 수 있고, 따라서 오늘의 삶을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는 교훈과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며, 나아가 오늘의 선택이 나에게 어떤 미래를 가져다 줄 것인지를 예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불 10년’, ‘권선징악’, ‘쥐구멍에도 볕 뜰 날이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교훈과 지혜 등은 역사가 아니면 도저히 배울 수 없는,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인류의 소중한 가치이자 자산이다.
이 책은 열국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 열국지 마니아, 역사 입문자나 전문가에게 재미면 재미, 지식이면 지식 면에서 독자들에의 취향과 성향에 따라 선택적으로 읽을꺼리를 제공하고 있고, 역사가 독자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교훈과 지혜를 듬뿍 담았다. 한 번에 독파하기는 어렵지만 독파하기만 하면 열국지와 고대 중국사 및 한자에 자신감을 갖게 할 수 있는, 두고두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고, 소장 가치가 있는 책이다.
한국중어중문학회 회장, 중국어문학연구회 회장, 한국중국언어학회 회장 등을 역임한 임동석 교수는 이 책의 추천사에서 저자 강용봉의 창작 활동에 대하여 ‘파천황破天荒’적 작업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Language한국어
Release dateJun 16, 2023
ISBN9791198328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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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눈으로 본 열국지 상 - 강 용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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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눈으로 본 열국지(상권)

    열국지 팩트체크(fact-check)

    ※다른 눈으로 보기에 앞서

    1. ‘이 책은 이런 책이다’

    이 책은 중국 명明나라 말엽의 작가 풍몽룡馮夢龍이, 중국의 기원전 8세기~3세기에 이르는 약 600년의 춘추 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의 장구한 역사를 형상화한 소설 『동주 열국지(東周列國志)』(청淸대의 채원방蔡元放이 풍몽룡의 『신열국지』를 『동주 열국지』라고 개칭)를 거꾸로 역사적으로 비교하며 탐색한 책이다.

    즉, 『동주 열국지』란 소설 속에 용해되거나 함축된 동시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좌구명左丘明의 『춘추좌전(春秋左傳)』, 『국어(國語)』,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유향劉向의 『전국책(戰國策)』, 『설원(說苑)』, 한비韓非의 『한비자(韓非子)』, 안자晏子의 『안자춘추(晏子春秋)』, 여불위呂不韋의 『여씨춘추(呂氏春秋)』, 『논어(論語)』, 맹자孟子의 『맹자(孟子)』, 장자莊子의 『장자(莊子)』 등에 기록되거나 전해지는 역사적 사실이나 일화와 비교하여 무엇은 사실이고 무엇은 허구인지를 가려보려는 시도이다.

    역사 소설은 말 그대로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만, 반대로 소설 속에 담긴 역사는 뭘까? 그저 허구의 액세서리일까? 그래도 역사일 수 있을까? 이것도 아니면 역사가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새로운 ‘허구적 역사’일까? 자주 의문을 가졌다.

    이 책은 이런 의문에서 역사 소설을 한번 역사적으로 탐색해보는 것도 의미 있고 재미가 있겠다 싶어 실험적으로 시도한 반소설이자 역사 반입문서이다.

    그리고 이 책은 2022년 4월에 발행된 『다른 눈으로 본 열국지』의 정정본訂正本이다. 차례, 팩트체크의 위치 등의 형태적인 면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많은 것을 수정하고 바로잡았다. 독자들의 너그로운 아량과 양해 부탁 드린다.

    2. ‘간략하게 일러두기’

    1) 이 책의 팩트체크(fact-check)에 책이름 없이 나오는 회차 표시는 위키미디어 재단 위키문헌(zh.wikisource.org)에 탑재된 풍몽룡의 『동주 열국지』 원문의 회차를 말하는데, 풍몽룡의 『동주 열국지』를 인용하는 빈도가 너무 많고, 출전 표기가 길어서 앞으로 ‘위키미디어 재단 위키문헌 풍몽룡의 『동주 열국지』’는 ‘『동주 열국지』’라 하고, 회차 표기는 위키미디어 재단 위키문헌 풍몽룡의 『동주 열국지』를 생략하고 회차 숫자만 표기하도록 하겠다.

    2) 출전 축약에 관하여: 일반적으로는 『사기(史記)』 「본기(本紀)」 ‘주 본기(周本紀)’의 형식으로 서명과 편명을 표기해야 하나, 출현 빈도가 너무 잦아 이 책에서는 축약하여 「주 본기」라고만 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언급되는 「본기(本紀)」, 「세가(世家)」, 「열전(列傳)」, 「연표(年表)」는 모두 『사기(史記)』라는 서명을 생략한 것이고, 다른 사서도 되도록 서명을 축약해서 표기하였다. 이는 이 책이 논문 등 연구물이 아님을 나타내려는 의도도 포함된 것이다.

    3) 「연표(年表)」 인용에 관하여: 「연표(年表)」는 『사기』 내의 「본기(本紀)」, 「세가(世家)」, 「열전(列傳)」의 기사를 보조하는 기능인 셈이어서 『사기』 내에서 기사가 상이하거나 「연표(年表)」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에 한하여 「연표(年表)」를 인용하였다.

    4) 시호諡號 사용에 대하여: 원래 시호는 왕이나 제후 등이 죽은 후에 망자의 행적 등을 참작하여 추증하는 것이어서 망자의 생전에는 쓰이지 않는 것이나, 이 책에서는 명확한 의미 전달을 위하여 망자의 생전에도 그 시호를 사용하였다.

    예) 주유왕周幽王, 제환공齊桓公, 위영공衛靈公

    5) 왕이나 제후는 되도록 시호를 썼고, 그 외의 인명은 되도록 그 사람의 자字보다 이름을 주로 하였으며, 이름을 알 수 없거나 불분명하거나 또는 이미 주지되고 있는 유명한 사람의 경우에는 그 사람의 시호나 자字를 썼다.

    6) 『동주 열국지』의 인명이나 지명이 사서, 즉 『사기)』, 『춘추좌전』, 『국어』, 『자치통감』, 『전국책』과 다를 경우, 해당 사서의 인명이나 지명을 채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서 간에도 서로 다를 경우 되도록 『춘추좌전』과 『자치통감』 순으로 따랐고, 이 외에는 원문의 것과 같은 것을 따랐으며, 『동주 열국지』와 사서 외의 참고 문헌을 인용했을 경우, 인·지명은 그 문헌의 것을 따랐다.

    7) 『동주 열국지』의 한자가 우리나라에서 자주 사용되는 글자와 다를 경우에는 원문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널리 쓰이는 것을 채택하였다. 

    예) 鬥 → 鬪, 薳 → 蔿

    8) 직접 인용에 대하여: 원래 직접 인용은 본인의 말이나 원전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나, 이 책에서는 발화자의 심경을 박진감 있게 전달하려고 경어법 등 화법 규칙을 따르지 않았음을 밝혀 둔다.

    9) 팩트체크(fact-check)의 괄호 속에 출전 언급 없이 표기된 주周 왕조와 제후들의 재위 연도의 서기 환산 표기는 「사기 표(史記表) 십이제후 연표(十二諸侯年表)」와 「사기 표(史記表) 육국 연표(六國年表)」를 기준으로 했음을 밝혀 둔다.

    10) 2천여 년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전래되면서 소실되거나 보완되는 등의 변화를 겪은 사서들을 비교·추정하는 것이므로 되도록 시비是非를 단정하기보다 상이相異를 밝히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3.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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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책을 내기까지’

    할렐루야! 이 책이 나오기까지 저의 노력과 열정과 인내 그 모든 숨결 하나하나에 하나님이 임하셨음을 증언합니다.

    이 책이 8년이란 세월이 걸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참고 문헌의 번역본 두서너 가지를 수십 번씩 읽어야 하고, 심지어 그 원문까지 샅샅이 봐야 할 줄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50대 말로 넘어가는 인생의 여정에서 오랜 직장 생활을 잠시 멈출 기회가 생겨서 그 시간을 어떻게 유용하게 보낼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독서의 취미를 살려 보자는 뜻에서 김구용 선생님의 『동주 열국지』를 한번 정리해 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독서 마니아여서 읽은(아니 시각장애인이어서 텍스트 파일의 점자를 손으로 만지거나, 음성 또는 TTS.로 제공되는 책을 귀로 들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책의 내용을 기억하기 위하여 꼼꼼히 메모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 메모 수준에서 10여 년 전에 읽은 바 있는 『동주 열국지』를 선택했습니다. 내용이 가벼워 시간도 잘 가고 메모하다 보면 잔생각을 떨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동주 열국지』의 시대적 배경이 된 춘추 전국 시대의 대표적인 사서인 사마천의 『사기』를 보게 되었는데, 『사기』와 『동주 열국지』를 비교해서 읽다가 보니 『사기』와 『동주 열국지』 간에는 공통된 부분이 매우 많지만, 양자 간에는 상이한 것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면 춘추 전국 시대의 다른 사서, 즉 『춘추좌전』, 『국어』, 『자치통감』, 『전국책』과 『동주 열국지』를 비교해 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을 느꼈고, 그 비교 과정에서 위의 사서들과 『동주 열국지』 간에는 물론, 위의 사서들 간에도 상이한 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동주 열국지』와 상기 여러 사서의 차이점을 비교하면서 비로소 『동주 열국지』의 저자 풍몽룡의 열정과 노력과 끈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동주 열국지』를 쓰기에 앞서 풍몽룡이 경사자집(經史子集)을 탐독할 때의 충혈된 눈, 수집된 방대한 자료 중에서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 고민하던 그 표정, 어느 사건과 사실에 상상력을 가할 것인지 고심하던 그 모습을 선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풍몽룡이 『동주 열국지』를 쓰기 위해 읽었을 문헌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찾아 읽었고, 이후 『동주 열국지』의 108장을 장별로 외우다시피 정독한 후, 해당 장의 내용에 대하여 각 문헌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각 문헌의 기록을 비교한 결과를 종합하여 이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요컨대, 풍몽룡이 방대한 춘추 전국 시대의 자료를 읽고 『동주 열국지』를 썼다면, 저는 『동주 열국지』를 통하여 그 속에 녹아든 현전(現傳) 자료의 편린(片鱗)을 찾고, 이를 다시 상기 사서와 상호 비교해 본 결과가 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료를 수집하고 책을 쓰는 동안 첫째, 필요한 자료를 시각 자료가 아닌 촉독(觸讀) 가능한 자료로 만드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가벼운 읽을거리는 음성으로 제공되는 녹음 자료나 음성 변환 자료로도 그 내용을 파악할 수는 있지만, 혼자서 내용을 이해하는 수준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제공할 읽을거리로 활용하려면 모든 단어의 의미나 표기법 등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므로 반드시 촉독 가능한 자료로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가 필요로 하는 참고 문헌은 촉독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진 것이 거의 없어서 원본을 스캔한 후 교정해서 파일을 만들거나 관련 사이트에서 다운로드했고, 심지어 『춘추좌전』, 『국어』, 『자치통감』, 『전국책』 등은 자원 봉사자들이 한 자 한 자 입력하여 파일로 만들어 주기까지 했습니다.

    둘째, 한자 해독이 힘들었습니다. 한국어 점자, 영어 점자, 일본어 점자 등은 표음식으로 되어 있어서 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점자 단말기로 출력되지 않는 문자가 많지 않지만, 한자의 경우에는 점자 단말기로는 인식 자수가 제한되어 있어서 한자가 많은 자료를 읽다가 보면 출력되지 않아서 공란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일단 번역본이나 원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점자 단말기로 출력되지 않는 한자를 일일이 주변의 도움을 받아서 검색해야 했고, 또 다의적인 한자의 의미를 맥락에 맞게 이해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습니다.

    셋째, 점자의 한계를 극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시각 문자를 촉각 문자로 변환한 것이 점자이고, 점자는 시각장애인의 보편적인 문자 생활을 지원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어서 아직도 점자는 시각 문자 전체를 구현하지는 못합니다. 특히, 티읕의 종성형과 의문부(?)와 여는큰따옴표(")의 점형이 동일한데, 일반적이고 평이한 내용을 읽는 데는 큰 지장이 없지만, 전문적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전달하는 경우에는 상당한 애로점이 있습니다. 이런 것에 실수를 줄이자니 많은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넷째, 무엇보다도 제가 부족하여 많이 배워야 하는 것이 더 힘들었습니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처음부터 출간할 의도 없이 메모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이 책의 팩트체크 난을 채워 가면서 저의 메모가 독특한 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되었습니다. 기쁘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부담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즉, 저의 메모가 남에게 읽을거리가 되자면 그 내용이 춘추 전국 시대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기반으로 해야 하고, 그 형식도 서적의 일반적인 체재를 갖추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기초도 없는 한자 이해 수준을 높여 가며 겁도 없이 참고 문헌의 원문을 조금씩 읽으면서 도서의 일반적인 형식을 조금씩 익혔습니다.

    대학에서는 국어교육학을 전공했지만, 20년 이상 사회복지 행정에 종사한 저에게는 출판 관련 사항이 생소한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것도 쉰이 넘은 나이에 배워야 했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까.

    책의 허두에는 흔히 ‘책을 내면서’라는 제하에 저자의 마음을 표시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도 이 책을 탈고하기까지 저를 도와주신 많은 분들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한 분 한 분께 저를 위하여 들인 시간과 마음에 사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이 책을 제가 쓰기는 했으나, 엄밀히 말하면 이분들의 봉사와 배려와 도움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저에게 글을 읽고 쓰는 기쁨을 맛보게 해 주고, 책을 낼 용기를 낼 수 있게 해 준 ‘한소네’라는 점자 정보 단말기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물론, 시각장애인도 일반 컴퓨터로 글을 읽고 쓸 수도 있지만, 아직은 불완전한 음성 변환 소프트웨어를 보완하고, 자신이 쓴 것을 자신이 확인하고 교정하고 편집하는 데에는 이 한소네가 더 유용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한소네가 없었다면 저는 책을 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단계 단계마다 시각장애인으로서, 아니 부족한 강용봉이라는 개인의 한계 때문에 포기할까 망설였을 때, 늘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 대학 때의 은사 정호완 교수님, 삼성 글로벌 리서치 손병두 상임 고문님, 법무 법인 율촌 김윤태 전무님, 헤럴드 경제 신문 박준환 본부장님께 감사를 드리며 격려의 말씀에 큰 용기를 얻었음을 고백합니다.

    참고 문헌을 일일이 타자하여 저에게 자료를 만들어 준 사단법인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중앙회와 부산지부의 직원들, 사단법인 대한안마사협회 중앙회 직원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의 화면 해설 작가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일일이 자료와 한자를 검색하고 교정과 편집을 도와준 하해은 선생님, 서울 삼성중학교 이순봉 선생님, 설계사무소 포스코 A&C 최광일 부장님, 대구대학교 부설 점자도서관에서 근무하시다가 정년 퇴임한 이석규 선생님, 이석규 선생님과 함께 저의 책 출간에 도움을 준 이은경 선생님, 제 곁에서 때로는 힘을 주고 때로는 날카로운 비평을 아끼지 않은 부산장우 신협 김명석 전 전무님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특히, 이석규 선생님은 저와 같은 시각장애인으로서 이 책의 교정은 물론, 그 내용에 있어서 많은 부분의 수정을 도와주었고, 무엇보다도 한자를 바로잡아 주고 8년간 한자에 대한 끊임없는 저의 질문에 응대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임동석 교수님의 격려와 응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수없이 포기하고 싶은 충동 속에서 갖은 고생과 노력 끝에 『다른 눈으로 본 열국지』를 쓰기는 썼는데, 이 책이 과연 의미있는 책일까? 책다운 면모는 갖추었을까 하는 등의 문제로 출간을 망설이면서 전문가의 평가를 받아 보려고 했습니다. 이에 용기를 내어 임 교수님께 연락을 드리고 책의 평가를 부탁드렸는데, 그 바쁘신 중에도 저의 책을 읽으시고 대단한 작업을 하였다.라며 격려해 주셔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오늘까지 대과 없이 살아가도록 큰 도움을 주신 우리나라 최초의 시각장애 정화원 전 국회의원님, 김정태 서울특별시 의회 전 운영위원장님, 헌법학회 전 수석부회장 권인희 교수님, 서울시립대 이성규 교수님, 에이블 뉴스 백종환 사장님, 사단법인 한국 장애인단체 총연맹 김동범 사무총장님, 김찬원 회장님, 나종천 회장님, 이병돈 회장님, 홍순봉 회장님, 이옥형 회장님, 김복명 회장님께도 감사를 드리며 무엇보다도 저를 아끼고 성원해 주신 대한민국의 안마사들을 비롯한 시각장애인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끝으로 철복을 갈아입듯이 직장을 수시로 바꾸느라고 가장의 노릇을 다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잘 지켜 주고, 늘 저를 위해 기도해 준 백인미 권사, 그리고 훌륭하게 성장해 준 우리 아들 력원이와 딸 민지와 사위 김선우 그리고 외손자 아인이에게도 미안한 마음과 함께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특히, 결혼 후 30여 년 동안 밤마다 제가 틀어 놓은 녹음기 소리에 밤잠을 설쳤을 백인미 권사에게 이 지면을 빌어 사죄의 마음을 전합니다.

    2023년 6월 어느 새벽에

    5. ‘추천사 임동석’

    추천사 임동석(건국대학교 명예 교수)

    姜龍奉의 다른 눈으로 본 열국지   출판 연기(緣起)

    한창 원고정리에 매달려 자료를 뒤지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부산에 어떤 분이 나와 통화를 하고 싶다고 하는데 전화번호를 일러주어도 되겠느냐는 조교의 연락이었다.

    이런 경우 가끔 곤란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더러는 아주 편벽한 자료의 이상한 주석을 갑자기 묻거나, 혹은 상고 시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신화 속의 우리 민족에 대해 질문하는 경우가 흔하였다. 모른다고 딱 끊으면 그만이지만 나는 거절해본 적이 없다. 늘 토론으로 이어지고 나도 자료를 찾아보고 얻는 게 있게 마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관행처럼 괜찮다고 하였다. 

    조금 후 전화가 왔다. 말이 빠르고 강했으며 그러면서도 공손하고 간절히 무언가 바라는 바가 있었다.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자신은 열국지에 대해 주석과 사실 관계의 고증을 한 책을 탈고했는데 꼭 나에게 보여주어 의견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며칠 뒤 한 뭉치의 출력본 원고가 집으로 배송되어 왔다. 박스를 풀어 펼쳤다. 상중하 셋의 두꺼운 출력물을 우선 후루룩 넘겨보고는 우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첫째 작업 양(量)에 놀랐고, 둘째 그 복잡한 동주시대(춘추전국) 역사 관련 자료를 섭렵하여 고증을 했다는 것에 놀랐고, 셋째 그보다 학자나 전공자도 아닌 사람이 이를 어떻게 해냈을까 하는데 놀라움과 한편 의문이 들었다. 

    다시 며칠 뒤 전화가 왔다. 서울에 올라갈 일이 있어 나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연구실에서 면대면으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더욱 놀라웠다. 시각장애를 가진 분이었다.

    문자는 시각이요, 언어는 청각이다. 그런데 작업 대상이, 한글도 아닌 한자로 기록된 것을, 그것도 중국 역사 속에 가장 복잡하고 나라도 많고, 이야기도 많고, 인물도 많으며, 기간도 긴 춘추와 전국을 아우른 엄청난 양을 시대 상황, 거기에 이를 사실 적시(摘示)의 역사 기록도 아니고, 이를 다시 풀어쓴   동주열국지  라는 소설을, 다시 이를 단순 번역이나 역주도 아니고, 각종 역사서를 교차 검증하여 ‘역사와 허구’를 구분하겠다고 정리한 것, 아니 중국 고대사 전공자라거나, 중국 고전 번역자나, 나아가 한학자도 아니며, 교수나 저술가도 아닌 사람이 이러한 일에 매달린 이유도 신기했으며, 차라리 청각장애인이면 시각으로 문자를 보고 매달려 해낼 수 있다 할 수 있겠지만, 글자가 보이지도 않는 시각장애인이 이러한 일을 해냈으며, 왜 세상에 많고 많은 자료 중에 이러한 것을 택했으며 무엇 때문에 이러한 작업을 했는지 등 의문을 넘어 기이하며 처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마 지구상에 이러한 경우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파천황(破天荒)은 이럴 때 써야 맞는 말일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기괴한 일이리라.

    세상에 저술가도, 학자도, 저자도, 글쓰기에 매달린 사람은 많고 많다. 아니 현대에는 너무 넘쳐난다. 내 주위에는 정년을 하고 노년에 들어서면서 수필가, 시인, 소설가로 등단했노라 하는 이가 너무 많다고 여길 정도이며, 그들은 가끔 얇고 깨끗하며 단정하게 책으로 낸 시집을 보내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은 양으로 우선 어지간한 저술은 비교도 되지 않으며, 내용의 복잡함은 고등학교 때 그토록 고통을 주던 수학 문제보다 더 어렵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윤곽을 이해하는 것만도 어렵지만, 그 속의 얽히고설킨 내용은 마구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보다 어렵다. 아니 보통 사람은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희귀종이 될 정도이다. 더구나 이를 소설로 쓴 풍몽룡(馮夢龍)의   동주열국지  는 소설로서의 허구와 스토리 재구성을 위해 다시 더 엄청난 양의 복잡한 복선(伏線)과 미로(迷路)를 바탕에 깔고 있다. 마치 진수(陳壽)의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  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설   삼국지  , 즉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가 더 복잡한 것과 같다. 이러한 책은 그저 번역, 혹 역주만 하려 해도 필생(畢生)의 작업 분량이며, 거기에도 한문 해독 능력과 그 시대에 대한 기초 지식, 사전 정보가 없이는 불가능하며, 나아가 중국 고어(古語) 자체의 음독(音讀)과 한자어의 변용(變用) 등에 대해 해박하지 않으면 자칫 오류를 범하기 쉬운 대상이다.

    그런데 이에 한 단계 더 나아가 정사와 소설 속의 내용을 비교하여 검증하고, 사실과 허구를 구분해 보고자 했다니, 내 생각으로는 그건 무리라고 여겼다. 실제   동주열국지  의 ‘동주’(But.Can.770-But.Can.221)는 전반기 춘추(春秋: B.Can.770-But.Can.476)와 후반기 전국(戰國: B.Can.475-But.Can.221)을 아우르는 시대를 말하며, ‘열국(列國)’은 춘추 초기의 수많은 제후국과 춘추오패(春秋五霸)와 전국시대의 전국칠웅(戰國七雄)들을 일컫는 것으로, 그 존몰(存沒)의 과정과 복잡한 사지(史地)는 학술계에서도 쉽게 풀어내기가 어려운 대상이다. 

    이에 대한 자료를 모두 섭렵하여 비교, 고증한다는 것은 전공자가 일생을 붙잡고 덤벼도 버거운 작업이다. 그런데 비장애인도 아닌, 장애인, 그것도 글씨를 볼 수 없는 시각장애를 가진 자, 나아가 전공 학자도 아닌 일반인이 해냈다는 것은 실로 불가능한 것이다. 물론 동일 학문은 아니지만 대학에서 국어교육학을,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여 학위 과정을 거쳐 학문적 훈련을 충분히 거쳤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한자로 기록된 막대한 분량의 550년 상고 시대 중국 역사를 풀어쓴 소설을, 그것도 사실과 소설적 허구를 비교했다고 하는 것, 나아가 무슨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그저 좋아서 했다는 것, 그리고 하다 보니 양이 엄청 늘었다는 것, 이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공자는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거워서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 했으니, 저자 강용봉씨는 ‘樂之者’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나아가 아마 하늘이 핸들 없는 ‘모노레일 인생’과 같은 길을 가도록 시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침 장애인의 책을 전문적으로 출판해주는 지인의 출판사에서 드디어 출판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희귀한 책으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크게 기대도 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마무리는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다시 겨울 추위에 지친 금년(2022) 2월 16일 우수(雨水)를 며칠 앞둔 날, 서울 한 음식점에서 그 항려(伉儷)와 만났다. 마침 그의 오랜 우인(友人) 박준환(朴俊煥) 헤럴드 기자도 자리를 함께하여 넷이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의 능력 총량(總量)은 누구에게나 같은가 봅니다. 그러나 강용봉씨는 거기에 더한 것 같군요!

    거기에 책 이름이 다른 눈으로 본 ‘열국지’  라니 시각장애의 ‘눈’이 겹치며 그 묘한 의미가 내 가슴에 파고들었다. 긍정적이고 씩씩하고 공손하고 봉사 정신으로 이제껏 펼쳐온 그의 활동, 즉 ‘시각장애인 사무총장’ 등 이력들도 그냥 이력서에 쓰여진 단순한 활자가 아님을 나는 말로 표현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면서 맹자의 天將降大任於是人也의 구절을 중얼거려 보았다.

    2022(壬寅年) 3월 5일 경칩(驚蟄)에 줄포(茁浦) 임동석(林東錫)이 부곽재(負郭齋)에서 적다.

    (추천자는 건국대학교 중어중문학 교수직을 정년 퇴임했고, 한국중어중문학회 회장, 중국어문학연구회 회장, 한국중국언어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조선역학고』, 『중국학술개론』, 『중한대비어문론』 등과 학술논문 100여 편이 있으며, 『사기』, 『전국책』 등 중국 고전 300여 편을 번역(역주)하였습니다.)

    6. ‘추천사 손병두’

    추천사 손병두(삼성 글로벌 리서치 상임 고문)

    먼저 8년이란 기나긴 시간 속에서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실망하면서도 ‘집념’ 하나로 버틴 강용봉씨의 노력과 투지에 찬사를 보냅니다.

    많은 이들의 부탁을 받고 여러 번 추천사를 썼지만, 이번처럼 감동적이고 폐부를 찌르는 말 그대로 투혼이 담긴 책을 추천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흔히 역사서나 역사소설을 보면 이전에 출간된 같은 부류의 책들의 내용이 중복되고 번역마저 똑같은 사례를 많이 보는데, 강용봉씨의 『다른 눈으로 보는 열국지』를 보면서 그 구성도 참신하고, 한자 한자 원전의 내용을 충분히 소화한, 자신만의 문장으로 꾸미려고 노력한 점이 돋보입니다.

    거기다가 강용봉씨가 시각장애라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한자 투성이의 이 같은 책을 썼다고 하니 시각장애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는 사람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재단법인 ‘2015세계시각장애인경기대회’의 조직위원장을 맡았을 때, 그때 강용봉씨는 사무총장과 차장으로서 대회 준비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면서 그분의 성실성과 집념, 일하는 열정에 큰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비장애인도 하기 힘든 책까지 낸 것을 보면서 시각장애인의 무한한 잠재력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다른 시각장애인들에게도 큰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어서 참으로 기쁩니다.

    이 책을 통하여 강용봉씨가 꿈꾸는 바가 다 이루어지길 바라며 이 책이 시각장애인의 인식의 벽을 허무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다시 한 번 강용봉씨에게 축하를 드리며 건승하기를 빕니다.

    (추천자는 서강대학교 총장, KBS 이사장, 2015세계시각장애인경기대회 조직위원장, 호암재단 이사장, 전경련 상근 부회장, 한국 중앙 연구원 이사장을 역임하였습니다.)

    7. ‘추천사 정호완’

    추천사 정호완(대구대학교 명예 교수)

    축하의 말씀  

    오늘날 바야흐로 메타버스(metaverse)의 시대가 오고 있다. 인터넷 웹이라는 공간에서 작가의 또 다른 얼굴인 애니메이션 속의 아바타처럼 일어나는 사건을 통하여 작가 자신의 다양한 가치관을 투영시켜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현실 세계를 가상 세계와 융합하여 또 다른 하나의 세상을 꿈꾸어 보는 것이다. 창작된 메타버스는 사용자들이 스스로 특정한 콘텐츠를 활용하여 만들 수 있도록 여건을 제공해 주고, 이를 재구성하여 3차원의 가상 공간에서 본인이 만들고 싶은 콘텐츠를 만들어 가는 작업이 가능하다. 가상 세계 기반 온라인 게임이 완성되면 메타버스의 또 다른 세상이 생겨난다.

      강용봉 작가는 중국의 상고 시기에 일어났던 일들을 바탕으로 지은 명나라 말엽의 작가인 풍몽룡(馮夢龍)의 역사 소설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를 회고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비교하여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가상인가를 찾아 나선 작업을 한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 동주열국지를 기반으로 같은 시기에 대한 약 6백년에 걸친 역사적 기록인 사마천의 사기(史記)나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 논어(論語)와 맹자(孟子), 장자(莊子) 등에 기록되어 전해오는 역사적 사실이나 일화와 비교하여 무엇은 사실이고 무엇은 허구인지를 가려 보려는 비교문화적인 일종의 역사비평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소설 속의 역사적 진실을 가려 보고자 한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지도상의 한반도를 180도 돌려서 보면, 태평양을 향한 어두운 밤바다의 등대처럼 보인다. 하나의 화두를 얻기 위하여 그지없는 나그네의 길을 걸었던 그 많은 이들의 발자취를 우리는 기억하기도 한다. 그래서 강 작가 본인은 책 이름을 ‘다른 눈으로 본 열국지’라 하였다. 이 책을 실험적인 반소설이자 역사 반입문서라 하고 있다. 메타버스 시대를 열어가는 많은 이들에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방법의 화두를 던져 주고 있다. 

      강 작가와는 필자는 사제 간의 묵은 인연이 있다. 학교 다닐 때부터 많은 질문을 서슴지 않았던 철 지난 기억이 새롭다. 시각장애라는 장벽을 허물어 버린 그의 메타버스, 아니 그가 만들어 낸 아바타가 관심 있는 많은 이들의 생산적인 자극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를 바탕으로 더 많은 메타버스 활동을 기대해 본다. 강 작가의 노고에 쾌재와 박수를 보낸다. 그대의 앞길에 빛과 지식 사랑의 꿈이 꽃피는 봄날이 오기를 성원한다.

                                                임인년 삼일절날 

                                                     갑내 정호완 두 손  

    (추천자는 대구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학과를 정년 퇴임했고, 길림대학 초빙교수를 역임했으며, 삼성현연구소 대표, 세종대왕기념회 이사에 재임 중이며 삼국유사사전 외 50여 권을 저술하였습니다.)

    8. ‘저자 약력’

    저자 강용봉(姜龍奉)씨는 1962년 1월 부산시 서구에서 부(父) 강상석(姜相錫)씨와 모(母) 조영춘(曺令春)씨의 4남 1녀 중 막내로 출생.

    1981년 2월 부산맹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3월~1985년 2월 대구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2005년 3월~2007년 8월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과학대학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였음.

    현재 2023년 2월부터 뷰북(VIEW BOOK) 대표

    1991년 1월~1994년 1월 사단법인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부산지부 사무국장, 1995년 10월~1996년 3월 중앙회 총무과장, 2007년 3월~2010년 5월 중앙회 사무총장, 2014년 4월~2016년 4월 중앙회  사무총장, 2018년 8월~2022년 4월 부산시각장애인복지연합회 사무처장 역임.

    1997년 1월~2006년 11월 사단법인 대한안마사협회 사무총장, 2011년 1월~2013년 9월 사무총장, 2011년 6월~2013년 12월 부설 안마수련원 시설장 역임.

    2007년 3월~2010년 5월 보건복지부 장애인복지조정 실무위원 역임.

    2007년 3월~2010년 5월 노동부 장애인고용촉진 실무위원 역임.

    2007년 3월~2010년 5월 정보통신협회 복지통신프로젝트그룹 PG416 의장 역임.

    2008년 1월~2010년 5월 한국정보화진흥원 웹 접근성 품질마크 인증위원 역임.

    2008년 9월~2010년 5월 보건복지부 편의증진심의회 위원 역임. 

    2009년 6월~2010년 6월 대한장애인체육회 생활체육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2011년 1월~2012년 12월 장애인복지학회 홍보이사 역임.

    2014년 9월~2014년 12월 재단법인 2015 세계시각장애인경기대회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역임.

    2015년 1월~2016년 4월 재단법인 2015 세계시각장애인경기대회 조직위원회 사무차장 역임.

    포상실적

    2010년 4월 20일: 국민포장 - 장애인복지 증진 유공(보건복지부)

    2017년 7월 18일: 체육포장 - 2015 세계시각장애인경기대회 운영 유공(문화체육관광부)

    「차례」 

    ※다른 눈으로 보기에 앞서

    1. ‘이 책은 이런 책이다’

    2. ‘간략하게 일러두기’

    3. ‘참고 문헌’

    4. ‘책을 내기까지’

    5. ‘추천사 임동석’

    6. ‘추천사 손병두’

    7. ‘추천사 정호완’

    8. ‘저자 약력’

    제1장 패자霸者를 기다리며

    제1절 낙양 천도洛陽遷都

    1. 주선왕周宣王 즉위卽位 전

    2. 불길한 조짐兆朕

    3. 포사褒姒

    4. 미소의 대가代價

    제2절 소패小霸 정장공鄭莊公

    1. 공숙 단共叔段의 난亂

    2. 주우州吁와 석작石碏

    3. 신흥 강자 정장공鄭莊公

    4. 시해弑害 그리고 시해

    5. 정군鄭軍과 천자군天子軍의 싸움

    6. 나도 왕이다

    제3절 반란叛亂과 변란變亂

    1. 밀거래된 군위君位

    2. 억울한 죽음

    3. 죄, 죄 그리고 피죄被罪

    제2장 패자霸者 제환공齊桓公

    1. 포숙아鮑叔牙의 눈

    2. 조귀논전曹劌論戰

    3. 식규息嬀

    4. 제환공齊桓公, 드디어 패자가 되다

    5. 17년 만의 복위復位

    6. 진晉나라 내전內戰은 끝나다

    7. 왕자王子 퇴頹의 난

    8. 비극의 씨

    9. 투곡오도鬪穀於菟

    10. 산융 토벌山戎討伐

    11. 죽고 죽이고, 또 죽이고

    12. 이것이 패자가 할 일

    13. 소릉 맹약召陵盟約

    14. 바로 세우기

    15. 순망치한脣亡齒寒

    16. 백리해百里奚도 얻고 건숙蹇叔도 얻고

    17. 신생申生의 자살

    18. 정변政變 그리고 두 시선

    19. 숙청肅淸

    20. 관중管仲의 죽음

    21. 한원 전쟁韓原戰爭

    22. 이런 충심忠心도 있소이다

    제3장 기다림 그리고 기다림의 끝

    제1절 짧고 굵게 진문공晉文公

    1. 쓸쓸한 퇴장

    2. 송양지인宋襄之仁

    3. 열국주유列國周遊

    4. 등극登極, 기다림의 끝

    5. 모반謀反, 그 정체는 불안과 의심

    6. 악연惡緣

    7. 패자 수업霸者修業

    8. 도전挑戰과 천명天命

    9. 성복 전쟁城濮戰爭

    10. 천토 회맹踐土會盟

    11. 쟁송爭訟

    12. 위衛나라의 변變

    13. 촉지무燭之武의 변설辯舌

    제2절 서융西戎의 패주伯主 진목공秦穆公

    1. 소 장수의 임기응변臨機應變

    2. 임금에게 침을 뱉은 선진先軫

    3. 마지막 소원, 곰 발바닥을 먹고 싶다

    4. 서융西戎의 패주伯主 진목공秦穆公

    제4장 초장왕楚莊王

    1. 옹雍이냐, 이고夷皐냐?갈팡질팡

    2. 막간幕間의 호령

    3. 사회士會 환국 작전還國作戰

    4. 원수를 물로 보다가 물이 된 제의공齊懿公

    5. 조모와 손자가 협잡挾雜한 군위 찬탈君位簒奪

    6. 심판자審判者

    7. 애강哀姜과 경영敬嬴

    8. 높이 날아오르는 새

    9. 내우외환內憂外患

    10. 희대 추행稀代醜行, 하희夏姬

    11. 필 전쟁邲戰爭, 지는 해와 뜨는 해

    12. 우맹優孟의 노래

    13. ‘신信’

    14. 결초보은結草報恩

    제1장 패자霸者를 기다리며

    제1절 낙양 천도洛陽遷都

    1. 주선왕周宣王 즉위卽位 전

    주周나라 부족 시조始祖는 요순堯舜 시대의 농업의 달인인 후직后稷이다. 그의 어머니, 즉 유태씨有邰氏의 딸이자 제곡帝嚳의 정실 부인正室夫人 강원姜原이 들판을 걷다가 길에 새겨진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태기를 느껴 낳은 아이가 후직后稷이다.

    강원姜原은 처음에는 불길하다고 하여 버렸으나, 짐승들이 피해서 가고 새들이 보호하는 것을 보고 아기가 보통 아기가 아님을 깨닫고 다시 데려다가 훌륭히 키웠다. 아이를 버리려고 했으므로 아이의 이름을 기棄라고 하였다.

    기棄는 어린 시절부터 농업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기술을 터득하고 그가 심은 마와 콩 등에서 성과를 내자, 요堯임금은 기棄를 등용登用하여 농사農士로 삼았다. 순舜임금 때에는 기棄를 태(邰: 섬서성陝西省 무공현武功縣 서남쪽)에 봉封하고 후직后稷이라고 불렀으며, 희씨姬氏 성姓을 하사下賜하였다. 그러나 후직后稷의 아들 불굴不窋은 하夏나라가 쇠퇴하자 관직官職을 잃고 서융西戎으로 떠났다.

    이후, 불굴不窋의 손자, 즉 공유(公劉: 후직后稷의 증손曾孫)는 서융西戎에서 농사를 다시 부흥復興하는 한편, 목재를 채취하여 사용했고 정착민은 물론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수입도 늘려 주어 사람들이 그의 밑으로 몰려들었다. 공유公劉의 아들, 즉 경절(慶節: 후직后稷의 고손高孫)은 빈(豳: 섬서성陝西省 순읍현旬邑縣 서남쪽)을 도읍都邑으로 하였다.

    후직后稷의 후손인 고공 단보古公亶父는 후직后稷과 공유公劉의 사업을 다시 일으켜 널리 덕德을 베풀었다. 적인狄人이 빈豳을 침범했을 때, 고공 단보古公亶父는 적인狄人에게 가죽과 비단, 개와 말, 진주와 구슬 등을 주며 달래었으나, 적인狄人들은 물러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자 고공 단보古公亶父는 백성百姓은 군주君主가 누구든 상관없다. 그들에게 이익만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백성이 나를 군주로 지키려고 싸운다면 이는 백성을 죽게 하며 그들의 군주가 되는 것인데, 나는 차마 그럴 수는 없다. 땅은 사람을 길러 주는 바탕인데 지금은 전쟁의 근원이 되니 어찌 이 땅을 지키려고 할 수 있으리!라고 하고는 자기 가까운 친척과 하인들과 함께 기산(岐山: 섬서성陝西省 기산현岐山縣)으로 달아나 기원전紀元前 1122년에 주周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빈豳의 백성들은 물론 고공 단보古公亶父의 소문을 들은 인근 백성들도 기산岐山으로 몰려갔다.

    그는 교육을 담당하는 사도司徒, 군사軍事를 담당하는 사마司馬, 토목 공사를 담당하는 사공司空, 토지를 담당하는 사토司土, 형벌을 담당하는 사구司寇의 5관五官을 두어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고공 단보古公亶父의 손자 창昌은 후덕厚德하고 인자하였다. 태전太顚, 굉요閎夭, 산의생散宜生, 육자鬻子 등 당대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우(虞: 산서성山西省 평륙현平陸縣 동북쪽)나라와 예(芮: 섬서성陝西省 대려현大荔縣 동남쪽)나라 두 임금이 땅을 두고 싸우다가 창昌의 조언을 들으려고 창昌을 찾아갔다. 둘은 기산岐山에 접어들어 백성은 관리官吏가 되기를 사양辭讓하는 것을 보았고, 하급 관리는 공경公卿을 사양하는 것을 보고는 둘은 이렇듯 온 나라가 사양하니 주周나라 임금은 천하를 사양하는 자일 것이다.라며 크게 깨달았다. 그러고는 창昌을 만나지 않고 자기들이 다투던 땅을 한전(閒田: 소유권이 없는 땅)으로 만드는 데에 합의合意하였다. 이같이 창昌의 명성名聲은 높았다.

    창昌의 기세와 덕망에 대하여 숭후崇侯 호虎는 은(殷: 왕조王朝 초기에는 상商이라 함)나라 주왕紂王에게 제후諸侯들이 창昌을 좋아하니 장차 이롭지 못할 것이라고 모함謀陷하자 주왕紂王은 창昌을 유리(羑里: 하남성河南省 탕음현湯陰縣 북쪽)에 가두었다.

    이에 산의생散宜生 등이 유신(有莘: 산동성山東省 조현曹縣 북쪽)의 미녀, 여융驪戎의 명마 등 기이奇異한 보물들을 은殷나라의 총신寵臣 비중費仲을 통하여 주왕紂王에게 바치며 창昌의 석방을 요청하자 주왕紂王은 크게 기뻐하며 창昌을 사면赦免하고, 궁시弓矢와 부월斧鉞을 하사하여 제후국諸侯國을 정벌할 수 있게 하였다.

    a0111 브리핑 (briefing) + 덤 상-1

    비중費仲이 창昌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창昌이 석방되도록 역할을 한 것과 주왕紂王이 뇌물을 받고 창昌을 석방한 내용은 「주 본기(周本紀)」의 기록記錄인데 「한비자(韓非子) 외저설(外儲說) 좌하(左下)」에는 「주 본기(周本紀)」와는 다른 이미지의 주왕紂王과 비중費仲을 언급하면서 주왕紂王이 비중費仲의 진언을 듣지 않아 결국 은殷나라가 멸망했다고 소개紹介하고 있다.

    비중費仲은 주왕紂王에게 세 번이나 창昌은 인자하여 백성들과 제후들이 복종하고 있다. 관은 낡았더라도 반드시 머리에 쓰야 하고, 신발은 보기 좋게 꾸몄더라도 반드시 발에 신는다. 신하가 군주보다 의로운 것은 결코 군주에게 도움이 안 된다. 또 군주가 신하를 주벌하는 것은 자연스러우니 조속히 창昌을 없애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주왕紂王은 그대 말대로 창昌이 의롭다면 어찌 그를 칠 수 있겠느냐? 또 인의仁義는 권면하는 바인데, 창昌이 인의롭다고 친다면 어찌 권면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겠느냐?라며 비중費仲의 말을 듣지 않았다.

    또 「한비자(韓非子) 유로(喩老)」에는 간신 비중費仲이 주왕紂王의 총애를 더욱 받게 하면서 창昌 자신과 비중費仲의 관계를 두텁게 한, 창昌의 지혜智慧를 소개하고 있다.

    주왕紂王은 창昌이 옥에 문자를 새긴 귀중한 옥판玉版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는 그것을 갖고 싶어 교격膠鬲을 창昌에게 보내어 옥판을 달라고 했으나, 창昌은 주지 않았다. 이에 주왕紂王은 다시 비중費仲을 창昌에게 보내어 옥판을 달라고 하자 창昌은 비중費仲에게 옥판을 내주었다. 주왕紂王은 옥판을 보고 기뻐하였다.

    창昌은 옥판을 주기 싫었으나, 주왕紂王이 가지려고 마음먹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국 소유하고야 만다는 것을 잘 알기에 옥판을 일찍 포기하였다. 그러나 주기는 주되 자신에게 도움이 되게 할 방도는 없을까 궁리하다가 교격膠鬲이 아닌 비중費仲에게 내주었다. 교격膠鬲은 어질고 도량이 큰 인물이어서 옥판을 가져가서 주왕紂王의 총애를 더 받아 봤자 결코 창昌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判斷하였다. 그러나 비중費仲은 간신 소인배여서 옥판을 가져 가 주왕紂王의 총애를 더 입게 되면 창昌 자신의 공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도 뇌물로 자기 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서백西伯, 즉 창昌은 견융犬戎, 밀수(密須: 감숙성甘肅省 영대현靈臺縣 서쪽), 기耆, 우虞, 숭(崇: 섬서성陝西省 호현戶縣 동쪽)등을 정벌하여 땅을 넓히는 한편, 풍(豐: 섬서성陝西省 호현戶縣 북쪽)땅으로 도읍을 옮겼다.

    기원전 1056년, 창昌에 이어 군위君位에 오른 발發이 주무왕周武王이다. 무왕武王은 강상(姜尙: 자아子牙. 강태공姜太公 또는 태공망太公望이라고도 함)과 동생 주공 단周公旦, 소공 석召公奭, 필공畢公의 보좌를 받아 선정善政을 베풀어 민심民心을 얻고 군대를 정비하는 한편, 도읍을 호(鎬: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 서쪽)로 옮겼다. 그러고는 달기妲己에 빠져 폭정暴政을 일삼는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주왕紂王을 타도打倒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강태공姜太公은 여(呂: 하남성河南省 남양현南陽縣 서쪽)나라의 후예여서 여상呂尙이라고도 한다.

    기원전 1048년, 무왕武王은 맹진(孟津: 하남성河南省 맹현孟縣 남쪽)에 제후 800여 명을 소집召集, 대대적인 열병식閱兵式을 개최하여 세를 과시하였다. 제후들은 곧장 은殷나라를 치자고 했으나, 무왕武王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군사를 물렸는데, 자신에 대한 제후들의 지지는 확인한 셈이었다.

    무왕武王은 은殷나라를 칠 기회를 노리며 은殷의 정세를 정탐하기 위하여 수차 은殷에 정탐꾼을 파견하였다. 정탐꾼이 돌아와 지금 은殷나라는 사악邪惡함과 간악奸惡함이 군자君子를 누를 만큼 혼란스럽다.라고 보고했으나 무왕武王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어 또 지금 은殷나라는 현자賢者들이 다른 곳으로 달아날 만큼 더 혼란스럽다.라고 보고했으나 무왕武王은 여전히 때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지금 은殷나라는 백성들이 은殷나라 임금을 원망怨望하지 못할 정도로 매우 혼란스럽다.라고 하자 그제야 출병出兵 준비를 시켰다.

    강태공姜太公은 사악함과 간악함이 군자를 누르는 것은 ‘포악暴惡함’이요, 현자들이 달아나는 것은 ‘무너짐’이며, 백성들이 헐뜯고 원망하지 못하는 것은 ‘살육이 판을 침’이라고 하면서 은殷나라의 혼란은 극에 달하여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진단하였다.

    무왕武王 11년, 즉 기원전 1046년, 무왕武王은 지금 주왕紂王은 달기妲己만 위할 뿐, 자기 부모 형제마저도 저버리며 스스로 천명天命을 끊고 하늘과 땅과 사람의 도리를 훼손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하늘의 명과 벌을 받들어 황음무도한 은殷나라를 치려고 한다.라고 천명闡明하였다. 이어 용맹한 자국군自國軍 소갑군素甲軍 3천과 갑옷 입은 병사兵士 45,000에다 용庸, 촉蜀, 강江, 미微 등의 군사 수만으로 거병擧兵하여 맹진孟津으로 진격進擊하였다.

    2월 갑자일甲子日, 무왕武王이 이끄는 연합군聯合軍은 목야(牧野: 하남성河南省 기현淇縣 서남쪽)에서 주왕이 이끄는 수십 만의 은군殷軍과 교전交戰하여 은군殷軍을 대파大破하였다.

    무왕武王은 은殷나라를 치기 전에 연합군 장수將帥들이 모인 자리에서 연합군의 결전 의지를 다지고자 주공 단周公旦에게 사람들이 은殷나라를 종주국이라 여기고 우리 주周나라를 은殷의 제후국이라고 여기는데, 이때 제후국이 천자국天子國을 쳐서 이길 묘수妙手가 없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주공 단周公旦이 은殷이 진정眞正 천자국이고 주周가 제후국의 역량밖에 없다면 주周나라는 결코 은殷을 이길 수 없다.라고 답하자, 무왕武王은 대로大怒하였다. 무왕武王은 주공 단周公旦에게서 출병의 당위성當爲性이나 연합군의 정신을 무장할 수 있는 각오를 기대했다가 생뚱맞는 소리에 크게 화가 났던 것이다.

    그러나 주공 단周公旦은 예禮 있는 자를 치는 것을 적賊이라고 하고 의로운 자를 치는 것을 잔殘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 주공主公은 무도하고 민심을 잃은 주紂를 치면서 어찌 천자를 치는 부담을 느끼는가?라며 무왕武王을 일깨우자, 무왕武王 등은 신하가 천자를 친다는 부담, 즉 반역의 심적 부담을 떨치는 환호歡呼를 내지르며 결전 의지를 다지고 출병하였다.

    무왕武王은 진군進軍하면서 수도(隧道: 땅을 파서 만든 길)를 지난 후 이를 허물어뜨렸고, 물을 건넌 후 배를 파손하는 등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군대가 영(寗: 하남성河南省 초작시焦作市)에 이르렀을 때, 폭풍우를 만나 군기가 큰 바람에 부러지고 큰비가 내려 행군을 방해하고, 거북등 껍질을 불에 태워 점을 치려고 할 때 불이 꺼지는 등의 징조徵兆가 나타나자 산의생散宜生은 불길하다며 진군을 잠시 멈추자고 진언進言하였다. 폭풍우를 만난 영寗에서도 군사 훈련은 계속했다고 하여 이 영寗을 수무修武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무왕武王은 천군天軍이 우리를 도와준다는 뜻이고 적군敵軍을 물로 쓸어 가겠다는 뜻이며 불이 꺼진 것은 하늘에 비느니 차라리 적군을 쳐라는 뜻이다.라며 어둡게 짓누르던 아군我軍 진영陣營의 두려움과 주저함을 깨끗이 걷어내고 계속 진군할 것을 명령하였다.

    또 무왕武王이 이끈 연합군이 유수鮪水에 이르렀을 때, 은殷나라의 신하 교격膠鬲이 찾아와 무왕武王의 진로進路를 염탐廉探했는데, 무왕武王은 그에게 연합군은 2월 갑자일에 은殷의 도성都城인 조가(朝歌: 하남성河南省 기현淇縣)에 도착할 것이다.라며 당당하게 밝혔다.

    그 후, 밤낮으로 폭우가 쏟아지자 연합군 참모들은 폭우를 피하여 잠시 쉬어 가자고 건의했으나, 무왕武王은 이를 뿌리치고 연합군을 거세게 재촉하였다. 자기가 교격膠鬲에게 2월 갑자일에 조가朝歌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만일 그 날짜에 도착하지 못하면 교격膠鬲은 주왕紂王에게 허위 보고한 셈이 되어 교격膠鬲의 생명이 위험할 것이라며, 교격膠鬲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도 서둘자고 연합군을 설득한 것이다.

    주왕紂王이 민심을 잃어 연합군이 가는 곳마다 귀순歸順했고, 은군殷軍은 창을 거꾸로 잡아 오히려 연합군을 도와 싸움다운 싸움 없이 조가朝歌까지 진격하였다. 주왕紂王은 세가 기울었음을 절감切感, 녹대(鹿臺: 하남성河南省 기현淇縣 서쪽)에 올라가 분신자살焚身自殺했고, 은殷은 멸망하였다. 달기妲己도 목을 매고 자살하였다.

    a0111 팩트체크 (fact-check) 상-1

    주왕紂王 등의 죽음과 관련한 기록이 상이相異하다. 첫째, 주왕紂王의 최후最後이다. 「주 본기(周本紀)」에서는 주왕紂王은 은군殷軍이 자신을 배신한 것을 자각自覺하고 녹대鹿臺 위에 올라가 비단옷을 두르고 스스로 불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여씨춘추(呂氏春秋)』 「팔람(八覽) 신대람(愼大覽)」에서는 주왕紂王은 무왕武王에게 생포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둘째, 달기妲己가 죽은 양상樣相이다. 「주 본기(周本紀)」에서는 주왕紂王의 애첩愛妾 두 여인(달기妲己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은 목매어 자살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은 본기(殷本紀)」에서는 주무왕周武王이 달기妲己를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셋째, 교격膠鬲이 어느 나라의 신하인가 하는 것이다. 「맹자(孟子) 고자(告子) 하(下)」에서는 교격膠鬲은 난리 중에 생선과 소금을 팔다가 주문왕周文王의 눈에 들어 등용되었다고 소개하고 있고, 「국어 진어(國語晉語) 1」에서는 주무왕周武王이 은殷나라를 멸할 때 교격膠鬲은 주周나라 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여씨춘추(呂氏春秋)』 「팔람(八覽) 신대람(愼大覽)」에서는 교격膠鬲은 주무왕周武王 때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신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한편, 하夏나라 걸왕桀王이 유시有施를 치고 말희(妺喜: 말희末喜라고도 함)를 데려온 것과 은殷나라 주왕紂王이 유소有蘇를 치고 달기妲己를 전리품으로 데려온 점, 걸왕桀王이 은殷의 탕왕湯王을 하대(夏臺: 하남성河南省 우현禹縣 동쪽)에, 주왕紂王이 창昌을 유리羑里에 가두었다가 공히共히 석방한 점,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이 탕왕蕩王과 창昌에게 공히 패망한 점 등이 너무 유사하여 두 사건은 하나라는 설說도 있다.

    무왕武王은 은殷나라에 들어가자마자 덕망德望 있는 은殷의 원로元老를 찾아가 은殷나라가 왜 망했느냐며 그 패망 원인을 물었다. 무왕武王이 생각하기에도 은殷나라가 너무나 쉽게 무기력하게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은殷나라 원로는 굳이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내일 다시 만나자.라고 하고는 그 자리를 피하였다.

    다음날, 무왕武王은 주공 단周公旦을 대동하고 약속 시간에 맞춰 다시 원로를 만나러 갔는데, 원로를 만날 수는 없었다. 이미 원로는 자취를 감춘 후였다. 이때 주공 단周公旦이 나서 원로는 군자다. 주왕紂王이 죽을 때 따라 죽지도 못했는데, 어찌 그가 모신 왕의 추하고 악한 점을 말하고 싶겠느냐? 그러나 원로는 답을 말한 셈이다. ‘약속하고도 이행履行하지 않고, 말하고도 신의를 지키지 않은 일’ 이것이 바로 은殷나라가 멸망한 이유가 아닐까!라며 원로가 사라진 배경을 추정推定하였다.

    무왕武王이 은殷나라 백성들과 선비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묻자, 강태공姜太公은 남김없이 죽이자고 했고, 소공 석召公奭은 죄 있는 자는 죽이고 죄 없는 자는 살려 두자고 했으며, 주공 단周公旦은 전과 같이 살게 하며 오직 인仁으로 다스리면 백성들이 순복順服할 것이다. 백성에게 잘못이 있다면 ‘나의 탓이다.’고 생각하면 된다.라고 진언進言, 무왕武王은 주공 단周公旦의 진언을 받아들였다.

    무왕武王은 은殷나라 백성들의 열열한 환영을 받으며 입성入城하였다. 무왕武王은 그때까지 옥에 갇혀 있던 서여(胥餘: 기자箕子라고도 함)등을 석방했고 녹대鹿臺 등의 곡식과 재물 등을 풀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구정九鼎을 낙(洛: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 낙양洛陽이라고도 함)으로 옮겼다. 서여胥餘는 기箕에 봉해져 기자箕子라고 한다.

    창昌과 정비正妃 태사太姒와의 사이에 백읍고伯邑考, 무왕武王 발發, 선鮮, 주공 단周公旦, 도度, 진탁振鐸, 무武, 처處, 봉封, 재載의 열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백읍고伯邑考는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하기 전에 주왕紂王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a0111 팩트체크 (fact-check) 상-2

    선鮮과 단旦의 형제 관계와 관련하여 「관·채 세가(管蔡世家)」,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하」, 「장자(莊子) 도척(盜跖)」에서는 선鮮이 단旦의 형이라고 기록·소개하고 있으나, 단旦이 선鮮의 형이라는 설도 있다. 소공 석召公奭과 관련하여 「주 본기(周本紀)」에서는 무왕武王의 신하, 「사기 표(史記表) 삼대세표(三代世表)」 주성왕周成王 조朝에서는 주周나라와 동성이라고만 기록하고 있으나, 무왕武王의 동모제同母弟 또는 이모제異母弟라는 설도 있다.

    무왕武王은 은殷나라를 멸한 후 창昌을 문왕文王으로 추존追尊하고, 선鮮에게 관(管: 하남성河南省 정주시鄭州市), 주공 단周公旦에게 노(魯: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 도度에게 채(蔡: 하남성河南省 상채현上蔡縣), 진탁振鐸에게 조(曹: 산동성山東省 정도현定陶縣 북쪽), 무武에게 성(郕: 처음에는 산동성山東省 늠구현廩丘縣에 있었으나 산동성山東省 영양현寧陽縣으로 옮김), 처處에게 곽(霍: 산서성山西省 곽현霍縣 서남쪽), 봉封에게 강康 그리고 강태공姜太公에게 제(齊: 산동성山東省 치박시淄博市 서북쪽)를 분봉分封하는 등 봉건 제도封建制度를 시행하였다.

    또 무왕武王은 주왕紂王의 아들인 무경武庚에게 은殷의 유민들을 다스리게 하는 한편, 동생인 관숙 선管叔鮮과 채숙 도蔡叔度에게 무경武庚을 감시하며 돕게 하였다. 선대先代의 성군들을 추념追念하여 신농씨神農氏의 후손을 초楚에, 황제黃帝의 후손을 축祝에, 요堯의 후손을 계薊에, 순舜의 후손을 진陳에, 우禹의 후손을 기杞에 각각 봉하였다.

    삼감三監의 난 이후 주성왕周成王은 강숙 봉康叔封에게 위衛, 재載에게 염聃, 미자 계(微子啓: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이복형)에게 송宋을 분봉하기도 하였다.

    a0222 브리핑 (briefing) + 덤 상-2

    「좌전(左傳) 노은공(魯隱公) 8년」조條에는 성씨姓氏와 관련한 노魯나라 대부大夫 중중衆仲의 말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천자는 유덕有德한 자를 제후에 봉封할 때 그의 출생지의 이름을 따서 제후의 성姓을 하사하고 그에게 하사한 봉지封地의 이름을 따서 씨氏를 하사하였다. 제후는 지위地位가 낮아 신하에게 성을 줄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신하의 자字를 보고 시호諡號를 하사했고 그 후손들은 그 시호로써 씨를 삼았다. 그리고 대대로 유공有功한 신하의 후손은 그 관직명으로 씨를 삼기도 했고 때로는 하사받거나 다스린 고을의 이름을 따서 씨氏로 삼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 기록에 의하여 살펴보면 성姓은 바꿀 수 없는 것이고 씨氏는 같은 성姓에서 조상祖上의 자字, 관직명, 봉지의 이름을 따서 갈려 나온, 즉 우리나라의 본관과도 유사한 뜻이다.

    주무왕周武王은 순舜이 규예嬀汭에서 출생했다고 하여 순舜의 후손 호공胡公에게 규(嬀: 규媯라고도 함)를 하사하며 진陳을 봉하여 씨로 삼도록 하였다. 관직명으로 씨가 된 것은 사마씨司馬氏, 사공씨司空氏, 태사씨太史氏 등이 있고, 봉지로 씨가 된 것은 진晉나라의 한씨韓氏, 위씨魏氏, 조씨趙氏 등이 있다.

    시호는 왕이나 제후를 포함한 왕실王室과 공실公室의 종친宗親, 경상卿相, 선비들이 죽은 뒤에 이들의 행실이나 업적을 평가平價하여 붙이는 호號를 말하는데, 시호 대상 인물의 생전의 선악善惡과 미추美醜를 판별하여 후대에 이를 권장하거나 징계하려는 목적이었다. 시호를 추증追贈하는 방법을 시법諡法이라고 하는데, 시호와 시법諡法은 주공 단周公旦 때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호의 글자는 처음에는 28자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약 200자에 달했는데, 주로 문文, 충忠, 정貞, 공恭, 양襄, 정靖, 양良, 효孝, 장莊, 안安, 경景, 장章, 익翼, 소昭, 평平, 희僖, 무武, 강康, 정正, 숙肅, 인仁, 경敬, 정定, 혜惠, 의懿, 헌憲, 열烈, 헌獻, 간簡, 원元, 성成, 순純, 목穆, 민敏, 의毅, 절節, 청淸, 선宣, 현顯, 순順, 단端, 강剛, 영榮, 장壯, 제齊, 대戴, 의義, 온溫, 도度, 장長, 명明, 광匡, 양煬, 황荒, 혹惑, 유幽, 영靈, 여厲, 폭暴, 혼昏 회懷, 도悼, 애哀, 민閔 등의 글자를 썼다.

    문文은 ‘經天緯地경천위지: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리다’, ‘勤學好問근학호문: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다’, ‘道德博聞도덕박문: 도덕을 널리 들어 아는 바가 많다’, ‘忠信愛人충신애인: 충과 신으로 남을 사랑한다’, ‘博聞多見박문다견: 널리 듣고 많이 본다’ 등의 여러 의미로 쓰였는데, 이처럼 시호 한 글자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였다.

    시호 대상 인물의 생전의 행위의 미선美善과 추악醜惡에 기초하여 미美, 평平, 악惡으로 대별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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