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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눈으로 본 열국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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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중국 명明나라 말엽의 작가 풍몽룡馮夢龍이 중국의 기원전 8세기~3세기에 이르는 약 600년의 춘추 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의 장구한 역사를 형상화한 소설 『동주 열국지(東周列國志)』를 거꾸로 역사적으로 비교하며 탐색한 책이다.
즉, 『동주 열국지』란 소설 속에 용해되거나 함축된 동시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좌구명左丘明의 『춘추좌전(春秋左傳)』, 『국어(國語)』,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유향劉向의 『전국책(戰國策)』, 『설원(說苑)』, 한비韓非의 『한비자(韓非子)』, 안자晏子의 『안자춘추(晏子春秋)』, 여불위呂不韋의 『여씨춘추(呂氏春秋)』, 『논어(論語)』, 맹자孟子의 『맹자(孟子)』, 장자莊子의 『장자(莊子)』 등에 기록되거나 전해지는 역사적 사실이나 일화와 비교하여 무엇은 사실이고 무엇은 허구인지를 가려보려는 참신하고 이색적인 책이다.
이 책은 첫째, 각 권마다 『동주 열국지』의 역사 소설을 압축한 소설 부분, 『동주 열국지』와 그 시대 배경이 되는 사서들을 세밀하게 비교·분석한 팩트체크(fact-check) 부분, 그리고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등에 관한, 참고 문헌에서 기록·소개하고 있는 일화, 비평, 보충 설명 등을 담은 브리핑(briefing) + 덤의 세 가지 부분으로 구획되어 있어서 소설의 흥미뿐만 아니라 역사 지식의 정보도 제공하고 있고,
둘째, 중국 고대 인명의 경우 그 사람의 관직, 봉읍封邑, 시호諡號 등에 따라 상이하여 동일인 여부 판단이 상당히 어려워 애를 먹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에서는 인명이나 지명의 경우 사서와 상이한 것은 별도로 표기하려고 하여 동일인 여부 판단에 많은 도움을 제공하고 있고,
셋째, 각 사건의 과정 과정마다 일일이 사서들을 비교 확인하여 서기 환산 연도(왕이나 제후의 재위 기간 표기가 아니라 기원전 표기)로 표기하였는데, 이는 열국지의 사건을 단발적인 일화 수준이 아닌 춘추 전국 시대의 종합적이고도 연계적인 사건 구조로 파악할 수 있게 구성하고 있는 점이 기존의 『열국지』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며, 역사 소설을 역사적으로 검증하려는 새로운 장르의 실험적인 시도이자 가치를 담은 반소설 겸 역사 반입문서이다.
우리가 역사 소설을 즐겨 읽는 것은,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인간의 본성에 바탕을 둔 욕망, 야망, 사랑, 증오, 배신과 복수, 시혜와 보은 등의 인간 삶의 양태樣態의 동질성을 발견할 수 있고, 따라서 오늘의 삶을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는 교훈과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며, 나아가 오늘의 선택이 나에게 어떤 미래를 가져다 줄 것인지를 예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불 10년’, ‘권선징악’, ‘쥐구멍에도 볕 뜰 날이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교훈과 지혜 등은 역사가 아니면 도저히 배울 수 없는,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인류의 소중한 가치이자 자산이다.
이 책은 열국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 열국지 마니아, 역사 입문자나 전문가에게 재미면 재미, 지식이면 지식 면에서 독자들에의 취향과 성향에 따라 선택적으로 읽을꺼리를 제공하고 있고, 역사가 독자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교훈과 지혜를 듬뿍 담았다. 한 번에 독파하기는 어렵지만 독파하기만 하면 열국지와 고대 중국사 및 한자에 자신감을 갖게 할 수 있는, 두고두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고, 소장 가치가 있는 책이다.
한국중어중문학회 회장, 중국어문학연구회 회장, 한국중국언어학회 회장 등을 역임한 임동석 교수는 이 책의 추천사에서 저자 강용봉의 창작 활동에 대하여 ‘파천황破天荒’적 작업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Language한국어
Release dateJun 16, 2023
ISBN9791198328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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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눈으로 본 열국지 하 - 강 용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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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눈으로 본 열국지(하권)

    열국지 팩트체크(fact-check)

    ※다른 눈으로 보기에 앞서

    1. ‘이 책은 이런 책이다’

    이 책은 중국 명明나라 말엽의 작가 풍몽룡馮夢龍이, 중국의 기원전 8세기~3세기에 이르는 약 600년의 춘추 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의 장구한 역사를 형상화한 소설 『동주 열국지(東周列國志)』(청淸대의 채원방蔡元放이 풍몽룡의 『신열국지』를 『동주 열국지』라고 개칭)를 거꾸로 역사적으로 비교하며 탐색한 책이다.

    즉, 『동주 열국지』란 소설 속에 용해되거나 함축된 동시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좌구명左丘明의 『춘추좌전(春秋左傳)』, 『국어(國語)』,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유향劉向의 『전국책(戰國策)』, 『설원(說苑)』, 한비韓非의 『한비자(韓非子)』, 안자晏子의 『안자춘추(晏子春秋)』, 여불위呂不韋의 『여씨춘추(呂氏春秋)』, 『논어(論語)』, 맹자孟子의 『맹자(孟子)』, 장자莊子의 『장자(莊子)』 등에 기록되거나 전해지는 역사적 사실이나 일화와 비교하여 무엇은 사실이고 무엇은 허구인지를 가려보려는 시도이다.

    역사 소설은 말 그대로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만, 반대로 소설 속에 담긴 역사는 뭘까? 그저 허구의 액세서리일까? 그래도 역사일 수 있을까? 이것도 아니면 역사가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새로운 ‘허구적 역사’일까? 자주 의문을 가졌다.

    이 책은 이런 의문에서 역사 소설을 한번 역사적으로 탐색해보는 것도 의미 있고 재미가 있겠다 싶어 실험적으로 시도한 반소설이자 역사 반입문서이다.

    그리고 이 책은 2022년 4월에 발행된 『다른 눈으로 본 열국지』의 정정본訂正本이다. 차례, 팩트체크의 위치 등의 형태적인 면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많은 것을 수정하고 바로잡았다. 독자들의 너그로운 아량과 양해 부탁 드린다.

    2. ‘간략하게 일러두기’

    1) 이 책의 팩트체크(fact-check)에 책이름 없이 나오는 회차 표시는 위키미디어 재단 위키문헌(zh.wikisource.org)에 탑재된 풍몽룡의 『동주 열국지』 원문의 회차를 말하는데, 풍몽룡의 『동주 열국지』를 인용하는 빈도가 너무 많고, 출전 표기가 길어서 앞으로 ‘위키미디어 재단 위키문헌 풍몽룡의 『동주 열국지』’는 ‘『동주 열국지』’라 하고, 회차 표기는 위키미디어 재단 위키문헌 풍몽룡의 『동주 열국지』를 생략하고 회차 숫자만 표기하도록 하겠다.

    2) 출전 축약에 관하여: 일반적으로는 『사기(史記)』 「본기(本紀)」 ‘주 본기(周本紀)’의 형식으로 서명과 편명을 표기해야 하나, 출현 빈도가 너무 잦아 이 책에서는 축약하여 「주 본기」라고만 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언급되는 「본기(本紀)」, 「세가(世家)」, 「열전(列傳)」, 「연표(年表)」는 모두 『사기(史記)』라는 서명을 생략한 것이고, 다른 사서도 되도록 서명을 축약해서 표기하였다. 이는 이 책이 논문 등 연구물이 아님을 나타내려는 의도도 포함된 것이다.

    3) 「연표(年表)」 인용에 관하여: 「연표(年表)」는 『사기』 내의 「본기(本紀)」, 「세가(世家)」, 「열전(列傳)」의 기사를 보조하는 기능인 셈이어서 『사기』 내에서 기사가 상이하거나 「연표(年表)」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에 한하여 「연표(年表)」를 인용하였다.

    4) 시호諡號 사용에 대하여: 원래 시호는 왕이나 제후 등이 죽은 후에 망자의 행적 등을 참작하여 추증하는 것이어서 망자의 생전에는 쓰이지 않는 것이나, 이 책에서는 명확한 의미 전달을 위하여 망자의 생전에도 그 시호를 사용하였다.

    예) 주유왕周幽王, 제환공齊桓公, 위영공衛靈公

    5) 왕이나 제후는 되도록 시호를 썼고, 그 외의 인명은 되도록 그 사람의 자字보다 이름을 주로 하였으며, 이름을 알 수 없거나 불분명하거나 또는 이미 주지되고 있는 유명한 사람의 경우에는 그 사람의 시호나 자字를 썼다.

    6) 『동주 열국지』의 인명이나 지명이 사서, 즉 『사기)』, 『춘추좌전』, 『국어』, 『자치통감』, 『전국책』과 다를 경우, 해당 사서의 인명이나 지명을 채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서 간에도 서로 다를 경우 되도록 『춘추좌전』과 『자치통감』 순으로 따랐고, 이 외에는 원문의 것과 같은 것을 따랐으며, 『동주 열국지』와 사서 외의 참고 문헌을 인용했을 경우, 인·지명은 그 문헌의 것을 따랐다.

    7) 『동주 열국지』의 한자가 우리나라에서 자주 사용되는 글자와 다를 경우에는 원문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널리 쓰이는 것을 채택하였다. 

    예) 鬥 → 鬪, 薳 → 蔿

    8) 직접 인용에 대하여: 원래 직접 인용은 본인의 말이나 원전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나, 이 책에서는 발화자의 심경을 박진감 있게 전달하려고 경어법 등 화법 규칙을 따르지 않았음을 밝혀 둔다.

    9) 팩트체크(fact-check)의 괄호 속에 출전 언급 없이 표기된 주周 왕조와 제후들의 재위 연도의 서기 환산 표기는 「사기 표(史記表) 십이제후 연표(十二諸侯年表)」와 「사기 표(史記表) 육국 연표(六國年表)」를 기준으로 했음을 밝혀 둔다.

    10) 2천여 년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전래되면서 소실되거나 보완되는 등의 변화를 겪은 사서들을 비교·추정하는 것이므로 되도록 시비是非를 단정하기보다 상이相異를 밝히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3.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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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다른 눈으로 보기에 앞서

    1. ‘이 책은 이런 책이다’

    2. ‘간략하게 일러두기’

    3. ‘참고 문헌’

    제7장 최강자를 향한 각축전角逐戰

    제1절 위문후魏文侯

    1. 진晉나라, 삼진三晉으로 분열

    2. 예양豫讓

    3. 삼진三晉 공식 승인

    4. 악양樂羊

    5. 섭정聶政

    6. 오기吳起

    제2절 손빈孫臏과 방연龐涓

    1. 제위왕齊威王

    2. ‘상군 변법商君變法’

    3. 귀곡鬼谷 선생

    4. 손빈孫臏 구출 작전

    5. 계릉桂陵 전투

    6. 방연龐涓과 마릉馬陵

    7. 상앙商鞅의 종말

    제3절 소진蘇秦과 장의張儀

    1. 소진蘇秦

    2. 장의張儀

    3. 합종合縱을 위한 원수 회맹洹水會盟

    4. 표리부동表裏不同

    5. 소진蘇秦의 죽음

    6. 맹상군孟嘗君의 등장

    7. 암군暗君의 멋이 화禍를 부르다

    8. 장의張儀에게 농락당한 초회왕楚懷王

    9. 장의張儀의 마지막 지혜

    10. 맹자孟子

    제8장 진소양왕秦昭襄王

    1. 가벼움과 무거움의 차이

    2. 초회왕楚懷王의 분사憤死

    3. 조무령왕趙武靈王

    4. 「이소(離騷)」

    5. 계명구도鷄鳴狗盜

    6. 걸송桀宋 송강왕宋康王

    7. 허황된 꿈의 마지막

    8. 전단田單, 제齊나라를 복원復元하다

    9. 인상여藺相如와 염파廉頗

    10. 진군進軍하는 진군秦軍

    11. 범저范雎

    12. 한 죽음에 얽힌 이해타산利害打算

    13. 춘신군春申君의 결단決斷

    14. 장평 전쟁長平戰爭

    15. 여불위呂不韋의 셈법

    16. 백기白起의 죽음

    17. 이인異人, 한단 탈출邯鄲脫出

    18. 병부兵符를 훔친 신릉군信陵君

    19. 구정九鼎, 옹주雍州로 옮겨지다

    20. 동주東周와 서주西周

    21. 쉽게 본 조趙나라에게 당한 연燕나라

    제9장 분열의 끝, 진시황秦始皇의 시대

    1. 신릉군信陵君의 화려한 귀환歸還

    2. 불신과 분열

    3. 장안군長安君의 반역反逆

    4. 왕통 절도王統竊盜 사건

    5. 소서자少庶子 감라甘羅

    6. 노애嫪毐의 난亂과 여불위呂不韋의 몰락沒落

    7. 한비韓非와 이사李斯

    8. 조趙나라의 멸망

    9. 형가荊軻에게 걸린 마지막 반전反轉의 기회

    10. 초楚나라도 사라지다

    11. 천하일통天下一統

    제7장 최강자를 향한 각축전角逐戰

    제1절 위문후魏文侯

    1. 진晉나라, 삼진三晉으로 분열

    a0222 브리핑 (briefing) + 덤 하-138

    주지周知하는 바와 같이 춘추 시대春秋時代의 시점은 주평왕周平王이 낙양洛陽으로 천도遷都한 기원전紀元前 770년이고,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종점은 진시황秦始皇이 중국中國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이라는 것에 대하여는 거의 이론異論이 없다. 그러나 춘추 시대의 종점이자 전국 시대의 시점, 즉 춘추 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의 분기점分岐點에 대하여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근거한 ‘기원전 476년설’,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근거한 ‘기원전 404년설’, 위魏, 한韓, 조趙 삼가三家가 지씨知氏를 멸망시키고 진晉나라를 3분한 것에 근거한 ‘기원전 453년설’ 등 여러 이견이 있다.

    전국 시대의 ‘연표(年表)’ 중 「사기 표(史記表) 육국 연표(六國年表)」는 각 나라 왕의 재위 연도在位年度 외에도 다른 기사記事를 다루고 있는 데 반하여 「전국 기년표(戰國紀年表)」는 각 나라 왕의 재위 연도만 기록記錄하고 있다. 또 「사기 표(史記表) 육국 연표(六國年表)」는 주周나라를 포함하여 진秦, 위魏, 한韓, 조趙, 초楚, 연燕, 제齊 8국의 기사를 다루고 있는 데 반하여 「전국 기년표(戰國紀年表)」는 8국 외에 전제田齊와 진晉이 추가되어 있다. 「전국 기년표(戰國紀年表)」는 만국정萬國鼎의 『중국 역사 기년표(中國歷史紀年表)』에서 발췌拔萃하였다.

    전국 시대 초기인 기원전 475년의 경우 「사기 표(史記表) 육국 연표(六國年表)」에서는 주원왕周元王 2년, 진여공공秦厲共公 2년, 조간자趙簡子 43년, 초혜왕楚惠王 14년, 연헌공燕獻公 18년, 제평공齊平公 6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전국 기년표(戰國紀年表)」에서는 주원왕周元王 원년元年, 진여공공秦厲共公 2년, 조양자趙襄子 원년, 초혜왕楚惠王 14년, 연효공燕孝公 23년, 제평공齊平公 6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진秦, 초楚, 제齊나라의 기록 외에는 다 불일치하고 있다.

    「사기 표(史記表) 육국 연표(六國年表)」와 「전국 기년표(戰國紀年表)」 중 삼진(三晉: 위魏, 한韓, 趙조), 전제(田齊: 전씨田氏의 제齊나라), 연燕나라에 대한 ‘연표(年表)’가 상당히 상이相異한데 삼진三晉과 전제田齊의 경우 근본적으로 삼진三晉과 전제田齊의 개국 시조(開國始祖)를 누구로 볼 것인가? 언제 개국한 것으로 볼 것인가? 그 군주君主의 재위 기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등의 이견에서부터 출발한다.

    이에 따라 위문후魏文侯의 경우 「사기 표(史記表)」에서는 기원전 424년~387년, 가칭 「자치통감 연표(資治通鑑年表)」,(저자가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발췌하여 통칭한 것임. 이하 같음)에서는 기원전 397년에 위문후魏文侯가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전국 기년표(戰國紀年表)」에서는 기원전 445년~396년에 재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애후韓哀侯의 경우 「사기 표(史記表)」와 「자치통감 연표(資治通鑑年表)」에서는 기원전 376년~371년, 「전국 기년표(戰國紀年表)」에서는 기원전 376년~375년에 재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열후趙烈侯의 경우 「사기 표(史記表)」에서는 기원전 408년~400년, 「자치통감 연표(資治通鑑年表)」에서는 기원전 400년에 조열후趙烈侯가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전국 기년표(戰國紀年表)」에서는 기원전 408년~387년에 재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特히, 전제田齊의 경우 「사기 표(史記表)」에서는 위왕威王은 기원전 378년~343년, 선왕宣王은 기원전 342년~324년, 민왕湣王은 기원전 323년~284년에 재위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자치통감 연표(資治通鑑年表)」에서는 위왕威王은 기원전 378년~333년, 선왕宣王은 기원전 332년~314년, 민왕湣王은 기원전 313년284년에 재위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전국 기년표(戰國紀年表)」에서는 위왕威王은 기원전 356년~320년, 선왕宣王은 기원전 319년~301년, 민왕湣王은 300년~284년에 재위했다고 기록하는 등 삼진三晉의 ‘연표(年表)’와 비교할 때 상당히 상이하다.

    「사기 표(史記表) 육국 연표(六國年表)」와 「전국 기년표(戰國紀年表)」 중 연燕나라에 대한 ‘연표(年表)’도 상당히 상이한데 연문공燕文公 원년(기원전 361년) 이전까지는 전부 상이하다. 첫째, 기원전 475년의 경우 「사기 표(史記表)」에서는 연헌공燕獻公 18년, 「전국 기년표(戰國紀年表)」에서는 연효공燕孝公 23년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둘째, 연효공燕孝公의 경우 「사기 표(史記表)」에서는 기원전 464년~450년의 15년을, 「전국 기년표(戰國紀年表)」에서는 기원전 497년~455년의 43년을 재위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셋째, 연성공燕成公의 경우 「사기 표(史記表)」에서는 기원전 449년~434년의 16년을, 「전국 기년표(戰國紀年表)」에서는 기원전 454년~439년의 16년을 재위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넷째, 연민공燕湣公의 경우 「사기 표(史記表)」에서는 기원전 433년~403년의 31년을, 「전국 기년표(戰國紀年表)」에서는 기원전 438년~415년의 24년을 재위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다섯째, 연환공燕桓公 직전의 제후와 관련하여 「사기 표(史記表)」에서는 연희공(燕僖公: 기원전 402년~373년), 「전국 기년표(戰國紀年表)」에서는 연간공(燕簡公: 기원전 414년~370년)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여섯째, 연환공燕桓公의 경우 「사기 표(史記表)」에서는 기원전 372년~362년의 11년을, 「전국 기년표(戰國紀年表)」에서는 기원전 369년~362년의 8년을 재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기 표(史記表) 육국 연표(六國年表)(기원전 476년~221년)」는 「자치통감 연표(資治通鑑年表)」와 「전국 기년표(戰國紀年表)」를 비교해도 많이 상이할 뿐 아니라, 『사기』 내에서도 「본기(本紀)」, 「세가(世家)」, 「열전(列傳)」과 비교해도 오류가 많다.

    오기誤記도 많고 검증도 덜 된 것이지만, 첫째, 이 책 상권과 중권에서 다루고 있는 「사기 표(史記表) 십이제후 연표(十二諸侯年表)」와의 연속성을 유지하고, 둘째, 상권과 중권에서 기술하고 있는 팩트체크(fact-check)의 접근 기조基調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셋째, 「사기 표(史記表) 육국 연표(六國年表)」, 「자치통감 연표(資治通鑑年表)」, 「전국 기년표(戰國紀年表)」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검증하기가 어려운 점 등을 고려하여 하권에서는 주로 「사기 표(史記表) 육국 연표(六國年表)」를 중심으로 했음을 밝혀 둔다.

    기원전 475년에 사망한 진정공晉定公에 이어 진출공晉出公이 즉위卽位했는데, 이때 진晉나라는 여전히 조앙(趙鞅: 간자簡子)이 건재健在한 가운데 한호(韓虎: 강자康子. 한불신韓不信의 손자), 위구(魏駒: 환자桓子. 위만다魏曼多의 손자), 지요(知瑤: 양자襄子. 지역知躒의 손자. 순요荀瑤라고도 함)가 그 가문家門을 이끌고 있었다. 지씨知氏는 지씨智氏 또는 순씨荀氏라고도 한다.

    지난날 당대 유명 관상가觀相家 고포자경姑布子卿이 조앙趙鞅의 자제들의 관상을 보고 적자嫡子들은 장군將軍감이 없다며 혹평酷評했으나, 천비賤婢 책翟나라 여인이 낳은 막내 무휼(無恤: 양자襄子. 무휼毋卹이라고도 함)을 보고는 장군감이라고 평하였다.

    조앙趙鞅은 고포자경姑布子卿의 말을 듣고는 장자長子 백로伯魯와 무휼無恤을 시험하기로 하고 죽간竹簡에 훈계의 말을 적어 둘에게 주며 뜻을 음미하라고 하였다. 이후, 3년이 지나 조앙趙鞅이 둘을 불러 물어보니 백로伯魯는 그 뜻은 물론 죽간마저 잃어버린 데 반하여 무휼無恤은 죽간의 뜻을 잘 기억하고 있었고, 소매 속에서 죽간을 꺼내 바치자 조앙趙鞅은 무휼無恤을 크게 칭찬하였다. 그 후에 조앙趙鞅이 무휼無恤을 유심히 살핀바, 학문, 행동거지, 사고력 등에서 아들 중 가장 뛰어남을 확인하고, 그를 적자로 삼고 적장자嫡長子 백로伯魯 대신 종주宗主로 선포하였다.

    기원전 464년, 진晉나라의 집정執政 지요知瑤는 정鄭나라가 수년 동안 조례朝禮하러 오지 않는다며 조앙趙鞅에게 함께 정鄭나라를 치자고 하였다. 이에 조앙趙鞅이 출병出兵하려다가 득병得病하여 무휼無恤을 대신 출정出征시켰다.

    지요知瑤는 기원전 468년 여름에도 정鄭나라 동구(桐丘: 하남성河南省 부구현扶溝縣 서쪽)까지 쳐들어갔다가, 정鄭나라 사홍(駟弘: 자반子般)의 요청에 따라 제군齊軍이 출병하자 싸우지도 않고 철군撤軍하였다. 이때 지요知瑤는 나는 정鄭나라를 치면 길吉하다는 것만 알고 왔지, 제군齊軍과의 싸움에 대하여는 점을 치지 않았다.라며 철군 이유를 밝혔다.

    이어 지요知瑤는 제군齊軍을 이끌고 있는 진항(陳恒: 성자成子. 진상陳常이라고도 함)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대는 진陳나라가 정鄭나라 때문에 멸망한 것을 모르는가? 이에 진군晉軍이 정鄭나라를 문죄問罪하는데 어찌 진陳 출신인 그대가 정鄭을 돕는가? 진陳이 멸망할 것을 바랐다면 더는 할 말이 없다.라며 제齊나라가 정鄭나라를 돕는 일을 비난非難하였다. 이에 진항陳恒은 지요知瑤는 오만하고 교만하다. 이자가 어떻게 오래 부귀富貴를 누릴 수 있으랴!라고 저주하였다. 진항陳恒은 성을 전씨田氏로 바꾸었으므로 전항田恒 또는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이때 진晉나라의 경卿들의 전쟁 때 조앙趙鞅 등에게 패하여 기원전 490년 봄에 범길사(范吉射: 소자昭子)와 같이 제齊나라로 달아났던 순인(荀寅: 문자文子)은 진항陳恒의 객이었는데, 진항陳恒이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고 이제야 내가 망명亡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았다. 일을 꾸밀 때에는 일의 처음과 중간, 끝을 미리 생각한 후에 일에 착수해야 하는데, 나는 이런 과정도 없이 일을 벌이기부터 했으니 어찌 잘 성사될 수 있었을까!라고 탄식歎息하였다.

    한편, 진군晉軍이 정鄭나라 도성都城을 공격하려고 할 때 지요知瑤가 무휼無恤에게 선공先攻하라고 하자, 무휼無恤은 주장主將인 지요知瑤가 앞장서라고 하였다. 그러자 지요知瑤가 못생긴 데다 용기까지 없는데 어찌 가문의 후계자가 됐느냐?라며 힐난詰難하자, 무휼無恤은 능히 치욕은 참을 수 있으면서 가문에도 해는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 탓이 아니겠느냐?라고 맞받아쳤다.

    또 진군晉軍이 대승하여 연 축하연 때 지요知瑤가 무휼無恤에게 술을 따라 주었으나 무휼無恤이 술을 즐기지 않는다며 마시지 않자, 지요知瑤는 건방지다며 술 취한 김에 무휼無恤의 얼굴에 쇠 술잔을 내던져 무휼無恤의 얼굴에서 피가 흘렀다. 무휼無恤 수하手下 장수將帥들이 격분하여 지요知瑤를 치려고 하자 무휼無恤은 어찌 내가 참는데 너희들이 나서느냐? 힘이 없어 참는 것은 굴욕屈辱이지만, 우리가 힘이 없는 것이 아니지 않으냐?라며 수하들을 타일렀다.

    그러나 지요知瑤는 자기 잘못을 깨닫기는커녕 진晉나라에 돌아가서는 오히려 조앙趙鞅에게 무휼無恤은 버릇이 없다. 그를 추방해 버려라.라고 권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무휼無恤과 지요知瑤 둘은 서로 싫어하게 되었다.

    기원전 458년, 조앙趙鞅이 무휼無恤에게 앞으로 진晉나라에 화난禍難이 일어나거든 윤탁尹鐸이 어리다고 무시하지 말고 그의 말을 듣고, 진양(晉陽: 산서성山西省 태원시太原市 서남쪽)이 멀다고 주저하지 말고 꼭 그리로 가라.라고 유언遺言하고 죽자, 무휼無恤이 그 뒤를 이었다. 조앙趙鞅이 죽은 후 지요知瑤는 명실상부名實相符하게 진晉나라의 국정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a0222 브리핑 (briefing) + 덤 하-139

    「설원(說苑) 신술(臣術)」과 『여씨춘추(呂氏春秋)』 「팔람(八覽) 시군람(恃君覽)」에는 조앙趙鞅과 윤탁尹鐸의 관계에 대한 대화를 소개紹介하고 있다.

    조앙趙鞅은 사람들에게 사궐[赦厥: 「팔람(八覽) 시군람(恃君覽)」에는 조궐趙厥이라고 함]은 나 혼자 있을 때 간언諫言하여 내가 창피당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데 반해, 윤탁尹鐸은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간언하여 내가 창피를 당한다. 이로 보아 사궐赦厥은 나를 아끼는 것 같고 윤탁尹鐸은 나를 아끼지 않는 것 같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윤탁尹鐸은 조앙趙鞅에게 사궐赦厥은 주군主君의 실수를 막으려고 노력하기보다 주군이 창피당하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주군이 창피당하는가의 여부보다 주군의 실수를 막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진언進言해도 주군이 잘못을 고치지 않을까 그것이 두렵다.라고 하였다.

    「국어 진어(國語晉語) 9」와 「설원(說苑) 존현(尊賢), 군도(君道)」에는 조앙趙鞅이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과 직언을 경청하려는 자세를 소개하고 있다.

    한번은 양인(楊因: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불명확함)이 조앙趙鞅을 찾아와서는 나는 마을에서 세 번 쫓겨났고, 군주에게서는 다섯 번 내침을 당하였다. 그러나 조앙趙鞅이 선비를 좋아한다기에 찾아왔다.라고 하였다. 조앙趙鞅은 기뻐하며 무릎걸음으로 나가 양인楊因을 환영歡迎하며 그를 가재(家宰: 가신장家臣長)로 삼았는데, 이로 인하여 조씨趙氏 가문은 흥하게 되었다.

    조앙趙鞅이 양인楊因을 후대厚待하려고 할 때 그의 측근側近들은 양인楊因이 마을에서 세 번이나 쫓겨났다는 것은 이유야 어떻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결과요, 군주에게서 내침을 당한 것은 군주의 신뢰를 얻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그런데 무엇을 믿고 양인楊因을 중용重用하려고 하는가?라며 반대하였다.

    이에 조앙趙鞅은 쫓겨나고 내침을 당한 것만 보지 말라. 차라리 한두 번만 쫓겨났다면 나도 그대들과 생각이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나 양인楊因은 여덟 번이나 쫓겨났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쫓겨난 배경과 그 연유는 다시 따져 봐야겠지만, 어쨌든 양인楊因이 유능하다는 것은 입증된 것이 아닌가? 미녀는 추녀의 질투를 받게 마련이고 유덕한 자는 소인배의 무함誣陷을 받게 마련이며 신실한 자는 무신無信한 자의 미움을 받게 마련이다. 양인楊因이 유능하다는 것은 쫓아낸 그들이 입증하는 것이고, 쫓아내고 아니 쫓아내고는 내 소관이 아니겠느냐? 두고 봐라.라며 측근들을 달래었다.

    조앙趙鞅은 가신家臣 난격欒激을 황하黃河에 빠뜨리려고 하면서 내가 음악과 여색을 좋아할 때 이를 찾아 주었고, 좋은 말과 훌륭한 마부를 좋아할 때 이를 구해 주더니, 내가 어진 인재를 찾은 지 6년이 넘었건만 어찌 한 사람도 천거薦擧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나의 잘못이 점점 쌓여 갈 뿐이다.라고 질책叱責하였다.

    또 조앙趙鞅은 뚜렷한 과오가 없는 상태에서 어떤 이가 막연하게 그대는 어찌 그대의 잘못을 고치지 않느냐?라고 하자 조앙趙鞅은 좋은 지적이라며 칭찬하였다. 그러고는 내가 고칠 잘못이 없다며 반박했다면 앞으로 가신들은 나에게 간하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좋은 지적이라고 말함으로써 가신들에게 간하는 용기를 갖게 한 것이고 간해도 불이익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공표公表한 것이다. 이는 나의 잘못을 줄이는 방편이다.라고 하였다.

    기원전 457년, 조양자趙襄子는 대(代: 하북성河北省 울현蔚縣 동북쪽)나라 왕을 하옥산夏屋山으로 초청하여 주연酒宴을 베풀고는 구리로 만든 국자로 대왕代王과 그 일행을 모조리 죽였다. 그 후 대代를 쳐서 멸망시키고 차지하였다. 이후 자기에게 장자의 자리를 양보하고 죽은 백로伯魯의 아들 조주趙周에게 대代를 봉하였다.

    일찍이 조양자趙襄子의 누나는 대왕代王에게 출가했는데, 남편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한 후 마계산摩笄山에서 비녀를 뾰족하게 갈아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이에 대代나라 사람들은 그녀를 후히 장사葬事 지냈다.

    지요知瑤는 지역(知躒: 문자文子)의 손자이자 지신(知申: 선자宣子. 지갑知甲이라고도 함)의 아들이다. 지난날 지신知申이 자기의 후계자로 지요知瑤를 지명하자, 일족인 지과(知果: 지과知過라고도 함)는 지요知瑤는 보통 사람에 비하여 수염이 아름답고 궁술이 뛰어나고 재주가 많고 과감果敢한 결단성決斷性이 있고 교묘한 지혜智慧가 있으나, 보통 사람보다 지독하게 욕심欲心이 많고 어질지 못하다. 지요知瑤는 장점으로 많은 사람을 거느릴 것이나 많은 사람을 거느릴 자가 덕德이 없고 욕심만 부린다면 누가 그를 용납할 것인가? 만일 지요知瑤가 대代를 이으면 지씨知氏 일족은 멸문滅門한다.라며 지소知宵를 후계자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지신知申은 이를 무시하고 지요知瑤를 종주로 삼았다. 지과知果는 만일 지씨知氏 성姓을 버리지 않으면 장차 큰 불행을 면하지 못하리라.라고 탄식하고 지씨知氏를 보씨輔氏로 변성變姓하였다.

    진출공晉出公은 실추失墜될 대로 실추된 공실公室의 권위와 힘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아무 힘이 없는 것을 한탄하던 중 기원전 458년에 지씨知氏, 조씨趙氏, 한씨韓氏, 위씨魏氏 사가四家가 범씨(范氏: 범씨範氏라고도 함)와 순씨荀氏의 옛 땅을 자기 허락도 없이 나누어 가지자 대로大怒하여 사가四家를 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진출공晉出公은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에 사가四家를 쳐 달라고 요청했으나, 제齊나라 전씨田氏와 노魯나라 삼가三家는 진출공晉出公의 요청을 거절拒絶함은 물론, 오히려 지요知瑤에게 진출공晉出公의 뜻을 알렸다. 제齊나라 전씨田氏란 진항陳恒이 성을 전씨田氏로 바꾸어 제齊나라를 집권執權하고 있는 가문이고, 노魯나라 삼가三家란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 가문을 말하는데, 노환공魯桓公의 아들들이라고 하여 삼환三桓이라고도 한다.

    기원전 457년, 지요知瑤는 조양자趙襄子, 한호韓虎, 위구魏駒와 진출공晉出公을 폐위하기로 합의하고 사가四家 군은 진출공晉出公을 공격하니, 그는 제齊나라로 달아나다가 객사하였다. 지요知瑤는 진소공晉昭公의 증손曾孫뻘인 교驕를 군주로 세웠는데, 이가 진애공晉哀公이다.

    a0111 팩트체크 (fact-check) 하-183

    지요知瑤가 종주가 되는 과정 등에 대한 기록이 상이하다. 첫째, 조앙趙鞅이 죽은 시기이다. 제83회에서는 주정왕周定王 11년(기원전 458년)에 조앙趙鞅이 죽었다고 묘사描寫하고 있다. 「조 세가(趙世家)」와 「연표(年表) 기원전 458년~457년」 조趙 난에서도 기원전 458년에 조간자(趙簡子: 조앙趙鞅)가 죽고 기원전 457년에 조양자趙襄子가 즉위했다고 기록記錄하고 있으나, 「좌전(左傳) 노애공(魯哀公) 20년」조條에서는 기원전 475년경頃에 이미 조앙趙鞅은 죽고 조양자趙襄子가 조씨趙氏 가문을 계승繼承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조 세가(趙世家)」와 「연표(年表) 기원전 457년」 조趙 난(조양자趙襄子 원년 기록)에서는 기원전 457년에 월군越軍이 오吳나라를 포위하자 조양자趙襄子는 초륭楚隆을 부차夫差에게 보내어 위문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① 「오 태백 세가(吳太伯世家)」, 「제 태공 세가(齊太公世家)」, 「노 주공 세가(魯周公世家)」, 「초 세가(楚世家)」, 「연표(年表) 기원전 473년」 초楚 난, 「좌전(左傳) 노애공(魯哀公) 22년」조條에는 오吳나라가 기원전 473년에 멸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기원전 458년에는 월군越軍이 오吳나라를 포위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고, ② 오吳나라가 포위된 전황戰況, 오영吳營을 방문한 조양자趙襄子의 사자使者가 초륭楚隆이라는 점 등이 「좌전 노애공(魯哀公) 20년」조條, 즉 기원전 475년의 기사와 유사한 점 등을 종합해 보면 조앙趙鞅이 죽은 시기와 관련한 「조 세가(趙世家)」의 기록도 의심스럽다.

    둘째, 지과知果의 변성 시기이다. 제84회에서는 지과知果가 지요知瑤의 단점을 강조하며 지요知瑤의 종주 책립冊立을 반대했으나 지요知瑤가 종주가 되자, 지과知果는 지씨知氏에서 보씨輔氏로 변성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국어 진어(國語晉語) 9」와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위열왕(周威烈王) 23년」에서도 제84회의 묘사와 유사하게 지요知瑤가 종주가 될 무렵에 지과知果가 변성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전국책 조책(戰國策趙策) 1」과 「한비자(韓非子) 십과(十過)」에서는 지요知瑤가 진양晉陽을 칠 때 지과知果가 변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셋째, 진출공晉出公이 죽은 시기이다. 『동주 열국지(東周列國志)』에는 진출공晉出公이 죽은 시기에 대한 명확한 묘사는 없고, 제83회에서는 조앙趙鞅이 사망한 후에 사가四家가 범씨范氏와 순씨荀氏의 땅을 허락도 없이 나누어 갖자, 진출공晉出公이 대로하여 사가四家를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그들의 공격을 받고 제齊나라로 달아났다고 묘사하고 있을 뿐,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제83회에는 조앙趙鞅이 죽은 시기를 주정왕周定王 11년, 즉 기원전 458년이라고 묘사하고 있어서 제83회는 진출공晉出公은 기원전 458년 이후에 죽었다고 묘사하고 있는 셈이다.

    「진 세가(晉世家)」와 「연표(年表) 기원전 474년」 위魏 난(진출공晉出公 원년 기록)에서는 진출공晉出公 17년, 즉 기원전 458년, 「조 세가(趙世家)」에서는 조양자趙襄子 4년, 즉 기원전 454년에 진출공晉出公이 사가四家와 다투다가 그들의 공격을 받고 제齊나라로 달아나다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연표(年表) 기원전 456년」 위魏 난에서는 기원전 456년에 진애공晉哀公이 즉위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연표(年表)」가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에 따라 기술된 점을 감안할 때, 「연표(年表) 기원전 456년」 위魏 난의 기사만으로 본다면 진출공晉出公은 기원전 457년에 죽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이란 연호年號를 사용함에 있어 새 군주는 전 군주가 죽은 해에 즉위했더라도 그 다음 해를 원년으로 삼는 규칙을 말한다. 그러나 정변政變이나 반정反正 등으로 군주가 폐위된 경우에는 폐위된 그 해를 원년으로 하는데, 이를 즉위년칭원법卽位年稱元法이라고 한다.

    a0222 브리핑 (briefing) + 덤 하-140

    『사기(史記)』의 경우 그 진위眞僞는 논외論外로 하고 전국 시대의 주周, 진秦, 위魏, 한韓, 조趙, 초楚, 연燕, 제齊나라 제후들의 재위년의 서기西紀 환산 연도를 알아보려면 「본기(本紀)」, 「세가(世家)」, 「열전(列傳)」과 「사기 표(史記表) 육국 연표(六國年表)」를 연동해 보면 확인할 수 있다.

    흔히들 전국 시대는 칠웅七雄이라고 하여 주周나라를 제외한 진秦, 위魏, 한韓, 조趙, 초楚, 연燕, 제齊나라 7국만 있었던 것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시대에도 「사기 표(史記表) 십이제후 연표(十二諸侯年表)」 중 춘추 시대에 멸망한 조(曹: 기원전 487년 멸망)나라와 진(陳: 기원전 478년 멸망)나라를 제외한 진晉, 노魯, 송宋, 위衛, 채蔡, 정鄭, 오吳나라는 존재하였다. 오(吳: 기원전 473년 멸망)나라를 필두로 그 국력과 환경에 따라 멸망 시기가 다르지만, 「위 강숙 세가(衛康叔世家)」와 「연표(年表) 기원전 229년」 위魏 난(위군 각衛君角 원년 기록)에서는 심지어 위衛나라는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이 죽은 후인 위군 각衛君角 21년, 즉 기원전 209년에 진멸盡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국 시대에 존재했으나, 「사기 표(史記表) 육국 연표(六國年表)」에는 별도의 난이 없는 진晉, 노魯, 송宋, 위衛, 채蔡, 정鄭, 오吳나라의 제후들의 재위년의 서기 환산 연도는, 진晉과 위衛나라는 「연표(年表)」 위魏 난에서, 노魯, 채蔡, 오吳나라는 초楚 난에서, 송宋나라는 제齊 난에서, 정鄭나라는 한韓 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연표(年表)」 난에는 관련 나라 제후의 사망 시기와 즉위년도 함께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기산점起算點으로 하여 그 제후의 재위년을 추산할 수 있다.

    지요知瑤는 권력權力을 독점獨占하고 넓은 봉토封土를 소유했으나,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진晉나라를 독차지하겠다고 작정하였다. 이에 모사謀士 치자(絺疵: 극자郄疵라고도 함)의 계책計策에 따라 지요知瑤는 월越나라를 물리치고 진晉의 영광을 회복하자는 기치 아래 조씨趙氏, 한씨韓氏, 위씨魏氏 삼가三家에게 사방 100리의 땅을 바치라고 하였다. 그 땅의 소출로 군비를 마련한다는 구실이었다. 삼가三家가 순종하면 지씨知氏는 300리의 땅을 얻음과 동시에 삼가三家는 그만큼 힘이 약화되고, 삼가三家가 불복하면 진애공晉哀公의 명령命令임을 앞세워 삼가三家를 없애 버리자는 계책이었다.

    100리 땅을 바치라는 명을 받은 삼가三家 중 한호韓虎와 위구魏駒는 심히 억울하고 불쾌했으나 불응不應하거나 저항할 경우 지요知瑤가 공격할 것이라는 가신들의 충고에 따라 땅을 바쳤다. 그러나 조양자趙襄子는 땅이란 조상의 피와 땀이 어린 가문의 상징인데, 내 죽으면 죽었지 어찌 조상에게 죄를 지으면서까지 지요知瑤에게 아첨阿諂하리오!라며 거절하였다. 지요知瑤는 조씨趙氏에게는 한씨韓氏와 위씨魏氏와는 달리 인(藺: 산서성山西省 이석현離石縣 서쪽)과 고랑(皐狼: 산서성山西省 이석현離石縣 서북쪽)을 지정하여 바치라고 하였다.

    한호韓虎가 모사 단규段規를 대동하고 바칠 땅의 지도를 들고 지요知瑤를 찾아가자, 지요知瑤는 기뻐하며 둘을 남대藍臺로 초청하여 주연을 베풀었다. 그 자리에서 지요知瑤는 노魯나라 대부大夫 변장자卞莊子가 범 세 마리를 찔러 죽이는 그림 족자 한 폭을 펼쳐 보였다. 그림에서는 한 마리의 양을 두고 범 세 마리가 싸우는데, 싸우다가 지칠 때를 노려 범들을 다 잡은 변장자卞莊子의 솜씨를 노래한 시문도 적혀 있었다.

    이에 지요知瑤는 한호韓虎에게 열국列國 중에서 제齊나라의 고호高虎, 정鄭나라의 한호罕虎, 진晉나라의 한호韓虎는 모두 범 호虎자다.라며 한호韓虎의 이름 ‘호虎’를 죽어 가는 범에 비유하였다. 한호韓虎는 모른 척하며 술만 마셨으나 단규段規가 농담이 지나치다고 하자, 지요知瑤는 키가 작은 단규段規의 이마를 치면서 네 분수를 알아라. 여기에 네가 낄 자리가 있느냐?라며 핀잔하자, 한호韓虎와 단규段規는 불쾌한 마음으로 귀가하였다.

    며칠 후, 지요知瑤의 가신 지국知國은 지요知瑤가 한호韓虎와 그 가신을 모욕侮辱한 사실을 전해 듣고는 지요知瑤에게 한낱 개미와 벌 떼도 사람을 해칠 수 있거늘 어찌 한씨韓氏 가문을 원수로 돌리느냐? 항상 겸손해야 한다.라며 한씨韓氏를 경계警戒해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그러나 지요知瑤는 내가 모든 사람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쥐고 있는데 누가 감히 나를 어쩐단 말인가? 장차 진晉나라를 통째로 지씨知氏 나라로 만들 작정인데 허수아비 같은 삼가三家가 무엇이 두려우냐? 쓸데없는 걱정은 오히려 분란紛亂만 일으킨다.라며 지국知國의 충고를 아예 무시하였다.

    a0111 팩트체크 (fact-check) 하-184

    지요知瑤가 한호韓虎와 단규段規를 모욕한 남대藍臺 연회가 열린 시기 등과 관련한 기록이 상이하다. 첫째, 남대藍臺 연회가 열린 시기이다. 『동주 열국지(東周列國志)』에는 남대藍臺 연회가 열린 시기에 대한 명확한 묘사는 없고, 제84회에서는 지요知瑤가 삼가三家에게 땅을 바치라고 했을 때에 지요知瑤가 남대藍臺 연회를 열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남대藍臺 연회에 대한 기사는 없지만, 「조 세가(趙世家)」와 「연표(年表) 기원전 454년」 조趙 난에서는 조양자趙襄子 4년, 즉 기원전 454년에 지요知瑤가 삼가三家에게 땅을 바치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제84회의 남대藍臺 연회는 기원전 454년 이후에 열린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셈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위열왕(周威烈王) 23년」에서는 지요知瑤가 집권한 초기에 지요知瑤가 삼가三家에게 땅을 요구하기 전에, 「국어 진어(國語晉語) 9」와 「설원(說苑) 귀덕(貴德)」에서는 지요知瑤가 위衛나라에서 돌아온 후에 남대藍臺 연회가 열렸고 그 자리에서 지요知瑤가 한호韓虎와 단규段規를 모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衛나라에서 돌아온 상황이란 진군晉軍이 정鄭나라를 침공하고 승리한 후에 위衛나라를 거쳐 돌아온 때로 추정되는데, 「조 세가(趙世家)」와 「연표(年表) 기원전 464년」 한韓 난에는 이때를 기원전 46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위열왕(周威烈王) 23년」의 남대藍臺 연회 기사만으로 본다면 남대藍臺 연회가 열린 시기를 특정特定할 수는 없지만, 남대藍臺 연회 바로 직전의 기사가 조앙趙鞅의 유언인 점을 볼 때, 남대藍臺 연회는 조앙趙鞅이 죽은 후에 열렸다고 추정할 수 있고, 조앙趙鞅이 죽은 시기와 관련하여 「조 세가(趙世家)」와 「연표(年表) 기원전 458년~457년」 조趙 난에서는 기원전 458년, 「좌전(左傳) 노애공(魯哀公) 20년」조條에서는 기원전 475년 이전이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남대藍臺 연회 또한 기원전 475년 이후 또는 기원전 458년 이후에 열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둘째, 남대藍臺 연회의 성격이다. 제84회에서는 지요知瑤가 삼가三家에게 땅을 바치라고 했을 때 한호韓虎가 땅을 바치러 가자 지요知瑤는 기뻐하며 남대藍臺 연회를 열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경(二卿: 지요知瑤와 한호韓虎. 단규段規는 한호韓虎를 수행)이 참석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위열왕(周威烈王) 23년」에서는 남대藍臺 연회가 마치 지요知瑤가 가문을 승계한 것을 축하하는 연회인 것처럼 지요知瑤, 위구魏駒, 한호韓虎가 참석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국어 진어(國語晉語) 9」와 「설원(說苑) 귀덕(貴德)」에서는 남대藍臺 연회가 마치 진군晉軍의 정鄭나라 침공 승리를 축하하는 전승연戰勝宴인 양 삼경三卿(지요知瑤, 한호韓虎, 나머지 한 명은 실명 없음)이 참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셋째, 지요知瑤가 한호韓虎와 단규段規를 모욕한 것에 대하여 잘못되었다며 한씨韓氏를 경계해야 한다고 진언한 사람이다. 제84회에서는 지요知瑤에게 한씨韓氏를 경계해야 한다고 진언한 사람은 지국知國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위열왕(周威烈王) 23년」과 「국어 진어(國語晉語) 9」에서도 지국知國이 지요知瑤에게 한씨韓氏를 경계해야 한다고 진언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설원(說苑) 귀덕(貴德)」에서는 지과知果가 진언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a0222 브리핑 (briefing) + 덤 하-141

    「장의 열전(張儀列傳)」과 「전국책 진책(戰國策秦策) 2」에서도 변장자卞莊子의 기사가 나오는데, 둘 다 진진陳軫이 진혜문왕秦惠文王에게 유세遊說하는 과정에서 인용引用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첫째, 유세 배경과 관련하여 「장의 열전(張儀列傳)」에서는 한韓나라와 위魏나라가 싸울 때, 「전국책 진책(戰國策秦策) 2」에서는 초楚나라와 제齊나라가 싸울 때 진秦나라가 양국을 중재해야 할지 방관해야 할지에 대하여 고민할 때의 유세라고 기록하고 있고, 둘째, 범을 죽인 사람과 관련하여 「장의 열전(張儀列傳)」에서는 변장자卞莊子, 「전국책 진책(戰國策秦策) 2」에서는 관장자管莊子라고 기록하고 있고, 셋째, 범의 먹이와 관련하여 「장의 열전(張儀列傳)」에서는 우(牛: 소), 「전국책 진책(戰國策秦策) 2」에서는 인(人: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넷째, 제84회에서는 변장자卞莊子가 한꺼번에 범 세 마리를 잡았다고 묘사하고 있으나, 두 곳에서는 변장자卞莊子가 한꺼번에 범 두 마리를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구(孔丘: 중니仲尼. 공자孔子라고도함)는 「논어(論語) 헌문(憲問)」에서 완성된 인간에 대한 중유(仲由: 자로子路 또는 계로季路라고도 함)의 질문에 대하여 장무중臧武仲의 지혜, 공작公綽의 욕심 없음, 변장자卞莊子의 용기, 염구冉求의 재주에다 예절과 음악을 보태면 어느 정도 완성된 인간이 될 수 있다.라며 변장자卞莊子의 용기를 인정하였다.

    「한비자(韓非子) 세림(說林) 하」와 「팔람(八覽) 신대람(愼大覽)」에는 지요知瑤가 구유仇猶를 점령한 계책을 소개하고 있다.

    지요知瑤는 구유仇猶를 차지하고자 했으나, 구유仇猶로 가는 길이 협소하여 고민하다가 수레 두 대에 실을 수 있는 큰 종을 만들고는 구유仇猶 군주에게 종을 가져가라고 하였다. 구유仇猶 군주는 크게 기뻐하며 종을 구유仇猶로 운송하기 위하여 절벽을 깎고 골짜기를 메우려고 하였다. 이에 구유仇猶의 신하 적장만지赤章蔓枝는 지요知瑤의 의도를 정확하게 지적하면서 종을 선물로 받거나 길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했으나, 구유仇猶 군주는 대국이 원하여 하는 일을 어찌 우리가 막을 수 있겠느냐?라며 적장만지赤章蔓枝의 진언을 뿌리치고 길을 냈다.

    적장만지赤章蔓枝는 신하가 충정忠貞을 갖추지 못하면 죄이지만, 충정이 쓰이지 못한다면 그 군주를 떠나도 신하의 죄는 아니다.라고 탄식한 후 구유仇猶를 떠났는데, 곧이어 종을 실은 수레 뒤에 지요知瑤의 군사가 따라가서 구유仇猶를 차지하였다.

    「전국책 송·위책(戰國策宋衛策)」과 「설원(說苑) 권모(權謀)」에는 지요知瑤가 구유仇猶처럼 위衛나라를 치려다가 실패한 일화를 기록·소개하고 있다.

    지요知瑤는 위衛나라를 칠 목적을 갖고 먼저 위군衛君을 방심시킬 의도로 위군衛君에게 말 400필[「설원(說苑) 권모(權謀)」에는 말 네 마리라고 기록]과 구슬 하나를 선물했는데, 위군衛君 등 위衛나라 사람들은 다들 좋아하였다. 이때 위衛나라 대부 남문자南文子가 나서 지금 지요知瑤의 선물은 통상적이지 않다. 선물이란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인데 왜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게 선물하겠는가? 선물 속에 감춰진 지요知瑤의 의도를 읽어야 한다.라고 진언하자, 위군衛君은 크게 깨닫고 진晉나라와의 국경 경비를 강화强化하였다. 그러자 지요知瑤는 자신의 의도가 간파看破당했다고 판단判斷하고 위衛나라 칠 일을 포기하였다.

    이후, 지요知瑤는 다시 자기 아들 안顔이 죄를 지어 진晉나라를 떠나 위衛나라로 도망 가는 것처럼 꾸미고, 그 아들 뒤에 군대를 붙여 위衛나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때 남문자南文子가 나서 안顔이 죄를 지었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 없다.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큰 나라로 도망 갈 것이지 어찌 작은 위衛나라로 오겠는가? 지요知瑤의 음모陰謀가 있다.라고 지적한 후, 안顔이 위衛나라로 들어올 때 그를 따르는 수레가 5승이 넘으면 그의 입국을 거절하라고 하자 지요知瑤는 남문자南文子의 지적을 전해 듣고는 이 계획도 철회하였다.

    기원전 454년, 지요知瑤는 조양자趙襄子를 치기로 하였다. 지요知瑤는 한씨韓氏와 위씨魏氏 양가에게 조씨趙氏를 쳐서 멸망시킨 후 조씨趙氏 땅을 3등분하여 나누어 갖자며 조씨趙氏 토벌에 동참하라고 통보하였다. 그러자 양가는 지요知瑤가 무섭기도 했지만, 조씨趙氏 땅을 얻을 욕심에 동참하여, 지군知軍, 한군韓軍, 위군魏軍 삼가 군三家軍은 조씨趙氏 부중府中을 쳤다.

    조씨趙氏의 가신 장맹담張孟談은 조양자趙襄子에게 진양晉陽에서 수성守城하자고 진언하였다. 진양晉陽은 수십 년간 동안우董安于와 윤탁尹鐸이 다스리며 많은 공을 들인 데다, 백성百姓들도 조씨趙氏의 은혜에 고마워하여 협조적일 것이고, 또 지난날 조앙趙鞅이 유언한 바도 있었다. 조양자趙襄子는 장맹담張孟談, 고혁高赫 등의 가신들과 식솔들을 인솔하고 진양晉陽으로 달아났다. 삼가 군三家軍도 진양晉陽까지 추격追擊하였다.

    이때, 조씨趙氏 가신 원과原過가 부중 뒷일을 마무리하느라고 본대와 처져서 진양晉陽으로 가다가 왕택王澤에서 신인神人들을 만나 대통을 받아 조양자趙襄子에게 건넸다. 조양자趙襄子는 사흘간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친히 대통을 쪼개니 안에 붉은색 글씨가 있었다. 글에서 3월 병술丙戌일에 너는 지씨知氏를 멸하게 될 것이다. 곽태산霍泰山 산양후山陽侯를 위하여 100개 성읍城邑에 사당祠堂을 세우고 제사祭祀를 지내라. 그러면 장차 너에게 임호(林胡: 내몽고內蒙古)의 땅을 주리라. 후손에 이르면 굳센 왕이 나타나 나라를 세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양자趙襄子는 진양晉陽에 입성하여 공궁公宮에 자리 잡았다. 조양자趙襄子가 성안을 둘러보니, 성곽은 허물어졌고 곡물 창고와 금고와 무기고는 텅 비었으며 수성할 장비도 태부족이었다.

    조양자趙襄子가 한숨을 쉬며 장맹담張孟談에게 이의 대책을 묻자, 장맹담張孟談은 ‘성인聖人이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백성들에게 비축하지 관아官衙 창고에 보관하지 않고, 교화에 힘쓰지 성곽을 수리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동안우董安于와 윤탁尹鐸은 틀림없이 그렇게 진양晉陽을 다스렸을 것이니 백성들에게 ‘3년 동안 먹을 양식, 돈, 가재 외에 남는 양식, 돈, 가재는 관아官衙에 바치게 하고, 농사 짓는 인력 외에 남는 인력은 성곽 수리에 보내라.’고 하라. 그러면 진양晉陽은 수성의 형세를 갖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양자趙襄子가 백성들에게 저녁에 그렇게 명령하자, 이튿날에 곡물 창고와 금고와 무기고는 가득 채워졌다. 5일이 지나 성곽 수리를 마쳤고 수성의 형세를 갖추었으나, 무기고의 모(矛: 장창), 과(戈: 단창), 극(戟: 갈래창) 등은 녹이 슬고 날이 무뎠고, 수성에 가장 요긴한 화살마저 1천 묶음밖에 되지 않아 조양자趙襄子는 크게 걱정하였다.

    이에 장맹담張孟談은 지난날 동안우董安于는 진양晉陽의 공궁을 지을 때 담은 모조리 화살의 재료로 쌓았고 궁실의 기둥들은 잘 정련精鍊된 동철로 세웠다는 말이 있다.라며 담을 헐고 기둥을 목재로 교체하라고 건의하였다. 이에 조양자趙襄子가 담을 헐자 그 속에는 화살 재료인 갈대와 쑥대가 가득 쌓여 있었고, 뽑은 기둥의 단청을 벗기자 모두가 정련된 동철이었다. 대장장이들은 동철 기둥을 부수어 녹여 화살촉과 칼과 창 등을 만들었다. 조양자趙襄子는 화난에 대비한 동안우董安于와 윤탁尹鐸의 예지豫知를 극찬極讚하였다.

    지난날 조앙趙鞅은 가신 윤탁尹鐸을 진양晉陽으로 보내며 조씨趙氏 가문이 위난危難을 당했을 때, 그곳에서 조씨趙氏 가문이 회생回生할 수 있게 진양晉陽을 만들어라. 군영軍營의 성루城樓는 모조리 허물어라. 만일 진양晉陽에 성루가 보이면 너를 나의 원수인 순인荀寅과 범길사范吉射같이 여길 것이다.라고 엄명嚴命하였다. 이에 윤탁尹鐸은 진양晉陽 성민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조세租稅와 부역賦役을 대폭 감면하는 등 조앙趙鞅의 지시指示에 충실했으나 성루만은 오히려 더 높이 쌓아 올렸다.

    조앙趙鞅은 진양晉陽에 갔다가 높은 성루를 보고는, 윤탁尹鐸이 자기 명령을 어겼으니 윤탁尹鐸을 죽인 후에 입성하겠다며 대로하였다. 그때 왕량(王良: 백락伯樂. 우무휼郵無恤 또는 우무정郵無正이라고도 함)이 나서 조씨趙氏 가문은 한 번 난을 당하지 않았느냐? 다른 가문보다 더 신중하고 철저하게 선업先業을 지키고 보호해야 하거늘 어찌 허울 좋은 관대함과 아량으로 오히려 적들을 유혹하려는가? 윤탁尹鐸도 성루를 높이 쌓는 것이 쉬워서 한 것은 아니지 않으냐? 오히려 주인보다 가문의 안전을 더 생각했으면 처벌이 아니라 포상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진언하자, 그제야 조앙趙鞅도 윤탁尹鐸의 깊은 뜻을 깨닫고 그를 포상하였다.

    그런데 원래 우무휼郵無恤은 윤탁尹鐸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윤탁尹鐸이 자기를 구해 준 것에 사은謝恩하고자 조앙趙鞅에게서 받은 상을 우무휼郵無恤에게 보내며 피살被殺될 뻔한 자가 구해 준 은혜를 잊고 어찌 상을 받으리!라고 하였다. 그러자 우무휼郵無恤은 나는 주인을 위하여 한 일이지 그대를 위하여 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원한은 예와 같다.라며 윤탁尹鐸의 예물을 돌려보냈다. 우무휼郵無恤은 어마馭馬의 대가大家였다.

    삼가 군三家軍은 진양성晉陽城을 철통같이 포위包圍하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성안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일치단결一致團結하여 적군敵軍이 다가오면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수성하였다.

    지요知瑤는 군사 수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포위한 지 1년 가깝도록 진양성晉陽城을 깨뜨리지 못하자 초조해하며 산세를 둘러보다가 수공水攻에 착안着眼하였다. 진수晉水의 발원지가 용산龍山이고 용산龍山에서 진양성晉陽城 서문까지 10리 정도이니 용산龍山에다 저수지貯水池를 만들고 진수晉水로 흐를 물을 막아 저장했다가 물이 차면 진양성晉陽城 쪽으로 둑을 터뜨리려는 계획이었다.

    지요知瑤는 한호韓虎와 위구魏駒를 호출하여 수공법을 설명한 후 종전대로 포위 상태를 유지하면서 저수지를 만들고 진양성晉陽城으로 흐를 수로水路를 만들 역할을 분담시켰다.

    기원전 453년, 저수지가 완공되고 그 물이 둑 높이와 같이 불어나자 지요知瑤는 군사를 시켜 북쪽 둑을 터뜨렸다. 저수지에 고였던 물은 무섭게 산 밑 진양성晉陽城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한편,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에도 진양성晉陽城 사람들은 큰 곤란을 겪지 않았다. 그러나 물이 점점 불어나 집들이 침수되고 불도 땔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큰 어려움에 처하였다. 그래도 다들 불평 없이 새처럼 높은 곳에 둥지를 지어 솥을 달아매고 음식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창고들도 물에 잠겨 먹을 것이 떨어지자 성민들은 아이들을 서로 바꾸어 잡아먹기도 하였다.

    조양자趙襄子는 크게 낙담하였다. 그러나 장맹담張孟談은 조양자趙襄子를 위로하고 자기가 성 밖으로 나가 한씨韓氏와 위씨魏氏와 함께 오히려 지씨知氏를 치는 일을 설득해 보겠다며 계획이 성공할 때에 대비하여 성안에서 준비해야 할 것들을 일러 주고 그날 밤에 동문으로 성을 빠져나갔다.

    장맹담張孟談은 지요知瑤의 군사처럼 가장假裝하고, 한호韓虎를 만나 기밀機密이라며 주위를 물리게 한 후 독대獨對하고 자기가 장맹담張孟談임을 밝혔다. 장맹담張孟談은 장차 조씨趙氏가 망하면 다음은 반드시 한씨韓氏와 위씨魏氏 차례다. 지요知瑤는 엄연한 남의 땅을 빼앗았지만 한씨韓氏와 위씨魏氏는 억울하다는 말 한마디 못 하였다. 조씨趙氏가 망하면 조씨趙氏 땅을 나누어 줄 것으로 믿는지 모르겠으나, 지요知瑤가 나누어 준다면 얼마나 나누어 줄 것이며 분배가 잘못되었다고 따질 수 있겠느냐? 지요知瑤가 똑같이 나누어 준다고 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강성해질 지요知瑤가 그 땅을 달라고 하면 거절할 방도나 용기가 있느냐?라며 어차피 지요知瑤와의 동거는 일시적일 뿐 오래지 않아 지요知瑤에게 잡아먹힌다고 설파說破하였다.

    장맹담張孟談은 한호韓虎가 자신의 말에 공감共感하는 것을 보고는 그에게 한韓, 조趙, 위魏가 합심하여 이참에 지요知瑤를 쳐서 지씨知氏를 멸문시키자. 지씨知氏 땅은 조씨趙氏 땅보다 배나 크니 조씨趙氏를 멸하여 얻을 이익보다 더 크다. 또 한韓나라와 위魏나라는 지요知瑤가 없으니 불안할 필요도 없다.라고 설득하자, 한호韓虎는 위구魏駒와 상의하겠다고 했고, 장맹담張孟談은 한군韓軍 영채營寨에 머물며 자기 계책을 지지해 준 단규段規와 교분交分을 나누었다.

    이튿날, 단규段規는 한호韓虎의 지시로 위구魏駒를 만나 비밀리에 장맹담張孟談과 한호韓虎가 나눈 이야기를 전하며 위구魏駒의 의중을 묻자, 위구魏駒는 지요知瑤는 싫다. 그러나 자칫 실패하면 되레 당하니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라며 즉답을 피하였다.

    이에 단규段規는 어차피 지요知瑤와는 공존共存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조씨趙氏를 없앤 다음에 한韓나라와 위魏나라 두 가문이 지요知瑤에게 대항하는 것보다 지금 조씨趙氏와 함께 세 가문이 지요知瑤를 치면 이길 공산이 더 높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두 가문이 생존할 방도는 없다. 또 두 가문이 조씨趙氏를 구해 주면 조씨趙氏는 두 가문에 얼마나 고마워하겠느냐? 흉악한 지요知瑤의 처분만 기다리며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사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느냐?라고 설득했고, 위구魏駒는 생각해 보겠다고 답하였다.

    지요知瑤는 한호韓虎와 위구魏駒를 초청하여, 용산龍山 위에서 주연을 열고 진양성晉陽城이 물에 잠기는 광경을 감상하며 물은 참 무섭다. 물은 쓰기에 따라서는 저렇듯 생명을 해치고 나라를 망치기도 하니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라며 혼자 감회에 젖었으나, 한호韓虎와 위구魏駒는 서로 팔꿈치로 몸을 건드리고 발로 상대의 발을 밟으며 서로 지요知瑤에 대한 경계심을 일깨웠다.

    주연을 마치고 둘이 돌아간 후, 치자絺疵는 지요知瑤에게 장차 둘은 배반할 것이다. 둘은 조금만 있으면 조씨趙氏 땅을 나누어 받을 것인데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다. 이는 무슨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주군이 물의 위험성을 강조했을 때 둘은 진수晉水가 진양성晉陽城을 삼켰듯이 분수汾水는 안(安: 산서성山西省 하현夏縣. 위씨魏氏 본거지)을, 강수絳水는 평양(平陽: 산서성山西省 임분현臨汾縣 서남쪽. 한씨韓氏 본거지)을 삼킬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졌을 것이다.라며 경계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요知瑤는 치자絺疵의 충고를 무시하였다.

    이후, 지요知瑤는 한호韓虎와 위구魏駒가 답례차 연 주연에서 직설적인 성격임을 밝힌 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치자絺疵가 말하기를 ‘장차 둘이 변란變亂을 일으킬 것이다.’고 하던데 둘은 과연 그럴 것인가?라고 묻자, 둘은 그것은 조양자趙襄子의 이간계離間計이다. 지씨知氏, 한씨韓氏, 위씨魏氏 삼가三家를 서로 의심하게 하여 진양성晉陽城 공격을 느슨하게 하려는 조양자趙襄子의 계책이다. 치자絺疵는 조씨趙氏의 뇌물賂物을 받고 이간계에 협조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곧 조씨趙氏의 땅 3분의 1을 가질 텐데, 목전의 이익을 포기하고 그 누가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를 위험한 짓을 계획하겠느냐?라고 부인否認하였다.

    지요知瑤는 둘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둘이 의심받은 것을 섭섭해하자, 지요知瑤는 앞으로는 의심하거나 미워하지 않겠다고 천지신명天地神明께 맹세盟誓하기까지 하였다. 둘이 돌아간 후 치자絺疵는 지요知瑤가 둘에게 자기가 의심한다는 것까지 말한 것을 알고, 지씨知氏가 망할 날이 바로 코앞이라고 탄식하였다. 곧이어 칭병稱病하고 그 곁을 떠났다.

    한호韓虎, 위구魏駒, 장맹담張孟談 셋은 지요知瑤를 치기로 삽혈歃血하고 맹세하였다. 내일 심야深夜에 한군韓軍과 위군魏軍은 둑을 터뜨려 가두어 놓은 물을 지군知軍 진영陣營 쪽으로 흐르게 하고, 조군趙軍은 진양성晉陽城 물이 줄어드는 시점에 성 밖으로 나와 지군知軍을 치기로 합의하였다. 장맹담張孟談은 진양성晉陽城에 돌아가 즉시 조양자趙襄子에게 그간의 경과를 보고하자, 조양자趙襄子는 크게 기뻐하며 곧 거병擧兵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이튿날 밤, 한韓, 위魏 양군은 저수지를 지키는 지군知軍을 야습夜襲하여 대파大破하고 서쪽 둑을 무너뜨렸다. 순식간에 저수지의 물은 지군知軍 진영을 휩쓸었다. 한편, 지요知瑤는 자다가 물벼락을 맞은 군사들의 아우성 소리에 잠을 깼다. 처음에는 저수지를 지키는 군사들의 실수로 물이 샜다고 판단했으나, 물이 점점 불어나 목까지 잠기자 크게 당황하였다.

    그때 동생 지국知國과 가신 예양(豫讓: 여양予讓이라고도 함)이 뗏목을 타고 와서 지요知瑤를 구출하였다. 지군知軍들은 살려고 허우적거리는데, 한군韓軍과 위군魏軍은 작은 배들을 타고 다니며 허우적대는 지군知軍들을 닥치는 대로 쳐죽였다. 그제야 지요知瑤는 한호韓虎와 위구魏駒에게 배신당했음을 알고 크게 후회하였다. 이때 예양豫讓은 지요知瑤에게 속히 몸을 피하여 진군秦軍을 청해 오라고 진언하자, 지요知瑤는 지국知國과 같이 작은 배로 산 뒤로 나갔다.

    조양자趙襄子는 장맹담張孟談에게 군사를 주며 한군韓軍과 위군魏軍을 도와 지군知軍을 치게 하고, 지요知瑤가 진秦나라로 달아날 것을 예견豫見하고, 자기는 별동대를 지휘指揮하여 용산龍山 뒤에 매복하였다. 예상대로 지요知瑤 일행이 그곳을 지나가자 그를 생포生捕하고는 친히 나서 칼로 쳐죽였다. 한편, 예양豫讓은 수적 열세劣勢에도 불구하고 분전奮戰했으나, 지요知瑤가 조군趙軍에게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변복하고 석실산石室山 쪽으로 달아났다. 그날이 바로 3월 병술丙戌일이었다.

    조양자趙襄子는 성안의 백성들을 위로한 후 한호韓虎와 위구魏駒에게 도와준 것에 사의謝意를 표하고 이왕 없애기로 작정했으니 이제는 그 뿌리까지 뽑아야 한다. 어영부영하다가는 불행의 씨만 키운다.라며 지씨知氏 잔당을 속히 제거하자고 독려督勵하였다.

    이에 조군趙軍, 위군魏軍, 한군韓軍, 즉 삼가 군三家軍은 1년여 만에 강주(絳州: 산서성山西省 곡옥현曲沃縣 서남쪽)에 돌아와 지씨知氏 일족을 몰살沒殺하였다. 보씨輔氏로 변성한 지과知果만이 죽음을 면했고, 한씨韓氏와 위씨魏氏는 지요知瑤에게 바쳤던 땅을 되찾았으며, 지씨知氏 일족의 땅은 삼가三家가 3분의 1씩 나누어 가졌다. 이로써 한韓, 위魏, 조趙는 사실상 진晉나라를 3분하여 단일 국가로 독립하였다.

    a0222 브리핑 (briefing) + 덤 하-142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위열왕(周威烈王) 23년」에서 지요知瑤의 패망과 관련하여 지요知瑤가 망한 것은 재주才操가 덕보다 많아서였다. 재주는 덕의 밑천이고 덕은 재주를 이끈다. 재주와 덕을 겸비한 자를 ‘성인聖人’이라고 하고, 재주와 덕이 함께 부족한 자를 ‘우인愚人’이라고 하며 덕이 재주보다 많은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하고, 재주가 덕보다 많은 사람을 ‘소인小人’이라고 한다. 군자란 재주를 가지고 착한 일을 하고, 소인은 재주를 가지고 악한 일을 한다.라고 설파하였다.

    「설원(說苑) 잡언(雜言)」에는 한호韓虎와 위구魏駒에게 배반당한 지요知瑤에 대하여 지요知瑤는 주방장이 고기를 구울 때 사용하는 대바구니를 잃은 것도 알 정도로 작은 일에는 세심했지만, 자신이 한韓나라와 위魏나라 군주에게 배반당할 큰일은 알지 못하였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조씨趙氏, 한씨韓氏, 위씨魏氏 삼가三家가 진晉나라를 나누려고 할 때, 단규段規는 한호韓虎에게 반드시 성고(成皐: 하남성河南省 사수현汜水縣 서쪽. 춘추 시대 때의 호뢰虎牢)를 차지하라고 하자, 한호韓虎는 성고成皐는 돌만 많다며 꺼렸다. 이에 단규段規는 1리의 땅으로도 천 리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지세의 이익 때문이요, 1만의 군사로도 3군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의표意表를 찌를 수 있기 때문이다.라며 훗날 성고成皐로 인하여 정鄭나라 땅까지 차지할 것이라고 예견하며 설득하였다. 한호韓虎는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며 성고成皐를 차지했는데, 기원전 375년 한韓나라가 정鄭나라를 침공하여 정鄭나라를 양책(陽翟: 하남성河南省 우현禹縣)에서 신정(新鄭: 하남성河南省 신정현新鄭縣)으로 쫓아낼 때까지 성고成皐는 그 기반이 되어 주었다.

    조양자趙襄子가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고혁高赫에게 1등 상을 주자, 장맹담張孟談은 고혁高赫은 계책을 낸 적도 없고, 또 목숨을 걸고 사명을 감당한 일도 없다. 그런데 뭘 보고 1등상을 주는가?라며 불평하였다. 이에 조양자趙襄子는 고혁高赫은 위기에도 당황하지 않고 일을 처리했음은 물론, 군신君臣 간이나 동료 간이나 예의禮儀를 잃지 않았다. 전공戰功도 작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예법禮法을 지킨 공은 길이길이 전할 부중의 자산資産이다.라며 시상 배경을 설명하니, 그제야 장맹담張孟談도 순복順服하였다.

    조양자趙襄子는 지난날 앞일을 일러 준 산신에 대하여 백 개의 성읍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원과原過에게 곽태산霍泰山 사당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또 조양자趙襄子는 지요知瑤에 대한 적개심으로 지요知瑤의 두골을 요강으로 사용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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