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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눈으로 본 열국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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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눈으로 본 열국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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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중국 명明나라 말엽의 작가 풍몽룡馮夢龍이 중국의 기원전 8세기~3세기에 이르는 약 600년의 춘추 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의 장구한 역사를 형상화한 소설 『동주 열국지(東周列國志)』를 거꾸로 역사적으로 비교하며 탐색한 책이다.
즉, 『동주 열국지』란 소설 속에 용해되거나 함축된 동시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좌구명左丘明의 『춘추좌전(春秋左傳)』, 『국어(國語)』,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유향劉向의 『전국책(戰國策)』, 『설원(說苑)』, 한비韓非의 『한비자(韓非子)』, 안자晏子의 『안자춘추(晏子春秋)』, 여불위呂不韋의 『여씨춘추(呂氏春秋)』, 『논어(論語)』, 맹자孟子의 『맹자(孟子)』, 장자莊子의 『장자(莊子)』 등에 기록되거나 전해지는 역사적 사실이나 일화와 비교하여 무엇은 사실이고 무엇은 허구인지를 가려보려는 참신하고 이색적인 책이다.
이 책은 첫째, 각 권마다 『동주 열국지』의 역사 소설을 압축한 소설 부분, 『동주 열국지』와 그 시대 배경이 되는 사서들을 세밀하게 비교·분석한 팩트체크(fact-check) 부분, 그리고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등에 관한, 참고 문헌에서 기록·소개하고 있는 일화, 비평, 보충 설명 등을 담은 브리핑(briefing) + 덤의 세 가지 부분으로 구획되어 있어서 소설의 흥미뿐만 아니라 역사 지식의 정보도 제공하고 있고,
둘째, 중국 고대 인명의 경우 그 사람의 관직, 봉읍封邑, 시호諡號 등에 따라 상이하여 동일인 여부 판단이 상당히 어려워 애를 먹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에서는 인명이나 지명의 경우 사서와 상이한 것은 별도로 표기하려고 하여 동일인 여부 판단에 많은 도움을 제공하고 있고,
셋째, 각 사건의 과정 과정마다 일일이 사서들을 비교 확인하여 서기 환산 연도(왕이나 제후의 재위 기간 표기가 아니라 기원전 표기)로 표기하였는데, 이는 열국지의 사건을 단발적인 일화 수준이 아닌 춘추 전국 시대의 종합적이고도 연계적인 사건 구조로 파악할 수 있게 구성하고 있는 점이 기존의 『열국지』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며, 역사 소설을 역사적으로 검증하려는 새로운 장르의 실험적인 시도이자 가치를 담은 반소설 겸 역사 반입문서이다.
우리가 역사 소설을 즐겨 읽는 것은,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인간의 본성에 바탕을 둔 욕망, 야망, 사랑, 증오, 배신과 복수, 시혜와 보은 등의 인간 삶의 양태樣態의 동질성을 발견할 수 있고, 따라서 오늘의 삶을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는 교훈과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며, 나아가 오늘의 선택이 나에게 어떤 미래를 가져다 줄 것인지를 예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불 10년’, ‘권선징악’, ‘쥐구멍에도 볕 뜰 날이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교훈과 지혜 등은 역사가 아니면 도저히 배울 수 없는,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인류의 소중한 가치이자 자산이다.
이 책은 열국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 열국지 마니아, 역사 입문자나 전문가에게 재미면 재미, 지식이면 지식 면에서 독자들에의 취향과 성향에 따라 선택적으로 읽을꺼리를 제공하고 있고, 역사가 독자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교훈과 지혜를 듬뿍 담았다. 한 번에 독파하기는 어렵지만 독파하기만 하면 열국지와 고대 중국사 및 한자에 자신감을 갖게 할 수 있는, 두고두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고, 소장 가치가 있는 책이다.
한국중어중문학회 회장, 중국어문학연구회 회장, 한국중국언어학회 회장 등을 역임한 임동석 교수는 이 책의 추천사에서 저자 강용봉의 창작 활동에 대하여 ‘파천황破天荒’적 작업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Language한국어
Release dateJun 16, 2023
ISBN9791198328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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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눈으로 본 열국지 중 - 강 용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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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눈으로 본 열국지(중권)

    열국지 팩트체크(fact-check)

    ※다른 눈으로 보기에 앞서

    1. ‘이 책은 이런 책이다’

    이 책은 중국 명明나라 말엽의 작가 풍몽룡馮夢龍이, 중국의 기원전 8세기~3세기에 이르는 약 600년의 춘추 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의 장구한 역사를 형상화한 소설 『동주 열국지(東周列國志)』(청淸대의 채원방蔡元放이 풍몽룡의 『신열국지』를 『동주 열국지』라고 개칭)를 거꾸로 역사적으로 비교하며 탐색한 책이다.

    즉, 『동주 열국지』란 소설 속에 용해되거나 함축된 동시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좌구명左丘明의 『춘추좌전(春秋左傳)』, 『국어(國語)』,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유향劉向의 『전국책(戰國策)』, 『설원(說苑)』, 한비韓非의 『한비자(韓非子)』, 안자晏子의 『안자춘추(晏子春秋)』, 여불위呂不韋의 『여씨춘추(呂氏春秋)』, 『논어(論語)』, 맹자孟子의 『맹자(孟子)』, 장자莊子의 『장자(莊子)』 등에 기록되거나 전해지는 역사적 사실이나 일화와 비교하여 무엇은 사실이고 무엇은 허구인지를 가려보려는 시도이다.

    역사 소설은 말 그대로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만, 반대로 소설 속에 담긴 역사는 뭘까? 그저 허구의 액세서리일까? 그래도 역사일 수 있을까? 이것도 아니면 역사가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새로운 ‘허구적 역사’일까? 자주 의문을 가졌다.

    이 책은 이런 의문에서 역사 소설을 한번 역사적으로 탐색해보는 것도 의미 있고 재미가 있겠다 싶어 실험적으로 시도한 반소설이자 역사 반입문서이다.

    그리고 이 책은 2022년 4월에 발행된 『다른 눈으로 본 열국지』의 정정본訂正本이다. 차례, 팩트체크의 위치 등의 형태적인 면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많은 것을 수정하고 바로잡았다. 독자들의 너그로운 아량과 양해 부탁 드린다.

    2. ‘간략하게 일러두기’

    1) 이 책의 팩트체크(fact-check)에 책이름 없이 나오는 회차 표시는 위키미디어 재단 위키문헌(zh.wikisource.org)에 탑재된 풍몽룡의 『동주 열국지』 원문의 회차를 말하는데, 풍몽룡의 『동주 열국지』를 인용하는 빈도가 너무 많고, 출전 표기가 길어서 앞으로 ‘위키미디어 재단 위키문헌 풍몽룡의 『동주 열국지』’는 ‘『동주 열국지』’라 하고, 회차 표기는 위키미디어 재단 위키문헌 풍몽룡의 『동주 열국지』를 생략하고 회차 숫자만 표기하도록 하겠다.

    2) 출전 축약에 관하여: 일반적으로는 『사기(史記)』 「본기(本紀)」 ‘주 본기(周本紀)’의 형식으로 서명과 편명을 표기해야 하나, 출현 빈도가 너무 잦아 이 책에서는 축약하여 「주 본기」라고만 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언급되는 「본기(本紀)」, 「세가(世家)」, 「열전(列傳)」, 「연표(年表)」는 모두 『사기(史記)』라는 서명을 생략한 것이고, 다른 사서도 되도록 서명을 축약해서 표기하였다. 이는 이 책이 논문 등 연구물이 아님을 나타내려는 의도도 포함된 것이다.

    3) 「연표(年表)」 인용에 관하여: 「연표(年表)」는 『사기』 내의 「본기(本紀)」, 「세가(世家)」, 「열전(列傳)」의 기사를 보조하는 기능인 셈이어서 『사기』 내에서 기사가 상이하거나 「연표(年表)」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에 한하여 「연표(年表)」를 인용하였다.

    4) 시호諡號 사용에 대하여: 원래 시호는 왕이나 제후 등이 죽은 후에 망자의 행적 등을 참작하여 추증하는 것이어서 망자의 생전에는 쓰이지 않는 것이나, 이 책에서는 명확한 의미 전달을 위하여 망자의 생전에도 그 시호를 사용하였다.

    예) 주유왕周幽王, 제환공齊桓公, 위영공衛靈公

    5) 왕이나 제후는 되도록 시호를 썼고, 그 외의 인명은 되도록 그 사람의 자字보다 이름을 주로 하였으며, 이름을 알 수 없거나 불분명하거나 또는 이미 주지되고 있는 유명한 사람의 경우에는 그 사람의 시호나 자字를 썼다.

    6) 『동주 열국지』의 인명이나 지명이 사서, 즉 『사기)』, 『춘추좌전』, 『국어』, 『자치통감』, 『전국책』과 다를 경우, 해당 사서의 인명이나 지명을 채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서 간에도 서로 다를 경우 되도록 『춘추좌전』과 『자치통감』 순으로 따랐고, 이 외에는 원문의 것과 같은 것을 따랐으며, 『동주 열국지』와 사서 외의 참고 문헌을 인용했을 경우, 인·지명은 그 문헌의 것을 따랐다.

    7) 『동주 열국지』의 한자가 우리나라에서 자주 사용되는 글자와 다를 경우에는 원문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널리 쓰이는 것을 채택하였다. 

    예) 鬥 → 鬪, 薳 → 蔿

    8) 직접 인용에 대하여: 원래 직접 인용은 본인의 말이나 원전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나, 이 책에서는 발화자의 심경을 박진감 있게 전달하려고 경어법 등 화법 규칙을 따르지 않았음을 밝혀 둔다.

    9) 팩트체크(fact-check)의 괄호 속에 출전 언급 없이 표기된 주周 왕조와 제후들의 재위 연도의 서기 환산 표기는 「사기 표(史記表) 십이제후 연표(十二諸侯年表)」와 「사기 표(史記表) 육국 연표(六國年表)」를 기준으로 했음을 밝혀 둔다.

    10) 2천여 년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전래되면서 소실되거나 보완되는 등의 변화를 겪은 사서들을 비교·추정하는 것이므로 되도록 시비是非를 단정하기보다 상이相異를 밝히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3.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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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다른 눈으로 보기에 앞서

    1. ‘이 책은 이런 책이다’

    2. ‘간략하게 일러두기’

    3. ‘참고 문헌’

    제5장 여전히 패자霸者, 되찾으려는 패자 자리

    1. 국난國難이 1嬰의 지혜

    제6장 오왕吳王 합려闔廬와 부차夫差 그리고 월왕越王 구천句踐

    1. 망명객亡命客이 된 건建과 오자서伍子胥

    2. 소관昭關 통과

    3. 주周나라 왕실王室의 변란變亂

    4. 전제專諸

    5. 비무극費無極과 요이要離

    6. 군위 공석

    7. 형정刑鼎과 성주성成周城

    8. 영성郢城으로 향하는 암운暗雲

    9. 오吳·초楚 전쟁

    10. 초楚나라를 구한 신포서申包胥의 충심忠心

    11. 공구孔丘

    12. 노魯나라 삼가三家 가신家臣들의 난亂

    13. 오吳·월越 전쟁

    14. 와신상담臥薪嘗膽

    15. 진晉나라 경卿들의 전쟁

    16. 공자孔子의 주유천하周遊天下

    17. 오吳나라, 중원中原 진출

    18. 동상이몽同牀異夢

    19. 오자서伍子胥의 죽음

    20. 복수復讐

    21. 공자孔子의 죽음

    22. 실패失敗와 성공成功의 차이

    23. 아들의 군위를 뺏은 위장공衛莊公

    24. 백공白公의 난

    25. 오吳나라의 멸망 그리고 패자가 된 월왕越王 구천句踐

    제5장 여전히 패자霸者, 되찾으려는 패자 자리

    1. 국난國難이 된 장난

    기원전紀元前 594년, 진晉나라는 엄청난 흉년凶年으로 사방에서 도적이 들끓자 순림보(荀林父: 환자桓子)는 도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극옹郤雍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지난날 순림보荀林父가 중항 대장中行大將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이를 근거로 순림보荀林父의 후손은 중항中行의 관직명을 씨氏로 하여 순씨荀氏를 중항씨中行氏라고도 한다.

    극옹郤雍은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에서 물건에 대한 욕심, 도적질에 대한 부끄러움, 잡힐 수 있다는 두려움을 읽고, 한눈에 도적 여부를 판별하여 매일 도적 수십 명을 잡아들였다. 그러나 도적은 점점 더 늘어났다.

    극옹郤雍에 대하여 대부大夫 양설직羊舌職은 극옹郤雍 한 사람의 힘만으로 도적을 다 잡아 없앨 순 없다. 도적들이 힘을 합쳐 도리어 극옹郤雍을 노릴 것이다.라고 예견豫見했는데, 불과 며칠도 안 되어 극옹郤雍은 수십 명의 도적에게 피살被殺되었다. 순림보荀林父도 울화병으로 죽었다.

    진경공晉景公은 양설직羊舌職을 불러 어떻게 해야 도적이 없어지겠느냐고 묻자, 그는 무법하고 무도한 도적을 법만으로 금할 수도 없고 많이 잡는다고 하여 도적의 씨를 말릴 수도 없다. 도적을 없애려면 사람들에게 염치廉恥를 가르치는 길밖에 없다.라며 도적 소탕의 적임자이자 순림보荀林父 후임에 사회(士會: 무자武子. 수회隨會라고도 함)를 천거薦擧하였다.

    기원전 593년, 진경공晉景公은 사회士會가 적적赤狄을 평정하고 돌아오자, 사회士會의 공을 널리 알리려고 그가 잡아 온 포로를 주周 왕실王室에 바치면서 천자天子가 임명할 수 있는 상경上卿에 사회士會를 천거하였다. 이에 주정왕周定王이 사회士會를 진晉 상경에 임명하자, 진경공晉景公은 3월에 사회士會를 중군 원수中軍元帥 겸 태부太傅로 삼고 범(范: 산서성山西省 개휴현介休縣 동쪽)을 봉하였다. 원래 사회士會는 사씨士氏였으나, 범范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범씨(范氏: 범씨範氏라고도 함)의 시조가 되었다.

    사회士會가 도적에 관한 법률을 정비하고 백성百姓들에게 선행을 장려하고 도적을 교화하니 진晉나라에는 도적이 점차 줄어 나라가 안정적으로 다스려졌다.

    기원전 592년, 진경공晉景公은 진문공晉文公과 진양공晉襄公 대代의 영화榮華와 위상位相이 진영공晉靈公과 진성공晉成公 대에 이르러 끊긴 것을 안타까워하며 손백규孫伯糾의 아들 모신謀臣 백종伯宗에게 옛 영광榮光을 되찾을 방법을 물었다.

    이에 백종伯宗은 진晉나라는 진영공晉靈公 즉위卽位를 두고 영호(令狐: 산서성山西省 의씨현猗氏縣 서쪽)에서 진秦나라와 싸우며 신용信用을 잃었고, 제齊나라와 송宋나라의 임금 시해弑害 사건을 문죄問罪하지 않아 산동山東 나라들로부터 배척당하였다. 필(邲: 하남성河南省 정주시鄭州市 동쪽)전쟁에서 초楚나라에 패하여 정鄭나라를 잃었고, 송宋나라도 구해 주지 못하여 지금의 진晉은 종이호랑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패업霸業을 회복할 뜻이 있다면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와 관계를 개선하면서 초楚나라를 이길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라고 진언進言하였다.

    진경공晉景公은 크게 기뻐하며 단도(斷道: 산서성山西省 심현沁縣 동남쪽)회맹會盟을 추진하기로 하고 제후諸侯들의 참석을 독려督勵하기 위하여 봄에 극결(郤缺: 성자成子)의 아들이자 상군 대장上軍大將인 극극(郤克: 헌자獻子)을 제齊나라와 노魯나라로 보냈다.

    극극郤克이 노魯나라를 거쳐 제齊나라로 갈 때, 노魯나라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제齊나라에 가던 사신使臣 계손행보(季孫行父: 문자文子)와 함께 가게 되었는데, 둘은 제齊나라의 교외에서 다시 제齊나라로 가던 위衛나라의 사자使者 손양부(孫良夫: 환자桓子)와 조曹나라 사자 공자公子 수首를 우연히 만나 제齊나라의 공궁公宮으로 함께 갔다. 넷은 제경공齊頃公을 알현謁見하고 각자 자기 임금의 말을 전한 후 객관客館으로 물러나 환영연歡迎宴을 기다렸다.

    제경공齊頃公은 사신 넷의 생김새가 기이奇異하여 연신 웃다가 생모 소태부인(蕭太夫人: 소후蕭侯의 딸로 제혜공齊惠公에게 출가한 여인)에게 오늘 네 나라에서 사신이 왔는데 극극郤克은 애꾸눈, 행보行父는 대머리, 손양부孫良夫는 절름발이, 공자 수首는 꼽추였다. 한자리에서 이들 넷을 보니 우스웠다.라고 하자 소태부인蕭太夫人은 한 번 보여 달라고 하여 제경공齊頃公도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객관에 있던 사자들이 연회장에 입장할 때에는 주최국에서 수레와 어자御者를 제공하는 것이 상례常例였다. 제경공齊頃公은 단지 어머니를 한번 웃게 할 심산으로 사자를 태울 수레를 몰 어자御者로 애꾸눈, 대머리, 절름발이, 꼽추를 선발選拔, 어자御者와 같은 장애의 사신을 태우게 하였다.

    소태부인蕭太夫人은 숭대崇臺 위에서 방장房帳 사이로 한 쌍의 애꾸눈, 한 쌍의 대머리, 한 쌍의 절름발이, 한 쌍의 꼽추가 수레를 몰거나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다가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넷은 처음에는 웬 여자가 저리 웃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연회장에 들어가서는 자신들의 장애 처지를 보고 웃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러나 연회장에서는 그 일에 대해서 서로들 이야기할 틈이 없어 각기 기분이 나쁜 상태로 연회를 일찍 마쳤다.

    넷은 연회가 끝난 후 객관으로 돌아가 사자의 신분身分임에도 불구하고 대접은커녕 희롱당한 자신들의 처지에 대하여 분통해하며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러다가 이는 사자 개인을 희롱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대표한 나라를 모독한 것이라는 점에 공감대를 형성한 후, 각기 자기네 임금에게 제齊나라를 치자고 진언하기로 삽혈歃血하고 맹세盟誓하였다. 그리고는 다음날 새벽에 제齊나라에 인사도 없이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제齊나라 상경 국좌(國佐: 무자武子)는 큰 화가 제齊나라에 닥칠 것을 우려憂慮하였다.

    a0111 팩트체크 (fact-check) 중-109

    제齊나라를 방문한 사신들의 장애 부위 등과 관련한 기록記錄이 상이相異하다. 첫째, 사신들의 장애 유형이다. 제56회에서는 극극郤克은 애꾸눈, 행보行父는 대머리, 손양부孫良夫는 절름발이, 공자 수首는 꼽추였다고 묘사描寫하고 있다. 그러나 「진 세가(晉世家)」에서는 극극郤克은 꼽추, 노魯나라 사신은 절름발이, 위衛나라 사신은 애꾸였다고 기록記錄하고 있고, 「제 태공 세가(齊太公世家)」와 「좌전(左傳) 노선공(魯宣公) 17년」조條에서는 극극郤克이 단 위로 오를 때의 거동을 보고 웃었다. 즉, 절름발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장애를 희롱한 모임 성격이다. 제56회와 「진 세가(晉世家)」에서는 사신들의 장애를 희롱한 것은 진晉나라, 노魯나라, 위衛나라, 즉 다국적 회동會同 때라고 묘사·기록하고 있으나, 「제 태공 세가(齊太公世家)」, 「좌전(左傳) 노선공(魯宣公) 17년」조條에서는 극극郤克이 제齊나라를 방문했을 때라고 기록하고 있다.

    셋째, 사신들의 장애를 희롱한 사람이다. 제56회에서는 사신들의 장애를 비웃은 사람은 제경공齊頃公의 어머니, 즉 제혜공齊惠公의 부인인 소태부인蕭太夫人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진 세가(晉世家)」에서도 사신들의 장애를 비웃은 사람은 제경공齊頃公의 어머니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제 태공 세가(齊太公世家)」와 「좌전(左傳) 노선공(魯宣公) 17년」조條에서는 제경공齊頃公의 부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극극郤克은 강성(絳城: 산서성山西省 익성현翼城縣 동남쪽)으로 돌아가 사회士會에게 제齊나라에서 당한 모욕을 들려주며, 이는 개인적인 모욕이 아니라 진晉나라에 대한 모욕이라며 제齊나라를 치자고 하였다. 그러나 사회士會는 우선 단도斷道 회맹이 더 급하다. 단도斷道 회맹의 성공을 위하여 집중해야 할 상황에 제齊나라를 치는 것은 좋지 않다.라며 반대하였다. 극극郤克은 제경공齊頃公이 회맹에 참석하면 기필코 복수復讐하리라 다짐하였다.

    제경공齊頃公은 즉위 때부터 진晉나라보다 초楚나라와 더 가까웠고, 특히特히 필邲 전쟁 때 진晉이 패한 후로는 진晉을 ‘지는 해’라 여기고 있는 터여서 처음부터 단도斷道 회맹에 불참하려고 하였다. 게다가 극극郤克 등을 희롱한 사건에 대한 여파도 우려하여 자기는 불참하고 고고(高固: 선자宣子)에게 대신 참석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고고高固는 안약(晏弱: 환자桓子. 안영晏嬰의 아버지), 채조蔡朝, 남곽언南郭偃 등을 대동하고 단도斷道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러나 일행이 염우(斂盂: 하남성河南省 복양현濮陽縣 동남쪽)에 당도했을 때, 고고高固는 극극郤克 등의 보복이 두려웠는지 단도斷道에 가지 않겠다고 하고는 제齊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안약晏弱은 고고高固에게 크게 실망했으나, 그렇다고 왕명王命을 어길 수는 없어 일행을 수습收拾하여 단도斷道에 도착하였다.

    극극郤克은 세작細作으로부터 단도斷道 회맹에 제경공齊頃公이 불참한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크게 낙담하였다. 그러나 고고高固는 출발했다고 하니 고고高固에게만이라도 복수하자 자위自慰하였다. 그런데 단도斷道에 도착한 제齊나라 일행 중에 고고高固도 없는 것을 보고는 대로大怒하였다.

    6월, 단도斷道에서 진晉나라, 노魯나라, 위衛나라, 조曹나라, 주(邾: 산동성山東省 추현鄒縣 동남쪽)나라의 군주君主가 참석한 회會가 열렸다. 이 회에서 진晉나라를 배반하고 초楚나라에 붙은 나라를 치기로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를 지목指目하지는 않았으나, 다들 제齊나라인 것을 알았다.

    a0222 브리핑 (briefing) + 덤 중-58

    「좌전(左傳) 노선공(魯宣公) 17년」조條에는 제齊나라의 일행 중 고고高固가 염우斂盂에서 돌아가 버렸으나, 안약晏弱은 단도斷道까지 갔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齊나라 대표로 회맹에 참석하지도 못하고 도리어 야왕(野王: 하남성河南省 심양현沁陽縣)등에 감금監禁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제 태공 세가(齊太公世家)」에는 구체적인 제齊나라의 사신의 이름은 없지만, 극극郤克은 제齊나라 사신 네 명을 붙잡아 하내河內에서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회士會는 단도斷道 회맹에 참가한 나라도 적을뿐더러, 제齊나라와 우호友好를 다진 후 초楚나라를 고립시키려고 한 회맹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 것에 책임을 지고 같은 해 가을에 사직辭職을 청하였다. 더욱이 제齊나라에 앙갚음하려고 제齊나라를 치자는 극극郤克의 집요한 요구를 거절拒絶할 자신이 없었다. 진경공晉景公은 수차 반려返戾하다가 결국 수리受理, 극극郤克이 그 후임이 되었다. 

    사회士會는 사직하기 전에 아들 사섭(士燮: 문자文子)에게 지금 제齊나라에 대한 극극郤克의 분노는 참을 수 있는 도를 넘었다. 만일 그가 진晉나라의 국정을 장악하지 못하면 그의 분노는 진晉에 분출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사직하여 그에게 중군 원수를 내주고자 한다. 그가 중군 원수가 되었다고 분노를 가라앉히면 다행이겠지만, 어떻든 너는 대부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군명君命을 성실히 준수하라. 그래야 네 몸과 가문家門을 온전히 지킬 것이다.라며 훈계하였다.

    한편, 묘분황苗賁皇은 야왕野王을 지나다가 안약晏弱을 만난 후 진경공晉景公에게 안약晏弱 등은 이미 예견된 위험임을 알면서도 두 나라의 우호를 위하여 단도斷道에 왔다. 그런데 안약晏弱 등을 구금하는 것은, 고고高固가 중도에 포기한 것이 옳았다는 것을 반증反證해 주는 것이다. 얻을 것 없이 제후들을 두렵게 만드는 부작용만 초래한다. 속히 석방하라.라고 진언, 진경공晉景公도 동의하였다. 이리하여 안약晏弱은 진晉의 묵인 하에 야왕野王을 탈출脫出하여 제齊나라로 달아났고 채조蔡朝와 남곽언南郭偃도 기원전 591년 봄에 제齊나라로 돌아갔다.

    노魯나라는 제환공齊桓公 이래 제齊나라를 꾸준히 추종追從하였다. 더욱이 노선공魯宣公은 제혜공齊惠公 덕에 군위君位에 올랐다고 여기고 제齊나라를 정성으로 섬겨 매년 두 번씩 예물禮物과 사신을 보냈다. 기원전 599년에 제혜공齊惠公이 죽고 제경공齊頃公이 즉위한 후에도 계속 제齊나라를 섬겨 왔고, 기원전 604년 가을과 기원전 601년 여름에 숙손득신(叔孫得臣: 장숙莊叔)과 공자 수(遂: 양중襄仲. 동문 수東門遂, 중수仲遂라고도 함)가 각각 죽은 후 노魯나라의 실권實權을 장악한 행보行父도 제齊나라를 섬기는 정책은 고수해 왔다.

    그러나 행보行父는 제齊나라에서 모욕당한 후 제齊나라에 대한 태도를 돌변突變, 제齊나라에 사전 상의相議나 통보도 없이 노선공魯宣公을 단도斷道 회맹에 참가하게 했고, 은밀히 극극郤克과 연락하며 제齊나라를 치려고 준비 중이었다.

    행보行父는 단도斷道 회맹 직후, 진晉나라가 회맹에 참가한 나라들을 규합糾合, 곧바로 제齊나라를 칠 줄 알았다. 그러나 제齊나라를 칠 기미가 없는 데다, 극극郤克이 중군 원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齊나라 공격을 주저하는 것을 보고는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기원전 591년 여름, 행보行父는 초楚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제齊나라를 치자며 청병請兵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가을에 초장왕楚莊王이 죽고 열 살의 세자世子 심審이 초공왕楚共王으로 즉위하자, 초楚나라는 국상이라며 청병을 거절拒絶, 행보行父는 더욱 초조감을 느꼈다. 이에 행보行父는 하루속히 제齊나라를 치자고 다시 한 번 독촉督促하기로 하고 가을에 진晉나라에 사자를 보내려고 했는데, 그 사자 임무를 공자 수遂의 아들 공손귀보(公孫歸父: 자가子家)에게 맡겼다.

    이 무렵, 노선공魯宣公은 맹손씨孟孫氏, 숙손씨叔孫氏, 계손씨季孫氏 삼가(三家: 노魯나라 3대 세도 가문. 노환공魯桓公의 세 아들이라는 뜻에서 삼환三桓이라고도 함)가 날로 번성하고 있는 것에 비하여 노魯나라 공실公室은 이들 세력에 의하여 위축되고 있는 현실을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노선공魯宣公은 공손귀보公孫歸父가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간다고 하자, 그를 은밀히 불러 진晉나라가 노魯나라 삼가三家를 없애 준다면 노魯는 진晉을 영원히 섬기겠다고 하고서 진晉의 도움을 청해 봐라.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귀보歸父는 진晉나라에 당도한 후, 진晉에서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고 있는 도안가屠岸賈를 만나 그에게 많은 뇌물賂物을 바치며 노선공魯宣公의 뜻을 전하고 진晉나라의 도움을 청하였다.

    이때 도안가屠岸賈는 갖은 아첨阿諂을 부려 진경공晉景公의 총애寵愛를 받아 사구司寇로 있으면서 지난날 진영공晉靈公 때의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도안가屠岸賈는 난서(欒書: 무자武子)와 극극郤克과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자기 세력을 굳건히 하고 있었는데, 귀보歸父로부터 노선공魯宣公의 뜻을 전해 듣고는 난서欒書와 상의하였다. 이어 난서欒書는 이를 극극郤克에게 보고하였다.

    극극郤克은 자나깨나 제齊나라에 대한 복수에만 몰두沒頭하였다. 그러는 중에 난서欒書의 보고를 받고는 깜짝 놀랐다. 난서欒書 앞에서는 노선공魯宣公이 노魯나라를 혼돈에 빠뜨리려고 한다며 그의 제의를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했으나, 내심으로는 제齊나라에 대한 복수에 차질이 생길까 봐 더 걱정하였다. 그래서 극극郤克은 행보行父에게 노선공魯宣公의 음모를 알려 주었다.

    행보行父는 극극郤克의 밀서密書를 받고 노선공魯宣公의 의도를 간파看破, 어이가 없었다. 경영敬嬴이 공자 수遂와 공모共謀, 악惡과 시視를 죽이고 노선공魯宣公을 세운 것에 대하여 이때까지 삼가三家가 침묵한 것은 국가의 안정을 위해서였는데, 이제 와서 귀보歸父와 노선공魯宣公이 공모하여 삼가三家를 몰아내려고 하는 것을 보고는 괘씸하게 여겼던 것이다.

    행보行父는 숙손교여(叔孫僑如: 선백宣伯)와 중손멸(仲孫蔑: 맹헌자孟獻子)에게 극극郤克이 보내 온 밀서를 보여 주며 노선공魯宣公에게 함께 따져 묻자고 했으나, 중손멸仲孫蔑은 어찌 신하가 임금의 시비是非를 따질 수 있느냐며 거절하였다. 그러자, 행보行父는 장손신(臧孫辰: 문중文仲)의 아들이자 사구司寇인 장손허(臧孫許: 선숙宣叔)를 끼워 넣어 숙손교여叔孫僑如, 장손허臧孫許와 같이 노선공魯宣公을 만나려고 공궁까지 갔다.

    그러나 노선공魯宣公의 병이 위독하다고 하여 셋은 그를 만나지 못했는데, 결국 그는 그해 겨울에 죽고, 열세 살의 세자 흑굉黑肱이 군위에 오르니 이가 노성공魯成公이다.

    행보行父는 대부들을 소집하고 지난날 악惡과 시視를 죽인 사건과 관련하여 공자 수遂의 죄임을 밝히고 그의 유족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진晉나라에서 귀국하던 귀보歸父는 노선공魯宣公이 죽고 공자 수遂의 죄로 자기 가족이 추방된 것을 전해 듣고 제齊나라로 달아났다.

    a0222 브리핑 (briefing) + 덤 중-59

    「좌전(左傳) 노선공(魯宣公) 14년」조條에는 안약晏弱이 공손귀보公孫歸父가 장차 망명할 것임을 예견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595년 겨울, 안약晏弱은 곡(穀: 산동성山東省 동아현東阿縣 남쪽)에서 제경공齊頃公과 공손귀보公孫歸父가 만날 때 수행隨行했는데, 이때 귀보歸父와 대화한 후 고고高固에게 귀보歸父는 장차 외국으로 달아날 것이다. 그는 자기의 지위地位와 신분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집착하면 반드시 탐심貪心이 생기고 탐심은 반드시 남을 해롭게 한다. 남을 해롭게 하면 또 남도 그를 해롭게 할 것이 아닌가? 한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해롭게 한다면 그가 어찌 달아나지 않을 수 있겠냐!라고 예견한 바 있었다.

    제경공齊頃公은 귀보歸父의 제보로 진晉나라와 노魯나라, 위衛나라 등이 연합하여 제齊나라를 치려고 준비 중임을 알았다. 이에 제경공齊頃公은 싸움이 벌어질 경우 초楚나라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먼저 사자를 초楚에 보내어 초楚와 우호를 다지는 한편, 기원전 589년 1월에 노魯나라의 용(龍: 산동성山東省 태안현泰安縣 동남쪽)을 쳤다. 이왕 싸워야 한다면 공격을 받아 제齊나라 땅에서 싸우는 것보다 먼저 쳐서 노魯나라 땅에서 싸우려고 한 것이다.

    기원전 590년에 제齊나라가 초楚나라와 동맹을 맺는 등 군사적인 움직임을 보이자, 노魯나라는 이에 대비하여 3월에 행정구역 구丘마다 무장병 1명을 징발하는 구갑丘甲 제도를 처음으로 시행했고, 겨울에는 징발된 군사와 보급품을 점검하고 성곽을 보수하며 제군齊軍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제경공齊頃公의 수족인 장수將帥 노포취괴盧蒲就魁는 자기 용력만 믿고 제경공齊頃公 앞에서 자기 자랑을 하려고 노군魯軍을 깔보고 용龍 북문으로 돌진突進하다가 노군魯軍이 만든 함정에 빠져 사로잡혔다. 이에 제경공齊頃公은 노포취괴盧蒲就魁를 돌려주면 철군撤軍하겠다고 했으나, 노魯나라 용龍 사람들은 제경공齊頃公의 제의를 뿌리치고 노포취괴盧蒲就魁를 처형하고는 노군魯軍의 사기士氣 진작振作을 위하여 그 시신을 성 위에 내걸었다.

    제경공齊頃公은 대로하여 용龍을 사방에서 사흘 밤낮없이 공격하였다. 용龍의 수비 대장守備大將 장손허臧孫許는 나흘째 아침에 곡부(曲阜: 산동성山東省 서부)로 달아났고, 용龍은 함락陷落되었다. 제경공齊頃公은 분풀이로 백성들과 군사를 모조리 잡아 죽였다. 장손허臧孫許는 노성공魯成公의 허락을 얻어 청병하려고 진晉나라로 떠났다.

    제경공齊頃公이 제군齊軍을 이끌고 용龍을 떠나 소구(巢丘: 산동성山東省 태안현泰安縣 부근)에 이르렀을 때, 위군衛軍이 제齊나라를 공격하러 온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제경공齊頃公은 약간의 군사로 용龍을 지키게 한 후,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위衛나라의 신축(新築: 하북성河北省 대명현大名縣)으로 진군進軍하였다.

    기원전 589년 4월, 위衛나라 부장 석직石稷은 손양부孫良夫에게 기습 의도가 노출되어 실패했으니 물러났다가 진晉나라와 노魯나라와 연합하여 다시 치자.라고 직언直言했으나, 손양부孫良夫는 원수인 제경공齊頃公을 눈앞에 두고 어찌 물러날 수 있겠느냐며 제영齊營을 들이쳤다.

    그러나 위군衛軍의 공격을 미리 예상한 제군齊軍의 계략計略에 빠져 위군衛軍은 대패大敗하였다. 손양부孫良夫도 제군齊軍에 포위包圍되어 큰 위기를 맞았으나, 영상寗相과 상금向禽의 도움으로 겨우 사지는 벗어났다.

    제군齊軍은 달아나는 손양부孫良夫를 계속 추격追擊하였다. 이때 석직石稷이 나타나 제군齊軍을 막아섰고 이어 신축新築의 대부 중숙 우해仲叔于奚도 석직石稷을 도우며 제군齊軍에 대항하자 제경공齊頃公은 회군回軍하였다. 석직石稷과 우해于奚도 제군齊軍을 추격하지 않았다.

    손양부孫良夫는 신축新築에 들어가 한숨을 돌린 후, 석직石稷에게 군사를 맡겨 신축新築을 지키게 하고는 진晉나라로 떠났다. 진군晉軍을 청해 와서 기어코 제경공齊頃公에게 복수하리라고 다짐했던 것이다.

    a0222 브리핑 (briefing) + 덤 중-60

    「좌전(左傳) 노성공(魯成公) 2년」조條에는 자기 공만 믿고 과도하게 요구한 우해于奚의 무례함, 월권 행위를 한 위목공衛穆公의 어리석음을 기록하고 있다.

    위목공衛穆公이 손양부孫良夫의 위기를 구한 우해于奚의 공功을 치하致賀하며 고을을 하사下賜하려고 하자, 우해于奚는 고을을 사양하며 곡현曲縣과 반영繁纓으로 조회朝會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위목공衛穆公은 이를 허락하였다.

    곡현曲縣이란 제후가 남쪽을 제외한 동, 서, 북쪽에다 종과 경磬 등의 악기를 걸어 두는 것을 의미하고, 반영繁纓이란 제후가 타는 말의 목에 채우는 장식이다. 즉, 우해于奚는 신하답지 않게 자기를 제후로 대접해 달라고 무례하게 요구한 것이었고, 위목공衛穆公은 제후를 봉하는 일은 천자만이 행할 수 있음을 모르고 어리석게 행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공자孔子는 기물器物과 칭호稱號는 남에게 주어서는 안 될 군주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칭호로써 위신威信을 드러내고 위신으로써 기물의 권위를 보전保全하며 기물로써 존비귀천尊卑貴賤의 예禮를 표현하고 예로써 의義를 행하며 의로써 이익利益을 창출하고 이익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통치統治의 요체要諦이다. 만약 기물과 칭호를 남에게 준다면 이는 정권을 남에게 주는 것과 같다.라고 평하였다.

    극극郤克은 중군 원수가 되었을 때 곧바로 제齊나라를 치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제齊나라를 치려고 하니 제齊나라에서 모욕을 당한 본인들 외에 진晉나라의 백성들, 또 진晉·제齊 전쟁을 바라볼 여러 나라들의 이목耳目과 평가가 마음에 걸렸다.

    중군 원수가 되기 전에는 출군 명령만으로 전쟁이 시작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출군 명령을 내려야 할 위치에 서고 보니 제齊나라를 쳐야 할 당위성과 명분名分이 필요하며, 또 이것들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축적되어야 함을 절감切感되었다.

    이때부터 극극郤克은 조바심과 싸워 가며 때를 기다렸다. 극극郤克 개인의 원한이 아닌, 제齊나라를 쳐야 할 당위성과 명분이 축적되기를 기다린 것이다. 기다리면서 한발짝 한발짝 복수의 그날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이럴 때인 기원전 589년 봄에 제경공齊頃公은 노魯나라와 위衛나라를 쳤다.

    진군晉軍은 기원전 591년 봄에 위衛나라 세자 장臧과 함께 제齊나라의 양곡(陽穀: 산동성山東省 동평현東平縣 서북쪽)까지 쳐들어가 무력을 과시하였다. 그러고는 제경공齊頃公과 증繒에서 결맹結盟하고 제齊나라의 공자 강疆을 인질人質로 잡아 온 일도 있었지만, 진晉나라 대부들은 제齊나라가 노魯나라와 위衛나라를 침입한 것은, 진晉나라를 깔보는 것이고 이를 방치하다가는 노魯나라와 위衛나라마저 잃겠다고 우려하며 제齊나라를 치자고 하였다.

    이 같은 대부들의 요구가 많아질 무렵에 위衛나라의 손양부孫良夫와 노魯나라의 장손허臧孫許가 진晉나라에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극극郤克은 때가 왔다고 판단判斷하고 단도斷道 맹약盟約 이행履行의 명분을 내걸고 출병을 진언, 진경공晉景公은 이를 수락受諾하였다.

    진경공晉景公은 중군 원수에 극극郤克을, 상군 대장에 사섭士燮을, 하군 대장下軍大將에 난서欒書를, 중군 사마中軍司馬에 한궐(韓厥: 헌자獻子)을 임명하여 기원전 589년 5월에 병거兵車 800승을 주며 제齊나라를 치게 하였다. 한편, 노魯나라도 행보行父와 숙손교여叔孫僑如가 즉시 거병擧兵했고, 위衛나라도 손양부孫良夫가 즉시 거병하였다. 조曹나라도 공자 수首가 거병擧兵, 진晉·노魯·위衛·조曹가 연합하게 되었다. 

    제경공齊頃公은 진晉나라의 개입은 예상했지만, 신속히 대병력을 동원하여 위衛나라 땅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제경공齊頃公은 진晉 연합군聯合軍과 제齊나라 안에서 싸우면 결국 백성들의 피해가 커질 것이므로 이를 줄이기 위해서 국경에서 싸우기로 결정하고 국거(鞫居: 산동성山東省 조성현朝城縣 경계)에 주둔駐屯하던 제군齊軍을 제齊나라 안(鞍: 산동성山東省 역성현歷城縣 서북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때 진晉 연합군은 미계산(靡笄山: 산동성山東省 역성현歷城縣 남쪽)에 주둔하였다.

    제경공齊頃公은 고고高固를 좌군 대장左軍大將으로 삼아 위군衛軍과 조군曹軍을 공격하게 하고, 국좌國佐를 우군 대장右軍大將으로 삼아 노군魯軍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봉축보逢丑父를 거우車右로, 병하邴夏를 어자御者로 삼아 중군을 이끌고 진군晉軍을 맡기로 하였다. 제경공齊頃公은 진군晉軍에 보낸 통첩通牒에서 군사를 이끌고 제齊나라까지 오는 수고를 하였다. 약한 군대이나 내일 아침에 싸우기를 청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극극郤克도 진晉, 노魯, 위衛는 형제 사이인데 두 나라 사신이 와서 도움을 청하기에 대명大命을 받고 왔다. 본래 성격이 앞으로 나갈 줄만 알지 뒤로 물러날 줄은 모른다. 이 점을 양해하라.라고 답하였다. 이에 또 제경공齊頃公은 응전應戰을 기다렸다. 불응不應했다고 해도 치려고 하였다.라며 결전 의지를 보였다.

    고고高固는 진군晉軍과 싸워 본 일이 없어 진군晉軍의 전력戰力을 탐색한다며 단신으로 진영晉營 앞에 나아가, 달려드는 지위地位가 낮은 진장晉將을 돌로 쳐죽이고, 병거兵車를 탈취하여 제영齊營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두려움을 버려라. 서전緖戰을 지켜보지 않았느냐? 이것이 이번이番 전쟁의 결과가 될 것이다.라고 큰소리쳤다. 제군齊軍은 진晉나라 연합군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제군齊軍이 일제히 활을 쏘는 가운데 제경공齊頃公은 진영晉營으로 돌진하였다. 극극郤克의 병거兵車를 몰던 어자御者 해장解張도 팔에 화살을 맞았고, 북을 치던 극극郤克도 옆구리에 화살을 맞는 등, 서전은 진군晉軍이 많은 사상자를 내며 고전苦戰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연합군이 분전奮戰하여 전세戰勢를 역전逆轉한 후 제군齊軍을 세게 몰아붙였다. 중상당한 극극郤克을 대신하여 본부군을 이끈 한궐韓厥은 금여金輿로 꾸민 제경공齊頃公이 탄 병거兵車만을 추격하였다.

    전투를 앞둔 전날 밤에 한궐韓厥이 꿈을 꾸었는데, 그 아비 한자여(韓子輿: 자진子鎭)가 나타나 내일 싸울 때 절대로 병거兵車의 오른쪽이나 왼쪽에는 앉지 마라.라고 하였다. 장수가 병거兵車를 탈 경우 장수는 왼쪽, 수레를 모는 사람, 즉 어자御者는 가운데, 장수의 호위 무사는 오른쪽에 탔는데, 오른쪽에 타는 사람을 거우車右라고 하였다. 즉, 한자여韓子輿는 한궐韓厥에게 병거兵車의 어자御者가 되라고 한 것이었다.

    다음날, 한궐韓厥이 어자御者가 되어 병거兵車를 몰고 제경공齊頃公을 추격했는데, 제경공齊頃公의 어자御者 병하邴夏는 추격하는 병거兵車의 어자御者를 쏘아서 추격을 따돌리려고 제경공齊頃公에게 어자御者, 즉 한궐韓厥에게 활을 쏘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경공齊頃公은 어자御者가 군자君子답다면서 어찌 군자를 쏠 수 있겠느냐 하고서 어자御者 대신 한궐韓厥의 왼쪽에 앉은 자를 쏘아 수레 밑으로 떨어뜨리고 거우車右를 쏘아 죽였다. 한궐韓厥은 선친先親의 몽중 지시로 제경공齊頃公의 화살을 피하였다.

    봉축보逢丑父는 화부주산(華不注山: 산동성山東省 역성현歷城縣 동북쪽)으로 달아나다가, 달아난다고 적을 따돌릴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봉축보逢丑父는 병하邴夏에게 구원군을 불러오라고 이르고는 자기가 제경공齊頃公의 금포수갑錦袍繡甲을 입고 제경공齊頃公을 어자御者로 삼아 달아났다. 그러나 화천華泉에서 결국 한궐韓厥에게 따라잡혔다.

    봉축보逢丑父는 진군晉軍 앞에서 어자御者로 꾸민 제경공齊頃公에게 태연히 마실 물을 떠 오라고 심부름시켜 달아나게 하고는 자신이 제경공齊頃公인 것처럼 진군晉軍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극극郤克은 금방 그가 제경공齊頃公이 아님을 알아보았다.

    연합군은 제齊나라를 쳐 없애 버릴 작정作定으로 구여(丘輿: 산동성山東省 익도현益都縣 경계)를 지나 마형(馬陘: 산동성山東省 익도현益都縣 서남쪽)을 치고 방화하며 계속 제군齊軍을 추격하여 제경공齊頃公이 입성入城한 원루(爰婁: 산동성山東省 임치현臨淄縣 경계)에 주둔하였다.

    제경공齊頃公은 진晉나라 연합군의 기세에 대적對敵할 수 없다고 판단判斷, 지난날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게서 뺏은 땅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화평和平을 제의하기로 하였다. 이에 전사한 고고高固 대신 국좌國佐를 사자로 삼고 그에게 지난날 기(紀: 산동성山東省 수광현壽光縣 남쪽)나라 기후紀侯에게서 받은 기증紀甑과 옥경(玉磬: 옥으로 만든 악기)을 들려 진晉나라에 바치게 하였다. 국좌國佐는 빈미인賓媚人이라 변성명하고 진영晉營으로 갔다.

    극극郤克은 국좌國佐로부터 제齊나라가 뺏은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의 땅을 다 돌려주겠다며 화평할 것을 제의받고는 제齊나라가 패망하면 제齊나라 땅은 연합국의 땅이 될 텐데 어찌 그것으로 화평하자고 하느냐?라며 힐난詰難하고, 첫째, 소태부인蕭太夫人을 인질로 진晉나라에 보내고, 둘째, 제齊나라의 밭두렁과 논두렁을 진晉나라로 향하게 고치라는 화평 조건을 수정修正 제의하였다.

    그러자 국좌國佐는 그대의 조건은 화평하자는 조건이 아니라 화평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사생결단死生決斷하겠다. 비록 여의치 않아 패망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연합군인들 온전하리! 끝까지 해 보자.라며 크게 반발하고 진영晉營을 뛰쳐나가 버렸다. 제齊나라의 밭두렁과 논두렁을 진晉나라로 향하게 고쳐 놓으라는 것은, 화평을 맺은 후 다시 제齊나라가 배반할 경우 진군晉軍이 제나라를 신속히 치러 올 수 있게 길을 만들어 두라는 뜻이다.

    극극郤克은 국좌國佐와의 회담會談을 통하여, 진晉나라 입장에서는 동맹을 다지고 위세威勢를 과시한 점은 있지만, 승전한 결과로 얻을 가시적인 이익이란 것이 고작 기증과 옥경에 불과하자 대로하였다. 그러고는 극극郤克은 제齊나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을 들이밀며 국좌國佐를 도발하였다. 그러면 국좌國佐는 쩔쩔매며 통사정할 줄 알았는데, 그냥 뛰쳐나가 버리자 극극郤克도 내심 당황하였다. 그의 수정 제의는 한마디로 협상의 한 과정이요 협상 기술이었던 것이다.

    극극郤克과 마찬가치로 장막 뒤에서 강화 회담講和會談을 엿듣던 손양부孫良夫와 행보行父도 당황하였다. 그러나 둘은 회담장을 박차고 나간 국좌國佐의 돌출 행동 때문에 당황한 것이 아니라 강화 회담에 임하는 극극郤克의 강경한 태도에 당황한 것이었다. 둘은 국좌國佐의 화평 조건을 듣고는 지난날 뺏긴 자국自國 땅을 돌려받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잔뜩 품고 있었는데, 결국 극극郤克의 강경한 수정 제의로 강화 회담마저 무산霧散되자 크게 실망하고 당황한 것이었다.

    둘은 장막 뒤에서 나와 극극郤克에게 회담을 깨고 나간 국좌國佐를 맹비난하는 한편, 극극郤克의 회담 태도와 기술을 뛰어나다며 극찬한 후 전쟁이란 이겨야 하지만 승자나 패자나 그 피해는 마찬가지다. 지금 제齊나라를 계속 치면 승리야 하겠지만 연합군의 피해 또한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진晉나라 입장에서는 소득이 적겠지만 맹주盟主가 어찌 늘 이익을 따질 수 있느냐?라며 조심스럽게 제齊나라의 화평 제의를 받아들이자고 하였다.

    극극郤克은 국좌國佐가 나간 후 다시 제齊나라와 싸워야 한다는 것도 부담스러웠지만, 회담 즉석에서 정제整齊되지 않은 조건을 제시하여 회담 자체를 무산시켰다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더 부담스러웠다. 소태부인蕭太夫人의 인질 조건은 자신의 사감이 들어간 것 같아 괜히 찝찝하였다. 금번 전투는 자신의 중군 원수로써의 첫 전투였고, 협상 또한 처음인데 이렇게 끝내도 될 것인가 하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국좌國佐를 다시 불러오라고 하려니 이것 또한 중군 원수의 체면은 아니어서 극극郤克은 안절부절못하였다.

    그러던 중에 손양부孫良夫와 행보行父가 나서서 제齊나라의 화평 제의를 받아들이자고 하자, 극극郤克은 속으로는 반가웠으나 못 이기는 체하며 진군晉軍의 수많은 생명을 바치고서 고작 기증과 옥경을 들고 개선凱旋한다면 진후晉侯와 진晉나라 백성들이 나를 뭐라고 보겠느냐? 차마 진晉나라 중군 원수의 체면은 말이 아니지만 둘의 체면을 보아 다시 만나는 보겠다.라며 국좌國佐를 데려오라고 하였다.

    국좌國佐는 홧김에 회담장을 뛰쳐나오기는 했으나 빈손으로 제경공齊頃公이 머무는 원루爰婁로 돌아가려니 발걸음은 무거웠다. 차라리 회담을 깰망정 자기 입으로 소태부인蕭太夫人을 인질이라며 제경공齊頃公에게 어찌 보고할까 싶어 회담장을 뛰쳐나온 것은 후회스럽지 않았지만, 다시 진晉나라 공격을 견뎌야 할 제齊나라의 운명을 생각하니 자신이 성급했나 싶었다. 꾹 참고 극극郤克을 찾아가 다시 한 번 통사정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한 나라의 국모를 인질로 바치라는 진晉나라의 치욕적인 화평 조건이 바뀌지 않는 이상 별 소득은 없을 것이라고 자위하며 느릿느릿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진군晉軍의 사자가 뒤따라와 붙잡자 국좌國佐는 못 이기는 체하고 그를 따라 진영晉營으로 갔다.

    극극郤克은 손양부孫良夫와 행보行父를 자기 곁에 앉히고는 국좌國佐에게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제齊나라와 화평한다고 밝히자 국좌國佐도 크게 반겼다. 둘은, 제齊나라는 진晉나라를 섬기고 지난날 뺏은 노魯와 위衛 땅을 돌려주며, 진군晉軍은 제齊나라 백성들을 노략질하지 않고 회군하겠다는 조건에 합의合意하였다. 이어 둘은 7월에 원루爰婁에서 삽혈 맹세하였다. 극극郤克은 봉축보逢丑父도 석방해 주고 당당하게 개선凱旋하였다.

    진군晉軍이 개선할 때 사섭士燮이 맨 나중에 강성絳城에 입성하였다. 이에 사회士會가 왜 늦었느냐고 묻자, 사섭士燮은 개선군은 백성들의 환호歡呼를 받을 것인데 내가 먼저 입성하면 극극郤克이 받아야 할 백성들의 환호와 갈채喝采를 가로채게 될 것이고, 또 다른 장수들의 질시의 대상이 될 것 같아서 이를 피하고자 늦게 입성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회士會는 네가 이렇듯 겸양謙讓의 덕德이 무엇을 가져다주는지를 명확하게 아는 것을 보니 이제 나는 우리 가문이 화禍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덜었다.라며 기뻐하였다.

    진晉나라는 진문공晉文公 때만큼은 아니지만 패주伯主의 영광과 위세를 회복한 듯한 분위기였고, 극극郤克의 위상 또한 확고해져 진晉의 국사國事를 전단專斷하였다.

    기원전 588년, 제경공齊頃公이 진晉나라를 방문하여 진경공晉景公에게 옥玉을 바치려고 하자, 극극郤克이 달려 나가 이번에 공公이 와서 이렇게 옥을 바치는 것은 지난날 소태부인蕭太夫人이 나를 희롱한 것에 대한 사죄의 뜻이니 이는 진경공晉景公이 받을 것이 아니다.라며 제경공齊頃公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또 진경공晉景公이 베푼 연회에 제경공齊頃公이 참석했을 때 극극郤克은 제경공齊頃公에게 포로가 된 군주의 예로써 음식을 올리며 이는 제군齊軍이 패한 것에 대한 하사품이니 널리 휘하 군사와 관원에게 내려라. 이것이 지난날 나를 비웃은 부인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다.라며 조소嘲笑하였다. 극극郤克의 이 같은 방자放恣한 행동에 대하여 묘분황苗賁皇은 극극郤克은 용맹하지만 예禮를 모를 뿐만 아니라 자기 공을 과장하고 일국의 군주를 조롱하였다. 이러고서야 어찌 자기 지위를 오래도록 유지할까!라고 탄식하였다.

    기원전 588년 12월, 극극郤克은 진경공晉景公의 재가를 받아 3군에다 신 3군을 신설하여 6군으로 증군하였다. 진晉·제齊 전쟁에 공이 있는 장수를 경으로 삼아 신중군 대장新中軍大將에 한궐韓厥을, 부장에 조괄趙括을, 신상군 대장新上軍大將에 공삭鞏朔을, 부장에 한천韓穿을, 신하군 대장新下軍大將에 순추荀騅를, 부장에 조전趙旃을 포진布陣시켰다. 그러나 극극郤克은 기원전 587년에 병사, 난서欒書가 진晉나라의 중군 원수가 되었다. 

    이때 진晉나라는 신삼군 외에 중군 원수는 난서欒書가, 부장은 순수(荀首: 장자莊子. 순림보荀林父의 동생. 지계知季라고도 함)가, 상군 대장은 순경(荀庚: 중항선자中行宣子 순림보荀林父의 아들)이, 부장은 사섭士燮이, 하군 대장은 극기(郤錡: 구백駒伯. 극극郤克의 아들)가, 부장은 조동趙同이 맡고 있었다.

    2. 굴무屈巫의 계략計略

    하희夏姬는 양노襄老와 같이 살다가 양노襄老가 필邲 전쟁에 참가했다가 죽는 사이에 양노襄老의 아들 흑요黑要와 관계를 가졌다. 굴무(屈巫: 자령子靈)는 하희夏姬와 흑요黑要의 관계를 소문으로 듣고는 이 기회에 하희夏姬를 자기 여자로 만들려고 결심하였다.

    이에 먼저 굴무屈巫는 하희夏姬의 시녀侍女를 매수하여 하희夏姬가 정鄭나라로 가면 자기도 따라가서 하희夏姬를 부인으로 삼겠다는 뜻을 비밀리에 전하게 하고, 자기와 하희夏姬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한 계책計策을 일러 주었다.

    이어 굴무屈巫는 심복心腹 하나를 정鄭나라에 보내어 정양공鄭襄公에게 하희夏姬가 정鄭나라로 돌아오고 싶어 하니 초楚나라로 사람을 보내어 데려가라.라고 하고, 정鄭나라 사자가 초楚나라에 와서 할 말을 일러 주었다. 이에 정양공鄭襄公은 사자를 초楚로 보냈다.

    하희夏姬는 굴무屈巫의 계책에 따라 겉으로는 양노襄老의 시체를 찾는다며 정鄭나라로 떠나려고 하였다. 양노襄老의 시체를 찾지 못하면 결코 초楚나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까지 보여 하희夏姬가 정鄭나라에 가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로 이때 정鄭나라의 사자가 초楚나라에 와서는 초왕楚王에게 정鄭나라가 진晉나라로부터 양노襄老의 시신을 받을 계획이니 하희夏姬가 정鄭나라에 와서 인수하라.라는 정양공鄭襄公의 뜻을 전하였다.

    초왕楚王이 정鄭나라 사자를 내보낸 후 양노襄老의 시체가 진晉나라에 있는데 왜 정鄭나라가 주선한단 말이냐고 묻자, 굴무屈巫가 나서 순수荀首는 곡신穀臣 및 양노襄老의 시체와 자기 아들 순앵(荀罃: 무자武子. 지앵知罃이라고도 함)을 바꾸는 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러나 직접 나서 초楚나라와 교섭하려니 부담스러워 절친한 정鄭나라 대부 황술(皇戌: 황수皇戍라고도 함)에게 부탁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정鄭나라도 지난날 필邲 전쟁 때 진晉나라 편을 들지 않은 것 때문에 진晉나라의 보복을 당할까 봐 노심초사勞心焦思하다가 순수荀首의 청을 듣고는 진晉나라에 환심을 살 좋은 기회라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하희夏姬가 정鄭나라에 가기만 하면 곡신穀臣 및 양노襄老의 시체를 인수할 수 있다.라고 설명하자 초왕楚王은 하희夏姬가 정鄭나라에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굴무屈巫는 정鄭나라로 가는 하희夏姬 편으로 정양공鄭襄公에게 하희夏姬를 아내로 삼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초장왕楚莊王과 공자 측(側: 자반子反)이 하희夏姬를 데리고 살려고 한 것을 정양공鄭襄公은 꿈에도 몰랐고, 굴무屈巫와 정鄭나라가 이런 것을 꾸미는 줄을 초楚나라에서는 아무도 몰랐다.

    이어 굴무屈巫는 순수荀首에게 곡신穀臣 및 양노襄老의 시신과 순앵荀罃을 맞교환하되 이에 따른 일은 황술皇戌에게 부탁하라.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순수荀首는 황술皇戌에게 이를 부탁했고, 황술皇戌도 초공왕楚共王에게 맞교환을 제의하자, 초공왕楚共王은 이를 수락하였다. 이리하여 기원전 588년에 초楚나라는 순앵荀罃을 진晉나라로 돌려보냈고, 진晉도 곡신穀臣 및 양노襄老의 시신을 초楚에 보냈다. 사람들은 굴무屈巫의 말대로 진행되는 것을 보고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초공왕楚共王이 생환生還의 감회를 묻자, 순앵荀罃은 내가 부족하여 초楚나라의 포로가 되었으나, 나를 죽이지 않고 진晉나라의 패장敗將의 예에 따라 진晉나라에서 죽을 수 있게 해 준 것에 대하여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용서함을 받고 다시 국사를 보게 되어 초장楚將을 만난다면 사력死力을 다하여 싸울 것이다. 그것이 신하의 도리요, 또 나를 생환시켜 준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초공왕楚共王은 순앵荀罃을 칭찬하며 후히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한편, 순앵荀罃은 초楚나라에 잡혀 있을 때, 정鄭나라의 한 상인과 공모하기를 그 상인의 전대纏帶 속에 자기가 들어가서 초楚를 탈출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맞교환 방식으로 진晉나라에 귀환하는 바람에 그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 후, 순앵荀罃은 진晉나라를 방문한 상인을 알아보고는 그를 은인같이 대하려고 했으나, 그 상인은 어떻든 공이 없는데 공이 있는 척할 수도 없고, 따라서 그렇게 대접받을 수도 없다.라며 사양하고 진晉나라를 떠났다.

    기원전 589년, 초楚나라는 제齊나라가 진晉 연합군에 대패한 것에 대하여 제齊의 원수를 갚아 주겠다며 10월에 노魯나라와 위衛나라를 치기로 하였다. 이에 초楚의 뜻을 정鄭나라와 제齊나라에 전하기 위하여 두 나라에 사자를 보내려고 할 때, 굴무屈巫가 자청하자 초공왕楚共王은 그를 사자로 선임하였다. 굴무屈巫는 가산을 정리整理하여 10여 대의 수레에 실어 먼저 보내고 나서 정鄭나라로 떠났다.

    굴무屈巫가 정鄭나라로 가던 도중에 초楚나라의 도읍 영(郢: 호북성湖北省 강릉현江陵縣)으로 향하던 신숙궤申叔跪 부자를 만났다. 이때 신숙궤申叔跪는 굴무屈巫 일행의 모습을 보고 굴무屈巫는 출병을 독촉하기 위하여 떠나는 사자의 몰골이 아니다. 그에게는 사자로서의 신중함이나 경계심이 없다. 마치 뽕나무 밑에서 밀회密會하는 즐거움을 상상하는 얼굴이다. 장차 남의 여인을 훔쳐 달아날 상이다.라고 평하였다.

    굴무屈巫는 정양공鄭襄公에게 초공왕楚共王의 말을 전한 후 하희夏姬와 결혼하였다. 그러고는 초공왕楚共王에게 제齊나라에 가야 할 사명을 완수하지 못함을 사죄하는 글을 보낸 후 진晉나라로 망명亡命하였다. 이에 진경공晉景公은 굴무屈巫에게 대부 벼슬과 함께 형(邢: 하남성河南省 온현溫縣 동쪽)을 하사했고, 굴무屈巫는 ‘무신巫臣’으로 변성명하였다. 굴무屈巫는 처음에는 제齊나라로 달아나려고 했으나, 제齊나라가 진晉나라 연합군에 패한 것을 보고는 패전국敗戰國에는 가봤자 재미없다고 판단하고 진晉으로 갔다.

    측側은 무신巫臣이 하희夏姬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로하였다. 그러고는 초공왕楚共王에게 진晉나라에 뇌물을 쓰더라도 무신巫臣의 출셋길을 막아야 한다고 했으나, 초공왕楚共王은 비록 무신巫臣이 나쁘지만, 선왕先王 때의 충성忠誠을 봐서라도 그럴 수는 없다. 그리고 그가 진晉나라를 이롭게 한다면 뇌물을 아무리 많이 주더라도 진晉은 초楚의 말을 들을 리 없고, 그가 무익하다면 진晉 스스로가 버릴 텐데 굳이 뇌물을 쓸 필요는 없지 않으냐?라며 반대하였다. 그 후, 공자 영제(嬰齊: 자중子重)와 측側은 무신巫臣의 일족一族과 흑요黑要를 죽이고 그들의 가산을 몰수沒收, 나누어 가졌다.

    10월, 영제嬰齊는 초군楚軍을 이끌고 위衛나라를 거쳐 노魯나라로 쳐들어가 노군魯軍을 격파擊破하고 노魯의 촉(蜀: 산동성山東省 태안현泰安縣 서쪽)을 통과하여 양교(陽橋: 산동성山東省 태안현泰安縣 서쪽)에 이르렀다. 이에 노魯나라는 방직 기술자 100명과 대부 공형公衡을 인질로 보내며 화평을 제의提議, 영제嬰齊는 이를 수용受容하고 노魯나라와 강화하였다.

    11월, 영제嬰齊는 촉蜀에서 노성공魯成公, 채경공蔡景公, 허영공許靈公, 진秦나라의 열說, 송宋나라의 화원華元, 진陳나라의 공손영公孫寧, 위衛나라의 손양부孫良夫, 정鄭나라의 거질(去疾: 자량子良), 제齊나라의 대부 등과 결맹하였다. 그러나 초楚나라 외의 나라들은 진晉나라를 두려워하여 은밀히 초楚나라와 결맹했는데, 「좌전(左傳) 노성공(魯成公) 2년」조條에는 촉 회맹蜀會盟을 성의가 결핍된 회맹이라고 하여 ‘궤맹匱盟’이라고 하였다.

    무신巫臣은 영제嬰齊와 측側이 자기 일족을 죽이고 재산까지 몰수하자, 둘에게 서신을 보내어 헛되이 바삐 뛰어다니다가 죽게 만들리라고 저주하였다. 나아가 굴무屈巫는 초楚나라에게 복수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에 무신巫臣은 초楚 옆의 오吳나라를 움직여 초楚를 경계警戒하고 괴롭히기로 작정하고 진경공晉景公에게 장기적으로 진晉나라가 초楚와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오吳나라와 우호를 맺어야 한다.라고 진언, 진경공晉景公의 허락을 받아 기원전 584년에 진晉나라 사자 자격으로 오吳나라로 갔다.

    무신巫臣은 수몽壽夢과의 회담을 통하여 진晉나라와 오吳나라가 우호를 맺게 하고, 가지고 간 병거兵車와 기술자와 교관을 오吳에 넘겨주어 오군吳軍에게 병거兵車 모는 법과 진법陣法 전개 등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무신巫臣은 아들 호용狐庸을 오吳에 남겨두어 벼슬을 살게 하며 계속 진晉과 연락을 취하였다. 오吳나라는 초楚나라를 배반하고 초楚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발전하였다.

    이후, 무신巫臣은 진晉나라에서 죽었다. 호용狐庸은 다시 성을 굴씨屈氏로 고치고 오吳나라에서 굴호용屈狐庸으로 경卿까지 지내며 오吳나라의 국사를 맡았다.

    a0111 팩트체크 (fact-check) 중-110

    순앵荀罃과 곡신穀臣 및 양노襄老의 시신 맞교환 시기와 관련하여 『동주 열국지(東周列國志)』에는 명확한 묘사는 없고, 제57회에서는 초장왕楚莊王이 사망[「좌전(左傳) 노선공(魯宣公) 18년」조條에는 기원전 591년이라고 기록]하기 전, 즉 기원전 591년 전에 맞교환이 이루어진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진 세가(晉世家)」와 「좌전(左傳) 노성공(魯成公) 3년」조條에서는 기원전 588년, 즉 초공왕楚共王 때에 맞교환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맞교환에 있어 순앵荀罃이란 살아 있는 사람과 아무리 공자라지만 약 10년 가까이 방치되다시피 한 곡신穀臣(죽은 시기를 모르므로 시기는 특정特定할 수 없음)및 양노襄老의 시신을 교환했다는 교환 가치의 등가等價에서도 의문이 들지만, 무엇보다도 곡신穀臣이 죽은 것을 문제 삼지 않은 초楚나라의 행동이 의문스럭다.

    곡신穀臣의 경우 제54회에서는 순수荀首의 활을 오른팔에 맞고 생포되었다고 묘사하고 있고, 「좌전(左傳) 노선공(魯宣公) 12년」조條에서도 곡신穀臣은 순수荀首에게 생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분명히 곡신穀臣이 진晉나라로 잡혀 갈 때에는 살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주 열국지(東周列國志)』, 『사기(史記)』, 『춘추좌전(春秋左傳)』, 『국어(國語)』에는 곡신穀臣이 필邲 전쟁 때 전사했다거나 포로 생활 중에 죽었다는 묘사·기록은 없이, 제57회에서는 초장왕楚莊王도 자기 아들 공자 곡신穀臣의 시체를 찾고 싶었다., 진晉나라도 두 시신(양노襄老와 곡신穀臣)을 초楚나라에 보냈다.라고 묘사하고 있고, 「좌전(左傳) 노성공(魯成公) 3년」조條에서도 진晉나라 사람이 곡신穀臣 및 양노襄老의 시체를 초楚나라에 돌려주는 조건으로 순앵荀罃을 돌려받으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으로 보면 분명히 초楚나라도 곡신穀臣의 시신을 받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세자 또는 군위에는 올랐으나 시호諡號도 없이 골육骨肉이나 정적政敵에 의해 사라져 간 이들은 차치且置하고, 증(鄫: 산동성山東省 임기현臨沂縣 서남쪽)나라 증후鄫侯는 제물祭物로 희생犧牲되었고, 거기공莒紀公과 초성왕楚成王은 아들에 의해 시해되었으며, 노은공魯隱公, 송상공宋殤公, 정영공鄭靈公, 정소공鄭昭公, 노환공魯桓公, 제양공齊襄公, 송민공宋閔公, 노민공魯閔公 등은 측근側近에 의해 시해되었는데, 이 같은 시대 상황에서 처음부터 생환하리라고 기대조차 하지도 않았을 한낱 전쟁 포로의 생사를 논한다는 것이 다소 멋쩍기도 하지만, 협상을 통한 교환이었다는 점, 더 나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왜 초楚나라는 곡신穀臣의 죽음에 대하여 따져 묻지 않았을까 의문이 드는 것이다.

    3. 화친和親과 반목反目 사이

    기원전 587년 여름, 노성공魯成公이 진晉나라를 방문했을 때, 진경공晉景公이 노성공魯成公을 홀대했는데, 노성공魯成公은 화가 났으나 꾹 참았다. 가을에 노魯나라로 돌아가서는 진晉나라를 배반하고 초楚나라를 섬기려고 하였다.

    그러자 계손행보季孫行父가 나서 진경공晉景公이 비록 무도하나, 진晉나라는 크고 그 신하들이 화목하며 노魯나라와 가깝고, 다른 제후들도 진晉나라를 잘 따르고 있으니 아직 배반할 때가 아니다.라며 노성공魯成公을 달래었다. 그러나 행보行父도 진경공晉景公의 불손不遜함에 대하여 진경공晉景公은 자국을 위해서라도 제후들을 잘 다스려야 하거늘 이렇듯 불손하니 그는 반드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난非難하였다.

    정鄭나라는 기원전 597년에 초楚나라에 신복臣伏한 이후 기원전 595년 여름, 기원전 588년 봄, 기원전 587년 겨울 등 여러 차례 진晉나라가 이끈 연합군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줄곧 초楚나라를 섬겨 왔다. 그러나 정鄭나라가 허許나라와 무력 충돌까지 빚는 분쟁 과정에서 초楚나라가 허許나라의 편을 드는 바람에 정鄭은 초楚와 등지게 되었다.

    기원전 592년 1월에 허소공許昭公이 죽은 후 즉위한 허영공許靈公은 초楚나라만 믿고 정鄭나라를 무시하였다. 이에 정양공鄭襄公은 기원전 588년 여름에 거질去疾로 하여금 허許나라를 치게 하고 기원전 587년 11월에는 공손신(公孫申: 숙신叔申이라고도 함)을 보내어 점령한 허許나라 땅을 정鄭나라 땅으로 편입해 버렸다.

    이에 허영공許靈公은 대로하여 허군許軍을 이끌고 가서 전피(展陂: 하남성河南省 허창현許昌縣 서북쪽)에서 정군鄭軍을 격파하였다. 이번에는 기원전 587년 3월에 사망한 정양공鄭襄公에 이어 군위에 오른 정도공鄭悼公이 정군鄭軍을 보내어 서임·영돈(鉏任泠敦: 하남성河南省 허창현許昌縣 경계)을 점령하였다.

    필邲 전쟁 후 정鄭나라를 아니꼽게 보던 진경공晉景公은 정鄭나라와 허許나라의 분쟁에 개입하기로 하고 중군 원수 난서欒書, 중군 부장中軍副將 순수荀首, 상군 부장上軍副將 사섭士燮으로 하여금 허許나라를 돕게 하였다. 이에 진군晉軍은 정鄭나라를 공격, 범(氾: 하남성河南省 양성현襄城縣 남쪽)과 제(祭: 하남성河南省 중모현中牟縣)를 취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초공왕楚共王이 측側을 보내어 정鄭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정도공鄭悼公과 허영공許靈公은 측側에게 분쟁을 판결해 달라며 소訴를 제기했는데, 측側은 자기는 명확히 판결하기 어려우니 초공왕楚共王의 심판을 받으라고 중재하였다.

    기원전 586년 6월, 정도공鄭悼公이 초楚나라에 가서 허許나라와의 분쟁 전말顚末을 설명하며 허許나라를 징벌해 주기를 청했으나, 초공왕楚共王은 도리어 허許나라 편을 들고 심지어 정도공鄭悼公을 수행한 황술皇戌과 공자 발(發: 자국子國)을 감금까지 하자 정도공鄭悼公은 대로하였다.

    정도공鄭悼公은 귀국해서는 공자 언(偃: 자유子游)을 진晉나라에 보내어 정鄭나라와 화친和親할 것을 청하자, 진晉나라도 기뻐하며 정鄭나라의 요청을 수락하였다. 이에 8월에 수극(垂棘: 산서성山西省 노성현潞城縣 북쪽)에서 정도공鄭悼公은 진晉나라의 조동趙同과 결맹하고 진晉나라를 섬기기로 하였다.

    겨울, 진경공晉景公은 정鄭나라가 순복順服한 것을 크게 기뻐하며 제경공齊頃公, 송공공宋共公, 노성공魯成公, 위정공衛定公, 정도공鄭悼公, 조선공曹宣公, 주정공邾定公, 기환공杞桓公 등을 충뢰(蟲牢: 하남성河南省 봉구현封丘縣 북쪽)로 초청하여 결맹하면서 세를 과시하였다. 이때 다른 제후들은 모임을 더 연장하자고 했으나, 송공공宋共公은 국내 사정을 구실로 거절하였다.

    기원전 586년, 화원華元은 초楚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하던 공자 위구(圍龜: 자령子靈)가 돌아오자 그를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그때 위구圍龜는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화원華元의 집 대문을 나갔다가 또 그렇게 들어와서는 화씨華氏를 공격하기 위하여 연습하는 중이라고 하자, 화원華元은 크게 놀랐다. 그리고는 이를 송공공宋共公에게 보고하니 송공공宋共公은 어처구니없어 하며 위구圍龜를 죽여 버렸다. 송공공宋共公이 충뢰蟲牢 회맹 연장을 사절謝絶한 것은 바로 이 사건으로 국내가 불안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경공晉景公은 충뢰蟲牢 회맹 때의 송공공宋共公의 처사에 대하여 대로하였다. 이에 기원전 585년 3월에 백종伯宗으로 하여금 진군晉軍, 위군衛軍, 정군鄭軍 및 이수伊水와 낙수雒水에 사는 오랑캐까지 동원하여 송宋나라를 치게 하는 한편, 노魯나라에도 송宋나라를 치라고 지시, 가을에 노魯의 중손멸仲孫蔑과 숙손교여叔孫僑如도 노군魯軍을 이끌고 송宋을 쳤다.

    기원전 585년 봄, 정도공鄭悼公은 진晉나라를 방문하여 정鄭나라와 진晉나라가 화평하게 된 것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며 진경공晉景公에게 옥을 바쳤는데, 정도공鄭悼公은 너무 서두는 바람에 정해진 위치를 벗어나고 말았다. 이때 정도공鄭悼公의 태도를 본 사악탁(士渥濁: 정자貞子. 사정백士貞伯이라고도 함)은 자기 신분이나 직위를 저렇듯 망각하니 정도공鄭悼公은 조만간 죽을 것이다. 시선은 고정되지 않고 걸음걸이는 쫓기듯 서둘고 자리에 앉아서는 불안해하니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예언豫言대로 정도공鄭悼公은 그해 6월에 사망하였다.

    고대의 당상堂上에는 동서로 두 개의 큰 기둥이 마주 서 있었는데, 이를 동영東楹과 서영西楹이라고 하고, 두 기둥의 중간을 중당中堂이라고 하였다. 옥을 주고받을 때 주인과 손의 신분이 대등한 경우에는 중당中堂에서 수수授受하고, 손의 신분이 주인보다 낮은 경우에는 중당中堂과 동영東楹 사이에서 수수하였다. 진경공晉景公과 정도공鄭悼公은 대등한 관계로 중당中堂에서 옥을 수수해야 했으나, 정도공鄭悼公은 상대적으로 걸음걸이가 빨랐고 스스로 진경공晉景公보다 자기 신분을 겸양하여 중당中堂을 지나 동영東楹 쪽으로 많이 가서 진경공晉景公에게 옥을 바친 것이었다.

    기원전 585년 가을, 초楚나라 영제嬰齊는 정鄭나라가 배반했다고 하여 정鄭나라를 쳤다. 이에 진晉나라의 난서欒書가 정鄭나라를 구원하러 가서 요각(繞角: 하남성河南省 노산현魯山縣 동남쪽)에서 초군楚軍과 만났으나, 초군楚軍이 진군晉軍을 피하여 돌아가는 바람에 양군은 싱겁게 헤어졌다.

    난서欒書는 초군楚軍과 싸워 보지도 못하고 귀국하려니 멋쩍어서 오랫동안 초楚나라를 섬기고 있는 채蔡나라를 쳤다. 이에 초楚나라 공자 신申과 공자 성成이 신(申: 하남성河南省 남양현南陽縣 북쪽)과 식(息: 하남성河南省 식현息縣)군대를 이끌고 채蔡나라를 구원하러 와서 상수(桑隧: 하남성河南省 확산현確山縣 동쪽)에 포진, 진군晉軍과 대치하였다.

    이때 진晉나라의 중군 원수 난서欒書, 하군 부장下軍副將 조동趙同, 신중군 부장新中軍副將 조괄趙括 등 많은 장수들이 초군楚軍과 싸우자고 했으나, 중군 부장 순수荀首, 상군 부장 사섭士燮, 신중군 대장 한궐韓厥은 정鄭나라를 구원하러 와서 정鄭나라를 구원했으면 목적은 달성한 것이다. 초군楚軍과 싸워서 정鄭나라를 구원하는 것이 출병할 때의 의도였고 명분에도 맞는 일이다. 그러나 초군楚軍이 달아날 때에는 방관하다가 이제 와서 어찌 초군楚軍과 싸우려고 하는가? 목적을 달성하고도 채蔡나라를 치는 것도 명분에 맞지 않거늘 채蔡를 구원하러 온 초군楚軍과 싸우는 것은 출병할 때의 의도도 아니요 도리도 아니다. 비록 이긴다고 하더라도 이 싸움은 명분도 없고 실익도 없다.라며 강력하게 반대하니 난서欒書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귀국을 결정하였다.

    난서欒書의 결정에 대하여 어떤 이가 성인聖人은 대중이 원하는 바를 따르고 일이란 그 성취를 바라는 사람이 많을수록 쉽다. 그런데 초군楚軍과 싸우자고 하는 편이 많은데 어찌 세 사람의 의견에 따르느냐?라고 따지자, 난서欒書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으로 의견이 다 좋을 때에는 다수 의견을 따르지만, 주전론主戰論도 있고, 주화론主和論도 있는 식으로 그 의견에 시비와 선악善惡이 있다면 이를 어찌 다수라는 형식적 기준으로 판단하겠느냐? 그래서 집정자執政者가 괴로운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기원전 584년 가을, 초楚나라 영제嬰齊는 다시 초군楚軍을 이끌고 정鄭나라를 공격하고자 범氾에 주둔하였다. 이에 진晉나라는 제齊, 송宋, 위衛, 조曹, 거(莒: 산동성山東省 거현莒縣)나라, 주邾나라, 기(杞: 하남성河南省 기현杞縣)나라의 군사를 동원하여 정鄭나라를 구원하였다. 이후, 진晉 등 제후국諸侯國들은 거莒나라가 진晉에 복종해 온 것을 축하하고 충뢰蟲牢 회맹의 뜻을 다지고자 8월에 마릉(馬陵: 하북성河北省 대명현大名縣 동남쪽)에서 회맹하였다.

    정도공鄭悼公에 이어 즉위한 정성공鄭成公은 기원전 584년 봄에 진晉나라를 방문하고, 기원전 585년 가을에 초군楚軍이 정鄭나라를 침공했을 때 정鄭나라를 구원해 준 것에 대하여 사의謝意를 표하였다. 초공왕楚共王은 정도공鄭悼公 때에도 정鄭나라의 친진親晉 노선을 불쾌하게 여겨 수차 쳤는데, 갓 즉위한 정성공鄭成公마저 친진 성향을 띄자, 정성공鄭成公을 길들이려고 기원전 585년 가을에 이어 기원전 584년 가을에 다시 정鄭나라를 쳤던 것이다. 그러나 초군楚軍은 정鄭나라의 공중共仲과 후우侯羽가 이끈 군사에 패하여 체면이 크게 상하였다.

    기원전 583년 봄, 진경공晉景公은 한천韓穿을 노魯나라에 보내어 문양(汶陽: 산동성山東省 영양현寧陽縣 동북쪽)을 제齊나라에 돌려주게 하였다. 이에 행보行父는 한천韓穿의 전송연餞送宴에서 대국의 처사가 도의에 맞아야 제후들이 대국을 맹주로 믿고 두 마음을 품지 않는다. 그런데 대국의 처사에 신의信義가 없다면 그 누가 따를 것이며 대국은 어찌 제후들을 다스릴 것인가? 문양汶陽을 두고 이랬다저랬다 하는 진晉나라의 처사는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제후들의 마음이 떠나지나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다.라며 비판하였다.

    문양汶陽은 원래 노魯나라 땅이었는데, 기원전 589년 봄에 제齊나라에 빼앗겼다가 진군晉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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