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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라이즈 27권
메모라이즈 2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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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라이즈 2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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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is ebook

◆ 본 작품은 15세 이용가 개정판입니다 ◆

현대와는 다른 세상 홀 플레인.
김수현은 군 전역을 신고하고 집으로 귀가하던 도중 홀 플레인의 세상에 강제로 소환 당한다.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고 끝끝내 정상에 오르는데 성공하지만, 홀 플레인에서 활동한 10년의 세월은 이미 너무나도 슬픈 과거로 얼룩진 상태였다.
김수현은 슬픈 과거를 바꾸기 위해, 제로 코드의 힘을 10년의 시간을 되돌리는데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WHISTLE BOOK
Release dateJun 3, 2019
ISBN9791132757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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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라이즈 27권 - 로유진

    1. 죽도록 싸운 자는 살고, 죽도록 도망친 자는… (2)

    후우우우. 미치겠네.

    식사를 마친 후, 자리에서 나온 안현은 홀로 걸음을 옮겨 한적한 곳에 드러누웠다. 탁 트인 밤하늘을 보고 있음에도 절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식사 때부터, 아니 사실상 처음 일어났을 때부터 느껴졌던 미묘한 기분이 계속해서 전신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좋게 끝났는데.

    구덩이 공략도 성공했고, 동료들도 목숨을 구했는데.

    그런데 왜 자꾸 뜻 모를 기분이 느껴지는 걸까.

    왜 자꾸만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쇠사슬에 온몸이 꽁꽁 사로잡힌 듯하다.

    별안간 가슴이 터질 듯이 갑갑해져와 안현은 차분히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 구덩이를 들어갔을 때부터 광산 열차를 타고 구덩이를 나올 때까지. 통로를 지나치고, 괴물들과 전투를 하고, 거대한 괴물과 조우하고, 다른 괴물을 추격하고, 또다시 전투하고, 겨우겨우 이기고…….

    그때였다.

    …아.

    주현호와 전투했던 기억을 떠올린 순간, 안현은 저도 모르게 양 주먹을 꽉 쥐고 말았다. 허전한 기분이 더욱 강해졌다.

    뭐 하냐? 여기서 혼자.

    그러한 찰나, 어디선가 익숙한 저음이 들려왔다. 번쩍 눈을 뜬 안현은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용자를 보고는 크게 기함하고 말았다. 언제 왔는지 김수현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던 것이다.

    혀, 형?

    안현은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곧바로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괜찮아. 누워있어.

    김수현이 괜찮다는 듯 손을 젓더니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 피곤해 죽겠네.

    안현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 김수현이 몸을 비틀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안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 그동안 어디 계셨어요? 아까 식사 시간 때는 안 보이시던데.

    못 먹었어. 바빠서. 부상자들한테도 가봐야 했고, 또 요새를 건설할 적당한 장소도 찾아야 했으니까.

    예? 그걸 왜 형이……. 휴식 지시가 떨어졌잖아요.

    …쉴 필요가 없으니까.

    조용히 중얼거린 김수현은 돌연 스리슬쩍 눈매를 올리며 안현을 흘겼다. 안현은 본능적으로 침을 삼켰다.

    안현.

    예.

    변한 건 없어. 우리는 여전히 강철 산맥의 한가운데에 있고, 앞으로 얼마 동안은 쭉 이대로 있어야 해. 클랜 하우스로 돌아가서 탐험 하나 끝냈다고 축제하는 게 아니라.

    ……?

    너한테 하는 소리야. 구덩이 하나 공략했다고 끝이 아니라고. 즉, 이게 바로 공식 원정과 탐험의 차이지.

    그렇죠.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안현은 당연하다는 말투로 회답하자 김수현이 시답잖은 웃음을 흘렸다.

    그럼 왜 그러고 청승은 떨고 있냐? 꼭 꿈꾸는 사람처럼.

    제, 제가요?

    안현은 아니라는 듯 반문하면서도 가슴이 뜨끔해지는걸 느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그랬던가?

    확실히 안현의 몸 상태는 김수현의 말대로였으나, 이번 원정의 기초 목적은 잊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 묘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렇게 생각한 안현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저도 형이 말한 건 알고 있는데. 그냥 꿈만 같아요. 구덩이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

    흠, 그래? 왜. 무슨 충격적인 일이라도 겪었어?

    그런가? 모르겠어요. 뭔가가 잡힐 듯 말 듯하고, 무언가 충분하지 않은 기분도 들고……. 허전해요. 정말 왜 이러는 걸까요?

    …….

    안현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아서일까.

    그러고 보니 안현의 행동은 아까부터 꽤 이상해 보였다. 입은 힘없이 벌어져있고, 손은 자꾸만 의미 없이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으며, 몸은 느슨하게 풀려있다.

    하지만 두 눈은 일견 흐리멍덩해 보이면서도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 뜻 모를 빛을 언뜻 발하고 있다.

    정작 자신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지만.

    뭔가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는지 김수현이 약간은 가라앉은, 심원해 보이는 눈동자로 안현을 응시했다.

    그 상태로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김수현이 헛웃음을 흘리며 차분히 옆을 더듬었다.

    허 참. 설마 그런 건가?

    그런 거라니요?

    아니. 너 혹시…….

    예?

    그때, 느닷없이 안현에게 뭔가가 휙 날아와 복부에 떨어졌다. 미미한 충격. 안현이 어리둥절해하면서 복부를 더듬자 순간 장대 같은 게 잡히며 손아귀가 꽉 찬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안현은 숨을 꿀꺽 삼키며 눈을 살짝 떴다. 약간이지만 허전한 기분이 가셨다.

    지금, 싸우고 싶은 거냐?

    ……!

    그리고 김수현의 말이 이어진 순간, 안현은 삼켰던 숨을 크게 토해냈다.

    싸우고 싶다.

    그때처럼,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끌어낸 채로 싸워보고 싶다.

    안현은 저도 모르게 상체를 일으켰다. 갑작스럽게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깨는 기분이 들었다.

    나른한 몸에 느닷없이 찬물을 뒤집어쓰면 이런 기분이 들까?

    갑작스럽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머릿속의 안개가 걷혔다. 흐리멍덩하던 눈동자가 빛을 발한다. 이내 창을 꽉 움켜쥔 안현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주현호와 맞섰던 기억이 하나하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저 가르침 받았던 대로만 했을 뿐이었다. 검사로서의 버릇을 버렸을 뿐이었다.

    그러할진대 모든 게 변했다.

    시야가 변하자 상대의 행동 하나하나가 생각대로 움직였다. 창을 놀리면 상대는 마치 빨려들어 오듯이 창끝으로 걸려들었다. 그리하여 힘겨운 전투 끝에 승리를 거머쥔 것은 안현이었다.

    안현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깨어난 직후 내내 자신의 온몸을 사로잡았던 이상야릇한 기분의 정체를. 그것은 일종의 갈망이라 볼 수 있었다.

    말인즉, 또다시 그때처럼 싸우고 싶다는, 투쟁에 대한 갈망.

    안현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김수현은 낮은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땅을 짚어 살짝 허리를 젖힌 채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럼 어디 한번 들어볼까?

    ……?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라. 하나씩, 차분하게.

    …예.

    안현은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김수현이 요구한 대로 주현호를 추적할 때부터 겪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스스로 되짚어보자 무언가 차곡차곡 정리되는 것 같아 조금이나마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마음도 가라앉아 말도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김수현은 흥미롭다는 듯 안현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했다.

    그렇게 창을 찔러 넣자 갑자기 그놈의 가슴이 터지면서…….

    응? 잠깐만.

    ……?

    그러니까 주… 아니, 그놈을 이겼다는 말인가?

    예. 그렇죠. 그런데 말씀드렸듯이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어요.

    그래도 그놈을 거의 너 혼자서 상대했고, 또 이겼다고? 정말로?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목소리 어딘가에 기특하다는 투가 깔려있었다. 그 말투에 용기를 얻은 안현이 재차 머리를 끄덕이자 김수현이 헛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네가 그놈을 이겼다고……. 아무리 극심한 부상 상태였다고는 하지만, 이건 정말 엄청난데. 믿을 수 없을 정도야.

    에, 그 정도예요? 그 정도로 놈이 강했어요?

    꽤. 아마 놈이 최상의 상태였다면 우리 클랜에서도 맞상대할 수 있는 사용자가 거의 없을 거야. 아마 남다은 정도는 되어야 할걸?

    헐.

    아니, 어쩌면 남다은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지도 몰라. 처음 2, 30분 정도는 우세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을 끌면 끌수록 질 확률이 높아지겠지.

    거, 검후님도요?

    물론 제대로 붙어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네가 상대한 놈은 그 정도로 강한 놈이었다고.

    …….

    김수현이 안현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기실 방금 분석은 김수현이 남다은의 내구 능력치가 낮다는 것을 아는 상태라 꺼낼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안현으로서는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김수현이 정확한 지표를 제시해 주자 막연하던 것이 슬슬 감이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추가로 시간이 흐르고, 안현은 광산 열차를 탔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

    사정을 들은 김수현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머리를 주억이며 몸을 일으켰다. 이내 바로 몸을 돌릴 기세라 안현은 재빠르게 김수현을 붙잡았다.

    저, 형. 잠시만요.

    …왜?

    그……. 재룡이 형은 괜찮으시겠죠?

    응? 소식 못 들었어? 목숨에 문제없다고.

    김수현이 어깨를 으쓱였으나 안현은 여전히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들었어요. 그런데 아직 정신이…….

    어쩔 수 없지. 거의 죽음 문턱까지 갔다 왔는데. 아무튼 걱정 마. 엘릭서까지 먹였으니 괜찮을 거다.

    그때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안현은 김수현의 눈에 뜻 모를 복잡한 감정이 스치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이상하게 피곤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형도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안현은 곧 자신이 잘못 보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수현이 시선을 지그시 내렸을 때, 달빛에 비친 낯은 언제나처럼 무덤덤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엘릭서를…….

    상관없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어차피 너랑 한결이한테 사용할 거, 마르랑 신재룡 씨한테 사용한 셈 치면 되니까.

    하하. 아, 아픈 기억을…….

    …….

    음……. 저, 그러니까…….

    …….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가 겉돌기 시작했다.

    김수현은 잠시 침묵을 지켰으며, 안현은 계속해서 말을 더듬고, 흐렸다. 마치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남았다는 것처럼.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자꾸 이리저리 돌리지 말고.

    그래서 김수현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을 때 안현은 고마운 마음까지 일었다.

    안현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사실 말을 하면서 어느 정도 풀어내기는 했지만, 가슴은 아직도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야기는 그저 감정의 정체를 확인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싸우고 싶다는 투쟁의 감정.

    뭔가 자꾸 초조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창이 없어 허전한 감정을 느꼈던 것도, 모두 그러한 이유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잠시 후, 안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형. 사실 그때 전투를 하면서 새로운 능력 하나를 깨우쳤거든요

    신검합일, 아니 신창합일이랬지? 축하해. 아주 쓸 만한 능력이야.

    한순간 안현이 흠칫했다. 그러나 곧 아까 이야기할 때 꺼냈음을 상기하고는 차분히 호흡을 골랐다. 어쨌든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크게 상관없는 문제였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가슴속에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불덩이를 어떻게든 꺼트리는 것.

    그래서…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뭘. 지금 네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어느덧 김수현은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안현은 느릿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물론 수준을 확인하고픈 마음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욱 확인해 보고 싶은 건…….

    형의 진심이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습니다.

    비로소 안현이 자신의 진심을 토해내었다.

    그와 동시에 처음으로 김수현의 얼굴이 변화했다. 안현의 태도에 깃든 진심을 읽어낸 것이다.

    진심.

    상황에 따라 여러 용도로 해석할 수는 있으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김수현이 안현이 말한 뜻을 모를 리가 없다.

    요컨대.

    …감당할 수 있겠냐?

    나직한 중얼거림이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안현은 처음으로, 김수현에게 처음으로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격한 반발심. 그것은 더 이상 김수현을 좇는 것을 그만두고 오롯한 창병의 길을 걷기로 한 기공창술사가 가지는 감정이었다. 즉, 김수현의 말은 안현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모르겠습니다. 저 또한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안현은 간신히 호흡을 추스르며 회답했다. 하지만 약간 날 선 어조는 숨기지 못했다.

    잠깐이나마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정적이 흘렀다.

    김수현과 안현의 시선이 교차하고, 둘 사이로 보이지 않는 불꽃이 부딪친다.

    정적의 시간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나쁠 것 없지. 좋다.

    마침내 김수현의 허락이 떨어졌다.

    일어나.

    곧바로 이어진 서릿발 같은 어조에 안현이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이내 두 사내가 천천히, 동시에 서로 몇 걸음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안현이 창대를 부드럽게 잡으며 정면으로 창을 겨냥했다. 신창합일을 발동하자 흑빛 일색이던 창의 전신에 새하얀 빛이 칠해졌다.

    그리고 김수현은 천천히 허리를 굽히고는 지면에 돋은 잡초 하나를 꺾어 들었다. 그걸 보는 안현의 눈이 한 번 거세게 꿈틀거렸다.

    잠시 후, 잡초도 새하얗게 물들며 은은한 빛을 흘리기 시작했다.

    …형.

    검 꺼내라는 소리는 하지 마라.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대련이 아닌, 정말로 진심을 원하는 거라면… 건방지다고 생각되니까.

    …….

    정 억울하면 네가 직접 꺼내게 만들어봐.

    그리고.

    더 이상 말은 필요 없겠지. 그럼 간다.

    그 말이 들려온 순간.

    ……!

    무척이나 갑작스럽게 김수현의 기세가 일변했다. 그저 뜬구름 같던 기운이 삽시간에 폭발적으로 휘몰아치며 인근을 장악해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윽고 김수현의 두 눈이 섬뜩한 빛을 뿌려내는 순간, 안현은 돌연 온 세상이 멈춘 듯한 착각을 느꼈다. 갑자기 눈이 빠질 듯한 고통이 느껴지고, 몸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냥 가만히 서있을 뿐인데 무형의 기운이 전신을 옥죄어 오는 기분.

    보이지 않는 칼끝이 온몸을 사정없이 찔러대는 기분.

    안현의 직감은 확실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죽는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지만, 그래도 안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전의를 불태웠다. 어차피 실력 차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자 안현을 노려보던 김수현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호. 그냥 입만 산 건 아니었나 보군.

    김수현이 기특하다는 목소리로 칭찬했다. 그러나 지금의 안현으로서는 하등 기쁘게만은 들을 수 없는 칭찬이었다.

    그에 발끈한 안현이 창을 살짝 아래로 흘렸다. 주현호 때 얻었던 경험을 되살린다. 신중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예전처럼 도발당했다고 성급하게 달려드는 게 아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두 수, 세 수 앞을 대비한다.

    상대는 머셔너리 클랜 로드.

    사용자 김수현이다.

    이내 머릿속에 하나의 그림을 그린 안현이 약간 몸을 기울인 찰나였다.

    갑작스럽게 김수현이 먼저 움직였다.

    퍽.

    채 반응할 틈도 없었다.

    그냥 무언가가 보였다.

    그게 전부였다.

    억…….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려내었다.

    약 1초 후 안현이 느낀 것은 어느새 몸이 허공을 날고 있다는 것. 그리고 복부에서 뒤늦게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것. 그러니까…….

    씨잉!

    당한 건가, 라 생각하기도 전에 옆으로 서늘한 바람이 짓쳐들었다.

    안현이 날아가는 와중에도 겨우 창을 들 수 있었던 것은 이대로 있으면 정말로 죽는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반응이었다. 바람결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잡초가 새하얀 잔상을 남기며 안현을 사선으로 훑는다.

    서걱!

    쨍그랑!

    단 일격에 호신강기가 부서졌다. 안현은 돌연 손아귀가 쫙 찢어지는 감촉을 느꼈다. 미처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몸이 허물어지는 것도 모자라, 땅바닥을 데구루루 구르기까지. 그나마 칭찬할 게 있다면 용케 창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과 바닥을 구르자마자 체술을 이용, 곧장 몸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머리가 핑핑 돈다거나 아픔은 차치해야 할 문제였다.

    그냥 차원이 다르다.

    안현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지금껏 상대해 왔던 적들이 김수현을 앞에 두고 어떤 기분을 느껴야만 했는지를.

    그것은 절망, 아니 죽음 그 자체였다.

    말 그대로 압도적인 공포.

    주현호? 비교할 수도 없다. 진심인 김수현과 맞상대를 하느니 차라리 알몸으로 주현호 100명과 대치하는 게 몇 배는 더 나으리라.

    사실상 안현은 이미 두 번이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안현은 몸을 날리는 와중에도 흘긋 시선을 돌리며 김수현의 위치를 확인했다.

    왼쪽으로 1미터.

    확인한 순간, 안현은 바로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가만히 있으면 당할 게 뻔히 보였거니와, 우선 머릿속 그림을 가다듬을 생각이었다.

    아니, 김수현을 상대로 그림을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 수를 보이기도 전 시작부터 박살 내 버리는데, 아무리 잘 그린 그림이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안현이 미간을 크게 찡그렸다. 그러면 남은 방법은 결국 하나.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뿐.

    그렇게 생각하며 간신히 자세를 추스른 찰나.

    …….

    안현은 그대로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서늘한 기운을 품은 잡초가 목 부근을 간질이고 있었기에.

    전, 좌, 우 방향 모두 김수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말인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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