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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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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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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is ebook

평범한 사람이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는 검증된 길

200년간 ‘미국의 정신’을 완벽히 대변해온 인생의 지혜를 읽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는 미국에서도 ‘미국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인물로 존경받고 있으며, 무에서 시작해 맨손으로 여러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루어낸 사람이다.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이라고는 초등학교 2년이 전부였으나, 21세에 인쇄 일을 배우면서 성실과 근면함을 기반으로, 순전히 독학으로 짧고 명료한 글쓰기 능력을 연마했고, 글에 대한 안목 덕분에 인쇄업자로 성공했다.
그는 부유하지 않았고 대단한 권력도 없었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남다른 학습 능력을 발휘하며 근면과 절약과 인내로 홀로 일어섰다. 작가, 우체국장, 발명가, 시민운동가, 정치인이자 외교관 등으로 활동했고, 정치와 과학 등에서도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그는 일상의 불편함을 적극 개선하고 새로운 것을 배워 이웃의 유익을 위해 자기 지식을 최대한 선용한, 실용적 지혜자였다.
지난 200년 동안 막스 베버나 데이비드 흄, 카를 마르크스 등 위대한 사상가와 실천가들도 이 자서전의 탁월함을 인정했다. 실제로 프랭클린이 자서전에서 밝힌 절제와 근면 등 13가지 덕목은 발간 후 200년이 넘는 동안 자기계발의 키워드로 자리 잡는다. 많은 미국인은 이 덕목을 따라 실제로 성공했고, 그가 제시한 성공의 길은 인생 공식이 되었다. 이러한 상징성으로 벤저민 프랭클린은 미화 100달러 지폐의 모델로 앞면에 등장한다. 그의 인생이 ‘미국의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낸다는 의미다.
현대에도 여전히 중요하게 여기는 시간 관리, 자기 관리, 인간관계 관리, 습관의 힘, 인격 성장, 공공의식, 실용정신, 개척정신, 신뢰라는 자산, 지식 축적 등에 관한 중요한 원리와 실천 사례를 우리는 프랭클린의 삶을 통해 발견하고 체득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직간접적으로 밝힌 몇 가지 삶의 원리 중 하나라도 받아들여 적용해본다면 누구라도 자기 분야에서 큰 진전을 경험하고, 일가를 이루게 될 것이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현대지성
Release dateAug 1, 2022
ISBN9791139707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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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 - 벤저민 프랭클린

    벤저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 1706-1790

    1706년 미국 보스턴에서 청교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자라 정규 학교 교육은 초등학교 2년이 전부였으나, 10세부터 아버지의 양초 제조업을 돕기 시작하여, 12세부터는 형 제임스의 도제로 인쇄업에 입문한 뒤, 17세인 1723년 독립적인 삶을 꿈꾸며 필라델피아로 떠났다. 필라델피아에서 21세에 본격적으로 인쇄업을 시작하고, 23세부터 신문사 발행인으로 성공하며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인쇄업자로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독학으로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라틴어 등을 익혀 스스로 지성을 넓혀나갔다.

    그 후로는 개인적인 행복에 매몰되지 않고 사회 발전에 눈을 돌려 43세에는 훗날 필라델피아 대학교가 되는 교육 기관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교장까지 지냈다. 또 회원제 도서관(25세), 필라델피아 최초의 소방서 설립(30세) 등에 관여하며 시민운동가로도 맹활약했다. 과학자로서는 프랭클린 난로를 발명했고(36세), 번개와 전기가 같은 성질을 띤다는 것을 실험으로 입증함으로써 피뢰침을 발명하기도 했다(46세).

    1748년 필라델피아 시의회 의원을 시작으로(42세), 정치에 뛰어든 그는 1776년 미국 독립선언 준비를 위한 기초 위원으로서 활동하고(70세), 주프랑스 대사로서 미국과 영국의 평화조약 체결을 위해 프랑스의 원조를 얻어내는 데 크게 공헌했다(70~79세). 나아가 말년에는 미국 헌법을 기초하기 위한 제헌회의에서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활동했다(81세). 런던에서 미국 식민지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식민지 연방을 위해 일한 공로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 최초의 미국인이란 별칭을 얻었다.

    이처럼 프랭클린은 인쇄업자, 작가, 우체국장, 발명가, 시민운동가, 정치인이자 외교관 등으로 활동한 만능인이었고, 정치와 과학 등에서도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또한, 절약과 근면, 교육의 힘과 공동체 정신 및 자치를 중시하고, 정치와 종교의 독선을 경계하며, 계몽주의와 관용적인 가치를 우선시하는 미국적인 정신을 정립하는 데 디딤돌을 놓았다.

    옮긴이 강주헌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고 프랑스 브장송 대학에서 수학했다. 번역의 탁월성을 인정받아 2003년 ‘올해의 출판인 특별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영어와 프랑스어 전문 번역가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습관의 힘』, 『문명의 붕괴』, 『12가지 인생의 법칙』, 『슬럼독 밀리어네어』,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미국 산책』, 『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 등 100여 권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 『기획에는 국경도 없다』, 『강주헌의 영어번역 테크닉』 등이 있다.

    표지 그림 〈미국독립선언문〉, 존 트럼불 作. Declaration of Independence, John Trumbull(1756–1843), 미국, 1819년.

    독립선언문 초안위원회 소속 5인이 의회에 초안을 제출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그림 중앙에 서 있는 5명은 왼쪽부터 차례로 존 애덤스, 로저 셔먼, 로버트 리빙스턴, 토머스 제퍼슨, 벤저민 프랭클린이다. 미화 2달러 지폐 뒷면에도 이 그림이 있으며, 원본은 미국 국회 의사당 원형 홀에 걸려 있다.

    incover

    일러두기

    1. 『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은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 사후에야 출간되었다. 흥미롭게도 첫 판본은 파리에서 프랑스어로 『벤저민 프랭클린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회고』라는 제목으로 1791년에 발간되었으나 일부 내용만 들어 있었다. 법률가이자 역사학자였던 존 비글로(John Bigelow)는 프랑스에서 프랭클린이 직접 쓴 필사본을 우여곡절 끝에 입수해 최초로 내용 전체가 포함된 자서전을 1868년에 출간했다.

    2. 이 책은 번역 대본으로 다음 원서에 사용된 본문을 기준으로 삼았으며, 원문에 없는 장 구분 등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편집자가 붙인 것이다.

    Autobiography of Benjamin Franklin, Edited from his manuscript, with notes and an introduction, by John Bigelow (Philadelphia: J. B. Lippincott & Co.; London: Trübner & Co., 1868).

    3. 본문에 나온 인물 생몰연대는 모두 옮긴이가 붙인 것이다.

    1부

    윌리엄 프랭클린에게

    1771년 트와이퍼드, 세인트애서프 감독관에서

    돌이켜 보면 크나큰 행복을 누렸기 때문이겠지만, 삶을 다시 살 기회가 내게 주어진다면 처음부터 같은 삶을 살겠노라고 말해왔다. … 하지만 똑같은 삶을 다시 사는 일은 허락되지 않기에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회고하는 것도 그 삶을 다시 사는 것에 버금가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 회고를 될 수 있으면 오랫동안 유지하고자 기록으로 남겨두려 한다.

    1장

    보스턴의 조상과 청소년기

    사랑하는 아들에게,

    나는 예전부터 조상들의 소소한 일화를 수집하는 걸 좋아했다. 너와 함께 영국에 갔을 때 내가 그곳 친척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던 걸 기억할지 모르겠구나. 그때 영국 여행도 조상 관련 일화를 수집하려던 게 목적이었다. 내가 그랬듯, 너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싶으리라 생각한다. 너는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거의 알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마침 시골에서 일주일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어 너에게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자리에 앉았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다. 나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이제는 상당히 풍족하고 세계적으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크게 성공했지만, 후손들은 내가 성공하는 데 어떤 방법들을 사용했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후손들이 내 이야기를 읽고 각자 처지에 맞추어 적합한 방법을 찾아 따르면 되지 않을까 싶다.

    돌이켜 보면 크나큰 행복을 누렸기 때문이겠지만, 삶을 다시 살 기회가 내게 주어진다면 처음부터 같은 삶을 살겠노라고 말해왔다. 물론 저자들이 개정판에서 초판 오류를 수정하듯 오류를 고칠 기회만큼은 요구하고 싶다. 오류를 바로잡을 뿐만 아니라 불운했던 사고와 사건을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더라도 여전히 똑같은 삶을 살겠느냐고 제안해오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똑같은 삶을 다시 사는 일은 허락되지 않기에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회고하는 것도 그 삶을 다시 사는 것에 버금가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 회고를 될 수 있으면 오랫동안 유지하고자 기록으로 남겨두려 한다.

    여느 노인네들이 흔히 그러듯 나도 과거에 내가 어떠했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말하고 싶지만, 순전히 노인을 존중한다는 마음으로 내 말을 의무적으로 듣게 하려는 식의 부담은 주고 싶지 않기에, 읽든 말든 너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글로 남김으로써 그 욕심을 채우려 한다. 끝으로 내가 부인한다 해도 믿지 않을 테니까 차라리 솔직히 고백하는 편이 나을 듯해 덧붙이자면, 회고록을 작성하면서 내 허영심도 꽤 채워지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내가 듣고 읽은 바에 따르면 절대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이란 말 뒤에 곧바로 자랑이 뒤따르지 않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랑은 실컷 늘어놓으면서 남의 자랑은 듣기 싫어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를 자랑하는 일이 꽤 생산적이라고 생각하므로 나는 언제 어디서든 자기 자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공정하게 대하고자 노력해왔다. 삶의 많은 위안거리 중에서 허영심을 주신 것에 하나님께 감사하더라도 그것이 큰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내친김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말을 해야겠다. 과거에 누렸던 내 모든 행복이 하나님의 자상한 섭리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분의 섭리로 성공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얻었음을 겸허한 마음으로 인정한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선하신 하나님은 앞으로도 내가 계속 행복을 누리도록 하실 것이고, 주제넘게 그분의 뜻을 넘겨짚어선 안 되겠지만, 다른 사람처럼 운명적으로 역경을 만나더라도 나를 지켜주시리라 소망한다. 내 미래가 어떠할지 누가 알겠는가? 미래는 오직 하나님만 아실 뿐, 그분의 권능 아래서는 고통마저도 축복이다.

    가족 일화를 수집하는 데 나만큼 관심이 많았던 삼촌이 있었다. 그가 언젠가 나에게 공책을 하나 건넸고, 거기 적힌 기록을 통해 우리 조상과 관련된 몇몇 사항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우리 가문이 노샘프턴셔 지방의 엑턴이란 마을에서 3백 년간 살았다는 걸 알았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살았을 수도 있지만, 삼촌도 확실하게는 몰랐다. 어쩌면 그때 왕국 전역에서 모두가 성(姓)을 갖게 되면서 전에는 계급을 지칭하던 ‘프랭클린’(Franklin, 귀족은 아니지만 자유인 지주)이 바로 성이 되었을 수도 있다.

    우리 가문은 약 3~4만 평 땅을 보유하고 있었고(프랭클린은 여기에 주를 붙일 계획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옮긴이), 대장간 일을 부업으로 삼고 있었다. 대장간 사업은 삼촌 때까지 계속되었고, 항상 장남이 가업을 이어받았다. 삼촌과 나의 아버지도 장남에게 가업을 잇게 해 풍습을 따랐다. 엑턴에서 호적부를 조사했는데 그 교구에서 있었던 출생과 결혼, 사망과 관련된 기록이 1555년 이후 것만 남아 있고 이전 것은 없었다. 호적부 조사 결과, 나는 5대째 막내아들의 막내아들임을 알게 되었다.

    나의 할아버지인 토머스는 1598년에 태어나 나이를 먹어 더는 일을 할 수 없을 때까지 엑턴에서 살았고, 그 후 옥스퍼드셔 밴버리에서 염색업자로 일하던 아들 존의 집으로 옮겨가 살았다. 나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도제로 일하며 염색 일을 배웠다.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고 묻혔다. 우리가 1758년에 할아버지 묘비를 보러 갔던 거 기억하니? 할아버지의 장남 토머스는 엑턴에 있는 집에서 살았고, 그 집과 땅을 외동딸에게 물려주었는데 웰링버러의 피셔 가문으로 시집간 외동딸은 그 유산을 지금 그곳 영주인 이스테드 씨에게 팔았다. 할아버지는 네 명의 아들, 즉 토머스와 존, 벤저민과 조사이아를 두었고, 그들 모두 건강하게 자랐다. 지금 내게는 그 공책이 없어서, 내가 기억하는 것만 얘기해줄 수 있구나. 내가 없는 동안 그 공책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네가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찾도록 해라.

    토머스 백부(伯父)는 할아버지에게 대장장이 훈련을 받았지만, 워낙 영리해서 당시 교구 유지였던 파머 씨의 후원을 받아 공부한 덕에(그의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증인 자격을 얻었고, 나중에는 지역에서 상당히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어 자치주, 즉 노샘프턴과 그의 고향에서 공공사업에 앞장섰다. 그래서 우리가 엑턴에 갔을 때 토머스 백부와 관련된 많은 일화를 들을 수 있었지. 토머스 백부는 당시 핼리팩스 경의 눈에 들어 상당한 지원을 받았다. 그분은 구력(舊曆)으로 1702년 1월 6일, 그러니까 내가 태어난 날보다 정확히 4년 전에 세상을 떠났단다. 우리가 엑턴에서 몇몇 노인들에게 그분의 삶과 성격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나와 너무도 닮았다며 깜짝 놀라던 네 모습이 기억나는구나. 그때 네가 아버지가 태어나신 날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그분이 환생하신 거라고 했겠는데요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존 중부(仲父)는 염색 기술을 배웠는데, 내 생각에는 모직물 염색이었을 것 같다.

    벤저민 삼촌은 런던에서 도제로 일하며 견직물 염색을 배웠단다. 벤저민 삼촌은 무척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내 기억 속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어렸을 때 벤저민 삼촌이 보스턴으로 아버지를 만나러 와서 몇 년간 우리와 함께 살았기 때문이지. 삼촌은 장수했고, 그분 손자인 새뮤얼 프랭클린은 지금 보스턴에 살고 있다. 벤저민 삼촌은 간혹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보낸 시들을 모아놓은 4절판 공책 두 권을 유산으로 남겼더구나. 나에게 보낸 시를 예로 들면(‘여기에 그 시를 옮겨놓을 것’이라고 해놓고, 프랭클린은 원고에 시를 덧붙이지 않았다—옮긴이) 벤저민 삼촌은 속기법을 직접 고안해 나에게 가르쳐주었단다. 하지만 나는 그 이후 전혀 연습을 하지 않아 지금은 완전히 잊고 말았다. 그의 이름을 따서 내 이름을 지었을 만큼 벤저민 삼촌과 아버지와의 형제애는 특별했단다. 벤저민 삼촌은 신앙심이 무척 깊어 훌륭한 목사들의 설교를 듣고 속기법으로 기록한 공책을 상당히 많이 남겼다. 벤저민 삼촌은 자신의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게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지. 나는 얼마 전 런던에서 삼촌이 1641년부터 1717년까지 공공 문제와 관련된 내용을 소책자로 만들어놓은 문집을 구할 수 있었다. 매겨진 번호를 보면 문집 중 상당수가 빠진 걸 알 수 있지만, 아직 2절판 8권, 4절판과 8절판이 24권이 남아 있다. 내가 가끔 들리곤 하던 헌책방 주인이 우연히 그 책들을 발견하고는 나에게 보내주었던 게지. 벤저민 삼촌이 미국으로 떠날 때 그 문집을 두고 간 게 분명한데, 그렇다면 50년도 더 된 것이다. 여백에 삼촌이 짤막하게 남긴 글도 눈에 띈다.

    우리 가문은 특별히 내세울 건 없지만 초창기부터 종교개혁에 참여했고, 메리 여왕 시대에도 프로테스탄트적인 믿음을 고수하며 가톨릭에 격렬히 저항했던 탓에 때로는 큰 곤경과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조상들은 영어로 쓰인 성경을 안전하게 감추려고 조립식 의자 틀 안쪽 아래에 책을 펴서 끈으로 묶어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내 증조부의 아버지, 그러니까 고조부가 가족에게 성경을 읽어줄 때는 조립식 의자를 뒤집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 끈 아래로 책장을 넘기며 읽어야 했다. 그때마다 아이 중 한 명이 문가에 서서 종교 재판소의 명령을 집행하는 관리가 오는지 망을 보았다. 집행관이 코앞까지 오면 조립식 의자를 다시 원래대로 뒤집었고 성경책은 감쪽같이 의자 밑에 감추어졌다. 이런 일화는 벤저민 삼촌에게서 들은 것이다. 우리 가문은 줄곧 영국 국교회 소속이었다. 찰스 2세 시대가 끝날 때쯤 국교회 교리를 따르지 않아 파문된 목사 중 일부가 노샘프턴셔에서 비밀리에 종교 집회를 열었을 때도 가족들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벤저민 삼촌과 나의 아버지는 그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고 그 후로도 비국교도로 살았다. 하지만 나머지 가족들은 영국 국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나의 아버지 조사이아는 젊어서 결혼했고 1682년경 아내와 세 자녀를 데리고 뉴잉글랜드로 이주했다. 비국교도의 비밀 집회는 법으로 금지된 데다 뻔질나게 방해를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비롯해 많은 지인이 뉴잉글랜드로 이민 가자고 유혹했다. 그곳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으리란 기대감에 아버지는 지인들과 함께 뉴잉글랜드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뉴잉글랜드로 이주한 뒤 같은 부인에게서 자녀를 네 명 더 두었고, 둘째 부인에게서 10명의 아이를 낳아 모두 17명의 자녀를 두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모두가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해 결혼한 13명의 자녀와 함께 한 식탁에 앉아 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나는 뉴잉글랜드 보스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지만, 여동생이 둘 있었다. 나의 어머니 어바니아 폴저는 둘째 부인이었고, 초기에 뉴잉글랜드로 이민을 와 정착한 이민자 피터 폴저의 딸이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역사학자 코튼 매더(Cotton Mather, 1663~1728)는 뉴잉글랜드 교회사를 다룬 책 『그리스도가 미국에서 이룬 위업Magnalia Christi Americana』에서 피터 폴저를 독실하고 학식이 깊은 영국인으로 높이 평가했다. 그분이 이따금 잡다한 주제로 짤막한 글을 썼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런 글 중 하나만 출간되었고 나도 오래전에 그 글을 보았다. 그 글은 1675년 당시 시대상과 사람들에 관해 쓴 소박한 시로 정부 관계자들에게 보낸 것이었다.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고 침례교나 퀘이커교도 등 박해받던 교파에 도움을 주려고 쓴 시였다. 또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인디언과의 전쟁이나 그 밖의 재앙들은 이런 박해 때문이고, 극악한 범죄를 벌하려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박해와 관련된 무자비한 법을 폐지하라고 촉구한 시였다. 마지막 여섯 행은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하지만 처음 두 행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구나. 여하튼 그 연의 요지는 그의 질책이 순전히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그가 시를 지은 저자라는 걸 밝히겠다는 것이었다.

    글로 남을 비방하는 게

    나는 정말 싫으니

    지금 내가 사는 셔번 마을에서

    내 이름을 밝히려 한다.

    어떤 적의도 없는 그대의 진실한 친구,

    그 이름은 피터 폴저.

    내 형들은 각자 다른 직종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다. 아버지가 교회에 십일조 하는 마음으로 아들 중 한 명을 성직자로 키우고 싶었던지, 나를 여덟 살에 문법 학교에 보냈다. 글을 읽지 못했던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면 나는 무척 어린 나이에 글을 깨우친 듯하다. 내가 틀림없이 훌륭한 학자가 될 거라는 아버지 친구들의 한결같은 칭찬도 아버지의 뜻에 힘을 실어주었다. 벤저민 삼촌도 아버지의 결정에 찬성하며 자기가 속기로 기록한 설교집을 나에게 모두 주겠다고 약속했다. 아마도 내가 삼촌의 속기법을 배우려면 그 설교집을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하지만 나는 문법 학교를 채 1년도 다니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해 입학한 학급의 중간쯤이었지만 점차 일등으로 올라섰고, 게다가 위 학년으로 월반까지 했다. 또 그해 말에는 학습 수준을 맞추기 위해 3학년으로 월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사이에 아버지는 생각이 바뀌었던지 나를 문법 학교에서 데리고 나와 쓰기와 산수를 가르치는 학교에 보냈다. 대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까닭에 학비를 부담할 만한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보기에 교육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반드시 넉넉하게 사는 건 아니라는 이유였다. 아무튼, 내가 듣는 데서 아버지는 친구들에게 생각을 바꾼 이유에 대해 그렇게 설명했다. 그 학교 운영자인 조지 브라우넬 씨는 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고, 온유하면서도 용기를 북돋워 주는 교수법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였다. 그의 지도 덕분에 나는 글쓰기 솜씨가 빠르게 늘었지만, 이상하게도 산수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열 살이 되었을 때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수지 양초와 비누를 제조하던 아버지 일을 돕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처음부터 그 일을 했던 것은 아니다. 뉴잉글랜드로 이주했을 때 본래 하던 염색 일 주문이 없어 가족을 부양하기 어려워지자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일이었다. 나는 양초 심지를 잘라내고, 양초 만드는 틀에 촛농을 붓고, 가게를 지키거나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했다.

    나는 그 일이 싫었다. 내 마음은 늘 바다를 향해 있었지만, 아버지는 내가 바다를 가까이하는 걸 한사코 반대했다. 하지만 바다 가까이에 살았던 까닭에 바다를 접할 기회는 많았다. 따라서 일찌감치 수영을 배웠고, 배 조종법도 익혔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보트나 카누를 타고 놀 때면 주로 내가 대장 노릇을 했고, 특히 곤란한 상황을 만나면 더더욱 그랬다. 다른 때도 거의 늘 내가 대장이었고 때때로 친구들을 곤란한 지경에 빠뜨릴 때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공적인 일에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긴 하지만, 사실 당시 제대로 한 일은 아니었다.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연못 한쪽 끝에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소택지(沼澤地)가 있었다. 바닷물이 들어오면 우리는 그 끝에서 피라미를 잡곤 했다. 우리가 마구 첨벙거리고 다니는 바람에 소택지는 온통 진창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 서서 낚시할 수 있는 둑을 만들자고 친구들에게 제안하며 소택지 옆에 새로 집을 지으려고 갖다놓은 돌무더기를 가리켰다. 둑을 쌓기에는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돌무더기였다. 해가 지고 인부들이 하루 일을 끝내고 돌아간 뒤 나는 친구들을 불러모았고, 그들과 함께 개미처럼 부지런히 돌을 날랐다. 때로는 돌 하나에 두세 명이 달라붙어 옮기기도 하면서 마침내 모든 돌을 지고 날라 우리만의 작은 둑을 쌓았다. 이튿날 아침, 인부들은 돌이 몽땅 사라진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지만, 곧 그 돌들이 우리 둑에 사용됐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고는 돌을 옮긴 범인을 찾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가 범인임이 밝혀졌다. 우리는 인부들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었고, 몇몇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벌을 받기도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 일의 유용성을 역설했지만, 정직하게 행해지지 않는다면 어떤 경우에도 유용하지 않다는 가르침을 받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쯤에서 너도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성품의 소유자였는지 알고 싶지 않을까 싶구나. 할아버지는 체질적으로 매우 건강했고, 키는 중간 정도였지만 균형 잡힌 몸매에 무척 강인한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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