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
By Ithaka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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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is ebook
뭔가 특출한 것이 손예 라프와 그녀의 사랑하는 소, 아나벨을 이어준다. 그러니 손예의 손자가 소를 빼앗으러 왔을 때 그녀는 당연히 녀석을 막으려 한다. 단, 문제가 있다. 무엇이 이들 관계를 그렇게 마법 같게 하는지 알아차린 손자 녀석은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르려 하는데...
Ithaka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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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preview
우유 - Ithaka O.
1
가파른 언덕을 뛰어오르던 손예는 밭에서 일하는 저놈의 게으른 농부들을 노려볼 힘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랴, 맹렬한 태양은 그녀의 뒷목을 태웠고, 그녀는 내일이면 구십 세가 될 노인이었다. 그녀가 저들 나이었을 땐—삼십인지 오십인지, 이십인지 사십인지, 정말이지 정확한 숫자는 상관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 중요한 건 저들이 그녀 나이의 절반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인데—이렇게나 헐떡거리며 힘겨워하는 할머니 근처에 있다가 눈에 띄기만 해도 예의범절을 망각한 애들을 두들겨 패 정신을 차리게 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이 말이다. 하지만 요즘 애들은 어떠한가? 그녀 나이의 절반인 애들은? 머리가 하얗게 센 노부인을 돕겠다고 나서는 일 따위는 없었다. 저런 놈들이 좀 아프고 부상을 입었다고 귀한 소의 귀한 우유를 준 걸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를 지경이었다.
어쩌면 저들에게는 손예가 전혀 뛰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지도 몰랐다. 저들에게는 그녀의 ‘속도’가 전혀 속도감 있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하긴, 손예는 어릴 적부터 느림보로 알려지긴 했었다. ‘발이 무거운 손예.’ 그게 과거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부르던 말이었다. 아주 예전에 죽은 마을 사람들 말이다.
참나, 그래도 그렇지, 지금 여기 있는 마을 사람들, 그러니까 참말로 살아있는 데다가 비교적 어리기까지 한 작자들 눈에는 뻔히 보여야 하는 게 아닌가? 이렇게나 가슴을 들썩이며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느라 애쓰는데? 소리가 안 들리나? ‘달리다’라는 단어의 정의가 절대적 속도에 의존하는 것은 말도 안 됐다. 만약 그래야 한다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아니고서야 그 단어를 쓰는 걸 금지시켜야만 했다. 그에 비하면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다 너무 느릴 테니까. 구십 년 동안 매우 세심히 다듬어온 손예의 견해에 따르면 ‘달리다’라는 단어는 그 행위를 행하는 자가 얼마나 무리하느냐에 의해 좌우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저놈의 젊은 농부들한테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 했다.
‘아, 손예 할머니가 그저 산책하거나 한가롭게 거니는 게 아니라 달리고 계시고, 도움이 필요하시구나.’
지금이야말로 아나벨의 우유가 한 잔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불가능한 것을 어쩌랴! 게다가 인간들한테 뭘 그만 바랄 때도 됐는데. 손예는 사랑하는 소 아나벨과 함께 거의 한평생을 엘뎀 마을을 불필요한 질병과 슬픔으로부터 지켜내는 데 썼건만, 저 젊은것들은 알 턱이 없었다. 지난 세월의 마을 사람들이 ‘발이 무겁다’는 말을 하면서도 그게 얼마나 문자 그대로의 진실을 담고 있는지는 몰랐던 것처럼.
매미들만이 변함없는 윙윙 소리로 그녀 곁을 지켰다. 녀석들은 두꺼운 느티나무 잎 사이에 숨어 있었다. 엘뎀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수십 년도 전부터 엘뎀 곳곳에서 자라던 나무들이었다. 이 정도 단거리는 단숨에 달리던 시절을 생각하며 손예는 눈을 따갑게 찌르는 땀을 닦아냈다.
아니, 적어도,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주 오래된 스웨터의 해어진 소매로 얼굴을 슬쩍 털어내는 꼴이 되고 말았다. 땀 몇 방울이 입 안으로 들어갔다. 맛이 씁쓸하고 짰다. 너무 간절해하는 맛이 나기도 하고. 손예 자신처럼 말이다. 너무 늙었는데 너무 고집은 세며, 포기하기에는 너무 성이 난.
우유를 좀 가지고 다녔어야 했는데. 남용과 과용,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탐욕이 두렵더라도 작은 유리병에 조금이라도 가지고 다녔어야……
언덕 꼭대기에서 슬픈 음매 소리가 들려왔다. 헉 소리가 절로 났다. 손예의 소 중 어떤 녀석이 운 걸까? 개처럼 청각이 고도로 발달되었더라면 좋았으련만, 물론 그렇지 않았다. 아나벨이 운 것 같다고 생각만 할 뿐이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손예는 오래된 스커트를 끌어 올렸다. 조금 더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자 자갈로 덮인 앞마당에 세워진 차가 보였다. 동네 도살자인 티엘로의 낡은 왜건이었다. 앞베란다에는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손예의 손자인 헤릭이었다. 그는 스마트폰인지 뭐시기라고 불리는 것 하나를 뚫어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