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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라이즈 7권
메모라이즈 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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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라이즈 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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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작품은 15세 이용가 개정판입니다 ◆

현대와는 다른 세상 홀 플레인.
김수현은 군 전역을 신고하고 집으로 귀가하던 도중 홀 플레인의 세상에 강제로 소환 당한다.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고 끝끝내 정상에 오르는데 성공하지만, 홀 플레인에서 활동한 10년의 세월은 이미 너무나도 슬픈 과거로 얼룩진 상태였다.
김수현은 슬픈 과거를 바꾸기 위해, 제로 코드의 힘을 10년의 시간을 되돌리는데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WHISTLE BOOK
Release dateJun 3, 2019
ISBN9791132757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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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라이즈 7권 - 로유진

    1. MenTal IllNess (2)

    김승범의 말이 끝나고 나서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동자로 여성을 바라보았다. 여성은 당혹한 표정으로 내 시선을 피했고,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김승범은 내 표정을 확인했는지 한층 유들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뭐, 사용자고 부랑자 관계니 은혜 운운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피차 쓸데없는 싸움은 피하자 이거지. 솔직히 이 연놈들을 잡느라 우리도 피해가 아주 없지는 않거든. 우리는 애초에 목적 달성해서 좋고, 너희는 손 더럽히지 않고 꼬리 처리해서 좋고. 싸움을 원한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하지만 서로 이러는 게 누이 좋고 매부 좋잖아. 그러니 이만 물러나자고.

    으음.

    나는 침음성을 흘리며 살짝 검을 내렸다. 김승범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고, 최주현은 갈등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서서히 열리는 게 보였다.

    속지 말아요! 이 남자와 함께 있는 부랑자들, 그렇게 크게 다치지 않았어요. 기껏해야 한두 명. 거의 압도적일 만큼 순식간에 당했어요. 가서 절대 경계를 풀지 마시고……. 으윽!

    최주현은 말을 매듭지을 수 없었다. 김승범이 다시금 그녀에게 발길질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몸을 웅크리는 그녀를 보며 그는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가련하고 처량해 나는 이쯤에서 쿵짝을 맞춰주기로 했다. 더는 상황을 끌어도 콩트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만하지. 부랑자.

    철컥!

    나는 내렸던 검을 다시 들어 힘주어 겨누었다. 신나게 발길질을 하던 김승범은―여담이지만 가짜로 때리는 게 아니었다. 아마 평소에 김승범이 최주현한테 많은 감정이 있었던 것 같았다― 우묵한 눈동자로 나를 돌아보았다.

    뭐냐. 그 검은. 서로 좋게 해결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그러더군. 부랑자와는 그 어떤 타협도 하지 말라고.

    하. 이래서 0년 차 햇병아리들은 안 된다니까. 융통성이 없어요. 융통성이.

    말실수 하나 발견. 굳이 0년 차 사용자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아무튼 이로써 나는 마음속에 있던 혹시나 하는 마음을 깨끗이 지울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욱 거리낄 게 없었다.

    네 말대로 저 사용자를 곱게 보는 건 아니야. 하지만 어쨌건… 넌 확실히 적이다.

    뭐, 굳이 벌주를 마시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후회하지나 말라… 윽!

    김승범은 어깨를 으쓱인 후 허리를 굽혔다. 자신이 벗어놓은 옷가지와 장비들을 챙기려는 모양이었다. 막 그의 손길이 얇은 검에 닿으려는 찰나, 그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이 X년이?

    내가 다시 검을 겨누는 걸 확인한 순간, 최주현은 잽싸게 두 팔을 뻗어 김승범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는 오버 액션을 하며 쿠당탕 넘어졌고, 최주현은 그 틈을 타 재빨리 무기를 집고 장비들을 크게 헤쳐버렸다.

    하아.

    그리고 나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고작 다리를 잡았는데 크게 넘어졌다는 것과 그녀가 집은 검이 남성 사용자가 사용하는 무기치고 극히 얇다는 것.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게 편할 것 같았다.

    최주현은 비틀거리면서도 꿋꿋이 일어났고, 나 또한 그에 화답해 놈과의 거리를 서서히 줄였다. 김승범은 재빠른 몸놀림으로 몸을 일으키고는 빠르게 뒤로 훌쩍 몸을 날렸다.

    한동안 나와 최주현, 그리고 김승범 사이에는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이쪽은 무기를 들고 있고, 김승범은 무기는커녕 나체로 서 있는 상태였다.

    이윽고 이를 까득 깨문 그는 제길. 두고 보자!라는 상투적인 말을 남기고 수풀 안으로 사라졌다. 얼른 그를 뒤쫓으려는 자세를 취하자 곧바로 내 옷깃을 붙잡는 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가지 마세요! 저것도 함정일지 몰라요. 분명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도망쳤을 거예요.

    흠.

    그녀의 외침에 나는 주춤하고는 막 달리려던 자세를 다시 풀었다. 이대로 들어가면 확실히 놈들의 계획대로일 텐데, 왜 막은 걸까.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리고 최주현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쯧쯧. 참으로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그러게 왜 따라오셔서…….

    조금은 노려보는 듯한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자 최주현은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그리고 정말로 후회한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윽고 거의 주저앉다시피 한 그녀는 내게 거듭 사과의 말을 건네며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오열했다. 그리고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처음부터 자신이 저지른 일을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고단한 삶. 그 와중 새로 뮬에 들어온 사용자를 보게 되었고, 나날이 갈수록 달라지는 장비들에 나쁜 마음을 먹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몰래 우리들의 뒤를 밟던 도중 자신들을 뒤따라오던 부랑자 무리들에게 당하고, 다른 동료들은 전부 죽고 자신만 살아남아 부랑자들에게 붙잡혔다는 것까지.

    최주현의 말을 들으며 나는 조금 감탄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나를 이곳으로 유인한 놈과 이 계획을 짠 놈은 다른 놈일 게 분명할 것이다. 진심으로 자신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계획을 잘 짤 수는 없을 테니까.

    확실히 고연주의 말대로 놈들 중에 제법 신중한 놈이 섞여있는 것 같았다. 우리를 바로 덮치는 게 아니라 혹시라도 있을 성과―유적 등―도 노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만일을 대비해 최주현을 슬쩍 끼워 넣으려고 했을 것이다.

    물론 그녀를 이대로 버리고 갈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냥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해서 0년 차 사용자의 인정에 기대는 계산을 했을 것이고. 아마 내가 이대로 그녀를 버리는 순간, 나는 돌아가는 와중에 분명히 습격을 받을 테지.

    거짓 속에 진실을 섞었고, 진실 속에 거짓을 섞었다. 각본은 제법 잘 지었다고 칭찬하고 싶지만, 놈들이 간과한 게 몇 가지 있었다. 그건 바로 상대가 나라는 것과 배우들의 연기력 미달, 즉 실수라고 할 수 있었다.

    나야 산전수전 공중전 시가전까지 겪은 10년 차 사용자고, 더구나 음지에서 활동한 만큼 웬만한 꼼수는 척 보면 척이었다. 그러나 만약 진짜로 0년 차 사용자였다면, 아니 이 자리에 있는 게 내가 아닌 애들이었다면 정말로 모르는 일이었다.

    돈과 장비에 눈이 너무 멀어서요. 흑흑. 그런데 동료들은 전부 죽었고 남은 장비라고는……. 어엉.

    그녀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애처로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나는 구슬피 우는 최주현을 물끄러미 보다가 한층 누그러든 얼굴로 천천히 다가섰다.

    최주현은 한동안 서럽게 울었다. 그러나 내가 위로도, 또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자 스스로 조금씩 울음을 그치기 시작했다. 점차적으로 잦아드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깐 동안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애초에 이곳에 들어왔을 때 공격을 받거나, 아니면 뒤따라가서 함정에 빠지는 스토리를 예상했는데. 하지만 놈들은 이렇게 한 명을 우리 쪽에 포함시키겠다는 식으로 한발 물러서고 말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아무튼 나 또한 대응 방식을 조금 변경하기로 했다. 아마 지금쯤 주변에서 쥐 죽은 듯 보고 있을 터. 그렇다면 되레 뛰쳐나오게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주현은 양 볼에 그득한 눈물 자국을 슥슥 지우고는 목 메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냥 죽을 생각으로 있었는데, 도와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려요. 이왕 이렇게 살게 되니 저도 사용자 이전에 한 명의 사람인지라 조금 욕심이 생기네요. 그러니 한 번만 더 보호를 해주시면 안 될까요? 방금 전 부랑자들은 분명히 다시 습격해 올 거예요. 저와 일행이 저지른 일은 정말 죄송하지만 허무하게 당한 동료들의 복수를 하고 싶어요.

    내가 곤란해하는 표정을 봤는지 최주현은 한층 애처로운 얼굴로 애걸했다. 그 말인즉슨 내 일행에 자신을 포함시켜 달라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그렇게 해줄 생각은 없었고, 해서 나는 그대로 최주현의 양팔에 손을 얹었다. 최주현은 몸을 살짝 움찔거렸다.

    사정은 딱하지만, 어떻게 보면 당신도 그 부랑자들과 똑같은 사용자입니다. 그런 사용자를 함부로 일행에 받아들이는 건 많이 곤란하네요.

    하지만 이대로 다시 혼자가 되면 저는 틀림없이 다시 습격을 받을 거예요. 아니면 몬스터들한테 변변한 저항도 못해보고 쓰러지겠죠.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건 알아요. 그래도 최소한 부랑자들이 다시 왔을 때 한쪽에서 거들기만이라도 하게 해주세요. 조금이지만 놈들의 정보도 알고 있는 게 있으니 분명히 도움이 될 거예요.

    대본을 외우듯 줄줄 읊는 그녀를 보며 나는 앞으로 한 걸음 더 옮겼다.

    깊은 밤. 깊은 산속. 그리고 알몸으로 서 있는 여성 사용자. 그렇게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나는 찬찬히, 위에서 아래로 그녀의 얼굴과 몸을 살폈다.

    최주현의 얼굴은 제법 예쁘장하다고 볼 수 있었다. 현대에서는 충분히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법한 미모였다. 잠시 동안 품평하듯 쳐다보던 나는 조금 비열하게 들릴 수도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글쎄요. 굳이 그런 것들이 아니라도 당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은데요.

    히죽 웃어도 주현의 얼굴 표정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이런 행동도 계산 안에 두고 있었던 건가. 그녀는 곧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눈을 슬쩍 내리깔았다. 그리고, 조그마한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이미 버린 몸. 보호만 확실히 해주신다면……. 좋아요.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나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최주현을 품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애초에 영입할 생각이었다면 당장에 옷이라도 걸쳐줬을 것이다.

    이쯤에서 슬슬 시작하자는 생각에 나는 상냥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네요. 싫어요.

    네?

    싫다고요. 안고 싶지 않아요.

    그, 그게 무슨. 아니, 그럼 어떻게…….

    최주현은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거렸다. 나는 재빠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양팔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녀는 아픔을 느끼는 듯 미약한 신음 소리를 흘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귓가에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바로 이렇게.

    말을 끝내고 곧바로 팔을 잡은 손에 크게 힘을 주었다.

    뿌지직!

    무언가 거칠게 뜯어지는 소리와 동시에 외마디 비명이 공터를 크게 울린다. 최주현은 갑작스러운 해체에 균형을 잡지 못한 듯 몸을 휘청거렸다. 나는 양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툭 떨어트리고는 그녀의 머리채를 붙잡아 똑바로 세워주었다.

    아아. 흐아악. 흐아아악!

    주, 주현아!

    최주현의 고통에 찬 비명 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수풀 안에서 검은 인영이 훌쩍 뛰어나왔다. 조금 전 보았던 김승범이 다급한 얼굴로 튀어나오는 게 보였다. 아마도 내가 따라가지 않자 가는 척만 하고 주변에 숨어있었던 것 같았다.

    김승범은 경악에 찬 얼굴로, 그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너, 너 이 자식!

    어. 다시 왔네. 부랑자.

    무슨 짓이야! 이 개자식아!

    응? 아. 네가 그랬잖아. 얘가 우리들 따라온 애라며. 그래서 죽이려고 이랬지. 왜?

    아파! 아파아! 도와줘! 승범아, 도와줘어어어! 아아아악!

    능글능글한 얼굴로 묻자 김승범은 일순 말문이 막힌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최주현의 비명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이를 빠득 깨물며 으르렁거렸다.

    놈! 좋은 말로 할 때 주현이를 이리 내놔라. 조금이라도 더 손을 대는 순간, 네놈을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뭐야. 실컷 하던 놈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설마 그새 정이라도 든 거야?

    잔말 말고 당장 그녀를 이쪽으로 보내라. 크윽!

    김승범은 정말로 단단히 화가 난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순순히 대답했다.

    알았어. 줄게.

    나는 천천히 최주현의 목으로 손을 옮겼다. 내 손이 이동할수록 놈의 얼굴에 이상함이 물들었다. 그리고 사슴 같은 그녀의 목이 손아귀에 잡히는 순간, 나는 정지연에게 그랬던 것처럼 힘차게 주먹을 쥐었다. 내 근력 능력치 94포인트를 전부 동원해서.

    카득, 카드득!

    껙! 께엑!

    자. 여기.

    툭. 데구루루.

    부러지다 못해 아주 작살이 난 목덜미를 나는 마치 볼링 하듯 굴려 놈에게로 보냈다. 목에서 흘러나온 피는 가느다란 혈선을 그리며 풀밭을 데굴데굴 굴렀다. 김승범은 굴러오는 머리를 멍하니 보다가 이내 크게 충격을 먹은 듯한 얼굴로 서서히 무릎을 꿇었다.

    주, 주현아.

    주현이였구나. 이름 한번 예쁘네.

    아, 아니야, 이건. 이럴 리 없어. 주현아. 주현아? 대답해, 주현아. 주현아. 주현아? 주현… 주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연신 여성의 이름을 부르던 김승범은 곧 처절하게 절규하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는 걸 보니 곧 나에게 달려들 모양새.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차분히 검을 들었다. 오자마자 저 꽥꽥거리는 입에 검을 쑥 찔러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김승범.

    막 내게로 달려오려는 김승범을 제지하는 허스키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바위, 나무, 수풀 등 이곳저곳에서 하나씩 몸을 드러내는 인영들이 보였다. 드디어 메인이벤트의 등장이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렇다면 김승범과 최주현을 합쳐 총 일곱 명이라는 소린가. 아까 제3의 눈을 활성화시키면서 어느 정도 파악을 해두었기 때문에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놈들의 클래스와 능력치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흠.

    별거 없군. 나름 연차와 능력치가 되는 놈들이 있었지만, 딱 그뿐이었다. 엄밀히 말해 내 상대가 되는 놈들은 없었다. 해서 나는 한층 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무신 차승현이 800명의 사용자를 앞에 두었을 때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내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김승범은 온몸을 바동거리며 자신을 붙잡은 손길들을 뿌리치고 있었다.

    저놈이, 저놈이 주현이를!

    알아. 아무래도 우리의 계획이 간파당한 것 같다. 그러니까 일단 진정해. 어차피 놈은 우리에게 포위돼 있어.

    눈앞의 사용자는 푸근한 인상을 갖고 있었지만, 한구석에 어두운 그늘을 갖고 있었다. 그의 다독거림을 받은 김승범은 한 번 숨을 크게 몰아쉰 후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

    지금 보니 어느새 녀석은 간단한 옷과 본래 자신의 무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처음의 울부짖던 눈동자가 살기 어린 시선으로 바뀌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검사 한 명, 궁수 한 명, 도끼 전사 한 명, 마법사 한 명, 전투 사제 한 명, 일반 사제 한 명. 지금은 사망한 최주현까지 합하면 나름 괜찮은 캐러밴이라고 볼 수는 있었다. 이윽고 맨 처음 모습을 드러낸 마법사 사용자가 음울한 얼굴로 내게 말을 걸었다.

    설마 우리들의 속셈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불침번을 바꿀 때 조금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런 꿍꿍이가 있었군.

    후후. 네 계획도 제법 괜찮았어. 배우들의 연기력이 문제였지만.

    가증스러운 놈. 웬만하면 새로운 성과를 발견할 때까지 그냥 놔두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군. 어디 한번 우리에게 붙잡히고서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보겠다.

    붙잡는다고? 처참하게 죽이는 게 아니라?

    음울한 놈의 말에 김승범이 날카롭게 반문하자 그는 음침한 목소리로 키득 웃었다. 아무래도 김승범만 제외하고 다른 놈들은 나름 태연한 걸 보니 확실히 부랑자가 맞기는 한 것 같았다. 그리고 김승범은 최주현의 연인 비슷한 관계일 테고.

    걱정 마. 결국에는 다 죽일 거니까. 하지만 그전에 이놈을 붙잡고 곧바로 다른 놈들을 덮친다. 남자 놈들은 모두 죽이고 여자들은……. 흐흐흐. 전에 도시에서 봤는데, 제법 괜찮은 년들이 있더군. 복 받은 놈들이야.

    웃기지 마.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주현이는 내……. 크윽. 난 바로 죽여야겠어.

    자, 자. 진정하라고. 나라고 함께하던 동료가 죽었는데, 아주 감정이 없는 건 아니야. 일단 이놈 사지를 잘라놓고 놈이 보는 앞에서 똑같이 해주는 거야. 그리고 마지막에는 눈앞에서 하나씩 목을 잘라주는 거지. 어때?

    이 말에는 꽤 솔깃했는지, 김승범은 얼굴을 찌푸린 상태로 몸을 멈췄다. 그리고 이내 한두 번 고개를 주억이고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좋아. 그것도 나쁘지 않군. 아니, 아주 좋은 생각이야. 똑같이 되돌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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