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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흑역사: 세계 최고 지성인도 피해 갈 수 없는 삽질의 기록들
과학자의 흑역사: 세계 최고 지성인도 피해 갈 수 없는 삽질의 기록들
과학자의 흑역사: 세계 최고 지성인도 피해 갈 수 없는 삽질의 기록들
Ebook398 pages4 hours

과학자의 흑역사: 세계 최고 지성인도 피해 갈 수 없는 삽질의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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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is ebook

천재 과학자들의 바보 같은 실수들이 빚어낸 유쾌한 과학의 역사
“과학은 진보하지만, 인간의 어리석음은 끝이 없다”

과학자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가? 흔히 냉철하고 철두철미하게 연구를 계속해나가는 사람 혹은 괴짜이면서 아주 천재적인 인물이 생각난다. 하지만 과학자들도 때로는, 아니 아주 자주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질러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들도 때로는 누군가를 시기하며 부도덕한 판단을 내리고, 자신의 편협한 의견을 고집하다가 엄청난 발견을 놓치기도 했다. 호킹, 아인슈타인, 케플러와 뉴턴 등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만한 위대한 과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성실하게 연구에 매진했던 이들일수록 성공보다 실패 횟수가 훨씬 많았다.
이 책에 나오는 과학자 26명의 흑역사와 시행착오는 우리가 인생에서 비슷한 실수를 하지 않도록 지혜를 준다. 또한, 각각의 일화에 관한 저자의 해박한 설명과 분석을 통해 독자들은 과학사 전체를 조망하는 지식과 통찰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현대지성
Release dateSep 16, 2021
ISBN9791166819704
과학자의 흑역사: 세계 최고 지성인도 피해 갈 수 없는 삽질의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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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자의 흑역사 - 양젠예

    1장 호킹이 이런 짓을 하다니!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신도 주사위 놀이를 한다. 때로는 찾을 수 없는 곳에 주사위를 던지기도 한다.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1942~2018)

    1981년에 바티칸 교황청 과학원에서 우주학 토론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영국의 위대한 우주학자 스티븐 호킹이 참석했고, ‘무경계 우주론’ 이론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각국 과학자들은 호킹의 이론을 열렬하게 지지했지만, 이 이론에는 분명한 반종교적 함의가 있었다. 그 때문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 1978년에 즉위)가 어떻게 반응할지가 사람들의 관심사였다. 우주에 경계가 없다면 하느님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교황은 이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과학자들은 교황 접견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마침내 접견일이 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과학자와 이들의 배우자는 교황의 피서지 카스텔 간돌포로 초청됐다. 성은 수수했고 성벽 바깥은 온통 농토와 작은 마을이었다. 교황은 큰 응접실에서 짧은 연설을 한 뒤, 단상 높은 의자에 앉았다.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 경호원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손님들이 하나둘씩 교황에게 안내됐다. 전통적으로, 교황을 접견하는 사람은 단상에 올라가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가벼운 대화를 나눈 뒤 올라온 방향과 반대쪽으로 단상을 내려와야 했다.

    호킹이 휠체어를 움직여 단상의 입구로 다가갔을 때 참석자들은 숨죽여 호킹과 교황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교황이 조물주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호킹에게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했다. 이때 놀라운 장면이 펼쳐졌다. 교황이 자리에서 일어나 호킹의 휠체어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교황은 호킹과 눈높이를 맞췄고, 대화 시간도 다른 사람보다 길었다.

    지금 무엇을 연구하고 계십니까?

    우주의 가장자리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을 연구 중입니다.

    당신의 연구 성과가 인류의 발전과 행복에 이바지하기를 바랍니다.

    교황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우주론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호킹은 어깨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머리를 힘껏 들어 올리며 교황의 말씀을 기다렸다.

    ‘세계가 형성된 순간’에 관한 연구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호킹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교황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이 일어나 옷에 붙은 먼지를 털어냈고, 호킹과 작별했다. 호킹의 휠체어는 단상 반대편으로 향했다. 그날 오후 응접실에 있던 많은 천주교인들은 교황이 호킹을 지나치게 존중했다고 느꼈다. 더욱이 호킹은 무신론자이며 그의 이론은 전통적인 천주교 교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교황은 왜 이렇게 호킹을 존중해주었을까?

    세상에는 내막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사건들이 있다. 1642년 1월 8일, 유럽에서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싸움이 한창이었다. 그날 교회로부터 온갖 박해와 모욕을 받아온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피렌체 근교의 산장에서 숨을 거뒀다.

    그 후, 300년이 흘러 1942년 1월 8일, 갈릴레이의 서거 300주년에 우주를 깊이 탐구한 또 한 명의 과학자 스티븐 호킹이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대학의 도시 옥스퍼드다. 원래 그의 가족은 런던 근교 하이게이트에 살았지만 호킹의 아버지 프랭크와 어머니 이사벨은 첫 아이를 옥스퍼드에서 낳기로 했다. 당시 영국은 매일 저녁 독일군의 공습을 받고 있었다. 런던 곳곳이 무너진 건물의 잔해로 가득 찼다. 그들이 살고 있는 교외 지역에도 멀지 않은 곳에 폭탄이 떨어져 유리창이 깨지는 일이 벌어졌다. 다만 영국과 독일 두 나라 정부가 유명한 대학 도시는 공습하지 않기로 협약을 맺었기 때문에 영국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독일의 괴팅겐과 하이델베르크는 폭격을 받지 않았다.

    스티븐 호킹은 두 살 무렵 하마터면 폭격으로 사망할 뻔한 적도 있었다. 호킹 가족은 그때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 있었는데, 독일의 장거리 로켓 V-2가 떨어져 호킹의 집을 무너뜨렸다. 당시 가족들이 전부 외출한 상태였기에 망정이지, 자칫 인류는 위대한 과학자를 잃어버릴 뻔했다.

    호킹의 아버지는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하고 열대병을 연구하는 의사였고, 어머니도 같은 학교를 나와 의학 연구기관에서 비서로 일했다. 부부가 모두 학력이 높고 명문대 졸업생이라 그런지 이웃들은 호킹 가족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이 좀 괴짜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호킹 가족은 이미 수많은 책이 있는데도 끊임없이 책을 사들인다거나 어른부터 어린아이까지 책을 읽으면서 밥을 먹는다는 것이었다. 식사 시간에도 책을 들고 있는 풍경은 다른 집에서는 예의에 어긋난다며 절대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다.

    호킹은 굼뜨고 서툰 편이었지만 상상력은 놀라울 정도로 풍부했다. 그의 사고는 여러 주제를 넘나들며 휙휙 바뀌었다. 그런 탓에 호킹은 적절한 언어로 생각을 표현하지 못했고, 말할 때 어물거리거나 더듬거리는 편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도 꼭 그랬다. 호킹 가문의 사람들에게는 ‘호킹어’라는 특수한 언어가 따로 있다고 농담 삼아 말할 정도였다. 호킹의 빠르고 날카로운 사유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이 늘 놀라워하는 부분이었다. 그의 친구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가 높은 곳에 앉아 우리를 내려다본다고 느꼈다. (……) 그건 일반적인 총명함이나 창의성이 아니라 ‘군계일학’이라고 할 만했다. 원한다면 호킹을 오만하다고 평가해도 좋다. 실제로 세상의 모든 것이 그의 눈 아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호킹은 확실히 ‘군계일학’이었다. 그는 아홉 살에 자신이 장래에 과학자가 될 것임을 알았다. 열여섯 살이 되자, 호킹과 친구들은 시계 부품과 버려진 전화 교환기를 이용해 간단한 컴퓨터를 제작했다. 호킹은 이 ‘논리 회전식 컴퓨터(LUCE)’의 주요 설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는 대학이나 정부기관에서나 사용하는 희귀한 물건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이런 컴퓨터를 만들어내자 현지 지방신문이 특집으로 보도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 기사에 따르면 LUCE는 몇 가지 산술 문제를 실제로 풀어냈다.

    나중에 이런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한 학교 책임자가 LUCE를 쓰레기라고 생각해 폐기했다. 한참 세월이 흐른 후 스티븐 호킹이 유명해지자 이 책임자는 그때서야 LUCE의 역사적 가치를 이해하고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1959년 호킹은 옥스퍼드대학교에 합격했다. 호킹은 물리학을 배우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그가 의학을 전공하기를 바랐고 둘은 논쟁을 벌였다. 스티븐 호킹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아버지는 내가 의학을 배우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나는 생물학이 현상을 서술할 뿐이라 생각했고, 근본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충분히 연구할 수 없다고 느꼈다. 분자생물학을 이해하게 된 후 좀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지만 그때는 분자생물학이 널리 알려지기 전이었다.

    그해 10월, 호킹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정식 입학 통지서를 받았다. 그는 물리학과에 합격했을 뿐 아니라 장학금도 받았다. 호킹 일가에게 장학금은 몹시 중요했다. 당시 의사 월급으로 아들을 옥스퍼드 같은 명문대에 보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옥스퍼드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호킹은 공부를 소홀히 했다.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면서 높은 점수를 받는 친구를 무시했고 그들에게 ‘그레이 맨(grey man)’이라는 별명을 붙여 조롱했다. 호킹이 쓴 책 『시간의 역사』(A Brief History of Time)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 옥스퍼드에서는 학업을 몹시 저해하는 풍조가 유행했다. 노력하지 않고도 좋은 성적을 거두든지, 아니면 자신의 지능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낮은 성적을 받든지 둘 중 하나를 해야 했다. 만약 무지막지하게 노력해서야 비로소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그 사람은 ‘그레이 맨’으로 여겨졌다. 옥스퍼드 학생들에게 이 별명은 가장 모욕적인 칭호였다.

    호킹은 당연히 ‘그레이 맨’이 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지능이 남보다 좋았기 때문에 게으름을 부려도(그가 대강 계산한 바에 따르면,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보낸 3년 중 학업에 쏟은 시간이 대략 1천 시간인데, 이는 평균적으로 하루에 1시간이다) 그의 성적은 교수나 친구들이 놀랄 만큼 훌륭했다.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그의 지도교수 버만 박사가 학생 네 명에게 13개의 물리학 문제를 과제로 내주며 다음 주 수업 전에 할 수 있는 데까지 풀어오라고 했다. 수업이 있는 날, 다른 세 명의 학생은 휴게실에서 SF 소설을 읽고 있는 호킹을 보았다.

    스티븐, 교수님이 내준 문제가 참 어려웠지?

    응? 아직 안 풀었는데.

    친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중 한 명이 진지하게 충고했다.

    빨리 시작하는 게 좋을걸. 우리 셋은 지난 월요일부터 풀었는데 겨우 한 문제 풀었어.

    호킹은 그 말을 듣고 교수가 내준 과제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는 그때부터 문제 풀이에 돌입했다. 강의실에서 다시 만난 친구들이 호킹에게 몇 개나 풀었느냐고 물었다.

    시간이 없어서 겨우 9개 풀었어.

    그 후, 호킹은 아버지를 따라 중동으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와 케임브리지대학교에 등록하여 데니스 시아마(Dennis Sciama, 1926~1999) 교수의 대학원생이 되었다. 원래는 우주론의 대가인 프레드 호일(Fred Hoyle, 1915~2001)의 연구실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시아마 교수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꽤 실망했지만 호킹은 곧 시아마가 매우 우수한 과학자임을 깨달았다. 그는 언제든지 호킹과 다양한 과학 문제를 토론했다.

    1962년 겨울 방학, 호킹은 제인 와일드¹라는 여학생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음 해 가을에 대학에 입학해 언어학을 전공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제인은 호킹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재치 있게 말하면서도 행동거지가 남다르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지나친 자부심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우정은 깊어졌다.

    1스티븐 호킹의 첫 번째 아내.

    호킹이 한창 빛과 행복 그리고 찬란한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 거대한 불행이 몰려와 그를 파괴했다. 그해 겨울방학, 호킹은 어머니와 스케이트를 타러 나갔다가 아무 이유 없이 넘어져 일어나지 못한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발생한 후 의사를 찾아갔는데 검사 결과 루게릭병(ALS)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루게릭병은 불치병이었고, 의사들은 호킹이 최대 2년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 병의 일반적인 진행은 근육위축(근육의 크기가 원래 크기에 비하여 줄어드는 것)에 따른 운동기능 저하, 전신마비, 성대의 근육위축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되어 언어능력 상실이 오고 마지막으로 음식이나 물을 삼키지 못하다가 호흡 근육까지 손상되면 사망이 임박했다고 본다. 이 모든 과정에서 오직 사고력과 기억력만이 손상을 입지 않는다.

    호킹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왜 어린 내가 고통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야 한단 말인가? 왜?’ 하지만 이런 질문에 아무도 대답해줄 수 없었다. 혼자 기숙사에 처박혀 술을 마시며 괴로움을 잊으려 했다. 그의 정신은 거의 붕괴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결국 이성이 그를 구원했다. 어차피 죽는다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는 학업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이론물리학을 전공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두뇌는 루게릭병의 영향을 받지 않으니 말이다. 마음을 굳힌 후, 전보다 더 시간을 소중히 여겼고 과거 자신이 낭비한 시간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난생처음 공부와 연구에 몰두했다. 이때 제인 와일드의 격려와 도움도 호킹의 변화를 이끈 결정적 요인 중 하나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제인은 강한 종교적 책임감으로 그를 절망에서 구해내기로 결심했다. 호킹의 전기 작가는 아주 공정한 태도로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시기에 제인이 나타난 것은 호킹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사실에는 누구도 의문을 품지 못할 것이다. (……) 제인은 호킹이 절망을 극복하고 새롭게 삶과 학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한편 호킹은 더디고 힘들게 박사 과정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호킹은 몸이 마비되어 전동 휠체어에 의존해 움직여야 했고 1985년 이후에는 전혀 소리를 내지 못해 컴퓨터로 타인과 소통해야 했지만, 이처럼 세계 최악의 장애를 가진 사람이 76세까지 살았을 뿐 아니라 최고의 우주학자이자 이론물리학자가 된 것은 기적이다. 호킹은 1974년에 블랙홀 복사 이론으로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다. 당시 32세였던 그는 왕립학회의 오랜 역사에서 가장 젊은 회원 중 한 명이었다. 1979년에는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루커스 수학 석좌교수²로 임명되었다. 310년 전 뉴턴도 이 직책을 맡은 적이 있었다. 1989년에는 훈장 컴패니언 오브 아너(Companion of Honour)를 받았다.

    2케임브리지대학교의 수학 관련 분야의 교수직 가운데 하나.

    호킹이 연구한 우주학 분야는 수학 수준이 높고 상상력이 풍부한 학자만이 할 수 있는 연구다. 또한 물리학에서 가장 심오한 이론인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장론(quantum field theory)에도 정통해야 한다. 호킹은 대단한 노력과 탁월한 성과로 초기 우주에 대한 인류의 인식을 크게 끌어올렸으며, 다른 누구도 이 분야에서 호킹보다 뛰어난 공헌을 하지 못했다. 이 공로로 스티븐 호킹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기적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호킹의 삶과 성취는 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수많은 사람을 격려하며 용기를 주었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위대하고 감동적인 일이 있을까? 하지만 이런 호킹도 때로는 실수를 했다.

    호킹은 주로 블랙홀을 연구했다. 블랙홀은 우주 공간에서 물질이 존재하는 특수한 형태 중 하나이며, 블랙홀에서는 물질의 밀도가 상상할 수 없이 높아진다. 그래서 블랙홀에서는 빛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당연히 인간의 눈에도 보이지 않으므로 이 공간을 ‘블랙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블랙홀에 한번 들어가면 어떤 물질도 다시는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블랙홀의 중력이 워낙 커서 빛조차도 탈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빛은 어느 정도의 거리를 달아났다가 더 이상 빠져나갈 힘이 없어지면 다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이것은 우리가 허공을 향해 소총을 쏘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에 총알은 의욕적으로 하늘을 향해 날아가지만, 잠시 후 어느 정도의 고도에 도달하면 중력의 작용으로 힘이 빠져 지구로 떨어진다.

    블랙홀은 중력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총알은 물론이고 미사일이든 빛이든 모두 일정 거리까지 날아간 다음에는 꼼짝없이 급커브를 돌아 블랙홀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빛이 가장 멀리까지 날아간 지점을 rₑ라고 할 때, 이 rₑ를 반지름으로 그린 원의 경계를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이라고 한다.³ 사건의 지평선은 곧 블랙홀의 경계다. 블랙홀이 클수록 사건의 지평선이 가지는 표면적(rₑ를 반경으로 하는 원의 면적인 πrₑ²)도 커진다.

    3사건의 지평선이란 일반상대성이론에 나오는 개념으로,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이 그 외부에 영향을 줄 수 없는 경계면이다. 외부에서는 물질이나 빛이 안쪽으로 빨려들어 갈 수 있지만, 내부에서는 블랙홀의 중력에 의한 붕괴 속도가 탈출하려는 빛의 속도보다 커지므로 내부로 들어온 물질이나 빛은 사건의 지평선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

    호킹의 위대한 공헌이 바로 이 원의 면적 πrₑ²을 연구한 것이다. 1970년 11월, 호킹의 딸 루시가 태어난 지 2주째 되던 날 밤, 막 잠자리에 들려던 호킹은 블랙홀 경계의 면적이 줄어들지 않고 변함없이 유지되거나 증가하기만 할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런 규칙을 적용하면 블랙홀의 성질과 작용에 중요한 제한을 둘 수 있고, 이 블랙홀 면적과 열역학의 엔트로피(entropy) 사이에 있는 커다란 유사성을 일깨워줄 수 있다. 열역학 제2법칙은 ‘고립계의 엔트로피가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거나 증가하기만 한다’라는 것인데(그래서 열역학 제2법칙을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특이하게도 블랙홀 면적(사건의 지평선 면적)이 엔트로피와 동일한 차원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 나중에 미국 물리학자 찬드라세카르가 다음과 같이 감탄했을 것이다.

    열역학과 통계물리학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엔트로피를 얻으려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이론에서 나온 결과는 열역학과 통계물리학의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 이런 사실로 사람들은 일반상대성이론을 확신하게 되었다. (……) 이는 일반상대성이론의 미학적 토대와 관련이 있다.

    호킹의 이런 중대한 발견은 당시 이론물리학자들의 환호를 받았다. 호킹 본인도 기뻐하며 휠체어를 타고 케임브리지대학교 거리를 돌아다녔다. 나중에 호킹은 의기양양하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머릿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든지, 그것을 꽉 붙잡고 있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당시 호킹이 느꼈던 흥분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얼마 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호킹이 자신의 새로운 견해(블랙홀의 경계가 가진 성질이 열역학의 엔트로피 법칙과 같다는 사실)에서 시작하여 블랙홀에 관한 통념을 단번에 뒤집은 것이다. 그러면서 이론물리학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블랙홀은 검지 않다라는 개념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곧 어떤 물질(기본 입자 등)은 블랙홀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다는 의미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난공불락의 외딴 섬에 지은 감옥인 샤토디프에서 탈출한 것처럼 말이다.

    이 획기적인 발견으로 호킹은 당대 우주학에서 최고의 인물이자 공인된 권위자가 됐다. 그런데 이 놀라운 발견이 실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처음에 호킹은 블랙홀 경계의 면적이 가지는 불변성을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과 연결 짓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연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이 둘을 ‘숫자적으로 늘지 않는다’라는 점에서 연결했을 뿐 본질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랬던 호킹은 나중에 어떤 논문에서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의 교수 존 휠러(John Wheeler)의 대학원생인 야코브 베켄슈타인(Jacob Bekenstein)이 블랙홀 경계의 면적이 블랙홀의 엔트로피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며, 이 면적이 블랙홀의 엔트로피량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또 뭘 모르는 대학원생이 나대는군! 호킹은 베켄슈타인의 의견에 울화통을 터트리며 몹시 분개했다. 어린애 같은 대학원생들은 생각도 없나? 블랙홀 사건의 지평선 면적이 정말로 엔트로피량이라면 그건 곧 온도량이라는 뜻이 되잖아. 블랙홀에 정말로 온도가 있다면 열이 블랙홀에서 빠져나와 우주에서 가장 추운 곳(-273℃)으로 흘러간다는 뜻인데, 그러면 에너지가 블랙홀에서 유실된다는 것을 의미해. 이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거지?

    그렇다. 호킹이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블랙홀이 ‘검은’ 이유는 어떤 물질(당연히 에너지도 포함된다)도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이 아니던가? 1973년에 호킹과 그의 동료 두 사람은 논문을 발표해 베켄슈타인의 논문에 나타난 ‘치명적인 약점’을 지적했다. 사실상 블랙홀의 유효 온도는 절대영도⁴이며, 어떤 복사열도 블랙홀 밖으로 방출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4 절대 온도의 기준 온도. 영하 273.15℃로, 이상 기체의 부피가 이론상 0이 되는 점이다.

    그러나 호킹은 나중에 베켄슈타인이 아니라 자신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과학사에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보수적인 전통 사상에 속박되지 않으려 애쓰면서 대담하게 도전하는 젊은 과학자는 예외 없이 권위자들의 분노와 반대에 직면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과학의 중대한 발전은 이런 젊은이들의 쉼 없는 도전 끝에 이루어졌다. 권위자와 노인들은 대부분 그 발전 과정에서 반대 세력의 역할을 맡는다. 이번에는 서른 살을 막 넘겨 나이는 많지 않지만 명성은 대단한 호킹이 이 역할을 맡은 것이다.

    더 재미있는 부분은 호킹이 좀 더 연구를 진행시켜 도출한 수학 공식이 베켄슈타인의 관점에 몹시 유리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호킹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약간의 분노를 가지고 있었고, 나중에야 호기심을 느꼈다. 이런 내용이 호킹의 저서 『시간의 역사』에 나와 있다.

    나는 베켄슈타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히 블랙홀 엔트로피 이론을 지지하는 논거로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의 이론을 좋아하지 않았다.

    호킹은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 베켄슈타인의 ‘잘못된 견해’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호킹은 베켄슈타인의 견해와 자신의 수학 공식에서 얻은 결론을 인정하고 편견을 내려놓았다. 잘못을 인정한 후에 호킹은 한 시대의 획을 긋는 과학적 발견을 하게 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최고의 진리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1989년에 호킹의 『시간의 역사』가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럼에도 호킹의 실수와 고집으로 또다시 풍파가 일어났다. 사건은 19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호킹은 모스크바를 방문했는데, 그때 만난 물리학자 안드레이 린데(Andrei Linde)는 자신이 연구 중인 우주의 새로운 팽창 이론을 호킹에게 들려주었다. 호킹은 비판 의견을 내놓았고, 린데는 호킹의 의견에 따라 자신의 이론을 수정했다. 모스크바 방문이 끝난 후, 호킹은 곧바로 미국 필라델피아로 날아가 필라델피아 프랭클린 인스티튜트가 수여하는 벤저민 프랭클린 메달을 받은 후 우주학 토론회에 참석해 발언했다. 토론회가 끝난 후에는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젊은 물리학자 폴 스타인하트(Paul Steinhardt)와 우주 팽창 문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나중에 문제가 생겼다. 호킹이 1988년에 출간한 『시간의 역사』에서 이 일을 언급했는데, 단순히 부주의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몰라도 이렇게 썼던 것이다.

    필라델피아 토론회에서 나는 우주 팽창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린데의 이론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내가 그의 오류를 어떻게 바로잡아주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당시 청중 가운데 스타인하트가 있었다. (……) 나중에 스타인하트는 나에게 논문을 하나 보내주었다. 그와 안드레아스 알브레히트가 같이 쓴 것인데, 린데의 이론과 매우 유사했다. 나중에 스타인하트는 내가 당시 린데의 이론을 설명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으며, 게다가 그들이 논문을 거의 완성한 시점에서야 린데의 논문을 읽었다고 말했다.

    스타인하트는 호킹의 무책임한 말에 몹시 화를 냈다. 이 일의 옳고 그름을 제대로 따지지 않는다면 자신의 명예와 연구 업적에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될 상황이었다. 스타인하트가 왜 이렇게 화를 냈을까?

    1982년에 호킹은 케임브리지에서 물리학 토론 강의를 열었다. 이 강의에서 우주 팽창 문제를 연구하고 토론했는데, 예정된 강의 일정이 모두 끝난 뒤 주최 측에서 토론 내용을 기록물로 작성했다. 이 강의에 참가한 미국의 물리학자 터너(Turner)와 배로(Barrow)가 초안을 보고 스타인하트의 공로를 내용에 추가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스타인하트와 린데는 각자 독립적으로 우주의 새로운 팽창 이론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호킹은 ‘공로를 나눠 주자’라는 그들의 제안에 찬성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스타인하트와 알브레히트의 이름을 빼는 대신 호킹-모스(Moss)의 이름으로 된 논문을 참고자료에 넣으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터너와 배로는 호킹의 무분별한 태도에 크게 화를 냈다. 특히 호킹-모스의 논문을 넣자는 의견은 누가 봐도 본인이 새로운 팽창 이론을 발견한 공로를 가져가려는 것으로 보였다. 터너와 배로는 호킹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무시하기로 했다. 또한 호킹에게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스타인하트가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으며, 최고의 위치에 있는 인물과 맞서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그들은 공정한 결과를 얻기 위해 어떤 것도 불사할 것이다.’

    처음에는 호킹이 오해를 했던 듯하다. 스타인하트가 필라델피아에서 자신의 강연을 듣고 린데의 새로운 팽창 이론에 대해 알게 된 후에 논문을 썼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스타인하트가 우주의 새로운 팽창 이론을 발견한 공로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스타인하트는 이 일을 알게 된 후 곧바로 자신의 수첩과 편지를 호킹에게 보냈다. 그것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호킹의 강연을 듣기 전부터 이미 새로운 팽창 이론에 관한 상당히 진척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호킹이 린데의 새로운 사상을 언급하는 것을 들은 바가 없다고 단언했다. 호킹은 스타인하트의 편지를 받은 후, 답신을 보내 스타인하트와 알브레히트의 연구가 린데의 연구와는 완전히 독립된 것임을 인정했다. 그는 또한 우호적인 태도로 앞으로 같이 협력 연구를 하자는 뜻을 비췄으며, 명백하게 이 일은 여기서 일단락되었음을 밝혔다.

    이것이 1982년의 일이었다. 만약 호킹이 자신의 말을 지켰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988년에 그는 『시간의 역사』를 쓰면서 자신이 1982년에 스타인하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했던 말을 전면 부정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호킹이 스타인하트를 헐뜯고 있다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스타인하트는 호킹이 신의를 지키지 않은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 일로 스타인하트의 명예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고, 미국의 정부과학기금에서는 그에게 연구비 지원을 중지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원인은 전부 호킹이 쓴 책이었다. 스타인하트는 자신의 명성을 지키려 싸워야 했다. 다행히 1981년에 열린 어떤 학술회의를 촬영한 비디오를 찾아냈고, 그 영상에서 스타인하트는 매우 확실하게 새로운 팽창 이론의 핵심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있었다. 스타인하트는 이 영상을 복사해 케임브리지에 있는 호킹과 『시간의 역사』를 출간한 출판사로 보냈다. 몇 달 후, 호킹이 답신을 보냈다. 『시간의 역사』 다음 판에서는 스타인하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그 부분의 내용을 수정하겠다는 편지였다. 그러나 호킹은 스타인하트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힌 사건을 두고 당사자에게 직접 사과를 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1988년에 미국에서 열린 회의에서 호킹은 터너를 만났을 때 어색하게 말을 붙였다.

    나와 대화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당신이 만들어낸 문제를 바로잡는다면요!

    나중에 세계 각국의 수많은 학자가 명백하게 그의 잘못이었다고 지적한 후에야 호킹은 조금 관대해진 태도를 보였다. 이 일을 두고 『스티븐 호킹: 과학의 일생』(Stephen Hawking: A Life in Science)의 저자는 이렇게 평가했다.

    호킹과 스타인하트 두 사람 입장에서 이 일은 이미 끝난 일이다. 하지만 호킹의 행동은 명백히 잘못되었다. 그는 성격이 강하고 고집스러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이런 성격의 부정적인 영향으로 공정함의 원칙을 무시하고 말았다. 아직도 이 일로 고통받고 있는 스타인하트는 의심의 여지없이 직업적으로 손해를 입었으며 정신적으로 받지 않아도 되었을 상처를 받았다. 스타인하트로서는 억울한 일이다. 호킹처럼 걸출한 인물은 그들의 사상과 상상력으로 과학을 더욱 생기 있게 만들지만, 개성이 뚜렷한 만큼 부정적 측면 역시 크게 드러난다. 어떨 때는 이런 부정적 측면이 삶의 흐름을 원래의 방향에서 멀어지게 한다.

    이 평가는 호킹의 전처인 제인 와일드가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스티븐에게 말해줬어요. 그는 신이 아니라고요. 그렇다. 스티븐 호킹은 신이 아니다. 다만 신의 어깨에 올라타 우주의 비밀을 슬쩍 넘겨다보았던 행운아였을 뿐이다.

    2장 아인슈타인이 저지른 가장 멍청한 실수

    우주는 무한한가? 아니면 어딘가 끝이 있는가? 하이네(Heine)의 시에 답이 있다. 한 가지 결론은 바보들이나 바라는 일이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은 20세기의 지식 혁명이었다. 돌이켜보면 참 괴이쩍은 일이다. 왜 그전에는 우주가 팽창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까?

    스티븐 호킹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을 이용해 우주에 관한 한 가장 대담하고 뛰어난 연구를 진행한 물리학자다. 1917년에 그는 자신의 첫 우주론 논문을 발표했다. ‘우주론’ 분야에서 일반상대성이론을 주제로 발표한 최초의 논문이기도 했다. 이 논문의 제목은 「일반상대성이론에 근거한 우주론 고찰」이다. 이 선구적인 논문에 도입된 수많은 개념과 발전은 1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현대 우주론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우주론 연구에 ‘우주항’이라는 개념을 도입했고, 그 방정식에서 우주 상수 Λ(람다)를 설정했다. 하지만 러시아 출신 이론물리학자 조지 가모브(George Gamow, 1904~1968)는 회고록에서 아인슈타인이 우주항을 도입한 것을 후회했다고 썼다.

    옛날에 나와 아인슈타인이 우주론 문제를 토론한 적이 있었다. 그는 우주 상수를 도입한 것이 자신이 평생 한 일 중에서 가장 멍청한 짓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우주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이 도입한 우주 상수가 필수적인 개념이라고 여긴다. 가모브는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지만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아인슈타인이 부정하고 포기한 이 ‘멍청한’ 방정식 항을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몇몇 우주론 학자들이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어 자모인 Λ로 대표되는 우주 상수는 그 추악하게 뾰족한 머리를 의기양양하게 치켜들고 몇 번이고 다시 세상에 출현했다.

    우주 상수 Λ를 추악하게 뾰족한 머리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가모브가 우주 상수를 얼마나 혐오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이 Λ를 포기했다고 해서, 가모브가 Λ를 추악하다라고 말했다 해서(Λ의 정수리가 뾰족한 것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우주 상수를 쓰레기통에 처박지 않았다.

    저명한 우주학자 스티븐 호킹은 물리학자인 머리 겔만(Murry Gell-Mann)의 영향을 받아 우주 상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982년에 어느 학회에서 ‘우주 상수와 인류 원리¹’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는 이 강연에서 어떤 상황에서 우주 상수는 마땅히 존재하는 것이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어떠한 물리학의 상수보다 0에 가까울 뿐이라고 설명했다. 호킹은 특히 광자(光子)의 질량을 0으로 둘 때 동일한 이유로 Λ의 수치 역시 0이 된다고 했다.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에딩턴은 우주 상수가 없어서는 안 되는 개념이라고 믿었고, 일찍이 이렇게 예언했다.

    1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들은 많은 우주 중 적합한 조건을 갖춘 곳에서만 존재 가능하며, 생명체 존재를 위한 조건을 통해 다양한 물리적 법칙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원리.

    Λ=0이라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이 사실은 불완전했던 상대성이론을 완전한 상태로 만든다. 우주 상수 문제는 상대성이론이 뉴턴 이론을 완전한 모습으로 만들었던 일과 같아, 생각하고 말고 할 게 없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은 왜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수많은 과학자는 왜 실수가 아니라고 여겼을까? 이 일화 속에는 ‘함정’과 ‘오해’가 그야말로 진짜와 가짜를 가릴 수 없을 만큼 교묘한 상태로 뒤섞여 있다. 우리가 유일하게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은 앞으로 이야기하려는 내용이 맞는지 틀린지 아직도 정확히 결론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뉴턴 역학이 성립된 이후, 그때까지 우주의 구조를 설명하던 초기 학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고대 중국이든 고대 그리스든 거의 모든 세상 사람들이 "우주는 우리가 사는 세상 전체를 가리키는데, 이 우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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