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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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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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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is ebook

▶ 책소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지은 역사전기소설이다. 신채호는 국민들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심을 배양하려는 목적으로 1907년 10월 번역한 양계초(梁啓超)의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을 필두로, 한국 역사상의 삼걸(三傑)인 을지문덕(乙支文德)·최영(崔瑩)·이순신(李舜臣)을 뽑아 저술한다. 한문을 모르는 일반 민중과 부녀층을 계몽하기 위하여 순국문판 「리슌신젼」을 1908년 6월 11일부터 10월 24일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하였다.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극복했던 이순신의 영웅적 행적을 통해 신채호는 일본에 다시 국권을 상실할 위기에 놓인 한국민의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이순신이 그들의 영웅이 되기를 기대했다.

「이순신전」은 다른 역사전기소설과 마찬가지로 동양의 전통적인 전기형식인 ‘전(傳)’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전’은 일반적으로 도입, 전개, 종결이라는 내용상의 단계가 구분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순신전」은 총 19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장 서론과 제19장 결론은 신채호의 저술 의도와 논평을 담고 있다. 본문인 제2장에서 제18장까지는 이순신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로 부임하여 수군을 진두지휘하기 전까지 일대기는 다음과 같다.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대장이 되어 전쟁놀이를 즐겼다. 그는 22세 때부터 본격적인 무예 훈련에 몰입하여 28세에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으나 실패하여 다시 32세에 식년무과에 정식으로 합격한다. 다시 35세에 훈련원봉사에 부임한 이래 문란한 군기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했으며 힘있는 사람에게 의지하여 출세를 도모하지 않는다. 오직 정의와 성실밖에 모르는 그에게 심한 모략과 중상이 늘 뒤따른다. 39세에 함경북도 경원군 건원보권관으로 전임되어 변방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기계(奇計)로 처치한 공적을 병사 김우서(金禹瑞)가 시기하여 허위 보고서를 올려 논공이 중지되어 정기 승급에서 겨우 일계급 승진했을 뿐이다. 직속 상관인 병사 이일(李鎰)이 이순신의 녹둔도 증원군 요청을 묵살한 잘못과 그로 인한 피해의 책임이 자기에게 돌아올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심한 형벌을 가하여 입을 막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무고(誣告)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백의종군케 한다. 당쟁으로 인한 모략과 승진이 지연되다가 임진왜란을 앞두고 47세에 전라 좌수사에 임명된다. 이 때 왜군의 침입에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조선과는 달리 일본의 풍신수길(토요토미히데요시)은 무력을 강화하고 대대적인 침공 준비를 한다. 그런데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각종 총통 제작과 전선의 제조 및 거북선을 재정비하여 전쟁준비를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드디어 1592년 왜구가 부산을 함락하자 이순신은 단독으로 겨우 85척의 병선을 거느리고 부산으로 향한다.

▶ 책 속 한 구절

내가 이순신전을 보다가 주먹으로 책상을 치고, 크게 소리 지름을 깨닫지 못하였노라. 오호라! 우리 민족의 힘이 이같이 감쇠한 시대를 당하여 이공 같은 자가 있었으니, 어찌 가히 놀랄 바가 아니며, 우리 조정 정치가 이 같이 부패한 시대를 당하여 이공 같은 자가 있었으니, 어찌 또한 가히 놀랄 바가 아니리요. 인민이 전쟁을 경력치 못하여 북소리만 들으면 놀라서 숨는 이런 시대에 이공 같은 자가 있었으니, 어찌 가히 기이할 바가 아니며, 조정 신료들이 당파의 나뉨으로 사사로이 싸우는 데는 용맹이 대단하나, 나라 싸움에는 겁이 많은 이 시대를 당하여 이공 같은 자가 있었으니, 어찌 또한 이상치 않으며, 대가(大駕)는 의주로 파천(播遷)하시매, 인심이 이산한 끝에 이공 같은 자가 있었으니, 어찌 가히 우리로 하여금 흠선(欽羨)할 바가 아니며, 일본이 바야흐로 강하여 우리 약한 것을 업수이 여기고, 그 교만하고 완만(頑慢)함이 비할 데 없는 이때에 이공 같은 자가 났으니, 어찌 가히 쾌할 바가 아니리요.


▶ 신채호(申采浩, 1880~1936)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독립 운동가이자, 언론인, 역사학자, 소설가이다. 호는 단재(丹齋),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이다.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열혈생(熱血生), 한놈, 검심(劍心), 적심(赤心), 연시몽인(燕市夢人)이다. 국권을 회복하고자 모든 수단을 강구한 민족주의자로, 국사 연구와 교육을 중시하였다. 기존의 왕과 영웅 중심의 전근대적인 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사학을 내세웠다. 신채호와 박은식을 통해 정립된 민족사관은 일제에 의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주체적 역사관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책보요여
Release dateApr 6, 2018
ISBN9791196315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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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 - 신채호 지음

    책을 펴내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 문장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역사학자이자 무정부주의 민족주의자'인 신채호 선생이 남긴 유명한 말씀이죠. 하지만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이순신전>을 저술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신채호 선생은 <이순신전>의 서론에서 슬프다 독서하는 제군이여! 정신을 들여 이순신전을 볼지어다라고 울분을 토합니다. 외로운 섬나라의 일개 왜구에서 제국으로 성장한 일본의 시커먼 구름이 한반도를 덮치고 있을 때  실의에 빠진 우리 민족에게 조선의 '수퍼히어로' 이순신을 이 땅에 다시 소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선생의 이러한 염원이 통했는지 우리는 국난을 다시 한번 슬기롭게 극복하고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평화로운 이 시대에도 우리는 김훈이라는 걸출한 작가가 쓴 베스트셀러 <칼의 노래>와 천만 관객이 사랑한 영화 <명량>으로  이순신 장군을 만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100년 전에 이미 우리에게는 <이순신전>이라는 장군의 훌륭한 전기가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신채호 선생을 존경하는 모든 분들이 꼭 한번 읽기를 바라며 이 책을 바칩니다. 

    — 책보요여 번역·편집팀 '글나르미'

    이순신에 대한 평가

    이순신은 백 번 싸운 장군으로서 한 손으로 친히 무너지는 하늘을 붙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재질을 가지고도 운수가 없어 백 가지 재능을 한 가지도 풀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 류성룡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 명나라 장수 진린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신채호(姜敬愛, 1907~1943)

    조선 말기·일제강점기의 역사가·언론인·독립운동가.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열혈생(熱血生)·한놈·검심(劍心)·적심(赤心)·연시몽인(燕市夢人), 가명은 유맹원(劉孟源).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에서 출생하였고, 충청북도 청원에서 성장하였다. 신숙주(申叔舟)의 후예로 아버지는 신광식(申光植)이다.

    문과에 급제해 정언(正言)을 지낸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로부터 한학교육을 받았으며, 10여 세에 『통감(通鑑)』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다. 18세 때에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사저에 드나들며 장서를 섭렵해 그의 총애를 받았다. 신기선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 관장 이종원(李鍾元)의 총애를 받았다. 한편, 당시 이름높은 유학자로서 성균관 교수 이남규(李南珪)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김연성(金演性)·변영만(卞榮晩)·이장식(李章植)·유인식(柳寅植) 등과 교유하였다. 이 무렵 신채호는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해 소장파로 활약하였다. 22세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학원(文東學院) 강사로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25세 때에는 신규식·신백우(申伯雨) 등과 함께 향리 부근에다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설립, 신교육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26세 되던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쓰며 크게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자, 이듬해양기탁(梁起鐸)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로 초빙되어 당당한 시론(時論)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를 편달하며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독사신론(讀史新論)」·「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동국고대선교고(東國古代仙敎考)」 등의 역사관계 논문과 시론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 등을 연재하였다.  그 밖에 역술서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과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을 국한문판으로 발행하기도 하였고, 『가정잡지(家庭雜誌)』의 발행에도 관여하였다. 「독사신론」은 그 뒤 내용의 일부가 가감, 수정되어 최남선(崔南善)이 발행하던, 『소년(少年)』 제3년 제8권에 「국사사론(國史私論)」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이미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의 주체적인 민족주의사관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신채호가 집필한 「동국거걸최도통전」과 「이순신전」·「을지문덕전」 등은 한말의 민족적인 위기를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대망하면서 썼던 것으로 영웅사관(英雄史觀)을 일정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힘쓰던 신채호는 28세 무렵, 양기탁·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갑(李甲)·이승훈(李昇薰) 등과 더불어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 조직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도 참여하여 논설을 통해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1922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의 초청을 받아 상해에 가서, 이듬해 초에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으로 불리는 의열단선언을 집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신채호는 폭력에 의한 민중 직접 혁명을 주장하였다. 이 선언은 일제의 침략과 압제를 경험하면서 성장한 민중세력을 일제의 이족통치(異族統治)로부터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약탈적·불평등적인 제국주의 체제를 타파하는 주인공으로 부각시켰다는 의미에서 신채호의 민족주의 이념의 폭과 질의 강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1924년경부터 신채호가 쓴 평론과 논문들이 『동아일보』·『조선일보』 등에 발표되었다. 신채호의 연보에 의하면, 1925년에 민족독립운동의 방편으로 대만인 임병문(林炳文)의 소개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無政府主義東方聯盟)에 가입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1928년에 발표된 「용과 용의 대격전」·「꿈하늘」 등의 사상소설에서는 자유·평등·폭력·혁명을 예찬하는 무정부주의의 논리가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1928년 4월 무정부주의동방연맹대회에 참석해 활동하는 등 점점 행동 투쟁에 나섰던 신채호는,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이송, 1930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旅順監獄)으로 이감,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순신(李舜臣)

    이순신 초상 (李舜臣 肖像),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6호

    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한성 출신이다.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선조 9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그 관직이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발포진 수군만호, 조산보 만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본인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고 깊은 효심을 지닌 선비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장수로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나라를 구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정조 때에는 증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

    고려 때 정5품 중랑장(中郎將)을 지낸 덕수 이씨의 시조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이며, 조선 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이변(李邊) 의 후손이다. 외가는 초계 변씨(卞氏), 처가는 온양 방씨(方氏, 당시에는 상주 방씨)이다. 그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다.

    일러두기

    각 장의 제목은 원제목을 일부 수정하여 수록하였습니다.  원제목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1장 서론

    제2장 이순신이 어렸을 때와 소시적의 일

    제3장 이순신의 출신(出身)과 그 후에 곤란

    제4장 오랑캐를 막던 조그만 싸움과 조정에서 인재를 구함

    제5장 이순신이 전쟁을 준비

    제6장 부산 바다로 구원하려 간 일

    제7장 이순신이 옥포에서 첫번 싸움

    제8장 이순신의 제2전(당포(唐浦))

    제9장 이순신의 제3전(견내량(見乃梁))

    제10장 이순신의 제4전(부산(釜山))

    제11장 제5전 후에 이순신

    제12장 이순신의 구나(拘拿)

    제13장 이순신의 옥에 들어갔다가 나오던 동안 집과 나라의 비참한 운수

    제14장 이순신의 통제사 재임과 명량(鳴梁)에서 대승첩

    제15장 왜적의 말로

    제16장 진린(陣璘)의 중도의 변함과 노량(露梁)의 대전(大戰)

    제17장 이순신의 반구와 그 유한

    제18장 이순신의 제장(諸將)과 그 유적과 그 기담(奇談)

    제19장 결론

    단락과 단락 사이에 글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어휘 풀이를 집어 넣었습니다.

    장과 장 사이에는 이순신 장군의 어록과 한시를 추가하여 징검다리를 놓았습니다.

    본문 말미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가운데 굵직한 해전들을 모아 정리하였으니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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