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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허츠 - Love Hurts
러브 허츠 - Love Hurts
러브 허츠 - Love Hu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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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허츠 - Love Hu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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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is ebook

대한그룹 후계자 자리를 거부한 송시안.
온갖 기행과 방탕한 생활을 드러내지 않는 방패로서 조그만 캐터링 회사를 운영한다.
망난이 사장의 비서로 스카웃된 서정화는 일상이 단조롭다.
스스로 방황에도 지친 송시안이 서정화에게 결혼을 제안하는데...
상처에 굳어진 남자.
잃을 게 아무 것도 없는 남자.
누구에게도 반응하지 않는 차가운 심장을 가진 남자.
이 남자의 마음 깊이 숨겨둔 뜨거운 열정을 용솟음치게 만든 여자.
조용한 심정이지만 사랑을 위해서라면 치열하게 지켜내는 여자.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고통과 어려움을 딛고 사랑을 이룬 두 남녀.
엇갈려 흩어질 뻔 했던 사랑,
그 사랑을 흔드는 지옥같은 고통.
타오르는 태양같은 사랑을 품은 송시안이 그를 위해 죽음도 불사르는 서정화를 지켜낸 사랑.
죽음만큼 아프고 빙하만큼 시린 고통을 이겨낸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Language한국어
Publisher이엘 북스
Release dateAug 9, 2017
ISBN9788967841409
러브 허츠 - Love Hu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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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 허츠 - Love Hurts - 홍 여람

    love hurts

    홍여람 지음

    저자소개

    홍여람

    저자 홍여람은 마음 속 깊이 자리한 붉은 기운을 은근하고 짙은 쪽빛으로 풀어내고 싶은 글쟁이.

    아는 대로 느끼는 대로 살아내고 싶고, 끄적거림으로 소통하고 싶은 보통인.

    다 가진듯하나 아무 것도 제 것이 없는 허수인.

    여전히 사랑과 그 사랑이 빚어내는 기적을 믿는 미련하고 서툰 낭만인.

    길 위에서 자기 인생을 들었다 놨다 하는 유랑인.

    부인할 수 없이 그 누구의 딸이자, 아내이며, 엄마인 평범녀.

    1. her story (1)

    어..어딜?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했으니 사라져줘야지, 안 그래?

    그게 무슨?

    웬 순진한 척?

    척...척이라뇨?

    "이 결혼이 정상적인 결혼은 아니지 않나?

    내가 남편 노릇까지 해주길 기대했었나?"

    ..........

    그 정도로 미련한 여잔 아니라고 봤는데....

    ........

    그냥...좀 갑갑해. 지금 내 심정이. 복잡하기도 하고....

    그녀의 눈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이 슬프게 변해갔다.

    아무리 그런 눈으로 쳐다봐도 현실은 현실이니까! 그럼.

    새신랑인 남자는 서늘한 바람을 남기고

    신혼집을 빠져나갔다, 신부는 혼자 남겨졌다.

    허망한 마음으로 남겨진 신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아...

    사랑으로 시작된 결혼은 아니었다.

    결혼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 처음으로 절망이 느껴지는 하루였다.

    [뭘 바랬던 거야?]

    그녀의 입술을 가르고 나오는 소리라곤 한숨소리뿐.

    한참을 주저앉아있던 그녀는 저려오는 다리를 조금씩 움직여보았다.

    저린 다리를 펴고 가냘픈 손으로 꾹꾹 눌러 안마를 해보았다.

    저림 현상은 없어졌지만 상처받고 주름이 간 자존심은 펴지지 않았다.

    어두워진 창밖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쩌다 내 신세가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신혼 살림을 위해 시댁에서 마련해 준 넓디넓은 신혼집.

    그 넓고 커다란 공간에 그녀의 것이라곤 몸뚱아리 하나뿐.

    그렇다고 친정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부모님과 오빠, 남동생마저 슬프게 만들 수 없으니까.

    *

    정화야...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다면 그렇게 해!

    엄마...

    "괜찮아, 아빠나 엄마, 그리고 정원이, 정수

    모두 널 앞세워 호강한단 얘긴 듣고 싶지 않다!"

    여기까지 왔는데... 나 잘 할 수 있어 엄마. 걱정 안 해도 돼.

    "네 행복까지 포기하진 말란 의미야. 우린 부족해도 행복했었잖니.

    사위라고 맘 편하게 부르지도 못하고 사둔이라고 원.... 어렵기만 하고..."

    나쁜 사람은 아니라니까, 회장님과 사모님도 그렇고...

    "나쁜 사람? 남편을 넌 그렇게 부르냐? 쯔쯔쯧, 회장님? 사모님? 이상하잖아.

    우리가 널 얼마나 곱고 귀하게 키웠는데.

    아내, 며느리 대접도 못 받고 사는 건 못 참는다, 이 엄마도."

    결혼식 전날까지도 엄마는 딸의 결혼을 미더워했다.

    사고 후 말이 없어진 아빠는 눈물을 참느라

    애쓰는 모습이어서 더욱 가슴이 아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

    서정화씨!

    네! 부장님.

    부속실로 가 봐요, 지금.

    부...부속실이요? 무슨 일인지...

    그거야 나도 모르지. 아무튼 지금 당장 가보도록!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기획실을 나와서

    부속실이 있는 15층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일까?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지난 번 프로젝트 때문에?]

    엘리베이터 문에 비치는 모습을 보며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머리를 정돈했다.

    대한그룹 기획실에서 근무한지 3년.

    입사동기나 기획실 직원 누구도 부속실에 불려간 적이 없는데

    왜 그녀를 호출했는지 궁금했고, 두려움도 생겼다.

    부속실 문을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네~

    더 이상 상냥할 수 없는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괜히 목청을 가다듬으며 정화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기획실의 서정홥니다...

    아, 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만 앉아 계시지요.

    아닙니다. 서있는 게 편합니다.

    네~ 그러시다면.

    상냥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안쪽에 있는 또 하나의 문을 노크하며 들어갔다.

    기획실의 서정화님 오셨습니다, 회장님.

    회장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서정화님, 들어가시지요.

    상냥한 그녀는 웃는 눈매를 지어보이며

    문 한 쪽으로 비켜서서 들어가란 손짓을 했다.

    구두 소리를 최대한 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정화는 문턱을 넘어섰다.

    그룹의 신년 행사 때 멀리서 바라만 보았던 송경환회장이

    그녀를 손수 맞이하며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깍듯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기획실에 서정홥니다.

    그래요, 서정화씨. 업무로 바쁠 텐데 불쑥 올라오라고 해서 미안하게 됐어요.

    아닙니다, 회장님.

    여기... 여기 좀 앉아요.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소파를 그녀에게 권하며

    송경환도 중앙에 놓인 1인용 소파에 좌정했다.

    앉으려는 찰나 아까 상냥한 목소리의 비서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뭘 드실는지 묻지 않고 가져와서 죄송합니다, 서정화씨.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페퍼민트차입니다, 회장님.

    "그래요. 서정화씨 미안해요. 아마 오후에 내가 즐겨 마시는 차를

    묻지도 않고 그냥 가져온 모양인데 이해해요."

    정말 괜찮습니다.

    찻잔을 얌전하게 내려놓고 박비서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나갔다.

    송경환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신 후 뜸을 들이는 듯 시간을 끌었다.

    정화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심정으로

    회장의 움직임만 조용한 눈빛으로 관망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할 테죠?

    .....

    혹시 내 아들들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어요?

    아드님들이요?

    난 아들만 둘 둔 아주 불행한 아버지란 건 다 알려진 사실일 테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두 아드님 이야기는

    귀담아 듣질 않아서 잘 모릅니다, 회장님."

    회장의 고개가 휙 돌아 정화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그 말은 들리는 얘기는 많았지만 관심이 없어서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 뜻인가요?"

    ......

    "그렇다면 내가 좀 길게 설명해야겠네. 내 두 아들 중 큰아들은 나뿐만 아니라

    그룹 차원에서도 골칫덩어리에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고,

    뭘 맡겨도 말아먹는... 후유~ 나도 나이가 들어가서 슬슬 은퇴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가 곧 올 테고 기업 상속 등 생각해야 할 문제가 많은데도

    큰 아들은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이에요.

    둘째 아들은 자기 사업한다고 이미 미국 기업을 인수합병해서

    차근차근 준비 중인데, 큰아들은 우리 부부 걱정만 늘려주는 셈이지."

    언젠가 누군가가 회장의 큰아들은 개망나니란 얘길 했던 거 같기도 했다.

    사업 수완도 엉망이란 소문도 들어본 기억이 났다.

    호흡을 고르는 회장의 말에 더욱 귀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정화의 의아심이 증폭되고 있었다.

    [왜 이런 얘길 나한테 하는 걸까?]

    "그런데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게 있다고 얼마 전에 이야길 하더군.

    내 귓등으로도 안 들었어요. 그동안 망해먹은 게 한두 번 이래야지 말이야.

    그러던 자식이 이번엔 제법 계획서란 것도 만들어서 왔단 말이지.

    게다가 사전에 필요한 내용들까지 빼곡하니 적어 왔더라구.

    그 중에 호텔조리 전공자가 있다면 좋겠다고. 그래서 우리 그룹차원에

    모든 직원들 이력서를 전부 검토해봤더니 서정화씨가 유일하게

    호텔조리를 전공했으면서 요리사 자격증도 있고 또 기획실 근무 3년차인데

    업무 처리 능력도 뛰어나다고 모두 인정하는 인재라고 추천을 받았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내 큰아들, 시안이가 하고 싶어 하는 캐이터링 사업을

    서정화씨가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네에에에?

    시안이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잘 좀 보필해줬으면 해요.

    부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회장의 부탁은 은근한 압력처럼 다가와

    그녀는 자신에게 선택권이 전혀 없음을 강하게 느꼈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금방 답변을 하기엔 너무 엄청난 사건이었다.

    무릎 위에 얌전히 놓았던 두 손을 쳐다보던 눈을 들어

    회장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며칠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며칠... 기다릴 수 있어요, 답변이 내가 원하는 것이기만 하면.

    ......

    며칠이나 필요합니까, 서정화씨?

    결정하는 대로 부속실을 통해 연락드리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소곳한 태도로 인사를 하고 나가는

    정화의 뒷모습을 보면서 회장은 마음 한 구석이 싸해왔다.

    [...그 부모에겐 귀한 자식일 텐데... 잘하는 일인지...]

    기획실로 돌아온 그녀는 그나마 조용하던 성격에 더 말이 없어졌다.

    부장이하 모두가 대놓고 묻지 못할 정도로

    정화의 표정은 굳어져있었고, 침울해보였다.

    그녀는 치열하게 고민했다.

    대한그룹과 그룹 내 자회사들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탐구했다.

    동시에 창립자이면서 회장인 송경환, 그의 아내 김정숙, 큰아들 송시안,

    그리고 둘째 아들 송이안에 관한 인물 검색도 소홀하지 않도록

    샅샅이 뒤져서 챙겨보았다.

    차라리 둘째 아들이라면 나을 뻔했다.

    송이안이라면 믿고 따를만한 인물이었다.

    송.시.안.... 이 남잔 아니었다. 아무리 따져 봐도 답은 하나였다.

    일식당, 중식당, 멕시칸 식당...아주 요식업도 나라별로

    골고루 섭렵하고 말아먹은 인물.

    일식당을 개업하면 비브리오 패혈증이 발생해서 손님이 뚝! 끊기고

    멕시칸 식당을 오픈하면 향신료 가격의 폭등으로

    원가를 맞추기가 어렵게 되는 상황.

    하는 일마다 꽈배기처럼 꼬여서 운도 복도 지지리 없는 남자.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본 이미지와 사진은 멀쩡한 사람이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멀쩡을 넘어 잘 생기고 매력적인 인상의 소유자였다.

    모든 이들이 주목하는 동생보다 인물과 외모만 보자면 더 나아보일 정도였으니.

    이 정도 요식업으로 망해봤으면 그만 둘 만도 한데,

    왜 계속 먹는 사업을 고집하는 걸까?

    상식적인 의문이었다.

    재벌 아들이, 그것도 장남이 먹는 게 부족하진 않았을 테고,

    회장님 댁에서 먹는 걸로 자녀들을 괴롭혔을 일도 만무한데... 도대체 왜?

    [사랑에.... 사랑에 굶주렸었나?]

    회장에게 불려간 지 열흘 만에 정화는 스스로도 믿지 못할 답변을 내놓았다.

    하겠습니다.

    [하아~~ 내가 왜 그 때 그런 결정을 했었을까?]

    텅 빈 신혼집에 불 꺼진 거실 소파에 앉아 정화는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여린 손을 꼭 쥔 채 후회만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래... 하겠다는 그 결정부터 잘못됐던 거야....]

    *

    2. her story (2)

    서정화씨?

    네, 맞습니다.

    어떤 생각으로 부속실 근무를 하겠다고 자청했을까?

    네?

    ... 회장님께서 두둑하게 챙겨주신다고 하셨나?

    ..........

    것두 아님 고속 승진?

    ........

    말 많은 인간들도 별루지만 필요한 말을 안 하는 것들도 나 별룬데.

    것..것들이라고요....?

    쳇! 뭐 자존심은 있다 그건가?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내가?

    아니셨다면 지금이라도 본부 기획실로 가도 괜찮습니다.

    호오~ 나랑 기싸움을 해보겠다?

    ...........

    내가 원하는 비서의 자격은 딱 하나!

    .........

    "바로 그거야! 천근보다 무거운 입! 보고도 못 들은 척, 알고도 모르는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특별히 내 사생활에 관한 거 전부에 대해!"

    공업용 본드로 붙인 것 같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는 그녀를

    시안은 민망할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럴 땐 대답은 해야죠, 서정화씨!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사장은 개뿔! 암 것도 없는데 무슨!

    그는 벌떡 일어나 회장실의 문을 벌컥 열고 나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그녀는 망연자실, 어리둥절할 뿐.

    잠시 뒤에 정신을 차리고 그녀는 맥빠진 다리에 힘을 줘서 일어나는 중이었다.

    다시 회장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녀는 눈을 들어 새로운 등장 인물을 바라보았다.

    송이안입니다. 서정화씨죠?

    네, 그렇습니다.

    저희 형... 만나보셨지요?

    방금 뵀습니다.

    "뭐라 했든 맘에 너무 담아두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성격이 모가 나거나 심성이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

    "형님이 초안을 잡은 계획서... 제가 좀 더 구체적으로 계획했습니다.

    다음 달 초면 사무실과 회사 정관, 로고, 이름, 초기 투입 자금, 인원들이

    정해질 겁니다. 그 때부터는 대한그룹 기획실이 아니라

    주식회사 굿푸드로 정식 출근하시면 됩니다."

    그 때까지 전 무엇을 하면 됩니까?

    특별히 하실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죄송하지만 계획서.. 저도 좀 볼 수 있을까요?

    앞으로 해야 할 업무나 일에 대해서 나름대로 윤곽을 잡아보고 싶습니다."

    아~ 그러신가요? 그러시다면 제가 카피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송부회장님.

    그녀가 나붓이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이안이 툭! 말을 던졌다.

    한가지...

    네?

    "시안형... 나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텅 빈 사람입니다.

    마치 밑 빠진 독처럼, 깨진 유리창처럼... 겉모습만 보시고 판단하시지 말고

    속마음을 헤아려주시길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정화는 동생 이안의 말에서 형을 향한 애틋함을 읽었다.

    ........

    "덧붙인다면, 그렇다고 서정화씨의 마음까진 허락하진 마십시오.

    누가 뭐라 해도 시안형의 외모, 배경, 말솜씨, 매너, 자유로운 영혼...

    충분히 매력적인 남자입니다.

    하지만 상사로만...상사로만 대해주시길 감히 말씀드립니다."

    이안의 말엔 애틋함을 넘어서 휑한 서글픔이 담겨있었다.

    그녀는 이안을 향해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동생으로서 드릴 수 있는 말씀은 다 드렸습니다.

    혹시나 후에 제게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았다는 원망이나 후회가

    생기는 일이 없기를 당부 드립니다.

    형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정화씨를 위해서."

    [여자문제 복잡하고, 망나니같은 형이니 조심해라.

    해줄 얘긴 다 해줬다...그런 뜻이겠지?]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송부회장님."

    지금까지 남들이 겪지 못했던 어려움과 고난도 잘 헤쳐 왔으니

    송시안과 관련된 문제라면,

    예측이 가능한 문제라면 자신이 있었다, 정화는.

    *

    아빠!

    어~ 우리 딸! 피곤하지?

    "에이~ 난 하라는 공부만 하는데 뭐가 피곤해요?

    아빠가 훨~~씬 피곤하시겠죠!"

    "난 괜찮다, 허허허. 퇴근할 때 매일 우리 고명딸이랑 같이

    집에 가니 행복하기만 한 걸?!"

    정말요?

    그럼, 그렇다마다.

    아빠... 오늘... 대학입시 전공에 대해서 입시담당 선생님과 상담했어요.

    ......

    호텔조리학 공부해보고 싶어요.

    ... 아빤... 반대다!

    에에에? 왜요? 난 아빠가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힘든 길이야. 돈 몇 푼 받는 직업으로는 모르겠지만

    음식을 만든다는 자체는 쉽게 생각해서 결정할 일은 아닌 거다."

    에이~~ 아빠 명성에 내가 누가 될까봐 걱정하시는 거죠?

    "누라니, 무슨. 먹거리는 인간에게 정말 중요한 거니까,

    그래서 제대로 하려면 힘들다는 거지. 그 힘든 길을 가겠다는 거,

    아빠는 인생 선배로써 말리로 싶은 거고."

    "그래두 아빠, 싫증나면 이 담에 결혼해서

    사랑하는 남편하고 자식들한테도 맛난 요리 해줄 수 있으니까...

    시간 낭비는 아니잖아요, 아빠. 나, 해보고 싶어요."

    서경인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의 의지를 꺾는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현재로썬 아직 철없어 보이는 딸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지켜볼 뿐.

    그 해 12월, 정화는 원하던 한강대학교 호텔조리학과에 차석으로 입학하였다.

    화려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그녀를 사모하는 남학생들이 제법 따라다닐 만큼

    정화는 숨겨진 원석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대학생이 되었다.

    호텔업계에선 1,2위를 다투는 외국계 특급 H호텔 한국 지점의 총주방장인

    아빠, 서경인이 집에서 늘상 해주던 요리를 먹고 보고자란 그녀의 손놀림은

    동급생은 물론 선배들 중에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 어려운 한식요리사 자격증은 2학년이 되기 전 겨울방학에 취득했고,

    3학년이 되어서 대학생 대상 전국요리대회에서 당당하게 입상했다.

    이를 계기로 그녀의 단아한 요리 솜씨는 한강대학교는 물론이고

    대학가에서는 꽤나 입소문을 타고 번져갔다.

    니가 한강대학교 요리퀸 서정화니?

    ...누...누구세요?

    나? 복학생.

    이름이 학생이예요? 성은 복이고?

    푸하하핫! 너 좀 재밌는 애구나!

    애라뇨? 말을 좀 가려서 하시죠!

    아쿠! 한 성격한다 이건가?

    정화의 목소리는 한 톤 정도 올랐고,

    복학생은 그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내 이름은 왜 확인한 거죠?

    대화를 하려면 상대를 확인해야하는 건 기본이니까.

    그러면 복학생이라는 그쪽의 이름도 얘길 하는 게 기본 아닌가요?

    "네~ 알겠습니다. 제 이름은 천상윤.

    다음 학기 호텔조리과 4학년 복학 예정자!"

    그런데요?

    복학생 오빠가 대학문화에 다시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는데...

    제가 왜 도와야 하는데요?

    왜냐...왜냐... 내가 너한테 관심이 많으니까.

    죄송합니다, 저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상윤은 적극적으로 정화에게 다가왔다.

    아예 정화와 똑같은 과목을 수강했고,

    늘 그녀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정화의 마음은 상윤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 날은 중식 요리사 자격증을 준비하느라고 경인이 특별하게 허락해 준

    H호텔 주방에서 밤늦도록 남아 이것저것 시도를 해보던 중이었다.

    상윤도 함께였다.

    정화야~ 너랑 나랑 졸업해서 근사한 식당 하면 정말 좋겠다, 그치?

    난 식당 할 생각이 없는데, 선배?

    왜? 총주방장님도 도와주실 텐데.

    "후훗. 선배가 우리 아빠를 잘 몰라서 그러나본데 우리 아빠

    내가 요리하는 거 탐탁지 않게 생각하셔. 너무 어렵고 힘든 길이라고."

    "무슨 소리야. 요즘 같은 세상에, 느이 아빠 같은 분이 좀 옆에서 도와주고

    홍보 마케팅 잘하면 금방 일어설 수 있지!"

    "난... 요리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음식과 관련된 사업을 하고 싶거든.

    그러려면 경영이나 그 밖의 분야도 좀 더 공부하고 싶고.

    그래서 졸업하면 난 대학원 진학하려고."

    서정화, 그러지 말고 이 오빠랑 멋진 식당 하나 같이 하자, 응?

    선배! 일주일만 있으면 자격증 시험 봐야 하는데 요리에 집중하자, 응?

    옆에서 정화에게 지분대는 상윤이 밉진 않았지만,

    요리 연습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에는 조바심이 났다.

    신경을 써서 소스를 만들고 맛을 보는 순간에 경인이 주방에 들어섰다.

    정화야~ 이젠 슬슬 정리를 해야 하는데... 다 잘 됐니?

    아~뇨. 상윤 선배가 자꾸 말 걸고 엉뚱한 소릴 해서 잘 안 된 것 같아요.

    "아, 아닙니다, 총주방장님.

    저는 우리의 밝은 미래에 대해 의논을 했던 것뿐입니다!"

    우리? 밝은 미래?

    "그...그게... 좀 있으면 저나 정화도 졸업하니까

    둘이서 뭔가 시작하는 게 어떤지..."

    자네는 이번에 중식 자격증을 딸 수는 있겠는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한식 자격증도 없으면서 무슨 중식이야?! 요리사한테 자격증이 중요한 건

    아니라고 해도 손맛이 없으면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자네는 이렇게 정화 뒤만 쫓아다녀서 어떻게 하려고 하나, 응?"

    경인의 목소리엔 한심하다는 감정과

    맘에 들지 않는다는 불만이 함께 섞여있었다.

    딱딱해진 분위기를 감지한 정화는 사용했던 요리 기구들과

    흩어져있던 주방을 깔끔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총주방장님, 졸업하고 정화랑 제가 식당 하나 오픈하는 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식당 하나?

    네!

    식당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멋지고 폼나는 게 아닐세.

    "그렇죠! 저도 압니다. 정화가 총주방장님 닮아 손맛도 일품이고 자격증도

    다 갖추게 되면 주방은 정화가 맡고 경영이나 그 밖의 것은

    제가 다 책임지면 환상의 팀이 될 것 같은데요?"

    경인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져갔다.

    [힘든 일은 몽땅 정화가 하고 자네는 숟가락이나 얹어보겠다?]

    그렇잖아도 마땅찮아 했던 녀석의 본심이 드러나는 것 같아 화가 치밀었다.

    지금도 정화 혼자 뒤처리를 묵묵하게 하는 것도 속이 부글부글한데,

    이 녀석은 주둥이만 놀리고 있다는 현실이 이 녀석과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아 경인의 심기는 점점 더 불편해졌다.

    총주방장님이 허락만 해주시면 정화도 마음을 굳힐 것 같은데....

    졸업 후의 일은 졸업 후에 걱정함세. 자네는 졸업이나 할 수 있겠나?!

    더 이상은 언급하지 말라는 명령을 담아 상윤을 찍어 내리는 눈빛을 쏘았다.

    H호텔 주방의 불을 끄고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를 올라탔다.

    경인은 1층과 지하 2층 버튼을 꾹 눌렀다.

    자네는 그만 돌아가게. 정화는 나랑 가면 되니까.

    에이~. 저도 좀 태워주시죠. 지하철역까지 만이라도...

    정화의 마음이 축 쳐졌다.

    선배! 오늘은 그냥 혼자 가는 게 좋겠다~

    야! 왜? 이 늦은 시간까지 너 시다바리 해줬음...

    그 사이 1층에 도착했고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열렸다.

    자네는 내리지. 좋게 봐줄 수 있을 때!

    정화는 째려보는 상윤의 눈을 피했다.

    서정화!

    내일 학교서 봐, 잘 가.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거리며 상윤은 투덜거리면서 발을 떼었다.

    에잇! 지하철역까지 나보고 걸어가란 말이야? 으이씨...

    상윤의 상스러운 뒤의 말은 닫히는 문사이로 멀어져갔다.

    경인은 자기가 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딸을 지긋하게 바라봤다.

    그런 딸이 안쓰러워 경인은 딸의 어깨를 쓰다듬어주었다.

    그제야 고개를 든 정화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찡그렸다.

    오늘따라.... 후유... 왜 저러는지...

    넌 모르겠냐? 아빤 금방 알겠는데.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신중하게.

    네에~ 아빠.

    다시 말이 없어진 두 사람은 차에 올랐고, 경인은 한국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한식명장의 손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지하주차장에서 호텔 정문을 빠져나와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을 때

    인도를 걸어가고 있는 상윤의 추욱 처진 어깨가 보였다.

    어쩔 수 없이 그를 쳐다보는 정화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아빠, 경인.

    왜 신경이 쓰이냐?

    ......

    아빠가 볼 때 저 놈은 널 진짜 아끼는 태도가 없어!

    ......

    대꾸를 못하는 딸이 안스러워 손을 뻗어 손등을 토닥이며 바라보았다.

    그때 갑자기 뛰어드는 검은 물체.

    아빠!!

    정화의 외침 소리가 울부짖음으로 변했다.

    *

    3. her story (3)

    정신을 차렸을 때 정화 눈에 보이는 건

    너무나 황량한 표정의 엄마, 화영의 얼굴이었다.

    눈알이 너무 뻑뻑해서 마치 눈동자를 움직일 때마다

    끼익끼익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정화야!

    엄마! 아빤? 아빠는?

    ...아빤...중환자실에 계신다...

    ...중...중환자실?

    그..그래. 여긴 응급실이고.

    무슨 일이... 아빠한테 무슨 일이?

    "아빤 튼튼하다 못해 철옹성 같은 호텔 담벼락을 들이 박았단다.

    아빠는 정신을 잃었고.."

    엄마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지만

    정화가 알아야 할 모든 걸 알려주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나만 아니었다면 아빤 한 눈 팔지 않았을테고, 그랬다면...]

    그 때 뛰어든 자전거... 자전거에 탄 사람은?

    그 사람이 신고했어. 응급차도 부르고. 다친 덴 없고...

    엄마.. 아빠 상태는?

    의식은 찾으셨어.

    정화가 깨어났다는 보고를 들은 의료진들이 몰려오더니

    이것 저것 묻고 진단한 후 일반 병실로 이동시켰다.

    병실로 올라온 그녀는 도저히 침대에 누워만 있기엔 맘이 편칠 않았다.

    링거홀더를 밀면서 중환자실로 향했다.

    간호사가 면회 시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만류하려 했지만

    그녀가 입고 있던 환자복 덕분에 특혜를 받아 경인을 면회할 수 있었다.

    경인의 코에는 호흡기가 꼽혀있었고,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가슴의 높낮이가 얼마나 중한 상태인지 쉽게 짐작하도록 했다.

    말없이 조용한 가운데 정화의 두 눈에는 눈물이 밀려 내려왔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정화의 호흡마저 가쁘게 만들었다.

    흐..으...윽... 아빠... 아빠... 나 때문에...나 때문에...

    여러 링거가 꼽혀있는 오른팔은 피해 왼팔을 아래위로 쓸어내리며

    정화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막으려 입을 틀어막았다.

    그 소리에 경인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ㅈ...저....정화야...

    아빠?!

    정화야... 어디.. 아픈?

    아빠. 난 괜찮아. 아빤?

    아...아빠두...

    괜찮다는 표현을 하고자 애쓰는 경인을 내려다보며

    정화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했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 경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믿긴 어려웠다.

    그때까지 왼팔을 쓰다듬던 정화는 괜찮다는 경인의 말에 속이 상한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운이 없는 정화의 악력이 약한대도 경인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순간, 정화는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간호사가 다가와는 더 이상은 무리라며 조용히 속삭였다.

    "아빠! 면회 시간에 다시 올게요. 난 괜찮으니까,

    아빠만, 아빠만 기운 차리시면 되요, 아셨죠?"

    정화의 울먹임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려고 애쓰는 경인의 모습이

    안타깝기만 했다. 간호사의 안내로 중환자실 입구까지 다다른 정화는

    간호사에게 몸을 돌리며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혹시... 서경인 환자... 왼쪽 팔에 부상이 있나요?

    "아~ 네. 어떻게 아셨죠? 사고 당시 오른쪽으로 몸을 틀고 조수석에 앉은 분을

    감싼 상태에서 그대로 추돌이 일어났기 때문에 왼쪽 어깨와 팔 부상이

    가장 심합니다. 제자리에 붙어있는 것이 기적일 정도로요.

    얼마나 다행 이예요? 오른쪽이 아니라서."

    간호사의 답변에 정화는 무너져 내리는 다리를 주체하기 어려웠다.

    [아빠... 날... 날 보호하려고 오른쪽으로!]

    어멋! 환자분! 왜 그러세요?

    아...아..아닙니다.

    가까스로 링거홀더를 의지하고 병실로 돌아온 정화는

    침대에 널브러져 베개에 머리를 박고 참았던 울음을 토해냈다.

    한식요리명장인 경인은 왼손잡이였으니까!

    아...아빠!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어..어..엉....

    정화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고,

    그녀는 자기 때문이라는 자책감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정화는 며칠 후 퇴원할 수 있었지만 경인은 그렇지 못했다.

    총주방장 직책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H호텔 그룹 회장의 선처를 경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혹독한 재활 과정을 거치면서도 경인의 왼팔은

    더 이상 수려하고 정교한 칼 다루는 솜씨를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갔고, 그 사이 정화는 졸업을 했다.

    물론 대학원 진학의 꿈은 접어야했다.

    경인의 상태가 절망적이란 소식에 상윤은 바로 정화에게 이별을 고했다.

    상윤의 저질스런 밑바닥이 드러난 사건이

    경인의 사고였음이 정화는 속상하기만 했다.

    졸업과 함께 정화는 일부러 음식이나 요리와는

    거리가 먼 회사들만 선택하여 지원했다.

    서너 번의 탈락 경험이후 대한그룹에 입사하게 되었다.

    명장으로서의 명예와 권위를 잃어버리게 만든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생각은

    발랄하고 생기 넘치던 정화의 성격마저 황폐하게 변화시켰다.

    가장 활발하게 일할 나이에 경인은 재활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처지로 전락했고, 대학원 마지막 학기를 다니던 오빠 정원은 대학원을 마치고 떠나려고 했던

    유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원은 유학 대신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동생 정수는 대학에 입학하고 1학기를 마친 후 군복무를 위해 입대하였다.

    그러니 화목하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집안 분위기마저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경인은 경인대로 자녀들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없는 자신이 처량하게만 느껴졌다.

    그렇다고 주저앉자니 하나뿐인 고명딸, 정화가 자꾸 눈에 밟혔다.

    경인에게 언제나 애교부리고 매달렸던 딸이 사고 이후 한없이 멀어져만 갔다.

    사고로 잃어버린 명장이란 명예보다 딸과의 서먹해져버린 거리가

    경인에겐 더 큰 손실이었다.

    *

    Rrrrrrrrrrrrrr

    <사모님>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거실 소파에서 꼼짝을 안하던 정화는

    부르르 떠는 휴대폰을 들고 대답했다.

    여보세요.

    <시안이는?>

    잠깐 나갔다 온다고....

    <결혼식 방금 마친 신랑이 잠시 어딜 간다고 나갔다고?>

    ....아마 친구들 만나지 않을까요?

    <친구? 친구 만나러 간 사람이 휴대폰은 왜 안 받는 건지...쯔쯔쯧.>

    정화는 전화를 해보지 않았으니 받는지 안 받는지도 모른다.

    <시안이 들어오면 나한테 전화 달라고 하렴.>

    네. 알겠습니다, 사모님.

    <..언제까지 시어머니한테 사모님이라고 할 참이야, 응?>

    죄송합니다. 아직....

    <...그래, 알겠다. 쉬어라.>

    마음이 마냥 편하지만 않은 시어머님이다.

    마음을 서로 나눠가지 않은 사람은 또 있다. 남편, 송시안.

    휴대폰을 손에서 떨궈내며 그녀는 이 집에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구부렸던 다리를 피며 일어났다.

    [앞으로 살아야 할 집이니까.... 한 번 둘러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몸을 일으켜 세워서 스위치를 찾아 조명을 밝혔다.

    거실 중앙에 서서 눈동자만 돌려 살펴본 집은 뭐든 커보였다.

    상대적으로 작게만 느껴지는 자신. 서.정.화.

    먼저 거실 옆 주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냉장고도, 식탁도, 김치냉장고도, 싱크대도 모두 컸다.

    10인용 압력밥솥을 발견하곤 정화의 입술을 비집고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10명이나 되는 사람이 이 집에서 오손도손 함께 밥 먹을 기회가 있을까?]

    남편 시안도 집에서 식사할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을 텐데 말이다.

    주방 옆 다용도실 문을 열어보았다.

    세탁기도, 빨래판이 달린 세탁싱크대도 역시 컸다.

    수납장 안에 도열하고 있는 청소기도, 다리미도 대용량이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조용히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와 오른쪽 옆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는 방은 썰렁했다.

    하다못해 붙박이장조차 없는 그 방의 용도가 궁금했다.

    울룩불룩 튀어나온 벽면도 이상했다.

    정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닫고 거실 쪽 욕실 문 열었다.

    아무 것도 없는 욕실 안은 휑했다.

    거실에 인접한 또 다른 문을 열었다.

    시안의 서재로 꾸며져 있는 방이었다.

    정화는 천천히 책장 앞으로 다가가 꽂혀있는 서적들을 훑어보았다.

    서적 제목들로만 봐서는 시안의 경영 이론과 철학은 누구보다 뛰어나야만 했다.

    하지만 3년 동안 상사로 모셔온 시안은 경영에 대해 문외한처럼 보였다.

    또다시 ‘피식’ 웃음이 재생되었다.

    서재 문을 닫고 거실 옆 복도를 따라 들어가니 나란하게 방문이 마주보고 있었다.

    어떤 쪽을 먼저 열어볼까 하다가 왼쪽 문고리를 돌렸다.

    침실이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남편 시안의 침실이었다.

    모르는 사람의 침실을 보는 것처럼 건조한 눈빛으로 살폈다.

    모든 것이 베이지색이었다.

    침구도, 베개도, 커튼도, 업라이트 조명갓 조차도 베이지였다.

    누구의 손길도 거부하는 듯했다.

    괜스레 서글픔이 화악! 몰려왔다.

    조심스럽게 시안의 침실 문을 닫으며 돌아섰을 때

    다시 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도 난 지지리 궁상에, 조심을 떨어야만 할까?]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졌다.

    맞은 편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큰 눈을 껌벅여 다시 확인했다.

    옅은 살구색 으로 마무리된 침실이었는데

    누가 봐도 이 방의 주인은 여자여야만 했다.

    잠시 멍한 눈빛으로 둘러보던 정화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결혼식을 몇 시간 전에 끝낸 신혼부부가 각 방을 사용해야 한다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 가슴이 미어져왔다.

    사랑받지 못하는 신부. 편의상 이뤄진 동맹적 관계.

    편리에 의한 형식적 결혼이기에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론 신혼집을 마련한 시안이 자신을 위해 인테리어를 했다는

    사실에도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고 올라왔다.

    잠깐동안이지만 이 사실에 감사해야 할지,

    아니면 따져 물어야할지 헷갈리기도 했다.

    레이스 커튼아래 자그마하지만 클래식한 콘솔과 1인용 소파도

    처연한 냉기를 품고 있었다.

    침실 끝에 연결된 워킹 클로젯 룸과 욕실까지

    이 방의 주인이 될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이 사람의 배려일까? 아니면....]

    다시 차올라오는 슬픔.

    자기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신혼집.

    이 집엔 바꿔 입을 옷가지 하나 없는 신세.

    그 때 들려오는 생소한 기계음 소리.

    Zzzzzzzzzzz

    감상에 젖어있던 정화는 서둘러 거실로 나왔다.

    거실, 부엌, 현관 앞에 달려있는 비디오폰 소리였다.

    네.

    <707호이시죠?>

    그렇습니다.

    <아~ 사모님! 여기 관리실인데요, 용달 배달이 왔습니다.>

    [용달 배달이라니... 이 집을 알고 있는 사람은

    사모..아니, 시어머님, 남편 송시안과 나 뿐인데...]

    아저씨, 올 게 없는데요.

    <잠시만요~~>

    말꼬리를 길게 늘이던 관리실 아저씨대신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707호 서정화님 아니십니까?>

    맞습니다만....

    <그러면 문 좀 열어주시죠. 저희도 빨리 물건 내려놓고 돌아가야 하니까요.>

    벌컥...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관리실 아저씨 좀 바꿔주시겠습니까?

    <네~ 사모님~>

    "제가 지금 혼자 있는데... 모르는 곳에서 배달이 왔다고 하니까

    제가 좀 불안해서요, 아저씨가 같이 와주실 수 있는지요?"

    <아..네,네,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20분 정도 시간이 흐르고 현관벨이 울렸다.

    정화는 현관문을 빠꼼히 열었다.

    그 정도 열린 문으론 택도 없는 엄청난 양의 박스들이 복도에 가득했다.

    아니, 이게 다....뭐죠?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정화의 눈도, 말도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

    4. his story (1)

    신혼집을 나온 시안은 답답한 가슴을 달래기 위해

    올림픽대로를 지나 인천대교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서.정.화.]

    너도 이젠 결혼할 때가 되지 않았니?

    .....

    "사업도 그 정도면 손익 분기점을 넘긴 것 같으니

    가정을 꾸리는 것도 나쁘진 않을게다."

    .....

    왜 아무런 대꾸가 없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느 귀한 집 딸 인생 망치지 말고

    조용히 혼자 살라고 하셨잖아요. 갑자기 마음이 바뀌신 이유가 뭡니까?"

    늬 엄마 맘고생을 좀 덜어줄 때도 되지 않았니, 네 나이가.

    제 나이가 어때서요. 한창 즐길 나이죠.

    시안아!

    결혼하고 싶지도 않지만 나랑 결혼하겠다는 여자도 없어요, 회장님.

    "꼭 그렇게만 생각할 건 아니다. 죽고 못 살 만큼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면

    좋겠지만, 네게 도움이 될 만한 여자라면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

    "서비서만한 여자 찾기도 어렵지 않겠니. 네 업무도 잘 이해하고 있고.

    니 얘기 어디로 옮기는 일도 없었고. 차분하고 마음 착하고 변덕스럽지도 않고."

    지금... 누구라고 하셨어요?

    어째 니 애비보다도 못 들어?

    회장님!

    서정화 비서.

    제가 하한가인거죠?

    뭐?

    "대한그룹 장남이고, 명목상이라고 해도 굿푸드회사 사장인 제 배우자 자리를

    탐내는 여자가 없다는 의미잖습니까. 워낙 제가 형편없으니까 아무리 훌륭한

    집안 배경이라고 해도 회장님이 사돈 맺고 싶어 하는 집안에선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구요."

    시안아!

    "서비서도 그 집에선 귀한 딸 일텐데... 저같은 망나니랑 결혼시키겠습니까?

    서비서가 하찮은 부하 직원으로 보이시나 보죠? 그 여자 인생 같은 건 신경도

    안 쓰는 악덕 사장 같아 보이지 않을까요? 회장님 장남이?"

    "... 이 애비가 너에게 좋은 아버진 아니라는 거 안다.

    그래도 널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아버지 때문에 누리지 못한 안정적인

    가정을 갖기를 바랄 뿐이고. 서비서라면 너에게 안정적인 가정을

    만들어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다."

    서비서가 저랑 결혼은 한데요?

    "아직 물어보진 않았다. 결혼 얘긴 네가 꺼내야지.

    이 애비가 볼 땐 가까운 곳에서 배우자를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단 말을 하는 거다."

    ...회장님 말씀... 안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아버진 굿푸드 회사를 3년 동안 건재하게 이끌어온 게

    니가 한 눈 안 팔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니 눈을 회사에 고정시켜놓은

    사람이 서비서라고 믿는 거고. 니 애비 생각이 맞다면

    서비서와의 결혼... 나쁘지 않다고 본다."

    회장님!

    "잘 생각해봐라. 서비서도 인간적으로 네게 환멸을 느꼈다면

    3년이란 세월 널 상사로 모시고 있진 않았을 테니까."

    [서정화...]

    그녀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필요한 말은 어떻게든 시안에게 정확하게

    전하는 재주를 지닌 여자였다. 말로 설득이 안 되면 휴대폰 문자로,

    책상 위 메모지로, 혹은 클럽까지라도 따라와

    맡겨진 임무를 성공시키는 강단도 있었다.

    비서를 하겠다고 했을 때 시안이 부탁한 들은 것도 못 들은 척,

    본 것도 못 본 척, 아는 것도 모르는 척 하는데 급이 있다면 블랙 벨트 급이었다.

    3년 세월동안 그녀가 화를 내는 모습이나

    목소리 톤이 올라가는 경우를 경험한 적이 없다.

    물론 기뻐서 소리 내어 웃거나 손뼉 치며 즐거워하는 모습도 발견한 적이 없다.

    서정화... 떠올릴 때마다 동시에 떠올려지는 단어는 단 하나. 침잠.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성정이 깊고 차분함.

    오죽하면 ‘침잠’이 시안의 휴대폰에 저장된 그녀의 이름이었다.

    송경환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 시안은 자기도 모르게

    정화를 결혼 배우자로 대입해서 바라보는 순간이 많아졌다.

    [그녀가 아내라면?]

    편할 것 같았다.

    속속들이 자신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여자.

    친구들과 놀 때 가는 클럽, 기분이 꿀꿀할 때 가는 바, 1단계 여자를 데리고

    가는 레스토랑, 2단계 여자 관리를 위해 선물을 사는 주얼리 숍,

    3단계 진입을 원하는 여자들을 끊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들까지

    서정화가 모르는 시안의 어두운 면은 없다고 보는 게 정확할 거다.

    하지만 시안의 속내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을 터.

    시안은 자신만의 진실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으니까.

    가끔 동생 이안에게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들기도 했었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오랜 세월 왜 방황하며 살아왔는지,

    아직도 한 곳에 지긋이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서정화...

    경환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 전에 말아먹은 사업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사무실 출근도 일주일에 세 번 이상 한다.

    얼마 전엔 손익분기점을 넘어서는 수익을 내기도 했다.

    시안이 사업이란 걸 한 이후 처음 본 흑자였다.

    큰 수익은 아니었지만, 시안에겐 큰 의미를 주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시안은 안다. 서정화... 그녀 덕분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계속해서 시안의 휴대폰은 울려댔다.

    어머니 김정숙. 무시했다. 들을 소리는 뻔하다.

    [서정화와 결혼한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오랜 방황을 끝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랑의 감정은 십대사춘기 이후로 믿어본 적이 없다.

    사랑처럼 요물같은 게 없었다.

    죽을 것처럼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져도, 잃어버려도 죽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면 하물며 잊기도 했다.

    하긴 죽을 것처럼 사랑했던 게 아닐 수도 있다.

    자기를 향해 달려드는 많은 여자들은 시안이 아닌 시안의 것이 될 것들에

    목숨거는 투자자들 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입으로는 시안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사랑이라고 우겼다.

    그러나 시안의 사랑을 진정으로 원한 여잔 그 누구도 없었다.

    그래서 시안은 자기 배경을 이용해서 달려드는 여자를 적당한 선에게

    떨궈내는 고수가 되었다. 그래도 떨어지지 않는 여자를 만나게 되면

    이안에게 처리를 부탁하면 직방이었고.

    사랑을 믿지 않기에 사랑의 감정을 뺀 ‘침잠 서정화’와는

    오래도록 단백하고 평온한 관계를 유지할 것 같았다.

    언젠간 해야할 결혼.

    현재 시안의 삶에서 잡을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

    결정적으로 부모님의 관심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이 믿을 만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고,

    서정화는 부모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패였다.

    비슷한 재력이나 정치력을 지닌 가문의 여자보다 훨씬 깔끔할 것 같기도 했다.

    만약 헤어 진다해도 말이다.

    서정화는 송시안에게 청와대 지하에 있다는 벙커같은 안전지대였다.

    심지어 이안이 한 번은 이렇게 애길 했었다.

    형, 그거 알아? 서비서 근무한 뒤로 내가 좀 편해진 거?

    사장과 비서 관계가 아니고 남편과 아내 관계가 된다면 동생 이안은 물론이고

    부모님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편해질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생겨났다.

    [그럼 서정화는 뭘 얻을 수 있지?]

    그녀가 바라는 것은 사랑도 아니었지만 물질도 아니었다.

    잘은 모르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자신과 꼭 닮은 공허함을 느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도 가족들과 겉돌고 있음을 가끔 인지할 수 있었다.

    자기처럼 가족을 벗어나길 바란다면

    자기와의 결혼이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

    그녀가 원하는 게 무관심의 자유라면

    맘껏, 충분히 누릴 수 있게 해줄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송시안에 대한 신뢰는 없겠지만 적어도 ‘송시안’의 배경과 지위는

    그녀의 가족들도 안심할 만한 조건이니까.

    시안과의 결혼이 그녀에게도 그리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고 파악했다.

    *

    인천대교고속도로에 곳곳에 매달린 속도위반 카메라를 무시하고

    시안은 고속질주했다.

    인천대교를 지나자마자 기념관 휴게소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차에서 내리는데 용달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부탁한 짐을 가지고 논현동에 도착했다고.

    그가 신혼집을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정화의 물건들을 그녀 어머니에게 부탁해서 챙겨달라고 했고,

    용달회사 직원들을 합정동 그녀의 집에 보내어 짐들을 싣고

    논현동 신혼집으로 배달용역을 부탁했었다.

    친정 엄마에게조차 신혼집 주소를 알려주지 않는

    정화의 심정을 시안은 충분히 이해했다.

    그래서 그 정도의 귀찮음은 감수하는 게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까지 결심한 여자에게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믿었다.

    그녀의 짐들이 도착할 무렵 그녀와 함께 한 집에 있기가 쑥스러웠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짐을 풀면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짐작했다.

    자기가 싸지도 않은 본인의 짐을 적응도 안 된 신혼집에서 풀면서

    느낄 공허함을 위로할 방법도 몰랐다.

    남편이란 남자를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에겐 그건 또 다른 수치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시안을 연애의 달인이라고 여겼지만 시안은 보다 적극적이거나 깊은 관계로 진입되기 전에 여자를 밀쳐내는 기술의 달인이었을 뿐이다.

    그는 사랑이 뭔지, 여자의 속성이 뭔지 모른다.

    전화 하셨어요?

    <어디냐?>

    잠시 나왔어요.

    <잠시 나온 데가 어디냐고...>

    ......

    <시안아!>

    ...네.

    <서비서.. 사랑하진 않겠지. 사랑하라고 강요도 안한다.

    하지만 여자 맘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는 주지 말거라.

    버려진 유기견한테도 하지 못할 일은 정화에게도 하지 마라.

    같은 여자로서 부탁한다. 그러면 여잔 사랑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적어도 무시당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

    <잠은 꼭 집에서 자라. 너를 낳고 또 이안이를 임신하고 낳기 전까지

    느이 아버지는 집에 들아오지 않았지. 그 때 내 불안함이 네게 그대로

    전해져서 네가 방황하는 건 아닐까... 내가... 마음이... 너무....흐..으...윽>

    "어머니.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어머니 탓 아니에요, 내가 살아온 세월.

    내가 그렇게 살기로 맘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산거예요.

    어머니 맘 충분히 알아요. 집엔 꼬박 꼬박 들어갈 테니 걱정마시구요.

    오늘... 나 때문에 지셨던 평생 짐 벗은 날인데... 두 다리 쭉 뻗고 주무세요."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며 실제로 시안은 그렇게 믿었다.

    어머니의 평생 짐이 된 자신이 결혼함으로써 정숙의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것마저도 고마운 일이라 생각했다.

    물론 서정화는 엄한 짐을 평생 떠맡게 될 형편에 처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안은 느낀다.

    서정화는 자신을 짐짝 취급은 안할 것이고 자신의 불편함을

    누구에게나 쉽게 발설하지 않을 여자란 걸.

    그녀는 그런 여자였으니까.

    한참을 바다만 바라보던 시안은 시계를 들여다보고 시간을 확인했다.

    마룬색 포르쉐 카이엔에 올라탄 그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기 위해 시동을 걸었다.

    올림픽대로로 들어들면서 결혼식 전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을 깨달았고,

    즉시 허기가 밀려왔다.

    *

    5. his story (2)

    서비서.

    네, 사장님.

    지금 내가 하는 얘기 신중하게 듣기 바래.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정화의 눈빛은 차분했다.

    시안의 목소리로 짐작컨대 가벼운 주제는 아닌 것을 눈치 챈 듯 했다.

    내가 결혼이란 걸 하려고 하는데...

    그녀의 고개가 번쩍 들려올라왔다.

    푸흡! 결혼과 내가 그렇게 안어울리나?

    아...아닙니다, 사장님.

    누구랑 했으면 좋겠어, 내가 결혼을 한다면?

    "....글쎄요. 지난 번 J통운의 둘째 현주양도 좋아하셨던 것 같고,

    MK물산의 외동따님인 재인씨도..."

    현주는 좀 뚱해서 싫고, 재인인 너무 따지는 성격이라 별룬데... 다른 여자들은?

    ... PME그룹의 막내 따님은 어떠세요? 제가 전화를 여러 번 받았었는데요.

    크큭.. 걘 아직 어리다구! 나랑 10살은 차이가 나는데...

    정화는 더 이상 생각해낼 수 없는지 말간 눈으로 시안을 바라봤다.

    왜, 더 이상 후보자가 없나? 나도 헛살았군!

    .........

    서비서 아나?

    뭘... 말씀이십니까?

    서비선 참... 거짓말에 서툴러!

    ........

    서비서, 나랑 결혼하는 건 어때?

    네에에?

    그녀의 눈동자가 왕솔방울만큼 팽창했다.

    "내년 꽉 찬 서른이니 빨리 결혼하라 성화일 거고, 같잖은 사장 밑에서

    험한 꼴 당할까봐 노심초사하실 텐데... 다른 남자 없으면

    나랑 결혼이란 걸 해보는 게 어떠냐고?"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사장님.

    어딜 봐서 내가 농담하는 거 같아?

    결혼은 비서가 아닌 사랑하는 여성과 하는 겁니다, 사장님.

    서비서와 나, 굿푸드 3년간 잘 해왔잖아, 문제없이.

    업무와 결혼 생활은 다른 영역입니다, 사장님.

    그러니까! 나랑 결혼을 업무처럼 해보자고!

    ??????

    "서비서 성격으로 뭐든 잘하지 않겠어? 조용하고 참하게. 평지풍파, 불란 없이. 게다가 남편 될 내가 서비서를 집에만 꽁꽁 묶어두지 않을 거고,

    누리고 싶은 대로 자유를 누리게 해줄 것이고,

    물론 서로 완벽하게 사생활은 보장하면서."

    정화의 입술은 한일자로 굳게 다물어졌다.

    "서비서는 날 따라다니는 여자들 잘 알잖아.

    적당히 끊어내고, 또 적당히 둘러대기도 하면서.

    나도 천하 재수탱이긴 하지만 집안 막강하고 재력 빵빵해서 나를 옥죄고

    제대로 된 남편 노릇 요구하는 여자와 결혼 생활 유지할 자신 없거든.

    서비서도 나이 서른에 부모로부터 벗어나 맘대로 살 수 있으면

    나쁘지 않을테니까. 서비서 친구들 사이에선 내 배경 때문에 결혼 잘한다고

    부러워는 할테니 그리 기죽지 않게 자존심세울 수 있고,

    서비서라면 우리 집에서도 반대는 안 할테니 난 편하고.

    서비서와 나, 직장에서와 같은 파트너십으로 결혼한다면 서로 윈-윈 아닐까? "

    정화의 다물어졌던 입술을 가르고 얕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뭐 정~ 아니면 말고. 자! 오늘 결혼 제안은 여기까지!

    할 말 다했다는 표정으로 시안이 엉덩이를 소파에서 떼어냈다.

    그 때까지도 정화는 미동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가 긴 다리를 쭉 펴서 상체를 꼿꼿이 다 폈을 때 그녀도 천천히 일어났다.

    "말도 안 되긴 말씀이지만 결혼 제의를 하실 만큼

    저를 믿어주신다는 뜻으로 받아드리고 감사합니다, 사장님."

    너무 자만하진 말기를. 내 변덕... 알잖아, 서비서! 죽 끓는 듯 하는 거. 후후훗. 그럼 난 오늘 JJ클럽으로 갑니다. 어머님 연락 오면 적당하게~

    말도 안 되는 자신의 결혼 제안에 정화는 그 뒤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시안을 대하는 태도 역시 변함이 없다.

    여려보이면서도 흩으러짐 없는 견고함.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정화가 감탄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그녀의 감정을 맘껏 휘저어보고 싶은 도전마저 생기게 한다.

    그 날도 점심 약속 때문에 외출했다가 들어오는 길이었다.

    주택을 개조해서 건축한 3층 사옥 옆 골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범상치 않았다.

    서정화!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왜 안 되는데?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옛정? 아하! 서비서에게도 애인이 있었단 말이지?]

    시안의 귀가 쫑긋거렸다.

    옛정?

    그러지 말구. 내가 잘못했다잖아! 다시 시작하자구!

    상윤 선배랑? 뭘 어떻게 시작해?

    처음부터 새롭게!

    이건 아니지, 상윤 선배. 소식 끊긴지 5년 만에 불쑥 나타나서 처음부터 새롭게 다시 시작하자고? 선배가 내 얼굴 보면 사과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무슨 사과?

    ...됐어. 오늘 찾아온 일 없던 것으로 할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으면 좋겠어.

    그녀가 돌아서는 것 같았다.

    야! 서정화!

    시안이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놔. 지금 난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어. 놓으랄 때 놔!

    작은 소리였지만 소름이 돋게 할 만큼 차갑고 냉정한 톤이었다.

    너... 널 잊은 적은 없었어, 한번도!

    .... 그 때나... 지금이나 이기적인 거짓말! 누구 때문에 우리 아빠가...

    정화의 소리는 끝맺지 못하고 거기서 끝이 났다.

    "느이 아빠가 뭐? 사고 일어난 게 내 탓이야?

    날 태워만 줬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거 아냐!"

    불쑥 나타나서 다시 시작하자고? 뭘?

    남녀가 만나서 뭘 시작하겠어?

    푸우...우습네. 선배가 날 사랑한 적은 있었어?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단 하루도!

    "단 하루도? 그런데 어떻게 그동안 감감무소식이었을까?

    헤어지자마자 민아선배랑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은 뭐고?

    결혼 날자도 잡았다고 했잖아, 헤어지는 날."

    즉시 후회했어. 너와 헤어지자고 한 거.

    "후회? 후회라고 했어?

    상윤 선배를 내 인생에서 만난 거 자체가 후회되는 사람이야, 난!"

    너랑 헤어지고 뭐든 되는 일이 없었다.... 민아랑 이혼도 했고.

    핫! 그게 내 탓이야? 되는 일이 없었다고? 난 되는 일이 있었을까?

    그러니까. 우리 다시 시작해보자구, 응? 정화야.

    이젠 읍소 작전을 피는 남자였다.

    더 듣고 싶지 않아!

    말은 그렇게 하지만 너... 나 때문에 지금까지 혼자인 거 알아.

    착각하지마! 선배는 나한테 아무 의미없는 사람이야!

    아마 그녀가 매몰차게 돌아선 모양이다.

    다급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놓으라 했지! 내 몸에 다시 손대지 말라구! 내가 만만해보여?

    순수한 스무살의 서정화는 없어! 알아?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마!"

    처음 접하는 서릿발 같은 정화의 음성에 시안은 그녀가 숨만 쉬는 인형이 아니라 살아 펄떡대는 심장이 있는 인간임을 느꼈다.

    시안은 일부러 다시 차에서 내리는 시늉을 하며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정화는 회사 현관으로 들어오면서 그를 발견하곤 멈칫했지만

    여느 때와 동일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안으로 사라졌다.

    시안은 잠시 더 머뭇거렸다.

    상윤 선배라는 남자가 골목에서 걸음걸이조차 비굴하게 걸어 나왔다.

    굿푸드 사옥을 흘깃 쳐다보더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외모는 나쁘지 않은 남자였다. 머리가 아둔해 보이는 타입도 아니었다.

    오히려 잔머리의 귀재처럼 보였다.

    일그러진 입술에 담배를 꼬나물고 천한 웃음을 흘리는 남자가

    시안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런 남자가 서비서 애인이었다고?]

    시안은 두 사람 사이의 ‘옛 정’이란 게 무엇인지 대단히 궁금했다.

    사무실에 들어오면서 마주친 정화의 얼굴은 방금 귀신을 본 사람처럼 창백했다.

    금세 고드름이라도 만들 것 같은 시린 표정으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오는 시안에게 목례했다.

    다시 조막만한 얼굴의 밀랍 인형 모습으로 그녀는 돌아와 있었다.

    회전의자에 몸을 툭 떨구며 앉았다.

    방금 전 들었던 서정화와 옛 남자의 대화로 짐작컨대

    정화의 아버지 사고와 연관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똑.똑.똑.

    네~

    사장님.

    ???

    지난 번 제안하신 결혼... 아직도 유효한가요?

    ........

    유효하다면 그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후후후... 서비서. 생각이 왜 바뀌었을까?

    .......

    하지만 시안은 안다.

    자기를 버리고 결혼했다 이혼하고 다시 찾아온 남자. 비참한 신세.

    나도 아직 죽지 않았다. 남아있는 한 방! 보여주고 싶다는 심정때문이겠지.

    그래도 시안은 공식적으로 결혼이나 이혼 경력 하나 없는 총각에

    그럴 듯한 배경을 가진 사장님이니까.

    중요한 건... 그런 여자의 심정 변화에 장단을 맞춰주고 싶어졌다는 거다.

    시안은 시원하게 답했다.

    그럽시다! 결혼이란 거.. 해봅시다, 우리.

    감사합니다, 사장님.

    "감사는 무슨... 그리고 결혼하자면서 사장님, 사장님.. 부르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안그래요, 서정화씨?!"

    시안은 그녀의 우수짙은 눈빛에서 자신과 비슷한 아픔,

    피멍맺힌 심정, 아릿한 슬픔을 읽었다.

    동병상련.

    자기 내면 깊숙이 숨겨놓은 가슴 시린 사연이

    혼자만의 전유물이 아닐 거란 생각이 강해졌다.

    어차피 조건을 따져서 결정해야 하는 결혼이라면

    초록동색의 파트너십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때까지 잠잠히 시안을 쳐다보던 정화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성급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그럼, 내가 결혼 계획을 좀 세워봐야겠는데...

    내게 원하는 최소한의 것. 뭐가 있을까?"

    없습니다, 사장님.

    또, 사장님 소리.

    끌끌 혀를 차면서 시안이 말했다.

    "내일까지 우리의 결혼 프로젝트를 위해 뭐가 필요한지 각자 생각해봅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많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서정화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꼭 필요한 거 정도는 해주고 싶으니까."

    그녀는 고개를 다시 들어 건조한 눈으로 시안을 주시했다.

    "그렇다면 저도 사장님께 동일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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