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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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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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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전 자살한 어머니를 AI로 다시 만난다면…”
꿈 많은 소녀였고 사랑이 절실한 여인이었던 ‘내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고 누군가와 제대로 이별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드라마 <허쉬>의 원작소설 작가이자,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과 백호임제문학상 수상작가 정진영의 신작 장편소설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가 출간되었다. 이번 소설의 테마는 ‘어머니’이다. ‘어머니’라는 테마는 소설의 소재이자 주제로 종종 사용되어 왔지만, 보통 당위적인 사랑과 헌신의 존재일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찾아가는 어머니의 옛 흔적에서 발견하는 것은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시절’을 간직한 어머니의 삶, 그 자체다. 꿈을 품었던 소녀, 욕망을 가졌던 여인, 나름의 갈등과 고뇌와 슬픔과 좌절 속에서 삶을 일구어 왔을 한 개인적 주체로서의 ‘어머니’를 탐구한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주인공인 아들(범우)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소통의 방법에 대해 배우게 된다.
주인공 범우(나)는 첫 장편소설로 1억 원 상금의 문학상을 타며 화려하게 데뷔한 소설가이지만, 그 이후 이렇다 할 작품을 선보이지 못하고 가난에 허덕이다 대필작가로 전락한다. 그러다 대기업 HT의 나재필 회장의 자서전을 대필한 일로 HT 홍보실 영입을 제안받고 비로소 인생이 풀리려나 싶은데, 입사 신체검사에서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으면서 다시 나락으로 추락하고 만다. 대장암 판정을 받고서 범우는 오랜 세월 묻어두고 살았던 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린다. 13년 전, 그가 사법고시에 번번히 떨어지고 오래 사귀었던 여자친구 유민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았던 그 시절, 그의 어머니는 그와 다투고,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창밖으로 투신해 자살했다. 범우는 그런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원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런데 예상치 않게도, HT의 나 회장은 대장암 환자인 그에게 입사해 회사의 지원을 받아 치료할 것을 권유하고, 본사 연구개발센터 인공지능 연구실의 책임연구원으로 채용한다. 거기서 선임연구원인 경선을 만나 연구실의 업무에 대한 내용을 듣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개발한 은총이라 이름 붙인 인공지능(AI)과 대화를 나누는데, 은총은 바로 그녀의 사산한 아들의 데이터로 만들어진 AI였다. 그 가능성을 이해한 후, 범우는 업무에 도움도 될 겸, 또 자신의 오랜 의문도 풀 겸, 자신의 어머니를 AI로 재현하는 일에 참여하기로 한다. 어머니에 대한 정보가 많을수록 더 정확한 재현이 가능했기 때문에, 범우는 오랫동안 외면했던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나선다. 그 여정에서 그는 어머니의 일기를 읽게 되고,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아버지와 처음으로 속 깊은 대화를 나누고, 이모와 외삼촌을 만나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파헤쳐 들어간다. 그리고 비로소 그는 어머니를 한 사람의 주체로서, 그와 마찬가지로 꿈과 욕망을 가졌던 온전한 실체로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AI로 구현된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자신보다 어렸던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는 독자들의 심금을 직격한다. 뻔한 신파가 아니다. 우리가 보통 너무나 무심하게 ‘어머니’라는 위상으로만 대해온 한 여인의 삶을 차곡차곡 쌓아, 그 여인이 끝내 자살에 이르기까지의 곡절들을 여실히 구성해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비로소 어머니를 한 사람의 여성이자 주체로 인식하는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십중팔구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분명히 존재했을 테지만 보통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는 어머니의 소녀 시절과 여자로서의 삶과 오래된 꿈과 주체로서의 삶을 새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인식의 전환으로 이끌어가는 과정이 아주 세밀하고 치밀한 극적 전개구조와 흡인력 있는 문장에 담겨 있는 소설이 바로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이다.
어머니의 흔적을 쫓아가는 과정은 동시에 범우(나)에게 관계를 올바르게 정리하고 제대로 이별하는 법에 대해서, 그리고 누군가와 온전히 소통하는 법에 대한 깨달음을 안겨준다. 주인공 역시 삶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처지에서 비로소 온전하게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배워간다는 것은 그만큼 누군가와 제대로 소통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일 테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고 사실은 가장 절실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성찰이 소설 곳곳에 배어 있다.
정진영 작가는 최근 한국문학에 드문 선 굵은 서사를 선보여 주목을 받아왔다. 지난해 드라마 <허쉬>의 원작 『침묵주의보』로 화제를 모았던 작가는 최근 『젠가』의 드라마 판권 계약을 체결하며 다시 한 번 탁월한 대중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는 작가 특유의 속도감 있는 문장에 섬세함이 더해져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흥미와 감동을 자아낸다. ‘나보다 어렸던 엄마’로 재현될 AI와 범우(나)가 무슨 대화를 나눌지, 소설에서 확인해보시길 권한다.

■ 목차

기억
기록
고백
증언
시작

작가의 말
작품 읽기

■ 추천사

작가 정진영은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에서 ‘사랑과 헌신의 표상’으로서의 어머니라는 경계를 넘어 갈등과 좌절과 고뇌와 슬픔의 삶을 살아온 한 여성으로서의 어머니를 탐구하고 있다. 그가 소설로 형상화한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서’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
-장경렬(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

■ 저자 소개
정진영
장편소설 『도화촌기행』으로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신문기자로 일했다. 장편소설 『침묵주의보』, 『젠가』, 『다시, 밸런타인데이』가 있다. 백호임제문학상을 받았다. 『침묵주의보』는 JTBC 드라마 <허쉬>의 원작이며, 『젠가』도 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이다.

Language한국어
Release dateJul 19, 2021
ISBN9791191433050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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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 정 진영

    1626936831427_01626936827276_01626936827357_1

    차례

    1     끝

    2   기억

    3   기록

    4   고백

    5   증언

    6   시작

       작가의 말

       작품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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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준다는 말은 견뎌낸 자들에 한해 사실이다. 견디지 못한 자들은 죽거나 사라졌을 테고, 죽거나 사라진 자들은 말이 없으니까. 신은 아무래도 나를 시련 따위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독종으로 오해한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신에게 무언가 씻을 수 없는 큰 죄라도 지었거나.

    순식간. 진부하지만 갑작스러운 사고에 이보다 적절한 표현을 나는 찾지 못했다. 1월 2일 새벽 세 시, 자유로 위에 쌓인 어둠은 한강의 무거운 습기, 겨울 공기와 뒤섞여 차갑게 끈적거렸다. 창백한 가로등 불빛은 도로에 닿자마자 힘없이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흰색 미니(MINI) 쿠퍼 컨버터블•은 엔진에서 쏟아지는 굉음과 함께 어둠을 찢으며 서울로 향하는 텅 빈 도로를 내달렸다. 새해 첫날을 술로 적신 나는 숙취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오른손으로 감싸며 신경질적으로 가속페달을 밟았다. 십 년을 넘긴 엔진은 변속 때마다 충격음과 함께 쇠가 갈리는 소리를 냈다. 소프트탑•은 방음과 단열에 취약했다. 겉보기에 폼이 나는 이 외제 오픈카는 국내 최대 직영 중고차매장이 보증했어도 어디까지나 연식이 오래된 중고차일 뿐이었다. 그 모양새가 나를 닮은 듯해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추위에 코끝이 아렸다. 나는 히터의 강도를 최대로 올렸다.

    히터가 내뿜는 따뜻한 공기가 얼굴에 닿자 졸음이 몰려왔다. 나는 졸음을 쫓아내고자 수차례 허벅지를 꼬집었다. 무거워진 눈꺼풀이 잠깐 붙었다가 떨어지는 사이, 2차선 위를 시속 130킬로미터로 달리던 차가 마지막 차선 가드레일과 닿을 듯 달라붙었다. 놀란 나는 다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조수석 펜더가 가드레일과 부딪쳤다. 핸들이 제멋대로 꺾였고, 속도를 이기지 못한 차가 시계 방향으로 뱅글뱅글 돌았다. 롤러코스터라도 탄 듯 몸이 왼쪽으로 쏠려 핸들과 자세를 바로잡을 수 없었다. 수많은 가로등 불빛이 360도 파노라마 영상처럼 눈앞에서 현란하게 빛났다. 에어백은 터지지 않았다. 주마등처럼 지난날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가운데, 문득 어차피 오래 버틸 수 없는 삶이라면 이참에 끝내는 게 덜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 전, 내 생에 처음으로 괜찮은 인생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가전제품 제조기업 HT가 홍보실을 확대 개편하며 내게 콘텐츠 제작 및 기획을 맡아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직급은 부장이었다. HT 홍보실 이범우 부장이라고 새겨진 명함을 상상하니 가슴이 뛰었다. 오랜 세월 꼬인 내 인생을 반전할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군 제대 이후 이십 년 가까이 경험해보지 못한 조직 생활이 조금 걱정됐지만, 거절할 이유를 찾는 일은 사치였다. 낙하산이라는 뒷말을 피하진 못하겠지만, 낙하산 줄이 조직의 꼭대기에 닿은 단단한 줄이어서 박힌 돌들이 대놓고 나를 밀어내긴 어려울 것이라는 계산이 섰다. 최근 HT의 기업 이미지 제고에 내가 기여한 공이 박힌 돌들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진 않을 테니 낙하산의 명분도 충분했다.

    내 낙하산 줄인 나재필 HT 회장은 샐러리맨 출신으로 맨땅에서 중소기업이었던 HT의 규모를 대기업 턱밑까지 키운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지방 국립대 전자공학과를 고학으로 졸업한 뒤, 대기업 여산그룹의 가전 계열사 여산전자에 입사했다. 그는 성실함과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남들이 꺼리는 부서로 배치되고 누구도 원하지 않는 업무를 떠맡는 등 인사 때마다 소외됐다. 사내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그의 주변은 적막했다. 끌어줄 인맥이나 학맥이 없는 조직에서 한계를 절감한 그는 자의 반 타의 반 독립을 선택했다.

    그가 퇴사하며 주목한 시장은 대기업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미용 기기, 특히 헤어드라이어 시장이었다. 야근 후 자주 들렀던 사우나에서 사용했던 헤어드라이어에서 나는 머리카락 탄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이유였다. 나 회장은 이십 년 전 퇴직금과 대출금을 끌어모아 HT의 전신인 헤어테크(Hair Tech)를 설립하며 중소기업이 난립한 헤어드라이어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레드오션 같지만, 제품만 제대로 만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게 나 회장의 계산이었다.

    헤어테크는 모발 열 손상 보호, 정교한 풍량 조절, 가벼운 무게 등 타사보다 앞선 기술력을 바탕으로 국내 헤어드라이어 시장을 단시간에 석권했다. 국내에서 경쟁자를 찾을 수 없게 된 헤어테크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헤어테크는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협업해 간결하면서도 파격적인 디자인을 가진 제품을 잇달아 선보여 아시아는 물론 유럽 시장에서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국내외 언론이 앞다퉈 나 회장의 행보에 주목했고, 많은 젊은 기업인들이 그를 우상으로 꼽으며 벤치마킹했다.

    나 회장은 성공을 오래 즐기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고심 끝에 자신이 한때 몸담았던 여산전자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십 년 넘게 적자 상태인 여산전자는 여산그룹의 골칫덩어리였지만, 헤어테크보다 규모와 매출액이 훨씬 큰 기업이었다. 다윗이 골리앗을 삼키는 꼴이었다. 여산전자는 실제 가치보다 헐값에 시장에 나왔지만, 끌어안아야 할 부채가 인수 금액의 몇 배였다. 나 회장은 회삿돈 이상으로 사재를 투입해 여산전자를 인수하며 헤어테크가 흔들리는 상황을 피했다. 과감하면서도 책임감 있는 나 회장의 행보에 당초 여산전자 인수를 반대했던 헤어테크 주주들은 지지 의견으로 돌아섰다. 나 회장을 점령군으로 여겼던 여산전자 구성원들도 그가 한때 같은 식구가 아니었느냐며 불안감을 덜었다. 나 회장은 헤어테크에 여산전자를 인수·합병하며 기업 이름을 HT(Highest Technology)로 바꿨다. HT는 단숨에 중견기업에서 자산규모 기준 50위권의 준대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스스로 나와야 했던 첫 직장을 인수하며 CEO로 금의환향한 샐러리맨. 나 회장은 성공한 샐러리맨 출신의 경영자를 넘어 재계의 신화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자 동종업계의 견제도 심해졌다. 헤어드라이어나 만들던 기업이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비아냥거림은 예사였고, 나 회장을 향한 근거 없는 흑색선전까지 판을 쳤다. HT가 경쟁업체의 임원과 연구원을 거액을 들여 스카우트하자, 해당 업체가 HT를 상대로 기술을 훔쳤다며 소송을 거는 등 법정 안팎에서도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경쟁업체 수준의 대언론 홍보 담당 부서를 아직 갖추지 못한 HT는 자사에 유리한 여론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출간된 나 회장의 자서전은 HT를 향한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 회장의 극적인 인생 역정, 담대하면서도 소탈한 성격을 잘 드러낸 자서전은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에 오른 데 이어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돼 방송을 타 화제를 모았다. 나 회장은 젊은 기업인들을 넘어 청년층 사이에서도 도전과 희망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이는 자연스럽게 HT의 기업 이미지 제고로 이어졌다. 나는 나 회장 자서전의 대필 작가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작가 가운데, 자신의 존재를 밝힐 수 없는 글을 쓰는 대필 작가를 꿈꿨던 이는 없다. 나 역시 대필은 다급한 생계 수단이었다. 내 작가 인생, 아니 대필 인생은 엉뚱한 계기로 시작됐다. 서울 소재 그럭저럭 괜찮은 대학교 법대 출신인 나는 이십 대 전부를 고시생으로 보내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신입생 시절에 같은 과에서 만나 캠퍼스커플로 인연을 맺어 함께 이십 대를 보낸 유민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고시생 커플의 마지막 모습은 둘 중 하나다. 둘 다 고시에 붙어 결혼까지 골인하거나, 아니면 먼저 붙은 사람이 떨어진 사람에게 이별을 통보하거나.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많은데, 나도 거기에 하나를 보탰다. 유민은 사법연수원에 입소한 지 불과 보름 만에 내게 이별을 통보했다. 귀찮은 혹을 떼어버리듯 차가운 목소리를 담은 전화 한 통이 전부였다. 십 년 연애의 허무한 마지막이었다.

    한 선배가 반지하 원룸에서 술로 세월을 보내는 나를 찾아와 무엇이든 써보라고 권했다. 일상과 감정을 기록하는 행위가 자기 치유에 효과가 있다는 선배의 조언은 힘내라는 입에 발린 말보다 신선하게 들렸다. 나는 속는 셈 치고 선배의 말을 따랐다. 처음에 작은 메모로 출발한 글쓰기는 일기, 산문에 이어 소설 쓰기로 발전했다. 선배의 조언대로 글쓰기는 마음을 다스리는 데 효과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즐거웠다. 나는 몰랐던 재능을 발견한 듯 흥분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몇 차례 올린 짧은 소설이 좋은 반응을 얻자 자신감이 생긴 나는 고시 공부까지 뒤로 미루고 소설 쓰기에 매달렸다. 나는 고시 공부만 하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마흔을 넘긴 내 앞에 무슨 일들이 펼쳐질지 상상하며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 과정은 때로는 끔찍했고, 때로는 슬펐으며, 때로는 짜릿했다.

    몇 달 후 나는 장편 분량의 원고를 완성해 출판사 수십 곳에 투고했다. 아무런 답변을 주지 않는 출판사가 다수였다. 답변을 준 소수의 출판사도 자사와 방향이 맞지 않아 출간이 어렵다는 의견만 내게 전할 뿐이었다. 낙담한 나는 별생각 없이 접수 마감을 코앞에 둔 한 장편소설 공모에 원고를 보냈다. 상금 1억 원. 내가 지금까지 만져보지 못한 거금을 내건 공모였다. 투고한 모든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맞은 문학 비전공자의 어설픈 작품이 당선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저 쓴 게 아까워서 공모에 원고를 보냈을 뿐이다. 그 원고가 나를 작가로 만들 줄은, 그리고 내 인생에 대필 작가라는 족쇄를 채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쨌든 내 신분은 느닷없이 고시생에서 작가로 바뀌었다. 그사이에 동문회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유민이 검사로 임용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데뷔는 화려했다. 첫 장편소설로 상금 1억 원 문학상을 거머쥔 천재 신인 작가. 판타지 문학의 경계를 허문 새로운 소설의 출현. 한국적 판타지의 외연을 넓힌 문제작. 내 앞에 펼쳐질지 모를 불안한 미래를 사실적으로 그린 소설이 세간에선 판타지라는 평가를 받았다. 처음엔 그런 평가에 당혹했지만, 딱히 잘못된 평가도 아니었다. 하찮은 장수 고시생이 갑자기 천재 신인 작가 소리를 듣는 지금 상황이 판타지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내 인터뷰가 실린 대학 동문회보를 펼쳐보며 유민이 지금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혹시 유민이 내게 다시 연락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잠깐 했지만, 들려온 건 유민의 결혼 소식이었다. 결혼 상대는 사법연수원에서 동기로 만난 두 살 연상의 변호사였다. 결혼 준비로 내 소식 따위는 궁금할 여유도 없을 유민을 생각하자 입맛이 썼다. 십 년을 연애하고도 보름 만에 이별 통보를 할 수 있고, 그보다 훨씬 짧은 기간을 만나고도 결혼을 결정할 수 있는 현실. 함께 이별했지만, 이별의 아픔은 온전히 내 몫임을 다시금 아프게 깨달았다. 앞으로 나는 다시 연애하기가 쉽지 않겠다고 예감했다.

    화려한 데뷔가 화려한 미래로 이어지진 않았다. 내게 새로운 작품을 써달라고 청탁하는 출판사가 줄을 이을 것이란 기대는 망상이었다. 처음에 느긋하게 청탁 전화를 기다렸던 나는 일 년 넘게 기다려도 청탁이 없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상금으로 반지하 원룸 월세방에서 벗어난 나는 투룸 전세를 얻어 방 하나를 작업실로 삼아 새 작품을 집필했다. 이를 여러 출판사에 투고했지만, 반응을 보이는 출판사가 단 한 곳도 없었다. 내심 믿었던 수상 경력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다급해진 나는 장편소설 공모에도 문을 두드렸지만, 처음 같은 행운은 내게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수상 후 이 년이 흐른 뒤에야 첫 청탁 전화를 받았다. 초선 국회의원 자서전 대필에 보수는 300만 원. 첫 청탁이 대필이란 사실에 굴욕감을 느꼈으나, 서울의 투룸 전세를 수도권의 원룸 전세로 좁힌 마당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대필 경력이 없으면 100만 원 수준인데, 나는 수상 경력 때문에 더 많은 보수가 책정됐다는 말을 들었다. 새 작품 출간에는 쓸모없던 수상 경력이 대필에서 내 가치를 높여줬다. 웃어야 할 일인지 울어야 할 일인지 헷갈렸다.

    나는 십여 차례에 걸쳐 대필을 의뢰한 의원의 자택을 찾았다. 그의 인생사를 듣고 기록하는 일은 지루했다. 지역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일류대 경제학과에 입학해 졸업하기도 전에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수십 년간 공직에서 일했던 그는 차관까지 지낸 뒤 물러나 고향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소년 등과한 사람치고 좋게 죽은 사람이 없다(小年登科 不得好死)’는 옛말은 그와 상관없었다. 부침 없이 평생 꽃길만 걸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는 심심한 인물이었다. 그가 왜 소설을 쓰는 내게 자서전 대필을 부탁했는지 알 것 같았다. 소설 집필이든 자서전 대필이든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각색해 매력적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점에선 매한가지니까.

    일단 나는 그에게서 듣고 정리한 인생사로 자서전의 뼈대를 세웠다. 그 위에 언론을 통해 공개된 각종 인터뷰 기사, 그가 지역구에서 이룬 업적과 공약 등을 참조해 살을 붙이고 적당히 양념을 쳤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결과물이 나왔고, 그는 출판기념회를 통해 상당한 정치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출판기념회를 치른 그는 비서관을 통해 내게 고마움을 표하며 200만 원을 더 보냈다. 500만 원. 내가 작가가 된 후 글을 팔아 처음으로 번 돈이었다. 집필을 마치는 데 넉 달이 들었으니 한 달 평균 125만 원을 번 셈이다. 그사이에 들어간 교통비 등 부대비용을 제외하면 한 달 순수익은 70만 원이 겨우 넘었다. 편의점 한 달 알바비도 되지 않았다.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도전은 언제나 초심자의 행운으로 시작해, 반드시 가혹한 시험으로 끝을 맺는다. 파울로 코엘료의 장편소설 《연금술사》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내 머릿속에서 무겁게 울렸다. 그제야 나는 지옥에 제 발로 걸어들어왔음을 실감했다.

    이후 본격적인 대필 인생이 펼쳐졌다. 자서전은 물론 에세이, 과학, 철학, 인문 심지어 자기계발서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대필을 맡았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글을 대필할 때는 가까운 공공도서관에 살다시피 하며 관련 서적들을 독파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집필 노동의 결과물들이 쌓일 때마다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대필을 통해 쌓은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필력이 언젠가 내 작품을 쓰는 데 도움을 줄 것이란 자위로 자괴감을 달랬다. 하지만 내 작품 집필에 집중할 틈도 없이 꾸준하게 대필 청탁이 들어왔고, 경제적으로 불안한 내게는 청탁을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멈출 수 없는 쳇바퀴를 굴리는 듯한 삶이었다. HT의 홍보실 영입 제안은 내 오랜 경제적 불안감과 자괴감을 단번에 해소해줄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입사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며 처음으로 나를 위한 자기소개서를 작성했다. 내게는 자기소개서를 채울 이야깃거리가 별로 없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필하는 사이에 내 인생이 비어버렸던 것이다. 나 회장의 낙하산인 내게 서류 제출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자기소개서를 다른 대필 작가에게 맡기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더불어 마흔이 돼서야 비로소 진짜 내 인생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했다. 임원 면접은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앞에 계셔서 하는 말이 아니라, 작가님 덕분에 회장님 이미지뿐만 아니라 회사 이미지도 정말 좋아졌습니다. 이렇게 한솥밥을 먹게 돼 반갑습니다.

    저는 그저 할 일을 한 것뿐이라서…….

    면접에 참여한 임원들은 내가 나 회장의 낙하산이자 자서전 대필 작가임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임원들은 돌아가며 내게 HT의 홍보를 위한 좋은 콘텐츠를 기획해달라고 당부했다. 혹시나 하며 걱정했던 민감한 질문은 없었다.

    앞으로 회사 홍보 전략을 세우는 일이 훨씬 수월해질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HT의 새 식구가 되신 걸 환영합니다.

    내가 받게 될 연봉은 세전 9,500만 원이었다. 내가 첫 작품으로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돼 받은 상금과 맞먹는 돈이 매년 내 통장에 꽂힌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입사를 위한 마지막 절차는 신체검사였다. 나는 HT가 지정한 병원에서 신장, 체중, 청력, 혈압, 시력, 구강검진, 혈액검사, 소변검사 등을 받았다. 술은 종종 마시지만 담배는 피우지 않고, 가벼운 운동도 규칙적으로 꾸준히 해온 터라 건강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다만 군 입대 이후 이십여 년 만에 처음 받는 신체검사이다 보니 나는 검사 내내 긴장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다행히 결과가 당일에 바로 나오지 않는 혈액검사와 소변검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정상이었다.

    병원에서 검사를 마친 나는 장한평의 한 중고차매장으로 향했다. 대기업 계열사가 직접 운영하는 매장이라 다른 곳보다 차량 가격이 센 편이었지만, 그만큼 확실한 매물을 보증한다는 광고에 혹했다. 한 번도 내 명의로 차를 가져본 일이 없고, 신차를 살 여유도 없는 나로서는 직영 중고차매장이 답이었다. 매장에 전시된 여러 중고차를 살피던 나는 2009년식 흰색 미니 쿠퍼 컨버터블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내 마음을 읽은 딜러가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소프트탑 오픈 버튼을 눌렀다. 소프트탑이 마치 이등병이 모포를 개듯 각을 맞춰 차곡차곡 뒤로 접혔다.

    "고객님, 살면서 한 번쯤은 지붕이 열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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