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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쿠소관 전기: 임진왜란 비사
모쿠소관 전기: 임진왜란 비사
모쿠소관 전기: 임진왜란 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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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쿠소관 전기: 임진왜란 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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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전쟁은 영웅과 패장을 낳고 신화를 탄생시킨다.
1592년 가을,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명군의 참전으로 북상이 좌절되고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면서 보급에 난관을 겪게 되자 곡창인 전라도 방면으로 진공하기 위해 3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진주성 공격에 나선다.
그때 초유사 김성일의 단안으로 진주목사가 된 김시민은 의병들과 안팎으로 호응하면서 엿새 동안의 격렬한 항전 끝에 일본군을 물리쳤다. 당시 김시민은 적의 흉탄을 맞고 숨졌지만 그의 죽음을 알지 못했던 일본군은 그를 모쿠소관으로 칭하면서 두려워했다. 그러자 김시민의 뒤를 이은 수많은 모쿠소관이 나타나 일본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모쿠소관이 곧 일본군의 저승사자가 된 것이다.
북관의 해정창전투에서 한극함이 일본군을 궁지에 몰아넣었고, 의병장 정문부가 살벌한 복수전을 통해 일본군을 공포에 몰아넣으며 모쿠소관의 이미지를 극대화했고, 김시민의 뒤를 이어 진주목사로 부임한 서예원이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뛰어난 전략전술로 일본군을 괴롭히면서 최후의 모쿠소관으로서 이름을 날렸다. 비록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일본군의 총력전으로 인해 패하고 말았지만 전후 일본인들조차 조선의 모쿠소관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밤잠을 설쳤다.
조선의 신장 모쿠소관에 대한 이야기는 18세기 초반부터 일본의 인형극과 가부키의 주요 소재로 다루어졌다. 2백 년 전, 일본군이 조선 땅을 건너가 대망을 이루기 직전에 홀연 악귀사신처럼 나타나 무시무시한 공포심을 안겨주었던 모쿠소관, 패퇴하던 일본군이 전력을 기울여 진주성을 공격한 끝에 그를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일본인들은 언제 그가 복수의 화신으로 부활하여 자신들을 공격해올지 몰라 두려움에 떨었다.
그 결과 1804년 일본의 문호 난보쿠 2세의 손에 의해 탄생한 작품이 〈덴지쿠 도쿠베 에이코쿠바나시〉였다. 이 작품에서 모쿠소관은 비정하고도 사악한 덴지쿠 도쿠베란 인물로 등장하여 뭇 일본인들을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물론 이 책에 등장하는 모쿠소관이라는 존재는 뻥튀기에 능한 일본인들의 문화적 상상력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역사라기보다는 신화에 가깝다. 그러나 잠재적인 주적이 두려워하는 인물을 좀더 강력하고 장엄하게 포장하고 선전하는 것은 우리들의 당연한 권리가 아닐까 싶다.
전쟁의 서사는 어느 시대이든 비참하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비극을 성찰하지 못하고 오히려 망각과 집착으로 새로운 비극을 잉태한다. 그러기에 역사는 항상 경고하고 있다. 적의를 품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관용이 도를 넘으면 유령처럼 위기가 닥쳐온다는 것, 그것이 바로 저자가 옛 전장의 뒤안길을 밟다가 모쿠소관이라는 일본인들의 심리적인 결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더욱 침소봉대하는 까닭이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유페이퍼
Release dateApr 12, 2021
ISBN9791166786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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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쿠소관 전기 - 이상각

    1590년(선조 23년) 일본의 관백(關伯)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시코쿠(四国)와 규슈(九州)를 평정한 다음 전국시대 최후의 저항가문이었던 간토(関東) 지방의 호조우지(北条氏)까지 무너뜨림으로써 일본 전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buchae

    히데요시의 황금부채

    일본 역사상 전무후무한 통일 국가의 주인공으로 거듭난 그는 조카이자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에게 관백 자리를 물려준 다음 자신은 무소불위의 신분인 태합(太閤)이 되어 조선을 침략하고 최종적으로 명나라까지 움켜쥐어 동아시아 일대의 패자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품었다.

    그는 이미 내전이 막바지에 달했던 1586년경부터 조선과 가까운 규슈 지역의 다이묘들에게 전함 건조를 명령한 바 있었다. 그 결과 조선 침공 직전에 대소 전함 1천여 척을 포함하여 3천여 척이 넘는 대규모 선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1591년(선조 24년)에 그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려 33만 명의 병력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그해 1월 히데요시는 〈고려국 금제(高麗國禁制)〉를 배포하여 조선 정벌을 기정사실화했다.

    금제의 내용은 첫째 장병들은 누구든지 난폭하게 굴지 말 것, 둘째 방화하지 말 것, 셋째 백성들에게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을 강요하지 말 것 등이었다.

    이는 이미 조선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장차 자신의 백성이 될 농민들을 보호하라는 선무공작의 일환이었다. 그는 금제를 어기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단언했고, 다이묘들에게 따로 보낸 문서에서 백성들에게 한 푼이라도 빼앗으면 목을 베겠다고 선언했다.

    gumje

    고려국 금제

    얼마 후 히데요시의 명을 받은 쓰시마번주 소 요시토시(宗義智)는 승려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를 조선에 보내 명나라를 정벌하려 하니 길을 빌려달라는 이른바 ‘가도입명(假道入明)’을 요구한다.

    조선 국왕 선조는 이에 대하여 섬나라 오랑캐의 광포한 주장이며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사상 최초로 전국 통일을 이룬 일본이 넘쳐나는 무력을 외부에 발산하려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황윤길과 김성일을 정·부사로 하는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여 적정을 살폈다.

    이런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속에서 당황한 것은 두 나라 사이에 끼어있던 쓰시마번이었다. 오랫동안 본국의 외면 속에 동래왜관을 통한 대조선무역을 유일한 생명줄로 삼고 있던 그들로서는 두 나라가 충돌하면 잃을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소 요시토시는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보려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본 내부에서도 전쟁에 대한 갑론을박이 치열했다. 무단파(武斷派)인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요시타카 등은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에 적극 찬동했다. 반면 오사카 상인 출신으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현실론자인 이시다 미쓰나리 같은 이료파(吏僚派)는 향후 조선과의 전쟁이 야기하게 될 동아시아의 혼란상을 염려하면서 히데요시를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히데요시에게 이 전쟁은 대륙 진출이라는 개인적인 야심 외에도 권력 기반 강화라는 현실적 과제가 놓여있었다. 당시 그는 내전이 종료된 뒤 자신을 위해 싸워 준 다이묘들에게 나누어 줄 토지가 턱없이 부족했다. 아울러 그 동안 다이묘들이 축적한 전력을 소진시켜 완전히 굴종하게 하려는 의미도 자중했다.

    1591년 3월 9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의 다이묘를 오사카에 불러 모은 다음 조선 정벌을 공식 표명했다.

    마침내 전쟁이 확정되자 쓰시마번주 소 요시토시는 조선 침공에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승리한 뒤의 대가를 노렸다. 그가 주목한 것은 조선의 말이었다.

    당시 일본의 장병들은 전쟁터를 전전하느라 한자를 읽지 못하는 무지렁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조선어는 그보다 훨씬 낯선 언어였다. 이국 땅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하면서 현지 언어를 모른다면 곤란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를 직시한 쓰시마번에서는 〈고려 말에 대하여[高麗詞之事]〉라는 조선어 회화집을 발간하고, 그 동안 동래왜관에서 활동하던 일본인들을 각 부대에 파견하여 조선어를 가르쳤다.

    회화집에는 일본군 장병들이 조선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구어들을 수록했다.

    조선인을 협박하기 위해 ‘사람 많이 죽였다.’, ‘네 목 벨 것이다.’, 장차 확보할 포로를 길잡이로 활용하기 위해서 ‘이 길인가?’, ‘곧이 이르라.’, ‘나이가 몇인가?’, ‘자식 있는가?’, 점령지에서 지식인이나 기술자를 골라 납치하기 위해 ‘피리 부는가?’, ‘장인인가?’, ‘글 하는가?’ 등과 함께 ‘고운 각시 더불어 오라.’, ‘옷을 벗어라.’ 같은 말도 포함되었다.

    출병의 그날을 기다리며 전초기지인 나고야성1) 해안에 집결한 왜병들은 이런 조선어를 중얼거리며 가슴을 졸였다.

    1) 나고야성(名護屋城)은 임진왜란의 전초기지이자 총지휘부가 있던 장소다. 현재 사가현 가라쓰시. 가토 기요마사, 데라자와 히로타카에 의해 1591년 8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불과 8개월 만인 1592년 3월에 완성했다. 전쟁을 위해 급조한 성이었지만 호화롭고 튼튼해서 히데요시가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무릇 전쟁은 비극과 영광이 중첩된 아수라장이다. 국내에서 오랫동안 내전을 치르며 서로를 적대시했던 그들은 이제부터 조선정벌군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바다 건너 이국땅에 피바람을 일으킬 것이었다.

    일본군의 총병력은 15만 8700명으로, 9번대로 나누어 출동했다.

    제1번대는 주장 고니시 유키나가, 병력 1만 8700명으로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길 안내를 맡았다.

    제2번대는 주장 가토 기요마사, 병력 2만 2800명으로 나베시마 나오시게, 사가라 요리후사가 보좌했다.

    제3번대는 주장 구로다 나가마사, 병력 1만 1000명, 제4번대는 주장 모리 요시나리, 병력 1만 4000명, 제5번대는 주장 후쿠시마 마사노리, 병력 2만 5000명, 제6번대는 주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병력 1만 5000명, 제7번대는 주장 모리 테루모토, 병력 3만 명, 제8번대는 주장 우키다 히데이에, 병력 1만 명, 제9번대는 주장 하시바 히데카스, 병력 1만 1500명이었다.

    수군은 총병력 9000명으로 구키 요시타카,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등이 이끌었다. 그 외에 예비대 10만 명이 나고야성에 대기했다.

    1592년(선조 25년) 3월 교토(京都)에서 나고야성으로 이동한 히데요시는 4월 14일 조선정벌군 제1번대인 고니시 부대에 출병 명령을 하달했다. 그들의 뒤를 이어 가토 기요마사의 제2번대,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번대가 돛을 높이 올리고 쓰시마의 오우라 항(大浦項)을 떠났다.

    조용히, 조용히. 갈댓잎들이 서로 부딪치며 낮은 음자리로 쑤우쑤우 신음을 토하는 밤, 환한 달빛에 일렁이는 물결이 칼날처럼 섬뜩하게 느껴졌다. 살그머니 협선의 노를 젓는 병사의 목덜미에서 주르르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소리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대체 적이 어디까지 쳐들어왔단 말인가. 병력은 어느 정도일까?’

    선두에 서서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김해부사 서예원2)은 물고기 튀는 소리에도 버럭 소름이 돋았다.

    2) 서예원(徐禮元, 1547~1593)은 이천 서씨로 아버지는 이조참판 서형(徐詗), 맏형은 임진왜란 당시 춘천부사였으며 전후에는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서인원(徐仁元)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건천동에서 살면서 두 살 위인 이순신과 친하게 지냈다. 1573년 28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나주판관, 보성군수 등을 거쳐 함경도 변경의 보화첨사가 되었다. 출사 연도로 따지면 이순신의 3년 선배다.

    그는 회령 보하진에서 80여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여진족의 근거지를 정탐하러 갔다가 적에게 포위되어 부하를 대부분 잃고 탈출한 뒤 종성에 유배되었다. 때마침 여진족 니탕개(尼湯介)가 국경을 넘어 경원부를 점령하자 신립 휘하에 백의종군하여 여진 추장 율보리(栗甫里)를 참수하는 전공을 세우고 곽산군수로 재기용되었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선조 24년)에 김해부사로 임명되었다.

    그가 일본군의 침공을 알게 된 것은 4월 14일 당일이었다. 처음에는 오보인 줄 알았는데 피난민들이 김해성으로 몰려오면서 동래성과 부산성이 연이어 함락되었고 일단의 일본군이 서진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작년에 조선통신사가 에도에서 돌아온 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오리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고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가을에 조정에서 성벽을 수축하고 병기를 보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의례적인 행사로 여겼다.

    서예원 역시 얼마 전 서울에 올라갔을 때 뵈었던 유성룡 대감이 최근 여러 해 동안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갔다면서 전란의 조짐이 아닐까 염려하자 기우에 불과하다며 웃어넘긴 적도 있었다. 그런데 김해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래 왜관에 있던 왜인들이 모조리 사라졌다는 말이 들려오더니 급기야 왜적의 침략이 현실화된 것이다.

    부산 쪽에서 항상 오가던 파발이 끊어진 것으로 보아 경상좌도3)의 관군은 이미 궤멸된 듯했다.

    '경상좌병사 이각과 경상좌수사 박홍은 대체 어찌 되었을까?'

    그들이 조금만 버텨주었다면 아무리 강맹한 일본군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빨리 부산을 거쳐 서쪽으로 진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짐작컨대 김해성으로 다가오는 적은 향후 창원을 거쳐 진주 방면으로 진출하려 할 것이다.

    3) 1519년(중종 14년)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로 구분했다. 이에 따라 육군의 지휘본부로 울산에 경상좌병영, 창원에 경상우병영이 설치되었다. 수군은 부산에 경상좌수영, 거제에 경상우수영이 설치되었다.

    ‘저들의 목표는 호남이 분명하다. 여해(汝諧)이순신의 아호. 형은 왜적의 내침 소식을 알고 있을까? 몇 해 전부터 전쟁이 날 거라고 노래를 부르고 다니더니 진짜 귀신이 따로 없군.’

    그는 평소에 잔병치레가 많아 툭하면 시름시름 앓아 누워 있다가도 임무가 떨어지면 대꼬챙이처럼 꼿꼿하게 일어서던 이순신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린 시절 전쟁 놀이 하며 뛰놀던 그들이 어느덧 불혹을 넘긴 나이에 무관으로서 북변을 거쳐 남해안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목전에 다다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현재 김해성 인근에는 수만 명의 백성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런데 성의 수비군은 불과 1천 여명 남짓, 서둘러 소수의 승군이 지키고 있는 분산산성으로 병력을 옮기면 한동안 버틸 수 있겠지만 백성들을 대피시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고심하던 그는 진주성에 내려와 있던 경상감사 김수, 창원에 있는 경상우병사 조대곤에게 급보를 알리는 파발을 띄우는 한편 인근에 있는 의령군수 오응창, 창녕군수 이철용, 창원군수 장의국 등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김해부의 유지인 이대형과 송빈에게도 의병을 모집해 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이대형은 아들 이우두와 이사두에게 조상의 제사를 맡긴 다음 1백 여명의 장정들을 모아 김해성으로 들어왔다. 서예원은 그에게 북문의 수비를 맡겼다.

    애타는 서예원의 심정에 호응하듯 김해성의 병력은 계속 증강되었다. 관군으로는 합천의 초계군수 이유검이 3백 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김해성에 들어왔다. 이어서 김해부 거인리에 살던 전 무관 김득기도 입성했다. 그는 6대 독자 이간에게 자신이 죽거든 훗날 아내와 합장해 달라며 평소 입고 있던 도포와 한 줌 머리칼을 잘라주고 집을 나섰다고 했다. 이미 그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있었다.

    서부사, 왜적이 쳐들어오다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오? 이쪽으로 몰려오는 적의 규모는 어느 정도나 된답니까?

    저도 아직 기별을 받지 못해 나름대로 사태를 파악하고 있는 중입니다.

    큰일이구려. 조정에서는 이런 상황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소.

    왜적의 기세가 워낙 신속하고 강맹해서 이쪽에선 파발조차 띄우지 못한 듯합니다. 그러니 알 리가 없겠지요.

    그날 함안의 선비 이령이 1백 명의 의병을 모아 김해성으로 달려오자 서예원은 그에게 동문 쪽 수성을 맡겼다. 이어서 송빈이 장남 송정백에게 집을 지키게 하고 의병을 모아 김해성에 들어오자 서문을 맡겼다. 그렇게 서두른 끝에 1천 5백 여명의 병력이 김해성에 모였지만 곧 밀어닥쳐올 일본군의 군세를 알지 못하고 있으니 실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 무렵 부산을 거쳐 북진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번대가 양산으로 진격했다. 깜짝 놀란 양산군수 박진이 성을 버리고 3백 명의 군사와 함께 양산과 밀양 사이에 있는 작원관으로 물러났다.

    4월 17일, 고니시 부대는 작원관으로 통하는 낙동강변의 황산잔도에서 하루 동안 발이 묶이자 이튿날 산을 우회하여 조선군을 공격해 전멸시킨 다음 대구 방면으로 이동했다.

    한편 고니시의 뒤를 이어 부산에 상륙한 가토 기요마사의 제2번대는 언양을 손쉽게 점령한 다음 경상좌병영이 있는 울산, 경주 방면으로 진공했다. 그들을 따라 바다를 건너와 서진하던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번대가 신속하게 김해성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서예원이 김해성을 지키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인 지 사흘 만인 4월 17일,  일본군 1천 여명이 김해성 밖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규슈 분고국의 다이묘인 왜장 오오토모 요시무네(大友吉統))가 보낸 선발대였다.

    저건 그저 돌담을 쌓아놓은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단숨에 돌파하여 공을 세우자.

    그들은 본국의 성채에 비해 턱없이 낮은 김해성의 성벽과 좁은 해자를 보자 코웃음을 치며 남문 쪽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왜병들은 사방에서 조총을 난사한 다음 사다리를 들고 성벽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구역별로 수비 태세를 갖춘 김해성 장병과 의병들은 목책과 마름쇠를 피해 뒤뚱거리며 다가서는 왜병들에게 소나기처럼 화살을 퍼부었다.

    성벽 가까이에 근접한 적은 승자총통을 쏘아 쓰러뜨리고, 장애물을 피하여 사다리를 타고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은 철겸으로 후려치고 돌멩이를 던져 떨어뜨렸다. 접전을 치른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아 조선군을 경시하고 무작정 돌격을 감행하던 일본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경거망동하는 적에게는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일본군의 수효도 얼마 되지 않고 공격력이 예상 외로 미약하자 자신감을 얻은 서예원은 한밤중에 정예병사를 동원하여 적진을 기습 공격했다. 일찍이 북방에서 여진족과 싸울 때도 그는 전격적인 기습 작전으로 수차례 승리를 거둔 바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함매(銜枚)병사들의 입에 물린 나무조각를 물고 소리 없이 적진에 다가간 조선군 병사들은 불시에 불화살을 날리고 고함을 지르며 돌격했다. 한낮의 전투에 지쳐 방심하고 있던 일본군은 예기치 못한 조선군의 반격에 허둥지둥하다가 수많은 시체를 남기고 흩어졌다.

    서예원은 여세를 몰아 낙동강에 인접한 죽도현재 부산시 가락산 지역까지 적을 밀어붙인 다음 철수했다.

    적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감히 저들이 우리를 이길 수 있겠는가.

    일전에 승리를 거둔 초계군수 이유검은 병사들 앞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아온 서예원은 왠지 찜찜했다. 첫 상대가 일본군의 주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허술했던 것이다.

    ‘적의 본진은 대체 어디쯤 오고 있을까?’

    조바심을 태우던 서예원은 4월 18일 한밤중에 몇몇 수하들과 함께 협선에 올라 낙동강 쪽으로 정찰을 나갔다.

    그 시각 전국시대의 효웅 구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의 아들인 25세의 청년 무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수백 척의 세키부네 전단을 거느리고 다대포를 지나 낙동강 하류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는 김해성을 공격한 선봉대의 패전 소식을 들었지만 동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건너야 할 돌다리를 한 번 두드려본 것이라 여겼을 뿐이다. 한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가 갑자기 부관에게 물었다.

    김해는 황금이 많은 곳인가?

    예전에 금관가야가 있던 지역이랍니다. 왕릉이 꽤나 많다고 합니다.

    아깝군. 시간이 남으면 왕릉이나 파헤쳐 볼 텐데.

    나중에 천천히 즐겨 보시지요.

    구로다 나가마사는 1587년 규슈에서 전공을 세우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규슈 북부에 있는 부젠국후쿠오카현 동부 지역을 영지로 받았다. 거대한 물소 뿔 장식의 투구를 트레이드 마크로 삼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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