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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인물 열전
중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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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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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is ebook

진시황부터 공자, 양귀비, 마오쩌둥까지, 79명의 인물로 만나는 중국사
이들만 알아도 5,000년 중국사의 흐름을 한 눈에 꿸 수 있다!
중국 전문가 소준섭 박사가 말해주는 재미있는 중국사 이야기

중국사는 5천 년이라는 유장한 시간을 자랑할 만큼 그 정보도 방대하여 쉽게 접근하기가 어렵다. 『중국사 인물 열전』은 그런 방대한 중국사의 문서와 기록들을 모두 취합하여 인물 열전이라는 형태로 중국사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간다. 통일 제국을 세운 진시황의 출생의 비밀, 현실 정치에서는 등용되지 못해 상갓집 개의 신세였던 공자, 괴로움에 못 이겨 자신의 얼굴 가죽을 뜯고 죽은 타이완의 개척자 정성공 등 수많은 인물들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그려지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의 인물 기술만 보아도 해당 시기의 사건과 주변 인물, 그리고 시대적 조류 및 전후좌우의 역사적 흐름과 사상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용의 이해를 돕는 이미지들도 200점 이상 수록해 독자들의 읽는 재미와 신선함도 더해줄 것이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현대지성
Release dateApr 12, 2018
ISBN979118714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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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사 인물 열전 - 소준섭

    1. 후세 군주의 전범典範 요순과 우임금

    요임금에 대하여 『사기·오제본기』는 그는 하늘처럼 인자하고 신처럼 지혜로웠으며, 사람들은 마치 태양에 의지하는 것처럼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만물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비구름을 보듯이 그를 우러러보았다. 그는 부유하였으나 교만하지 않았고, 존귀했으나 거드름 피거나 오만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 요임금이 한 마을을 지나갔다. 그곳에서는 노인들이 음식을 먹으면서 배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해가 뜨면 나가서 일하고日出而作

    해가 지면 들어와 쉬노라日入而息.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鑿井而飮

    밭을 갈아 배불리 먹노라耕田而食.

    그러니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帝力何有於我哉

    이 노래가 바로 ‘함포고복含哺鼓腹’의 ‘격양가擊壤歌’이다. 백성들이 왕이나 정치를 잊을 정도로 편안하게 일을 하고 안온하게 잘 살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무위자연’의 덕德의 정치로서 후세 정치의 모범으로 존숭되었다.

    요임금은 아들 단주丹朱가 불초해서 천하를 이어받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권력을 순舜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왜냐하면 순에게 제위를 넘겨주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이익을 얻고 단주만 손해를 보지만, 단주에게 제위를 넘겨주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손해를 보고 단주만 이익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임금은 결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손해를 보면서 한 사람만 이익을 얻게 할 수는 없다고 하며 천하를 순에게 넘겨주었다. 이것이 바로 ‘천하위공天下爲公’의 사상이다.

    순舜임금의 ‘순舜’은 ‘민첩하다’ 혹은 ‘민첩한 사람’을 의미하며, ‘총명하다’는 뜻도 지니고 있다. 공자는 『중용』에서 순임금에 대하여 순임금은 위대한 효자였다. 성인의 덕으로 생전에는 존귀한 천자가 되었고 천하의 부를 차지했으며 죽어서는 종묘에 제사 받고 자손이 길이 받들었다.라고 기술하였다.

    요임금의 뒤를 이은 순임금은 적재적소에 유능한 인물을 기용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우禹를 등용하여 가장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인 치수治水에 성공을 거둔 것은 그 대표적인 일이었다. 특히 순임금은 오교五敎: 부의父義, 모자母慈, 형우兄友, 제공弟恭, 자효子孝와 오상五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널리 보급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실천하게 하였으며, 예악禮樂을 제정하여 예치禮治의 정통을 확립하였다.

    한편 우禹임금에 대하여 『사기』는 우는 총명하고 의욕이 왕성하며 매우 부지런하였다. 그 덕은 어김이 없었고, 인자하여 친애할 수 있었으며, 말은 신용이 있었다. 말소리는 음률처럼 화기애애하였고, 행동은 법도에 맞았으며, 사리판단을 잘하여 일을 처리하고, 부지런하고 엄숙하여 백관의 모범이 되었다.고 평하고 있다.

    그가 치수 사업에 온몸을 바친 것에 대해서도 『사기』는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육로는 수레를 타고 다녔고, 수로는 배를 타고 다녔으며, 수렁 길은 썰매를 타고 다녔고, 산은 바닥에 쇠를 박은 신발을 신고 다녔다. 왼손에는 수준기와 먹줄을, 오른손에는 그림쇠와 곱자를 들고, 또한 사계절을 측량하는 기구를 가지고서 구주九州를 개척하고, 구도九道를 소통시키며, 구택九澤을 축조하고, 구산九山에 길을 뚫었다.

    우는 허름한 옷을 걸치고 조잡한 음식으로 허기를 채웠으며 지친 몸을 이끌고 굽은 허리로 절룩이며 전국을 걸어 다녔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의 걸음걸이를 ‘우보禹步’라고 불렀다. 순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우는 산 속으로 숨었으나 사람들이 그를 추천하여 왕위에 올랐다.

    2. 덕이 짐승까지 미치다 은나라 탕왕

    은나라 왕 상탕商湯의 조상은 제곡帝嚳의 아들인 설契이다. 설의 어머니는 유융씨의 딸인 간적이었다. 어느 날 한 마리 검은 새가 날아와서 알을 떨어뜨리고 갔는데, 그녀는 그 알을 주워 먹고 설을 잉태하였다. 이렇게 태어난 설은 우의 치수 사업에 공을 세웠고 순임금에 의해 교육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또 순임금은 설을 상商 지방에 봉하고 상이라는 성씨도 내렸다.

    상탕은 설의 14대 자손이었다. 자애롭고 인자한 정치를 펼친 상탕으로 인해 은나라는 날이 갈수록 융성해졌다. 당시 중앙의 하夏나라는 폭군 걸왕桀王의 시대였다. 상탕은 여전히 신하 나라로서 하나라를 섬겼다. 그는 현명하기로 이름이 높던 이윤伊尹이라는 사람을 초청하여 하나라 걸왕에게 추천해 보냈다. 이윤이 신하로 일한다면 나라가 조금이라도 바로잡힐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주색에 빠져 있던 걸왕은 이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할 수 없이 이윤은 돌아와 상탕을 섬기게 되었다.

    원래 이윤은 산동 지방에 살면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상탕이 그의 뛰어남을 알고 사람을 보내 나라의 일을 도와 달라고 청하였다. 그 당시 이윤은 걸왕의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정치에 나설 생각이 없다며 숨어 살 뜻을 비쳤다. 그 뒤 상탕은 더욱 극진한 예를 갖춰 사람을 보내 청했지만 이윤은 거듭 사양하였다. 이렇게 오가기를 다섯 번, 이윤도 상탕이 성실하고 겸손한 인물임을 확인하고 부름에 응했다.

    이때 걸왕에게 직언을 한 충신 관용봉이 걸왕의 노여움을 사 처형되었는데, 상탕은 신하를 보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걸왕은 크게 노했다. 그는 상탕을 초대하는 척하며 그를 불렀고 탕이 도착하자마자 그를 하대夏臺의 감옥에 가둬 버렸다. 이렇게 상탕의 목숨이 위태로워졌을 때 이윤은 걸왕이 좋아하는 미녀와 많은 보물을 바쳐 간신히 상탕을 구했다.

    하나라 걸왕을 토벌하다

    어느 날 탕왕이 시찰을 나갔을 때였다. 어떤 사람이 그물을 사방에 쳐놓고 새가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든,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든 사방에서 날아오는 모든 새는 다 내 그물에 걸려라.

    탕왕이 이를 보고는 한쪽 그물만 남기고 나머지 세 방향의 그물은 거둬 버리면서(이로부터 망개일면網開一面이라는 고사성어가 비롯되었다) 이렇게 말하였다.

    왼쪽으로 가려는 새는 왼쪽으로 가라. 그리고 오른쪽으로 가려거든 그쪽으로 가라. 다만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새만 그물에 걸려라.

    이 소문이 나라에 널리 퍼지자 백성들은 탕왕의 덕이 저렇듯 짐승에게까지 미치니, 하물며 사람에게는 어떻겠느냐. 하며 상탕의 인자한 덕을 너나 할 것 없이 칭송하였다.

    그 후 상탕이 하나라 걸왕을 토벌하자 천하의 제후들은 모두 그를 천자로 추대했다. 상탕이 천자가 되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자 천하는 다시 태평성대를 맞았다. 그런데 이 무렵 가뭄이 7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탕왕이 태사太史(천문을 맡는 관리)에게 그 까닭을 점치게 하니 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아무래도 사람을 바쳐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탕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비가 오기를 비는 것은 모두 백성을 위함이다.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희생시킬 수는 없다. 만약 사람을 희생물로 바쳐야 한다면 내가 그 희생자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 탕왕은 목욕을 하고 난 후 손톱을 깎고 머리털을 잘랐다. 그리고 흰 말이 이끄는 장식 없는 흰 수레를 타고서 흰 머리띠를 두르고 스스로 희생양이 되었다. 그런 다음 들판에 나가 단을 쌓고 엄숙하게 꿇어 앉아 자기 자신을 꾸짖는 여섯 조항의 말을 하늘에 아뢰었다.

    지금 이렇듯 백성들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은 능력 없고 덕이 부족한 제가 정치를 하며 절제를 하지 못하고 문란해졌기 때문입니까? 또한 제가 백성을 다 살피지 못하여 백성들이 직업을 잃고 곤궁해졌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저의 궁전이 너무 화려하기 때문입니까? 또는 궁궐에서 여자 때문에 정치가 어지럽혀졌기 때문입니까? 뇌물이 성하여 도덕이 무너졌기 때문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아부하는 말로 인하여 어진 사람이 배척당하기 때문입니까?

    탕왕의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늘에서 갑자기 억수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비는 가뭄으로 허덕였던 세상을 흠뻑 적셨다.

    3. 후세의 모범 주나라를 세운 주 문왕

    주 왕조의 시조

    주나라 무왕武王은 성이 희姬씨요, 이름은 발發로서 후직의 16대 손이다. 후직의 어머니는 제곡의 부인인 강원이다.

    어느 날 강원이 들판에 나갔다가 거인의 발자국을 보고 이상하게 마음이 끌려 그 발자국을 밟았다. 그 후 기棄를 낳게 되었는데, 불길한 아이라 하여 길거리에 내다버렸다. 이렇게 아이를 버렸기 때문에 버릴 기棄자를 이름으로 쓴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나가는 소와 말이 아이를 밟지 않고 피해 갔다. 그래서 산 속으로 데려가 버리려 하였는데, 마침 사람이 많아서 버리지 못했다. 걸음을 옮겨 이번에는 얼어붙은 강 위에 놓아두었다. 그러자 새들이 날아와 날개로 덮어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이에 강원은 하늘이 보살펴 주는 아들이라 생각하고 아기를 안고 돌아왔다.

    기는 어려서부터 생각하는 것이 어른스러웠다. 또 풀이나 나무 심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어른이 되자 곧잘 땅을 살펴보고서 무엇이 그 땅에 적합한지를 연구하곤 하였다.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 그리하며 그는 요임금과 순임금으로부터 봉토를 받고 희씨 성을 받았다.

    그 후 8대 후손인 고공단보에 이르렀을 때 북쪽의 흉노족이 대규모로 쳐들어왔다. 그래서 그는 남쪽 기산 지방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때 백성들이 고공단보는 참으로 어진 인물이다. 그분을 놓쳐서는 안 된다.라면서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이를 업고서 모두 고공단보 일행을 뒤따랐다.

    고공단보의 장남은 태백이고 둘째는 우중이며, 막내는 계력이다. 계력에겐 창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창이 태어날 때 붉은 새가 붉은 책을 물고 와 산모의 방 위에 앉는 상서로운 징조가 있었다.

    이에 태백과 우중은 아버지 고공단보가 막내인 계력에게 왕위를 넘길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알고 남쪽 오나라 지방으로 가서 그곳 풍습에 따라 머리를 깎고 몸에 문신을 하며 계력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계력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이 뒤를 이었는데, 그가 바로 후에 주나라 문왕文王이 된 서백창西伯昌이다. 그의 높은 덕을 잘 알고 있던 제후들은 앞을 다투어 그에게 복속해 왔다.

    요염한 그 자태 어디 가고 비구름만 맴도는가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원래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머리가 좋고 말재주도 뛰어났으며, 맹수를 맨손으로 때려잡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 그래서 초기에는 대규모로 영토를 확장하는 등 국세를 크게 떨쳤다. 하지만 그는 갈수록 자신의 재능을 믿고 교만해졌다. 특히 절세의 미녀 달기妲己를 얻고부터는 전형적인 폭군이 되어 갔다. 사치와 향락만을 일삼고 정사를 내팽개쳤으며, 신하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은 무조건 처형하였다.

    달기는 유소씨有蘇氏의 딸이며 주왕이 유소씨를 토벌했을 때 그로부터 전리품으로 받은 미녀였다. 주왕은 요염한 달기의 자태에 넋을 잃어 그녀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했다.

    어느 날 달기는 궁중 음악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사오니 마음을 풀어줄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 어떤지요?라고 청하였다. 주왕은 즉시 음악을 담당하는 관리에게 명령하여 관능적이고도 자유분방한 ‘미미의 악靡靡之樂’이라는 음악을 만들게 하였다.

    얼마 뒤 달기가 또 말했다.

    폐하, 환락의 극치가 어떠한 것인지 한번 끝까지 가보고 싶사옵니다.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고 후회 없는 삶을 누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하여 마침내 주지육림酒池肉林의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공사가 완성되자마자 매일같이 연회가 벌어졌다. 그들은 낮에 잠을 자고 저녁부터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마시고 놀며 즐겼다. 이러한 환락의 날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자그마치 120일이나 이어지니, 이를 ‘장야長夜의 음飮’이라 불렀다.

    달기는 재물을 모으기 위해 백성들에게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여 녹대鹿臺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금고를 만들었는데, 그 크기는 넓이가 1리里나 되었고 높이는 천 척尺이나 되었다. 또한 별궁을 확장하여 온갖 동물들을 모아 길렀다.

    한편 이 무렵에 포락지형炮烙之刑이라는 형벌이 행해졌다. 포락지형이란 구리 기둥에 기름을 바르고 그 아래에 이글거리는 숯불을 피워놓은 후 죄인들로 하여금 구리 기둥 위를 맨발로 걸어가게 하는 형벌이었다.

    충신의 운명

    당시에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3공三公이 있었는데, 바로 구후九侯와 악후鄂侯, 그리고 서백창이라는 충신들이었다.

    폭군 주왕은 구후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나 그녀가 음란한 짓을 싫어하자 그녀의 얼굴이 못생겼다는 이유로 죽였으며 구후도 죽여 소금에 절였다. 또 이를 악후가 격렬하게 비난하자 악후도 죽여 육포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그 육포를 서백창에게 보내 너도 눈 밖에 나면 이 모양이 될 것이다.라고 겁을 주었다. 서백창은 그것을 보고 기가 막혔다. 그래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해마지 않았다.

    한편 육포를 가져왔던 사자가 주왕에게 돌아와 서백창이 탄식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주왕은 크게 노했다. 그는 곧장 서백창을 붙잡아 유리라는 벽지로 유폐시켜 버렸다. 상용商容이라는 인물도 사람됨이 어질어서 백성이 그를 따랐으나 주왕은 그를 등용하지 않았다.

    그 후에도 주왕의 폭정은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만삭의 임산부까지 찔러 죽이는 만행까지 일삼았다.

    한편 은나라에 비간比干이라는 충직한 왕자가 있었다. 그는 주왕의 계속되는 폭정을 두고만 볼 수 없다고 생각해 주왕을 찾아갔다.

    폐하,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시고 나라를 지키소서. 지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고 민심은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통촉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주왕은 들은 척하지도 않았다. 비간이 몇 번에 걸쳐 호소했지만, 주왕은 듣지도 않고 자리를 떠버렸다. 그렇지만 비간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자리에 꿇어앉아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하여 호소하였다. 그러자 주왕은 크게 화를 냈다.

    네가 나를 이렇게 괴롭힐 수 있느냐. 그럼 좋다. 네가 그렇게 성인이란 말이더냐? 내가 알기로 성인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는데, 오늘 확인해 보겠다.

    그러면서 비간을 죽이고 그의 심장을 도려냈다.

    한편 비간 왕자가 주왕에게 간하다가 궁궐 밖으로 쫓겨나 계속 호소한다는 소식이 널리 퍼졌을 때, 현명한 선비로 이름 높았던 기자箕子가 비간을 구하기 위해 궁궐로 찾아갔다. 그러나 기자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비간 왕자가 비참한 죽임을 당한 뒤였다.

    기자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아! 이 나라는 정녕 끝났는가!

    그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 사람으로 변장한 채 거리를 유랑하였다.

    한편 유폐되어 있던 서백창은 그 와중에도 학문에 정진하여 고금의 명저 『주역』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서백의 신하인 굉요閎夭 등이 미녀와 진기한 보물, 준마 등을 구하여 주왕에게 바치자 주왕은 곧 서백을 사면해 주었다. 서백은 석방되자 낙수洛水 서쪽의 땅을 바치며 포락지형炮烙之刑을 없애주기를 청원했다.

    서백이 귀국하여 드러나지 않게 덕을 베풀고 선정을 행하니 많은 제후들이 주왕을 등지고 서백을 추종하기 시작했다. 그는 굉요, 산의생을 비롯하여 백이, 숙제 등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여 나라를 다스렸고, 근검절약하여 백성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손수 논밭에 나가 일을 했다.

    서백창이 남몰래 선을 행하자 제후들은 모두 그를 찾아와 시비를 가려줄 것을 청하였다. 한번은 우虞나라 사람과 예芮나라 사람이 송사를 벌이다가 서백창에게 중재를 요청하기 위하여 그를 찾아가는 도중 주나라¹ 사람들이 서로의 논밭의 경계를 양보하면서 장자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 모습을 본 그들은 자신들의 모습이 부끄러워 서로 양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제후들은 모두 서백은 하늘의 명을 받은 군주일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서백의 세력이 점점 강해짐에 따라서 주왕의 위세는 점차 줄어들었다.

    1.서백창의 선조들이 기산岐山 남쪽의 주원周原을 주요 근거지로 하였기 때문에 주족周族으로 불렸고, 이들이 세운 나라는 주周라 하였다.

    주 문왕은 왕위에 오른 지 50년 만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97세였다. 그는 필畢 땅에 묻혔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발發이 무왕으로 즉위하였다.

    문왕은 임종하면서 무왕에게 『보훈保訓』을 유언으로 남겼는데, 그 주요한 사상은 ‘중中’, 곧 중도였다. 이 ‘중’의 사상은 이후 중국 유학의 핵심 사상으로 계승되었다.

    공자는 문왕을 존숭하여 삼대지영三代之英, 즉 삼대 시대의 영명한 군왕君王이라 하여 요순임금과 같은 차원의 인물로 높이 평가하였다.

    4. 기묘한 계책과 용병술 강태공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은 동해²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일찍이 사악四嶽의 관리³가 되어 우禹임금의 치수 사업을 도와 크게 공을 세웠다. 그들은 우虞와 하夏 시대에 여呂 또는 신申 땅에 봉해졌으며 성姓은 강씨姜氏였다. 하나라와 은나라 시대에는 그 방계의 자손이 신과 여 땅에 봉해지기도 하였고, 또 평민이 되기도 하였는데 상尙이 그 후예다. 본래의 성은 강씨였지만 그 봉지封地를 성으로 삼아 여상呂尙이라고 불렀다.

    2.현재 장쑤성과 산둥성 일대의 연안을 가리킨다.

    3.요순 시대에 사시四時를 관장하고 사방을 순시하는 직책을 담당했다는 전설적인 관직명.

    여상은 학문을 좋아해서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했다. 그래서 원래 가난한 집이었지만, 나중에는 더욱 가난해져 끼니조차 이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러자 그의 아내조차도 견디지 못하고 몰래 도망쳐 버렸다. 그래도 그는 학문에만 매달렸다.

    이 무렵 주 문왕이었던 서백창은 나라를 더욱 발전시키려면 인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천하의 인재를 찾아 나섰다.

    어느 날 강태공이 시장에 나갔다가 서백창이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부터 강태공은 강가에 나가 낚싯대를 드리웠다. 이때 강태공의 나이는 이미 70세가 넘어 있었다. 하지만 강태공은 하루 종일 한 마리의 고기도 낚지 못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강태공은 모자도 팽개치고 옷까지 벗어 버리며 화를 터트렸다. 지나가다 이 모습을 본 어부가 다가오더니 서둘지 말고 천천히 해 보시오.라고 말했다. 어부가 시키는 대로 하니 과연 잉어가 걸려들었다. 그리고 그 잉어의 배를 갈라보니 < 장차 큰 귀인이 될 것이니라 >라는 글귀가 나왔다.

    서백창은 평소 사냥을 즐겼었다. 하루는 사냥에 나가기 전에 점을 쳐보니, < 얻은 것은 용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며, 큰 곰도 아니다. 사냥에서 얻는 것은 천하를 얻는 데 필요한 신하로다 >라는 점괘를 얻었다. 점괘가 말한 것처럼 그날 그는 한 마리의 짐승도 잡지 못했다. 저녁 무렵에 그냥 돌아오려는데, 멀리 강가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이 보였다. 멀리 보기에도 풍채가 범상치 않았다. 서백창이 바로 달려가 그 사람과 몇 마디 얘기해 보니 과연 뛰어난 인물이었다.

    아버님께서는 머지않아 성인이 주나라에 나타나 우리 주나라가 그로 인해 크게 흥할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당신이 그 성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를 궁궐로 모셔서 스승으로 삼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강태공이었다. 서백창은 그에게 태공망太公望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는데, 그 뜻은 서백창의 아버지인 태공太公이 바라던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서백창은 유리에서 벗어나자 여상과 은밀히 계획을 세우고 덕행을 닦아 상商나라의 정권을 무너뜨렸는데, 이 일들은 주로 용병술과 기묘한 계책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후세에 용병술과 주나라의 권모權謀를 말하는 이들은 모두 태공太公을 그 주모자로 존숭하였다. 강태공은 특히 병법에 뛰어나 『육도六韜』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일부 사람들은 『육도』가 강태공의 저술이 아닌 하나라 이후의 책이라고 의심했지만, 1972년 산둥성 은작산에서 발굴된 한 무제 초기의 무덤에서 『육도(六韜)』의 일부 죽간이 발견되면서 『육도』가 한나라 이전 시기에 크게 유행했던 강태공의 작품이었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증명되었다.

    주 무왕이 은나라를 멸한 뒤 공헌이 큰 친족과 공신에게 봉토를 주었는데, 강태공은 제나라에 봉해졌다. 처음 강태공이 제나라에 봉해졌을 때 그곳은 소금기가 많은 개펄이었고 사람이 매우 적었다. 그리하여 강태공은 여자들에게 방직, 자수 등의 일을 권장하고 동시에 어업과 염업을 개발했다. 사방의 사람들과 물자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이게 되어 마치 수레바퀴의 바퀴살이 차축에 모여들듯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그 결과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제나라에서 생산된 의복과 신발과 모자를 사용하게 되었고, 동해에서 태산에 이르는 작은 나라 제후들이 모두 의관을 정제하고 공경한 태도로 제나라에 와서 알현하게 되었다. 강태공은 친소관계를 가리지 않고 능력 있고 현명한 인재를 기용하였고, 법으로 다스리면서 인의仁義로 민심을 안정시켰다.

    강태공은 주나라 강왕 6년 주나라 수도 호경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139세였다.

    5. 왕도 정치의 길 제 환공

    춘추전국시대

    주나라 유왕幽王⁴이 견융犬戎족에게 살해당한 후 주나라는 도읍을 낙양으로 옮겼으나 그때는 이미 천하의 지배력을 잃고 일개 소국으로 전락한 후였다. 이때부터 각 지역의 제후들이 세력을 다투는 이른바 영웅쟁패의 시대가 전개된다. 바로 이 시대가 춘추春秋 시대이다.

    4.주나라의 폭군. 총희 포사褒姒에 마음을 빼앗기고 끝내 견융족에게 살해당했다.

    ‘춘추 시대’란 공자가 노나라 역사를 편찬한 책 이름인 『춘추』에서 비롯되었다. 춘추 시대는 주나라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때부터 주나라가 멸망할 때까지를 지칭하며 초기에 140여 나라가 곳곳에 난립했으나 마침내 10여 개 국으로 압축된다.

    한편 전국戰國 시대는 강력했던 진晋나라가 한, 위, 조의 세 나라로 나뉘면서 시작되어 진秦나라가 천하통일을 이룰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국 시대라는 명칭은 한나라 말기 유향劉向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한 것이다.

    춘추 시대에는 힘이 쇠약해진 주나라 왕실을 존중한다는 명분과 관념이 강했다. 이를테면 관중은 주 왕실을 보호하고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슬로건으로 삼았는데, 이는 춘추 시대의 으뜸가는 정신이 되었다. 하지만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그러한 명분과 관념이 없어지고 오직 적나라한 힘과 힘의 대결인 약육강식의 시대가 펼쳐졌다.

    춘추 시대에는 강대국으로 성장하여 천하를 압도적으로 군림하던 제후가 다섯 명 있었는데, 이들을 춘추 5패春秋五覇(『사기』에서는 제 환공을 비롯하여 진 문공, 초 장왕, 송 양공, 진 목공을 지칭하며, 다른 견해에 따르면 제 환공, 진 문공, 초 장왕, 오왕 부차, 월왕 구천의 다섯 명을 지칭하기도 한다)라 부른다. 그 최초의 패자覇者는 관중의 경제개혁을 발판으로 하여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제나라 환공桓公이었다.

    전국시대는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하여 연, 조, 제, 한, 위, 진, 초의 일곱 나라가 치열하게 쟁투했다. 처음에 단지 중원 밖 서쪽 변두리의 미개한 나라에 불과했던 진나라는 상앙의 개혁을 통해 군사 강국으로의 확고한 위상을 정립함으로써 천하 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최초의 패자覇者

    중국 역사에서 왕도王道 정치는 대단히 존숭되어 왔다.

    맹자는 왕도와 패도를 엄격히 구별하여 힘으로써 인仁을 가식하는 자는 패覇이다. 이에 반해 덕德으로써 인을 행하는 자는 왕王이다. 덕으로써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자는 마음속에서 참되게 복종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인의仁義의 덕이 안으로 충실하여 선정善政으로 나타나는 것은 왕도지만, 겉으로 인정仁政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권력정치를 행하는 것은 패도覇道일 뿐이다.

    전국시대 최초로 패자의 자리에 올라섰던 제나라 환공桓公의 옆에는 관중管仲이라는 천하 제1의 참모가 있었다.

    관중은 춘추시대 제나라의 영수 기슭에 살던 사람이었다.

    관중에게는 포숙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포숙은 언제나 그를 끔찍하게 위해주었다. 관중은 매우 가난해서 포숙을 몇 번이나 속인 적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포숙은 그를 관용으로 대해 주었다.

    당시 제나라의 왕이었던 양공은 무도한 군주였다. 그는 노나라의 환공을 술에 취하게 만든 후 살해하고 환공의 부인과 정을 통했으며, 걸핏하면 신하들을 마구 살상하였다. 이렇게 되자 양공의 동생들은 그 화가 자신들에게까지 미칠까봐 크게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이웃나라로 망명해야 했다.

    그때 포숙은 공자 소백을 따라 망명하고, 관중은 공자 규와 함께 망명하였다. 마침내 무도한 군주 양공은 암살되었고 그 소식을 들은 소백과 규는 서로 군주가 되기 위해 앞을 다퉈 귀국길에 올랐다. 이때 관중은 별동대를 거느리고 매복하고 있다가 소백을 화살로 정확히 맞춰 쓰러뜨렸다. 그런 뒤 공자 규와 함께 6일 만에 느긋한 마음으로 제나라에 도착했다.

    그런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소백이 이미 군주로 즉위해 있었다. 알고 보니 관중의 화살이 맞춘 곳은 소백의 허리띠에 있던 쇠장식이었던 것이다. 소백은 화살을 맞자 죽은 척하고 쓰러져 있다가 급히 영구차를 타고 제나라로 돌아갔다. 이렇게 되자 관중과 공자 규 일행은 다시 노나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나라의 왕으로 즉위한 소백은 곧바로 공자 규가 망명해 있던 노나라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 후 노나라에 사신을 보내 명령하였다.

    공자 규는 피를 나눈 형제이므로 차마 내 손으로 죽일 수 없으니 노나라에서 그를 죽여주었으면 한다. 또한 관중은 나를 죽이려 했던 원수이므로 송환시켜 마음껏 욕보인 후 죽여 젓을 담글 것이다. 만약 이에 응하지 않으면 나는 기필코 노나라를 멸망시키겠노라.

    궁지에 몰린 노나라는 할 수 없이 규를 죽이고 관중을 포박하여 제나라에 보냈다. 이때 포숙은 거듭 환공을 설득하였다.

    폐하께서 제나라만 다스릴 생각이시면 모르겠지만, 만약 천하를 다스릴 패자가 되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관중이 있어야 합니다. 관중을 중용하는 나라가 천하를 다스릴 것입니다.

    포숙의 간절하고도 충성스러운 간청에 환공도 비로소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환공은 관중을 잡아와야만 마음이 풀릴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를 중용하려 했다. 관중은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돌아오겠다고 청했다. 포숙이 관중을 맞으러 나왔다.

    제나라 도읍 근처에 오자 포숙은 관중의 손과 발을 채운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환공을 만나게 하였다. 환공은 그를 후하게 대접하고 대부大父의 벼슬을 주어 정사를 맡겼다.

    작은 이익에 만족하면 천하를 잃는다

    환공은 이웃의 노나라와 다섯 번 싸워 다섯 번 모두 이겼다. 그렇게 하여 노나라의 땅은 거의 모두 빼앗기게 되었다.

    그런데 노나라에 조말曹沫이라는 용기 있는 장군이 있었다. 어느 날 환공이 노나라와 회담을 벌이고 있을 때 조말이 갑자기 단상에 뛰어올라 환공에게 비수를 들이대면서 그간 빼앗아간 노나라 땅을 모두 되돌려 달라고 협박했다. 환공은 황망 간에 닥친 위기를 모면하고자 그 요구를 허락하였다. 하지만 조말이 내려간 뒤 환공은 그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조말을 당장 죽이려 했다. 그러자 관중이 환공을 말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협박을 당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하시겠지만, 어디까지나 약속은 약속입니다. 그것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상대를 죽인다면 신의를 저버리는 처사입니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하신 약속을 스스로 깨뜨리시는 것이 되어 천하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주는 것이 곧 받는 길입니다. 작은 이익에 만족하시면 제후들의 신망이 떨어지고 천하의 명성도 잃게 됩니다.

    환공은 결국 노나라로부터 빼앗은 땅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그 뒤 북쪽의 산융족山戎族이 연나라를 침공하자 연나라는 제나라에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환공은 군사를 이끌고 산융족을 토벌하고 이어서 고죽국을 격파하였다. 그런 후 환공은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연나라 왕이 감격한 나머지 전송하러 나왔다가 어느새 제나라 땅까지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자 환공이 말했다.

    천자를 제외하고 제후끼리의 전송에서는 국경을 넘지 않습니다. 나는 연나라에 대하여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즉시 그 자리에서 국경의 도랑을 파게 하여 연왕이 전송하며 따라온 곳까지 연나라의 땅으로 떼어주었다. 또한 환공은 연나라 왕에게 어진 정치를 베풀라고 권하면서 주나라 왕실에게 공물을 바치도록 했다.

    환공의 이러한 행동들은 제후들에게 높이 평가되었다. 그래서 제나라와 손을 잡으려는 나라가 줄을 잇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환공은 제후들에 의하여 천하의 패자覇者로 추대되었다.

    6. 최고의 경세가 관중

    관중은 기원전 723년 제나라 장공 때 출생하였다. 그의 조상은 본래 희씨 성으로 주나라 왕실과 동종同宗이다. 그의 부친은 대부 벼슬까지 했지만 가문이 점차 쇠하게 되어 관중 때에는 한미해졌다.

    관중과 포숙은 친구였는데 포숙은 관중을 현자로 생각했다. 관중은 가난하여 포숙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포숙은 변함없이 그를 잘 대해주었으며 전혀 원망의 말을 하지 않았다.

    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내가 가난했을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한 적이 있는데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몫을 더 많이 가졌지만 포숙은 나를 욕심 많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언젠가는 내가 포숙을 위해 일을 봐줬는데 오히려 그에게 손해를 끼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내가 어리석다고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시기의 유리함과 불리함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세 번 벼슬을 했다가 세 번 모두 군주에게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지만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시운을 만나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세 번을 싸워 세 번 모두 패하여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에게 늙으신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패했을 때 소홀이 그를 위해 죽고 나는 잡히어 굴욕을 당했지만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떨치지 못하는 것을 치욕으로 아는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주는 이는 포숙이다!"⁵

    5.이로부터 생아자부모, 지아자포숙야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也라는 유명한 구절이 비롯되었다.

    포숙은 관중을 천거했지만 자신은 관중보다 낮은 벼슬을 하였다. 천하의 사람들은 관중의 현능함은 칭찬하지 않고 오히려 포숙의 사람 보는 눈을 칭찬했다.

    관중은 항상 대의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환공 27년, 노나라 민공魯湣公의 어머니 애강哀姜은 환공의 여동생이었는데, 노나라의 공자 경보慶父⁶와 간음하였다. 경보가 민공을 시해하자 애강은 경보를 즉위시키고자 했는데 노나라 사람들은 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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