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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젖은 노을: 정형남 장편소설
피에 젖은 노을: 정형남 장편소설
피에 젖은 노을: 정형남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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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젖은 노을: 정형남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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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유민(百濟流民)이 망국의 한을 품고 마지막으로 바다를 건너간 동로현(冬老縣)
그리고 망부석처럼 묵시적으로 백제유민을 기리는 삼층석탑
천년 세월을 넘나들며 그 오랜 역사적 사실을 섬세하고 리얼하게 담아낸 정형남의 장편소설

지난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깨어난 자세로 땅속 깊이로 묻히어진 역사를 비추어보아야 한다. 삶 자체가 역사라는 것을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뿌리의 근원을 망각한 무지스러움으로 역사의 오류가 생겨난다. 인간의 흥망성쇠는 개인이나 국가를 막론하고 과거의 역사를 유출해내어 거기에 대한 잘잘못과 반성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극복할 수 있다. 오늘의 현실을 명징하게 갈래 지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땅속에 묻힌 역사를 밟고 다니지 않는가.

≪피에 젖은 노을≫은 그렇게 땅속 깊이 묻히어진 역사의 한 단면을 시대의 간극을 초월하여 돋을새김으로 각인하였다. 조그마한 불씨 하나가 세상을 밝히듯, 천년 세월을 넘나들며 그 오랜 역사적 사실을 섬세하고 리얼하게 가슴으로 담아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이야기는 예리한 비수 날로 우리의 가슴을 파고들며 새로운 감동으로 충만케 한다. 저자의 치밀하고도 넉넉한 역사인식이 새삼 돋보인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애플북스
Release dateOct 10, 2018
ISBN9791157713455
피에 젖은 노을: 정형남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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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 젖은 노을 - 정 형남

    현대문학 추천

    월간문학 신인상

    세계의문학에 중편 《난동(暖冬)》 발표

    주요 작품

    단편집: 《수평인간》 《장군과 소리꾼》 《진경산수》 《노루똥》

    중편집: 《반쪽거울과 족집게》 《백갈래 강물이 바다를 이룬다》

    장편소설: 《숨겨진 햇살》 《높은 곳 낮은 사람들》

    《만남, 그 열정의 빛깔》 《여인의 새벽》(전 5권)

    《해인을 찾아서》(대산창작지원금 수혜)

    《토굴》 《천년의 찻씨 한 알》(문예진흥기금 수혜)

    《삼겹살》(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선정)

    《감꽃 떨어질 때》(세종우수도서 선정, 전주영화제 작품 선정)

    《남도》(전 5권), (제1회 채만식문학상 수상)

    《꽃이 지니 열매 맺혔어라》

    《피에 젖은 노을》

    |차례|

    문을 열다

    까마귀 떼

    흔적

    떠나는 자와 남는 자

    사라진 포구

    새로운 둥지

    새 시대의 백성

    옛 성터

    한 시대의 황혼

    하늘의 민심

    낯선 손객

    장군의 실체

    봄날의 재회

    말발굽소리

    백제의 혼으로 일어서다

    백제의 숨결

    출전

    항몽(抗蒙)의 후예들 1

    항몽(抗蒙)의 후예들 2

    맥박

    작가의 말

    문을 열다

    산을 오르지 않는 날이나 들판 너머 아슴한 거리의 바닷가에 나가지 않는 날이면 눈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호수를 찾았다. 호수를 끼고 도는 자전거 산책길은 저녁노을만큼이나 정감을 안겨 주었다. 호수 속에 거꾸로 잠긴 태공의 모습이 한 폭의 정물화처럼 한가하게 보였다. 차량의 소음이 와 닿지 않는 시골의 정취는 태고의 아련한 숨결로 폐부를 어루었다.

    그날은 이제 막 동면에서 깨어난 개구리 울음소리를 귓결로 흘려들으며 숨죽이고 엎디어 있는 마을 어귀를 돌아들었다.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인데도 지나치는 길목에 그저 눈으로 일별한 마을인지라 다소 어린아이의 낯가림으로 다가왔다. 봄 향기를 머금은 개구리 울음소리만 아니라면 이질감마저 들 법하였다. 그 가운데 비바람 찬서리에 부대끼며 망부석처럼 서있는 삼층석탑이 시선을 붙들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치성을 드리고 있는 여인네······.

    지난 가을 거두었던 고추밭과 김장밭은 정한으로 얼룩진 훈김이 묻어나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에 내리는 빗물처럼 쓸쓸하고 애잔한 기운이 서리어 있었다.

    정연(鄭然)은 자전거를 세워놓고 삼층석탑 곁으로 다가갔다. 이끼 낀 표지판은 지방문화재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라고 붙박이로 말하였다.

    여인네는 정연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였다. 세월의 풍상에 부대끼고 닳아진 삼층석탑과 정갈한 모습으로 치성을 드리는 여인네의 자태가 하나로 어우러져 하나의 입상처럼 보였다. 정연은 여인네의 그 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서러운 마음이 들면서 한 서린 우리네 어머니를 떠올렸다.

    이리 와 술 한 잔 하시게요.

    발길을 돌리려는데 느닷없는 여인네의 목소리에 정연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한없이 가라앉은 음성은 환청처럼 들려 가슴 깊이로 파고드는 한 송이 눈(雪)의 무게로 와 닿았다. 여인네는 무릎앉음새를 편안하게 고쳐 앉으며 재차 손짓해 불렀다.

    정연은 자석에 이끌리듯 여인네와 마주 앉았다. 가까이에서 마주 대하고보니 세파에 시달려온 연륜이 얼굴 가득 새겨져 있었다. 치성을 드리는 정한이 주름살 속에 문신처럼 배어났다. 삼층석탑 앞에 진설한 두어 가지 나물과 돼지수육은 조촐한 안주거리였다. 그 가운데 도드라지게 눈에 들어온 것은 중앙에 소복하게 차려올린 엿이었다. 의외라는 느낌이 들었다. 여인네는 말없이 술잔을 건넸다. 정연은 어정쩡하게 술잔을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함이 일었습니다.

    오늘 기도가 끝나는 날이오.

    여인네는 묻잖은 말로 홀가분함을 나타냈다.

    그러세요. 몇 날이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정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로 삼년이구만이라우. 아흔아홉 수를 사시고 돌아가신 시아버님 삼년상인 셈이지요. 세월이 긴 것도 같은디 뒤돌아보니 금방이네요.

    여인네는 새삼 감개가 무량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런 기분이 들지 않는다면 굳이 정연을 스스럼없이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 대단한 효심입니다.

    삼년상 자체가 요즘 세상에 생각할 수 있는 일인가. 사십구제도 번거롭게 여기며 삼우제마저도 생략하는 세태 아닌가.

    요즘 시상에 그게 뭐 효심인가요. 주책이지요.

    여인네는 삼층석탑을 그윽한 눈길로 쓸어보았다.

    시아버지의 삼년상을 삼층석탑 앞에서 드린 사연이 있을 법한데요.

    시아버님의 간절한 유언이었지요.

    삼층석탑과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가요?

    정연은 여인네에게 술잔을 건넸다. 저녁노을이 점점 사위어 가고 산자락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였다.

    사연이 길지요. 천년세월 대대로 이어져 왔으니께요.

    조상의 한과 관련이 있는가 봅니다.

    말하자면 그렇지라우. 조상의 한스러움을 대물림으로 가슴에 지녀왔으니께요. 부질없는 집착인지도 모르겠고······.

    이 엿은 제물로는 상당히 이색적인데요.

    정연은 안주삼아 엿을 한입 깨물었다. 달작지근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입안에 착 달라붙었다.

    그런 셈이지요. 대대로 엿을 빚어왔으니께요. 그만 일어나시게요. 머리위에 어둠이 내려앉는구만요.

    저는 이야기를 더 듣고 싶습니다만······.

    정연은 변죽만 울리다만 여인네의 집안 내력에 대해 아쉬움을 내비쳤다.

    우리 집으로 가시게요.

    여인네는 일방적이다 싶게 자리를 정리하고 앞장섰다. 초승달이 서산마루에 여리고 애처롭게 걸려 있었다.

    여인네의 집은 마을입구 묘지를 지나 제일 위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을이래야 오늘의 현실을 반영하듯 열두어 채 남짓하여 여인네의 집은 그만큼 호젓하였다. 한눈에 멀리 바다가 열려있고, 드넓은 들판이 시원스레 내려다 보였다. 바로 눈 아래 삼층석탑이 들어왔다. 짐작컨대 삼층석탑이 무언의 침묵으로 말해주듯 마을 전체가 제법 규모가 반듯한 도량(道場)이었을 것이다. 여인네의 집은 위치로 보아 산신각 아니면 칠성단이 있었던 자리쯤으로 짐작되었다.

    자식들은 다들 도시로 나가고, 시부모님과 영감을 앞서 보내고 나서 나 혼자 궁상을 떨며 살다보니 집이 그렇소만 괘념치 마시게요.

    여인네는 오랜만에 말벗이 생겼다는 듯 어둠살이 서려있는 외로움을 손사래 치듯 하며 풋풋함을 베어 물었다.

    뭘요. 집안이 살뜰하고 정갈하십니다.

    정연은 벽면에 걸려있는 가족사진을 올려다보았다. 한쪽 벽면을 빼곡하게 장식한 가족사진은 사각모를 쓴 손자로부터 아들 딸 다복한 집안이었다. 제일 위쪽 중앙에 여인네가 말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빛바랜 사진이 걸려 있었다. 여인네는 조촐한 주안상을 내왔다. 역시나 상 위에 안주로 엿을 올려놓았다.

    생면부지 손님을 오시라 해놓고 대접이 영 그렇소.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시아버님께서 의연해 보입니다.

    특별하거나 유별난 분은 아니셨고, 다만 윗대로부터 내려온 유습(遺習)을 소중하게 여겼구만이라우.

    유습이라면 삼층석탑과 관련이 있는가요?

    정연은 차분하게 앉음새를 바로하며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엿을 한입 깨물었다. 막걸리와 엿. 생각보다 궁합이 잘 맞는 안주였다.

    짐작은 하셨겠지만 마을이 들어서기 전에는 아담한 도량이었구만요.

    삼층석탑 안내표지문을 보니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더군요.

    백제가 망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유민의 무사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이곳에 남은 자손들이 지은 절이었구만이라우.

    그렇다면 시아버님의 윗대 조상도 그 가운데 한 분이셨단 말인가요?

    물론이지요. 그때는 마을 어귀까지 바닷물이 차올라 어족자원이 풍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닷길이 한없이 열려 있어 한 서린 고국 땅을 뒤로 하고 바다를 건너갈 수 있었다고 하더이다. 시아버님의 윗대 조상은 여기 남아 그들을 바다 멀리 떠나보냈고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만해도 이순신장군이 이곳에서 식량을 실어갔다고 하더군요.

    그러게요. 지금의 들녘은 일제 때 원막이를 하였제요. 여기에서 난 곡식을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 기차철로도 생겨났고요.

    그 같은 수난의 역사는 들어 알고 있습니다만, 이곳에서 백제유민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갔다니 격세지감이 듭니다.

    정연은 새삼 세월의 간극을 느꼈다. 생각을 곱씹을수록 아릿한 통증 같은 슬픔이 솔잎에 맺힌 이슬방울처럼 가슴에 맺혀났다.

    시아버님께서는 살아생전 매일같이 삼층석탑을 어루만지며 조상의 넋을 기렸어요.

    윗대 조상께서는 무슨 사연으로 바다를 건너가는 사람들 속에 합류하지 못하였을까요?

    시아버님 말씀으로는 윗대 조상님의 부인께서 만삭의 몸이어서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남아 눈물로 그들을 배웅하였다네요. 해산날과 맞물렸다나요. 그래서 노약자들과 병약한 사람들과 같이 남아 바다를 건너가는 백제유민의 무사를 빌었다 하더이다.

    정말 전설 같은 슬픈 역사입니다.

    정연은 후두둑 가슴을 여미었다. 망각의 늪에서 한 조각 파편처럼 각인되는 역사의 진실을 어떻게 담아야 할까?

    이제는 세월이 흐른 만큼이나 잊혀지고 묻혀졌지요.

    유서 깊은 절이 언제 소실되었을까요?

    금메요. 거기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그가 있소만, 나로서는 어느 이야그가 옳은지 분간을 못하겠구만이라우.

    그 말씀을 들으니 삼층석탑이 더욱 가슴을 여미게 합니다.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삼층석탑 주위로 서녘 초승달빛이 안개빛으로 드리웠다.

    호젓한 밤 달빛을 이고 선 삼층석탑을 볼라치면 시아버님 영상이 겹쳐져 마음이 괜스레 울적하다오. 윗대 조상님들의 망부석 같기도 하고요.

    바다를 건너간 백제유민의 자손들은 조상님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까 모르겠습니다.

    시아버님께서도 그 점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문을 가졌습니다만, 혹여 모르제요. 우리 집 가대처럼 누대로 기록한 유품이라도 있다면 뿌리의 내력을 소중히 지니고 있을지 누가 아남요.

    그렇다면 얼마나 다행입니까. 자손의 누군가가 뿌리의 근원을 밝혀내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요.

    정연은 불쑥 여인네가 지니고 있다는 유품을 볼 수 없을까, 솟구치는 충동을 자제하였다.

    시아버님께서도 그런 기대감을 안고 평생을 사셨어요. 돌아가신 뒤에라도 그 같은 사실이 밝혀진다면 지하에서도 기쁨의 눈물을 흘리실게요.

    시대가 아무리 변했다 하더라도 그런 기대감을 지녀야지요. 그런데 이 엿은 직접 고아 빚은 것입니까?

    정연은 부름을 깨물듯 엿을 깨물었다. 먹을수록 찰지고 구수한가하면 달착지근하고 입안이 환하였다.

    조상 대대로 전수되어 내 차례까지 이르렀구만이라우.

    삼층석탑 앞에서 도드라지게 엿을 올린 것을 보고 세월의 간극을 넘나들었을 거라는 느낌은 들었습니다만, 그 무언가가 입안에 가득합니다.

    윗대 조상께서 백제유민을 바다 멀리 떠나보내기에 앞서 몇 날 몇 밤을 밝혀가며 엿을 만들었다고 하더이다. 뱃멀미에도 좋고, 허정한 뱃속을 달래기에도 좋고요. 조국의 향수를 입 안 가득 담아 오래오래 잊지 말고 간직하라는 염원까지 담아서요.

    그러한 염원을 기리기 위해 천년세월 누대를 이어 한결 같은 마음으로 엿을 빚어왔단 말인가요?

    정연은 경이로운 마음으로 혀끝을 감싸안는 엿의 맛을 새삼스레 음미하였다. 도자기라든가, 민속품 따위는 대물림으로 긴 세월을 뛰어넘는다고 하지만 간식거리에 지나지 않는 엿을 천년세월 대를 이어 빚어오다니······.

    뒤돌아보면 세월이 무상하지요. 우리 집안의 가풍이랄까, 비법을 올곧이 품 받아 이어왔으니 마당가에 뿌리내린 동백나무 같은 생각이 드요.

    엿을 만드는 데도 전래의 비법이 있는가요?

    있다마다요. 지방마다 사용하는 재료가 다르고, 저마다 정성어린 손맛을 지니고 있제요. 무엇보다 정갈한 마음자세가 똑 뿌러지게 중요하요.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만큼이나 공력이 깃들어야제요.

    그 마음속에 백제유민을 바다 멀리 떠나보낸 서럽고 한스러운 선조의 넋이 담겨 있겠군요.

    정연은 만삭의 몸으로 몇 날을 지새우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엿을 빚었을 여인네의 선조를 아슴한 신기루처럼 떠올렸다.

    선조의 마음을 올곧이 새기며 엿을 만들다보면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지요. 정성으로 전수되어 내려온 그 세월을 어느 누가 알기나 하겠소.

    말씀을 듣고 보니 엿 맛이 더욱 깊어집니다.

    워메, 습관처럼 몸에 익어서 그렇제, 처음에는 무던히도 토심스럽고 애를 먹었구만요.

    다음 며느리께서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를 이어나가야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디, 시상이 어디 그렇소. 젊은 사람일수록 우리 것을 시뿌게 여긴 나머지 눈 아래로 내려다보지 않으요. 힘든 일, 돈 안 되는 일이라면 저저이 머리를 내두르고. 헌디 막내며느리가 쪼깐 관심을 가지요. 기특한 생각도 들고, 어쨌거나 나로서는 천만다행으로 든든한 마음이 드요.

    우리의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디, 어떤 인연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가라우?

    아, 저 말씀입니까?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나서 어딘가에 모닥불처럼 향수를 온전히 피워줄 안온한 곳이 있지싶어 여러 곳을 기웃거리다 이곳 고인돌무지를 발견하고 마음을 내려놓기로 하였습니다.

    고인돌이사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사방에 널려있었지라우. 우리들은 그게 옛사람들의 무덤인줄 모르고 장독대도 놓고, 개울목 넓적다리도 놓고, 마을 표지석도 했제요. 그 위에 한술 더 떠서 새마을 가꾸기야, 마을 안길 넓히기야, 마구잡이로 파뒤집어 훼손시켰구만이라우.

    그 점은 심히 유감스럽고 아쉽더군요. 아무튼 선사시대 때부터 주거혈거지(住居血居地)라는 점에서 옛 조상들의 숨결이 오롯이 잠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상한 대로 얼마나 산수 좋고 풍취 좋습니까. 풍요로운 들판과 바다가 열린 공간으로 다가와 마음을 시원하게 안아 줍니다.

    다들 한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다면 누가 뭐라 하겠소. 그런디도 다들 도시로 떠나고 마을들이 고사 직전 아니요. 삼층석탑만 하더라도 백제유민의 정한이 깃들어 있는디 소 닭 보댓기 하지 않는개비요. 여력만 있으면 나라도 불끈 일어나 소실된 유실물을 다시금 일으켜 세우고 싶소만, 그저 부질없는 한낱 베갯머리 공상에 지나지 않으요.

    언젠가는 그 소원이 이루어질지 누가 압니까.

    하메, 그 시절이 언제 돌아올런지. 시아버님께서도 그 같은 염원을 한 평생 가슴에 지니다 가셨응께요.

    여인네의 눈길이 벽면의 시아버지 사진에 머물렀다. 정연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여인네의 다음 세대에 이르면 여인네의 시아버지가 가슴에 지녔던 간절한 염원을 얼마큼 새겨 담을까? 시절은 빠르게 변하고, 사람들의 의식은 옛것을 소홀히 하여 망각의 늪을 넓혀가지 않는가. 우리네 핍박한 환경이, 삶의 의식구조와 생리가 그렇지 않는가. 하지만 실낱 같은 희망의 불꽃이 망각의 늪지대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조그마한 성냥개비 한 개가 크나큰 불씨를 일으키지 않는가.

    너무 비관하지 마십시오. 뿌리 찾기는 인간의 영원한 향수이자 근원입니다. 제가 보니까 백제유민의 넋을 기리기 위해 축제를 열더군요.

    여러 해 전부터 면민들이 한마음으로 축제마당을 걸판지게 하요만, 그것도 요즘은 전국방방곡곡 마구잡이로 유행하는 축제마당 같아서 내가 보기에는 어째 좀 그렇다는 느낌이 드요.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 아니겠어요. 점차 새로운 자각으로 축제마당을 발전적으로 이어간다면 가슴에 지닌 염원이 이루어질지 누가 압니까.

    그렇다면야 얼마나 좋겠소. 엿을 더 내올까 봐요.

    여인네는 엿을 잘도 깨무는 정연을 의식하였다.

    됐습니다.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그럼, 가실 때 쬐끔 싸 줄테니께 이물개로 드시게요.

    정말 엿을 맛보니 진득한 향수가 가슴에 가득 찹니다.

    우리 자식들도 미쳐 그런 마음을 지니지 못 했는디 참으로 기쁘요. 일어나실려고요? 잠깐 있어 보시오.

    여인네는 엿을 봉지에 싸주고 나서 장롱 깊숙한 곳에서 낡고 퇴색한 고서를 꺼냈다.

    이건 뭡니까?

    시아버님께서 소중하게 지니셨던 가보(家寶)지요. 백제유민에 얽힌 이야기와 엿을 만들어 온 내력이 적혀있을 것이오.

    그 귀중한 가보를 어찌 저에게······?

    정연은 흔감한 마음으로 몇 장을 떠들려 보았다. 각기 글씨체가 다른 누대로 이어온 필사본이었다.

    한문이 섞여 있어 우리 자식들은 제대로 음독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언제까지 마냥 장롱 깊숙이 처박아 둘 수는 없지 않겠수. 수고스럽겠지만 해석을 곁들여 한번 봐주십사 하고요. 어쩐지 믿음이 가네요.

    저로서는 고맙기만 합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가슴에 새기고 나서 돌려 드리겠습니다.

    정연은 여인네와 헤어져 삼층석탑 곁에 세워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하늘의 별빛이 유난히 밝았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나서 엿과 여인네 집안의 가보를 책상 위에 펼쳤다. 백제유민을 실은 배가 가뭇하게 포구를 벗어나자 만삭의 여인이 눈물을 훔치며 손짓해 보내고 있었다.

    까마귀 떼

    한 무리 사람들이 열가치를 넘어왔다. 몇 날을 걸어왔는지 지치고 굶주린 초라한 행색은 그야말로 아사직전이었다. 열가치는 까마귀 떼로 새까맣게 뒤덮여 있었다. 시신 썩어나는 냄새가 진동하였고, 죽어 널브러진 시신들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며칠 전에 결사항쟁으로 최후를 마친 전사들이었다. 그 속에는 무참하게 죽어간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 그리고 머리 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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