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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처방론+우상론
이단 처방론+우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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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139 pages1 hour

이단 처방론+우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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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이란?
정통 학파나 종파에서 벗어나 다른 학설을 주장하는 일이나 교파. 헬라어 원어 ‘하이레시스’의 기본 의미는 선택choice, 의견opinion으로서 단순히 ‘분파’, ‘파’ 등을 일컫는 경우(행 22:22)와 ‘교회 내에서의 편당’(고전 11:19)을 뜻하는 경우, 그리고 ‘다른 교리를 주장하는 이단’(벧후 2:1) 등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릇된 교훈을 가르치는 ‘이단’을 뜻하는 또 다른 원어 ‘하이레티코스’는 ‘하이레오’(선택하다)와 ‘헤테로스’(다른)의 합성어로서, ‘다른 것을 선택하다’는 뜻이며 이는 복음 이외의 다른 가르침을 좇는 행위를 일컫는다(딛 3:10).

얼마 전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한국 이단 중 하나의 집단폭행이 보도되어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적이 있다. 정통교회처럼 같은 성경을 강론하지만 정통교회와는 달리 신도가 뺨을 맞고 만신창이가 되는 일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신도들은 쉽게 헤어나올 수가 없다. 지능이 떨어지지도 않고,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인데도 말이다. 성경에 따르면, 정통교회에서 이단이라 부르는 파는 약 2000년 전에도 들끓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통교회는 이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에 대해 사도 바울과 아울러 이단을 논한 교부 터툴리안의 생각을 들어보기로 했다. AD 200년경에 활동했던 교부 터툴리안의 이단 처방론에 귀를 기울여 보자.
Language한국어
Publisher투나미스
Release dateApr 15, 2019
ISBN9791187632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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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단 처방론+우상론 - 터툴리안

    (터툴리안의) 이단 처방론 + 우상론

    글쓴이

    퀸투스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 

    옮긴이

    S. 텔월 / 피터 홈스 

    T. H. 바인들리 / 유지훈

    * 일러두기

    1. ‘주님’으로 번역된 ‘the Lord’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대상이 다를 때는 ‘여호와(YHWH)’나 ‘하나님’으로 옮겼다. 

    2. 성경구절은 개역개정판을 참고했으며 원문의 취지에 따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럴 때는 원어를 병기했다. 

    3. 원문에 기록된 성경의 장절은 개역개정과 다를 경우 후자를 기준으로 변경했다. 

    4. 괄호() 안에 ‘―옮긴이’가 없는 글은 원문 각주를 번역한 것이다.

    1부 이단 처방론 

    01장 / 이단은 존재할 수밖에 없고, 수효도 아주 많다. 이단은 믿음의 시금석이다.

    이미 예견된 사실인 까닭에(마 7:15) (만연해 있는) 이단에 충격을 받아서도 안 되고, 이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서도 안 된다는 가르침은 현 시대의 특징을 반영한다. 성도의 믿음을 뒤엎어놓는다는 점을 두고도 의연히 대처해야 마땅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단은 믿음을 시험함으로써 이를 ‘인정받을’ 기회를(고전 11:19) 주기 위해 횡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단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분개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처사이며 그래야 할 근거도 없다. 애당초 이단이 없었다면 분노할 법도 하겠지만 말이다!

    어떤 현상이 어찌어찌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럴 (궁극적인) 권세가 있다는 방증이다. 존재하는 데 필요한 권세를 확보했으니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02장 / 열병과 이단의 유사성. 이단은 경외할 대상이 아니며, 성도의 취약한 믿음을 통해 더욱 강성해진다. 그들에게는 진리가 없다. 격투사와 검투사에 비유한 글을 보라.

    예컨대, 열병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치명적이고도 고통스런 인생사 한켠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하지만 열병에 걸린다거나, 열병으로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기이히 여기는 사람은 없다. 열병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단도 그렇다. 이단은 믿음을 약화시켜 아주 없애버리기 위해 발흥해왔다. 이단에게 그런 권세가 있어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한다. 먼저는 이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겁을 낸다. 이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권세가 있다는 방증이고, 권세가 있는 한 존재는 이어지게 마련이니까.

    반면 열병은, 알다시피, 원인이나 세력이 모두 악한 탓에 대개는 이를 기이히 여기지 않고 혐오한다. 아무리 힘을 써본들 대비는 할 수 있을지언정 병원체를 아주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단을 경외하는 성도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단의 마수에서 벗어날 기회가 있음에도 그 권세를 피하기는커녕 막강한 힘이 있다는 이유로 되레 두려워한다. 영원한 죽음과 거센 불구덩이로 끌어들이는데도 말이다. 이단에게 권세가 있다며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단도 속절없이 무기력해질 것이다. 이단을 두려워하다보면 덫에 빠지게 되고, 덫에 빠지면 마치 그들에게 진리가 있어 권세가 막강하리라는 착각에 그들을 경외하게 된다. 믿음이 연약한 자 앞에서만 강성해지는 것이 아니라면 이단의 권세에 놀라지 않을 수는 없으리라. 대개 격투사와 검투사가 싸움을 벌일 때 힘이 강해서 승리를 쟁취한다거나 힘이 모자라 패전한다기보다는 패전한 자가 힘이 모자란 것으로 봐야 옳다. 설령 싸움에서 이긴 자라도 훗날 정말 강한 상대를 만나면 맥을 못추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단 또한 무력한 자의 취약성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언제든 믿음이 강하다는 상대와 마주치더라도 말이다.

    03장 / 연약한 자는 이단의 먹잇감이 된다. 이단은 인간의 취약성으로부터 힘을 얻기 때문이다. 사울과 다윗, 솔로몬을 비롯한 위인들도 믿음을 저버린 바 있다. 그리스도를 향한 지조 역시 예외가 아니다.

    연약한 자들과 아울러, 이단에 미혹된 자가 (은밀히) 강성해지면서 타락에서 자멸로 이어진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혹자는 묻는다) 교회에서 신실하고 신중한 데다 신임을 받는 형제‧자매가 어떻게 이단에 넘어갈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묻는 사람은 ‘이단이 넘어뜨릴 수 있는 자라면 신실하거나, 신중하거나 혹은 신임을 받을 리 없는가?’라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재차 말하지만, 교회에서 신임을 받은 자가 훗날 타락하는 것이 기이한 일일까? 당대 의인으로 꼽힌 사울은 질투에 눈이 멀어 실족했고(삼상 18:8~9),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삼상 13:14) 선한 다윗도 살인과 간음죄를(삼하 9) 지었으며, 하나님이 부귀와 지혜를 준 솔로몬은 이방 여인들의 회유로 우상에 빠지고 말았다(왕상 11:4). 죄를 범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한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뿐이었다(히 4:15). 그렇다면 주교가, 집사나 미망인, 혹은 처녀나 의사나, 심지어 순교자가 (믿음의) 법도를 저버린다면 그런 이유로 이단에게 진리가 있다고 보겠는가? 사람으로 믿음을 입증하는가, 아니면 믿음으로 사람을 입증하는가? 그리스도 외에 온전히 지혜롭고 신실하며 존엄한 사람은 없다. 마지막 순간까지 인내한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리스도가 될 자는 아무도 없다(마 10:22).

    사람은 으레 외모로 상대를 판단한다. 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눈길이 닿는 만큼만 보인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주의 눈은 높으시고(렘 32:19) 사람은 외모를 보나 하나님은 중심을 본다고 한다(삼상 16:7). 아울러 주는 자기 백성을 (보고) 아시며(딤후 2:19),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뽑힐 것이며(마 15:13),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마 20:16),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마 3:12). 따라서 미혹의 바람이 불 때마다 연약한 믿음이라는 쭉정이는 날아가게 내버려 두라. 믿음이 좀더 순전하다면 주님의 곳간에 쌓일 알곡이 될 테니까.

    (숱한) 제자들도 죄를 짓고 주님을 버리지 않았던가?(딤후 1:15, 2:17, 딤전 1:20) 그래서 나머지 (열두) 제자는 주님을 외면할 리 없다고 자부했다. 주님이 생명의 말씀이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 물으신 후에도 그들은 끝까지 주님과 동행했다. 부겔로Phygellus와 허모게네Hermogenes, 빌레도Philetus 및 후메내오Hymenaeus 같은 사람들이 주의 사도를 버린 일은 비교적 약과에 불과하다(딤후 1:15). 사도 중 하나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고난을 겪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방증이지만, 주님의 교회가 몇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이 놀랍긴 하다.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을 것이라(요일 2:19).

    04장 / 신약성서에 기록된, 이단에 대한 경고를 비롯한 담론. 이는 이단에 미혹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사도가 쓴 서신과 주님의 말씀에 유념하자. 주님과 사도들은 이단이 활동하리라는 것을 예언했고, 그들을 피하라며 미리 언질을 주었다. 이단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이상히 여기지 않듯, 이단이 성도를 미혹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놀라선 안 된다. 미혹 때문에 이단을 피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고 말씀하셨다. 양의 옷은 무엇인가? 겉으로만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노략질하는 이리는 누구인가? 기만이 가득 찬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양떼를 말살하기 위해 숨어있는 자가 아니겠는가? 거짓 선지자는 누구인가? 거짓으로 미래를 예언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거짓 사도는 누구인가? 겉으로만 그럴싸한 복음을 설파하는 자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그렇다면 작금 이후로 영원히 사그라지지 않을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이단은 그날 적그리스도가 잔혹한 만행으로 교회를 핍박하는 것 못지않게 교리를 왜곡하여 교회를 갈라놓을 것이다. 박해는 일곱 명의 순교자를 낳겠지만 이단은 배교자를 낳을 뿐이다.

    따라서 이단(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즉,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자와 이단에 미혹되지 않은 자가 가려질 거라는 이야기다. 사도 바울은 신조를 이단의 것과 바꾸는 자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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