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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법 2: 죽지 않는 사람들
백년법 2: 죽지 않는 사람들
백년법 2: 죽지 않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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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법 2: 죽지 않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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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대상
제10회 일본서점대상 수상작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를 이은 작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야마다 무네키의 소설!

영원한 젊음을 얻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은
어떤 미래를 꿈꿀 것인가?

원자폭탄 여섯 발이 일본의 도시를 송두리째 불태우며 멸망의 길에 이르게 된 일본. 미국의 점령 하에 공화제 국가가 된 일본에 1949년 불로화 기술인 ‘HAVI’가 도입된다. 늙지도 죽지도 않는 삶을 가능케 하는 불로화 기술로 ‘영원한 젊음’을 얻게 된 일본 국민은 세대교체를 위해 불로화 시술을 받은 사람은 100년 후 죽어야 한다는 법률인 생존제한법, 이른바 ‘백년법’을 제정하게 된다.
그리고 2048년. 백년법 시행을 눈앞에 둔 일본은 강요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 아래에서 엄청난 혼란에 휩싸인다. 누군가는 죽어야만 지속될 수 있는 사회. 미래를 위해 가장 기본적인 인권, ‘사는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불로불사의 꿈과 현실의 비극은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20대의 외모 그대로 늙지도 죽지도 않는 ‘영원한 젊음’을 얻지만 그 대가로 100년이 지난 뒤엔 반드시 죽어야 한다. 불로불사의 꿈이 실현된 사회에서 인생의 유통기한을 예고하는 ‘백년법(생존제한법)’을 둘러싸고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 본연의 문제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소설. 인류에게 궁극의 꿈인 ‘불로불사의 삶’이 실현된 사회를 배경으로, 영원한 생명을 손에 넣었을 때 세상은 과연 낙원이 될 것인가라는 문제를 가까운 미래 사회의 모습에 비추어 그려내고 있다.

인구조절을 위한 명목으로 인간의 수명을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백년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과학기술의 발달과 반비례해 인권과 생명이 가벼이 여겨지고 있는 현대사회의 모순과 부조리한 권력의 행태를 꼬집는다. 또한 자연스런 늙음과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이나 백년법을 거부하는 이들이 한 사회에서 얽히고설키면서 펼쳐지는 미래사회의 다양한 군상은 사회의 커다란 흐름과 인간의 선택이라는 피할 수 없는 물음을 던진다. 충격적이고 신선한 주제, 긴박감 넘치는 전개와 생생한 갈등과 심리 묘사로 진정 인간다운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문제를 드라마틱하게 풀어낸 재미와 깊이를 동시에 담보하는 수작이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애플북스
Release dateFeb 21, 2023
ISBN9791192081144
백년법 2: 죽지 않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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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법 2 - 야마다 무네키

    야마다 무네키山田宗樹

    1965년 일본 아이치현 출생. 츠쿠바 대학 대학원 농학연구 과정 수료. 제약회사에서 농약 개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1998년에 《직선의 사각》으로 제18회 요

    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2003년에 발표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돼 크게 히트를 했다. 그 외의 작품으로 《검은 봄》 《자폭》 《미친 도시》 《마욕》 등이 있다. 그중 《백년법》은 제10회 일본 서점 대상 9위를 기록함과 동시에 제66회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최고은 옮김

    대학에서 일본사와 정치를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일본 대중 문화론을 공부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 수첩》 《64 육사》 《침묵의 거리에서》 《부러진 용골》 《소녀지옥》 《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모방살의》 등이 있다.

    HYAKUNENHO 2

    ⓒ Muneki Yamada 2012

    First published in Japan in 2012 by KADOKAWA CORPORATION, Tokyo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d with KADOKAWA CORPORATION, Tokyo

    through Eric Yang Agency Inc, Seoul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에릭양 에이전시를 통한 저작권자와의 독점 계약으로 비전 B&P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하여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저자의 말

    기다리던 한국 독자와의 만남

    드디어 한국 독자들에게도 《백년법》을 선보인다 생각하니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소설은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조차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불로화 기술이 보급된 세계. 하지만 모든 인간이 영원히 살아서는 사회를 유지할 수 없다. 따라서 불로화 시술을 받은 이는 법으로 정해진 기한이 지나면 죽어야 한다.’

    이 설정을 생각해낸 건 10년도 더 된 일입니다. 착상이 떠오른 순간 재미있는 작품이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플롯을 짜려 했지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습니다. 설정은 재미있지만 그 재미를 잘 끌어내는 스토리가 떠오르지 않았죠. 초조해하다 점점 체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집필을 시작할 용기도 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비슷한 설정의 만화가 먼저 세상에 나왔습니다.

    치명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백년법’의 가장 큰 매력은 설정의 참신함이었습니다. 선행 작품이 나왔으니 그 매력은 거의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작품을 쓴들 의미가 없다.’ 저는 집필을 완전히 단념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뒤에 담당 편집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SF작품을 써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저는 주저하면서 ‘백년법’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런 아이디어가 있었지만 설정이 비슷한 만화가 나왔기 때문에 집필을 포기했다고요. 편집자는 낯빛을 바꾸며 말했습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시고 일단 쓰십시오. 묻어두기에는 아깝습니다. 쓰세요.

    그 기세에 밀려 쓰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금방 후회했습니다. 분명 이미 나온 작품이 있다는 게 집필을 단념한 이유 중 하나였지만, 따지고 보면 자신의 실력 부족으로 내던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소재였습니다. 그러나 프로 작가인 만큼 약속했으니 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간신히 초고를 완성한 건 편집자에게 약속한 지 무려 3년 반이라는 세월이 지난 뒤였습니다.

    만일 편집자가 SF를 쓸 생각이 없느냐고 묻지 않았더라면 이 소설은 지금도 제 머릿속에 묻힌 상태였을 겁니다. 여러 우연이 겹쳐, 편집자의 권유와 열정 덕에 비로소 세상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상을 뛰어넘은 반응과 높은 평가를 받는 영광도 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언어의 벽을 뛰어넘어 한국에 소개됩니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제 마음을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매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설들이 전 세계에서 발표됩니다. 아무리 애서가라 해도 볼 수 있는 건 그 가운데 정말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처럼, 작품과의 만남도 때로는 기적이 되고 운명이 됩니다. 지금 이 책을 펼친 여러분과의, 바다를 뛰어넘은 만남 또한 그러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014년 5월 12일

    후쿠오카의 자택에서

    야마다 무네키

    CONTENTS

    저자의 말

    3부

    2장 | 낯선 풍경

    3장 | 영원의 경계

    4부

    1장 | 서기 2098년

    2장 | 지도자의 그릇

    3장 | 쿠데타

    4장 | 진정한 위기

    마지막 장 | 공화국민에게 고함

    주요 등장인물

    가토 다로  |  공화국병원 종양과 의사

    아나타 도진  |  폭탄 테러를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테러리스트

    선생님 |  거부자 마을의 지도자

    가이 |  거부자 마을 ‘C1’의 주민

    효도 가쓰라  |  내무성 경찰국 국장

    초 |  거부자 마을 ‘C5’의 지도자

    기타자와 |  대통령 직속 특수부대 ‘센추리온’ 대령

    부데 |  거부자 네트워크 거점을 장악한 유력인사

    가가와 데쓰오  |  내무성 경찰국 대테러 특수부 부장

    사쿠라다 |  내무성 경찰국 과학수사부 주임기술관

    다케스에 |  내무성 경찰국 대테러 특수부 차장

    후카마치 신타로  |  내무성 차관

    니시나 겐  |  전 메이쇼 대학 학생

    사카자키 다카요  |  겐의 어머니인 니시나 란코의 친구

    우시지마 료이치  |  일본공화국 대통령

    가와카미 유키미  |  니시나 란코의 친구인 가와카미 미나의 딸

    유사 아키히토  |  일본공화국 총리

    다치바나 케이  |  내무성 생존제한법 특별준비실 전 팀원

    나기 사다카즈  |  대통령 비서실장

    아라카와 신  |  신시대당 대표

    마무라 사키코  |  거부자 마을 주민

    가리야 다네히코  |  의사, 대통령 주치의

    3부

    생존제한법

    LIFE LIMIT LAW

    불로화 시술을 받은 국민은

    시술 후 100년이 지난 시점부터

    생존권을 비롯한 기본 인권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

    2장 |  낯선 풍경

    1

    동이 트기 시작하자 어디가 동쪽인지 대충 방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가토 다로는 썰렁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같은 자세였던 탓에 어깨와 등이 결렸다. 몸을 움직이니 뼈 소리가 났다. 근육통을 참으며 넓고 휑한 방을 가로질러 창가로 다가갔다. 시시각각 밝아오는 하늘을 배경으로 크고 작은 산봉우리가 검은 그림자처럼 우뚝 서 있었다. 창문의 얼룩이 심했다. 열리기는 할까? 걸쇠를 올리고 열어봤다. 딸깍, 소리가 나며 살짝 움직였다. 두 손으로 체중을 실어 힘을 더 주자 그제야 활짝 열렸다.

    열린 창문을 통해 신선한 공기와 함께 낮고 굵은 진동이 밀려왔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짙은 오존이 느껴졌다. 근처에 강이 흐르는 모양이었다. 소리로 미루어 수심은 얕지만 물살은 센 것 같았다. 군데군데 수면 위로 울퉁불퉁한 바위가 머리를 내민 모습이 눈에 선했다. 끊임없이 밀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물방울들. 분명 민물고기도 헤엄치고 있으리라. 하지만 소리만 들릴 뿐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범위 안에는 보이지 않았다.

    앞산을 자세히 보자 나무 하나하나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렇게 가까웠던가, 뜻밖의 사실에 은근히 놀랐다.

    산기슭에는 잡초가 무성한 공터가 펼쳐져 있었다. 야간 조명탑이 두 개 있는 걸 보면 원래 야구 경기장으로 쓰였던 곳일지도 모른다.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아래를 보았다.

    생각보다 바닥이 가까웠다. 이곳은 2층. 고개를 꺾어 위를 확인하니 3층짜리 낡은 철근콘크리트 건물이었다. 왠지 모를 그리움이 느껴지는 풍경이다. 혹시나 해서 다시 고개를 돌려 실내를 둘러보았다. 바깥이 밝아지자 실내 모습도 구석구석까지 눈에 들어왔다.

    왜 좀 더 일찍 알아채지 못했을까.

    서쪽 벽에 커다란 칠판이 걸려 있었다. 북쪽 벽 양쪽 끝에는 미닫이 출입문 두 개가 있고, 그 사이에는 유리창이 있었다. 문 너머는 복도이리라.

    학교 교실이다. 하지만 책걸상은 없었다. 나무판자로 된 방 한가운데에 녹슨 철제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자세히 보니 체육시간에 쓰는 매트가 깔려 있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남자가 나타났다.

    창문 너머로 실내를 들여다보더니, 가토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씩 웃더니 앞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박사님.

    어젯밤에 본 남자였다.

    뻣뻣한 검은 머리를 한 갈래로 묶었고, 목덜미와 팔뚝은 탄탄한 근육질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어우러져 야성미를 자아냈다. 입고 있는 반팔 셔츠와 작업복 바지는 꽤 낡아 보였다.

    하지만 이 남자에게서 보이는 가장 큰 특징은 눈가의 잔주름이었다. 노화한 것이다. 그런 외모 때문인지 남자에게서 정체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편히 주무셨습니까?

    어울리지 않게도 남자의 목소리는 더없이 밝고 온화했다.

    잠이 오겠나?

    가토는 짐짓 허세를 부리며 침대에 털썩 앉았다. 심장은 정직해서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쿵쾅거렸다.

    남자는 문 쪽에 서서 말했다.

    어젯밤의 무례는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가토는 남자를 힐끗 보았다.

    의료차량을 돌려주게. 그리고 당장 날 보내줘.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상한 조건 붙이지 말고 내놓으라고!

    어젯밤부터 쌓였던 울분을 토해내듯 버럭 외쳤지만 이내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젯밤 자신을 겨눴던 총구가 뇌리를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다.

    박사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가토는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환자를 봐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병원에 가든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삼켰다. 죽고 살기는 이 남자에 달려 있다. 괜히 화를 돋워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병원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환자가 전국 방방곡곡에 수없이 많았다.

    돈이 없나?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 의료 서비스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불법 이민자인가?

    아뇨, 틀림없는 공화국 국민……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감이 왔다.

    거부자로군.

    역시, 눈치가 빠르시군요.

    그렇다고 왜 이런 짓을 벌인 거지? 이곳에도 의사 한 명쯤은…….

    없습니다, 한 명도.

    …….

    그렇다고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에게 왕진을 부탁할 수도 없죠. 환자는 거부자니까요.

    그래서 의료차량을 몰고 지나가는 의사를 납치한 건가? 일석이조로군, 꿩이 알을 물고 찾아온 셈이니까. 난…….

    가토는 간신히 이성을 되찾아 입을 다물었다. 한번 말을 쏟아내면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의 정신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그도 그럴 법했다. 총으로 위협을 받아 낯선 곳으로 끌려온 데다,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혀 한숨도 자지 못했으니 말이다.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의료차량은 어디에 있나? 설마 부수지는 않았겠지?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만에 하나라도 차량이 파손된다면 시말서 한 장으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그 장비로 환자를 진찰해주시겠습니까?

    보아하니 남자는 가토를 인질이 아닌 의사로서 대하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얼마간 마음이 편해졌다. 일방적인 약자가 아니었다. 그에게도 꺼낼 수 있는 패가 있었다.

    거부자를 진료하는 건 의료법으로 금지되어 있네. 법을 어기면 의사 면허를 박탈당해.

    단, 신체적으로 위해를 입거나 폭력을 동원해 강제했을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 분명 그런 대법원 판례가 있었죠.

    자세히도 알아봤군.

    반쯤은 진심이었다.

    한마디로 자네는 날 협박해 거부자를 치료하게 하려는 건가?

    협박하는 게 아닙니다. 박사님도 이렇게 하는 게 마음 편하시지 않겠습니까?

    허튼 소리. 총으로 협박을 받으며 치료를 하란 말인가?

    물론 실제로 그런 무식한 짓은 안 합니다. 그냥 시늉이죠.

    하지만 어젯밤에는 총구를 들이대지 않았나.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박사님이 같이 와주셨겠습니까? 하지만 그때 저희가 들고 있던 총에는 총알이 없었습니다. 혹여나 방아쇠가 당겨져도 박사님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지금 그 얘기를 나한테 믿으라는 건가?

    믿지 않으셔도 어쩔 수 없지만 사실입니다.

    남자의 말은 사실이리라. 가토의 직감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기 모습이 낯설었다. 어째서 자신을 납치한 이 남자를 믿는 걸까. 아, 이게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건가? 무의식적으로 이 남자를 제 편으로 만들고 싶은 건가? 잘 보이려는 건가? 목숨을 건지기 위해.

    이런 짓까지 해가면서 구하려는 환자가 대체 누군가? 무척 중요한 사람인 모양이지?

    중요하다는 말이 지위가 높다, 태생이 귀하다는 뜻이라면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하지만 무척 소중한 사람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자네 애인인가?

    환자는 남자분입니다.

    남자라고 애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잖나.

    남자는 순간 말문이 막힌 듯했다.

    아……, 제가 말을 잘못했군요. 그런 사이는 아닙니다. 방금 소중한 사람이라 표현한 건, 저뿐 아니라 이곳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소중한 분이란 뜻이었습니다.

    자네들의 교주인가?

    그런 건…….

    여긴 대체 어딘가? 무슨 마을이지?

    지도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마을입니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게 무슨…….

    남자는 슬며시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였다. 가토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여전히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야기가 깁니다. 먼저 아침부터 드시죠, 차린 건 없지만.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쌓였던 감정을 말로 토해내서인지 공복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허세라고 하면 할 말 없었지만 그래도 오기가 났다. 오기를 부릴 정도로는 평정심을 되찾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남자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남자가 나가고 홀로 남겨진 가토는 분한 마음에 도망칠까 생각했지만, 눈앞에 총구가 어른거리는 바람에 바로 생각을 접었다. 설령 총알이 장전되지 않았더라도 의료차량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안다고 해도 과연 움직일까? 움직이더라도 어느 길로 어떻게 가야 돌아갈 수 있는 걸까? 창문 너머로 끝없이 이어진 산줄기가 보였다. 아마 이곳은 깊은 산중이리라…….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가토는 주머니를 뒤졌다. 아이즈만 있으면 외부와 연락을 취할 수 있다. 여기서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젯밤의 고장도 일시적인 현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없잖아.

    아이즈뿐 아니라 그립도 없었다. 남자의 일당이 어느샌가 가져간 모양이다. 쯧 하고 혀를 찼다. 신사적인 태도로 나오더니 할 짓은 다 하는군. 섣불리 마음을 열어서는 안 되겠어.

    박사님.

    문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 좀 열어주시겠습니까?

    가토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손을 쓸 수가 없어서.

    남자는 양손에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있었다. 쌀밥과 생선구이, 야채절임에 맑은 장국까지 보였다. 각 쟁반에 젓가락이 한 쌍씩 놓여 있는 걸로 봐서는 두 사람 차림인 듯했다. 가토의 생각을 읽었는지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저도 같이 먹으려고요. 혼자 먹으면 맛없잖습니까.

    남자의 웃는 얼굴은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뜻하지 않게 기선을 제압당한 가토는 거절할 구실도 찾지 못한 채 바닥에 쟁반을 내려놓고 남자와 마주앉았다.

    남자는 두 손을 모으고 나서 젓가락을 들었다. 평소에는 그냥 먹지만, 오늘은 남자를 따라 두 손을 모았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지 않았나. 경우가 딱 맞지는 않지만.

    가토는 먼저 장국으로 목을 축이고 밥과 야채절임을 먹었다. 시장이 반찬이라 유난히 맛있었다. 민물고기인 듯한 생선구이도 씹다 보니 점점 깊은 맛이 느껴졌다. 눈 깜짝할 새에 한 공기를 깨끗이 비우고 입가심으로 물을 마셨다.

    한 공기 더 드시겠습니까?

    남자는 아직 먹는 중이었다. 우걱우걱 먼저 먹어버린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서 일부러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됐네. 전통적인 밥상이군. 이 근방에서는 요새도 이렇게 먹나?

    구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거든요.

    남자의 먹는 모습은 차분했다. 민물고기도 깔끔하게 뼈를 발라냈다. 야성미 넘치는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순간 이 남자를 인질로 삼아 의료차량이 있는 곳까지 데려가라고 할까 하는 망상을 잠깐 했지만, 곧 비현실적임을 깨닫고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닌 모양이다. 무기도 없이 이 남자와 맞붙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설령 총을 들었더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여긴 학교로군.

    네, 초등학교였습니다.

    남자가 장국을 마시며 대답했다.

    폐교됐나?

    학교뿐 아니라 이 마을 전체가 버려졌습니다, 24년 전에.

    24년 전……, 그때 무슨 일이 있었지?

    남자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건 마을을 안내하며 말씀드리겠습니다.

    안내해주려고? 고맙군.

    박사님은 이 마을의 VIP니까요.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지만 남자는 장난스레 대꾸했다.

    하지만 VIP라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마음이 더욱 편안해지는 효과를 가져온 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불현듯 오한이 들었다. 설마 거기까지 계산하고 한 말인가?

    하나만 물어보지.

    말씀하십시오.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거부자인가?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이른바 거부자 마을이로군.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네도?

    저는 아닙니다. 애초에 HAVI를 받지 않았으니 백년법 적용대상자가 아니죠.

    역시 그랬군…….

    하나만 물어본다고 했지만 의사로서 밀려드는 호기심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럼 지금은 몇 살인가?

    내년이면 마흔입니다.

    실제 나이 74세인 가토에 비하면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다. 겉모습만 봐서는 실감이 들지 않았지만.

    왜 HAVI를 받지 않았나? 아니, 거부자도 아닌 자네가 왜 그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발 벗고 나서는 거지? 목적이 뭔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군요.

    남자는 진심으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남자였다. 이 표정도 계산된 것이라면 배우 뺨치는 연기실력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하리라.

    딱히 이렇다 할 이유나 목적은 없습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죠.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어쩌다 보니 납치한 건가?

    전 예비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운명이요.

    그거나 저거나.

    전혀 다릅니다.

    따끔하게 쏘아주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자네들은 어젯밤 날 기다린 건가?

    그렇습니다.

    어떻게 내가 그 길을 지나가는 줄 알았지?

    그러니까 예비하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헛소리 작작…….

    갑자기 말을 멈춘 가토를 남자는 의아스레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식사를 해서인지 장운동이 활발해졌다.

    여기, 화장실 있나?

    아, 밖으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가면 나옵니다. 볼일을 보시고 변기 옆에 있는 통에 담긴 물로 흘려보내시면 됩니다.

    가토는 서둘러 복도로 나가 오른쪽으로 갔다.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이 보였다.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자 그 남자 말대로 물이 담긴 나무통이 보였다. 바가지로 퍼서 물을 내리는 구조였다. 선반에 휴지 한 롤이 있었다. 뜯지 않은 새것이었지만 꽤 오래된 것 같았다. 고마운 마음으로 잘 썼다.

    볼일을 보고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돌렸지만 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포기하고 교실로 돌아갔는데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먹은 그릇도 함께 사라졌다. 지금이라면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마을의 수세식 화장실 이용 소감은 어떠십니까?

    등 뒤에서 들린 남자의 목소리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가토는 태연한 척 돌아봤다.

    너무 고전적인 것도 생각해볼 일이야.

    죄송하지만 이곳에서는 저게 최선입니다.

    남자는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사과했다.

    물은 안 나오나?

    기초 설비는 마을이 버려졌을 때 모두 중단됐습니다. 강 상류에서 새로 끌어온 수도가 하나 있긴 하지만, 공동 수도꼭지에 연결되어 있어서 여기까지는 오지 않습니다.

    참고로 묻는 건데…… 오물 처리는 어떻게 하나?

    일부는 밭에 거름으로 쓰고 나머지는 강에 버립니다. 물고기들이 깨끗하게 먹어주죠.

    그럼 아까 그 생선구이도…….

    냄새만 안 나면 되죠.

    가토의 표정이 어지간히 우스웠는지 남자는 껄껄 웃었다.

    순간 발끈했지만 남자의 웃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멎은 순간, 가토의 내면에서 뭔가 변화가 느껴졌다.

    재촉하는 것 같지만…….

    남자의 눈동자에 감출 수 없는 근심의 빛이 어른거렸다.

    곧바로 환자를 봐주시겠습니까?

    그렇게 상태가 안 좋나?

    제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럼 왜 어젯밤에 데려오지 않았지?

    부탁드렸으면 진찰해주셨겠습니까?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는 진찰해도 적절한 처치를 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러웠다.

    증상이 어떤가?

    봐주시는 겁니까?

    먼저 증상을 말해보게. 듣고 나서 결정하겠네.

    처음에는 온몸에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고 들었습니다. 원래 건강한 분이었는데 팔다리를 가누지 못할 정도로 힘을 쓰지 못하셨습니다. 그런 상태가 한 달쯤 지속된 뒤에 복부 통증을 호소했고, 기침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각혈, 하혈까지 시작됐고요. 급격히 야위고 안색도 누래져서 요 며칠은 계속 주무시기만 합니다. 그리고…….

    남자는 말을 흐렸다.

    배에 커다란 덩어리가 여러 개 만져집니다.

    SMOC다.

    가토는 확신했다.

    그것도 말기.

    의료차량의 종합진단장치로 검사해볼 필요도 없었다.

    박사님, 어떤 것 같습니까?

    남자의 얼굴에서 밝은 분위기가 사라졌다. 소중한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힌 표정이었다.

    이 역시 연기일까.

    치료해도 그 환자를 살리지 못한다면 날 어쩔 작정인가?

    그 고갯길까지 다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약속드립니다.

    연기라 해도 상관없다.

    가토는 결심을 굳혔다.

    지금부터는 의사로서 행동하자.

    오늘 외래진료가 있네.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담당하는 입원환자의 상태도 마음에 걸리고. 다들 생명과 직결되는 병과 싸우고 있어.

    네.

    그들 말고도 날 기다리는 환자가 많아. 하루라도 빨리 병원으로 돌아가 환자들을 돌봐야 해.

    압니다.

    솔직히 지금 들은 증상만으로도 대충 무슨 병인지 짐작이 가네. 허나 자네는 수긍하지 않겠지.

    …….

    환자를 의료차량으로 데려오게. 어쨌든 진료는 그 안에서 해야 하니까. 환자가 거동하기 힘든 상태면 내가 차를 몰고 그 집 앞으로 가겠네.

    진료해주시는 겁니까?

    어쩌겠나. 자네가 폭력으로 날 위협하는데.

    박사님, 감사합니다.

    남자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너무 기대하진 말게.

    가토가 남자를 쏘아보며 말했다.

    난 신이 아니니까.

    2

    들어오십시오.

    공화국경찰 국장 효도 가쓰라의 말에 회의실 문을 열고 나타난 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제복을 입은 거구의 남자였다.

    잘 단련된 육체에 사각턱이 눈에 띄는 기다란 얼굴, 짧게 자른 머리. 한눈에 군인임을 알 수 있었지만 공화국 방위대는 아니었다. 제복이 달랐다. 계급장이나 훈장 같은 것도 없었고, 유일하게 은색 독수리 모양의 장식이 왼쪽 가슴에 달려 있었다.

    남자는 효도 국장 옆에 섰다.

    두 눈 사이의 간격이 넓고 외꺼풀인 작은 눈이 날카로운 빛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말했다.

    기타자와라고 하네. 잘 부탁하네.

    센추리온……?

    가가와 데쓰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옆자리의 다케스에도 처음 봅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대령님, 이리 오십시오.

    남자는 효도의 말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마주 본 순간 탁자 맞은편에서 풍압 같은 것이 느껴졌다.

    가가와는 효도를 보며 물었다.

    그럼 이번 임무는 센추리온에서 담당하는 겁니까?

    효도는 선 채로 말했다.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신 일이네. 테러리스트들의 뿌리를 확실히 뽑아버리기 위해 센추리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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