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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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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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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은 찰스 디킨스의 장편 소설
켄트의 습지에서 누나와 남편과 함께 사는 어린 고아 핍은 어느 날 저녁 공동묘지에 앉아 부모님의 묘비를 바라봅니다. 갑자기 탈옥한 죄수 한 명이 묘비 뒤에서 튀어나와 핍을 붙잡더니 음식과 다리 쇠고랑을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핍은 순순히 따르지만, 무시무시한 죄수는 곧 잡혀갑니다. 죄수는 자신이 물건을 훔쳤다고 주장하며 핍을 보호합니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온이퍼브
Release dateJun 12, 2023
ISBN9791163398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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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유산 - 찰스 디킨스

    •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1812~1870)

    영국의 소설가이자 사회 비평가로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이며 그의 작품은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디킨스 1836년 첫 소설 《피크위크 페이퍼스》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일약 스타 작가가 되었다.

    그 후 《올리버 트위스트》, 《데이비드 코퍼필드》, 《위대한 유산》, 《크리스마스 캐럴》 등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디킨스 작품은 사회의 어두운 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가난, 빈곤, 불평등 등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고 사회 변화를 가져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영국 문학에 큰 공헌을 한 작가로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

    발행일|2023년 6월 15일

    펴낸곳|온이퍼브

    지은이|찰스 디킨스

    편집 디자인|박순임

    펴낸이|김응환

    출판등록 2011-000124호

    전자우편 onepub@naver.com

    ISBN 979-11-6339-833-2 05840

    이 책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책의 내용 전체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Copyright ⓒ 2023. onepub All rights reserved.

    ※ 이 책은 코펍체를 사용하였습니다.

     목차


    본문

    1~59

    1686736155152_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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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성씨는 피립(Pirrip)이고, 나의 세례명은 필립(Philip)이다. 그런데 어려서 혀가 짧아 길고 또렷하게 발음할 수 없었던 나는 스스로를 핍(Pip)이라고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나를 핍이라고 불렀다.

    아버지의 성씨가 피립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묘비와 누나가 말해줘서 알았다(누나는 대장장이 조 가저리와 결혼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은커녕 그 비슷한 사람들조차 본 적 없던(부모님은 사진이라는 것이 나오기 전에 돌아가셨다) 나는 비문을 읽고 부모님의 모습을 제멋대로 상상했다. 아버지는 네모난 얼굴에 건장한 체격, 까무잡잡한 피부, 검은 곱슬머리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묘소 옆에는 어머니의 묘소도 있다. 나는 ‘위의 부인 조지애나도 여기 잠들다’라고 비석에 새겨진 글씨체와 문구만 보고 어머니가 주근깨투성이 얼굴에 몹시 허약했을 거라고 상상했다. 부모님 무덤 옆으로는 작은 마름모꼴 석판 5개가 한 줄로 늘어서 있는데, 그것은 나의 다섯 형제들을 애도하기 위한 것이다. 다섯 동생들은 불쌍하게도 이 세상의 생존경쟁에서 너무나도 일찍 자신들의 삶을 포기한 셈이었다.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바깥세상에 내던져졌고, 더욱이 단 한 번도 그런 상태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듯 불쌍한 내 동생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은혜를 입은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

    우리 마을은 습지대가 유난히 많은 시골이었다. 습지대는 강 아래쪽에 있었고, 굽이쳐 흐르는 강은 우리 마을에서 32킬로미터쯤 떨어진 바다로 이어졌다. 내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모든 사물들을 또렷이 인식하게 된 것은 유난히 추웠던 어느 저녁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잡초들로 뒤덮인 그 우울한 곳이 교회 묘지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부모님이 잠든 곳도 교회 묘지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앞서 말한 다섯 아이들, 알렉산더와 바살러뮤, 에이브러햄, 토비아스, 로저, 그들이 잠든 곳도 교회 묘지라는 것을. 교회 묘지 뒤쪽의, 도랑과 둔덕과 출입문들이 군데군데 있고 소들이 풀을 뜯는 평지가 습지대라는 사실도 확실하게 알았다. 아울러 그 습지대 너머 납빛 가느다란 선이 강이라는 것도 분명히 알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찬 바람이 야수처럼 불어오는 저 먼 곳이 바다라는 사실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눈앞에 펼쳐진 그 모든 광경이 두렵다 못해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것도 나 자신 핍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했다. 그때였다.

    꼼짝 마!

    갑자기 웬 남자가 교회 무덤 사이에서 튀어나와 으르렁거리듯 소리쳤다.

    입 다물고, 꼼짝 마! 안 그럼 네놈 모가지를 날려버릴 테니!

    험악한 인상에 낡은 잿빛 옷을 입은 남자는 한쪽 다리에 족쇄를 차고 있었다. 머리에는 모자 대신 너덜너덜한 헝겊을 둘렀고, 신발도 다 찢겨져 당장이라도 벗겨질 것 같았다. 게다가 물에 흠뻑 젖은 온몸이 진흙투성이였고, 돌에 치여 다리를 절뚝거렸다. 돌과 쐐기풀에 긁힌 자국,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찢어진 상처도 다리 여기저기에 있었다.

    그는 온몸을 떨면서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으르렁거렸다. 추위로 입이 덜덜거리면서 머리 전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가 다짜고짜 내 턱을 잡아당겼다.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나 역시 온몸을 떨며 애원했다.

    네놈 이름이 뭐냐? 어서 말하지 못해?

    핍이에요.

    더 크게 말해.

    그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핍이에요, 핍.

    어디 살지? 어딘지 손으로 가리켜봐!

    나는 손가락으로 우리 마을을 가리켰다. 우리 마을은 오리나무들과 가지를 자른 나무 너머, 이곳 교회에서 1.6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강가 평지에 있었다.

    그는 나를 잠시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느닷없이 나를 번쩍 들어 거꾸로 세우고는 내 호주머니를 뒤졌다. 호주머니에는 빵 한 조각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후, 교회 건물이 다시금 원래대로 보이는가 싶었는데, 남자가 너무나도 순식간에 나를 세워놓은 바람에 발 아래쪽으로 교회의 첨탑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아주 높은 묘비 위에 앉혀졌다. 내가 두려움에 떠는 동안 남자는 빵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요놈 좀 보게. 뺨이 제법 통통하네.

    그는 입맛 다시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나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왜소하고 허약했지만, 양 볼은 유독 살집이 도톰했다.

    맛있겠는데. 뜯어 먹어버릴까!

    그는 위협하듯 머리를 격하게 흔들었다.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하면서 앉아 있던 묘비 위에 바짝 달라붙었다. 밑으로 떨어질까 봐 무섭기도 했지만, 울음을 참으려고 그런 것이었다.

    네 엄마는 어디 있냐?

    남자가 물었다.

    저기요.

    그는 엄마가 가까이 있다는 줄 알았는지 깜짝 놀라 몇 걸음 도망치다 뒤돌아보았다.

    저, 저기 말이에요.

    나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지애나 부인, 저게 우리 엄마예요.

    나는 어머니의 묘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내게로 왔다.

    그럼 저기, 위에 것은 네 아빠냐?

    네. 아빠도 저기 계세요. 여기 교회 근처에 살았거든요.

    음.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넌 누구랑 사는데? 너를 살려줄지 말지 아직 정하지는 않았다만, 살려준다면 말이지?

    누나랑요. 조 가저리 부인요. 대장장이 조 가저리 부인 말이에요.

    대장장이라고?

    그는 자기 발에 달린 족쇄를 내려다보며 되물었다.

    그는 자기 다리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한 발짝 더 다가와 두 팔로 나를 움켜잡고 뒤로 확 밀어젖혔다. 남자는 더욱 위압적인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무기력한 눈빛으로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내 눈 똑바로 봐! 바른 대로 대답 안 하면 죽을 줄 알아. 너, 줄칼이 뭔지 알지?

    네, 알아요.

    음식이 뭔지도 알지?

    네, 그럼요.

    그는 하나하나 물을 때마다 나를 뒤로 밀어젖혔다. 지금 내가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 같았다.

    줄칼 가져와.

    그가 또다시 나를 밀어젖히며 말했다.

    음식도 가져오고.

    그가 좀더 나를 밀어젖혔다.

    둘 다 가져와. 내 말 안 들으면 네놈 심장과 간을 파먹을 거다.

    그가 더욱 나를 밀어젖혔다.

    나는 온몸이 벌벌 떨리고 어지러워서 두 손으로 남자를 붙잡았다.

    부탁이에요. 저 좀 붙잡아주세요, 제발. 토할 것 같아요. 너무 어지러워요. 지금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는 나를 거꾸로 치켜들고 공중에서 한 바퀴 돌렸다. 풍향계가 뒤집히면서 교회 건물이 한 바퀴 도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내 두 팔을 꽉 붙잡아 묘비 위에 똑바로 앉혀놓고 계속 살벌한 이야기를 지껄여댔다.

    내일 아침에 음식하고 줄칼을 가져와. 저기, 옛날 포병대가 있던 곳에서 기다릴 테니까.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돼. 누군가를 만났다는 말도 하면 안 되고. 그러면 널 살려주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뻥긋하기만 해. 네놈 심장과 간을 파내 구워 먹을 테니까. 똑똑히 잘 들어. 나는 지금 혼자가 아니야. 나 말고 또 한 사람이 숨어 있어. 젊은 놈이지. 그놈에 비하면 나는 그야말로 천사지. 암, 그렇고말고. 그놈은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을 죄 듣고 있어. 그놈한테는 아주 놀라운 특기가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면, 어린아이들을 몰래 잡아다가 심장과 간을 도려내는 거야. 놈한테 일단 잡히면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어. 어디 숨는 것도 어림없지. 집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이불 속으로 푹 파묻히면 괜찮은 줄 알지? 천만에! 꼬맹이들이 어디에 숨든 결국 잡히고 말아. 그놈은 살금살금 집 안으로 들어가 찍소리 하나 안 내고 너를 갈기갈기 찢어놓을걸. 하지만 너무 겁먹을 필요 없어. 내가 있으면 괜찮거든. 지금도 나만 없으면 벌써 그놈이 너를 잡아먹었을걸. 내가 너를 보호해주고 있는 거야, 지금. 그놈은 지금도 네놈의 심장이랑 간을 후벼 파지 못해 미칠 지경이지. 너를 지켜주기도 쉽지 않아. 그래도 너를 끝까지 지켜주지. 자, 이제 어쩔 셈이냐?

    줄칼을 가져올게요.

    나는 얼른 대답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먹을 것도 최대한 챙겨서 그가 말한 장소로 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럼 맹세해. 약속을 어기면 하느님한테 벌 받아도 좋다고!

    내가 맹세하자 그는 묘비에서 나를 내려주었다.

    약속 잊지 마. 아까 말한 내 친구 놈에 대해 입도 뻥긋해서는 안 돼. 알아들었으면, 얼른 집으로 달려가!

    아, 안녕히 계세요.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런 데서 참도 안녕하겠다! 차라리 개구리나 뱀장어가 되는 게 낫겠네!

    그는 습지대를 둘러보며 투덜거렸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두 팔로 덜덜거리는 몸뚱이를 힘껏 감싸 안았다. 팔이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듯이 말이다. 그는 그렇게 절룩거리며 교회의 낮은 담장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쐐기풀 사이를 지나 가시덤불을 헤치며 갔다. 가시덤불 우거진 곳에는 잡초로 뒤덮인 무덤들이 있었다. 어린 내 눈에는 그가 마치 무덤 속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행인을 낚아채 무덤 속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유령들의 손길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두 다리는 오랜 추위에 뻣뻣이 굳고 마비된 것처럼 보였는데도, 그는 교회 입구에 이르자 언제 절룩거렸냐는 듯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러더니 몸을 홱 돌려 내 쪽을 쳐다보았다.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남자의 눈을 피해 마을 쪽으로 힘껏 내달렸다.

    잠시 후, 어깨 너머로 돌아보니 그는 여전히 두 팔로 몸통을 감싼 채 강변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절룩거리면서도 비가 오거나 썰물 때 징검다리로 쓰려고 놓아둔 큰 돌들 사이를 더듬거리듯 걸어갔다.

    얼마쯤 달렸을까? 뜀박질을 멈추고 뒤돌아보았을 때, 어느덧 습지대는 한 줄기 검은 지평선으로 보일 뿐이었다. 강은 습지대보다 더 가늘고 덜 검은 수평선으로 변했다. 그리고 하늘은 ‘타는 듯 붉은 긴 선’들과 ‘검고 굵은 선’들의 조합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강변에 있는 검은 물체 2개가 어렴풋이 보였다. 수직으로 서 있는 2개의 물체 가운데 하나는 등대였다. 그 등대는 마치 긴 막대기 위에 올려놓은 테두리 없는 나무 술통 같았는데, 가까이에서 보면 몹시 흉측한 모습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한때 해적 하나가 처형된 적이 있는, 쇠사슬이 여럿 달린 교수대였다. 교수대 쪽으로 계속 절뚝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마치 해적이 교수대에서 살아 나왔다가 다시금 목매달려고 교수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등골이 오싹했다. 마침 강가의 소들도 일제히 남자의 뒷모습을 향해 있었다. 문득 나는 소들도 그 남자를 쳐다보며 나와 똑같은 상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남자가 말한 그 무서운 젊은 사람이 어디 있는지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몹시 무서워서 도망치듯 마을로 내달렸다. 이번에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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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나 조 가저리 부인은 나보다 스무 살이 더 많았다. 누나는 부모님을 대신해서 나를 손수 길러주었기 때문에 마을에서 평판이 매우 좋은 편이었다. 누나는 그런 이웃들의 칭찬에 뿌듯해했다. 그 무렵 나는 어렸지만 ‘손수 길러주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웬만큼 알고 있었다. 더불어 누나의 손이 얼마나 모질고 우악스러운지도 잘 알았다. 누나는 그 거친 손으로 나는 물론 매형도 후려치기 일쑤였다. 조금 과장하자면 나와 매형은 누나한테 하도 얻어맞아서 그런지 우리가 누나에 의해 길러진 것은 아닌가 의심하곤 했다.

    누나의 외모는 아름답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매형이 누나의 강압에 못 이겨 억지로 결혼한 것이 아닐까 의심한 적도 있다. 나의 매형, 조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조는 늘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고, 얼굴 양쪽으로 길게 늘어뜨린 금발에 파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파란 눈동자는 마치 흰자위와 조금 섞인 것처럼 보였다. 조는 다정하고 느긋한 성격이었으며, 마음씨도 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너무 착한 나머지 바보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나한테는 편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조는 헤라클레스의 힘과 약점을 동시에 지닌 그런 사람이었다.

    조 부인은 검은 머리에 눈동자도 검고, 피부색은 붉은 편이었다. 누나의 분홍빛 피부를 볼 때마다 나는 이런 의심이 들곤 했다. 혹 누나가 목욕할 때 비누 대신 우리가 모르는 무슨 특별한 향료 같은 것을 몰래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누나는 키는 컸지만, 뼈가 앙상할 정도로 몹시 마른 체형이었다. 그녀는 싸구려 천으로 만든 변변찮은 앞치마를 늘상 걸치고 있었다. 앞치마 윗부분에 달린 정사각형 모양의 장식에는 바늘은 물론 별의별 핀들이 잔뜩 꽂혀 있었다. 그 때문에 누나는 마치 중무장한 여전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누나는 항상 앞치마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더없는 미덕으로 여겼을 뿐 아니라 남편을 비난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도구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누나의 자부심과는 별도로 나는 그녀가 왜 항상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지 정말 알 수 없었다. 동시에 그녀가 왜 그것을 벗지 않는지도 알 수 없었다. 도대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전 생애를 앞치마와 쌍둥이처럼 붙어 사는 나의 누나란!

    조의 대장간에는 살림집이 딸려 있었다. 우리 마을의 여느 집처럼 나무로 지은 집이었다. 대장간도 나무로 지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 대장간 문은 잠겨 있었고, 조는 부엌에 홀로 앉아 있었다. 일종의 동병상련의 정을 가지고 있는 조와 나는 서로에게 비밀이 없었다. 부엌문을 열고 조를 빤히 바라보자 조가 나에게 살며시 속삭였다.

    조 부인이 너를 찾느라 벌써 열두 번이나 나갔어, 핍. 좀 전에 또 나갔으니 열세 번째로구나.

    정말요?

    그래, 핍. 그런데 이번에는 회초리까지 들고 나갔단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나는 조끼에 달랑 하나 남은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벽난로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하도 때려서 왁스를 발라놓은 회초리 끝부분이 아주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다.

    조 부인은 의자에 앉았다 섰다 안절부절못하더니, 이내 회초리를 움켜쥐고 길길이 날뛰다가 밖으로 뛰쳐나갔단다. 어쩌냐, 핍?

    조는 벽난로 아래쪽 불 속을 부지깽이로 후비며 느릿느릿 말했다.

    보통 화가 난 게 아니다, 핍.

    나간 지 얼마나 됐어?

    나는 늘 조를 내 또래 덩치 큰 친구처럼 대했다.

    글쎄. 길길이 날뛰다가 마지막으로 나간 게…… 가만있자…… 한 5분쯤 된 것 같다.

    조가 벽시계를 올려다보며 느릿느릿 말하다가 갑자기 문 쪽을 쳐다보더니 다급히 외치듯 속삭였다.

    핍, 조 부인이 온다! 어서 숨어, 핍.

    조는 문 뒤에 있는 넓은 수건 뒤에 숨으라고 했다.

    나는 조가 시키는 대로 했다. 이윽고 누나가 문을 홱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누나는 곧바로 문 뒤에 심상찮은 장막이 있음을 눈치채고 회초리 끝으로 수건을 쿡쿡 찔러댔다. 나는 금방 발각되고 말았다. 누나의 탐색은 싱겁게 끝났고, 나는 곧바로 조에게 던져지고 말았다. 나는 종종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무기가 되곤 했다. 누나가 던진 나를 조는 온몸으로 기꺼이 받았다. 그는 나를 벽난로 쪽으로 옮겨놓고 자신의 긴 다리로 울타리를 쳐주었다.

    저 장난꾸러기 놈은 당신과 한편이지? 어디를 싸돌아다니다 이제 기어 들어온 거야?

    조 부인은 발로 바닥을 쾅쾅 치며 소리쳤다.

    어서 말해. 어디 가서 뭘 하다 이제 들어와? 사람 속을 그렇게 태우고, 걱정하게 만들어? 바른 대로 말 안 하면 당장 끄집어낼 테다. 너 같은 녀석이 50명이 됐건, 가저리 같은 작자가 5백 명이 됐건, 네놈을 끄집어내고 말 테다!

    교회 묘지에 갔었어.

    나는 벽난로 앞쪽 발판에 쪼그려 앉아 울먹이면서 대답했다.

    교회 묘지?

    누나는 내 말을 되받아치고는 다시 소리쳤다.

    내가 없었다면 넌 벌써 귀신이 됐어도 골백번은 됐어. 알아? 말해봐. 널 키운 게 누구지?

    누나.

    내가 흐느끼면서 대답했다.

    내가 너 같은 놈을 뭐하러 키워줬을까? 말해봐. 거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 어서!

    몰라.

    나는 훌쩍거리며 얼버무렸다.

    누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이제 나도 모른다, 이놈아. 다시는 네놈을 돌봐주지 않을 거다. 정말이야! 네놈이 태어난 뒤로 이놈의 앞치마를 한 번도 벗어본 적이 없다. 대장장이 마누라 노릇도 지긋지긋한데, 네놈 어미 노릇까지 해야 한단 말이냐? 그나저나 그놈의 대장장이라는 작자 이름이 가저리라지, 아마!

    나는 우울한 심정으로 벽난로 불길을 바라보았다. 누나는 계속 떠들어댔지만, 아무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다른 문제에 골몰해 있었다. 습지대에서 만난, 한쪽 다리에 족쇄를 차고 있던 의문의 남자, 그가 가져오라고 한 줄칼과 음식, 그리고 기꺼이 도둑질이라도 하겠다고 맹세한 일……. 나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왠지 어떤 무서운 복수심 같은 것을 느꼈다. 약속을 어기면 그 무시무시한 남자가 분명 나한테 복수할 것만 같았다.

    오호! 교회 묘지라! 당신들 그 말 참 잘도 지껄이네.

    누나가 회초리를 제자리에 놓으면서 말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조는 단 한 번도 교회 묘지를 언급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누나는 매형을 공범 취급했다.

    당신들이 결국 나를 교회 묘지로 보내겠지. 그럼 머잖아 둘도 없는 단짝이 되겠군.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주제에!

    누나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조가 짐짓 자신의 다리 너머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조의 그런 행동은 누나가 말한 대로 우리 둘만 남게 되었을 때, 과연 우리가 어떤 팀이 될지 알 만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조는 자신의 오른쪽 금발 곱슬머리와 구레나룻을 만지작거리며 조 부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누나에게 공격받았을 때마다 하는 버릇이었다.

    누나는 빵을 썰었다. 누나는 우리에게 나눠 줄 빵과 버터를 항상 일정한 크기로 잘랐다. 크기가 달라지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조와 나는 누나가 빵과 씨름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누나는 먼저 빵 덩어리를 왼손으로 붙잡고 예의 장식이 있는 앞치마 가슴에 단단히 고정했다(앞서도 말했듯이 앞치마 장식에는 바늘과 갖가지 핀들이 꽂혀 있어서 그 바늘과 핀들이 종종 조와 내 입속으로 들어오곤 했다). 누나는 빵을 썰고 나서, 버터를 나이프에 조금 발라 마치 약사들이 고약을 바르듯 빵 위에 얇게 펴 발랐는데, 그 모습이 흡사 회반죽을 바르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나이프 양면으로 날렵하게 버터를 빵 가장자리까지 최대한 펼쳐 바르고 나머지는 말끔히 긁어냈다. 이어서 빵 가장자리에 나이프를 한 번 훔치고, 빵 위로 나이프를 다시 한번 닦은 후, 빵을 아주 두껍게 톱질하듯 썰었다.

    나는 몹시 배가 고팠지만, 도무지 빵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 무서운 남자와 그보다 더 무서운 젊은이에게 갖다 줄 빵을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누나는 엄격할 정도로 알뜰한 살림꾼이었다. 부엌을 아무리 뒤져봐도 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않을 게 뻔했다. 나는 일단 내 몫의 빵을 바짓가랑이에 감춰놓을 작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결단력이 필요했다. 마치 높은 집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거나 엄청 깊은 물속으로 곤두박질하는 것처럼 단단히 각오해야 했다. 게다가 조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동병상련의 정과 돈독한 우정으로 뭉친 조와 나는 저녁 식사 때마다 각기 빵을 한입씩 베어 물고 남은 빵을 서로 비교해보는 버릇이 있었다. 상대의 빵을 보고 놀라움과 감탄의 눈빛을 주고받기도 했는데, 그러면 식욕이 더욱 자극되었다.

    그날 밤에도 조는 금세 줄어든 빵을 몇 번이고 들어 보이며, 평소처럼 우호적인 경쟁을 벌이자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나는 조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빵은 물론이고 찻잔에도 손을 대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윽고 나는 과감하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그럴듯하게 행동해야 했다. 조가 쳐다본 직후 나는 무릎 위에 올려둔 빵을 슬그머니 바짓가랑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내가 입맛이 없다고 여겼는지 조의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빵을 한입 베어 물고는 자못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오래 오물거리면서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잠시 후 조는 무슨 알약이라도 삼키듯 빵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또 한입 베어 물려고 빵을 입에 대는 순간, 내 빵이 사라진 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너무나도 유난스러워 그만 누나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뭐야?

    누나가 찻잔을 세게 내려놓으며 물었다.

    음, 저기, 그…….

    조가 나지막이 우물거리더니 나를 바라보며 꾸짖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핍, 이 친구야! 장난하면 못써. 목에 걸린다니까. 음식은 꼭꼭 씹어 먹어야지.

    뭐냐고?

    누나가 한층 더 앙칼지게 물었다.

    그냥 토해버리는 게 좋겠다, 핍.

    조가 몹시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식탁 예절도 예절이지만, 네 몸부터 생각해야지.

    조의 말에 누나는 짜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다. 누나는 급기야 조에게 달려들어 그의 양쪽 구레나룻을 움켜쥐고 머리를 뒷벽에 찧어댔다. 구석에 앉은 나는 죄인의 심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자, 무슨 일인지 말해, 어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처럼 빤히 쳐다보지 말고!

    누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조는 무기력한 얼굴로 누나를 바라보더니, 이어서 빵을 우물거리며 다시금 나를 쳐다보았다.

    핍.

    조는 빵을 삼키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 여기 우리 둘밖에 없다는 듯 허물없는 말투였다.

    너와 나는 언제나 친구야.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너를 일러바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조는 의자를 옮기고 우리 둘 사이의 바닥 여기저기를 살펴보더니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그게 어떤 빵인데 씹지 않고 삼켜?

    뭐? 이놈이 빵을 통째로 삼켰어?

    누나가 소리쳤다.

    이봐 친구, 알지?

    조는 여전히 입안 가득 빵을 우물거리며 누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내게 말했다.

    나도 너처럼 어렸을 때는 빵을 꿀꺽꿀꺽 잘도 삼켰지. 다른 애들도 툭하면 그랬어. 하지만 그렇게 큰 걸 단번에 삼키는 건 정말 처음 본다, 핍. 그걸 삼키고도 죽지 않은 게 다행이야.

    누나는 한달음에 달려와 내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어서 약부터 먹자!

    정말이지 죽기보다 싫은 말이었다. 당시 어떤 몹쓸 의사가 타르에 물을 탄 혼합물을 특효약이라고 떠들어댔는데, 누나는 그걸 항상 찬장에 구비해두었던 것이다. 누나는 그 불결한 약이, 그에 상응하는 어떤 특별한 효능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그 고약한 맛 때문에 오히려 효험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누나는 내가 멀쩡할 때도 보약이라며 수시로 먹이곤 했다. 약을 먹으면 울타리를 새로 칠했을 때 나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다녀야 했다.

    누나는 나를 요모조모 살펴보더니 그 물약이 3백 밀리리터 필요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누나는 장화 벗는 기구에 장화를 끼우듯이 자기 팔에 내 머리를 끼우고 목구멍 속으로 약물을 들이부었다. 조 역시 3백 밀리리터를 마시고 나서야 누나에게서 풀려났다. 조는 벽난로 앞에 앉아 한동안 빵을 우적우적 씹어대며 뒤틀린 속을 달랬다. 누나는 조가 빵을 먹다 탈이 났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약을 먹기 전까지 멀쩡했으니, 분명 그 약이 화근이었다.

    어른이든 아이든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다. 아이의 경우 양심이라는 무거운 짐이 또 다른 짐이라고 할 수 있는 바짓가랑이 속의 빵과 충돌하면, 그것은 어린아이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크나큰 형벌이 되고 만다. 말하자면 당시 어린 나는 누나가 준 빵을 몰래 숨긴 것만으로도 엄청난 죄의식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결코 조의 것을 훔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집 안의 모든 물건은 음식까지도 조의 것이라고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 조 부인의 것을 훔쳤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누나의 것을 훔쳤다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남몰래 주머니 속에 손을 찌른 채 빵을 계속 붙잡고 있을 때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앉아 있을 때나 서 있을 때나, 심지어 부엌 곳곳을 돌아다니며 심부름할 때도 빵과 씨름해야 했다.

    습지대에서 불어온 바람에 벽난로 불길이 더욱 크게 타올랐다. 순간, 집 밖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습지대에서 만난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굶어 죽을 것 같아. 내일까지 못 기다리겠어. 지금 당장 먹을 것을 가져와!’ 그런가 하면 두려움에 시달리기도 했다. ‘내일 음식을 갖다 주지 않으면 나는 꼼짝없이 그 무시무시한 젊은이한테 잡아먹힐 것이다. 족쇄를 찬 남자가 말한 그 젊은이한테 말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 무서운 젊은이는 오늘 밤 내 심장과 간을 파먹으러 쳐들어올지도 모른다. 그 젊은이는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성질이 급한 나머지 내일을 오늘로 착각할지도 모른다.’ 공포로 정말 머리카락이 곤두설 수 있다면 내 머리카락이 그랬을 것이다.

    그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7시부터 8시까지 나는 다음 날 먹을 푸딩을 저었다. 여전히 바짓가랑이 속에 짐을 매단 채.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빵이 수시로 바짓가랑이 사이로 빠져나오려 했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중간에 부엌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나는 곧장 다락방으로 올라가 내 ‘양심의 일부’인 빵을 숨겨놓고, 다시 부엌으로 내려갔다.

    나는 푸딩을 다 젓고, 잠자리에 들기 전 벽난로 구석에 앉아 마지막 남은 불씨의 온기를 쬐며 조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 멀리서 대포 소리가 들려왔다.

    저거 대포 소리 맞지?

    내가 조에게 물었다.

    맞아. 죄수가 또 도망친 모양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조 부인은 조와 내가 이야기를 나눌 때면 언제나 자기 멋대로 해석하면서 조와 나의 대화를 끝장내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녀는 어김없이 불쑥 끼어들었다.

    도망쳤어. 도망친 거라고, 이놈아.

    조 부인은 마치 ‘타르 수용액’이라는 ‘그놈의 특효약’이 발하는 새카만 색깔만큼이나 또렷하게 딱 잘라 말했다.

    조 부인이 바느질하는 동안, 나는 소리 나지 않게 입술만 움직여 조에게 물었다.

    죄수가 뭐야?

    조 역시 같은 방법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조가 나름 성의껏 대답했는데도, 나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핍이라는 단어 빼고는.

    내가 도통 알아듣지 못하자 조는 참다 못해 큰 소리로 설명했다.

    어젯밤에도 죄수 하나가 도망쳤어. 저녁에 대포 소리랑 경고 사격 소리도 났어. 그런데 지금 또 대포 소리가 난 걸 보면 또 도망친 거 같은데.

    누가 쏘는 건데?

    내가 묻자 누나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녀는 바느질하던 손을 멈추고 나를 노려보았다.

    지긋지긋한 놈 같으니라고! 그놈 참 말 많네.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더 묻지 마. 어차피 거짓말만 듣게 될 테니.

    누나의 말대로라면 누나는 엄청난 거짓말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것은 상대는 물론 자신에게도 매우 무책임한 일이었다. 내 생각에는 그랬다. 내가 조에게 뭔가를 물어볼 때마다 번번이 누나가 대답했고, 그녀 자신이 말한 대로라면 언제나 거짓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조가 입술만 움직여 뭔가 말하려고 무척 애썼는데,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몹시 궁금했다. 입 모양이 ‘화났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나는 당연히 누나를 가리키며 입 모양으로 ‘누나?’라고 물었다. 그러나 조는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다시 입을 크게 벌려 단어 하나를 말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궁금증을 풀려면 나는 누나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정중하게 누나에게 말을 걸었다.

    누나, 궁금한 게 있는데, 귀찮더라도 가르쳐줘. 저 대포 소리는 어디서 들려오는 거야?

    하느님, 저 녀석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누나는 고함을 지르다시피 했는데, 자비는커녕 저주를 퍼붓는 것처럼 들렸다.

    감옥선에서 나는 소리라고!

    나는 조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아하, 감옥선이구나, 조!

    조는 ‘내가 그렇다고 말했잖아’라고 원망하듯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그런데 감옥선이 뭐야?

    내가 다시 물었다.

    저 녀석이 저렇다니까!

    누나는 바느질을 하다 말고 바늘 끝으로 찌를 듯이 나를 가리키더니 고개까지 흔들어대며 소리쳤다.

    저놈은 하나를 가르쳐주면 곧바로 12개를 물어보지. 감옥선은 죄수들을 태운 배야. ‘숩지대’ 건너편에 있는 거.

    누나가 말하는 숩지대란 다름 아닌 습지대였다(우리 마을에서는 습지대를 항상 숩지대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누나의 말은, 죄수들을 태운 배를 감옥선이라고 하고, 그 배는 습지대 건너편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 감옥선에는 누가 들어가? 그리고 왜 들어가는 거야?

    나는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내가 계속 묻자 누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누나는 심기가 불편한지 나를 나무랐다.

    별 쓸데없는 걸 꼬치꼬치 캐물어서 사람 귀찮게 해? 내가 그러라고 너를 키운 줄 알아? 그딴 식으로 계속 괴롭히는 건, 네놈을 손수 길러준 나를 모욕하는 짓이야. 그건 그렇고, 아무튼, 감옥선에 가는 건 죄를 지었기 때문이야. 사람을 죽이고, 도둑질하고, 가짜 돈을 만들고. 나쁜 짓들을 했으니까 감옥선에 들어가는 거지. 그런데 감옥선에 들어간 사람들이 어쩌다 나쁜 짓을 저지르게 되었는지 아냐? 바로 네놈처럼 꼬치꼬치 캐물어서 그런 거야. 이제 후딱 올라가서 잠이나 자, 이놈아!

    나는 누나의 명령대로 촛불 없이 어두컴컴한 계단을 따라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머리가 따끔거렸다. 누나가 다락방으로 올라가라면서 탬버린을 연주하듯 골무 낀 손으로 내 머리를 두들겼기 때문이다. 그 계단을 올라가면서 나는 나 자신이 감옥선에 갈 가능성이 크고 거기에 갈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말이다. 나는 분명 그곳, 감옥선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것저것 캐묻고 누나의 물건을 도둑질하려고 했으니.

    아주 먼 과거의 일이지만, 그날 이후 나는 공포에 휩싸인 어린아이가 얼마나 많은 비밀을 안고 있는지 어른들은 알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설령 괜한 공포라 하더라도 어린아이에게는 엄연한 공포다. 나는 내 심장과 간을 파먹지 못해 안달이 난 그 무시무시한 젊은이가 두려워 벌벌 떨었고, 한쪽 다리에 족쇄를 찬 그 남자에게도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누나는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지만 나를 혼내기만 했기에 누나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다. 그렇듯 나는 말 못할 공포에 사로잡혀 그 남자가 시키는 일이면 뭐든 다 할 작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무서운 일이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깜박 잠들었다가도 악몽에 시달리다 금세 깨어났다. 자다 깨다 하면서 계속 악몽을 꾸었다. 나는 거센 밀물에 떠밀려 감옥선을 향해 강을 떠내려갔고, 또 교수대 옆을 지나갈 때는 유령 같은 해적이 나타나 나에게 강가로 올라와 교수대에 목매달라고 확성기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심지어 나는 자고 싶은데도 잠을 자기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날이 밝기 무섭게 도둑질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밤중에는 도둑질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무도 모르게 불을 밝힐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싯돌에다 쇳조각을 힘차게 쳐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해적들이 쇠사슬을 끄는 것만큼이나 요란한 소리가 날 게 뻔했다.

    거대한 검은 ‘벨벳 장막’ 같은 밤이 어느덧 회색빛으로 변했다. 다락방의 작은 창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었다. 마침내 날이 밝아왔던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락방을 내려갔다.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계단의 널빤지와 갈라진 틈새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도둑놈아, 거기 서지 못할까! 조 부인, 어서 일어나시오!’ 나는 살금살금 찬방으로 들어갔다. 크리스마스여서 평소보다 먹을 것이 많았다. 거꾸로 매달린 토끼를 보고 놀라 자빠질 뻔했다. 등을 반쯤 돌렸을 때 그 산토끼가 한쪽 눈을 찡긋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토끼의 눈을 다시 볼 여유도, 음식을 고를 여유도 없었다. 우선 빵부터 챙겼다. 치즈 조금 하고, 민스미트(파이 속에 넣는 재료로 말린 과일과 양념 등을 섞어 만든다.—옮긴이) 반병도 챙겼다. 그리고 이것들을 어젯밤에 챙겨놓은 빵과 함께 손수건에 쌌다. 미리 준비한 작은 병에 브랜디도 조금 담았다. 그리고 브랜디 술병에는 부엌 찬장에 있는 주전자 물을 적당히 채워놓았다. 살점이 얼마 없는 뼈다귀 하나와, 속이 꽉 찬 동그란 돼지고기 파이도 챙겼다. 하마터면 이 파이를 그냥 지나칠 뻔했다. 선반 구석에 큰 접시 하나가 있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동그랗고 예쁜 모양의 파이가 있었다. 나는 파이를 챙기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파이가 없어진 게 들통나면 안 되는데……. 이 파이가 내일 당장 식탁 위로 올라가면 안 되는데…….

    부엌에는 대장간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 나는 자물쇠를 열고 빗장을 푼 다음, 조의 연장 통 속에서 줄칼 하나를 빼냈다. 그리고 자물쇠와 빗장을 원래대로 해놓고 대문을 열고(어젯밤 나는 이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다) 안개 자욱한 습지대로 달려갔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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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리가 내려 무척이나 습습한 아침이었다. 다락방 작은 창문에도 서리가 들러붙어 하얀 얼룩이 생겼다. 얼룩은 흡사 악귀가 창밖에서 밤새 울부짖으며 흘려놓은 것 같았다. 집 근처 울타리와 마른 잔디, 그리고 나뭇가지와 잎사귀에도 마치 성긴 거미줄처럼 이슬방울들이 잔뜩 매달려 있었다. 철책들도, 출입문들도 모두 기분 나쁠 정도로 축축했다. 습지대 안개가 너무 짙어서 우리 마을을 가리키는 손가락 모양의 나무 표지판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나무 손가락’을 밑에서 올려다보자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졌다. 물방울들을 보고 있으니 나무 손가락이 마치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고 있는 나에게 어서 감옥선으로 가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습지대를 나와 한층 더 짙은 안개 속으로 들어가자 내가 달려가는 게 아니라 세상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 같았다.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고 있던 나는 더욱 기분이 안 좋았다. 출입문과 도랑, 강둑들이 짙은 안개를 헤치고 나에게 달려들면서 일제히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저기, 돼지고기 파이를 훔친 소년이 간다. 저 소년을 잡아라!’ 마침 들판에 있던 소들이 허연 콧김을 내뿜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소들도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꼬마 도둑놈, 어딜 가는 거냐?’ 목덜미에 흰 반점이 있는 검은 소 한 마리가 나를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검은 소는 내 움직임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심지어 소가 내 양심을 일깨우는 목사님 같았다. 급기야 나는 울먹이면서 소에게 말했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나 혼자 먹으려고 훔친 게 아니라고요!

    검은 소는 머리를 숙이고 희뿌연 연기 같은 콧김을 내뿜으며 뒷다리를 차고는 꼬리를 한 번 휘젓더니 이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사력을 다해 강 쪽으로 뛰어갔다. 발이 시렸다. 남자의 한쪽 다리에 채워진 족쇄처럼 냉랭한 습기가 내 발에서도 떨어지지 않았다. 포병대가 있던 곳으로 가는 길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일요일이면 조와 함께 그곳 아래까지 가보곤 했다. 조는 낡은 대포 위에 걸터앉아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정식으로 내 도제가 되면 우리는 꽤 재밌을 거야.’

    자욱한 안개 때문에 헷갈렸는지, 나는 그만 목적지에서 오른편으로 너무 많이 지나쳐버렸다. 조수 차이를 표시하는 말뚝과 진흙 너머 돌들이 널린 강둑 위쪽을 따라 강변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가까스로 왔던 길을 되돌아와 도랑 하나를 건너고 나서야 비로소 목적지 가까이 이르렀다. 둔덕을 올라가자 그 남자가 보였다. 그는 내 쪽을 등지고 앉아 있었는데, 여전히 양팔로 몸통을 감싸 안은 채 깊은 잠에 빠져 고개를 끄덕거렸다. 구세주가 먹을 것을 가지고 전혀 예기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나타나면 더더욱 기뻐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살그머니 다가가 그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순간 그가 벌떡 일어섰다. 그런데, 젠장, 어제 본 그 남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남자도 초라한 잿빛 죄수복에 족쇄를 차고 있었다. 목소리는 잔뜩 쉰 채 추위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얼굴만 다를 뿐 어제 보았던 그 남자와 너무나 비슷한 행색이었다.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넓은 챙에 춤이 낮은 펠트 모자를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모든 것을 본 것은 한순간이었고,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가 욕설을 퍼부으면서 나에게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그의 주먹은 빗나갔다. 그는 주먹을 휘두르다 돌부리에 발이 걸려 비틀거리면서 자빠지고 말았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도망치듯 안개 속으로 달려갔다. 그 역시 절뚝거렸다. 그는 두 번이나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일어나더니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 무시무시한 젊은이인가?’ 순간적으로 이런 의심이 들자 갑자기 심장이 찌릿찌릿했다. 그때 간이 몸속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면, 분명 거기에도 똑같은 통증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곧 목적지에 다다랐고, 이번에는 그 남자가 틀림없었다. 그는 역시나 두 팔로 몸뚱이를 감싼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새도록 그러고 있었으리라! 계속 추위에 떨고 있던 남자는 나를 보자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남자가 다시 몸을 일으키자 나는 곧바로 줄칼을 건넸다. 그는 줄칼을 받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제보다 더 굶주려 보였다. 먹을 것이 담긴 보따리를 보지 못했다면, 아마도 그는 줄칼이라도 먹어치웠으리라. 물론 그는 어제처럼 나를 거꾸로 세워놓지 않았다. 내가 보따리를 풀고, 호주머니를 말끔히 비울 때까지 그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병에 든 건 뭐지?

    그가 물었다.

    브랜디예요, 아저씨.

    내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의 손이 가장 먼저 닿은 것은 민스미트였다. 음식을 먹는 그의 모습은 난생처음 보는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먹는다기보다 마구 집어넣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술을 마실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여유롭게 조금씩 홀짝거렸다.

    그는 음식을 먹는 내내 온몸을 격렬하게 떨었다. 어찌나 심하게 떨던지 술병에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였다. 술병이 멀쩡한 게 다행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오한이 심하신 것 같아요, 아저씨.

    그런 거 같다, 꼬마야.

    여기는 공기가 안 좋아요. 습지대에서 누워 있으면 큰일 나요. 온몸이 덜덜 떨리거든요. 여기서 자다가 류머티즘인가 뭔가 걸린 사람도 있대요.

    그래? 그럼, 죽기 전에 원 없이 먹기라도 해야겠다. 배불리 먹고 나면, 저기 교수대에 목매달려도 여한이 없겠구나. 우선 먹어야겠다. 먹고 나면 추위도 가실 거다. 내가 장담하마.

    남자는 민스미트, 살점이 아주 조금 붙은 뼈다귀, 빵, 치즈, 돼지고기 파이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그렇게 먹는 동안에도 주변과 안개 속을 수시로 살폈고, 중간 중간 씹기를 멈추고 귀를 쫑긋 세우곤 했다. 그때 갑자기 무슨 소리가 났다. 하지만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환청인지 강에서 나는 소리인지, 혹은 습지대에 사는 짐승들의 숨소리인지 정체 모를 소리들이 들려왔다. 남자는 무척이나 놀라고 당황스러워했다.

    남자가 갑자기 나를 쏘아보며 물었다.

    설마, 날 엿 먹이려고 님프(요정—옮긴이)랑 같이 온 건 아니지? 정말 혼자 온 거 맞지?

    맹세코 혼자 왔어요. 아무도 안 데려왔어요, 아저씨!

    네 뒤를 몰래 따라붙은 사람도 없었니?

    절대 없었어요!

    그럼 됐어!

    그는 조금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다시금 나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나처럼 불쌍한 사람을 속인다면, 그건 정말 비열한 사냥개 새끼야! 넌 비열한 사냥개가 아니겠지? 그래, 좋다. 널 믿으마.

    그의 목에서 ‘짤깍’ 소리가 났다. 마치 그의 목에 시계 같은 것이 달려 있어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릴 것 같았다. 그는 너덜너덜한 소매로 두 눈을 문질렀다. 그는 어느덧 안정을 되찾았고, 그 모습을 보자 그에게 연민마저 느껴졌다.

    맛있게 드시는 걸 보니 저도 기뻐요, 아저씨.

    뭐라고?

    아저씨가 맛있게 드시니 저도 기분 좋다고요.

    고맙구나, 꼬마야. 정말 고맙다.

    집에서 키우는 덩치 큰 개가 밥 먹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는데, 지금 보니 이 남자가 밥 먹는 모습이 딱 우리 집 개를 닮았다. 우리 집 개처럼 이 남자도 마치 발작을 일으키듯 날카로운 이로 먹을 것을 격렬하게 물어뜯었다. 음식을 덥석 물고 순식간에 삼켜버리고는, 갑자기 누군가 튀어나와 먹을 것을 빼앗을까 봐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먹어서야 맛을 느낄 턱이 없었다. 이렇게 먹는 사람은 다른 사람, 그것도 자기 집에 누군가를 초대해 함께 식사를 할 때도 여지없이 그럴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나는 실례되지는 않을까 헤아린 뒤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사람 먹을 건 하나도 안 남기시네요. 그 사람 어떡해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먹을 걸 더 가져올 수는 없어요.

    더 이상 가져올 게 없는 건 사실이었다.

    그 사람 먹을 거라니? 누구?

    그가 파이 껍질을 우적우적 씹다 말고 물었다.

    그 젊은이요. 아저씨가 얘기했던 젊은 사람 말이에요. 아저씨랑 같이 숨어 있다던.

    아하! 그놈? 그래, 나랑 같이 숨어 있었지. 하지만 그놈한테는 먹을 것이 필요 없어.

    남자가 거친 웃음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필요해 보이던데요.

    남자는 음식을 먹다 말고 적잖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보이다니? 진짜 봤단 말이냐?

    네, 방금 전에요.

    어디서?

    저기요. 저기서 졸고 있던데요. 처음에 아저씨인 줄 알았어요.

    나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남자가 느닷없이 내 멱살을 움켜잡더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순간 어제 남자가 나를 처음 보았을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놈 모가지를 분질러버리겠다!’ 나는 또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혀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저씨랑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어요. 그런데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리고…….

    나는 조바심을 내면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아저씨처럼 줄칼이 필요해 보였어요. 그런데 어젯밤 대포 소리 못 들으셨어요?

    그게 진짜 대포 소리였군.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대포 소리를 못 들으셨다니 놀라워요. 우리 집은 여기서 더 멀어요. 그런데도 우리 집까지 들렸어요. 문도 다 잠가놨는데도 똑똑히 들렸는걸요.

    꼬마야, 이놈의 습지대에 홀로 남겨진 놈한테는 말이다, 그것도 머리 나쁘고 잔뜩 굶주린 놈, 이렇게 지랄 같은 추위와 불안에 벌벌 떠는 놈한테 밤새 들리는 소리라고는 대포 소리요, 군인들이 뒤쫓는 소리란다. 소리뿐이냐? 그놈의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빨간 코트를 입고 횃불을 밝히며 곳곳을 수색하는 군인들이지. 그놈의 귀에는 이런 소리밖에 안 들려. 죄수 번호를 부르는 소리, 꼼짝 마 하고 외치는 소리, 장총이 덜그럭거리는 소리, 그리고 소대장이 이렇게 명령하는 소리. ‘사격 준비! 저놈이 꼼짝 못하게 총을 겨눠라!’ 그러고는 바로 붙잡히는 거지. 그러면 끝이야, 제기랄! 내가 어젯밤에 본 추격대만 해도 백 개 부대는 됐어. 군인들이 겹겹이 떼 지어 가더군. 그리고 또 그 대포 소리는 어떻고! 오늘 아침에도 대포 소리에 안개가 흔들린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놈 말이다.

    그때까지 그는 내가 거기 없는 듯 말했다.

    그놈을 보았을 때 뭐 눈에 띈 거 없었냐?

    있었어요. 얼굴에 검은 멍 자국이 있던데요.

    나는 까맣게 잊고 있던 것까지 기억해내며 말했다.

    여기에?

    그가 자신의 왼쪽 뺨을 찰싹 때리며 물었다.

    맞아요. 거기요.

    그놈이 어디 있었지?

    그는 조금 남은 음식을 품속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놈이 어느 쪽으로 갔는지 말해. 사냥개처럼 쫓아가서 박살을 내줄 테니. 그건 그렇고 이 망할 놈의 쇳덩이부터……. 이놈의 쇳덩이 때문에 상처가 났어. 제기랄! 그 줄칼 좀 다오, 꼬마야.

    나는 낯선 남자가 사라진 안개 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나 나의 친구는 내가 가리킨 쪽을 잠깐 보고는 곧바로 줄칼을 집어 들었다. 그는 흠뻑 젖은 풀밭 위에 주저앉아 흡사 미친 사람처럼 줄칼로 쇠사슬을 갈기 시작했다.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쇠사슬을 자르는 데 몰두했다. 족쇄가 채워진 다리는 피로 얼룩져 있었는데, 그는 아무 통증도 못 느끼는 듯 자기 다리를 고기 다루듯 했다.

    미친 듯이 쇠사슬을 자르는 그의 모습에 나는 다시 두려움을 느꼈다. 게다가 집에서 너무 멀리 온 것도 불안했다. 이윽고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이제 가도 되나요?

    그러나 그는 자기 일에 빠져 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몰래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빨리 도망쳐야 하리라. 나는 슬그머니 그에게서 몇 걸음 벗어났다. 다행히 들키지 않아 용기를 내어 다시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듯싶었고, 이제 냅다 달리기만 하면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후 뒤돌아보았을 때, 그는 여전히 한쪽 다리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라는 존재는 어느새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그에게서 제법 멀찌감치 벗어나 안개 속에서 마지막으로 뒤돌아보았을 때도 그는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쇠사슬을 자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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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집에 돌아가면 당연히 경찰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경찰은 하나도 없었다. 도둑질이 아직 들통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 부인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집을 청소하느라 부산스러웠다. 조는 누나의 쓰레받기에 걸리는 것을 피하려고 부엌 밖 계단에 나와 있었다. 누나가 집 안 곳곳을 청소할 때 쓰레받기에 걸리는 것은 언제나 조였다.

    이놈아, 어딜 쏘다니다 이제 오는 거야?

    조 부인이 내게 건넨 크리스마스 인사인 셈이었다. 그때까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던 나는 캐럴을 들으러 갔다 왔다고 얼버무렸다.

    다행이네. 네놈이 더 못된 짓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나는 내심 누나의 말이 백번 옳다고 생각했다.

    내가 대장장이 마누라만 아니었어도, 그리고 이놈의 노예살이 같은 앞치마만 아니었어도 나도 캐럴을 들으러 갔을 거다. 나도 캐럴을 아주 좋아해. 그래서 나는 캐럴을 절대 안 들어.

    누나가 말했다.

    쓰레받기가 치워지자 우리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누나가 째려보자 조는 누나를 진정시키려는 듯 손등으로 코를 쓱 문질렀다. 그리고 누나가 눈길을 거두자 나를 향해 집게손가락 2개로 십자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누나가 저기압이라는 표시였다. 누나는 거의 매일 골이 나 있었다. 그래서 조와 나는 십자군 기사 조각상의 두 다리처럼 거의 매일 손가락으로 십자 모양을 만들어야 했다.

    그날은 모처럼 풍성한 저녁 식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절인 돼지 다리 한 짝, 갖가지 샐러드, 속을 꽉 채워 구운 칠면조와 오리 고기가 식탁에 오를 예정이었다. 다행히 저녁 식탁에 오를 민스파이는 어제 아침에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그래서 민스미트가 사라진 것이 아직 발각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푸딩은 벌써 팔팔 끓고 있었다. 이렇게 거창한 저녁 준비를 하느라 아침은 대충 때워야 했다.

    조 부인이 우리에게 말했다.

    오늘은 할 일이 엄청 많아. 왕창 먹고 흥청망청 놀다가 설거지할 시간이 어디 있어? 안 그래?

    조와 나는 평소처럼 빵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우리 신세는 빵 몇 조각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계속 강행군을 해야 하는 수천 명의 군인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황송한 표정까지 지으며 찬장에 놓인 주전자에서 우유와 물을 잔뜩 따라 마셨다. 우리가 이러는 동안, 조 부인은 하얀 커튼을 새로 달고, 널찍한 벽난로의 꽃무늬 헌 주름 장식을 떼고 새 장식을 압정으로 고정했다. 그리고 복도 맞은편 거실의 덮개를 벗겨냈다. 거실 덮개는 벗겨낸 적이 없었다. 은종이는 차가운 실안개처럼 1년 내내 그곳을 뒤덮고 있었다. 심지어 벽난로 선반 위의 작고 하얀 도자기 푸들 네 마리도 은종이에 뒤덮여 있었다. 한결같이 까만 코를 가진 네 마리 개들은 한 쌍씩 서로 마주 보며 꽃바구니를 하나씩 물고 있었다.

    조 부인은 정말 깔끔한 주부였다. 하지만 그녀는 청결함을 불결함보다 더 못마땅하게 만드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 청결은 신앙심만큼 중요하다. 그래서일까? 어떤 사람들은 자기만의 중요한 무엇 때문에 조 부인처럼 행동한다. 크리스마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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