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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전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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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전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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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첩보요원이 쓴 심리전 교과서
2차 대전과 한국전쟁 당시 첩보요원으로 참전한 작가가 현장에서 보고 듣고 쓴 책!

심리전Psychological Warfare이란 “명백한 군사적 적대 행위 없이 적군이나 상대국 국민에게 심리적인 자극과 압력을 주어 자기 나라의 정치‧외교‧군사 면에 유리하도록 이끄는 전쟁”을 일컫는다.

심리전 매체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전단을 꼽는다. 전단(삐라)은 \'들리지 않는 총성\'이고 \'종이 폭탄\'이며, \'심리전의 보병\'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지 4일째 되던 6월 28일 미 극동군 심리전과에서 무려 1176만 장이나 되는 엄청난 삐라를 처음 제작, 살포했고 그해 10월 말에는 1억 장, 1951년 1월 26일에 2억 장을 돌파했으며, 11월 말까지 8억 장을 넘어섰고, 전쟁 발발에서 휴전까지 25억 장 이상의 삐라를 살포했다. 북한군과 중국군도 심리전을 적군 와해공작(적공)이라고 표현하여 작전을 수행하면서 역시 삐라를 적극 활용했다.

기원 전후의 전쟁에서 심리전이 작동한 사례를 삽화와 사진자료로 생생히 들려준다.

Language한국어
Publisher투나미스
Release dateOct 31, 2020
ISBN9791190847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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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리전이란 무엇인가? - 폴 라인바거

    - 한국전쟁에 참전한 美심리전 요원이 쓴 -

    심리전이란 무엇인가? 

    Psychological Warfare

    폴 M. A. 라인바거 지음 | 유지훈 옮김

    투나미스

    사랑하는 아내 제너비브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개정판 서문

    독자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1950년대 중반에 개정본을 집필했다. 초판 본문 중 14장은 ‘심리전과 무장해제Psychological Warfare and Disarmament’로 남겨두길 바랐으나 결국에는 삭제했다. 새로 쓴 4부는 3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심리전 분야와 관련된 학자 및 요원이 겪은 문제를 다루었다. 13장까지는 초판과 본문이 같다.

    개정판은 초판과 마찬가지로 현장 경험의 산물이다. 필자는 1949년 이후 아홉 차례의 해외 파견 중 다섯 번은 극동지방에서 근무했다. 이때 말라야에서 연방고등판무관을 지낸 헨리 거니 경(나중에 공산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함)을 비롯하여 필리핀인과 한국인, 중국 국민당원 및 중공군 포로 등과 대면했고, 전장에서 맥아더 장군의 지휘를 받던 수석 심리전 전문가인 J. 우달 그린 대령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1953년에 사망한 조셉 I. 그린 대령에게는 친구이자 동료로서 갚아야 할 빚이 있다. 감사의 글(초판)에 열거한 옛 친구에게도 많은 신세를 졌다. 그들의 조언과 지도편달 덕분에 수많은 궁금증이 해소될 수 있었다.

    초판을 읽은 독자들이 소감이 담긴 편지를 보내 많은 보탬이 되었다. 아르헨티나 번역가 2인과, 일본어 번역을 위해 애써준 수마 요카치로Suma Yokachiro와 중국어역 초판 및 개정판을 옮긴 첸 엥칭Ch'ên En-ch'êng 모두는 작품의 내용이나 필치를 개선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전에는 제자였다가 육군지원 부설연구소(ORO, the Operations Research Office) 동료를 거쳐 지금은 아내가 된 제너비브 라인바거 박사의 격려와 조언에도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끝으로, 美기관과 정부 부처가 심리전의 원칙을 좀더 타당하게 확정하여 3판에서는—몇 년 후면 출간될—좀더 원숙한 심리전이 국제정세에 반영될 수 있기를 바란다. 원칙을 수정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딱히 정해두지 않았지만 범위나 방침이나 혹은 작전의 정의에 대해 소견을 밝히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저자와 상의하여 3판 이후에라도 내용을 실을 수 있으면 좋겠다.

    폴 라인바거 1954년 8월 3일

    감사의 글

    이 책은 연구보다는 경험, 탐독보다는 컨설팅의 산물이다. 미국 심리전 기관에 소속된 민간 전문가이자 육군 장교로서 5년간 겪은 실무—합동‧연합참모본부의 기획단계에서 중국파견대의 전단 제작에 이르기까지—에 바탕을 두었다. 물론 필자의 경험만을 담기보다는 현역들이 인정한 개념과 원칙도 초판에 통합하려 했다. 그러니 책임은 내게 있겠지만 신빙성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심리전에는 머리를 써야 하는 흥미진진한 업무가 수반된다. 그래서 두뇌가 비상한―번뜩이는 아이디어가 가득한―사람들이 끌리게 되어 있다. 옌안의 마오쩌둥과 워싱턴의 조셉 데이비스 대사를 위시하여 뉴질랜드의 엔지니어(상병)와 충칭 본부의 2급 쿨리(coolie, 중국과 인도에서 19~20세기 초 미국으로 넘어온 노동자들을 비하하여 부르는 용어―옮긴이)와도 심리전에 대한 소견을 나눈 적이 있다. 그러다 보니 같은 뉴욕에서 어느 변호사의 ‘멘탈’이 붕괴될라치면 동료 변호사가 해결책을 제시하고 퓰리처 수상자의 아이디어가 바닥나면 속기사가 이를 채워주는 사례도 있었다. 모든 이들에게서 한수 배우려고 애썼고 그런 열정이 담긴 기억을 그러모아 책으로 엮으려 했다. 다행히 저작권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아쉽게도 코멘트나 창작의 출처는 밝히지 못했다. 일부 저작권자가 사람들의 기억에 오르내리는 것을 거부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은인 중 서너 명은 뇌리에 확실히 각인되어 감사를 표현하지 않을 수 없지만, 지면에 열거하고픈 사람을 전부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소개하련다.

    우선 부친인 폴 M. W. 라인바거 판사(1871~1939)는 쑨원과 중국 국민당을 대표하는 활동과 관련하여, 국제 정치전의 거의 모든 국면(공개와 비공개를 떠나)을 접하게 했다. 빠듯한 예산으로(사재를 턴 기간이 수년이다) 네다섯 개 언어를 구사해가며 반제국주의 및 반공산주의 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미중 우호관계와 중국의 민주주의 정립에도 앞장섰다. 5년 반 동안 부친의 비서로 활동하다 보니 이 책이 미국의 원칙만을 고집하지 않을 수 있었다. 프로파간다를 배우려면 남이 유포한 프로파간다를 몸소 체감하는 것이 가장 좋다.

    아버지 다음으로는 육군성에서 심리전을 담당한 총참모부 장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미국은 지성과 양심과 역량을 겸비한 인재들이 중차대한 임무를 끊임없이 이어왔다. 1942년에서 47년까지 그들의 지휘아래서 복무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임무 순으로 열거하자면 퍼시 W. 블랙 대령을 비롯하여 오스카 N. 솔버트 준장과 찰스 블래키니 대령, 찰스 알렉산더 홈즈 톰슨 중령, 존 스탠리 대령, 리처드 허시 중령, 브루스 버틀스 중령, 다나 존스턴 대령, 대니얼 테이텀 중령 및 웨슬리 에드워즈 중령 등이 있다. 재능과 성장배경은 서로 다르지만 역량만은 모두가 출중했다. 심리전의 독특한 마력이나 부관참모의 혜안이라기보다는 그저 운이 좋아 이런 인맥을 쌓을 수 있었다고 본다.

    특히 수기 원고를 (일부 혹은 전부) 읽어준 지인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이들은 콜롬비아에서 교육을 이수하고 군사정보처MIS에서 프로파간다를 분석해온 에드워드 K. 메라트와 국무성 국제정보 컨설턴트 겸 브루킹스 연구소 간부인 C. A. H. 톰슨, 가톨릭대 교수이자 합동참모부 소속 심리전 역사가인 E. P. 릴리, 인네스 랜돌프 중령, 그리고 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1‧2차 대전에 모두 참전하여 심리전 장교로 활약한 헤버 블랭켄혼 대위, 전시에 OWI‧MiS 대외사기분석처를 지휘한 정신과 전문의 겸 인류학자인 알렉산더 M. 라이턴 해군 소령, 리처드 허시, 도널드 홀 대령(그의 격려가 없었다면 책은 출간되지 못했을 것이다) 외에, 전략 정보에 대한 넓은 식견으로 평론에 무게를 더한 조지 S, 페티 교수와 다나 존스턴 대령, 언젠가는 미스터리한 야크지프 작전Yakzif operation의 전말을 전 세계에 공개할지 모를 마틴 허츠 및 M. S. 라인바거 등이다.

    프로파간다 기관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료들에게도 감사를 표시해야 할 듯싶다. 제프리 고러는 탁월한 동료이자 조력자였다. 에드윈 거드리 학장은 신중하고 인간적인 성품과 탁월한 심리학적 지식이 투영된 통찰력을 심리전에 접목시켰고 역사학자인 W. A. 에이켄 교수는 2차 대전 때 가동되던 미국 기관의 초기 사료를 제공했다. OWI 중국 아웃포스트 담당관인 F. M. 피셔와 리처드 와츠 주니어는 동료와 함께 업무를 분담함으로써 많은 것을 일러주었으며, 당시 직속상관이던 조셉 K. 디키 대령은 일손이 빠듯했음에도 참모 중 하나가 심리전에 시간을 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허버트 리틀과 존 크리디 및 C. A. 피어스는 프로파간다의 목적을 둘러싼 기상천외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전 국무성 차관 및 주일대사를 역임한 조셉 C. 그루에 따르면, 기존의 외교절차에는 심리전이 다른 형태로 재발견한 기술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끝으로 조셉 I. 그린 대령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는 편집자와 발행인과 친구라는 1인 3역으로 출간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책에 실은 자료는 육군성이 보안상의 이의를 제기하진 않았으나 당국의 정책이나 시각이나 견해와는 방향이 다를 수 있으며 사실의 정확성에 대해서도 당국은 책임이 없다. 책임은 전적으로 필자에게 있으니 소감이나 불만이 있다면 언제든 흔쾌히 들을 참이다.

    폴 M. A. 라인바거

    2831 29번가 N. W. 

    워싱턴 8, D. C. 

    1947년 6월 20일(현재)

    * 일러두기

    1 ‘프로파간다’는 ‘선전’과 동일하다. 

    2 원문에서 직접인용은 큰따옴표()를, 생각이나 강조(이탤릭체)는 작은따옴표를 사용했다.

    1부 정의와 역사

    CHAPTER 1 심리전의 역사적 사례

    심리전은 전쟁 전부터 종식된 이후에도 벌어진다. 심리전은 심리전 전담요원을 상대로 벌이는 싸움이 아니다. 전쟁의 법과 관례 및 관행의 통제를 받지 않고 지형이나 전투서열 혹은 교전 측면에서 정의할 수도 없다. 심리전은 끊임없는 과정process일 뿐이다. 성패는 작전을 개시한 후 수개월이나 수년이 지난 뒤에 알려질 때가 더러 있다. 어떻게든 성공하면(성공을 딱히 규정하긴 어렵다) 엄청난 보상을 누리고 실패하면(물론 감지할 수는 없겠지만)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심리전은 전쟁이라는 익숙한 개념에 잘 들어맞진 않는다. 군사학이 정밀하고 정확한 까닭은 합법적인 폭력을 적용한다는, 정의가 명확한 주제를 다루기 때문이라고 본다. 장교나 사병은 자신이 적을 정하지 않고도 다수에 대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전쟁을 선포하거나 중립을 인정하거나 적군의 목록을 작성하거나, 혹은 평화를 선언하는 등의 문제는 정치색을 띄는 탓에 군인의 책임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즉, 군인은 고위(즉, 정치)당국이 군사작전의 성격을 규정하거나 법으로 권위를 인정받은 사령부가 적을 확정한 후라야 전쟁으로 비화되지 않는 선에서 무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반면 작전의 본질이 하염없이 모호한 분야는 오직 심리전뿐이다.

    심리전은 수단과 임무의 성격상 전쟁이 선포되기 훨씬 전부터 개시된다. 격렬한 교전이 중단되더라도 심리전은 중단되지 않는다. 적은 심리전에 투입된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때로는 조국과 신God의 목소리로, 때로는 교회나 친근한 언론의 목소리로 위장한다는 것이다. 심리전 담당요원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는 반동세력(적을 가리킨다)과 투쟁해야 한다. 눈에 빤히 보이는 전담요원과 싸워서는 안 된다. 그는 공격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심리전에서 승리와 패배는 딱히 규정할 잣대가 없어 전략을 구상하더라도 섬뜩한 살얼음판을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심리전이란 무엇인가? 

    분명한 전쟁 프로세스 중 베일에 싸인 심리전에 접근하는 공식적인 방식을 보자면, 논리로 주제의 범위가 한정될 때까지 정의에서 정의로 이어지는 유클리드 증명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혹은 시대에 따라 심리전이 발전해온 양상을 밝히는 역사적 접근법도 흥미로울 성싶다.

    최선은 논리적‧역사적 접근법을 단순화시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구체적인 예로 2차 대전에 이르는 역사에 나타난 심리전의 사료를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리라 본다. 그럼 각종 개념과 협력관계를 추적할 수 있을 터인데 이를 염두에 둔다면 1‧2차 대전에 가담한 조직과 작전을 상세하고도 정확히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사학자나 철학자가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떤 대목에서는 숱한 논쟁을 벌이겠지만 규정이 어려운 주제를 다룬 조사결과에 대해서는 격론까지 가진 않을 듯싶다.

    p1

    <사진> 프로파간다(선전)의 기본형. 미국에서 제작된 이 전단은 필리핀 상륙 당시 발행된 것으로 파병부대와 현지 민간인의 협력을 유도하기 위해 필리핀 현지에 살포되었다. ‘민간인작전civilian-action’ 타입type 정도로 봄직하다.

    심리전과 프로파간다는 각각 인류만큼이나 역사가 깊지만 독립적인 전략으로 주목하기 위해 현대식으로 전문화되었다. 관련 사료는 수천 종의 서적에 산재되어 있는 탓에 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긴 어려울 것이다. 퇴역을 고려하고 있는 독자라면 이 주제를 꼭 살펴보기 바란다. 프로파간다의 역사는 혹시라도 특이하거나 사소한 것으로 치부했을 법한 수많은 사건을 다시 조명할 뿐 아니라 역사가 흘러가는 과정을 밝히 볼 수 있는 감각도 일깨워줄 것이다. 심리전을 구사했다고 인용할 만한 자료도 적지 않다.

    기드온이 구사한 패닉 전술

    심리전을 적용한 옛 사례 중 하나는 기드온(기원전 1245년으로 추정)이 미디안과의 전투에서 횃불과 항아리를 사용한 사건을 꼽는다.

    이 일화는 성경 『사사기the Book of Judges』 7장에 기록되어 있다. 기드온은 전술적으로 열세였던 반면 미디안은 많은 수효로 기드온을 아주 쓸어버릴 작정이었다. 보통 전술로는 전황을 역전시킬 수 없던 그는 작금의 사령관과는 달리 좀더 신적인 영감을 바탕으로 당대의 기술과 군대식 의례에 주안점을 두었다.

    기드온은 앞서 300명의 장정을 확보한 후, 적 진영에 혼란을 일으킬 방도를 찾고 있었다. 이때 당시 군대는 100명 중 한 명이 등과 횃불을 들고 출격한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300명에게 각각 횃불과 나팔을 갖추게 했으니 30만 병력의 ‘아우라’를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등불은 요즘처럼 스위치로 점멸할 수 없으므로 항아리에 횃불을 숨겨 허를 찌르는 급습이 가능했다.

    p2

    <사진> 나치군의 사기저하 전단. 1944년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된 이 전단에서 나치는 미군의 행동을 요구하진 않고 있다. 목표는 프로파간다를 통해 미군의 사기를 저해하는 것. 단순명료한 메시지에 주목하라. 나치는 2차 대전 내내 정치편향적인 첩보를 오해한 탓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 대한 미군의 반감이 상당했으리라는 착각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를테면 평소에 내뱉는 불만도 대역선동으로 착각한 나머지 독일군은 이런 전단이 먹혀들었다고 생각했을 성싶다.

    p3

    <사진> 전쟁 당시 눈에 띈 전단 중 하나. 일본 상공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B-29(폭격기)로 살포할 예정이었는데 전단에는 공격으로 폐허가 될 11개 도시가 명시되어 있었다. 미군은 ‘민간인작전’ 타입인 이 전단을 활용, 일본인들에게 스스로 생명을 지키라며 호소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자 적국은 전략적 요충지인 11개 도시를 폐쇄하여 전투력에 타격을 입었으나, 미군은 인륜을 중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며 미군이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는 일본군의 주장을 반박했다.

    장정 300명은 횃불과 항아리를 준비했다. 횃불은 항아리에 숨긴 채 나팔과 함께 이를 각자가 하나씩 들고 나선 것이다. 기드온은 당일 밤 적진 주변에 병력의 대형을 갖추고는 자신을 따라 항아리를 동시에 깨도록 했다. 그러고는 미친 듯 나팔을 불어댔다.

    미디안인들은 충격에 잠을 깼다. 경황이 없던 터라 제 진영에서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히브리 기자는 이 공로를 겸허히 하나님께 돌렸다. 미디안이 싸움을 포기하고 줄행랑을 치자 이스라엘은 그들의 뒤를 좇았다(사사기 7:22~23). 결국 기드온은 미디안을 진멸했다.

    패닉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왠지 어울리지 않을 법한 도구를 활용한 심리전은 고대국가의 역사에서는 흔한 편이다. 예컨대, 중국에서는 황제권력을 찬탈한 왕망Wang Mang이 한때 주술사를 대거 파견한 부대로 훈족을 멸하려 한 적이 있다. 정작 자신은 정통적인 책략을 가장 신뢰했음에도 말이다. 당시 그는 타격을 입었지만 회복이 불가한 혁신가innovator였던지라 기원후 23년경에는 반란군 진압 중 황실동물원에 있던 야수—호랑이와 코뿔소 및 코끼리—를 그들에게 풀어버린 적도 있다.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요량으로 방사한 것이다. 이때 반란군은 먼저 왕순Wang Sun 장군을 살해했다. 야수들은 흥분한 채 황실군대 주변을 배회하며 되레 그들을 위협했다. 설상가상으로 태풍까지 불어 닥치자 흥분은 더 고조되었고 반란군의 사기도 충천해져 결국 부대는 참패를 당하고 만다. 사령관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맥을 못 추게 하라는 핵심 프로파간다가 되레 왕망에게 실현된 것이다. 반란군의 전세를 알게 된 그를 두고 혹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극심한 우울감이 황제를 억눌러 건강이 나빠졌다. 황제는 술을 많이 마셨고 굴oysters 외의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으며 매사를 그냥 내버려두곤 했다. 또한 몸을 뻗을 수 없어 의자에 앉은 채로 잠을 청하기도 했다(레옹 위게, 『역사론Textes Historiques』 1권 628~633p). 왕망은 그해 죽임을 당했다. 그로부터 1000년이 흘러 안시Wang An-Shih(기원후 1021~1086)가 집권하기 전까지 이렇다 할 경제적 혁신은 이루어진 바가 없다. 좀더 효과적인 심리전을 구사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아테네인과 한족의 프로파간다

    심리전을 좀더 그럴듯하게 활용한 사례는 그리스 역사학자인 헤로도투스Herodotus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에서 최고로 꼽히는 범선들을 점찍어둔 후 마실 물이 흐르는 곳에 이르렀다. 그는 이튿날 이오니아인이 아르테미시움에 도착하면 바로 보이는 비석에 글을 새겨두었다. 내용은 이렇다. 이오니아인들이여, 조상과 싸움을 벌이고 그리스를 노예로 만드는 데 앞장서고 있는 그대는 불의를 행하고 있소. 우리와 손을 잡읍시다. 혹시라도 그럴 수 없는 형편이라면 전장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카리아인에게도 철수를 요청하시오. 어느 것도 불가하다면,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라면 우리가 개입하더라도 밀어붙이시오. 다만 이오니아인은 우리의 자손이며 본디 야만인의 원한은 그대들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오.

    2차 대전 당시 중국의 괴뢰부대와 이탈리아군 등, 다소 반신반의하는 적들에게 살포한 전단과 문구가 매우 흡사하다(그리스어로 쓴 본문과 사진 5를 비교하라). 선동가가 청중의 관점에서 상황을 보려 한다는 점에 주목하라. 상대의 안전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뉘앙스는 유대감을 일으키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이오니아인이 전쟁을 밀어붙일 경우를 대비하여 페르시아에 대한 흑색선전도 추가했다. 골수가 아닌 이오니아인이라면 누구든 아테네와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의구심을 유도한 것이다. 현대식 전시전단의 요건에도 모두 부합하는 선전이다.

    군사적 프로파간다의 또 다른 초기형태는 전쟁 개시 전에 선언하는 정치적 비판으로, 선포 즉시 어느 한 편에 대한 법적‧윤리적 정당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봄직했다. 예를 들어 『삼국지San Kuo』는 가장 많은 독자가 읽은 소설이 아닐까 싶은데, 이 작품에는 군사작전을 감행하기 전날 밤(기원후 200년경) 친(親)한 반체제 집단이 선포한 것으로 보이는 글이 보존되어 왔다고 한다. 본문은 선전기법을 한 데 모아놓은 까닭에 관심이 간다. 이를테면, 1) 적을 구체적으로 지명하고 2) ‘포섭이 가능한 사람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3) 군중의 공감대를 형성하며 4) 정통체제의 지지를 탄원하는가 하면 5) 자신의 역량과 높은 사기를 호언하고 6) 단합을 기원하며 7) 종교에 호소한다는 것이다. 선언문을 포고하는 것은 다소 정교한 정례의식과도 관계가 깊다.

    한조는 악한 날 몰락했고 황제의 권위는 기울어졌다. 동탁이 현 사태를 악용하자 재앙이 귀족가문에 닥치고 말았다. 평민도 잔인한 행태에 치를 떨었다. 우리는 황실 권세의 안위와 나라의 존립을 위해 군대를 소집했다. 맹세컨대 우리는 전력을 다해 힘이 닿는 데 까지 싸울 것이다. 일탈이나 이기적인 행동은 추호도 없으리라. 서약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며 자손도 끊길지니라. 전능한 천신과 대지모와 조상의 영령이 우리의 증인이라.

    어떤 국가든 역사에 나타난 선전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선전이 군사작전의 일환으로 활용된다면 이는 ‘군사적 프로파간다’라야 옳을 것이다.

    p5

    <사진> 혁명 프로파간다. 혁명이 전시에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준다면 혁명 프로파간다는 한 정부가 다른 정부를 비판하는 수단이 되게 마련이다. 위 전단은 일제의 괴뢰정권인 수바스 찬드라 보스의 아자드 힌드 파우지(자유인도군)가 발행한 것이다(싱가포르, 1943~44년에는 ‘쇼난Shonan’으로 통했다). 일제를 대놓고 언급하지 않은 탓에 ‘블록block’ 프로파간다로 봄직하다. 주제는 단순하다. 영국인은 먹을 것이 풍족한 반면 인도인은 굶어죽고 있다는 것. 물론 개연성이 아주 없는 주장은 아니었다. 실제로 벵골에 기근이 닥쳤을 때 아사한 수천 명 중 백인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안타까운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과거에 대한 경험은 미래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다. 1‧2차 세계대전은 냉철한 외교적 현안보다는 뇌리를 장악해온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신념이 전쟁의 원동력이 되고 말았다. 전황은 점차 심각해졌고 인정gentlemanly도 고갈되어갔다. 적은 인간이 아닌 미치광이로 취급했다. 충직한 군인이라면 부대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주의ism)’나 지도자에 대한 의리까지 지켜야 했다. 전쟁이 종교전으로 퇴보한 셈이다. 과거의 기독교‧이슬람교나 혹은 가톨릭(구교)‧프로테스탄트(신교)간의 전쟁에서 비롯된 선전술을 재조명한다면 현대전에서 심리‧군사적으로 적용해 봄직한 전술을 정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상대방의 종교를 바꾸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며, 적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 상황은 언제인가? 이단(요즘 말로는 ‘반동세력’)은 어떻게 뿌리를 뽑을 수 있는가? 적은 때가 되면 변절할 만큼 믿음이 약한가? 적이 떠받드는 (민감한) 주제를 전단이나 방송에 언급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규정은 무엇인가?

    이슬람 신앙과 제국이 팽창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수많은 정보는 요즘에도 간과해선 안 된다. 일설에 따르면, 인간의 믿음은 폭력으로 소멸되지 않고, 폭력만으로 인간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고 한다. 사실이 그렇다면 독일은 나치 이데올로기를 탈피할 수 없고, 전체주의 세력의 포로가 된 민주사회 국민은 군주정치에 적응하지 못할 터이나, 혹시라도 적응하고 나면 자유주의 원칙으로는 두 번 다시 마음을 돌릴 수 없을 것이다. 이슬람의 수장과 후계자가 벌인 전쟁은 장기화된 심리전의 두 가지 원칙을 보여주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적용된다.

    인간은 개종과 죽음의 기로에 서면 개종을 택하기도 한다. 때문에 독실한 사람은 뿌리마저 사라질 것이다. 종교를 바꾸려면 공공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식적인 종교용어도 필요하다. 아울러 지속적인 감시로 배교자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모든 언론매체가 기존의 신앙을 배격한다면 새로운 종교를 순수한 마음으로 인정할 것이다.

    즉각적인 개종에 대규모의 혹독한 군사작전이 필요하다면, 새로운 종교에 귀의하는 조건 하에 특권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불쾌한 종교에 관용을 베푸는 것도 같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피정복민이 기존의 신앙과 관행을 개인적으로 변변찮게나마 누릴 수 있게 되더라도 사회생활에—정치‧경제 혹은 문화든 관계없이—발을 들이게 되면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도록 길들여질 것이다. 따라서 사회의 모든 신흥집단은 몇 세대가 지나는 동안 부와 권력과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종교에 귀의하고 기존 신앙은 세력도 품격도 없는 야비한 미신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앞선 두 가지 원칙은 이슬람이 출현할 때도 작용했다. 2차 대전 당시에는 나치가 이를 적용한 바 있는데 이를테면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와 바이엘로루시아에서는 군사작전을, 네덜란드와 벨기에 및 노르웨이를 비롯한 서방국가에서는 관용의 원칙을 구사했다. 작전 중에도 이런 원칙이 눈에 띄었을 것이다. 전자는 곤란이 따르고 물리적 피해도 크지만 효과가 신속한 반면, 후자는 스팀롤러만큼이나 (속도는 더디지만) 결과가 확실하다. 기독교인이나 민주주의자 혹은 진보주의자가—자유주의자를 뭐라 부르든—자신의 사상에 대해 특권을 누리지 못하거나 수치스런 입장에 놓여 있다는 가정 하에, 자발적인 전향에 대한 기회가 열려있어 누구라도 승자의 대열에 편승할 수 있다면 그들은 목엣가시가 될 만한 사람을 거의 다 전향시킬 수 있을 것이다(빌프레도 파레토의 말을 빌리자면 신흥 엘리트를 포섭하는 것이요, 현대판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면 역사적으로 교체된 계급으로부터 잠재적 핵심 지도층 인사를 활용한다 할 것이요, 요즘 정치인이라면 야당에서 인재를 등용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것이다).

    p8

    <사진> 몽골의 비밀병기. 몽골 정복자들은 군사력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풍문과 공포 전략을 구사했다. 그들은 일단 권력을 잡으면 피정복민을 위협하기 위해 그럴싸한 군사전시물을 사용하곤 했다. 일설에 따르면, 사진에 묘사된 프랑스 판화는 전투용 하우다(howdah, 코끼리나 낙타의 등에 올려놓는 닫집이 있는 가마—옮긴이)로 칭기즈칸의 종손이자 마르코 폴로의 친구인 쿠빌라이칸이 도입했다고 한다. 분명 실전보다는 의례전시용에나 걸맞을 듯한 이 병기는 이름만 내뱉어도 ‘심리전’의 변수가 되었다.

    칭기즈칸의 흑색선전

    심리전의 효과가 매우 탁월하여 오늘날에도 여파가 남아있는 사례가 있다. 전 세계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정복자(테무진, 칭기즈칸)는 끝이 보이지 않는 타타르족 기병으로 정복전쟁에 나섰다. 육중한 수효로 전 세계를 휩쓴 것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구밀도가 낮은 내륙아시아 외곽은 밀도가 높은 몽골 주변을 제압할 만큼 많은 인구를 생산할 순 없다고 한다. 칸 제국은 대담한 군사적 창의력을—기동성이 높은 군대와 첩보를 십분 활용하고 전 세계의 절반을 아우르는 전략을 구사하며 온갖 프로파간다를 적용했다—바탕으로 세워졌다. 몽골은 중국 송 왕조뿐 아니라 4000마일이나 떨어진 프로이센에서 신성로마제국과도 전쟁을 벌였는데, 당시 로마제국과 송 왕조는 상대의 존재를 몰랐다(풍문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몽골은 전술을 계획하기 위해 스파이를 투입하는 등, 여러 수단을 통해 수효가 많다는 둥, 무식하고 포악하다는 둥의 허위사실을 고의로 유포하기도 했다.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적이라면 그들의 의중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열세한 데다 숫자도 적은 기마대를 ‘수효를 헤아릴 수 없는 부대’로 띄우곤 했다. 몽골 첩자가 길거리에서 그런 유언비어를 퍼뜨렸기 때문이다. 7세기 전 몽골이 공격할 당시 군사력이 약했다거나 사령부의 냉철한 첩보활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유럽인은 지금도 거의 없다.

    칭기즈칸은 적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 적군의 첩자도 이용했다. 첩자를 만나면 부대에 대한 뜬소문을 주입시킨 것이다. 칭기즈칸 전기를 처음 저술한 유럽작가는 예스러운 문체로 그가 호레즘에게 일격을 가한 일화를 이렇게 기록했다.

    한 사가는 호레즘 왕이 감시차 보냈던 첩자에게 정보를 흘려 적군의 전력과 수효를 다음과 같이 밝히게 했다. 첩자가 왕에게 이르되, 모두가 전쟁에 능한 장정으로 혈기가 왕성하여 마치 씨름꾼을 보는 듯하더이다. 전쟁과 피로 얼룩진 그들은 싸움을 참지 못해 장수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정도였습디다. 하지만 성정은 불같아도 사령관에게는 철저히 복종했고 칭기즈칸에게도 헌신을 다하더이다. 그들은 식량에 불만이 없었으며 이슬람 사람과는 달리 닥치는 대로 짐승을 잡아먹는 까닭에 연명하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죠. 저들은 딱히 먹을 고기가 없을 때는 돼지뿐 아니라 늑대와 곰과 개도 잡아먹고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가리지 않습디다. 허기를 채워야 한다면 이슬람이 금기시하는 동물도 서슴지 않고 죽였습죠. (마지막으로) 칭기즈칸 부대의 수효는 메뚜기떼 같아 당최 헤아릴 수가 없더이다.

    실제로 칭기즈칸이 파악해 보니 부대는 70만 명으로 확인되었다 ….

    첩자는 (전에도 그랬지만)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만큼은 효과가 확실히 입증되었다. 호레즘의 통치자와 백성은 늑대를 서슴지 않고 잡아먹는 데다 수효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씨름꾼들에게 공격을 당하리라는 두려움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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