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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의 진실이야기1
원대의 진실이야기1
원대의 진실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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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의 진실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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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원대의 진실이야기


처음부터

책을 내려고

글을 썼던 것은 아닙니다.


그냥

자문자답하며

글을 쓰다 보니

쓴 글이 많아졌습니다.


어느 날  

어떤 분이

글 몇 편을

백독을 해보고

머리가 텅 비워진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때

고요에서 받아 적은 글이라

낭독하는 자 또한

고요해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또 어느 날

어떤 분이

여러 사람이 낭독할 수 있게

책으로 내야 한다고

여러 번 요청하여


전체성의

요청으로 받아들이고

처음으로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원대의 진실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게 된

소박한 사연입니다.


그 뒤로

이영미님이 요청하고

후원하여

2, 3권이 나왔고


그 뒤로

김정현님과 서선철님을 비롯한 

여러 낭독인들이 동참하여

4, 5권이 나왔습니다.


원대의 진실이야기는

내면의 고요에서

글을 받아 적습니다.


그래서

글을 낭독하는 자도

낭독만 하면

저절로 고요해집니다.


소리를 타고

고요에

당도합니다.


아주

간단하고

쉽습니다.



누구든지

낭독만 하면

저절로

고요가 복원됩니다.


앞으로는

낭독으로 눈을 뜨고

글쓰기로 책을 내고

유튜브로 방송하는


자기 법을 펴는

과정이

보통 일상 평범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제

원대의 진실이야기

낭독교재가 완성되었으니


각자 놓여진 낭독방에서

삼삼오오 낭독하여

진실눈이 떠져

진실한 세상이 복원될 것입니다.


책이 나올 수 있도록

함께 해주신 전체성과

모든 인연들께

진실로 고맙습니다.


2019. 12. 29

Language한국어
Release dateFeb 8, 2022
ISBN9791195913558
원대의 진실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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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대의 진실이야기1 - 김대영

    1. 관찰

    관찰

    보고 살핀다.

    그런데 무엇을 보며

    어떻게 살피는가?

    흔히들 밖으로 보이는 현상을

    육안으로 보고 살핌을 관찰이라고 한다.

    밖으로 몰입하여 한눈을 파는 순간

    자기 몸과 마음에 대하여는

    관찰이 없다.

    그래서 번뇌망상에 끌려가는 줄 모르고

    멱살 잡혀 살고 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진정한 관찰은

    밖을 봄이 아니라

    자기를 봄이다.

    자기 몸의 동정을 관찰함이고

    자기 마음의 동정을 관찰함이다.

    이것이 깨어있음의 시작이고

    내외명철의 시작이다.

    처음에는 밖을 보면 안을 놓치고

    안을 보면 밖을 놓친다.

    그러나 자꾸

    몸이

    움직이면 움직이는 줄 관찰하고

    안 움직이면 안 움직이는 줄 관찰하고

    나아가

    마음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줄 관찰하고

    마음이 안 일어나면 안 일어나는 줄 관찰하면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눈이 생긴다.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힘이 생긴다.

    이 눈이 

    심안 영안이며 제3의 눈이다.

    이 관찰의 눈이 생기면

    자기, 

    자기의 내면만 보이는 것이 아니고

    자기 이외의 사물에 대하여도 

    관찰하는 눈이 넓어진다.

    안과 밖이 동시에 들어오는 것이다.

    하나의 둥근 거울

    대원경이 복원되는 것이다.

    보려고 노력해서 보는 것이 아니고

    거울에 비쳐서 보는 것이다.

    이 관찰의 눈

    관찰의 거울은

    공간성이며 무시간성인지라

    모든 동하는 것이 감지된다.

    모든 동(動)하는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靜)한 것 마저 감지된다.

    그것은 

    침묵이며 고요함이며 

    깨끗함이며 광명이다.

    그래서 관광이다.

    이 빛은 

    유광 무광 

    모두 아우르는 빛이다.

    우선 방향을 내면으로

    자기에게로 돌리는 관찰이 되고 보면

    안과 밖을 동시에 관찰하는 눈이다.

    바야흐로 봄이 온 사람이다.

    2014.01.24 

    2. 내면을 보면 어떻습니까?

    처음엔 

    내면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항상 눈빛이 

    밖으로 향해있기 때문입니다.

    먹고 살려고 재색명리에 팔려

    안을 볼 여가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밖으로 볼 장을 다 본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자기의 안을 보기 시작합니다.

    어쩌다 문득 문득 일고지는

    생각의 조각들을 보기 시작합니다.

    거기에는 

    보이는 생각과

    보이는 생각을 감각하는 

    보는 자가 존재합니다.

    보이는 생각을 

    움직임 

    동(動)이라고 하면

    생각을 보고 있는 

    감각하는 것은 

    정(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 일고지는 것을

    지속적으로 보고 있으면

    보이는 생각들이 유지가 안 되고

    보는 족족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빛으로 그림자를 비추면 

    사라지듯이 없어집니다.

    그러기를 

    부지기수로 하다가 보면

    문득 어느 순간에

    생각이 없는 공간이 감지가 됩니다.

    바로 허공입니다.

    그것은 침묵입니다.

    그것은 고요입니다.

    이 암흑의 하늘이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면의 하늘입니다.

    여기서 바로 

    백척간두 진일보해야 합니다.

    그 암흑의 하늘을 

    계속 지속하여 보아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신비가 일어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태초 암흑을 주시하고 있으면

    이내 밝아옵니다.

    고요 가운데 

    동시에 고요를 감각하고 있음을

    어두움을 알아차리고 있는 동시성

    어두움을 어두운줄 알아차리고 있는 밝음이

    포개져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현상계에는 

    어둠과 밝음이 

    동시에 공존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이원성 

    상대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침묵을 감각하는 침묵이 

    밝음 자체입니다.

    어두움을 감각하는 

    그 자체가 밝음입니다.

    명암이 포개져 있습니다.

    어둠과 밝음이 동시성입니다.

    내면의 하늘은 

    그래서 명암쌍쌍입니다.

    명암이라는 이원성이 

    묘하게

    둘이 아니게 

    포개져 있습니다.

    이것을 봄이 

    바로 

    성품을 본다고 하여

    견성이라고 합니다.

    한번 보고 나면 

    영원히 잃지 않아

    일득영득 이라고 합니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둘이 아니라서

    보는 자 없이 봄이라서 

    합일이라고 합니다.

    방향을 안으로 돌려

    내면에서 보기만 하면 됩니다.

    아무나 다 되는 것입니다.                          

    2014.02.07

    3. 회광반조

    옛말에 회광반조란 말이 있다고 한다.

    빛을 돌이켜 비춘다. 정도로 

    문자해석을 할 수 있다.

    혹은 

    더 나아가면 

    자기를 반성한다.

    혹은 성찰한다. 정도로 해석하지만

    정확한 것도 아니고 

    스스로 적용이 안 되어

    나하고는 무관한 문자에 머물고 만다.

    모든 물질의 빛은 

    자기 자신은 비추지 못하고

    나 이외의 밖을 비춘다.

    그래서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한다.

    우리 몸의 육안의 눈도

    밖으로만 비추지

    정작 자기 내면의 느낌을 

    감각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감각해야할 방향은 밖이 아니라

    안쪽인 나의 몸이요 나의 내면이다.

    그래서 회광은 

    밖을 보는 빛을 안으로 돌려 

    내 몸과 나의 내면을 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등잔이 

    등잔 밑을 비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밖을 보는 시선을 

    안을 보는 시선으로 돌림이 회광이다.

    이것이 

    물성의 눈 

    육안의 눈을

    영안으로 차원변경하는 시작이다.

    이렇게 방향을 안으로 돌림은

    걸음마에 불과하다.

    이제 힘을 길러야 한다.

    반조를 해야 한다.

    처음에는 반조가 되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힘을 길러야 한다.

    자기의 

    생각, 말, 행동을 관찰하기 시작해야 한다.

    우선 행동을 관찰해야 한다.

    몸이 움직이면 

    움직이는 줄 대중 잡고

    안 움직이면 

    안 움직이는 줄 대중 잡아야 한다.

    크게는 목, 팔, 허리, 다리 등 

    좌우 상하 앞뒤로

    움직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것이 관찰이며 반조의 시작이다.

    움직이나 안 움직이나 

    항상하게 

    봄이 있다면

    한눈이 떠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자기가 하는 

    자기 말소리를 

    자기 귀로 듣기 시작해야 한다.

    말하는 순간만이라도 깨어서 들어야 한다.

    내 말소리이지만 

    내 말소리도 

    남의 말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말이 나를 이끎이 아니라

    말에 주체성이 생겨 

    주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말을 하려면 하고 

    안하려면 안하게 된다.

    말이 산만함에서 나옴이 아니고

    고요와 안정에서 나오게 된다.

    반조의 공덕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닌

    속으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기 시작해야 한다.

    더 깊은 반조의 시작이다.

    생각의 중얼거림, 

    마음의 중얼거림, 

    감정의 중얼거림,

    느낌의 중얼거림 

    모두 들어주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차츰 고요가 찾아온다.

    침묵이 찾아온다.

    이 고요는 안정감이다.

    안락이요 안식이다.

    아무 걱정도 없고 

    싸움도 없고 

    두려움이 없는

    평안이다.

    이때 비로소 

    반조가 가능해진다.

    관찰자가 

    스스로를 관찰할 수 있게 된다.

    대상을 관찰함이 아니라

    보는 자가 보이는 자이고

    보이는 자가 보는 자이게 된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항상 보게 된다.

    항상 무한한 하늘을 보게 된다.

    항상 고요를 보게 된다.

    항상 침묵을 보게 된다.

    이것이 

    우리들 각자에게 있는 

    내면의 하늘이다.

    이 하늘 없는 사람이 없다.

    무심의 하늘이다.

    이 빛은 

    있다 없다 하는 빛이 아니다.

    이 빛은 이미지가 아니다.

    이 빛은 각성의 빛이다.

    깨어있는 빛이다.

    각성이 각성을 각성하는 것이다.

    방향을 

    나의 몸 내면으로 돌림이 회광이요.

    자기의 생각, 말, 행동을 관찰하다가

    궁극에 

    관찰자 자신을 보게 됨이 반조이다.

    봄이 봄을 보는 것이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둘이 아닌 것 이다.

    이것은 이론도 성리도 아니다.

    실재이고 진실이다.

    이것이 합일의 눈이고

    한눈의 복원이다.

    회광반조에는 

    이런 비밀이 들어있다.

    2014.02.12 

    4.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말을 아는 것과 

    실천하면서 사는 것은 별개이다.

    어떤 게 고운 말인지를 모르며

    어떻게 고운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른다.

    무의식으로 말이 나가기 때문에

    말에 주재권이 없다.

    고운 말은 고요한데서 나온다.

    우선 나의 내면이 고요해져야 한다.

    번잡스럽지 않고 깨끗해야 한다.

    부동하고 안정감이 있어야 한다.

    고요해져야 고운 말이 나온다.

    고요해지기 위해서는

    자기가 

    자기 말을 들으면서 말해야 한다.

    소리에서 소리가 나옴이 아니고

    들어봄이라는 침묵에서

    소리가 만들어지는 

    처음부터 

    진행과정

    마지막에 소리가 멈추는 것까지 

    들어줘야 한다.

    그래야 말이 

    흩어지거나 갈라지거나 

    싸우거나 경쟁하거나

    무시하거나 우월하거나 

    열등해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실에 입각하여

    진실한 말 

    소박한 말이 나온다.

    저절로 나오는 말이고 

    자연스러운 말이다.

    고요한 가운데에도 

    울림이 있어 감동을 준다.

    고운 말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말이 아니다.

    남의 말을 

    모두 들어주는 가운데

    필요에 따라 

    할 말만 인연 따라 하는 말이다.

    고운 말은 

    꾸미지 않는 말이다.

    진실한 말이고 알맞은 말이다.

    내가 듣기에도 고운 말이면 

    남이 듣기에도 고운 말이다.

    고운 말이 나오면 주변이 고와진다.

    그러니 다시 고운 말이 들려온다.

    사나운 말은 

    나 자신도 사납게 만들고

    주변도 시끄럽게 만든다.

    그래서 잘 관찰해야 한다.

    오는 말이 곱지 않을 때

    내 말소리가 

    고운 말이 나오는지 관찰하여

    잘 걸러서 내보내야 한다.

    내가 듣기에 민망한 소리는

    분명 

    남이 듣기에도 

    민망한 소리이다.

    전해오는 속담이 

    참 맞는 말이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2014.02.14 

    5. 정신 차려라!

    한번쯤은 들었을 말이고

    또한 

    한번쯤은 해봤을 말이다.

    그러나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나

    이 말에 

    정신을 깨닫는 사람은 드물다.

    정신을 어떻게 차리고,

    또한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은

    육안의 눈으로 보이는 형상이 아니다.

    그러나 없다고 말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있다고 말하기도 확실하지 않다.

    정신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기 눈으로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하여

    얼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기 눈으로

    자기 눈을 보지 못한다고 하여

    자기 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몸을 육체라고 하면

    정신은 영체이다.

    몸이라는 육체가 움직이거나 멈출 때

    그 몸의 거동을 

    관찰하는 자

    주시하는 자

    알아차리는 자

    보아주는 자

    그자가 바로 정신이다.

    몸이라는 육체가

    움직이면 움직이는 줄 알아차리고

    안 움직이면 안 움직이는 줄 알아차리는 자

    그 알아차리는 자

    깨어서 항상 보고 있는 자

    보고자 하는바 없이 

    항상 자각하고 있는 거울

    어쩐지 몰래카메라처럼

    몸 육체의 모든 거동을 주시하는 자

    이 보는 자가 바로 정신이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려면

    몸의 거동을 소상하게 보고 있으면

    그 자체가

    몸과 마음이 함께 하는 것이다.

    몸 따로 마음 따로 일 때는

    분열로서 정신 못 차린 것이지만

    마음이 몸의 거동을 항상 보아

    함께 하는 순간부터는

    심신일여로서

    정신인 영체가

    몸인 육체의 일거일동을

    주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차림의 과정이며

    실재이다.

    정신이 듦이다.

    정신 차려서

    정신이 들고 보면

    정신은 항상하며 

    전체성이라

    들고 남이 없음을 보게 된다.

    생각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정신이 들고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구름이 들락날락하는 것이지

    하늘 자체는 들고 난 흔적이 없으며

    들고 날 수 있는 속성이 아니다.

    정신 차려라 !

    자기 몸의 거동을

    항상 돌보아줌이

    정신차림의 핵심이다.

    2014.03.20 

    6. 한눈 팔지마라!

    한눈 팔지마라. 는 말

    가끔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

    그런데

    보통 말이기에

    자세하게 살피지 못하고

    모르면서도 보통으로 사용한다.

    여기서 한눈은

    하나, 둘, 셋의

     숫자로서의 상대적인 한눈이 아니다.

    굳이 하나의 눈이라고 한다면

    절대의 

    오직 한눈이다.

    분열이 아닌 눈

    둘이 아닌 눈이다.

    이 눈은 바로

    정신을 말한다.

    정신이 어째서 눈이란 말인가?

    보배중의 보배인

    나의 몸을

     항상 봐주고 살피고

    움직이게 하고 멈추게 하고

    먹이고 살리는 

    돌봄이

    정신을 

    한눈이라고 한다.

    각자

    몸 육체라는 도구를 하나씩 갖고

    한바탕 놀려고 지구촌에 왔다.

    무한하고 영원한 정신이라는 존재가

    이 몸을 보아주고 있다.

    그 눈은 나에게도 있지만

    각자 몸에 모두 임재해 있는

    모두의 눈이다.

    그 눈은 무한하여

    한계가 없는 큰 눈이다.

    그래서 한눈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기 몸을 놓치고

    정신을 못 차릴 때

    한눈 팔지마라고 한다.

    깬 눈으로 보면

    한눈은 

    사고 팔수 없는 것이니

    한눈 팔지마라는 말은

    말이 안 되는 말이다.

    그래도

    아직 자기 몸을

    자각하고 살지 못한다면

    몸은 몸이로되

    주인 없는 몸이다.

    눈은 눈이로되

    소인의 눈이다.

    소안이다.

    재색명리에 팔린 눈이다.

    먹고 사는 것에 팔려

    몸을 놓치고 산다.

    그래서 병고가 계속되고 있다.

    정신 차리고 사는 법 !

    한눈팔고 살지 않는 법 !

    몸을 늘봄이 비밀 아닌 비밀이다.

    지금 

    몸이 감각되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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