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의 경계에서 On the Cusp of Evolution
이내의 시간, 구례 화엄사 톨게이트를 나왔다. 며칠째 비가 온 뒤라 지리산의 푸름은 끝없이 이어졌고 골을 따라 섬진강의 물이 넉넉하다. 짙고 익숙한 풍경, 이곳엔 무엇을 지어도 산이 품어줄 것 같다. 숙제를 안고 묵은 평사리, 50만 평 너른 들 위의 집도 동네도 밤도 깊다. 그곳에서 낯설고 익숙한 집을 만났다. 2년 만에 모인 건축가 조정구의 작업들. 경상남도 하동군 평사리의 최참판댁 위에, 전주 삼전동의 고즈넉한 곳에, 제주의 한천 곁에, 은평한옥마을의 끝에 지은 집들이다. 규모가 커졌고 개인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단층의 한식 목구조가 닿지 않았던 지점들, 변화의 필요가 그에게 왔다. 그는 피하지 않고 진화를 택했다. 콘크리트 저층에 한식 목구조를 쌓아 올려 밀도를 해결하고, 마을의 구성 원리를 살펴 수평으로 확장하고, 한옥의 구법을 중목구조와 결합해서 제약을 넘는다. 스스로 익힌 한옥의 유전자를 중심에 두고 해법을 찾았다.
언젠가 그의 집 이야기를 진득이 들었다. 한국인 주거의 본질은 형태가 아닌 삶에 있으며, 그 형상을 찾아서 건축에 담는다고 했다. 본질을 이해했지만 그는 두려워한다. 무섭기 때문에 모형을 자세히 만들고 형상을 만들기 위해 끝없이 근거를 찾는다. 1000번의 수요답사는 그 근거를 찾는 여정이다. 수천 년 이 땅에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흔적엔 반드시 근거가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찾기의 고단함을 마다하지 않는다. 답사를 통해 가치를 찾아 그걸 기어이 끄집어 올린다. 우리 삶의 형질이 여기 남아 있노라면서. 온전히 새로 만들어지는 창조란 애초에 없다. 건축도 다르지 않다. 그는 이 땅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이번엔 근거 찾기가 지방으로 확장되었다. 하동 마을의 구성 질서를 하동 한옥문화관에, 외부 마당을 펼쳐 쓰는 전주집을 따라 전주주택을 만들었고, 제주 신촌리의 큰물을 찾아 제주문학관에 대입했다. 여러 사람의 힘으로 쌓던 구축의 프로세스는 사라졌지만 그곳에 남은 ‘공동의 기억’이 소환되었다. 기억은 불러오는 순간 현재가 된다. 풍토를 익히고 마을의 건축에 대한 언어, 재료, 구성을 보며 창의적으로 변형해도 되겠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그에게 건축은 학습을 현장에 옮기는 작업이다. 그것이 조정구의 진화다.
보편을 향한 발자국
평사리 산자락에서 비용 한계를 해결해야 하는 숙소들, 미국식 주거에 익숙한 사용자의 필요가 강한 전주주택, 간선도로 아래 자리 잡은 문학관이 드러내야 하는 제주성(性), 주차장 가운데 땅에서 건폐율과 용적률을 채워야 하는 체험관. 한옥만으론 해결이 어렵다. 이 땅의 건축 적장자였던 한옥은 근대 이후 콘크리트 더미 속에 서자가 되더니 이젠 고아처럼 내팽개쳐졌다. 한옥도 지금의 필요에 융합해야 동시대 건축이 된다. 도시화, 자동차, 기술, 재료, 인력, 구축 시스템, 법과 제도, 땅의 제한, 비용, 쓰임과 큰 규모…. 필요는 제각각이며 빠르게 변하고 유동적이다. 문화재라는 특별 수요와 보호구역에 갇혀서는 지속도 확장도 자생도 어렵다. 살아남으려면 대응해서 변주해야 한다. 이번에 살펴본 그의 프로젝트들은 도심지 현대한옥과 누정(樓亭) 건축의 유전자를 결합해서 진화했다. 진관사 한문화체험관은 경회루를 닮은 기단 역할의 저층에 도시한옥을 수직으로 결합했다. 중간층에 적용한 이중외피의 해법이 묘수다. 투명한 유리 안에 한옥이 온전히 들어 있다. 건축 유형의 충돌을 그렇게 풀었다. 병치를 넘어선 결합이다. 현대건축과 목구조 한옥을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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